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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7.18 바콩시스코 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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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4년 7월 18일 서강대 바콩시스코 납시다

...

서강대 총장을 꽤 오래 한 박홍이라는 신부님이 계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이름은 그를 익히 아는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그냥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봤던 이들에게 이 신부님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당연한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캠퍼스에서 대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잔을 나누던 '괴짜'였고 군 복무 시절 간첩을 잡았다고 회식을 벌이던 부대원들 앞에서 "동족을 죽여놓고 무슨......"이라고 결기를 세우다가 몰매를 맞은 일을 회상하기도 하던 열혈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91년 5월 그 지옥같은 분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비장하게 그러나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전민련 간부였던 김기설이 분신자살한 몇 시간 후 그는 이런 발언을 한다.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올린다.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며 죽음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체를 깨닫도록 식별의 지혜를 베푸소서”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 블랙리스트를 들고 오늘은 네가 기름 끼얹고 내일은 네가 신나 뿌려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지만, 그 발언 가운데 가장 큰 함정은 그의 말 속에 파여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실체가 없으나 영적으로는 충만한 그의 영감은 보수 언론과 검찰에게는 복음과도 같았다. 당장 박홍의 발언과 기도는 김기설을 죽도록 꼬드긴(?), 그리고 유서까지 써 준 누군가를 잡아들이려는 검찰의 기민함으로 이어졌고, 언론들은 연일 '죽음의 세력'에 대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91년 5월이 몸서리쳐지게 싫고, 그때 젊은이들의 전염병같은 분신 사태를 막지 못하고 장례식 참석하기만 바빴던 왕년의 '민민운동 진영'의 실책도 추궁되어야 마땅하다고 보지만 박홍은 파울도 장외파울을 치고 있었다.



그때 자신에게 집중된 매스컴의 플래쉬가 그리웠던 탓일까. 그 뒤로 심심찮게 레드 바이러스니 뭐니 하면서 자신의 극우적 성향을 커밍아웃해가던 그가 마침내 대형사고를 친다.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대학총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엄숙하게 선언한다.

"대학 안에 생각보다 주사파가 깊이 침투해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사회주의로동자청년동맹)과 김정일이 있다."는 것이 피를 토하는 그의 고발이었다. 하늘을 찌르는 준엄함과 델 것 같은 열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구체성이 부족했다. 주사파는 밖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대학 내에서 자랐고, 사노맹은 주사파를 맹렬히 공격하던 이들이었으며, 사노맹이 사로청과 연결된 것은 '사노' 두 글자의 유사성의 이유 외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이다. 4월 흑싸리껍데기로 7월 멧돼지를 먹을 기세였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걸. 그의 주사파 파노라마는 이후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기자가 '증거'를 묻자 "증거고 나발이고....."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 신호탄에 불과했다.



야당에 주사파 750명이 암약하고 숫자까지 들이밀었다가 야당이 눈에 불을 켜고 항의하자 이번엔 여당에도 포함된 숫자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자 팔짱 끼며 콧노래 부르던 검찰이 이건 또 뭐야 박홍을 소환했지만 검찰마저 "새로운 사실이 없다."고 돌려 보냈지만 그래도 박홍 총장은 주사파 탈춤을 추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추임새에 신들이 났다. 어느 전향한 주사파인지는 모르지만 난데없이 워드로 찍힌 주사파의 참회 편지를 들고 읽으며 그는 신파극을 연출한다. 제자의 슬픈 고백에 눈물 흘리는 교수의 애틋함은 그 몇 분 후 헐크의 광폭함으로 변신한다. 서강대학생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한 데 대해 "이런 똥파리같은 놈들이! 아들이 애비더러 나가란다고 아버지가 나가는 것 봤어?"


88년부터 94년까지의 모든 대학 총학생회장이 주사파였다고 우기거나 주사파가 3만 명이 넘는다고 고함을 지르거나, 대학 교수 중에도 북한 돈 받고 공부한 놈이 있다고 발악을 하거나 그의 모든 주장에는 '구체성'이 없었다. 로만 칼라를 입은 신부라는 신분이 그의 진실의 근거였을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주사파가 많이 있었다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되, 그들은 그의 착각대로 바이러스도 아니고 어디에서 침투한 이들도 아닌, 사상의 자유 속에서 그들의 논리를 펴고 공박당할 권리가 있는 공화국의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깡그리 무시했다. 그저 그에게 주사파는 몇만인지 몇천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없애야 할 마귀들이었던 것이다. 마치 "죽여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알아보신다,."고 외쳤던 유럽 중세의 사제처럼 말이다.

한 기자가 끈질기게 물었다. " 주사파의 배후에 사노맹이 있다는 증거를....... " 그러자 박홍 신부는 특유의 제스추어를 취하며 신부로서는 차마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 답답하네.. 사노맹이건 주사파건 살모사와 코브라의 차이예요. 같은 독사들이라니까...." 그때 나는 이 말을 들으며 60년대 미국의 인권 운동이 한창일때 한 흑인 주일학교에서 폭탄이 폭발 , 수 명의 흑인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당시 KKK단의 대변인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 거사를 한 것이 누구이든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우리가 방울뱀을 죽이는데 새끼와 어미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 적어도 박홍은 그 순간 신부가 아니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죄인을 사랑하러 오신" 예수의 종도 아니었다. 그저 매스컵의 헹가레에 도취되어 "무슨일을 하는지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지리에 불과했다.

세상에는 많은 모지리가 있다. 박홍처럼 4월 흑싸리건 7월 멧돼지건 그놈이 그놈일 뿐인 모지리도 있고, 자신들을 비판하면 다 박홍같은 놈이라고 우기는 모지리도 있다. 사실 그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 모지리들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강화하는 일 뿐이리라. 남의 머리 속의 사고방식과 그걸 표현한 것 가지고 국가가 어떻게 된다고 우기는 이들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할 수 있어야, 사고가 마비된 채 "국민이 아니라 당원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치인이나 선거판에 방북해서는 김정일 장군님을 부르짖고서는 그걸 통일을 위한 위대한 행동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1994년 7월 18일 박홍은 주사파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고 우겼다. 그리고 그 유령은 유령이 아니라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인간들이었다. 또 그 유령(?)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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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7.19 월드컵 최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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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6년 7월 19일 월드컵 사상 최고의 기적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하지만, 역대 월드컵 사상 최고의 이변을 얘기할 때 아시아의 이 나라 축구팀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그 월드컵에 출전하기 불과 13년 전까지 전쟁을 치렀으며 그 나라를 폭격하던 적국의 비행사들이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고 그냥 복귀할 만큼 참혹한 전화(戰禍)를 겪었다. “그 나...라는 석기 시대로 돌아갔다.”는 것이 적국의 공군 지휘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런 참상 속에서 그들은 기적적인 전후 복구를 이루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축구팀도 그에 덩달아 강세를 보였다.

평균 신장 165센티미터 그러니까 나보다도 더 키가 더 작은 선수가 태반인 축구팀이었지만 전원이 100미터를 11초에 끊는다고 할만큼 재빨랐고 군 특수부대와 함께 훈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뛰어났다. 그들이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자 그들의 동포이되 철천지원수로 지내던 나라의 축구팀은 지레 겁을 먹고 출전을 포기한다. FIFA가 벌금까지 매겼지만 차라리 벌금을 내면 냈지 저쪽에 깨질 수는 없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보탤 설명이 없다. 마침내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만나게 된 팀은 호주였다.

호주팀은 작달막한 체구의 황인종 선수들을 조금은 우습게 보았지만 중립국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연전에서 그 높은 콧대가 작신작신 부러지고 만다. 이 공포의 아시아 대표는 호주를 6대1 3대 1로 KO시켰던 것이다. 아시아를 대표하여 월드컵에 나가게 된 나라의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66년 영국 월드컵에 나가게 된다.

냉전의 차가움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 북한은 주최국 영국으로부터 많은 수모를 겪는다. 영국은 애초에 북한이 예선에서 나가 떨어지기를 바랐다. 저 적성국 (영국은 6.25 때 미군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 팀에게 비자를 내 주는 것도 좀 껄쩍지근한데 쟤네들 인공기가 버젓이 휘날리고 국가도 연주해 줘야 하느냐. 하지만 FIFA 규정상 정치적인 이유로 출전팀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고, 몇 가지 조건을 건다. 국기 게양은 허용하되 국가는 결선 개막전과 결승전에만 연주한다는 식으로 피해갔고 정식국명도 DPRK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North Korea를 쓰도록 했다. 북한은 이를 다 받아들인다. 적어도 이때의 북한은 21세기에 “태극기는 죽어도 평양에 못 내건다.”고 고집 피우는 벽창호가 아니었다.

북한이 속한 조에는 소련, 칠레가 끼어 있었고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라 그랬는지 북한은 소련에게 맥없이 깨진다. 소련 팀의 전설적인 수문장 야신에게서 한 골도 뺏어내지 못하고 3대0으로 지고, 칠레에게도 끌려가다가 1대1로 비긴다. 종료 직전 박승진이 25미터 중거리슛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것만 해도 기적이었지만 남은 것은 이탈리아였다. 월드컵 두 번 우승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기세 좋은 푸른빛 유니폼 앞에 북한 선수들의 작은 키는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 할 파게티를 비롯해서 북한 선수들에는 댈 것도 아닌 으리으리한 이름들이 그라운드를 수놓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거세게 몰아부쳤지만 북한 선수들은 의외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특히 골키퍼 리창명은 곡예 수준의 선방으로 이탈리아의 슛을 막아 냈다. 자료화면을 보면 리창명은 신들린 것처럼 공을 쳐내고 받아 안으며 골문을 사수한다. 그리고 북한 선수들은 점프를 할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서로의 점프를 조력하는 ‘사다리전법’으로 이탈리아의 제공권에 도전했고 빠른 공격으로 이탈리아의 빗장수비를 노렸다. 그러던 중 행운이 찾아왔다. 이탈리아 선수 하나가 박승진에게 험악한 태클을 걸었는데 정작 박승진은 말짱하고 본인이 다리를 접질려 실려 나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선수 교체의 규칙이 없었다. 즉 이탈리아는 11대 10으로 싸워야 했던 것.

마침내 북한에게 서광이 비쳤다. 전반 42분이었다. 헤딩으로 길게 넘어온 공을 박두익은 그대로 강하게 슛했고 기겁을 한 이탈리아 골키퍼 알베르토시의 사력을 다한 다이빙도 헛되이 공은 이탈리아 네트에 꽂혀 버린 것이다.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기적을 낳은 골이었다. 이탈리아는 노도와 같이 북한 수비를 휘몰아쳤지만 리창명 골키퍼는 그날 확실히 접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1대0. 한 달 전 이탈리아의 복싱 챔피언 벤베누티는 남한에 가서 타이틀을 뺏기고 왔는데 이젠 북한팀이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을 눌렀다. 남과 북에 뺨맞고 걷어차인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국회에서 그 패인이 다뤄지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8강전에서도 3대0으로 앞서나가다가 경기 운영 미스로 역전패했지만 이때의 북한은 정말로 당당했다. 영국 정부는 월드컵 기념 우표에서 인공기를 빼 버렸지만, 스탠드에서 양복을 입은 조선인민공화국 외교일꾼이 휘두른 인공기는 위풍당당했다. 자기 나라 정식 명칭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북한이 예선을 치른 미들스버러 시민들은 이 기적의 코리아인들에게 환호했고 8강전 때에는 수천 명이 원정을 가서 ‘코리아’를 부르짖으며 응원했고 거창한 파티까지 열어주며 북한의 선전을 치하했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북한 선수들의 기념품 갖기에 혈안이 됐고, 인공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덩치 큰 축구의 종갓집들에 기죽지 않고 이겼고 졌어도 당당했던 북한 선수들은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였던 것이다.

월드컵 최대의 기적..... 북한이 이탈리아를 울린 날, 1966년 7월 19일이었다. 이날 한반도의 북부는 라디오 생중계를 들으며 뒤집어졌었다. 그로부터 36년 뒤 남한이 이탈리아를 물리쳤을 때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1980.7.20 김사왕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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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내 인생의 명승부에서 슬쩍)

1980년 7월 20일 김사왕의 패배

1980년 7월 20일 성지곡 수원지 풀장에 가서 쿤타 킨테처럼 새까맣게 되어 집에 돌아온 이후 TV 앞에 붙박혔던 날이다. 그날은 김사왕이라는 복서가 WBA 페더급 챔피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를 국내로 불러들여 한판 대결을 벌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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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한국 복싱계에는 내로라 할 KO왕들이 많았다. 김태식이 루이스 이바라를 요즘 말로 ‘떡실신’시키고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 이름에서부터 도끼 같은 포스가 물씬 풍기는 박종팔의 주먹에 동양권 선수 태반이 거품을 문 채 나뒹굴었고, 스트레이트밖에 칠 줄 모르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으나 주먹 하나는 살인적이었던 미남 복서 최충일이 연속 KO 행진을 벌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사왕은 그 철권들 가운데에서도 발군이었다. 그는 일종의 만화 주인공같은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그의 본명은 사왕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복싱에서 왕이 되겠다는 뜻으로 그는 嗣王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고 했다. 자세히 알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치렁치렁한 문신이 그 몸을 휘감고 있었던 걸로 비추어 그의 과거가 해맑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어찌 되었든 복싱 선수로서 그는 대단한 주먹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굉장한 맷집의 소유자였다. 실컷 두들겨 맞다가도 대수롭지 않게 씩 웃고서는 롱 훅 한 방으로 상대를 실신시키는 괴력의 소유자였고 그 해의 7월 20일까지 단 한 번도 다운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상대를 몇회에 KO시키겠노라 예고를 하고 그 예고를 적중시키는 신통력(?)까지 선보였으니 이토록 만화같은 실존 인물도 찾기 어려우리라.


7월 20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김사왕이 도전장을 내민 이후 페드로사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몇 번씩이나 일정을 미루었고 몇 개의 날짜가 허수로 흘러 버렸다. 그 사정은 짐작이 어렵지만 당시 언론은 페드로사가 김사왕의 주먹이 너무나 무서워서 피하는 것으로 분석했고 7월 20일 경기가 최종 결정되었을 때 만화가 김철호씨는 챔피언 김태식이 "사왕아 한 방에 보내 버려~" 라고 김사왕을 부추기는 가운데 "연기 금지! 7월 20일 경기할 것 - WBA"라는 벽보가 붙은 앞에서 페드로사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카툰을 그렸다. 더구나 알폰소 사모라 (홍수환에게 타이틀을 빼앗아 갔던)에게 단 6분을 견디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는 페드로사의 유리턱까지 소문에 가세하니 완연히 '승리는 우리 것'이었다.

바야흐로 시꺼먼스 말라깽이 페드로사의 가냘픈 주먹을 툭툭 맞아 주다가 한 방에 안드로메다행 은하철도 999를 태워 버리고 로프에 올라서서 "내가 참피온이다"라고 부르짖는 호연지기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날이었다. 실제로 김사왕은 자주 그랬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김사왕의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자신의 주먹과 깡다구에 대한 믿음, 기필고 사각의 링의 제왕이 되리라 이름까지 바꿔 버린 결의가 그의 몸에 실려 있었다. 문제는 그 자신감이 페드로사의 몸에 미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의 열악한 현장 마이크와 부실한 14인치 TV의 오디오를 통해서도 김사왕의 스윙 소리가 들릴 정도였지만 그 무서운 스윙은 페드로사의 살갗조차 제대로 건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페드로사의 카운터 하나가 작렬했다. 김사왕의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펀치였는데 어 어 하는 웅성거림이 일기가 무섭게 김사왕이 두 팔을 번쩍 치켜들더니 심지어 한 번 쳐 보라는 듯 가드를 내리고 몸을 내미는 게 아닌가. 역시 김사왕!

"문제 없습니다 김사왕 선수~ 네 맷집도 세계 최강 아니겠습니까?"

그때 캐스터의 말이 그랬다. 맷집에도 세계 최강이 있을까? 그때 같이 TV를 보던 동네 아저씨가 그 말을 들으며 "매에는 장사 없는데 ....."라고 불안하게 한 마디 했다가 인민재판 수준의 다구리를 당했다. 재수없는 소리할 거면 나가 술이나 먹으라고 어른이고 애고 악을 썼다. 아직도 '승리는 우리의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출발은 불안한데 믿음은 커져만 갔다. 괜찮아 괜찮아 사왕이 쟤 원래 저래..... 불안해서 그랬을까. 우리는 그 믿음에 기대게 되었고 종국에는 기대가 현실을 왜곡시키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우리 일행 뿐이 아니었다. 이철원씨로 기억되는 캐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김사왕 선수, 저렇게 고전 끝에 역전시켰던 적이 많죠?"
"페드로사 선수 도망다니다 보니 지쳐 보이는데요......"
"김사왕 선수 원래 저럽니다 걱정 마십쇼." (해설자)

권투의 격언에 턱은 맞을수록 약해지고 복부는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특히 김사왕은 복부가 강하기로 유명했다. 보디 공격을 받으면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를 부르짖기라도 하는 듯 배를 보란듯이 내밀고 들어가는 것도 몇 번 보았다. 이제는 맷집을 자랑할 게 아니라 주먹 자랑을 좀 보고 싶었는데 환장하게도 김사왕의 주먹은 페드로사의 유리턱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김사왕의 불운 탓이 아니었다. 페드로사가 김사왕을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은 5라운드를 넘기면서부터였다. 지쳐 가는 것은 김사왕이었고 매맞으면 맞는대로 움찔움찔거리면서 제대로 아픈 시늉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8라운드. 페드로사의 한 방이 제대로 김사왕의 턱에 꽂혔고 김사왕이 몇 발자욱 물러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페드로사가 달려들자 김사왕 역시 지지 않으려는 듯 맞대응을 했는데 그 2초 뒤...... 김사왕은 배를 잡고 매트에 나뒹굴고 말았다. 거미의 독침에 맞아 버둥거리는 매미처럼 신이 내린 펀치와 맷집을 자랑하던 김사왕은 생애 첫 다운을 당하고 열 번 카운트를 누워서 들어야 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김사왕이 벌떡 일어나 파이트를 외친 후 페드로사를 때려눕히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끝이었다. 열이 아니라 스물을 세어도 일어나지 못했던 그의 늘어진 팔에 단호한 글씨로 새겨진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일심 (一心).

김사왕의 가장 큰 적은 승리의 신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맞아도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믿음만큼 강한 주먹이 어디 있으며 내 주먹이 제대로만 들어가면 누구를 이기지 못하랴 하는 호기만큼 든든한 빽이 어디 있으랴. 그 일심이 7월 20일 이전까지 김사왕을 만들었지만 결국 7월 20일 이후의 김사왕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김사왕은 그에게 승리의 쾌감을 안겨 주었던 방식을, 훗날 19차 방어까지 성공한 페더급 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에게 한치도 어김없이 적용할할만큼 한결같았고 결국 매우 혁신적인 모습으로 생애 첫 KO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것도 내가 지켜보았던 허다한 복싱 경기 가운데 최악으로 인상 깊은 참담함으로 점철된.......

재기할 능력이 충분한 선수였지만 그는 끝내 그 패배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링 위에서 그만한 자신감을 보여 준 선수가 또 있었나 싶었던 김사왕은 버림받다시피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스포츠면이 아닌 사회면을 장식함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토록 강력했던 그가, 승리를 향한 일심으로 가득했던 그가 , 80년대 식으로 표현하면 혁명적 낙관주의에 불타올랐던 그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그가 사실은 심약한 선수라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지 변하기 어려운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또 한 번 사회면을 장식했다. 사회에서 만나 믿고 의지하며 의형제까지 맺었다는 이의 손에 그만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승리의 기쁨은 사람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더욱 더 흔하게는 사람을 좁게 만든다. 승리의 기억은 달콤하지만 패배보다는 배우는 것이 적다. 그래서 승리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을 때 자신의 목을 찌르는 칼이 된다. 얼굴 붓기 하나 없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페드로사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던 김사왕을 추억하며, 또 7월 20일 이전의 그 가공할만큼 멋졌던 김사왕을 오버랩시키며, 나는 그 경기를 내 인생의 명승부 하나로 기록한다. 멋있어서가 아니라 신나서가 아니라 씁슬한 가르침을 매캐하게 전하는 경기여서다,. .

고 김사왕 선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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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7.21 붉은 거미 살인마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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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7.22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아버지 과레스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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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7.23 조선을 사랑한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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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7.24 로보트 태권브이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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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7월 24일 로봇 태권브이 개봉

지난 4월 총선 당시 표절 시비가 붙었던 모 후보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다음과 같은 ‘노가바’를 흥얼거리며 킬킬거렸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달려라 달려 문도리코 날아라 날아 콘트롤 브이 복사로 따낸 학위 체육학박사 석사학위 논문은 아닐까보냐 원본을 곧게 앞으로 펴서 복사집 향해 달려나가면 멋지다 신난다 구캐의원 니꺼다 무염치 우리 친구 콘트롤브이 빰빠라..... 빰빰밤 빰바라빰빰.”

새삼스레 지금도 여의도에서 그 명함 파고 버티고 있는 의원님의 과거를 들출 생각은 없다. 자칭 진보랍시는 사람들도 국회의원에 목매고 있는 마당에 구태여 그이를 끌어낼 이유도 없다. 단지 저 가사를 끄집어내는 건 그 멜로디를 알고 있는가, 알더라도 저 가사와 멜로디의 조화를 이해하는가, 그리고 빰빠람빰빰빰 손나팔을 불며 신나 할 수 있는가를 묻기 위해서다. 그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 또래다. 나이를 넘어 ‘로봇태권브이’의 감동과 설렘과 흥분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로봇태권브이의 역사적 개봉이 1976년 7월 24일이었다. 못생긴 외모에 땅딸보였던 카프 박사는 세계 정복의 못된 꿈을 꾸고 ‘붉은 제국’ (그 이름 참.....)을 창설한 후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대머리 김 박사를 암살한다. 이 암살의 선봉에 선 것은 카프 박사의 인조인간 딸 메리. 하지만 김 박사는 비장의 무기 로봇 태권브이를 완성하고 있었고, 아들 훈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죽는다. 각국의 과학자와 걸출한 스포츠 스타들을 납치하여 레슬링 로봇 등 캐릭터 있는(?) 로봇들을 구비하여 세계 정복의 꿈을 꾸던 카프 박사와 훈이가 조종하는 로봇 태권브이는 사투를 벌이고 결국 정의는 승리하고 우리 편이 이긴다.

이때 툭하면 튀어나왔던 주제가가 맨 처음에 언급했던 노가바의 멜로디였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정의로 뭉친 주먹 로봇 태권,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적진을 향해 하늘 나르면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사실 태권브이는 마징가 제트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으며 철이의 파트너 영희의 등장이나 그 아버지 윤 박사의 캐릭터는 마징가 제트의 표절과도 같았다. 마징가 제트가 1차적으로 방송이 끝난 것도 1976년 2월이었으니 그 외형에 관한한 거의 일본의 마징가 제트의 복사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틀린 점이 있었다면 마징가 제트가 사용했던 그 변화무쌍 다재다능의 무기가 별로 없이 오로지 태권도로만 즐겨 승부했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 열악했던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의 결과다. 레이저 빔이든 전자도끼든 마징가 제트의 친구 비너스 로봇의 유방 미사일이든 그걸 그려내려면 무지하게 돈이 들었고 그저 몸으로 때우는(?) 태권 동작이 돈을 아끼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기‘ 태권도가 전국적으로 전파되던 시절 태권브이의 태권 동작을 돈 아끼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로봇이 돌려차기를 하고 정권찌르기를 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 로봇이 검도로봇을 물리치고 레슬링 로봇을 박살낼 때 빰빠람빰빰빰 손나팔을 부는 건 그야말로 어린이들의 특권이었다.

태권브이는 7월 24일 개봉 후 18만 명에 이르는 관중을 동원하는데 이는 그 해의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었다., 나 자신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추억의 힘을 빌어 21세기에도 재개봉된 바 있는데 여기에는 기구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1탄 2탄 3탄 까지 나왔고, 그 원화를 그리던 실력자가 회사를 옮겨 만들었던 마루치 아라치에게 일격을 당한 뒤엔 로봇 태권브이와 황금날개 123으로 다시 그 명성을 회복했던 로봇 태권브이이고 우리 모두의 추억이 서렸던 애니메이션이지만, 무려 30년 가까이 그 필름은 우리 곁에 없었다. 마치 우리 영화의 시조라 할 나운규의 <아리랑>이 남아 있지 않듯이 말이다.

촬영 중 만난 한 수집가는 자신의 일생 일대의 수집품으로 로봇 태권브이 필름을 들었다, 그는 충북 제천의 한 낡은 극장 창고에서 그 필름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그게 2001년도였는데 내가 알기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태권브이 필름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몇 년 뒤 영화진흥공사 창고에서 그 필름이 발견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로봇 태권브이는 디지털 복원되어 대중 앞에 다시 선보이게 된다. 나는 별로 흥미없어하는 아들을 억지로 끌고 그 영화를 보러 갔었다. 하기사 온갖 세련된 그림에 눈이 길들여진 아들 눈에 아무 무기 없이 돌려차기와 앞차기만 하고 있는 로봇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라고

그나마 유감스럽게도 로봇 태권브이 2편 우주대작전과 3편 수중특공대는 그 필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매니아 가운데 해외로 흘러갔던 태권브이의 디븨디판을 구비한 이가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은 있지만 필름으로 남아 있는 사례는 아직 들은 바 없다. 그래서 나는 2탄에서 1탄의 악당 카프 박사의 인조인간 딸 메리가 그 간절한 소망 끝에 외계의 적들의 대폭발로 기인한 에너지를 받으면서 인간이 되는(?! 뭐 이런,.,,,#$$^^&) 감동적인 장면과 3탄에서 한쪽 팔을 잃어버린 채 하늘을 나는 태권브이의 모습을 공개적으로는 다시 볼 수 없다.

태권브이 뿐이 아니다. 너무나도 바쁘게 달려온 우리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장식하고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으며 그 후로도 수십 년 뒤에도 그 주제가를 흥얼거리거나 토막 스토리를 읊으면 누구나 추억에 젖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클로버문고’도 그렇고, 어머니가 귓방망이를 끌고 갈 때에도 한 자라도 더 보려고 애썼던 만화방의 산더미같던 만화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대다수다. 그나마 21세기에 30년 전 내 또래가 된 아들과 그 추억을 공유할 수 있었던 로봇 태권브이가 다행이라고나 할까........ 1976년 7월 24일 로봇 태권브이가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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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7.25 저승사자 나주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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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7.26 두 강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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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7.27 수상 다나까와 동경지검특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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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와 동경지검특수부

일본의 역사에서는 귀족이나 사무라이 등 웬만큼 번듯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 말짱 평민이나 그 이하 계급으로서 최고 권력자에 오른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근대화 이후로도 정치인은 그렇고 그런 집안끼리 나눠먹고 물려먹는 직업 중의 하나였고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는 그 범주에 끼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민 가운데 최고 권력자에 등극한 대표적인 사례 ...
가운데 두 명이 풍신수길, 즉 도요도미 히데요시와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이라고 들었다. 다나까 가꾸에이는 그 성부터 평민스럽다. 다나까는 메이지 유신 이후 평민도 성을 갖게 되면서 닥치는 대로 붙여진 '밭 가운데'(田中)의 흔한 성 아닌가.

고등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혈혈단신 상경해 실업계 및 정치계에서 성공을 거둔 다나까는 곧잘 역시 서민 출신으로서 일본을 호령하는 태합까지 올랐던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곧잘 비교됐다고 한다. “현재의 태합”이나 “서민 재상”으로 불리우며 취임 직후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당시에는 지지율이 70% 전후를 기록했다고 한다.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조사한 1000년 이후 일본 역사상 정치적 리더 선호도 조사에서도 당당 4위를 기록한 바 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일도 열정적으로 했고, 업적도 적잖이 남겼지만 일본 내 금권 정치의 막전막후 실력자로서 해악도 꽤 끼친 양면을 가진 그에게는 재미 있는 별명이 있었다. '컴퓨터를 단 불도저'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우리 가카께오서 스스로를 평가하시며 썼던 그 표현이다. 황공하옵게도 '컴도저'라는 말의 지적소유권은 가카에게 있지 않다.

이 인기 높은 서민 재상, 현재의 태합 전하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을 물러난 뒤에도 막강한 파벌의 거두로서 일본을 주무르던 그가 1976년 7월 27일 거꾸러진다. 그의 목을 통타하여 말 아래로 떨어뜨린 상대방 기사는 동경지검특수부라는 이름의 검찰 조직이었다. 애초에 시작은 미국의 록히드사였다. 록히드사는 자사의 항공기를 팔기 위하여 일본과 유럽 각국 등 미국의 우방의 정치인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이것이 점차 마각을 드러내는 바람에 여러 나라의 정계가 쑥대밭이 됐던 것이다. 가장 큰 쑥대밭은 일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쑥대밭은 가꾼 주체(?)가 바로 동경지검특수부였던 것이다.

"만약 이 수사에 실패한다면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때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이다." 수사에 착수했던 동경지검 특수부의 한 검사의 각오다. (책 "동경지검특수부" 중에서 - 일본 검사들의 말은 거기에서 따온다) 드라마 <추격자>에서 "검사는 검사받으며 일한다고 해서 검사"라는 명대사가 나오지만 적어도 동경지검 특수부는 그 누구에게도 숙제검사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현 수상이 "수사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느냐?"고 애타게 물었을 때에도 마흔 셋의 검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한다. "총리대신 각하. 안되겠습니다."

이런 깡다구는 평검사들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상층부의 완강한 방어막으로부터 기인한 바 컸다. 검찰총장 후세 다께시는 이렇게 외친다. "모든 책임은 내가진다. 당신들 (수사 검사들)은 사표 쓸 걱정 같은 건 하지도 마라." 기자들에게 촌지 이벤트나 벌이고 위에서 하명한 수사를 검사들의 밥그릇에 덜렁덜렁 놓아 주는 것이 주임무인 어느 나라 검찰총장과는 그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검사들도 단순한 정의감을 넘어서서 일종의 위기감 섞인 사명감으로 자신들의 목을 좌우할 수도 있는 거악의 스캔들에 맞섰다. " 특정한 피해자가 없는 독직사전을 적발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지만 그것이 만연하면 국가자체가 붕괴한다." - 가와이 노부따로 특수부장.

수사팀은 다나까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체포 작전 전날 오후까지도 법무대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장관은 다나까 파벌에 속한 정치인이었지만 특수부의 서슬에 몰려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다나까는 수갑을 찬다. 공판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일화. 뇌물을 준 업자를 대라는 공판 검사 홋타의 추궁에 "기억이 안난다." 신공으로 (이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맞서자 홋타는 이렇게 말하며 다나카의 뒤통수를 친다. "아까 하신 당신에게 유리하게 진실하신 것도 확실한 기억이 아니로군요." 순간 다나카는 만년필을 떨어뜨렸고, 그 소리는 폭음과 같았다고 한 평론가는 기록했다.

1976년 7월 27일 "정치는 돈과 머릿수로 하는 거야."(이런 당권파같은 놈!) 라며 일본 천지를 호령하던 전 수상 다나까 가꾸에이는 새파란 검사들이 내민 영장 앞에서 고개를 떨궈야 했다. 왜 한국에는 그런 검사가 없을까 탄식이 귀에 들린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아무렴 검찰청에 그런 사람이 없을까. 다음과 같이 격정을 토로한 검사도 있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와 함께 울어주고 성역없이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하는 검찰을 사랑한다. 그래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눈치를 슬슬 보면서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검찰을 미워한다.” 가히 동경지검특수부 찜쪄먹을 기세다. 그는 또 고위공무원 구속 때 법무부장관의 승인 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은진수라고 한다. 가카의 남자로서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을 저축은행으로부터 받아처먹고 감옥에 갔다가 소리소문없이 가석방된 BBK 대책팀장 은진수. 그도 왕년엔 그랬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망치는 시스템이 문제고, 그 시스템을 '어쩔!' 하며 지켜보아온 우리가 문제다.

동경지검특수부도 좌절을 맛본 때가 있었다. 1954년 여당의 간사장을 체포하려 하자 법무대신이 지휘권을 행사하여 이를 가로막았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 법무대신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그 뒤 법무대신의 검찰 개입은 금기시되었고 동경지검특수부는 1976년 7월 27일 다나까 가꾸에이, '현재의 태합'을 그 집에서 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 국민들이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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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7.28 당산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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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7.29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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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7.31 날으는 작은 새들의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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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6년 7월 31일 날으는 작은 새들의 동메달

요즘 산하의 오역이 영 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올림픽인 것 같다. 올림픽 경기를 본 뒤엔 이기든 지든 그냥 자야 하니까. 어차피 올림픽 무대에 선 사람들은 각국의 1인자들이고 거기서 주어지는 메달이란 사람의 힘만이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하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만큼 값지지 않은 메달이 어디 있을까마는 1976년 7월 31일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한국 여...
자배구팀이 따낸 동메달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메달로서 그 영양가가 매우 높다 하겠다.

여자 배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64년 동경 올림픽 때였다. 전쟁의 참화를 완전히 극복하고 전쟁 이전의 국력을 회복했음을 과시하는 무대이기도 했던 이 올림픽에서 일본은 여러 개의 금메달을 따내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은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던 여자배구에서의 금메달이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과 질릴 정도로 강력한 수비로 ‘동양의 마녀’라고 불리운 일본 대표팀은 소련을 꺾고 금메달을 땄는데 이날 동경 시내에서는 통화량이 거의 없었고 시청률도 70퍼센트에 육박했다고 한다. 우리가 배구를 볼 때 가끔씩 듣는 ‘시간차 공격’은 바로 이때 일본팀이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리시브 토스 스파이크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 뒤 10여년 동안 일본 여자배구팀은 막강한 전력으로 세계를 주무른다. 76년 몬트리얼 올림픽에서도 일본은 단연 최강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 올림픽에는 ‘동양의 마녀’들이 한 팀 더 등장한다. 한국팀이었다. 그리고 이 한국팀은 원조 ‘동양의 마녀’ 일본팀을 꺾은 적이 있었다. 몬트리얼 올림픽 1년 앞두고 벌어진 프레 올림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적수가 없다 하던 일본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조혜정, 유경화, 정순옥, 윤영내, 변경자, 유정혜, 백명선 등이 주축을 이룬 한국 여자배구팀은 서양의 선수들보다는 평균 신장이 10센티 가까이 작았다. 주공격수 ‘날으는 작은 새’라는 별명의 조혜정은 불과 164센티미터였다. 요즘 164센티미터의 키로 배구를 한다면 세터로나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대성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키로 조혜정은 덩치들의 블로킹을 뚫고 자유자재로 스파이크를 날렸다. 또 한국 여자 대표팀은 64년 동경에서의 일본팀과 같은 악바리 근성과 투혼의 수비로 장대같은 서양 팀과 고무공같이 튀어오르는 쿠바팀을 상대해 나갔다.

첫 경기에서 소련에 첫 세트를 따내고도 3대 1로 역전패하면서 주춤했지만 ‘날으는 작은 새’들은 (원래 나는 작은 새들이라고 표기해야 맞지만 말맛이 안나서 걍 쓴다.) 동독과 쿠바에게 짜릿한 풀세트 역전승을 거둔다. 특히 동독전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한국 대표팀은 두 세트를 먼저 내 주고 벼랑 끝에 몰린다 가까스로 한 세트를 만회하여 2대2를 만들었지만 5세트에서도 13대 8까지 몰린다. 그때 세터 유정혜가 갑자기 뭐라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서 뭔가 찾기 시작했다. “부적이 없어졌어요!” 몸에 품고 다니던 부적이 떨어졌던 것.

부적을 찾은 뒤 유정혜는 이번에는 공격수 조혜정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언니 하나만! 하나만! 제발 힘을 내요.” 조혜정은 그 단신의 몸이 부서져라 스파이크를 때렸고 급기야 한국팀은 14대 13으로 대역전극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때 동독의 강스파이크가 터져나왔다. 공은 블로킹에 나선 한국 선수의 손에 스칠 듯 말 듯 한국쪽으로 날아갔지만 선심은 아웃을 선언했다. 문제는 터치 아웃이냐 그냥 아웃이냐. 그 순간 주심은 아웃을 선언했다. 하지만 서브권을 되찾아온 이후 세터 유경화가 교체되어 나왔다. 그녀는 tktlf 새끼 손가락을 심하게 다쳤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척 하고 있었다. 즉 터치 아웃이었던 것이다. 이 오심(?)으로 한국은 동독을 꺾는다.

조혜정은 이후 쿠바와의 경기에서 무릎을 심하게 다친다. 의사 소견으로는 “뛸 수 없다.”였다. 아쉬움을 달래며 얼음찜질을 하던 그녀의 눈에 막내 백명선이 보였다. 조혜정은 백명선에게 “메달 따서 연금받으면 뭐할 거니?”라고 물었다.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뜻밖에 무거웠다. “언니. 저 동생이 여섯 명인데 학비를 제가 대야 해요.” 이 말을 듣고 그래 고생해라 할 언니가 어디 있으랴. 결국 조혜정은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경기에 출전한다. 첫 세트 악전고투를 했지만 끝내 패했고 더 이상 점프조차 어려운 조혜정은 교체되어 나왔다. 그리고 프레 올림픽에서의 패배 이후 한국팀을 철저히 연구해 온 일본팀에게 패하고 만다.

하지만 코칭 스태프는 동메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일본에서 조혜정을 뺀 것도 그 전략의 일환이었다. 헝가리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한국은 3대 1로 승리한다. 이 경기에서 유독 맹타를 휘두른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여섯 명의 학비를 대야 했던 백명선이었다. 동메달. 그것이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딴 메달이었다. 열 두 명의 선수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울었다. 그 가치를 인정해서일까. 그들은 몬트리얼 올림픽 후 베풀어진 카 퍼레이드에서 금메달리스트였던 양정모와 같은 예우를 받은 것이다. 조혜정에게는 ‘날으는 작은 새’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것을 붙인 건 한국 기자가 아니라 외국 기자였다. 영어로 “Flying Little Bird"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한국 기자가 컨닝(?)을 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날으는 작은 새가 어찌 그 하나 뿐이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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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8.1 안네의 마지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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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8.2 통킹만과 맥나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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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3 두번째 통일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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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4 내 귀에 도청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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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8.5 손창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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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8년 8월 5일 손창호 사망

어렸을 때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노래를 하라고 시키면 내 또래 아이들의 입에서는 CM 송이 많이 흘러나왔다. ‘동구 밖 과수원길’은 너무 심심하고 유행가를 따라부르기엔 좀 버거웠던 아이들에게 만만한 것이 CM송이었던 까닭이다. “열 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브라보콜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이며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라든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카시아껌” 등등 다양한 CM송들이 단가처럼 불리웠는데 그 가운데 내 기억에 남는 CM송 가운데 하나가 ‘시모나’다. “약속 시간 5분 늦게 달려갔더니 무뚝뚝한 그 남자 화가 났다네. 아차 시모나가 생각이 나서 시모나를 사다주니 화가 풀렸네. 과자 속의 아이스크림 해태 시모나.”

시모나는 붕어빵처럼 과자 속에 아이스크림이 든 빙과류의 시조격이라 할만한 제품인데 (그 전에 뭐가 있었다면 할 말 없음. 지적 바람) 그 CM송과 CM 그림은 매우 유쾌했다. 헐레벌떡 달려가는 여자와 삐져버린 남자, 아차! 할 때의 여자의 똥그란 눈, 아이스크림 보고 헤헤거리는 남자를 마치 그 가사를 그리다시피 보여 주었던 CM이었다. 이때 여자는 오늘날에는 푼수 비슷한 중년 여자로 즐겨 브라운관에 등장하지만 그때만 해도 청춘스타로 그 이름이 하늘에 닿았던 임예진이고, 남자 주인공이 '뚱띠‘ (어렸을 적 나와 내 친구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손창호였다.

손창호는 이미 1970년, 즉 내가 태어나던 해에 탤런트로 데뷔했었다. 그리고 70년대를 풍미한 ‘얄개’ 시리즈에 등장했고 나에게 ‘최유리’라는 이름과 더불어 요즘 말로 하면 ‘아이돌’ 배우로 기억되는 ‘이승현’을 골탕먹이거나 되레 골탕을 먹는 심술맞은 선배로 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 전 페북 모임에서 그때 이승현의 애를 태우던, 공부 잘하고 얼굴도 이쁜 범생이였던 주희 역을 맡으셨던 여배우를 중년의 모습으로 만났을 때에도 머리가 천정에 닿도록 뛰어올랐거니와 이승현, 손창호, 진유영, 강주희, 임예진, 이덕화 등등의 이름은 나의 초딩 시절을 떠올려 주는 키 네임 (Key Name)들로 남아 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그의 슬픈 최후 직전 촬영됐던 <병원 24시> 편이다. <병원24시>는 제작진에게나 촬영 대상에게나 심지어 그 프로그램을 감수해야 할 외주 담당 PD에게나 매우 힘겨운 프로그램이었다. 흔히들 병원에 가 보면 건강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고 하거니와 일삼아 그 아픔과 불행의 현장을 취재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며, 그를 어떻게든 스토리에 녹여 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고충은 며느리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손창호가 나왔다! 그는 당뇨와 신부전증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왕년의 ‘뚱띠’를 못알아 볼 만큼은 아니었지만 시커먼 얼굴과 허공을 향할 뿐인 흐린 눈동자, 시한부 통고를 받았음에도 담배를 피워대던 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저 사람 어쩌다 저렇게 된 것인가. 영화 감독을 해 보겠다고 <동경 아리랑>을 찍었다는 얘긴 까마득하게 들었고, 그 영화가 재산 들어먹고 피폐해지도록 망쪼가 들었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어떻게 저렇게 될 수가. 이경규도 서세원도 그랬다가 살아났는데..... 왕년의 그 손창호가 부인과도 이혼하고 늙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수발을 받으며 시들어가고 있었다니. 영화판 소식에 정통한 선배 말로는 손창호의 성격이 워낙 좀 독불스러운 면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꽂히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했고, 좀 고까운 일을 만나면 부드럽게 넘어가기보다는 고집을 세우다가 때려치우게 되거나 그를 강요당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 24시에서 해 보고 싶은 몇 가지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 “월급쟁이를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어렸을 때에는 하이틴 스타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스타로 살았고, 말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맞닥뜨린 죽음 앞에서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는 롤러코스트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 평범한 삶, 고만고만한 직장에서 수더분한 마누라 만나 아들 딸 낳고 월급이 적니 많으니 하루에 몇 번씩 사표 썼다가 찢고, 적금 타고 집 장만하고 애들 좋은 대학 가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절실하게 부러워졌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천상 월급쟁이가 될 팔자는 못되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연기 학원에서 연기 지망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할 때의 그 눈빛은 병원에서의 그것과 보름달과 반딧불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를 마지막 본 연기자로서의 모습은 베스트 극장의 이름 모를 한 편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본인 역으로 나왔다. 일본에서는 하층 백수 건달이었지만 사업가로 한국에 건너오면서 기생관광을 비롯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데 하루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엄청나게 아부하던 한국인 사업가 앞에서 조센징 운운하다가 (한국인 사업가는 김용건씨였다. 배우 하정우의 아버지) 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는다. 술에서 깬 다음날 걸려온 한국인 사업가의 전화를 받으면서 손창호는 먼저 사과하지만 돌아온 것은 더욱 정중하고 비굴하기까지 한 한국인의 사죄..... 손창호가 아주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드라마는 끝난다. 하지만 그 넓적한 얼굴에서 피어난 잔인하도록 비열한 미소는 선명히 내 기억의 박물관 속 한켠에 큼직하게 걸려 있다. 그는 명연기자였다.

그 딸 손화령이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언젠가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벽제 납골당에 계세요. 초라하고 조그만 공간에요. 그때는 저도 어렸고 사정도 어려워서. 꼭 성공해서 넓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모셔야겠지요. 그게 제 목표예요.”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좋은 아버지일 수 없었던 고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도 장래 희망을 ‘배우’로 삼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피는 못속이는지 배우가 됐다. 그녀가 아버지의 영광을 이어받기를, 그리고 그 그림자는 결코 물려받지 않기를 바라 본다. 손창호의 연기를 보며 말똥말똥 스크린으로 빠져들었던 유년 시절을 추억의 자산으로 간직한 이로서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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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7일 어느 용감한 기독교인의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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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5년 8월 7일 어느 용감한 기독교인의 소천

한국 기독교의 본고장이라면 아무래도 평안도다. 통상을 핑계로 한 해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이 양이들. 내 가만히 두디 안카서!"라고 일갈하며 폭탄을 들고 그 배에 올라 포로가 된 조선 관리를 구출해 왔던 간 큰 사내 박춘권이 '주님의 종'이 된 얘기는 즐겨 운위되거니와 조선의 여러 도 가운데 평안남북도 일원의 기독교세는 실로...
당당했다. 진남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온누리교회로 그 명망이 드높은 하용조 목사가 진남포 출신이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나의 은인이며 사상은 달라도 위대한 애국자"라는 극찬을 들었던 손정도 목사도 진남포에서 목회를 했다. 그리고 1927년 한 기독교인이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변선환이다.

그는 모태신앙은 아니었고 열여덟살 때쯤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그를 기독교인으로 바꿔 놓은 사람은 신석구 목사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이후 기독교의 암흑 시기에도 신사참배와 일본의 전승 기념 예배를 거부한 감리교 목사였다. 해방 후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서 월남 권유를 들었지만 "내 양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북한에 남았던 그는 매우 독특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목사 가운을 입지 않았고 로만 칼라도 하지 않은 그는 항상 두루마기를 펄럭이고 다녔다. 또 동양적인 것이라면 눈살부터 찌푸리고 손을 젓던 많은 목사들과는 달리 동양 경전에 해박했다.

신석구에 따르면 유교는 기독교 이전의 유태교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대중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한 일종의 '몽학선생'이었다. "다른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우치게 하여 예수께로 소개하는 '蒙學先生'이요, 예수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참 길이시니...." (감신대 이덕주 교수의 글 중에서) 이만해도 배타성에서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한국 개신교에서는 별종이라 할 만했다. 신석구 자신 타종교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변선환은 자신이 '신앙의 아버지'라 불렀던 신석구를 넘어선 청출어람을 창출하게 된다. 신앙에서도 "호부에 견자없다"는 말이 성립하나보다.

또 감리교는 신석구 목사 외에도 타 종교에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 목사들의 전통이 있었다. 유학자 출신의 최병헌 목사는 이미 1912년에 유불선과 기독교의 교리를 설파하는 4인의 대화 형식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고 양주삼 목사는 비슷한 시기에 구약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던지고 다녔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신석구가 있었고 결국은 변선환이 나온 것이리라.

이미 스위스 바젤 신학대학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그의 방 벽에는 중국 선불교의 새 장을 연 육조혜능 선사의 '神秀의 偈'가 걸려 있었다고 하거니와 "영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불교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들의 대화"를 스스로 불러 일으켰던 그는 "종교의 등불은 달라도 그 빛은 하나"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기독교 밖에서도 구원은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은 신학적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일부 꼴통 개신교인들의 엉덩이에 찔린 바늘과 같았다. 당연히 그들은 미쳐 날뛰었다.


"예수를 거부한 땅이기에 쓰나미가 왔다."는 악마적 설교로 유명한 금란교회 목사 김홍도가 그 선봉이었다. 그의 말은 매카시즘과 무식함과 종교재판관의 사악함이 골고루 곁들여져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북한으로 가지 않고 국가를 혼란시키려 하는 것이나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교회를 파괴하려 드는 것은 사탄의 간계다. 그들이 교회 밖으로 나가서 학문의 자유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변선환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기로 한다.

1992년 5월 7일 20세기의 ‘종교 재판’이 열린다. 재판정은 어디 감신교 관련 건물도 아니고, 기독교회관도 아닌 김홍도 목사가 시무하는 금란교회였다. 이미 재판이 아니라 십자가형의 선고장이었고 인민재판의 기독교식이었다. 신자들이 악을 쓰고 야유하는 가운데 스승의 무죄를 항변하는 감신대생들은 입이 틀어막혔고 끌려 나갔다. 여기서 감신교 재판위원회는 변선환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 처분을 내린다. 감리교회 목사직 파면은 기본, 신자 자격까지 빼앗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대학원생들이 하나같이 그에게 학위 지도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한 교수가 학생 6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이정배 교수)였던 감리교 신학대학장은 그로써 사탄의 졸개로 공식적으로 규정된다. 신석구와 최병헌이 이를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랴. 감리교의 시원이라 할 웨슬리는 또 이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1995년 8월 7일 "나는 한국에 실려온 병신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 분은 선교사가 오기 전부터 이 땅위에서 활동하고 계셨다."고 속이 다 시원하게 얘기하던 변선환은 그가 평생 해온 것처럼 서재 위에서 펜과 종이와 씨름하다가 홀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고는 "한일양국의 근대화와 종교"였다. 마지막 글을 쓰다가 느닷없이 찾아든 하늘의 명령 앞에서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머리 속에 떠올린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 말이 아니었을지. "동족끼리 종교인들끼리 싸우지 말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거대한 악마적인 권세와 싸우라' 그리고 제자들이 찾아오면 항상 찾았다는 우래옥 냉면집의 정다운 대화가 그가 떠올린 마지막 풍경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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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8 8888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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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8년 8월 8일 8888의 비극

영화 <왕과 나> 속에서 영국인 가정교사 안나는 세계 지도를 펴고 태국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가르친다. 그 지도 속에서 태국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작다. 이에 태국 왕세자가 분연히 항의하고 안나는 영국 또한 태국보다도 작은 섬나라라고 말한다. 그래도 왕세자는 태국이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라고 기염을 토하는데, 사실 더 재밌는 장면은 그 전에 등장한다. 태국의 눈으로 ...
본 세계 지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 지도에는 중국만큼 큰 태국이 있고 옆의 찌그러지도록 작은 나라 왕은 겁에 질려 도망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 나라는 버마였다.

버마는 태국의 이웃나라였고, 이상하게도 이웃국가끼리는 웬수인 법이라 태국과 꽤 오랜 기간 피튀기는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왕과 나>의 태국판 세계지도와는 달리 버마가 전반적으로 우세했다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 (지금 왕조의 이전 왕조)는 버마군에 의해 참혹하게 멸망당하기도 했다. 지금 태국의 국보로서 온 나라가 애지중지하는 에머럴드 불상도 버마와의 전쟁 와중에 꽤 오랫 동안 행방이 묘연해진 적이 있었으니 대체로 태국의 열세였다고 하겠다. 그만큼 버마는 동남아에서 방귀깨나 뀌는 강대국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가 독립을 이룬 뒤에도 버마는 아시아에서 그 발전 가능성에서 손꼽히는 나라였다. 비옥한 토지에 지하자원도 동남아시아에서 으뜸이었다. 땅덩이도 좁고 자원도 빈약한데다 전쟁까지 치룬 극동의 가련한 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였다. 위상도 그랬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나오기 45년 전에 이미 이 나라의 우 탄트가 UN 사무총장을 역임할 정도였으니 비록 총장의 직위가 국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대충은 짐작이 갈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 등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해 오던 버마에 강철 군화 자국이 찍힌 것은 1962년이었다. 아웅산의 동료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배웠는지 아니면 한국에 가르쳐 준 것인지 ‘버마식 사회주의’(한국은 한국형 민주주의)를 내세워 버마 전체를 질식시켜 간다. 이 네윈이 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달려와 위로를 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니 어지간히 오래도 해먹는다.

억압이 있는 땅에서는 저항이 있는 법. 주류 버마족에 맞서 싸우는 소수민족들도 그렇지만 버마 내부에서도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것이 군부 독재의 철벽 틈 사이로 새어나왔던 사건이 1974년 우탄트 시신 탈취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전 UN 사무총장 우 탄트가 사망하자 일군의 학생들이 우탄트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진행되는데 항의, 시신을 탈취하여 랭군 대학으로 옮긴 뒤 당국에 고인의 업적에 맞는 적절한 장례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버마 군부는 계엄령으로 대응하고 학생들을 짓눌렀다.

1988년이 왔다. 버마의 실권자 네윈이 정권을 잡았던 1962년만 해도 가엾은 눈으로 지켜보던 나라는 바로 그 전 해 민주화를 위한 홍역을 치르고 이제는 올림픽을 치른다고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그 해 봄부터 버마는 시끄러웠다. 3월. 랑군의 어느 찻집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패싸움으로 번져 수백 명의 경찰이 투입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큰 싸움이었는데 그 주도자 한 명이 방면된다. 아버지가 정부의 고관이었던 것.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군과 경찰은 하던 대로 학생들을 체포, 호송했는데 얼마나 꽉꽉 채워 넣었던지 그 가운데 41명의 학생이 질식사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기화로 버마 전국은 들끓는다. 그리고 마침내 26년 군부독재에 대한 포한이 마침내 터지는 날이 왔다. 1988년 8월 8일이었다.

버마 국민들은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과 승려들이 앞장섰고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군이 발포하자 돌을 던지거나 자전거 살을 화살 삼아 쏘면서 맞섰고 상당수의 공무원, 군인, 심지어 정보기관원들까지도 시위에 나섰다. 우리 귀에 역시 낯익은 아웅산 수지도 이때 등장하여 인민을 위한 임시 정부 수립을 목청껏 외친다. 필리핀에 이어 한국, 다음은 버마까지 피플 파워가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버마에는 군부가 있었다. 네윈은 8월 8일 이전에 정권에서 축출됐지만 이런 불길한 경고를 남긴다. ““민주주의와 복수 정당 제도를 허용할 것이지만 만약 국민들이 시위를 하게 되면 군인들은 총구를 그들에게 곧바로 겨누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군부는 어김없이 이 그 경고를 이행한다. 수천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시체로 변했다. 버마 군부는 “얼마든지 죽이겠다,”는 각오가 확연한 상태였다. 네윈이 수십 년간 병영 체제로 길러온 국가의 군인들은 ‘보이는 대로 죽여라’는 명령에 기계처럼 대응했고 그 앞에서는 피플 파워도, 아웅산 수지의 외침도 외국의 규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실베스타 스탤론의 노화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영화 <람보 4>에 등장하는 잔혹한 군인들은 바로 이 버마 군들인바, 그들은 자국민을 완벽하게 도살했고 마침내 ‘질서’를 회복한다. 그리고 아웅산 수지는 가택에 연금된 채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몇 해 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버마를 취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버마인의 목소리를 전한다. “미국이 우리나라는 안 쳐들어오나.” 맨손으로 저항했다가 피의 폭풍에 휩쓸려버린 나라의 민중의 가냘픈 숨소리였다. 차라리 외국의 침입이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1988년 8월 8일의 버마는 그런 것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민중의 분노가 크고, 변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와도, 무력을 쥔 자들이 이지러짐이나 망설임 없이 ‘단결하여’ 그 무력을 행사한다면 처참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언젠가는 승리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참한 패배감 속에 무력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런 질문이 참 역겹고 싫다. “그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왜 인민들이 저항하지 않겠는가.”  1988년 8월 8일, 갓 창간했던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며 버마 민중들의 항쟁을 응원했던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버마 민중들이 영화 <왕과 나>에 등장했던 겁에 질린 버마 왕처럼, 자신들의 지배자들의 혼을 빼놓고 그 엉덩이를 차 줄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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