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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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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6.8 세기의 미남, 조금은 비겁했던 사나이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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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9년 6월 8일 세기의 미남, 그러나 비겁했던 남자 영면

헐리웃의 역사에서 미남 미녀를 들자면 날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한 미남을 꼽아 보라면 이 사람이 다섯 손가락에서 빠지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로버트 테일러다. 영화 <애수>에서 영국군 장교 로이 크로닌으로 나와 올드랭사인의 선율 속에 그 반듯한 트렌치 코트 속의 태양 같은 미소로 세상의 여자들을 쓰러뜨렸던 사람이며, <쿠...오바디스>의 늠름한 로마 호민관으로 데보라 카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바로 그 배우. 로버트 테일러다.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MGM사 스카우트 눈에 들어 전속 배우로 캐스팅된 그의 배우 생활 초기의 문제는 너무나 잘생긴 외모였다. “외모에 비해 연기가 형편없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은 것이다. 우리로 비춰 보면 배우 장동건을 생각하면 되겠다. 연기의 깊이를 더하겠다는 일념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단역에 가까운 조역을 불사했던 그의 고민은 바로 로버트 테일러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나도 미남의 본질이란 어떻게 하든 머리카락 안보이도록 꼭꼭 숨기지 못하는 법이다. 구두닦이를 시키건 험악한 강력계 형사를 시키건 그 외모에서는 목동 야구장 조명같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로버트 테일러가 그랬고 장동건이 그렇고 산하가 그런 거처럼.

1936년 당대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춘희>를 찍으면서 로버트 테일러는 “미남 배우 로버트 테일러, 이제 좀 연기가 되는데?” 하는 평을 얻으면서 외모와 연기를 겸비한 슈퍼 스타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신인 티를 벗지 못했던 로버트 테일러는 그레타 가르보를 안아들고 걷는 연기에서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 비싼 여배우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애수>의 상대역이 된 비비안 리도 이 잘생겼지만 연기는 미지수인 남자 배우가 영 마땅찮았던 모양이다. “로버트 테일러가 그림같이 생기긴 했지만 이 영화에는 맞지 않는다고!”라고 불평을 했으니까. 비비안 리는 애인 로렌스 올리비에를 강력히 추천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트렌치 코트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 황홀한 미소도 보유하지 못했을 테니까. . <애수> 원제 <Waterloo Bridge>는 세계적 히트를 쳤고, 로버트 테일러는 만인의 연인으로 발돋움한다.

미남도 남자였다. 한창 피어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아이반호>에서 만났을 때 그 폭발적인 매력 때문에 로버트 테일러는 어쩔 수 없는 난처함에 빠진다. 의상이 문제였다. 중세 시대 의상인 그 착 달라붙는 타이즈같은 바지를 입는데 엘리자베스와 연기를 할 때 하반신의 변화가 두드러진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 감독한테 “가급적 상반신만 찍어 주세요.ㅠㅠ”라고 호소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아이반호, <흑기사>로 번역되기도 한 영화는 두 명의 테일러가 절정의 매력을 과시한 영화였다.

그런데 로버트 테일러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호민관 마커스, 기사도의 화신 아이반호처럼 용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 선풍 속에서 그는 로널드 레이건, 게리 쿠퍼, 존 웨인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를 고발하고 색출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로널드 레이건만큼 열정적인 빨갱이 사냥에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동료들의 이름을 그 입에 올렸다. 그것도 상당히 비겁한 방식으로. “나는 <러시아의 노래>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리처드 콜린스, 폴 재리코가 쓴 대본과 이프 하버그가 만든 한 노래는 친공적(pro- Communist)이었어요.” 라고 세 사람에게 황당한 올가미를 들이댔는가 하면 가히 21세기 대한민국의 누군가를 연상케하는 증언을 계속한다. “나는 한때 사회 위협 세력처럼 보였던 이들을 알아요. 그 중의 하나는 하워드 다 실바입니다. 그는 모든 걸 삐딱하게만 말했어요. 뭐 그들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이 증언을 하면서 딱딱하게 굳어졌을 뿐 아니라 뭐라 말하기 어려운 당혹감 서렸던 로버트 테일러의 얼굴은 전 세계 여성을 사로잡은 미남의 얼굴이 아니었다.

매카시즘의 상흔은 반세기를 거쳐도 아물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내 일을 팽개칠 수는 없지 않으냐”면서 공산주의자(?) 동료 이름을 댔던 엘리어 카잔 감독에게1999년 아카데미 특별상이 주어졌을 때 청중의 반은 전설적인 노감독의 영광의 순간을 침묵으로 보이코트했을 뿐만 아니라 워렌 비티 같은 경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불만의 소리를 내뱉으며 퇴장해 버리기도 했고 닉 놀테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그 어떤 위대한 예술적 공로도 비신사적인 행위를 덮을 수는 없다.” 양심의 자유와 예술혼을 정치적 외압에 팔아버린 이에 대한 단죄였고 일갈이었다. 로버트 테일러도 그때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욕을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로부터 30년 전인 1969년 6월 8일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가 죽은지 43년이 지난 2012년 6월 8일 대한민국의 한 전직 의원이 느닷없이 로버트 테일러를 찬양하고 나섰다. 그가 청문회에서 “이 나라에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소련이나 또는 소련의 동조국으로 이민(移民)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시원스럽게 답변하여 의원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 스스로 반성했고, 일종의 치욕으로 기록되고 있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곤혹스럽게 친구의 이름을 대던 한 배우의 한 마디가 왜 그렇게 본받고 싶은 말이고, 따르고 싶은 소리가 되는지는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작 미국이 지켜야 했던 가치는 로버트 테일러가 아니라 “수정헌법 1조”를 되뇌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서 살아 있음을 오늘날의 미국인들도 인정하고 있는데 말이다


1942.6.9 리디체의 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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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2년 6월 9일 리디체의 에바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 토요명화가 주말 밤 시간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시절, 가끔 ‘시청자 선정 추억의 명화’ 같은 기획이 내 또래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곤 했다. 비디오도 귀하고 동영상을 다운받을 인터넷선은 상상 속에서도 없었던 시절, 스크린 잡지 또는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에서나 그 내용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영화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 기라성같은 영화 제목들 가운데 빠지지 않는 영화가 <새벽의 7인>이었다.

이 영화는 1942년 5월 일어났던 ‘프라하의 도살자’이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독일제국 보호관 (거의 총독)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인 특공대가 잠입하여 내부의 빨치산들과 협조하여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것이다. 집무실의 시계를 고치러 들어간 시계공이 하이드리히의 스케줄을 훔쳤고, 하녀가 그를 특공대에게 전달했고 특공대는 커브길에 스피드를 줄이는 것까지 계산한 잠복 끝에 하이드리히를 공격했고 그는 1주일 뒤 죽었다. 나찌 수뇌부들은 경악했다. 히믈러는 자식을 잃은 듯이 오열했고 괴벨스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히틀러 역시 ‘강철의 심장’을 가졌던 하이드리히를 애도했다. 그리고 시작된 것은 체코인 대학살이었다.

그 와중에 빨치산 멤버가 리디체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리디체에 빨치산 멤버가 은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별 관계없었다. 이미 히틀러 총통은 하이드리히 1명의 목숨과 체코인 1만명의 목숨을 바꿀 것을 공언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42년 6월 9일 베를린에서 하이드리히의 장례식이 끝난 몇 시간 뒤 리디체 마을에는 완전무장한 독일군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끌어내어 수용한 뒤 이튼날부터 대학살을 시작했다. 173명의 남자와 10대 소년들을 사살하여 구덩이에 묻어 버리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끌고 갔다. 마을은 불태워졌고 불도저로 땅을 고른 다음 나무와 농작물을 심었다.

학살을 면한 어린아이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해야 했다. 나찌의 의사들이 몰려들어 얼굴과 코의 길이를 재고 신체적 특징을 적었다. 그런 일을 당한 아이들의 공통점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 즉 ‘아리안 족’의 특성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아이들이었다. 나찌들은 이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우수한 아리안 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들을 교육원에 강제 수용한다. 독일 이름이 주어지고 독일어를 가르치고 독일 제복을 입혔다. 세뇌 또한 철저하여 아이들은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부모를 잃은 것으로 주입받았고, 교육에서 탈락한 아이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 중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 <이름을 빼앗긴 소녀 에바>(푸른나무)다. 리디체의 아이 중 하나인 밀레나는 몇 년 동안 감금된 채 교육을 받고 에바라는 독일 이름도 얻는다. 기나긴 교육 끝에 외출을 허락받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동포들로부터 “독일 악마년”이라고 불리우는 데에 충격을 받는다. 더 큰 충격은 수용소의 체코인 죄수들을 만날 때 일어났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그를 묻고자 했지만 그의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독일어였지 체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에바는 수용소장의 양녀로 입양되었고 독일인으로 살아가지만 전쟁 후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에바가 아닌 밀레나임을 밝히고 자신의 본래 터전으로 돌아간다. 수용소에서 말못할 고초를 겪고 몰라보게 변해버린 엄마를 만나고 그 손길을 느끼고서야 에바는 밀레나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나왔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봤던 <이름을 빼앗긴 소녀 에바>가 준 기억은 꽤 선명하다. 악당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항상 비슷하여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 벌어질 당시 희생자들의 자녀를 불임인 군 장교 부부에게 불하하듯 입양시켜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무엇이 될까.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 부모와 형제의 원수에게 재롱을 떨면서 아양을 부리면서 동심을 형성해 갔던 그들에게 어린 시절이란 그 평생에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리디체의 에바, 아니 리디체의 밀레나에게 1942년 6월 9일은 어떤 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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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6.10 하와이 망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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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6월 10일 하와이 망언 사건

자유당 정권이 그 말로를 향해 열심히 치닫고 있던 1959년의 초여름, 온 장안을 달구는 뜨거운 화제 하나가 터져 나왔다. 이름하여 '하와이 필화 사건'. 제목부터 야리꾸리한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가 있었다. 1959년 초 이 잡지는 "서울 시내 처녀 60퍼센트도 안된다."는 뚱딴지같은 기사를 실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끝에 폐간 처리되는데 몇 달 뒤 '야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잡지를 내게 된다. 그런데 이 '야화'가 야심차게 기획한 것이 한국 사회의 10대 풍조의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이었는데 그 두 번째로 기획된 것이 얄궂고 저열하게도 전라도의 '하와이 근성'이라는 주제였다. 여기에 대한 '시'(是) 즉, 긍정의 편에서 쓰여진 글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글쓴이는 조영암이라는 강원도 출신의 시인(?)이었다. 뭐하던 작자이고 무슨 시를 끄적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글은 독랄했고 저열했다. "전라도 개땅쇠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며.... 전라도 출신들은 우선 인류권에서 제외해야겠고, 동료권에서 제외해야 겠고, 친구에서 제명해야겠기에..... 전라도놈은 송충이나 그 이하의 해충... 전라도 사람은 신용이 없고 의리가 없으며 잔꾀가 많아 깊이 사귈 수 없다. 사회 각층에서 말썽을 일으킨 부류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 대부분이며,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도 이곳 출신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독일인이 유태인을 비하하는 표현보다도, 일본인이 조센징을 멸시하는 것보다 더한 표현이버젓이 만인환시의 잡지에 실렸던 것이다. 이러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당장 전라도 출신의 서울 시민들 가운데 성미 급한 이는 잡지사를 찾아 멱살을 쥐었다. 전북일보는 사설을 통해 조영암의 악질적인 호남 비하를 규탄했고 전북 도지사는 6백만 전라도민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개탄했고 전남과 전북 도의회 역시 물 끓듯 들고 일어났다. 호남 출신 민의원들은 여야 구분 없이 일치 단결하여 공보실장을 출석시켜놓고 “야화”가 지방파당과 민족분열을 조장하여 이적행위를 하는 악덕배라고 지적하고 “하와이 근성 시비”에 대한 공보부의 책임소홀을 지적하며 엄중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보부는 1959년 6월 10일 월간잡지 “야화”에 대한 판매금지를 즉시 내리고, 판매 금지가 내리게 된 이유는 이 잡지 7월호에 기재된 소위 “하와이 근성 시비”라는 제목하에 전라도민을 가리켜 “개땅쇠” 또는 “간휼과 배신의 표상”이라는 글이 지나치게 저속한 것으로서 사회 도의를 추락시키고 미풍양속을 저해하고 사회의 평온을 문란케 하였다고 지적 판매 금지를 내렸다. 이름하여 '하와이 필화' 사건이다. 필화라는 표현도 무색하고 과분한 '망언' 내지는 '망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이 사건이 말해 주는 사실은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이후 이른바 영남 정권이 판을 치기 이전에도 심각할이만큼의 호남 차별 정서, 즉 '정서적 호남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와 이후 정권들이 호남에 대한 차별 기제를 가동했고 그 정서를 조직적으로 이용하고 확산시키고 자신들의 야욕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호남 사람들에 대한 정신병적인 편견은 존재했던 것이다.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저 편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와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왜 하와이인가. 일설에 따르면 미군정이 편의상 조선의 행정구역에 미국의 지명을 붙였고 평안도는 텍사스, 함경도는 알래스카, 전라도는 하와이 등으로 불렀던 바 그 잔재라고도 하고, 악의적인 얘기에 따르면 2차대전 중 미국의 하와이 병정들이 "머리는 좋지만 탈영을 잘했던" 바, 그 기질을 그대로 빼닮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6.25 때 사단 편제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단이라 할 한국군 1사단의 주력이 호남 출신들이었다는 것은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 외에도 조영암이라는 자칭 시인이 들먹인 모든 내용들은 그 근거가 없는 카더라 방송 내지는 내맘대로 보도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그 태반은 바로 일본인들이 조센징에게 퍼붓던 욕설이기도 했다. 조센징들은 믿을 수 없고, 뒤통수를 잘 치며, 범죄의 온상이며, 앞에서는 설설 기어도 뒤에서는 돌을 들고 있는, 지진 나면 우물에 독이나 푸는 군상들이었던 것이다.

조센징 전체가 감당해야 했던 편견이 해방 후 그 겨레 가운데에는 유독 호남에만 집중되었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갑오농민전쟁과 일제의 남한대토벌 (황현에 따르면 호남평야에서부터 땅끝마을 해남까지 쓸어내리고 쓸어올리며 의병을 토벌했던), 그리고 일제와 조선인 지주들의 탐학에 내몰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인구가 가장 많은 도였으며, 전통적 유대가 강했던 각 지역 사람들에게 일종의 '이방인'으로 그 편견을 굳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그 편견의 정신병적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고 완고하다.

6월 10일은 대개 벅찬 가슴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입증한 6월 평화 혁명의 시작일이고, 민주주의 앞에서 광주 시민과 부산 시민과 서울 시민이 하나가 되어 군부독재자에게 저항했던 날이다. 그렇게 자부심으로 빛나야 할 날에, 그리고 87년 6월로부터 25년이 지난 요즘에도, 나는 조영암 따위의 시러베아들이 지녔던 정서와 망상이 그 자랑찬 공화국의 시민들 사이에 온존하고 있음에 소스라칠 때가 있다. 1959년 조영암보다 더한 억지로, 그 표현보다 더 지독한 비하가 이뤄지고 있고 우리의 아이들까지도 그 말을 어디선가 들어올 때 나는 문득 암담해진다. 아직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려면 멀었다. 참고로 조영암과 잡지 책임자는 처음에는 2년, 대법원에서는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때는 그런 말에 대해서 단죄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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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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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년치가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저 좋아서 끄적이기 시작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쁘기도 뿌듯하기도 하고, 하여간 제가 했던 뻘짓 가운데에서는 개중에 꽤 괜찮은 뻘짓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했는데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  그 서문입니다. 

 

 서문 수정

 

한 1년 8개월 쯤 전이었을까요. 트위터를 뒤적이다가 이왕 끄적일 바에는 신변잡기 외에도 의미도 있고 제 스스로에게 남는 것도 있는 포스팅을 해 보자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마음보다는 저 혼자 재미로 140자 트위터를 채운 일은 과거의 ‘오늘’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습관이 됐습니다.

 

 우선 쉬웠습니다. 탁월하고도 성능 좋은 검색 엔진들은 정말 없는 게 없는 정보력을 가졌더군요. 과거 같으면 몇날 며칠 도서관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수고가 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대체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자애로운 문명의 혜택인지요. 그에 더하여 매해 돌아오는 하루 하루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으며 이미 세월과 문자의 틀에 갇혀 버린 그날 하루 하루에 사람들의 피와 땀이, 눈물과 환호가 알알이 맺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꼭 공부 못하는 놈들이 쉬는 시간에 공부한다고, 대학 때에는 제대로 전공 (사학) 공부하지도 않은 녀석이 느지막히 역사의 잔재미를 즐기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페이스북에서는 트위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요약, 생략해야 했던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올리게 됐고, 어영부영 그것이 1년을 채웠습니다. 글을 올리면서 나름 글들을 묶을 제목을 고민했었습니다. 그게 ‘산하의 오역’이었습니다. 그 동안 “산하는 네 닉넴이라고 치고, 오역은 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답변하자면 ‘오늘의 역사’의 준말입니다. 그렇게 별 뜻 없는 말줄임이었지만 시간을 쌓아 나가다보니 부수적인 뜻이 첨가됐던 것 같습니다.우선 오늘의 역사이기도 하며 둘째로는 나만의 역사를 뜻하는 ‘오역’(吾歷)이고 그러하다하보니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고 경계해야 하는 오역(誤歷)일 수도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이야기하는 사람의 시각과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 객관’은 없을 테고, 그 와중에 당연히 발생할 것이니까요.

 

 

그 다음으로 받은 질문은 “왜 조선 시대나 그 이전의 얘기는 거의 없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설명드리자면 제가 정했던 몇 가지 기준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양력 날짜 우선입니다. 트위터에서 짤막하게 올릴 때 충무공 이순신을 두 번 죽인 (그분의 전사 날짜를 양력, 음력 모두 기록한 통에) 이후 양력을 고수하기로 했고, 그래서 간혹 서양 얘기는 과거로 거슬러 오르지만 우리를 비롯한 동양쪽 역사는 근현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 겁니다.

 

둘째 아이들 위인전들에 등장하는 큰 위인들이나 역사를 직접적으로 바꾼 대사건보다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쉽게 잊혀지고 있는 듯한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자 했습니다. 역사란 “특별하게 빛나는” 사람들의 기록이면서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이들의 삶의 총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옛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되새길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는체 하실만한 은사님도 하나 없이 전공과 담을 쌓았던 처지에 감히 ‘역사’를 들먹이는 것은 솔직히 면구스러운 일이었지만, 하나 또렷이 기억하는 경구가 있다면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크로체의 말을 들겠습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은 어제 일어났던 일이고, 결국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역사, 그리고 나만의 역사, 그래서 틀릴 수도 있는 사연들을 ‘과거의 오늘’에 빗대어 얘기하면서 저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 역시 땀 냄새와 발고린내와 거친 숨결이 생생하게 배어 있는 ‘오늘’임을 깨달았습니다. 제 눈길에 채였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역시 결국 ‘역사’가 아니라 ‘오늘’이기도 했던 겁니다. 역사라는 것이 교과서속의 글줄만도 아니고 무덤 속의 먼지만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작년 12월 31·일,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장탄식을 하며 신문을 뒤적이던 저는 한 기사에 눈이 못박혀야 했습니다. 어느 대학의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송년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였습니다.

 

 차비가 없어서, 정말로 차비가 아까와서 먼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형편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그 처지에 누구를 돕는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겁니다. ‘제 코가 석 자’인 처지에 누가 누굴 돕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역시 신문에 나올만 했습니다. 자신의 학교 청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3년간이나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을 도와 학교 당국과 싸움도 하고 협상도 도왔던 그는 마침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길어질 대로 길어진 자신의 코 앞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도무지 등록금을 내지 못할 처지임을 깨달은 겁니다.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돈 나올 구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나섰습니다. 그 박봉을 쪼개고 파지 팔아 모은 돈을 보태어 1백만원을 마련했고, 아주머니들이 막간을 이용해 차린 송년회 자리에 문제의 학생을 초대하여 전달했다고 합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학생은 제가 이 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고, 박수를 치는 노동자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학생에게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 고맙다.”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자신의 어려움만큼이나 남의 어려움을 살필 줄 알았던 한 아름다운 청년을 통해서, 자신들을 도왔던 이의 어려움을 저버릴 수 없었던 아주머니들을 통해서, 저는 이런 식으로 역사의 퍼즐들이 맞춰져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맥이 끊기지 않고 흘러온 역사의 물줄기의 물방울들이란 바로 이런 모습들이겠거니 하는 상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청년은 평생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그와 함께 했던 3년을 망각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 작은 개인의 기억들은 사회적 기억으로 승화될 것이고, 때로는 좌절하고 더러는 기념되면서 역사라는 거대한 돌탑의 일부를 이루겠지요.

 

 21세기 한국 어느 대학교의 고학 청년과 같았던, 또 그와 함께 눈물 흘렸던 아주머니들과 비슷했던 수많은 이들, 평범하지만 위대하기도 했던 이들, 또 반대로 탁월하지만 사악했던 이들, 그들이 얼키고 설켜낸 역사 속 오늘, ‘그들이 살았던 오늘’들을 이렇게 모아 봅니다. 또한 우리의 오늘도 언젠가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로 남을 것임을 되새겨 봅니다.

 

그렇게 내세울 것도 없는 책으로 묶을 결심을 해 주신 도서출판 웅진지식하우스 보경님과 보잘것 없는 원고를 갈고 닦아 환골탈태하도록 도움 주신 편집자 공성아님, 그리고 멋진 디자인으로 책의 품위를 열 곱은 더해 주신 디자이너 000님, ‘내가 살았던 오늘’들을 함께 했던 직장의 선후배, 그리고 동료 여러분, 그리고 별 것 아닌 이야기에 웃어 주시고 맞장구쳐주셨던 트친과 페친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부모님들께도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사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특히 사춘기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아들 녀석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쁘기 한량이 없겠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뒤적이다 보니 1년 365일 의미 없는 날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365일도 그러하겠지요. 아무리 허투루 보낸 날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이겠지요. 그리고 그날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역사를 만들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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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11일 가스배달원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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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11일 가스배달원의 실종
 

대망의 아시안게임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1986년 6월 11일 인천 모처에서 부리부리한.눈매의 대공계 형사들이 누군가를 잡아챘다. 평범한 가스배달원 신호수는 도대체 대공계 형사들이 왜 나를 잡으러 왔는지 영문을 몰라했지만 서울 서부경찰서까지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그가 살던 이전 집의 장판 밑에서 불온삐라가 대다수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이 도배하다가 그것들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해서 113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호수는 불온분자나 이른바 의식화학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삼수갑산만큼 먼 평범하고 뭉툭한 가스배달원이었다. 그리고 그 삐라를 모으도록 장려한 것은 그가 방위병으로 복무했던 군부대였다. 부대에서는 불온삐라를 모아오면 특별휴가 제도를 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었던 것이다. 즉 그 삐라들은 휴가 타먹고 남은 잔여물들이었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뿐 대공혐의점은 없었다. 경찰도 그를 인정했다.


"세 시간만에 훈방했다니까요. 부대 동료가 와서 증언을 하는데 뭐 딱 아니더라고. 애가 길을 몰라서 헤매는 것 같아서 서울역까지 바래다 주기까지 했어요 인천 가라고."

그런데 이 말에는 많은 거짓말이 숨어 있었다. 일단 동료 경찰이 신호수가 세시간만에 훈방된 게 아니라 서부서에 3일 동안 머물러 있던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일대에 오래 살았던 신호수가 서울역을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경찰이 연행자 에스코트할만큼 친절한 시대도 아니었고 말이다. 6월 11일 연행된 뒤 당일 풀려났건 며칠 조사받았건 불온분자는 전혀 아니었던 노동자 신호수는 자신의 일터로 돌아오지 않았다. 천만뜻밖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서울에서 천리 밖 그의 고향인.여수 돌산의 대미산의 한 동굴에서 목을 맨 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렸지만 그것이 자살이라면 풀어야 할 미스테리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 경찰은 "신호수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 끝을 묶은 후 동굴 천장 부근의 바위틈에 끼워 빠지지 않게 하고 목을 매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최초 목격자였던 당시 방위병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사건 직후) 현장 검증에 참석하라고 하여 경찰들과 함께 동굴에 갔다. 그러면서 경찰이 나에게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라고 했다. 이후 경찰들은 내가 목격한 것처럼 신호수의 자살 자세를 재현하고자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동굴 천정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다리를 대거나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근접할 수 없는 곳에 신호수는 하늘로 날아오른 듯 접근을 했고 자신의 옷을 벗어서 바위틈에 묶는 수고까지 한 후 목을 맨 것이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그 천리길에 목을 맬 나무 하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구태여 고향의 산자락에 와서 서커스하듯이 동굴로 기어올라가서 목을 매야 했을까.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의 허리띠였다. 그 허리띠는 신호수의 몸과 팔을 묶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이 목을 매단 뒤에도 두 손이 자유로와서 목 아래 손가락을 넣고 숨을 연장할까 두려웠던 것일까, 인류가 목매달아 자살하는 방법을 깨달은 이후 스스로 결박을 하고서 목숨을 끊는 예는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그 좁은 동굴 안에서 허리띠 풀어 자신의 몸과 팔을 결박한 남자가 어떻게 목을 매어 죽는 아크로바틱한 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하지만 자살이었다. 방위 마치고 평범한 가스배달원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던 한 젊은이는 급작스런 연행 뒤 행방을 감추었다가 마치 귀신처럼 사람들 앞에 발가벗은 시체로 돌아왔다. 자살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군대에서 시체로 돌아오고, 엄마하고 농담하며 웃던 청년이 다음날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쌕쌕거리던 날이 일상이던 시절이다. 그 시대에 신호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끌려갔고 짓밟히고 얼러지는 가운데 목숨을 잃거나 정신줄을 놓거나 안팎으로 곪아서 진물을 흘리면서 시들어 갔다. 지금도 전 재산 29만원인 그 시대의 최고 책임자가 거액의 육사 발전 기금을 내놓고 그 댓가(?)로 대한민국 육군 예비 장교들로부터 사열을 받는 세상을 신호수가 지켜본다면 그는 어떤 심경이 될까.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상을 밝혀 줄 것을 애끓게 호소하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어떻게 사람이 이 상태에서 목을 맬 수 있냐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서 이른바 열사도 하다못해 운동권 동지도 아니었던 평범한 노동자 신호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진은 아버지가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재연하며 그 '자살'의 불합리성을 호소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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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6.12 한국형(?) 축구 영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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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6월 12일 한국형(?) 축구 세계 4강에 들다

1983년 즈음에 한국 축구팀이 세계 수준의 대회에서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바라렴” 하는 악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54넌 스위스 월드컵에 나가 헝가리에게 9대0으로 짓밟히고 이후, 동경 올림픽에 출전했다가 이집트에게 10대 0으로 망신을 당한 이후, 한국 축구는 망신을 당할 본선 무대에 나설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나? 티브이 앞으로 집결했다가 역시나 하며 자리를 박차기를 반복하고 있던 세월이었다. 세계의 벽이 높은지 낮은지 댈 것도 없이 아시아의 벽조차 안나푸르나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국 청소년 축구팀이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하여 예선을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약간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 그 출전은 어부지리 출전이었다. 원래 한국팀은 아시아 예선에서 북한에 패했고, 북한이 아시아의 대표선수로 출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중동 오일 달러의 위력으로 의심되는 심판의 편파 판정을 참지 못한 북한 팀 선수들과 임원들이 심판에게 ‘혁명적 본때’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인해 북한을 대표하는 모든 축구팀이 2년간 국제 경기 출장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대타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오랜 숙적 호주와, 세상에나 개최국 멕시코 (이 경기 정말 명승부였다)를 메다꽂고 당당 8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1983년 6월 12일 벌어진 8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 우루과이가 어디라고 우리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존재였던가, 7년 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 드높을 루벤 소사도 바로 그 팀에서 뛰고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뛰었다. 전반전이 얼마간 흘러가면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고 한국 선수들의 몸에 넘치는 자신감이 화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우루과이 문전을 위협하던 김종부가 통렬한 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렵다는 무릎 아래 골문 모서리로 빨려 들어가던 공을 우루과이 골키퍼가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발휘하여 펀칭해 냈을 때는 온 동네에 아이고 소리가 드높았지만 잠시 뒤 천둥 같은 함성이 작년의 촛불처럼 일렁였다. 멋진 다이빙 펀칭의 주인공이 우루과이 골키퍼가 아니라 수비수였던 것이다. 페널티킥이었다. 하지만 주장 노인우는 이 천금의 기회를 실축하고 만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은 “미친 듯이” 뛰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83년의 노인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페널티킥을 못 넣은 그는 짖궂은 카메라에 계속 잡혔고 그때마다 푸르륵거리는 황소처럼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빚을 갚을 때가 왔다. 후반전이 시작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적으로 나오던 우루과이 선수들 사이로 노인우가 우루과이 선수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깊숙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그것이 신연호 선수에게 노마크 찬스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신연호가 마침내 골을 넣었다. 요즘은 멋있게 “골!!!!~”을 외치지만 그때는 아나운서도 즐겨 “꼬링”이라고 발음했었다. 꼬링의 절규가 태평양을 건너올 듯 아나운서는 꼬링을 외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한 골을 먹은 후 우루과이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고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남미 특유의 개인기는 눈에 띄게 둔해진 한국의 스피드를 눌렀고 결국 한 골을 먹고 말았다.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실로 투명한 경기였다.


투명함의 의미는 이렇다. 구만 팔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경기이며, 위성을 통해 14인치 티브이로 전달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뼈와 뼈 부딪는 소리, 이따금 내지르는 독려의 고함까지도 유채화처럼 진하고 두텁게 펼쳐졌다.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구석도 볼 수 있었던 경기였다. 우루과이가 개인돌파를 시도하면 한국은 패스웍으로 우루과이 수비를 위협했다. 연장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한국 축구사 사상 최대의 비운의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골 라인을 치고 들어가다가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이 문전을 쇄도하던 신연호의 발에 맞고 우루과이 골키퍼가 처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데굴데굴 우루과이 골 네트의 품에 안겼다. 이날의 결승골이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는 그 역사를 새로 썼다. 30년 동안 월드컵 본선도 밟지 못한 나라가 세계 4강을 ‘쟁취’한 것이다.

이때 박종환 감독과 18인의 청소년 축구팀에는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갱이가 됩시다’ (Be the Reds)의 붉은 악마의 유래가 된다. 이들이 보여준 빠르게 돌아가는 숏패스와 강인한 정신력은 ‘한국형 축구’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선전분투와는 별도로 ‘한국형 축구’는 그 이후 그리 큰 빛을 발하지 못한다.


‘독사’라는 별명에서 보듯 무시무시한 스파르타 훈련을 시켰고 주먹질 (당시 훈련 과정을 촬영하던 카메라 앞에서도 박종환 감독은 선수에게 강력한 군밤을 매겼다)도 마다하지 않았던 박종환 감독의 카리스마는 때로 유효했지만 그가 대표팀 감독이 됐을 때, 최순호, 이태호, 변병주 등 정예 선수들이 “이럴려면 안한다.”고 반발하며 팀을 이탈케 하는 주요 원인이 됐던 것이다. 또 숏패스 위주의 ‘한국형’ 축구는 “길목만 지키면 자멸한다.”는 외국 감독의 비아냥 아래 ‘로봇 축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강력한 지도력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훈련을 통해 단기적 성과를 이뤄 내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성과를 계승하고 진보시키고 체화하는 데에는 다른 패러다임의 리더쉽 또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한때의 성과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것을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의 붉은 악마들은 생생하게 보여 주게 된다. 차범근의 대를 이을 것이라는 대형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자신의 의사와 학교측의 의사, 그리고 재벌 축구팀간의 각축 와중에 선수 자격마저 일정 기간 박탈당한 채 죽을 쑤고 지내다가 허망하게 은퇴해야 했던 것은 그 단면일 뿐이다. 결국 ‘한국형 축구’란 ‘한국형 민주주의’처럼 실체는 없으되 위세는 요란한 허명의 하나였다.

그래도 1983년 6월 12일 한국 청소년 축구팀이 보여 준 투혼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생이었던 골키퍼 이문영은 공중볼을 잡다가 충돌하여 공을 안은 채 골라인 안쪽으로 넘어졌는데 벌떡 일어나 공을 골 에리어에 갖다 놓은 뒤에야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스스로 골라인 안쪽에 넘어졌다는 사실을 안 순간 그는 모든 고통을 잊고 발딱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역전골을 넣었을 때 골을 넣은 신연호에게 달려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골 세레모니조차 어렵도록 지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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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6.13 여기는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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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0년 6월 13일 여기는 평양입니다.

그 날 아침 꼭두새벽부터 나는 분주했다. 한 순대집 촬영을 하는데 순대 속 만드는 걸 찍으려면 일찌감치 설쳐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대집 이름은 ‘알래스카 순대’였다. 아마 지금 을지로 4가쯤에 남아 있을 것이다. 순대집에 웬 알래스카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무엇이 유래였는지는 몰라도 각 도에 미국의 지명을 붙여 별칭으로 부르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 함경도가 알래스카로 불리웠다. 평안도는 텍사스였다. 그래서 5.16 후 경상도 군 인맥들이 이북 출신의 군 인맥들을 제거할 때 ‘알래스카 토벌’이니 ‘텍사스 토벌’이니 부르곤 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경상도는 과연 뭐라고 불리웠을까? 요즘 경상도 사람들 하는 거 보면 60년대 앨라배마나 미시시피 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각설하고, 그렇게 일찍 서둘러 도착한 순대집에서는 게으른 PD 기다려주지 않은 채 속만들기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정작 알래스카 순대, 즉 함경도 순대를 만드는 건 꽤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쓰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조금 의아해서 물으니 “여기서 일한 게 30년인데 전라도 사람이라고 함경도 순대 못만드나?” 라는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허기사 종종 이런 일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 을밀대의 주인장은 우렁우렁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를 당혹케 하셨었다. “피난 나와서 대구서 컸는데 우얍니까. 고향은 평양이지만도.”


하지만 알래스카 순대에서 음식 만드는 분들은 주인이 아니었다. 음식은 손 놓고 물러났지만 그 집의 주인은 좀 이따 점잖게 등장하셨다. 혼자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는 화사한 꽃단장을 하고 화장까지 흐드러지게 하셨다. 말투를 보아하니 이북 분들이었다.


왜들 이렇게 가꾸고들 오셨냐고 호들갑을 떨며 물으니 주인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꽃단장하고 왔지.”“에고 뭐 방송 출연한다고 꽃단장까지......하하”“예끼 여보쇼. 방송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오늘 대통령 평양 가는 날이잖아. 간만에 이북 친구들 보기로 했다구.”


그날은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역사적인 평양 방문길에 나선 날이었다. 아차 그렇구나. 아침에 뉴스를 질리도록 보고 나왔지만 일하는 가운데 나는 정말로 깜박 그 날을 잊고 있었다. 무슨 빅스타 여배우가 포토라인에 서듯, 아주 잠깐 촬영에 응해 준 뒤 주인 할머니와 그 친구들은 TV삼매경에 빠져 버렸다. 나도
하릴없이 TV를 지켜볼 밖에 없었다.


TV 화면에는 이미 평양 순안공항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탄 특별기의 기체도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뭐라뭐라 계속 말했지만 식당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귓전에는 그저 흘러내릴 뿐 모든 관심은 비행기 문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작은 탄성이 이는 가운데 대통령은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감회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면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트랩 아래 북녘 땅을 돌아봤다.


여기는 북한이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에 도착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침묵의 감회는 ‘오욕의 세월’을 그 어떤 웅변보다도 뜨겁게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이 트랩 아래에 나타났다. 김정일이다! 그는 이런 직설적인 환영사를 하게 된다. “대통령께서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평양에 오셨습니다. 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총부리를 맞대고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나갈 판인데, 대통령께서는 인민군 명예의장대 사열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건 보통 모순이 아닙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께서 왜 방북했는지, 김 위원장이 왜 승낙했는지 의문들이 대단합니다. 2박 3일 동안 우리가 대답해줘야 합니다."


마침내 트랩을 내려온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을 때 식당에선 작은 박수 소리와 순간적인 흐느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았던 롯데 호텔에 설치된 프레스 센터에서는 천 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근처 인쇄 골목에서도 환호까지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벅찬 가슴이 전해지는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식당 안 할머니들은 그제야 TV삼매경에서 벗어나서 대화를 시작했다. “저기 순안이 내 고향이야,”라고 말문을 연 할머니 한 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중매선 사람이 김일성 아버지야”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는 1894년생. 그가 내 앞에 앉은 할머니의 부모를 맺어 줄 때 그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아마 그 중신 선 다음 술 받아먹을 때 김일성 주석도 옷자락 잡고 칭얼대고 있진 않았을까. 혹시 김형직이 조직했다는 조선광복회 동료는 아니었을까. 어쨌건 신기했다. 김일성의 아버지와 그렇게 친숙한 관계였던 이가 내 앞에 있다니. 그런데 친구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야 그 얘기 나 오늘 처음 듣는데? 너 이때껀 그런 얘기 일절 없었지 않아?”“뭔 자랑이라고 그 얘기 하간. 오늘 같은 날이니까 하는 거지.”그렇게 별 것도 아닌 이야기도 또 어떻게 엮일지 몰랐던 세월, 가슴 속 깊이 숨겨두어야 했던 시절이 그날로 끝났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이 들었던 김형직의 이야기, 강반석(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의 기억까지도 신나게 허물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오후 나절이 됐을 때 주인 할머니가 주방에 들었다. 할머니는 벽에 걸린 대꼬챙이로 순대를 푹푹 찌르고 있었다. “이렇게 숨구멍을 내야 순대가 잘 삶겨요. 순대도 답답하면 복장이 터져서 풀어진다고.” 수십 년간 그런 숨구멍도 없이, 부모 형제 피붙이들과 완벽히 차단된 가마솥 안에서 터져나는 속을 다스려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맘 편히 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보다 하고 가슴 벅찬 날이 2000년 6월 13일이었지만, 그 숨구멍은 잔인하게 틀어막혔다. 그로부터 12년. 아마도 그날 알래스카 순대집을 메웠던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의 백발 노인들은 그 절반 이상이 터져나는 복장을 안으로 삭이며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왜 우리는 순대를 삶는 재주조차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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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6.14 여성참정권의 불꽃 사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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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6월 14일 여성 참정권의 불꽃 사위다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에게 주어지는 선거권이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권리다. 선거의 의미와 가치를 떠나서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시민은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이며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또 그 권리는 성별과 재산의 유무와 종교와 피부색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접적으로 행사되고, 그 투표의 내용...은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권리는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손오공처럼 바위산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니다. “투표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다. 투표하러 가는 자체가 죽을 죄일 수 있었던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 투표라는 것을 구경조차 못해 봤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그리고 정작 세계를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에서. 한창 대영제국의 끗발을 날리던 1884년 투표권을 보유한 이는 전체 성인의 28.5 퍼센트에 불과했다. 183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이나 기타 피맺힌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이어졌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그 28.5퍼센트의 ‘성인’은 죄다 남자였다. 여자에게는 아예 투표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한 인물이 우뚝 솟아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라는 여인이다. 미국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는(또는 그렇게 비쳐졌던)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그를 위해 모금운동까지 벌인 행동파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파리의 기숙학교에서 파리 꼬뮨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평생 독일과 관계된 것을 미워했던 이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에멀린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여성의 종속’ 등 저서를 통해 여성의 예속을 비판했던 J.S 밀의 친구였던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면서 팽크허스트라는 성을 얻는다.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녀는 남편의 정치 활동을 외조하면서 현실에 눈을 떴는데 남편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잠자고 있던 저항의 영혼을 일깨웠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참고 있는 거요? 왜 남자의 눈을 손으로 할퀴면서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거요?” 이런 말들은 잠자고 있던 암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행위와 같았다. 에멀린은 점차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세력의 지도자로 성장해 간다. 남편이 죽은 뒤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랑하던 맏딸 크리스터벨과 함께 여성 참정권 쟁취 대오에 뛰어든다.

1903년 에멀린은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창설한다. WSPU. 이 이름은 기억해 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그 패러다임부터 조금 달랐다. 이전의 운동단체가 이미 선거권을 가진 남성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는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정도의 “우리도 이만큼은 주세요”가 아니라 모든 여성의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요즘 한국 말로 하면 “닥치고 투표권!”을 내세운데다가 이전의 서명운동이나 청원같은 방식에서 벗어나 ‘전투적인’ 방식을 서슴없이 사용한 것이다.

1911년 정부가 “재산이 있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을 때 에멀린과 그 동지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1912년 3월 1일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여성들은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영국 피카딜리 광장 등 중심가의 모든 상점과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버킹검 궁전 난간에 몸을 묶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미친’ 여성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 개탄하는 이들에게 던진 에멀린의 한 마디. “.....정부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산권이다. 우리는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적을 분쇄하고자 한다.”

“폭력시위를 엄단하여 공공의 안정을 지키는” 것은 동서고금 정부의 공통된 수사, 정부는 당연히 수백 명의 여성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는 그 입을 벌리고 강제로 음식물을 흘려넣는 강제 급식을 실시했고,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지면 풀어줬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잡아넣는 법까지 만들었다. 옥스퍼드 출신의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한창 진행되던 경마장에 들어가 국왕 소유의 말을 막아서고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 부르짖다가 밟혀 죽은 것은 그 모든 부당한 억압과 질곡에 대한 저항의 절정이었다. 심지어 귀족 여성들이 노동자 복장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몸을 상하는 일도 있었다. 쉰을 훌쩍 넘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 투쟁의 중심에 있었고 열 두 번이나 되는 단식투쟁을 벌이며 ”Vote for Woman!"을 부르짖었다.

“우리들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 난리굿판을 치르고, 또 전쟁까지 겪은 후에야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 그리고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진다. 가만 이상하다. 왜 30세일까. 이유는 “전쟁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여성 유권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즉 멍청한 여자 유권자가 더 많아지면 곤란하다는 속셈이었다. 영국 남성들의 유전자는 한국 남성들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지. 하긴 어느 나라 남자는 그렇지 않았겠냐마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조건의 보통선거가 실시된 것은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였다. 그 지난한 세월의 결실이 맺어지기 직전, 1928년 6월 14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얻는 교훈은 한 가지다. 세상에서 거저 얻어지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공짜로 이뤄지는 진보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남편 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말대로 “눈이라도 할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질주하는 말의 말고삐를 잡아채고 외치려는 노력이 없고서는 주어질 수 없던 권리였다. 어디 여성참정권 뿐이랴. 우리들이 물처럼 마시고 공기처럼 들이키는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찾아야 할 오아시스였고 화생방 훈련 후에 들이마시는 바깥 공기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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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15 여간첩 김수임 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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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0년 6월 15일 김수임 사형선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간첩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판장 육군 대령 김백일이 차갑게 말했다. 피고석에 선 여자는 무려 열 아홉가지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미군 헌병 사령관 베어드의 동거녀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베어드의 차로 남로당의 거물이었던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기밀을 빼내고 북에서 남로당에 보내는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등 일대 스파이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었고, 김백일 대령은 사형을 선고한다.

1911년 개성에서 지지리도 못사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하시라도 빨리 입 하나 덜어야 했던 사연으로 11살에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신랑은 15살이었다. 하지만 시집살이는 혹독했고 남편은 철도 없고 경우도 없었다. 시집간지 4년만에 김수임은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독신녀의 수양딸이 되어 성장한다. 이화여전을 다니면서는 시인 모윤숙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는데 어느날 모윤숙은 그녀에게 한 남자를 소개한다. 경성제국대학 법대생 이강국이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함흥 감옥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이강국은 원산 총파업 지원 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다음날부터 김수임은 이강국의 겨울나기를 위한 옷을 뜨개질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강국은 유부남이었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기에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해방될 무렵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장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병원에 폐렴에 걸린 이강국이 입원하면서 둘은 광폭한 운명에 휘말리게 된다. 이강국의 본처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함흥에서 당신을 본 이후 한 번도 당신을 잊어 본 일이 없소.” 기차게 잘나고 인품도 훌륭해서 10년 뒤 대통령감이라는 극찬을 듣던 이강국의 사랑 고백에 김수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함몰되어 버렸다. 둘은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이강국이 북으로 간 후 종무소식이었던 것. 이후 그녀는 사교 클럽에서 만난 미군 24사단 헌병대장 베어드의 구애를 받고 동거하게 되고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어쨌건 이강국 뿐이었다.

이강국이 재차 남한에 내려와 활동하다가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미군 전용차에 숨겨 검문을 피한 후 월북시킨 것을 필두로, 이강국의 연락원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고, 사형수였던 남로당 빨치산책 이중업을 빼내 북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집에는 무기를 숨겨 두기도 했다(고 한다.)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이념도,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의 후배였던 수필가 전숙희의 말은 안타까움이 세월을 넘어 뚝뚝 떨어진다. “수임이 언니는 사랑밖에 몰랐어요 너무너무 순진했지요. 자기가 한 일이 뭔지도 몰랐어요. 사람 목숨 하나 구해 준 게 무슨 죽을 죄냐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순진무구하고 사랑밖에 몰랐던 맹꽁이’의 꼬리는 쉽사리 수사 당국에 밟혔다. 하지만 미군 헌병대장의 집이란 언감생심 남한의 수사 기관이 쉽사리 치고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역정을 낸 뒤에야 체포 작전이 실행되지만 그래도 미군 헌병대장 집에서 그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끌고 나올 배짱은 돋아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또 한 번 모윤숙이다.

3월 5일은 모윤숙의 생일이었다.  모윤숙은 “미역국이라도 혼자 먹으려니 네 생각이 나는구나. 와서 같이 미역국이라도 먹자.”고 김수임을 불렀고 그 집 앞에는 수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역국을 떠올리며 모윤숙의 집 앞에 이른 김수임은 삽시간에 눈이 가려지고 재갈 물려져 체포된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모윤숙은 “종달새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는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며,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변호했는데 그 뒤 그녀가 쓴 일기를 보면 그 우정(?)이 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수임은 사형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형이 그릇된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친구 수임은 죽었다 벌써 죽었다. 이 지상에는 없는 수임이다. 저것은 사형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1950년 6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은 (16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김수임은 전쟁이 터진 후 서울 함락 직전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된다. 김수임의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남북 교환 인사 명단에 김수임을 넣어 김수임을 구출해 보려고 애썼던 이강국 역시 5년 뒤 이번엔 “미제의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사형당한다. 똑똑하고 반듯했던, 그러나 이념의 구현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한 남자와 명랑하고 사랑에 약했던 여자는 그렇게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갔다.

그런데 지난 2001년 AP 통신은 비밀 해제된 문서 가운데 이강국이 CIA의 협조자로 기록된 문서를 세상에 공개한다. 실제로 이강국이 ‘미제의 간첩’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수임의 애인이었던 베어드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김수임을 통해 일종의 역공작을 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수임의 아들이 양로원에 있는 베어드를 찾아갔을 때 베어드는 “I'm your father"가 아니라 ”네 아버지는 미스터 스미스“라는 기이한 말을 남긴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모르는 뒤죽박죽이 된다.

종달새처럼 재잘대기 좋아했던, 사랑에 목숨을 걸었을 뿐 이념 따위는 몰랐던 것으로 그녀를 아는 모두가 증언하는 한 여자가 1950년 6월 15일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사진은 세브란스병원근무시절의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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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16일 한 역사가의 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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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6월 16일 늙은 사학자의 순직

순직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직을 위해 , 그 자리의 가치를 지키려다가 죽어간 이들을 두고 우리는 순직자라 부른다. 1944년 6월 16일 프랑스 리용의 어느 황량한 벌판에 게슈타포의 총을 맞고 죽어간 한 역사학자는 자신이 평생을 걸고 연구한 역사의 부름에 응하여 치열하게 싸우다 최후를 맞이한 역사의 순직자였다.

... 그는 유태인이었다. 따라서 드레퓌스 사건에서 볼 수 있었듯 유태인들에 대한 반감과 편견이 공공연했던 프랑스 사회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각국의 국민 노릇을 하던 유태인들 거개가 그랬듯 자신의 조국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증조부가 대혁명 후 프랑스 공화국의 군인이었음과 자신의 아버지가 불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에 맞선 병사였음 그리고 그 자신 졸병에서 장교까지 진급하는 공훈을 세웠던 참전군인임을 긍지로 삼았다.

" 당장도 나를 추방하고 싶어하는 (그러는데 성공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프랑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내 마음이 가장 깊이 연결되어있는 단 하나의 나라라는 사실로 대답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그 문화의 물을 마시며 자랐다. 난 프랑스의 과거를 내 과거로 삼았다. 난 프랑스의 땅에서 자유로이 숨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그 국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역사학적으로 그는 역사학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실증사학, 즉 "과거에 그것이 어떠했는가"의 질문에 충실했던 랑케의 감화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 도구 혹은 기계의 배후에 또는 겉으로는 차갑기 그지없는 문서나 그것을 제정했던 사람과는 얼핏 보면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제도의 배후에, 역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중

그에게 사료란 "인간이 말하고 쓴 모든 것,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인간이 손댄 모든 것” 이었고 역사는 단순한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시간 속의 인간에 대한 학문"이었으며 “역사는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의 정당성을 증명해 줄 것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실천에 옮긴다.

나찌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시킨 후 그는 망명을 모색한다. 나찌의 괴뢰수 정부이자 왕년의 전쟁 영웅 패탱이 그 수반이었던 비시 정부는 그에게 여권을 내주지만 미국이 그 가족 모두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자 블로흐는 프랑스에 잔류하고 이어 항독 레지스탕스에 가담한다. ㅣ

“불의의 운명에 우리는 잠시 정복당해 있다. (투쟁을향한)우리(레지스탕스)의 생각과 희망은 (미래) 우리(프랑스인)의 연대를 더욱 강하고 깊게 해줄 것을 확신한다."

목숨을 건 사보타지와 저항 활동.와중에 그는 "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 이로서의 생각을 담은 글을 써내게 되는데 그것이 "역사를 위한 변명"이다.

프랑스 리용 지방의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활약하던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감방 안에서도 그는 수감자들에게 역사를 믿을 것을 호소하며 그 의기를 놓지 않았다. 마침내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열흘 뒤 그리고 프랑스 해방 두 달 전인 1944년 6월 16일 스물 일곱 명의 동료들과 함께 벌판으로 끌려나간다. 그 가운데에는 열여섯.소년도 있었다. 그는 곁에 있던 백발 희끗희끗한 사내의 팔을 잡으며 묻는다. "아프겠지요 총을 맞으면?" 그때 남자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랜다. "아니야 금방 끝날 거다." 그리고 게슈타포의 총구 앞에서 프랑스 만세를 부르짖으며 총을 맞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 중 한 명인 마르크 블로흐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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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6.17 한국 푸스카스 그리고 프리츠 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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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6월 17일 푸스카스 , 한국 ,그리고 프리츠 발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열렸다. 2차대전 후로는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그런데 6월 16일 녹초가 된 채 취리히 공항에 내리는 일군의 동양인들이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었다. 월드컵 극동 예선에는 한국 대만 일본이 편성됐는데 대만, 즉 당시 중국은 불참했고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려면 일본을 꺾어야 했다. 그런데 "강력한 반...일감정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팀의 입국을 강력히 반대하여 어웨이 경기로만 두 경기를 치러야 했다.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수업 뒤에 질문 퍼붓는 느낌)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만약에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내비치고서야 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갔고 일본을 한 번은 대파하고 한 번은 비겼다. 그로써 1954년 월드컵의 아시아 몫 티켓은 한국의 것이 됐다.

그런데 스위스가 어디메뇨. 지구본만 돌려봐도 아득한 거리였다. 더구나 그때는 스위스 직항 따위는 꿈에서도 나타날 때가 아니었고, 타고 갈 비행기도 없었다. 결국 미 군용기를 빌려 탄 대한민국 축구팀은 일단 일본으로 갔다. 방콕에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 귀하던 시절,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불확실하게 되는 바람에 두 자리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이 사태에 망연자실한 군상들을 본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표가 없어서 못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기 자리를 양보해 주어 선수단은 비행기에 전원 탑승해서는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캘커타 지날 때는 프로펠러가 고장나서 국수를 삶아먹으며 허기를 견뎠고 로마에서는 그래도 전쟁 갓 치른 아시아의 선수들이 유럽에 왔다 해서 기자회견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힘겨운 장도를 거쳐 도착한 다음날 1954년 6월 17일 한국은 당시 축구 최강팀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헝가리와 대결한다. 이때 헝가리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금메달을 딴 이래 무패의 가도를 달려 오던 세계 최강팀이었다. 축구 종가라고 거드름피우는 잉글랜드를 7대1로 대파하여 그 코를 뭉개기도 했고 49년 동구권 대회에서는 북한이 헝가리한테 9대1로 깨진 적도 있었다. 그때 북한팀 선수로 뛰었던 박일갑이 해 준 얘기가 한국팀이 헝가리를 아는 전부였다. 그 팀에는 피렌체 푸스카스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었다. "왼발의 달인"이라면 우리는 하석주를 떠올리지만 세계 축구사에서 왼발의 달인이라면 푸스카스를 든다.

지쳐서 뛸 기운도 없는 한국 선수들과 전설적인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가 이끄는 마자르 군단의 만남. 말할 것도 볼 것도 없는 경기였다. 9대 0이었다. 선수 교체가 없던 시절, 후반 나절에는 선수 4명이 나가 떨어져 7명이 11명을 상대하는 장관(?)을 연출했으니 9대0도 기적적인 스코어였다. 실제로 헝가리팀은 동구권의 소국 알바니아를 12대0으로 날려 버린 적이 있었다. 그 공훈은 마땅히 골키퍼 홍덕영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푸스카스를 위시한 헝가리 선수들의 슛을 온몸을 던져 막아낸 홍덕영 골키퍼의 가슴에는 멍이 들었고 나중에는 발을 들 수조차 없는 근육 경련에 시달렸다. 운도 없지, 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 12대 0으로 골키퍼는 홍덕영이었다.

9대0으로 졌지만 그만하면 선방이었다. 한국은 이어 터키에 7대 0으로 지고 짐을 싼다. 한 경기가 남아 있었지만 8강 탈락한 팀과는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 상대가 서독이었다. 헝가리는 서독과 맞붙어 무려 8골을 집어넣는 괴력을 발휘한다. 8대3. 헝가리를 상대할 자는 없었다. 그런데 헝가리는 대진운이 좋지 않았다. 특히 브라질과의 대결에서는 경기가 끝난 후 난투극까지 벌이며 기력을 소진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독도 절치부심 결승전까지 진출한다. 그래도 헝가리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서독 골문을 여덟 번이나 뚫었던 예선을 보았지 않은가.

이 시절 서독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헤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쟁과 패전의 상처는 온국민의 트라우마였다. 한 예로 서독 대표팀을 이끈 주장 프리츠 발터는 한사코 비행기 탑승을 거부했다. 축구 선수의 우수한 신체 덕분에 나치 독일군의 공수부대에 차출되었던 그는 공중 강하 직후 소련군의 저격을 받아 동료들이 피를 튀기며 즉사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심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그 가족 중에 전쟁통에 죽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전란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서독 전체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결승에 진출했다.

'독일병정'들은 독일병정들이었다. 선수 입장시 독일 선수들은 부동자세로 도열했고 프리츠 발터는 뒷짐을 지고 입장한다. 헝가리 선수들은 이걸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독일팀은헤어베르거 감독과 주장 발터 아래 일치단결, 경기에 나선다. 이 경기에서 독일팀은 베른의 기적을 일군다. 푸스카스가 이끈 마자르군단에게 4년만에 패배를 안긴 것이다. 결승골을 넣은 헬무트 란은 기뻐 날뛰며 발터를 끌어안고, 독일 아나운서는 "벨트마이스터!" 즉 세계챔피언 독일을 외쳤다. 가까운 스위스로 응원왔던 독일 응원단은 목메어 노래를 불렀다. 독일 국가. 하지만 전쟁 후 10년이 지났어도 그 국가는 여러 사람에게 악몽이었다. 스위스 라디오 방송국은 중계를 중단해 버린다.

어떻든 독일인들에게는,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발터에게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린 안될 거야 망연자실하고 있던 독일 국민들에게는 그 경기는 "베른의 기적"이었다. "독일에게 있어 그 경기는 독일인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도 같았다. 어떤 관점에서는 독일 공화국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독일의 사학자 요아킴 페스트)

그 프리츠 발터가 2002년 6월 17일, 신생국 한국이 헝가리에게 작살이 나던 꼭 48년 뒤 세상을 뜬다. 며칠 뒤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 선수들은 검은 완장을 두르고 경기에 임한다. 하필이면 그 월드컵이 열린 장소는 48년 전 백넘버도 없는 유니폼을 입고 와서 백넘버를 자기들이 꿰매고 출전했던, 경기 전날에야 겨우 현지에 도착해서 시차적응 따위는 필요도 없이 뛰었던 어느 비참했던 나라의 한 도시, 울산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왼쪽이 발터, 오른쪽 검은 옷이 푸스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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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6.18 육군장 1호 사형 1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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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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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18일 어느 연대장의 죽음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쯤,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육군 11 연대본부에서 총성 두 발이 울렸다. 곯아떨어졌던 경계병이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희생자는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었다. 그는 중령에서 대령으로 갓 진급하여 제주 유지들과 함께 축하연을 치르고 귀대한 터였다. 두 발은 정확히 머리와 심장을 뚫었다. 위생병이 달려들어와 살폈지만 이미 연대장은 사망한 후였다. 위생병은 눈물을 흘리며 연대장님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연기였다. 위생병 손석호 하사는 잠든 연대장 방 안에 숨어들어 M1소총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스물 여덟살의 패기넘치는 연대장 박진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를 죽인 이들은 3대대장 문상길 중위 이하 몇 명의 부하들이었다. 그럼 그들은 왜 박진경을 죽였는가. 일단 그들은 남로당 세포들로서 제주도 4.3 봉기의 지휘자였던 김달삼의 지령으로 봉기의 진압군 사령관격인 박진경을 죽였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좀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일단 박진경이 부임한 것은 1948년 5월 6일이었고, 그 전임 연대장은 김익렬 대령이었다. 이 사람으로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김익렬 대령은 제주도 주둔 9연대장으로서 4.3을 맞는다.  6.25 때 혈전을 치르고 살아남아 중장으로 예편했던 그는 사망하기 전  흡사 고려 말 초야에 묻힌 충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때 공개하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것은 4.3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에 따르면 4.3은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출동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악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폭동"이었다.  그는 그 신념대로 일을 처리하려 든다.  즉각 토벌을 호령하는 미군정에게 "극렬 분자는 2-300명에 불과한만큼 화평 선무 귀순 공작을 펴 보고 그 뒤에 토벌해도 늦지 않다."고 설득한 것이다.  즉 그에게 봉기한 이들은 어쨌든 달래고 설득해야 할 국민이었지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제주도내 국군의 최고 지휘관은 직접 봉기자들과의 협상에 나선다. 

 목숨을 건 협상이었다. 그는 '수괴' 김달삼과 마주하려 했지만 봉기자들이 그를 믿으려 들지 않자 "내 가족을 인질로 데려가라."고 선언한다.  세상에 이런 군인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   그에 따른 김달삼의 대답도 걸작이었다.  "노모를 산에 잡아 둘 수는 없다."  김익렬은 무장대의 은신처로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김달삼과 만나 평화 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그 3일 뒤 오라리 사건이 터진다.  이는 평화협상을 깨기 위해 경찰의 비호 아래 우익 청년단이 마을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무장대에게 뒤집어 씌워졌고, 5월 5일 서울에서 딘 군정장관을 비롯하여 조병옥, 안재홍 , 송호성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제주도로 온다.  조병옥은 강경론을 폈고 이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김익렬에게 뜻밖의 공박을 가한다.  "저 자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로서...... "  이에 흥분한 김익렬은 단상에 올라가 조병옥의 목을 조른다.  이 개새끼야. 우리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조병옥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일대 육박전이 벌어지고 안재홍은 그저 통곡하고 딘 소장은 콰이어트! 콰이어트! 만 외치는 난장판이었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초토화해서라도 공비들을 토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딘 소장도 이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딘 소장은 김익렬을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그 자리에 박는다.  그리고 새로이 11연대를 구성한다.

 박진경 중령은 부임 직후 훈시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군인 특유의 과장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취한 행동은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중산간 지역의 주민들을 쓸어담다시치 체포한 것이었다.  게릴라와 인민이 물과 고기의 관계라면 물을 말리리려는 심사였다.  부임한지 불과 한 달 열흘(48년 5월 6일~6월 18일)만에 대부분이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제주 지구 미군 사령관 브라운에 따르면 "제주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과감한 행동은 미군정의 격찬을 받았고 박진경은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그 축하연 밤에 그는 죽음을 당한다.  그의 장례는 육군장 1호로 치러진다.

 
 "박진경의 이러한 무차별 체포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은 더욱 깊은 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  (박명림)

 암살자들의 수괴는 문상길 중위였다.  그는 남로당 세포였고 여맹 위원장 딸의 애인이었다.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의 투사였는지, 아니면 태풍에 휩쓸린 제주도 사람들을 동정하고 상관을 죽임으로써 그를 막으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당 중에는 제주도 출신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용케 혐의 대상에서 벗어났지만 뜻밖의 투서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문상길 중위가 범인이라는 투서가 수사대에 제보된 것이다.   문상길 중위는 모진 심문 끝에 범행을 인정했다.  그의 가슴에 부적을 넣고 있었는데, 붉은 인주가 피부에 번져 있는 것을 보고 심문관은 "상관 죽인 뒤에 불안해서 그 부적 갖고 있었던 거지?"라고 추궁을 했고 문 중위는 인정을 했다고 한다.   부적을 품에 안고 있었을지언정 문상길은 기독교인이었고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의 최후진술을 보면 그렇다. 

 "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문상길은 처형된다.  대한민국 성립 후 사형 1호였다. 


 해방 공간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슬픈 것이 결국은 모 아니면 도 라는 논리가 칼날같이 곤두선 가운데 마치 자석의 양극처럼 버티고 서서 널려 있는 쇳가루같은 인간들을 휩쓸고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나라가 빨갱이 만들고 지주가 공산당 만들던" 시기, 나라는 빨갱이들에게 야차처럼 무서웠고 지주들은 공산당 비슷한 이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며, 빨갱이들 역시 "민족반역자 처형하고 무산대중의 조국 건설"을 하기 위해 협상을 하기 보다는 목전에 다다른 해방을 위한 무장봉기와 무력항쟁을 선호했다.  결국 김익렬 같은 이들의 설 곳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결국은 박진경과 문상길로만 남게 된 것이다. 

 김익렬이 자신의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조병옥에게 육박해 들어갔던 그 현장에 있던 사람 가운데, 조병옥은 제주도 학살의 책임을 두고두고 면치 못할 위인으로 남고, "연대장 제발 놓으시오. 이 무슨 망신이오."라고 통곡하던 안재홍은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김익렬의 상관이자 김익렬을 만류했지만 뜯어말리지는 않았던 송호성은 국군 지휘부의 무신경 속에 6.25 발발 직후 서울에 남겨지고 인민군의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나마 김익렬 대령이 한국군에 남아 나름의 공을 세우고 중장으로 예편, 종생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1948년 6월 18일 한 고급 장교가 죽었다. 그 죽음은 그때에만 남아 있지 않다.  한 사회의 내부 구성원들 사이를 극단과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묘미이자 의무라고 할 때, 그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오늘날의 우리 형편 때문이다.  

 


 사진은 박진경 대령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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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7.10 구보 박태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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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10일 구보 박태원 사망

나의 고등학교 국어 시간은 이상했다. 현대문학사를 배우면서 KAPF는 시험에 자주 나올만큼 중요한 문학단체였는데, 정작 KAPF의 문학 작품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한때 KAPF의 주도자였던 박영희의 회심 고백은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어 ‘박영희’는 아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구인회’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분명히 아홉 명의 문인들로 구성된 모임일 텐데 거기서 필요한 이름은 이상, 이효석, 김유정, 유치진 정도였다. 그 외 다른 이름들은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시험에 안나오니까.


구인회는 그 이름대로 아홉 명의 회원은 지켜졌지만, 그 아홉 명이 꾸준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발기인이었던 이종명, 김유영을 비롯해서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이 구인회였고 이후 이종명 김유영, 그리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효석이 탈퇴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다. 그리고 그 뒤에 두 명이 탈퇴하면서 김유정이 처음으로 얼굴을 디밀게 된다. 원래 이 구인회는 경향문학 즉 요즘 말로 하면 참여 문학, 또는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주창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구인회가 단체로서 영향을 미친 바는 적으나, 그 구성원 개개인이 쟁쟁한 문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는 지대하다 하겠다.


구보 박태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30년 <신생>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반계몽, 반계급주의 입장에 서서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등의 소설로 명성을 얻는다. 이때 그 소설에 삽화를 그려 준 건 <오감도>의 작가 이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박태원은 모더니즘적인 입장의 작가였고, 그 파격적인 문체로 이른바 속물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냈지만 계급적 각성이나 투쟁의 호소와는 거리가 있는 문학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는 이 문재(文才)의 인생 또한 휘저어 놓았다.


그는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보도연맹원까지 됐다. 보도연맹원이란 “좌익활동을 했지만 그 과오를 늬우친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조직이었지만 전쟁이 터진 뒤 그 조직원 명부가 그대로 학살자 리스트로 뒤바뀐 바로 그 이름이다. 하지만 워낙 빨리 서울이 함락된 터라 박태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2남 3녀와 처를 놔두고 단신 월북한다. 딸 하나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북으로 갔지만 남은 가족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그 처는 인민군복을 빨래한 죄로 징역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되는 남로당 숙청의 피바람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교수로 잘 지냈지만 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4년간 평남 강서 지방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는데 이때 영양실조로 인해 그 시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입는다. 복권된 뒤 북한의 대표적 역사 소설인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등을 저술하는데 이미 이 2부를 쓸 때 그의 눈은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와 있었다. “이 병은 불치의 병일 뿐 아니라 오래지 않아 눈이 멀게 될 무서운 병이었다. 날이 갈수록 시야는 점점 좁아져 글자 한자를 보려고 해도 확대경을 가져와 대야만 했다. 그는 말없이 캄캄한 어둠속에 잠겨 또 밤이 오는 것도 모르면서 절망속에서 모대기었다(시달렸다). (부인 권영희) 거기다가 뇌졸중까지 찾아왔다. 가히 작가로서는 사형 선고였다.
 

하지만 무척이나 댄디했고 시니컬했던 구보 박태원은 오히려 그런 형편에서 그가 지녔던 문학혼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반신불수 상황에서도 원고지 모양의 틀에서 손으로 작업하다가 그마저 안되자 구술로, 구술마저 안되었을 때에는 부인 권영희가 대신 써서 완성한 것이 <갑오농민전쟁>이다. 부인 권영희는 구인회 멤버 중의 하나인 정인택의 부인이었는데 정인택이 죽은 후 박태원의 옆에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그 지난한 받아쓰기 과정에서 청력을 잃었다 한다.



그렇게 필사적인 문학 작품을 남긴 그가 1986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가 남긴 후손들은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특별상봉에서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던 큰딸 박설영이 남한에서 사는 남동생 재영과 만난 것이다.

이날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천변풍경’ 등으로 1930년대 문단을 풍미했던 구보 박태원씨(1909~86)의 둘째아들 재영씨가 초등학교 3학년때 헤어진 북측의 큰누나 설영씨(70)와 첫 행사인 단체상봉에서 해후했다. 그때 화제에 오른 인물이 영화 <괴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다. 그는 남한에 남은 박태원의 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설영씨는 자신의 조카가 이름을 드날리는 영화 감독이라는 것에 놀라와했고 그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그녀가 생전에 그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자리에 박태원의 혼령이라도 있었다면 남과 북의 후손들의 어깨를 잡고 어여들 인사하거라 어여들..... 하며 혼자 흥겨워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의붓딸, 즉 권영희의 딸이자 친구 정인택의 딸이었던 정태은이 남긴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 중 한 대목에 따르면 박태원은 ‘주체 48년’(1959)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하니까. “일영아!, 재영아!, 소영아!, 은영아! 어디에 있느냐, 그리운 아이들아 ! 이름이라도 불러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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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7.11 박왕자씨 살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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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1일 박왕자씨 살해 사건 - 종북이 싫은 이유

 

외모를 극복하기 위해 연기력을 무기로 하는 배우들이 많지만, 장동건도 정반대의 견지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무슨 역을 맡던 형광등 천 개의 아우라가 비치는 외모 때문에 그는 오히려 고민이 많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같은 영화에서는 조연도 마다 않고 출연했고 그 외 영화에서도 그 눈짓 하나로 여자를 홀리는 로맨틱 가이보다는 그 외모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험한 역할도 많이 했다. <친구>의 깡패나 <해안선>의 초병이나. 영화 <해안선>에서 해병대원 장동건은 군사보호지역에서 사랑을 나누던 연인에게 사격을 가해 남자를 죽인다. 그는 경계근무에 철저한 사병으로 표창을 받고 포상휴가를 받지만 그사건은 두고두고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게 된다.

 

부산 태종대나 송정의 해안가에는 "한 마리 잡자."라는 구호가 걸려 있었고, "한 마리 잡으면 헬기 타고 고향 앞으로." 라는 해설이 딸려 있었다. '한 마리'란 다름아닌 침투하는 간첩이었고,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고 쏘아 죽이고 헬기 타고 고향 가면 되는 발판일 뿐이었다. 영화 <해안선>이 드러내고자 한 것도 물론 적이긴 하지만 그 적을 '한 마리'에 비유하는 폭력성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군사보호지역에 허락 없이 뛰어들어 얼쩡대다가 초병의 수하에 대답도 않고 후다닥 도망가는 인간이란 더더욱 마땅히 죽여야 할 짐승인지도 모른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외아들 하나 둔 평범하디 평범한 50대 주부가 동창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새벽 일출을 보겠다며 어둑어둑한 해안으로 나갔다가 모래 언덕 정도로만 막아 놨던 민간인 출입 경계선을 넘었고 북한 초병의 수하에 놀라 도망하다가 총격을 맞고 숨졌다. 바로 박왕자씨 사건이다. 적어도 북한 초병에게 모래밭을 뒤뚱뒤뚱 뛰어 도망가는 50대 여인은 '한 마리'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놓치기보다는 사살하는 것이 낫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준으로 등짝을 명중시킬 정도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상황의 재연은 서술하지 않겠다. 그러나 민간인통제구역을 설정하는 것은 통제하는 쪽의 권리이자 의무다. 즉 철조망이든 철책선이든 민간인이 손쉽게 넘기 어려운 장벽을 설치하든지, 여러 경로로 경고를 발하여 민간인들이 통제를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남한 관광객들이 득실대던 금강산 인근에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을 공지하고 물리적인 차단선을 설정해야 하는 의무가 가장 크게 지워지는 것은 바로 조선 인민군이다. 만약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철책선 하나 없는 군사보호구역에서 들어간 민간인이 사살됐다면, 초병은 휴가를 갈지언정 그 관리 책임을 진 장교는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정부간 합의에 따라 자국의 기업이 관광 시설을 설치하고, 자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남한 정부가 사건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밝히라고 요구할 권리는 단호하게 '있다'.

 

그러나 자칭 일부 진보 진영은 이 상식을 어긴다. 한국진보연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북의 땅으로 남과 북이 정해진 기준을 잘 따라야 한다..... 사망하신 분과 관련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남북이 이 일로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이 말을 풀어 쓰면 이렇다. "죽은 사람은 안됐지만 누가 거기 들어가래? 그냥 넘어가자." 한국진보연대는 이어 공식 성명에서 "박왕자 여사의 영전에 삼가 애도의 마음을 드리고...... 이 사건은 남북 화해 협력에 추가적인 장애를 조성한 점에서 하루 속히 전향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진상이 규명되고 재발방지대책이 세워져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을 읊은 뒤에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여 남북관계 경색을 추구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 주장하는 널뛰기를 한다.

 

북한이 남한의 공동 조사 제안을 거부하고, 심지어 "터놓고 말하여 군사통제구역 안에 불법침입한 그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말이지 (생포했다면) 우리로서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식으로 고인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갈 때 심지어 자칭 진보 진영 일부에서는 고인의 남편이 전직 경찰이었음을 들먹이며 야릇한 냄새를 피우는 이들마저 있었다. '진상규명'을 입에 달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진상은 북한의 발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남측의 공동조사를 거절하는 북한을 '규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급기야 북한은 남측의 제의를 거절한 채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남한 인력을 추방한다. 즉 금강산 문을 닫아 건 것은 북한이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불행한 현실의 책임은 남북이 반반으로 짊어져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남쪽의 책임에 대해서는 청산유수가 흐르지만 북쪽의 책임에 대해서 문제의 '일부' 진보 진영이 일언반구나마 언급한 적은 없다. 그저 박왕자씨는 안됐지만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갔을 뿐이며, 전 민주노동당 간부 최규엽이 "인터넷에서 퍼서 인용한" 주장처럼, "(초병의 경고나 명령에) 불응, 도주 시에는 발포 및 사살이 규칙"일 뿐이었다. 북한군 초병은 결국 한 마리를 잡은 것이다.

 

북한은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으며, 사과를 받을 쪽은 남한이 아니라 북조선"이라고 우겼다. 이 후안무치함에 대해서도 일부 진보 진영은 단 한 마디를 하지 못한다. 과실이 명백하긴 하지만, 고의성은 없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여중생의 원통함에 대해서는 군 부대 철책선을 뜯고 미군 부대에 뛰어들 만큼 용맹하던 그 용기는 결코 북쪽에 대해서는 발휘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박왕자씨는 "들어가지 못할 곳을 찾아들었다가 총맞아 죽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랬고, 이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진보'가 아니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기에 필요한 것은 남과 북 정권 모두의 전향적인 태도다. 북한이 끝까지 "박왕자 책임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남한 정부가 무슨 면목으로 관광객을 북으로 실어보낼 수 있단 말인가. 2008년 7월 11일 한 여인이 열 일곱 살의 여군 (자주민보 보도대로라면)에 의해 등이 꿰뚫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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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꺼 재탕. 1906.7.12 드레퓌스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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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의 무죄를 요구하며 작년 꺼 다시.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 무죄!”
...

1894년 프랑스 정보 요원이 누군가가 독일 무관에게 보내는 기밀 문서를 훔쳐 내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스파이를 찾은 끝에 범인을 잡아냈는데 근거는 그 필체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체 말고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빌어먹을 유태인이었다. 간첩과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다."면서 보다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이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나아가 "이것은 너무나 민감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협박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자신이 무죄임을 열심히 항변했지만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훗날 ‘빠삐용’의 무대가 되는 악명 높은 기아나의 유형지로 끌려간다. 그 이후 드레퓌스의 생이 그려내는 드라마의 주요 배역들을 읊어 보자.

조르쥬 피카르 중령. 그는 스파이 사건을 조사 중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접하게 된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고 문제의 필체가 또 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 그는 용감하게 에스테라지 체포와 드레퓌스의 재심을 상관에게 요구하지만 완전무결하게 거부당하고 튀니지로 좌천된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외부에 전파함으로써 프랑스의 양심을 지킨다. 이 사실은 변호사를 거쳐 상원 의원에게까지 흘러들어가지만 그들은 이 사건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반유태주의 물결이 거센 상황에서 드레퓌스 편을 드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자살 행위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필사적으로 드레퓌스 구명에 나선다. 그 부인은 남편이 법정에 출된 증거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또 다시 드레퓌스의 이름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초지일관 프랑스 군부 편을 들던 극우 신문 르 마탱이 뜻밖의 사고를 친다. 드레퓌스의 죄상을 공개한답시고 일찍이 드레퓌스의 필적이라 규정되었던 문제의 서류를 대문짝만하게 실어버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필체의 주인은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 진짜 간첩으로서 간첩질로 얻은 돈으로 과부나 꼬셔 재미를 보고 다니던 저질 인간. 르마탱에 자신의 필적이 공개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반유태인 선전에 열을 올리며 턱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유태인 하나쯤에 그랑드 아르메 (대 육군- 프랑스 육군의 호칭)의 명예를 저버릴 수 없었던 참모본부도 그의 편이었다. 에스테라지는 법정에서 깨끗한 무죄 판결로 그 무고함(?)을 인증받는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에스테라지와 프랑스 군부 앞에 강력한 상대역이 등장한다.

에밀 졸라. 이 말도 안되는 꼬락서니에 그는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폭발하듯 써내린 그의 고발문은 일거에 수십 만 명이 읽었다. 동시에 그는 반유태 정서를 지닌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의 과녁이 된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재차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실이 땅 속에 묻히면 끝내는 더 무섭게 폭발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졸라는 절규한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 드레퓌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피카르 중령의 목숨을 건 항변을 무시하고 그를 군사기밀유출죄로 체포했다가 튀지니로 보내 버리고, 에밀 졸라마저 군 모독죄로 잡아들이려 했던 그들은 에밀 졸라의 고발 이후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안 에스테라지가 국외로 튀어 버렸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드레퓌스에게 “지금까지의 고생을 참작하여” 종신징역을 10년 형으로 감해주는 그야말로 대!!단한 관용을 베푼다. 드레퓌스의 기가 막히고 졸라의 코가 막혔으리라.

알프레드 드레퓌스. 독일과의 접경 지역에 살면서 군인으로서 프랑스에 봉사하리라 결심했던 유태인 장교, 그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그는 악마의 섬에서의 유형 생활을 꿋꿋이 버티며 군인으로서 누명과의 전쟁을 성실히 감내해 냈다.

예전에 일어난 사건이 쌍둥이처럼 후일 재구성되는 것을 평행이론이라고 한다던가.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일란성 쌍둥이 아니 흡사 분신처럼 20세기 말 한국에서 재연된다. 바로 ‘유서 대필 사건’이다. 갱 영화에서 자살을 강요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제 손으로 자신의 유서를 쓰는 모습도 못봤던 것일까. 대한민국의 꼴통 나으리들은 유서는 엉뚱한 이가 쓰고 죽기는 딴 사람이 죽는 기상천외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반유태주의에 미쳤던 프랑스 우익을 빼닮은 박홍이 잇따른 분신 뒤에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분위기를 잡았고, 국과수의 필적 전문가 김형영은 에스테라지같이 거짓말을 일삼으며 필적의 주인을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친구 강기훈으로 지목한다. 에스테라지와 마찬가지로 저질이었던 이 인간은 후일 돈 받고 감정을 하다가 쇠고랑을 찬다.



김형영 국과수 문서감정팀장이 돈 받고 허위 감정을 해 왔던 사건에 대한 수사는 신속하게 시작해서 정확한 기간 내에 시침 뚝으로 끝났다. “돈은 받았으나 허위 감정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감정은 2심 3심 내내 명확한 증거로 채택됐다. 그 와중에 검찰은 한겨레신문이 감정을 의뢰한 사설 감정원을 압수수색했고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을 막았다. 프랑스 육군 나리들이 지하에서 보고 감탄해 마지않을 추진력이었다. 이 가공할 억지에 판결로서 마침표를 찍은 대법원 판사들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노무현 탄핵 때 4천만이 그 얼굴을 지켜봤던 윤영철이 그다. 판결문도 좀 컨닝해 두자.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도운 것이 명백하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


이왕 이름 나온 김에 ‘그랑드 아르메’ 프랑스 육군의 꼴통들의 높은 콧대를 작신작신 부러뜨릴 대한 건아의 이름들을 들먹여 보자. 강신욱 사건 당시 서울 지검 강력부장.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서 대필 재심 권고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특정 단체가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 가히 “그 동안 고생했으니 종신 징역은 말고 10년만 살아라.”던 프랑스 육군 재판부의 발전적 환생이 아닌가. 당시 남기춘 검사. "당시 증거물로 제출되지도 않았던 김기설의 필적을 가져다 감정한 뒤 이것이 옛날 감정 결과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수사와 재판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한다. 에스테라지의 필적을 갖고 와서 이놈이 범인라고 부르짖는 피카르 중령에게 “입 닥쳐.”를 부르짖던 프랑스 장성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더욱 우수한 인재로 거듭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드레퓌스 강기훈은 91년 당시 이렇게 피를 토하며 잡혀 갔었다. “무고한 개인이 권력의 힘에 의해 끝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런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신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쯤 되면 평행 이론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평행 이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도 있다. 1906년 7월 12일 105년 전의 바로 오늘 드레퓌스 대위는 지긋지긋한 스파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움을 프랑스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리고 열흘 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소령 계급장과 레종 도뇌르 훈장을 휘감고 아들을 앞세운 무개차를 타고 부대 문을 나선다. 그 순간 수십만의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 군중 앞에서 드레퓌스가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얼마나 감동스러웠으랴. 하지만 아직 우리의 드레퓌스,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목으로 인생의 황금기에 녹물을 부어야 했던 강기훈은 아직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로부터 멀다. 우리에게 에밀 졸라가 없어서일까. 피카르 중령이 없어서일까. 또 이렇게 보면 평행 이론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보수라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자라면 강기훈 앞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가 겪은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스스로 맹세해야 한다. 강기훈은 한국의 수구 꼴통 세력이 만들어낸 극악한 장난의 희생양이었다. 드레퓌스는 폼나는 스파이라도 됐다. 하지만 강기훈은 친구가 죽는데 유서까지 대신 써 주는 미친 놈으로 20년을 보냈다. 1992년 7월 24일도 아울러 기억하자. 강기훈이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은 날이다. 우리는 언제쯤 되어야 대한민국 만세 진실 만세를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언제쯤 되어야 자연인 강기훈에게 우리가 눈이 어두웠노라고, 아니 뒤집혔었노라고 국가가 사과하고 그 세월에 대해 보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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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7.13 어느 지독한 '평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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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7월 13일 어느 지독한 ‘평화’의 끝

신영복 교수님의 회고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감옥에 있을 때 함께 지낸 수인 중에 ‘대의(大義)’라는 이름의 절도 3범이 있었다고 한다. 신영복 교수는 그런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의 뜻과 지금의 수인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참 네 아버지 가슴 아프시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하루는 넌지시 누가 그 이름을 지었냐 물어봤더니 대단히 기분나빠하면서 광주 도...청 앞 대의파출소에 버려졌기에 그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영복 교수는 이에 문자로 사람을 읽으려 했던 먹물로서의 관념성을 뼈아프게 자기비판하셨다고 하지만, 속물인 나는 좀 다르다. 살다보면 그 이름과는 영 딴판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이름은 ‘온순’인데 천하의 가정폭력범인 사람도 있었고, 언젠가 만난 ‘성실이’처럼 천상천하 유일백수인 경우도 있으니까. 1954년 7월 13일 죽어간 멕시코의 한 여성 화가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였다.

‘프리다’는 독일 말로(그녀 아버지는 독일인) 평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일생 동안 그녀의 이름에 그녀의 삶이 도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삶은 차라리 전쟁이었고 형극이었으며 울퉁불퉁한 돌짝밭길이었다. 일단 그녀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다. 보통은 이 정도만 되어도 안됐다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고.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인생에서 소아마비 정도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시련으로 남는다. 의사를 꿈꾸던 열여덟의 여학생 프리다 칼로는 학교에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가공할 사고를 만난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복부를 뚫고 국부를 관통해 허벅지에 구멍을 낸 이 무시무시한 사고로 그녀는 근 아홉 달 동안을 기브스한 채 천정만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 망연하고 답답한 기간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정에 매단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움직이 수 있는 손만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 이후 그녀는 평생 동안 수많은 자화상을 남기거니와 병상에서의 자화상은 그 시작이었다.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내 그림의 주제는 바로 나다.” 기적적으로 그녀는 걸을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마치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걸을 때마다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일찍이 멕시코 혁명(1910) 때 에밀리아노 자파타의 혁명군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며 응원하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사회주의에 경도된다. 그는 멕시코에 망명한 쿠바 혁명가와 교분을 나누면서 그 혁명가의 애인이었던 사회주의자이자 사진 작가 티나 모도티와 우정을 쌓는다. 그리고 그 티나의 소개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버스 사고 이상으로 파괴하고 동시에 규정했던 사고로 연결된다. 그 누군가는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이자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미술가 디에고 리베라였다. 리베라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 고 격찬한다. 그러나 리베라가 감탄한 것은 그녀의 그림보다도 그녀 자체였다.

스물 하나의 앳된 프리다와 마흔 셋의 아저씨 리베라는 곧 결혼하게 된다.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반대하던 부모도 두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는 프리다 자신이 얘기한 바대로 “버스 사고 이후의 두 번째의 대형 사고”였다. 둘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지 않는 예술적 동료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방해한 것은 우선적으로 리베라의 가공할 바람기였다. 리베라의 별명은 ‘식인귀’였는데 해부학 교실에서 인육을 먹어 봤다는 그로테스크한 그의 자랑(?) 때문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워낙 많은 여자들과 닥치는 대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다의 동생까지도 그 바람기의 희생양이 됐으니 프리다의 고통은 자심한 것이었다. 언젠가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이런 그림을 보낸다.
침대 앞에서 웃옷을 피로 물들인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림을.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진의 그림이다)

그러나 프리다는 리베라를 열렬히 사랑했고 리베라도 프리다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프리다는 품고 싶지만 품어지지 않는 남편과 아이에 대한 갈증(그녀는 사고 때문에 임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을 그림으로 풀고, 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는 운동가의 열정으로 보충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에게 가장 큰 에너지는 디에고 리베라라는 남자였다. 그녀의 사랑은 불가사의해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그녀도 맞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멕시코에 망명온 우상같은 혁명가 트로츠키와 존경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리베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를 무너뜨린 것은 리베라의 이혼 요구였다. “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라고 일기에 쓰던 그녀에게 디에고의 이혼 요구는 삶의 기둥의 부러짐이었다.

고통스런 1년이 지나고 그녀를 잊지 못한 리베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또 그를 받아들인다. 여자관계 정리와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조건이었지만, 리베라는 그 약속의 메아리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여자의 침대에 뛰어들고 있었다. 프리다는 리베라를 체념했지만 포기하지는 못한다. 사랑하지만 자기 것이 되지 않는 남편, 병에 걸려 한쪽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 몸을 부서뜨릴 듯 엄습하는 척추의 아픔 속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행동한다. 그녀를 지탱하던 코르셋에 낫과 망치를 그려넣었던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했고, 급기야 미국의 볼리비아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엄청난 비를 맞고 들어온 후 폐렴에 걸려 세상을 뜬다. 1954년 7월 13일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평화(프리다)의 종말이었다. 이렇게 많은 고통 속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한 사람을 나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디에고,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당신은 나에게 호의를, 빛과 온정을 주는군요." 이제는 저승에서 만났을 디에고와 프리다. 디에고는 과연 그 바람기를 멈추고 자신의 인생의 여자였던 프리다에게 안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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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7.14 에스페란토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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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7.15. 여걸 추근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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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7년 7월 15일 여걸 추근 처형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든 ‘여자의 몸으로 남자도 못한 일을 해낸’ 영웅들이 존재한다. 잔다르크가 그렇고 ‘유관순 누나’도 그러하며 중국 한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를 물리친 베트남의 쯩 자매도 유명하다. 1907년 7월 15일 새벽, 아직은 망하지 않았던 청나라의 한 도시 소흥에서는 여걸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은 한 여자가 처형당했다. 그 이름은 추근이라고 한...다.

그녀는 태어난 곳은 중국 남쪽의 하문이었고, 그녀가 자란 곳은 서양인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서양인들이 부리는 횡포를 눈으로 보았고 심지어 그곳 관리였던 할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것도 지켜보면서 컸다. 추근은 재능이 많았다. 교양이 높은 어머니는 그녀에게 글과 시를 가르쳤고 추근은 열한살 때 벌써 시를 짓고 두보 시선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고 연약한 문학소녀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술과 말타기에도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별종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느 집안의 딸들처럼 나이 스물 하나에 추근은 시집을 가지만 부호의 아들이었던 남편은 아내의 그릇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간장 종지였다. 세월이 흘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슬하에 두지만 둘의 금슬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난 마누라 둔 못난 남편만큼 까탈스러운 생명체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역사에 봐도 허난설헌은 그 재능 때문에 되레 팔자가 사납지 않았던가. 이 가족의 명운은 베이징으로 이사를 가면서 깨진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여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듣게 된 추근은 한 남편의 아내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여성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과감하게 선택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말과 소와 다를 바가 없었어요. 이제 새삶을 살아야겠어요. 우선 공부를 해야겠어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어요.”

어머니가 전족을 하려고 헝겊으로 발을 싸매면 밤마다 그를 풀어헤치던 추근의 고집은 여지없이 발휘됐다. 남편은 말려도 보고 아이들을 핑계로 설득도 해 봤고 일체의 경제적 지원은 없다고 엄포도 놨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자기 패물을 팔아 여비를 마련한 추근이 일본으로 훌쩍 떠난 것이다. 이때 추근은 쿠울리, 즉 남자 노동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선실에 끼어 일본으로 떠났고 그때 칼을 품고 자신을 지켰다고 한다.

해와 달이 빛이 없으니 천지가 어두운데
캄캄한 여성 세계 누가 구하리
바다 건너 일본에 유학하려 장식품 팔고
골육과 헤어져 옥문관을 나섰다네.
전족을 없애 천년의 해독을 씻고
힘모아 백만 여성을 일깨우고자 하니
예쁜 손수건 하나 반은 핏물 반은 눈물이라네.
공부는 물론 혁명의 꿈을 키우며 사격과 폭탄 제조까지 배우던 그녀는 당시 중국 여성을 옥죄던 대표적인 풍습 중의 하나인 전족 폐지를 외치는 단체를 조직한다. 그것이 ‘천족회(天足會)’다. 천족이란 아예 전족을 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녀평등과 봉건 유습 타파, 여성의 교육 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즈음 청나라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반정부 기운이 강했고 이에 신경을 곤두세운 청나라 정부의 압력으로 일본이 유학생들의 행동 반경을 좁히려들자 유학생 사회는 반으로 나뉘었다. 부당한 조처를 거부하고 당장 귀국하자는 쪽과 일단 공부는 마치자는 쪽. 추근은 귀국파였는데 잔류를 주장하던 유학생 소도남에게 이런 욕설을 퍼붓는다. “이 죽일 놈!”

“남자로서 광복을 (청나라의 멸망) 위해 죽은 사람은 있으나 그런 여성이 없는 것은 여성계의 수치”라고 주장했던 그녀는 귀국 후 철저한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손문이 조직한 광복회의 절강 지부에서 일했고, 서석린 등과 함께 안휘, 절강성에서의 혁명군의 봉기를 조직하려 한다. 하지만 봉기 계획이 누설되면서 서석린은 안휘성의 순무, 즉 성의 최고 관리를 암살하지만 체포, 처형된다. 한 성의 최고위 관리가 혁명가들의 손에 죽자 관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동조자를 찾았고, 이때 한 관리가 그녀를 고발한다. 그 관리의 이름은 바로 소도남. 일본에서 추근에게 장히 욕을 얻어먹었던 그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1907년 7월 15일 가을비 가을 바람 애간장을 태우는구나 (秋風秋雨愁熬人)이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참수된다. 그녀는 죽기 전 옷을 벗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은 수용되었다고 한다. 구습을 타파하고 봉건 정부를 타도하고자 했던 여걸 추근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그녀의 딸을 통해 입증된다. 중화민국 정부 설립 후 혁명열사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되는데 추근의 딸은 그 보상금을 기반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술을 익혀 ‘동방의 여기장’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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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7.16 최초의 핵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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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남쪽 193km 거리의 앨러머고도 공군 기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탄은 과학장비로 둘러싸인 강철탑 위에서 폭발했는데 그곳에서 9km 떨어진 벙커 안에서는 과학자들과 몇몇 고위인사가 원격 감시장치로 폭발광경을 초조한 낯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폭탄이 터지자 강렬한 섬광이 미명을 밝혔고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면서 골짜기를 울려 귀가 멀 듯한 폭음으로 번졌다. 하늘을 찌르는 불기둥이 치솟았고, 버섯 모양 구름은 1만 2000m 상공까지 뒤덮었다. 강철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폭심 주변의 모래는 녹아서 유리가루처럼 변해 버렸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면서 이 폭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이렇게 외쳤다.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즉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또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만든 폭탄에 빙의된 듯 인도의 서사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고도 한다.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이노라." 인류가 발명한 무기 가운데 인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죽음의 신, 지구를 통째로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세상의 파괴자가 등장한 것이다.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과정을 군사목적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였다. 이 연구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나찌와 파시스트들을 피해 온 망명 과학자들이었다. 우선 엔리코 페르미.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 유태인이었던 아내에 대한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고 후일 연구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망명자였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나찌가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서한을 보내 (후일 그는 이 결정을 몹시도 후회했다지만) 미국 정부의 본격적인 원자탄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민간 기관에서 담당하던 핵폭탄 개발 연구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에는 육군부의 소관이 됐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연구 시설과 실험 부지를 만족시키려면 육군 공병단의 개입이 없으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1942년 6월에 공병단의 맨해튼 관구가 먼저 그 건설사업 책임을 맡았으며(초기 연구가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주로 이뤄졌기 때문인데), 그래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맨하탄 계획’이 된다.

철저한 보안과 감시 속에 진행된 원자폭탄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정부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유럽에서 망명 온 학자들이 큰 힘이 되고 있었던 바, 유럽에는 그들만큼이나 유능한 과학자들이 숱하게 남아 있으며 그들 역시 그들의 조국을 위하여 진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쪽의 과학자들을 독려함과 동시에 저쪽의 핵융합 연구에 대한 정보를 얻고, 부득이할 경우 그 개발에 필요한 두뇌들을 제거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때 활약한 미국인 중의 하나가 모 버그다. 그는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다.

솔직히 그는 야구에서는 큰 빛을 못 본 선수였다. 프로야구단에 입단하긴 했지만 유격수를 했다가 포수를 했다가 포지션도 왔다갔다 했고 주전포수가 된 다음에는 부상을 입어 주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쪽으로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 그는 언어의 천재였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 그는 무려 10개 국어를 배웠고 말할 줄 알았다. 그가 베이브루스와 함께 올스타팀에 들어 일본에 갔을 때 그는 일본어를 말할 줄 아는 진귀한 미국인으로서 일본의 곳곳을 촬영하고 돌아왔다.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자 호기심으로 찍었던 그 자료 화면들은 고스란히 일본의 지형 지물을 파악하는데 쓰인다.

OSS(CIA의 전신)는 이 영민한 인물을 프로야구 포수로 썩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를 설득하여 스파이로 유럽에 잠입시킨다. 임무는 좀 무시무시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의 주도자라 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하여 원자폭탄 연구 진전 상황을 알아내고 만약에 원자폭탄이 개발이 임박했다면 하이젠베르크를 죽이는 것이었다. 야구공 대신 권총과 청산가리를 들고 하이젠베르크에게 접근했지만 그가 얻은 정보는 아직 원자폭탄 개발로부터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 모 버그도 살인의 업을 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후에 자신은 고의로 태업을 해서 원폭 제작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저승의 염라대왕도 궁금해 했을 일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자칫하면 모 버그는 독일의 원자폭탄 생산을 재촉하는 암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폭 계획은 일본에서도 진행 중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흥남 앞바다에서 소규모 핵실험을 했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된 바 있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흥남 비료공장을 비롯한 흥남 일원이 특별히 미 공군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류는 자신의 목을 내려칠 수 있는 시퍼런 칼을 갈아 머리맡 천정에 달아매려고 노력했고 누가 빨리 달아매는가 경주를 했다. 그 경주 끝에 1945년 7월 16일 거대한 섬광과 버섯구름의 위용으로 원자폭탄이 태어났다. 그리고 첫 번째 이름 ‘꼬마’는 히로시마를 집어삼켰고 두 번째 ‘뚱뚱이’는 나가사키를 폐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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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7,17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사건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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