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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8.10 우장춘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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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서거

아주 오래 전 노래모임 ‘꽃다지’에서 <민들레처럼>이라는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엉뚱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아무리 짓밟아도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살자는 것은 어느 위대한 위인이 평생 동안 간직했던 좌우명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우장춘이다.

...
우장춘의 아버지는 우범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비가 비명에 죽어갔던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대대장으로서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에 진입했던 이였으며 민비의 시신을 확인해 주었다고도 한다. 그는 부귀영화를 노린 친일파라기보다는 민비 일파의 전횡에 반대하는 신념을 가진 쪽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지만, 어쨌건 ‘국모’를 시해한 범인이 됐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아내를 잃은 고종은 절치부심 원수를 갚고자 했는데 그 집요함의 대상은 진범인 일본인들이 아니라 종범이라 할 망명한 조선인들로 귀결됐다. 우범선 역시 고영근이라는 사람 (이 사람의 일편단심도 알아줄만 하다. 그는 합방 후에도 고종과 민비의 능참봉이 되어 그 능을 지키고 살았다)에게 피살된다.

그때 우범선은 이미 일본 여인 사카이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장춘이었다. 남편은 남편의 조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죽었고, 일본에도 기댈 언덕이 없었던 사카이는 큰아들 장춘을 잠시 고아원에 맡긴다. 그때 우장춘은 일본인 아이들에게 심한 이지메를 당하며 두들겨 맞았는데 이 일을 알게 된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아라. 저 민들레는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꽃을 피운단다. 낙심말고 저 민들레처럼 어려운 일을 이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과 더불어 어린 우장춘에게 자존감이 되어 주었던 것은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다짐이었다.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

그 후 우장춘은 놀라운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학계의 총아로 성장한다. 그의 과학적 업적을 줄줄이 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별명은 ‘불독’이었다. 생김새도 불독을 떠올리게 하거니와 한 번 꽂힌 연구 과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품성의 사나이였다. 솔직히 나름의 의기를 발휘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야욕의 꼭둑각시가 되어 버린 아버지보다는 과부의 몸으로 별 일을 다 하면서 아들을 교육시키고,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너는 조선의 혁명가의 아들이다.”고 아금박았던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잘나가는 우장춘도 결국 조센징이었다.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 와다나베는 자신의 친정과 절연을 해야 했다. 반쪽이긴 해도 조센징의 핏줄이 어엿한 사범학교를 나온 처녀와 결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내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는지 무려 30여년 동안 자신의 남편을 인정하지 않는 친정과 절연하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우장춘도 자식 앞에선 한 수 접을 수 밖에 없었던지 딸이 태어난 후 아내의 지인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택하여 스나가라는 성을 얻어 스나가 나가하루가 된다. 하지만 영어 논문에는 어김없이 U라는 성을 사용하며 포기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고 있었다. 또 후일 그를 한국으로 초대하는데 공을 세우는 김종을 비롯하여 이태규 등 한국 과학자들과 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바꿔 보려고 했지만 허무하게 실패하고 끝내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던 나라의 이름은 점점 더 그의 마음 속에서 커 가게 된다.

마침내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한국이 독립했을 때 앞서 말한 김종을 중심으로 우장춘 박사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를 한국으로 초청하자 우장춘은 귀국을 결심하고 스스로 귀국 조선인들을 수용하던 오오무라 수용소에 들어간다. 일본 정부는 기겁을 하고 그 귀국을 막으려 했지만 경성으로 출생 신고가 된 (우범선은 아들의 출생 신고를 경성, 즉 서울로 했다.) 호적 등본을 들이미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환국 추진위원회는 그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00만원을 보내 왔는데, 우장춘은 아내와 2남 4녀에게는 이 돈을 한푼도 주지 않고 종자들과 연구 기자재들을 잔뜩 사 들고 귀국한다. 그의 귀국 코멘트는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으로서 일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일할 것이고 이곳에 뼈를 묻겠습니다.”

평생을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는 우리 말을 하지 못했다. 귀국하고 나서도 연구할 일이 많은데 언어 공부까지 할 시간이 없다면서 굳이 우리 말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듣는 건 다 알아들었고, 한글도 깨우쳤지만) 그리고 ‘국모를 시해한 자의 아들’이라는 딱지도 항상 따라다녔다. 하루는 꽤 떵떵거리는 정치인이 왜 우리 말을 배우지 않느냐고 힐난하자 우장춘은 이렇게 웃어 넘겼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저 정도는 굳이 입 다물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한민국의 수만 인명을 구했다. 제주도를 감귤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 감자의 병충해 문제를 해결하여 강원도 지역의 유수한 생산품으로 만든 것,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개량형 배추를 만들어 낸 것 등등 그의 업적은 열거하기 귀찮을 정도로 많고,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위대하다.

1953년 8월 어머니 사카이가 일본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온 가족을 일본에 두고 온, 일본말밖에 모르는 농학자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덜컥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랴 싶은 걱정이 든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우장춘은 동래 원예 시험장에 영구 없는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입었다. 약소국의 망명 정객의 아내가 되어 남편을 그 조국의 자객에 잃고 무서운 가난을 딛고 자식을 세계적인 농학자로 키워 낸 사카이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고 한다. “아들을 장하게 길러내어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으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나도 충분히 면목이 선다,”

우장춘은 어머니가 죽은 6년 뒤 1959년 8월 10일 세상을 뜬다. 병석에 누워서도 그는 링게르병과 함께 시험관에 든 품종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고, 한국인의 주식인 벼의 개량 연구에도 마지막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3일전 농림부 장관이 그의 병실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전달한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 이은 두 번째의 문화 포장이었다. 반세기를 반쪽짜리 일본인으로서 일본에서 살았던 우장춘은 9년밖에 자신의 또 하나의 조국에 기거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훈장을 받으며 그는 말했다.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조국이 나를 알아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네.”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시아의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살아야 했던, 그 때문에 그 아내까지도 친정과 수십 년 연을 끊고 살아야 했고, 또 역시 그 때문에 목숨 걸고 자신을 키웠던 어머니의 임종마저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두 조국 모두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던 한 과학자는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를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그는 탁월한 일본인이기도 했고, 더욱 위대한 일본인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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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8.11 북간도관리사 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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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3년 8월 11일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 임명

압록강과 두만강이 우리의 국경이라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지만 100년 전에는 사뭇 사정이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일단 청나라와 조선의 관료들이 만나 세운 정계비에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조선과 청나라가 달랐고 그로 인해 영토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860년대 이후 함경도 사람들이 간도...
지역에 많이 정착해 있었고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 역시 만주 지역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하고 자국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은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은 변발을 하고 청나라 백성이 되던가 아니면 돌아가야 한다고 우겼다.

이 옥신각신 속에서 먼저 빛을 발휘한 사람은 이중하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계사, 즉 경계를 살피는 관리로 임명받아 청나라와 두 차례 담판에 나선다. 첫 담판은 1885년. 1885년이라면 임오군란 뒤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해 가고, 갑신정변으로 3일 천하를 이룬 김옥균 정권을 뭉개 버리고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이때 조선에 나와 있던 인물이 후일 아주 짧게나마 중국의 황제 노릇까지 하는 위안 스카이, 원세개다. 이런 판국에 청나라와 담판을 짓는다는 것은 아마도 비탈길 아랫쪽에서 족구하는 느낌과 비슷했으리라. 하지만 당찬 관료 이중하는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사실 우리측 논리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국경을 우리가 주장하는 토문강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는)으로 정할라치면 거의 함경도의 몇 배나 되는 땅이 (심지어 연해주까지!) 조선 땅이 되는 셈이었는데 이건 좀 무리였던 것이다. 이중하 역시 두 번째 회담에서는 국경선을 두만강의 지류인 홍토수로 주장한다. 청나라는 이마저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이중하는 강단있게 맞선다. 까짓거 안되면 내 목을 가져가라고! 를 부르짖으면서.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양국은 뚜렷한 국경선을 긋지 못하고 만다. 조선인들을 추방하면서 국경선을 분명히 긋자고 나섰던 청의 판정패였다. 이 불분명함이 조선측에는 기회가 된다.

조선인들은 계속 간도로 들어갔고 청나라는 이에 강경대응하는 가운데 국경 문제는 다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1897년 함경도 관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이주자는 수만 호에 이르렀고 모두 청나라의 압제를 받고 있는데 청나라 사람의 수는 그에 훨씬 못미친다고 했다. 압박에 못이겨 변발한 이도 있으나 그는 극히 일부이니 하시라도 빨리 경계가 정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년 후 청나라가 의화단의 난 등 내우외환으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간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903년 그 지역에 나가 있던 간도시찰사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즉 간도는 우리 땅이니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범윤은 헤이그 밀사 중 1인인 이위종의 삼촌이고 러시아 공사로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자결로 순절한 이범진의 형이다.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마패와 유척을 하사받고 간도관리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호구조사를 시행했고 군대 파견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사포대라는 일종의 의용군을 조직하여 무력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중하가 담판을 통해 청나라의 요구를 꺾어 일종의 판을 마련했다면 이범윤은 그 판 위에서 실제로 간도 지역에서 살아가던 한국인들의 안위를 지켰다. 조그만 충돌 뿐 아니라 수백 명 단위의 ‘전투’도 벌어졌다 하니 간도 지역은 일종의 저강도 전쟁 상황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러일 전쟁 국면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청나라 역시 전쟁 후에 제대로 경계를 정하자고 나와 대한제국 정부는 이범윤을 소환한다. 하지만 이범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러시아령으로 넘어가 항일 투쟁에 나선다. 이범윤의 의병대 소속 '의병참모중장‘은 후일 간도 협약을 통해 간도를 완전히 청나라 영토로 못박은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하게 된다. 그 이름이 안중근이다.

이범윤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러시아령과 북만주 일대를 누비며 독립군의 지도자로서 활약한다. 13도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에도 그 이름을 올렸고,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한 기록이 보인다. 예전 대학가의 구전 가요 중에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만주 고향을 떠나온지가 몇 해이더냐 웃어 보는 얼굴에 날리는 수염.....”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범윤은 그 가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후손들에 따르면 그는 1940년 노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서울로 돌아와 숨진다. 가끔 머리가 맑아질 때마다 “청산리 고지를 내가 맨 먼저 밟았다.”고 중얼거렸다고 하며, 죽은 뒤에는 일본 관헌이 두려와 화장했다고 한다. 간도 일대를 호령했고 이후에는 독립 투쟁에 모든 걸 바친 그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간도는 우리 땅” 구호에 반대한다. 조선인들이 넘어가 땅을 개척하고 살았기에 간도가 부각된 것이지 조선이나 대한제국 정부가 그 땅에 행정권을 행사한 것은 그렇게 긴 세월이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중국 영토가 된지 100년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국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기로 한 터에,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은 대한민국 정부가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해 본들 그만한 공염불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임금의 아버지를 잡아가고, 일개 외국의 관리가 말을 타고 경복궁에 들어설만큼 위세 당당하던 청나라에 목숨을 걸고 맞서던 이중하의 기개와, 1903년 8월 11일 “간도관리사”가 되어 청나라의 압박에 무력으로 저항하며 자국인의 안전을 도모하려던 이범윤의 이름은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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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8.13 불쌍한 악마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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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5년 8월 13일 불쌍한 악마의 출현

1975년 8월 13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간 전남 광산의 한 외딴 집에 괴한이 나타났다. 바짝 마른 체구에 크지 않은 키. 길쭉한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부부 둘이 곤한 잠을 자고 있던 집에 스며든 괴한은 낫을 휘둘러 남편을 죽이고 아내는 절굿대로 때려 실신시킨 뒤 물건을 훔쳐 도망간다. 그가 훔친 물건은 플래쉬 1개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범행은 대한민국 ...
범죄사에서 연쇄살인마의 원조로 운위되는 김대두의 첫 살인이었다.

당시 폭행 전과 2범이던 김대두는 일단 사람을 죽인 뒤 더욱 피에 굶주린 악마가 되어 갔다. 공범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공범이 없을 때에도 그는 단독으로 가정집에 침입, 거침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에 깃들었던 악마의 잔혹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택의 외딴집에 침입한 그는 70대 할머니와 일곱 살 , 다섯 살 난 손자들을 때려 죽였다. 얼굴을 못알아볼 정도로 둔기로 난타했다. 열 한 살 난 손녀는 뒷산으로 끌고 올라가 나무에 묶어놓고 똑같이 죽였다. 그나마 자신의 얼굴을 봤으니 죽였다는 변명이 성립한다고 치자. 하지만 시흥에서 벌어진 참상은 그야말로 최악 그 이하의 최악이었다. 20대 주부를 성폭행하고 죽인 것은 그렇다고 치지만 생후 3개월짜리 아이까지 짓밟아 죽였다. 21세기의 유영철도 강호순도 어린아이를 그렇게 죽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밝혀진 것으로는)

그는 그렇게 17명을 죽였다. 8월 13일 첫 범행 후 치안당국은 무려 50여일이 넘도록 공조 수사를 벌이지 못하고 독립된 사건 하나 하나에 매달렸다. 연쇄살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을 때였던 것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어찌보면 어처구니없는 행동 때문이었다. 자신이 꼬드겨 공범을 만들고자 했지만 되레 물건을 훔쳐 도망친 청년을 기어코 찾아내 죽인 뒤 그 피 튀긴 바지를 버젓이 세탁소에 맡긴 것이다. 세탁소 주인이 웬 피냐고 물었을 때 그는 코피를 흘린 것이라 했고, 세탁소 주인은 순간 머리가 쭈뼛 선다. 코피를 다리에 흘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세탁소 주인은 파출소로 달려갔고 김대두는 체포된다. 그가 연쇄살인범임이 밝혀진 것은 그 스스로 범행을 털어놨기 때문이다.

현장검증에서 김대두는 검을 쩍쩍 씹으며 자신의 범행을 재연해서 보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빨리 끝내자”면서 짜증까지 부렸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씨나락도 없어 보였다. 왜 그렇게 사람을 죽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몸이 약해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는 당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허약체질로 군대 입대조차 거부당한 사람이었다. 도무지 악마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김대두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한 것은 호남 사람들이었다. 김대두의 고향이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지존파 사건 때도 비슷했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의 고향이 충청도고, 유영철은 경기도이며, 정두영의 경우 부산이지만 기묘하게도 그들의 고향은 화제에 오르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요즘 말로 ‘프로파일링’ 같은 것은 있지도 않을 때였고, 범죄심리학이라는 말도 생소했을 때인지라 그가 어떤 심리 상태에서 무슨 의도로 그런 짐승같은 살인들을 저질렀는지의 분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17명을 죽인 악마였을 뿐이다. 그런데 사형수로서 살아가면서 그는 여러모로 변화한다. (물론 그가 사회에 다시 나갔더라면 그 변화가 이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처음에는 변호사에게 당신도 결국 검찰의 앞잡이라며 자신이 겪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거친 욕설만 토로하던 그는 변호사와 교화사의 설득으로 점차 그 살기의 날을 거두어 간다. 담당 이상혁 변호사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네 이름 대두는 큰 대(大)에 말 두(斗)인데 결국 `큰 사람''이란 뜻 아닌가. 사형을 받아 죽을 몸이고, 인격체로서의 시간은 짧게 남아있지만 유용하게 크게 살아라. 그 길만이 인간다운 모습 되찾는 것이고 피해자에게 회개하는 길이다.” (광주일보 2004.3.17)

특히 김대두는 자신을 맡은 교화사와 많은 교류를 가졌고 그녀와 그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도무지 살인마답지 않은 단면을 드러낸다. 위 기사에서 퍼와 본다.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없는 이 못난 죄인이 사모님에게 첫 세배를 올립니다.… 아무개 아무개 꼬마께서 보내주신 카드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이런 카드를 받아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976년 1월 1일의 편지였다. “△△이! 어머니 말씀들으니 감기에 걸렸다는 데 다 나았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공부열심히 하고 착한 꼬마 아저씨에게 감기를 걸리게 하셨는지, 하나님도 무정하셔!…△△이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5월은 어린이날, 어린이 세상...'' 교화사의 아이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죽었다. 그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과자들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그들이기에 그 꿈은 더욱 간절하고 큽니다. 그러나 그 꿈은 세상의 냉대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납니다. 사회가 출소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갱생의 길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초범자와 재범자를 분리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저 같은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저를 돌봐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만납시다.”

죽음 앞에서 선해지지 않는 자가 흔하겠는가. 요즘 나는 사형제가 유명무실할지언정 폐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서고 있다. 생후 3개월된 아이를 밟아죽인 자의 회개를 어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그의 유언은 잠시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나는 성범죄자들의 신상 공개를 지지한다. 전자발찌에도 찬성한다. 그런데 어쨌건 법적 처벌을 받은 그들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들을 공개하고 차별하고 우리 앞에 드러내고 우리가 피하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물론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짐승들까지 우리가 신경써 줘야 할 이유는 없다는 데에도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아예 격리하거나 죽여 버리지 않는 한.

물론 세상 살다 보면 별 놈이 많을 것이다. 악마도 있고 짐승도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포기하는 순간 지옥도는 더 넓고 크게 펼쳐지기 시작한다는 것일 게다

1941.8,14 거룩! 꼴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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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8월 14일 거룩! 막시밀리안 꼴베

나찌 독일은 거의 전 유럽을 석권했다. 프랑스는 초반에 무너졌고 노르웨이도 나찌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바야흐로 지중해에서 발틱해까지, 노르망디의 해변부터 폴란드의 평원까지 히틀러 휘하의 독일군은 승승장구하며 온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승리를 토대로 나찌는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인간 이하’의 종족들에 대한 격리 작업에도 착수했다. 각지에 수용소...
가 세워졌고 유태인, 집시, 폴란드 인 등 이른바 열등한 인종들과 나찌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은 그곳에 수용되어 혹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1940년 5월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가운데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1941년 초, 한 명의 폴란드인 신부가 잡혀 들어왔다. 유태인들을 보호하고 폴란드 레지스탕스 신문 발행에 관여한 혐의였다. 이름은 막시밀리안 꼴베.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선교한 적도 있고, 출판, 방송 등 대중 매체를 통해 가톨릭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해 온 사제였다. 그런데 수용소에서 탈출 사고가 일어났다. 소식이 알려지자 수용소는 엄청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것은 수용소장이 누군가 탈주할 경우 무작위로 10명을 뽑아 아사(餓死) 감방에 넣겠다고 선포해 놨던 탓이다.

아사 감방이란 음식도 심지어 물도 주지 않은 채 굶겨 죽이는 감방을 말하는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감방 안에서 말라 죽어간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혀 온다. 무정한 나찌 수용소 간수들은 열을 지어 선 수인들 가운데 10명을 지명했다. 손가락질 하나 하나에 생사가 갈렸고 손가락총을 맞은 이들은 그만 털썩 털썩 곳곳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차라리 총알 한 방에 머리가 뚫리는 게 낫지, 며칠일지 모를 기간 죽음같은 기갈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하다니. 그 가운데 한 명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이 있다구요. 나는 죽을 수 없어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남은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나찌 간수가 그를 동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나찌 간수가 그를 살려 준다면 다른 사람이 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그때 꼴베 신부가 나섰다. “저 사람 대신 내가 들어가게 해 주시오. 나는 가족이 없는 가톨릭 신부니까 괜찮소.” 나찌들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신부건 무엇이건 죽음이 틀림이 없는 방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며칠 동안이 될지 모르는 죽음 이상의 고통 끝에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하지만 곧 정리됐다. “마음대로 하게 하라.” 난데없이 나선 신부 때문에 죽음 직전에서 놓여 난 이의 이름은 가요비니체코였다. 그는 그 순간 꼴베 신부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멍하니 신부를 쳐다보았을 뿐이고, 꼴베 신부는 되레 환한 미소로 그와 이별했다. 가요비니체코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끝내 전쟁 후까지 살아남았고 1995년 아흔 셋의 나이로 죽는다. 적어도 그는 허무하게 죽지는 않고 살아남아 꼴베 신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 옷도 걸치기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 아사 감방에 처넣어진 10명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목마름과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다. 그들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꼴베 신부였다. 시신을 확인하려 들어온 나찌 간수들 앞에서도 꼴베 신부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그들을 되레 질리게 만들었다. 괴로운 신음 사이에서도 기도와 성가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려 나왔고 아홉 명의 희생자들은 가냘프지만 든든한 신부의 배웅 속에 처참한 이승과 고별할 수 있었다. “꼴베 신부가 가요비니체코씨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겠다고 신청한 것이 아니라 신부는, 사실은 아사 감방에 함께 넣어진 9명을 구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는 꼴베 기념관장 오자키 신부의 말은 그래서 적절한지도 모른다.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의 마지막 소임을 위해, 그가 평생을 섬긴 천주님은 꼴베 신부에게 초인적인 생명력을 선물했다, 물도 음식도 일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젊은 희생자들이 다 죽어 나간 뒤에도 17일 동안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은 나찌 쪽이었다. 마지막 양심인지 아니면 성미가 급한 탓이었던지 그들은 꼴베 신부에게 독주사를 놓아 안락사시키기로 한다. 꼴베 신부는 앙상한 팔을 내밀어 나찌의 마지막 주사를 맞고서 천국으로 떠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처럼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말이 없다. 더구나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이르면 당신같은 신의 아들이나 가능하지 인간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 볼멘 소리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런 ‘큰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에 아연해지기 때문이며,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일 것 같다.

강기훈을 도웁시다! 우리를 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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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강기훈을 도웁시다.

한 사람의 이름이 우리의 귀를 잡아당깁니다. 제발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요. 자신이 왜 억울한지, 그리고 얼마나 억울한지, 그저 앉아만 있어도 피가 거꾸로 솟고 생각만 해도 간이 타들어가는 사연을 들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강기훈입니다. 이른바 '민자당 해체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친구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참람한 혐의를 감수해야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살방조'혐...
의였지요.


1991년 당시의 이 나라 공안당국이 조금 더 현실 지각력이 있었다면 강기훈은 자살 방조가 아니라 살인 혐의로 구속되었어야 합니다. 자살의 형태로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유서만큼은 자필로 쓰게 할 겁니다. 칼을 목에 대든 총구를 머리에 밀착하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혐의를 벗어날 수 있고, 자신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유서 쓰기를 거절하는 친구에게 유서를 써서 들이밀어 품에 넣어 주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자살 방조'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살인입니다. 반대로 과연 유서 쓰기도 거절할 만큼 심약하던 사람이 남이 써 준 유서를 남기고 제 몸에 불을 당기는 일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친구의 분신을 돕기 위해 버젓이 자신의 필체로 공개적인 유서를 써 주어 친구의 분신을 방조했다는 이 C급 영화 스토리로도 못 쓸 범죄 사실이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검사들에 의해 쓰여지고, 증거 하나 없는 사건에서 판사들은 그 증거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정황만으로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 유죄 판결 앞에서 강기훈은 어떤 심경이었을지를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친구의 슬픈 죽음 앞에서 네가 그 죽음을 사주했고 심지어 네가 그 친구의 유서까지 쓴 것이 분명하다는 윽박지름과 마주해야 했던, 그 죄값(?)으로 3년의 옥살이까지 치러야 했던 한 청년의 마음을 무슨 수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강기훈의 이념적 성향도 아니고, 분신자살한 김기설의 유서 내용도 아니며, 인간의 존엄함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공화국의 시민의 하나인 강기훈이 그가 응당 향유하여야 할 권리는 무참하게 짓밟혔다는 것입니다. 공안당국과 법원은 터무니없는 증거로 한 사람의 청춘을 구속했고 판결로써 그 미래를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그 유일한 '증거'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경찰들조차 그 증거 채택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음을 인정했고 분신자살한 고인의 필체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그 '재심'을 2년 동안이나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강기훈의 부모님은 그 오랜 세월의 울화와 포한을 이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수를 들이켜야 속이 가라앉을 분노, 자신 때문에 속앓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간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불의 범벅이 되어 자신의 가슴을 태우는 고통을 견뎌야 했던 강기훈 자신도 간암에 걸려 삶과 죽음 사이의 외나무 다리에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80년대의 젊은 사자들이 숱하게 국회의원 배지도 달고 청와대에서 국정도 호령했었건만, 그들과 나란히 80년대를 내달렸던 강기훈이라는 한 개인은 정말로 속절없고 대책없는 피해자가 되어 자신의 무고함만은 밝혀 달라고, 아니 그 이전에 일단 재심 결정이라도 내려 주십사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게 2년입니다.

"가장 천사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공지영의 고등어 중에서)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라는 이름의 밤 하늘에 별들로 남은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립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우리들이라면, 역시 자신의 일신의 안락에 굴하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으되 터무니없는 오명을 쓰고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세력의 장난감이 되어 버렸던, 그러면서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어찌 무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그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이 더럭 가까워져 버린 한 사람의 한맺힌 포한이라면야 더욱요.

드라마 <추격자>에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욕심에 한 소녀를 죽여 버렸던 강동윤은 계속 자신을 추적하다가 납치되어 온 소녀의 아버지 백홍석 형사에게 악을 씁니다. "너 때문이야, 니가 PK준만 안 잡았어도, 법정에서 죽이지만 않았어도, 탈옥만 안했어도.. 백홍석 니가 포기를 했으면은! .왜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그러자 백홍석이 대답합니다. "나는 수정이 아버지니까." 그 대사를 들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라는 간단한 사실이 백홍석의 행동을 이해해 주는 열쇠였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키워드였겠지요.

대법관까지 지낸 당시 지검장 강신욱, 1심 노원욱, 2심 임대화, 3심의 박만호 재판관의 서울법대 후배이자 현재 재심 청구를 뭉개고 있는 양창수 대법관 기타 등등은 강기훈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니가 데모만 안했어도, 니가 김기설하고 친구만 아니었어도, 그냥 3년 군대 다시 갔다 온 셈치고 포기를 했으면은! 다른 놈들처럼 정치를 하건 돈을 벌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과연 강기훈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신 답변해 줄 수는 없을까요. "너 같으면 포기하겠냐. 이 개새끼들아."라고.


강기훈씨를 도웁시다. "생존 확률 50퍼센트"라는 선고까지 들었다는 그를 이렇게 하릴없이 죽게 내버려 둔다면, 최소한 그에게 진실을 찾아주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이 더러운 세상을 버리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자칭 민주공화국을 살았던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됩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관용어가 되는 법치국가에서 출생과 사망신고를 하는 우리 전부는 나무로 깎은 등신 이상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기본원리로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하나 하나는 모두 누군가의 손짓 하나에 춤췄다가 삿대질했다 울다가 웃는 꼭두각시 그 이하로 전락하게 됩니다.


강기훈씨를 도웁시다. 그의 치료비와 법정 비용이 많이 모자란답니다. 우리은행 계좌 1002-946-922550 예금주 권형택...... 으로 백시일반 만시일반 십만시일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강기훈 개인을 돕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시는 그런 어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우리 스스로 등신과 죄인과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이고, 결국 우리 스스로를 돕는 일입니다. 여유가 없으면 전화 한 통화라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법원 홍보실이든 양창수 대법관 사무실이든 전화 하셔서 강기훈 재심 청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검토는 하고 있는지, 언제 결정할 예정인지 끔찍할만큼 물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안되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속 젊은이가 나이 쉰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는..... 결백을 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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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부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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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을 바꾼 것 문세광이 바꾼 것

1974년 8월 15일도 역시 광복절이었다. 그 해 광복절에는 경사가 하나 더 있었다. 1호선 지하철이 일부 완공됨으로써 서울의 지하세계(?)에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를 달렸던 지하철의 탄생은 당연히 장안의 화제였고 대통령 각하께서 그 ‘시승식’을 거행하는 것은 더욱 응당한 일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다른 양복짜리들이 ...
다 서 있는 가운데 각하 혼자서만 자리에 홀로 앉아 감회에 젖어 계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시간이 11시 10분경. 그러나 각하의 머리 속에는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지나갔을 것이다. 바로 40분 전 자신의 아내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던 것이다.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혼수상태로 실려나간 후, 물 한 잔 마시고 “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하며 끝까지 광복절 기념사를 읽어 내리던 모습은 박정희를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신화가 되어 있거니와, 그 난리를 치르고도 바로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해서 홀로 좌석에 앉아 있는 풍경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음이 있다. 육영수 여사를 쏜 사람은 재일교포 문세광이었다(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문세광을 불러들인 것은 바로 그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기 꼭 1년하고도 1주일 전, 1973년 8월 8일 일본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의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디 야쿠자를 시킨 것도 아니고 한국 외교관 신분의 요원들이 가세하여 치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알았다고도 하고 몰랐다고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그 아랫 사람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충성 경쟁을 즐기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불 같이 화를 냈다면 이런 식이 아니었을지. “이런 일 하나 똑똑히 처리하지 못하고 말이야!”

한국에서야 무슨 애국 단체 회원들이 납치해서 집에 데려다 놨다면 그만이었고, 시끄럽게 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넣으면 끝이었지만 문제는 일본이었다. 일본 정부도 정부였지만 일본의 여론은 한국을 무슨 야만족 취급을 하고 있었다. 허긴 야만족 소리 들어도 마땅한 일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망명객을 자국의 정보요원들이 자루에 넣어 납치하는 짓을 저지르는 나라를 문명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조센징 소리에 지긋지긋한 재일교포 사회는 당연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어이 조센징 긴다이쭈 (김대중)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나는 강꼬꾸징(한국인)이라고!” “그래 강꼬꾸징. 강꼬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응?”

조총련 아닌 우익 거류민단 소속이었고 (정부에 따르면 골수 공산주의자로서 민단 분열을 꾀하려 위장 가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거류민단 단비 수금원부터 휴지 수집상, 유리창 청소 등 궂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그 역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격노했던 것이다. 그는 김대중 구출을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영사관을 점거하고 그 직원들을 인질 삼아 김대중과의 교환을 요구하자.”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였다는 한국 당국의 말이 맞다고 해도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험한 일 마다 않고 일하던 그를 권총 찬 암살자로 만든 가장 큰 계기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건 그는 많은 의혹 속에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다. 렌트한 외제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그 삼엄한 기념식장에 비표도 없이 들어가서는 연단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는 이 날 세상을 떠났다. 청와대 내 야당으로 불리우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할 말은 했다는 영부인, 그래서 청와대 내부에서 ‘육박전’이라 표현되는 부부싸움을 자주 벌이기도 했으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어 인기가 높았던 영부인은 그렇게 남편과 이별한다.

그 뒤 여러 가지가 바뀐다. 일단 납치 사건 이후 완전히 수그리고 지내던 일본과의 관계가 역전됐다. 처음에는 재일 한국인의 범죄로서 사과할 일 없다고 딱 잘라 버린 일본 정부였지만 “일본에서 자란 미국인이 일본 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가서 미국 대통령을 쐈다면 일본 정부가 그럴 수 있겠느냐”며 거세게 대드는 한국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고, 박정희는 “일본 폭격”까지 입에 담았다. 결국 일본은 진사 사절을 한국에 파견했고 그는 박정희에게 “평생 처음인 모욕”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이후 한국 역사의 분수령이 펼쳐진다.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영애’가 모친의 비극을 맞아 급거 귀국하고, 학업을 작파하고는 청와대의 퍼스트 레이디 배역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영애’가 귀국하면서 물은 것이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 였다고 한다. (김운용의 회고로는 그렇다) 문세광은 전혀 예기치 않았겠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영애'를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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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8월 16일 피털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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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19년 8월16일 피털루 학살

영국의 넬슨 제독은 영국 침공을 꿈꾸는 나폴레옹의 함대와의 결전, 즉 트라팔가 해전을 벌이기 직전, 함대의 전 수병들에게 이렇게 훈시한다. "영국은 그대들 모두가 스스로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넬슨 자신은 개선 행진에 참석하지 못하고 전사했지만 그 훈시대로 영국 해군은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여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고, 그 외에도 식민지 각처에서, 유럽 대...
륙 곳곳에서 영국군은 나폴레옹이라는 거인의 몸 곳곳에 돋아난 종기가 되었으며, 영국인들은 나폴레옹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한다. 승리였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 원래 쓴잔은 다 함께 먹자고 언성 높이는 놈들이 단물은 몰래 끼리끼리 들이키게 마련. '스스로의 의무'를 다한 영국 민중들에게 전쟁 승리의 과실은 헤라클레스도 직접 가져오지는 못했던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처럼 머나먼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곡물법이란 놈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륙 봉쇄령 당시 곡물 수입이 여의치 않아 하늘 높이 올라갔던 곡물값이 전쟁이 끝나면서 폭락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데, 이것은 지주들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현상이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회(일정 정도의 토지 소유자만 참정권이 있었다.)는 곡물법을 제정, "소맥 1쿼터(약 12.7 kg)당 가격이 80실링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소맥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선언한다. 식량값은 당연히 두 배로 올랐다. 거기다 전쟁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대거 산업 예비군이 되어 국내로 쏟아지니 월급은 반으로 줄었다. 주급 60 실링을 받던 면직공장 반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24실링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시인이자 상원 의원이었던 바이런의 한 마디 "이제 사람의 목숨 값이 양말 짜는 기계만도 못하게 되었소!"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뛰던 바로 그 도시, 맨체스터에서 1819년 8월 16일 대규모의 집회가 열린다. 참정권 확대와 선거법 개정 등을 외치는 참여자의 수는 6만 여명, 그만큼 많은 민중들이 멘체스터의 성 베드로 광장, 영어로 Peter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집회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순서가 하나 있었다. 유명한 급진적 연설가였던 헨리 헌트가 참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람을 폭탄이라도 두른 위험 분자로 봤지만 사실 그는 의회 내의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또 다른 집회 참가자(?)들이 그를 덮친다. 베드로 광장에 한 켠에서 시위대를 굽어보고 있던 영국군 제 15 검기병대를 비롯하여 1500여명의 기병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태반은 정규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의 하수인을 동원하여 조직한 '의용 기병대'였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술까지 먹어 얼굴들이 살기와 취기로 반반씩 벌개져 있었다.

"돌격!" 1500 여 기병대가 일제히 말을 몰아 비무장의 군중들을 덮쳤다. 기병대의 태반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을 베어넘기던 역전의 제대 장병들이었다. 유럽 최고의 무력이 여자들과 아이들도 수없이 섞여 있고, 몽둥이 하나 들고 있지 않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한 것이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기병대의 공포란 훈련된 보병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비무장 민중들에랴. 최대 10만을 헤아리던 인파는 일시에 흩어졌다. 마치 1987년 7월 이한열 장례식에 몰려든 100만의 군중들이 지랄탄 몇 방에 깨끗이 없어졌던 것과 같이.

정부는 11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에서 칼을 맞은 사람은 500여명이 넘었다. 이 사건은 성 피터 (베드로) 광장과 워털루의 합성어로 '피털루 학살'이라 역사 속에서 명명된다. 워털루 용사들이 피터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벌인 학살이라 비꼬는 이름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영국 정부는 철저하게 민중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들었다. 50명 이상의 집회가 금지됐고, 모든 신문에 인지세를 증대하여 신문값을 올려 노동자들로부터 언론을 차단하려는 뻘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털루 사건은 영국 노동운동사와 근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으며, 이후 참정권 확대와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 투쟁의 기폭제가 된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영국 노동당 형성의 원류로 보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생했던 민간 용역 회사의 어처구니없고 인정사정없는 노조 진압 작전을 보면서 나는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를 떠올렸다. 용역들은 "경고"를 제멋대로 남발한 후 "선봉대 넘어!"라는 전투적 용어를 감행하며 소화기를 뿌리고 그 빈 용기를 내던지고 노동자들이 피땀흘려 만들어 놓은 부품까지도 던지면서 수십 년 동안 그 공장에 근속하던 노동자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 공권력은 그들을 방관할 뿐이었고, "사람 죽어가는 것 안보이냐?"는 말에 "지시가 없었다."고 먼산만 바라봤다.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는 술이라도 퍼먹고 이성을 잃었지만 짭짤한 아르바이트비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대학생들이 주였다는 용역들은 어쩌면 그들과 같은 처지일 노동자들에게 의용 기병대처럼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베드로 광장이 깨끗이 비워졌듯 공장은 용역의 손에 넘어갔다. 이 소식에 분기가 채 풀리지 않는데 또 하나의 희한한 소식이 어이를 또 한 번 빼앗는다. 삼성 특검의 책임자였던 조준웅 특검의 아들이 삼성에 과장으로 특채됐단다. 그 경력은 사법고시 공부와 중국 유학. 우리에게는 피털루가 여러 번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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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17일 가봉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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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8월 17일 가봉 독립

산하의 오역에서 어느 나라 독립을 얘기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한 번 해 보자. 1960년 8월 17일 가봉이라는 나라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이 해는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울만큼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아프리카에 세워졌다. 50년대 한국이 '최빈국'이라고 얘기되는 것은 실제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아프리카에 비교할 만한 '나라'가 적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신생...
독립국들은 대개는 잔혹한 독재나 치열한 내전과 학살의 공포를 골고루 겪었지만 가봉은 그 폭풍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1967년 이래 오마르 봉고 대통령 치하에서 역시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 체제를 이루며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꽤 잘 사는 나라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이다. (물론 1993년을 비롯해서 정치적 위기는 존재했지만)

이 가봉 공화국은 여러 모로 우리와 인연이 많은 나라다. 비동맹노선을 표방하면서도 프랑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이 나라는 친서방적 면모도 지니고 있었기에 우리의 아프리카 외교의 교두보가 된다. 60년대에 이어 70년대 중반까지 남북은 전쟁에 가까운 외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북한은 어떤 비동맹 회의에서 페루 대표에게 뇌물을 줬다가 들통이 났고 한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표에게 돈을 안겨 한국 입장의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한 예는 얼마나 그 '전쟁'이 유치찬란했는가를 드러내 준다. 북한의 경우 한 해 아프리카에 6천8백만 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고 한다. 또 태반이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한 아프리카에서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한은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가봉은 그 와중의 희망이었다. 봉고 대통령이 국빈으로서는 최다 한국 방문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 기인한다.

그는 1975,84,96년 그리고 2007년 이렇게 네 번씩이나 한국을 방문한다. 1975년의 첫 방문에서 가봉 대통령은 가히 거국적인 환영을 받는다. 요즘에야 웬만한 나라 대통령이 왔다는 소식은 단신에서도 빠지기 일쑤지만 이때는 달랐다. 공항에는 정,관, 재계 인사 1400 명이 총출동해서 봉고 대통령을 맞았던 것이다. 가봉이 1974년 북한과도 수교한 마당에 그 대통령을 '국빈'으로 모신 것은 일종의 외교적 승리였다. 연도에는 수십만의 시민이 동원되어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뜨거운 환영의 깃발을 펄럭였다. "가봉의 봉고 대통령인지 봉고의 가봉 대통령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서울대학교는 그에게 명예학위를 주는데 애처롭게도 그 학위증서에는 이름이 틀려 있었다.

그 외에도 경희대학교 의료원에서는 보약을 안겨 주었고, 가봉 수도에는 15층짜리 백화점을 지어주기로 했으며, 기아자동차에서 개발한 신형 승합차에는 '봉고'의 이름이 붙여졌다. 정말 봉고가 그 봉고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2007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봉고 대통령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은 답사에서 "한국 첫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내 이름이 한국의 한 미니버스에 붙여졌다"고 밝힌 것이다. 환대가 얼마나 지극했던지 봉고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머문 뒤 출국한다. 바로 이때를 겨냥해서 '성접대설' 소문이 난다. 누가 흑인 애를 낳았다더라 하는 그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바로 봉고 대통령이었다. 사실 봉고 대통령은 자국에서 굉장한 엽색행각을 벌인 인물이기도 했다. (자녀 150여명)

1982년 8월 17일 가봉이 독립기념일에 전두환은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떠난다. 내가 왜 이를 기억하는가 하면, 그 더운 여름날 전두환 5개국 순방 기념 우표를 사겠다고 우체국 앞에서 날밤을 샜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표 수집 취미가 무슨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레이건 방한 기념우표, 동남아순방 기념우표는 요즘 말로 '득템'의 대상이었고 "10년만 지나면 가격이 100배가 될" 보물이었다. 하긴 지금 그 우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정도 가격이 될 것도 같다. 각설하고, 순방 기간 중 가봉에 도착하여 엄숙한 표정으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전두환의 얼굴은 곧 흙빛으로 변한다.

가봉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이 애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북한 애국가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건 장세동 안기부장이었다. 그는 달려나가 군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내리쳤다. 이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양국 관리들은 사태를 파악한 뒤 얼어붙어 버렸다. 전두환도 선불맞은 짐승처럼 흥분했다. 이때를 목격한 당시 외교관 배상길의 <내가 만난 아프리카>에 따르면 전두환은 수행원들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격노했고 가봉 방문 취소하고 돌아가자고 우겼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의 외교 관계는 결렬 수준이 될 것은 뻔한 일, 수행원들은 가까스로 전두환을 설득했고 가봉 봉고 대통령은 정중히 그 결례를 사과한다. 냉전 시대, 그리고 그 다음해 북한이 전두환의 목숨을 노려 아웅산에 폭탄을 설치하던 시대의 가봉의 실수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촌식을 할 때 남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펄펄 뛰는 것을 보고 나는 옛날의 전두환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웃었다.

우리에게 '봉고차'라는 한국어 단어를 선사한 인물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나라, 남북한의 유치하기까지 한 출혈 외교의 증인이자, 그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간직한 나라 가봉이 1960년 8월 17일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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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8.18 도끼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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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1976년 8월 18일 박철 중위와 문재인 상병

"양키들이 우리 초소 앞까지 들어왔습네다. 트럭에 무슨 장비까지 싣구 왔습네다. 군관 동무." 다급하게 달려온 인민군 병사는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뭐이? 4초소 앞 말이오? 그 아새끼덜 또 미루나무 베러 온 거이가?" 인민군 박철 중위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12일 전 8월 6일에도 UN군 초소에서 인민군 초소를 감시하는 시계(視界)가 불량하다는 이...
유로 남조선 근로자들이 높이 12미터의 미류 나무를 베러 들어온 것을 호통 쳐서 돌려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양키 장교가 직접 남조선 아이들을 이끌고 미류 나무로 왔다는 것이다. 박철 중위는 경비병들을 이끌고 달려 갔다. 미군 지휘관은 보니파스 대위. 한국 근무 3일 남은 갈참이었다.

"뭐하는 건가." "관측에 방해되는 가지를 치러 왔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인민군도 보고만 있었고 미군과 한국군, 한국 노무자들도 평온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한창 작업이 진행되는데 박철 중위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 이상 가지를 자르는 건 용납하지 않갔다." 보니파스 대위도 한국 짬밥이 많았던 터에 그 정도 으름장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 한국인 노무자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작업을 계속했는데 갑자기 인민군 경비대원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대거 현장에 도착했다. 작업반이 완전히 포위되었을 때 박철 중위는 느릿느릿 시계를 풀어 손수건에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살기 어린 한 마디를 부르짖는다. "죽여."

보니파스 대위가 구타를 당해 쓰러진 후 인민군 한 명이 작업자들에게서 빼앗은 도끼를 그 뒷머리를 향해 휘두른다. 보니파스 대위 절명. 인솔 장교 중의 하나인 바레트는 필사적으로 UN군 초소 쪽으로 도망갔지만 이내 덜미가 잡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폭행을 당한 후 후송 중 사망한다. 불과 3분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근처에서 무비 카메라를 돌리고 있던 미군에 의해 고스란히 촬영되었다. 이른바 8.18 도끼 만행 사건이다.

월남 해방 이후 패전국 미국은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수치심에 떨고 있었다. 심지어 캄보디아 해군이 미 상선을 나포하는 기염을 토할 정도였으니 자존심에 금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져 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그렇게 절치부심하는 와중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 그것도 장교가 두 명씩이나 총에 맞은 것도 아니고 도끼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미국을 격동시켰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휴가 중 전투기 뒷자리에 앉아 복귀했고 휴전 이후 최초로 한국에는 '데프콘 3', 이후 데프콘 2 (이건 전쟁 직전 상황이다)까지 발동됐다. "우리도 다쳤다."고 북한이 우겼고 "미리 조작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 장면을 카메라가 상세히 찍고 있었겠느냐"고도 항변을 해 봤지만 어쨌건 도끼를 휘두른 건 빼도박도 못할 북한 군인이었다. 보니파스가 도끼날을 향해 뒤통수로 다이빙하지 않은 한.

북한도 전시 체제를 발동했고 평양 시민 수십만명이 소개 내지는 지방으로 재배치됐다. 그러나 미국의 무력은 기가 질릴 만큼 압도적이었다. 항공모함 세 척이 한반도로 접근했고 괌에서 날아온 폭격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도 거기까지였다. 또 다른 전면전을 감당하기에는 그들은 아직 월남전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택한 전술적 목표(?)는 문제의 미류 나무였다. 일단 여차 하면 때려 버린다는 시위를 하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그 나무를 베어 버리는 세레모니를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여차하면 이 작전의 산통을 깨겠다고 작심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군이었다. 나무를 자르면서 혹시나 모를 확전을 경계한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 경계 병력에게 '몽둥이'를 들 것을 명령한다. 한국군은 이를 수용하는 체 하면서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M16 소총을 분해하여 몸에 지닐 것을 지시하고 천만뜻밖의 명령을 내린다. 북한 아이들이 무슨 움직임만 보이면 바로 쏘아붙이고 북한군 초소까지 때려 부수라는. 즉 '도발' 명령이었다. 그야말로 전쟁의 머리카락을 잡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문재인이라는 이름의 상병이 있었다.

그들이 총을 꺼내들었을 때 미군들은 기절할 듯 놀랐다. 한국군은 북한군 초소를 박살내는 동안 이를 저지하려던 미군 머리에 총까지 겨눴다. 초소 세 개가 아작이 났다. 그러나 북한은 끝내 침묵한다. 근처에서 그를 지켜보는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도발하지도 말고 도발에 대응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지키고 있었다. 기세 좋게 초소를 때려부수는 한국군들도 머리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총성 한 발이라도 울린다면, 숫제 누군가 오발이라도 했다면 특공대 64명은 물론 60만 한국군과 3천만 한국 국민, 그리고 2천만 조선 인민 태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인민군 박철 중위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급한 성미와 난폭한 성품으로 유명했다는 그 역시 욕지거리는 내뱉었을망정 "죽여!"소리를 입 밖에 다시 내지는 못했으리라.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 데프콘2가 발동된 상황에서의 미루나무 제거 작전은 끝내 충돌 없이 끝났다. 현장에 투입됐던 특공대원 하나는 대통령을 꿈꾸며 야당 후보 경선에 나서고 있지만 사건의 당사자였던 인민군 박철 중위는 오늘을 맞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관광객이 판문점을 통해 망명했을 때 UN군과 인민군 경비병들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일어났고 그때 수백 미터 남쪽까지 내려와서 망명객을 사살 내지 체포하려던 인민군들 가운데 세 명이 벌집이 되어 죽었는데 그때 인민군들에 의해 수습된 시신 중의 하나가 바로 박철이었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남과 북은 여차하면 붙는다는 생각을 쌍방간에 하고 살았다. 그러니특공대를 청와대 까러 보내기도 하고 우습게 놀면 쓸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적의 초소를 때려부수는 시위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터지면 한반도 전체는 공포에 시달렸고 빙하기처럼 얼어붙었다. 북한은 이 사건 후 무려 1년 반 동안 전시태세를 풀지 않았고 남한의 '총력안보' 태세는 반대자들을 질식시키고 겨울 공화국의 독기를 끌어올렸다. 전쟁의 위기는 이 말고도 많았지만 전쟁의 문지방을 밟았던 사례로서는 1976년 8월 18일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포스팅은 2010년 11월호 신동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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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19 자유의 절규를 알린 언론인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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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8.20 매독으로부터의 모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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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5년 8월 20일 매독으로부터의 해방자 별세

크리스토퍼 콜롬부스, 에이브러햄 링컨, 빈센트 반 고호, 폴 고갱, 모파상, 슈베르트, 니체..... 위인전에서나 세계 문학전집에서 즐겨 보았을 이 이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공통점은 그다지 저 위인들의 이름에 걸맞게 우아하지만은 않다. 그들은 매독 환자들이었다. 매독이라는 병은 온갖 병균을 신대륙에 쏟아부었던 유럽인들에 대한 신대륙의 유일한 복수...
였다는 설도 있고 매독 역시 구대륙의 소산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쨌건 매독은 콜롬부스의 항해 이후 이탈리아에서 대유행했고 이후 수백년간 수천만 명을 죽인 1급 살인자로서 그 악명을 떨친다.

오랫 동안 이 질병은 사실 뚜렷한 치료법이 없었다. 항균 효과가 있는 수은을 바르고 먹기도 했지만 수은은 세균 뿐 아니라 인간도 충분히 죽일 힘을 지닌 물질이었다. 매독 환자는 매독으로도 죽었지만 수은 중독으로도 죽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매독은 참으로 근절하기 어려운 병이었다. 대단한 호색한이었고 기회가 오면 결코 놓치지 않고 하루에 스무 번이 넘도록 섹스를 했다는 정력가 모파상의 절규는 매독의 참혹함을 여실히 증명한다. "내 뇌는 지금 점점 물렁물렁해지고 있습니다.....밤이면 뇌가 끈적끈적한 액체 상태로 변해서 제 입과 코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제 말은,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미쳐 가고 있습니다! 제 머릿속은 뒤죽박죽 혼란스레 뒤엉켜 있습니다"



그의 뇌는 매독균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는 착란 속에 총을 난사하거나 칼로 자기 목을 자르려는 등 광란의 말년을 보내야 했다.

중국인들이 몽골인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매독균에 오염된 담요를 뿌렸다는 설이 있을만큼 동서고금의 인류에게 사악한 공격자였던 매독은 20세기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인류의 추격에 뒷덜미를 잡히게 된다. 일본 지폐에도 등장하는 의학자이며, 일본만화 <닥터 노구찌>의 모델인 노구치 히데요가 매독균을 발견했던 것이다. 노구치 히데요는 전신마비로 고생하는 환자의 뇌에서 매독을 일으키는 병원체인 '트레포네마 팔리둠'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그런데 매독 연구가들에게는 또 다른 적이 있었다. 매독 치료법 개발 자체에 반대하는 이들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매독은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며, 이를 치료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불경이라고 우겼다. 여기에 대해 요쿠르트 이름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메치니코프가 반박한 말은 이것이다. "매독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부도덕한 주장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매독의 창궐을 막지 못했으며 결백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도 했다.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부도덕한 일이다.”

파울 에를리히도 매독 치료법에 도전한 의사 중의 하나였다. 어렸을 적 문학 교사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냈을 때 "인생은 산화(酸化)작용이다. 꿈이란 뇌의 활동이고 뇌의 활동이란 단지 산화작용이다."라고 써서 내는 바람에 문학 교사로 하여금 거품을 물고 분노하게 했던 괴짜였던 그는 의과대학에 가서도 의대생이면 당연히 외워야 할 의학 용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의사라면 또 한 번 당연히 익숙해져야 할 환자들의 비명, 신음 등등의 풍경을 보는 것도 질색을 하는 기이한 의대생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탄저병균을 발견한 코흐의 연구에 흠뻑 빠졌고 코흐의 제자가 되어 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 사냥에 인생을 건다. 얼마나 그가 연구에 몰두했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서 열리는 축하 파티를 까먹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초대장을 발송할 정도였다. 뭐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옷에든 커튼에든 벽에든 닥치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단상을 끄적였다.

어느 날 그는 동물에게 염료를 주사하면 특정 부위만 색깔이 변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에를리히는 이에 착안해 '동물의 몸을 가운데 특정 부위만 염색하는 염료가 있다면 사람의 조직에 있는 세균만을 가려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즉 정상세포는 죽이지 않고 사람을 괴롭히는 미생물만 죽이는 화학적 약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에 붙여진 표현대로라면 ‘마법의 탄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비소 화합물로 이루어진 606호 약물을 생산해 냈다. 토끼에 매독균을 주사한 뒤 실험을 했더니 성공이었다. 이윽고 매독에 걸려 더 이상 손 쓸 수 없이 죽어가던 사람 역시 한 번의 주사로 일어났다.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가장 효율적인 매독 치료제였던 ‘실바르산’ 606이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1908년 노벨상을 수상했고 독일 의학 대회에서 이 사실을 보고한 순간 연설을 이을 수 없을 정도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다. 금전적 보상에 관심이 없던 그는 임상 실험의 부족과 부작용 우려를 이유로 약의 빠른 공개를 거절했지만 사업가들은 이를 냉큼 세계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 가장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했고 법정 투쟁까지 벌여야 했던 것은 다름아닌 에를리히였다. 어쨌든, 500년간 천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던 인류 최고 최대의 적수 가운데 하나는 괴짜에 연구벌레이자 돈 같은 건 모르는 우직하지만 격정적이었던 과학자에게 무릎을 꿇었고, 에를리히는 그 영광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난다. 1915년 8월 20일이었고 영국의 타임즈는 “전 세계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기사로 그의 죽음을 기린다.


그가 발명한 매독 치료제 이름 ‘실바르산 606’은 언제 들어도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든다. 606이란 605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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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년 8월 21일 할렐루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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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741년 8월 21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입식 교육의 희생자이면서 모범적인 이수자였던 나는 아주 오랫 동안 한 음악가의 성별을 착각했었다.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의 선율은 몰라도 그의 별명이 “음악의 신동”이었음은 알았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은 몰라도 그가 ‘악성’(樂聖)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기억했으며 쇼팽의 폴로네이즈 선율은 구별 못해도 그를 일컫는 이름이 ‘피아노의 시인’인...
건 종종 시험에 나와서 틀려봐서 안다. 그리고 음악의 아버지는 바하였고 음악의 어머니는 헨델이었다. 착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명 때문에 나는 근1년 동안 결코 앉아서 오줌 눈 적이 없었을 (그 시절엔 특히!) 헨델을 여자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독일인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음악 활동을 오래 했고 영국에서 오래 살다 죽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하기사 당시의 영국 왕실도 혈연을 따지다보니 어영부영 왕이 된 독일 귀죽 출신의 하노버 왕가였으니 그가 영국에서 오래 살고 그곳에 뼈를 묻은 것이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헨델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우선 그의 출신부터. 모짜르트건 베토벤이건 대개는 음악적 소양과 자질이 충만하거나 최소한 그쪽에 발을 걸친 집안 출신들이었지만 헨델의 경우는 가족 중 음악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이 음악에 관심을 보일라치면 매섭고도 무섭게 아들의 관심을 틀어막았다. “넌 법률 공부를 해야 해.” (20세기 한국에도 이런 일이 흔했다.)

하지만 헨델은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혼자 다락방에서 클라비코드 (피아노의 전신쯤 되는 악기)를 뚱땅거리면서 연습했고 이는 어디선가 들리는 낭랑한 소리를 추적해 들어간 아버지에게 발각되기까지 지속됐다. 동서고금 어디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이라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에게 음악의 길을 허락하게 된다.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지만 헨델 또한 격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음악적 해석의 차이로 다툼을 빚은 동료 음악가와 결투를 벌인 것은 유명하다. 이때 동료 음악가의 칼끝이 헨델의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갔지만 그 조끼 단추에 걸려 구사일생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음악의 아버지 바하가 사실 그 대표곡 중의 하나인 <마태 수난곡>이 멘델스존에 의해 발견되는 등 당대보다는 후세에 더욱 ‘음악의 아버지’로서의 명성을 쌓았다면 헨델은 당대에 인정받았던 작곡가였다. “독일적 중후함과 프랑스적인 장려함, 이탈리아적인 명료함” (전 객석 편집장 류태형)을 두루 갖춘 그의 재능은 한창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영국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그는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의 악단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에서의 활동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지 않았는데 별안간 이 하노버 선제후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등극하는 인생의 새옹지마를 경험한다. 배신의 죄를 어떻게든 사함받아야 했던 헨델이 낸 아이디어는 매우 로맨틱했다. 조지 1세가 템스 강에 배를 띄우자 자신의 악단을 그에 접근시켜 음악을 통해 조지 1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것이 <수상 음악>이다.

잘나가는 인생이든 그렇지 못한 삶이든 부침이 없을 수는 없다. 항상 절정의 인기를 누려 온 음악가 헨델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일종의 워커홀릭이었다. 작곡 뿐 아니라 극장 운영이나 하다못해 무대의 디자인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할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누가 지운 책임이든 책임이 많으면 고통이 큰 법이다. 작곡한 오페라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파산에 직면했을 때 빚쟁이들은 그의 오선지에서 콩나물이라도 거둬 가겠다는 듯 집요하게 찾아와 괴롭혔으며, 비평가들은 독설을 쏟아냈고 청중들은 그의 작품들을 외면했다. 급기야 1736년 그는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의사의 진단은 반신불수였다. 음악가로는 사형선고였던 셈이다. 그러나 헨델은 온천행 등 갖가지 방법을 통해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하고 그 이전보다 더한 열정으로 작곡에 매달린다.

1741년 8월 21일 헨델은 그로부터 근 2주일 동안 광기와도 같고 열병과도 같은 영감에 시달린다. 그는 거의 침식을 잃은 채 일종의 종교적 환희에 사로잡혀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써낸다. 즉 1741년 8월 21일은 잘나가다 코 깨지고 맘 상한 음악가의 재기에 대한 열정과 종교적인 영감, 그리고 뭔가 대박을 터뜨리고 싶은 한 음악가의 세속적 열망이 짬뽕이 되고 서로의 하이라이트만 뽑아 내어 인류에게 커다란 예술적 선물로 구성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 유명한 <할렐루야> 대합창을 비롯해서.

월간정보자 <예술의 전당> 기자였던 노승림에 따르면 이 오라토리오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완성한 후 근 하루를 밥도 안 먹고 쓰러져 잤다는 헨델은 또 욕심을 낸다. 입장료 수입을 감안한 나머지 이 경건한 종교 음악을 교회에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일종의 유흥 지역인 코벤트 가든에서 연주하려고 했고 그로 인한 괘씸죄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결국 초연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뤄진다. 이때 “최초 공연 수익금은 환자와 죄수들을 위해 헌정되지만 기타 수익금은 작곡가의 몫”이라고 말하는 아일랜드인 앞에서 헨델은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감동적인 멘트를 날린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돈은 한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나 또한 다른 분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환자였습니다. 지금은 건강해졌지만요. 나 또한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나를 해방시켰습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쯔바이크, 자작나무)

그렇게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행해진 <메시아> 초연은 경이적인 환호를 불러일으키고 다시 런던으로 수입된다.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퍼질 때 영국 왕 조지 2세가 무아지경의 감동에 빠져 일어서고 나머지 청중들이 따라 일어선 이래 이 합창이 울려퍼질 때 기립하는 전통이 세워진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할렐루야>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또 종교적 신심을 북돋우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 작품이 처음으로 그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다름아닌 작곡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실패보다는 성공에 익숙했고 바닥보다는 구름 위를 주로 거닐었던 인기 작곡가가 바닥을 경험한 후, 그리고 탐욕의 복수까지도 맞닥뜨린 후 자신의 작품에 대해 던진 한 마디는 그 음악만큼이나 울림이 크다. “나 또한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물론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 노래를 들으며 아멘을 부르짖으면서 더 죄인이 되어 가는 느낌이 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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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8.22 노동자 이석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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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8.23 실미도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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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1년 8월 23일 실미도의 아침

약 천만 명이 1971년 8월 23일의 아침을 보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날 죽고 산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어슴푸레 기억할 것이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서다. 1968년 청와대 까러 온 김신조와 그 동료들 31명에 똑같이 맞추어 31명으로 편성된 대북 특수 부대요원들이 이날 실미도를 쑥밭으로 만들고 뭍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부대...
원들에게 '부대 말소' 사실을 흘리고 자결하는 부대장은 실제로는 비참하게 맞아죽는다. (물론 그 사실을 흘린 것 또한 설정이다.) 그리고 '부대 말소 명령'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변소에 숨어들어 살았던 기간병의 이야기는 사실이고 (지금도 그때 변소가 실미도에 남아 있다는데) 정든 기간병을 죽이지 못해 살려준 특수부대원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간병들이 이날 새벽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처참하게 죽어간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고 왜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 행보가 어땠고 어디에 죽었는지는 영화를 통해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근처에 가면 여기까지 실미도 부대가 왔었구나 싶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 말이다. 다 비슷할 것이다. 천만 명이 그 영화를 보고 추석 설날 명절 때 툭하면 틀어주는 영화인데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적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고생하며 바닥을 기다가 결국 깡패가 되었고 사람을 죽인다. 그는 사형수가 되지만 '국가'에서 나온 이들이 그를 찾아온다. 값없이 죽을래 국가를 위해 봉사할래. 영화 속에서 실미도 부대원들은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로 채워진 것으로 나온다. 이른바 사회의 쓰레기들, 양아치들,사형수들, 기타 죄수들 등등. 하지만 청와대를 까러 왔던 124군 부대를 되짚어 보자. 그들 31명은 어중이 떠중이를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 전원 인민군 장교들이었다. 사실 이런 류의 막중한 임무에 사형수나 기타 죄수들만의 부대를 만들어 투입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아니할말로 여기서 바닥 이하였던 사람들이 무슨 사명감이 불타올라서 김일성의 목을 딴단 말인가. 관련자들의 증언을 들어 봐도 실미도 부대원들 중 전과자는 있었지만 그들 31명 (7명은 훈련 중 사망) 이 전원 죄수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한다. 모두 죄수들이었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들 일부 또는 대다수가 죄수가 아니었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실미도 부대원이 됐고, 그들은 누구였는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들이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하기 전 한 대원은 기자에게 자신의 출신과 이름을 밝힌다. "충북 옥천 사람 박기수" 이는 그 당시 신문에 실리기도 했던 사실이고, 실제로 충북 옥천에는 박기수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와 기자를 찾았을 때는 이미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한다는 입장이었고 그예 흐지부지된다. 그런데 충북 옥천에서 사라진 것은 박기수 뿐만이 아니었다. 또래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니던 7명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군대를 필한 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조금만 고생하면 평생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7명 가운데 범죄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미도 부대 옥천 사람" - 이안재 옥천신문 대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김중권 전 민주당 의원도 "대전역 근처에서 모집한 건달들"이라고 했다.

유한양행 앞에서 수류탄 폭발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4명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군인 신분이 아니었지만 군법 재판을 받았고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중권 민주당 의원은 그들이 상고해 봤자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다고 증언한다. "사형 집행 당시 한 명은 ‘김일성 모가지에 총구멍을 내지 못하고 가는 게 한스럽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최후진술에서도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도 않았으며, 예상보다 의연했습니다."

하기사 그들 손에 수십 명의 인명이 사라진 이상 살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것은 결국 국가였다. 그들은 왜 '특수범'으로 낙인찍혀야 했으며, 옥천 사람 7명을 제외한 이들은 다 어디에서 끌려온 누구이며, 그들은 왜 청와대로 가려고 했을까. 평양 침투 훈련을 받은 이들이 산개하여 숨어들었다면 오히려 다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왜 한데 어울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서울로 달려왔던 것일까. 난동이 시작되기 이전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었을까. 국가는 과연 약속을 지켰을까. 하다못해 실미도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괴로움 속에 살았는데 국가는 그들에게 넉넉했을까. 죽음 앞에서도 김일성 모가지를 따지 못해 한스럽다던 사형수 앞에서 '반공제일주의 국가'는 부끄럼이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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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8.24. '애국시대'의 종말, 통혁당 검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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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25일 포로가 된 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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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27 이주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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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2년 8월 27일 이주일 사망

나의 유년 시절을 가르는 위인은 단연 박정희 대통령이다. 내 기억은 대개 ‘박정희 전’과 ‘박정희 죽은 후’로 나뉜다. 이를테면 소풍 가서 벼랑에서 굴렀던 건 박정희 죽기 전이었으니까 3학년때 소풍이었다는 식이다. 그 박정희가 죽던 해 실로 기상천외한 연예인이 혜성과 함께 나타났다. 전두환이 등장해서 없애 버렸던 TBC에서 했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프로그램에...
서였다. 타잔 역을 하던 윤수일이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실수로 누군가 부딪치는 바람에 그 사람은 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왔다. 그런데 그 몰골이 가히 몇 년 뒤에 나왔던 영화 ET가 물에 젖은 급이어서 방청객들은 경악 속에 배꼽을 잡았다. 쟤 누구냐?

그것이 ‘데뷔’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방송 데뷔가 처음은 아니었다. 몇 달 전 술자리에서 만난 MBC PD의 섭외로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다가 “어디서 저런 구역질나는 인물을 출연시키느냐”는 시청자의 항의와 “방송용이 아니다”는 내부 평가로 바로 잘린 바 있었고, KBS <여의도 청백전>에서는 ‘수지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뒤로 빼로 걷는, 그 후로 전설이 된 동작을 선보인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이었다. 물에 빠진 ET 이후 두 번째 출연 코너에서 그는 골든벨을 울린다. 환자 눈을 까뒤집으면서 “운명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하는 역이었는데 긴장을 했는지 설정이었는지 이 못생긴 의사 선생님이 자기 눈을 뒤집으며 “운명하셨습니다.”고 해 버린 것이다. 환자의 용태를 묻던 뚱보 코미디언 최용순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까지 끅끅거렸고 방청객은 물론이고 스탭들까지 자지러졌다. 단 2주일만에 그는 스타가 됐다. 그래서 그 이름도 정주일에서 이주일로 바꿨다. 코미디언의 황제 이주일의 등장이었다.

원래 그는 강원도 고성의 부유한 집의 독자였다. 전쟁의 참화는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압박을 이기지 못해 38선 이남으로 왔던 이주일의 가족은 전쟁이 터지자 산속으로 피난을 했고 국군이 다시 수복한 이후 물정을 알아보러 아버지만 돌아갔는데 그만 1.4 후퇴 때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좌익들은 이 반동분자에게 이후 건강을 잃어버릴 정도로 잔인한 테러를 가했다. 또 그 땅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 좌익분자들은 공개석상에 세워져 그 죄상을 고발당했고 이주일은 아버지를 괴롭힌 놈들을 죽이겠다고 설쳤는데 그때 아버지는 분노로 입술이 찢기도록 입을 깨물면서도 “적을 사랑하라는 옛 어른 말씀을 모르느냐?”라고 아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운동 신경이 유난히 뛰어났던 그는 축구의 명문으로 유명한 춘천고의 주전 라이트 윙이었고 친구 박종환과 함께 축구 명문 경희대학교에 입학이 결정된다. 그렇게 정해진 코스로 갔다면 한국 축구사의 한 획을 그은 박종환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축구계 인사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고향에서 보내온 입학금을 섰다판에서 날리는 불상사만 없었더라면. 이 불상사로 바로 머리 깎고 군에 입대한 그는 예능적인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문선대의 총아가 된다. 불량끼 있는대로 발산하던 고교 시절 여학생 때문에 시비가 붙어 “다 덤벼!”라고 호기를 발휘하다가 보트 젓는 노에 면상을 강타당해 내려앉은 코를 중심으로 한 그의 외모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 동안 무명이었다. 그 못생긴 외모로 도움도 받았지만 설움도 무지하게 받았다. 기껏 어딘가에 자리를 얻으면 “뭐 저런 걸 쓰느냐?”는 지청구는 예사고 심지어는 발길질 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렇게 쫓겨난 뒤 설움을 달래러 해장국집에서 소주 한 잔 하려는데 아침부터 못생긴게 재수없다고 주인이 또 쫓아냈을 때에는 아마도 국으로 죽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스타가 됐다. 2주일만에. 그런데 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 사람 죽이고 들어서서 ‘정의 사회 구현’을 부르짖던 정권이 ‘퇴폐 연예인’으로 낙인을 찍고 출연정지를 시켜 버린 것이다. 이주일도 경탄해 마지않을 코미디였다. 하지만 이주일은 TV보다도 밤무대에서 더 위대한 황제로 군림했다. 극장 식당 물랭루즈, 유흥업소였지만 갈비집 이름 같았던 ‘초원의 집’ 등에서 그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최고의 줏가를 올렸다. “제가 방송 출연이 정지된 것은 중계방송을 못해서 그런 겁니다. 연날리기 대회였습니다. .... 한 년, 두 년.... 온갖 잡년은 다 모였습니다.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연놈’도 있습니다.....” 턱 나온 년과 까진 연놈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적어도 그 시절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한 프로였다. 일찌기 이리 다이나마이트 폭발 사고때 엉멍이 된 공연장에서 당시 극단의 최고 스타 하춘화를 구해 나오다가 하춘화가 담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자 “내 머리를 밟고 뛰어내리라.”고 외쳤던 그 근성으로 그는 코미디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았고 철저히 수행했다. 그와 같이 정씨 가문의 독자였던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3일 뒤 그는 SBS 개국 축하 기념연에 등장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박철언씨와의 관계 개선을 해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천연덕스럽게 사람들을 웃긴다. 그 죽음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그를 풀기 위한 흡연으로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만큼 큰 충격이었으면서도.

친구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오일 달러를 내세운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말도 안되는 심판 판정으로 5대4로 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바로 싱가포르로 달려가 한국 응원단 앞에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응원을 주도했던 그는 죽음 앞에서 한때 그의 전반부 인생을 밝혔던 축구 경기를 위해 마지막 외출을 감행한다. 2002년 한국의 16강 진출을 결정하던 포르투갈 경기를 그는 휠체어를 탄 채 지켜 보았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동심과 젊음으로 돌아간다. 그 오리걸음을 흉내내려고 애썼던 시간들, “일단 한 번 와 보시라니깐요.”의 코맹맹이 소리를 연방 따라하던 친구들의 웃음 소리. “말 되네.”라는 유행어 (순전히 개인적인 추정으로 이전의 한국어에서 말이 안된다는 말은 있었지만 말 되네! 소리는 이주일의 카피 이후 생긴 게 아닌가 한다)를 연발하여 후루룩거리던 라면, 그의 수십년 전 외상값까지 긁어내던 대한민국 정보 기관의 진짜 코미디, 그리고 국회의원을 마치고 “코미디 잘 배우고 간다.”던 냉소적인 코멘트까지. 그 모든 것을 남기고 이주일은 갔다.


이 포스팅은 고 이주일이 쓴 ‘이력서’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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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8,28 루터킹의 연설... 그가 한국에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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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8월 28일 I have a dream, 루터 킹이 우리나라에 온다면

...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 앞에서 마틴 루터 킹은 역사적인 연설을 한다. 만약 2012년 대한민국에 온다면 (나이 여든 넷이니 생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이런 연설을 하지 않았을까...... 그 두 연설(?)을 발췌하여 대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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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킹 (2012. 8. 28) I have a dream in Seoul


한국 역사에서 감동적인 자유를 위한 노래가 태어난 날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오늘 작곡됐다)로 역사에 기록된 오늘 나는 한국인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42년 전, 그리고 제가 워싱턴 기념관에서 제 꿈을 외쳤던 날로부터 꼭 7년 뒤 한 한국인이 고심 끝에 한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작곡가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는 위대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이라고 부르짖으면서 수많은 젊음들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는 선언은 독재와 폭력에 시들어가던 수천만 한국인들에게 꺼지지 않는 희망의 횃불로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후에도, 여러분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후에도, 여러분 머리 위의 태양은 한낮의 찌는 더위로 여러분의 숨을 막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그 맘에 알알이 맺힌 설움들을 버리고 광야로 떠나야 합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중년을 맞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물질적 번영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한가운데 떠나디는 쓰레기의 바다처럼, 빈곤에 허덕이는 한국인들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40년 전 아버지의 독재 정권의 마스코트였던 이가 이 나라의 권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 년이 지난 후에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선진 조국에 진입했다는 나라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풀이 죽고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수치스런 상황을 알리고자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저는 대한민국의 수도에 온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은 그 헌법에 숭고한 단어들을 써넣었으며, 모든 한국인들이 상속받아야 할 약속어음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약속어음은 모든 국민들에게 행복의 추구와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가 그 약속어음에 대한 지급 의무를 방기하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이 신성한 의무를 존중하지 않고서, 대한민국은 잔고부족이라고 표기되어 되돌아 온 수표, 부도수표를 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중략)

이건 아니다!를 부르짖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쯤 당신들은 만족하겠느냐?"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공권력도 아닌 사적인 깡패들의 폭력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의 희생자가 되는 한.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뼈빠지는 노동이 평온한 저녁과 내 가족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사용자의 이익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한,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 때에 절은 몸을 씻으려 할 때 "정규직 전용 샤워 시간"이라 쓰여진 문구 앞에서 맥없이 돌아서야 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출근 시간에 쫓겨 투표조차 할 수 없고 찍어 줄래도 도무지 찍어 줄 사람들이 없다고 한탄하는 한. 절대로, 절대로,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정당함이 거대한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거대한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여기에 왔다는 것을 나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좁은 감방에서 이제 막 나왔습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자유에 대한 당신의 요구가 당신을 박해의 폭풍 앞에서 부서지게 하고 공권력의 만행이란 바람에 비틀거리게 했던 곳에서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의미 있는 고통에 익숙해진 노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고통도 과분하다 여기고 보상을 받으리란 믿음으로 계속 해나가십시요.

돌아가십시오. 울산과 거제로, 인천으로, 빛고을 광주로, 5대 대도시들의 빈민가와 임대주택단지들로, 어떻게든 지금의 이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그리고 변화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서 돌아가십시요. 절망의 계곡에서 몸부림치지 말자고,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대한민국 헌법에 깊이 뿌리를 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참뜻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부산의 한진 조선소 크레인 밑에서 한때 짓밟고 짓밟히던, 그리고 목이 쉬게 외치던 그 모든 이들이 형제애로 뭉쳐 평등하게 노를 저을 수 있으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묻지 마 지지의 열기로 무더운, 비이성의 광기로 찌는 듯한 경상도마저도 그들이 20년 전만 해도 늠연히 간직했던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다시 들어올리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분의 아이들과 손주들이 재력과 스펙과 외모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개별적인 존엄이 존중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세습해 보겠다며 제 새끼들을 우선적으로 취직시키라는 단협을 내세우는 ‘정규직’ 노동자들, 똑같이 노동하는데 너는 내 돈 절반을 받아가도 비정규직이니 할 수 있냐는 인간차별주의자들, 헌법에 규정된 노동권과 파업권조차 “연봉 얼마짜리가 무슨 파업이냐”고 무시하는 대통령, 빳다로 직원들을 후려치고 슬리퍼로 뺨을 때리고 용역들을 투입시켜 자신의 부를 형성해 준 노동자들을 짓밟는 사악한 이들이 무릎을 꿇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들은 메워지고, 모든 언덕과 산들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며, 이것이 내가 평생을 지켜 온 신념입니다. 이 신념으로써,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깎아 희망의 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써, 우리는 대한민국의 살벌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교향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써, 우리가 언젠가는 자유로워 질 것이라 믿으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며,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날이, 이 날이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그리고 세계 인류가 새로운 의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중략)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침내 자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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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돌아가서..... 1963년 8월 28일 킹의 진짜 연설 발췌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자유를 위한 가장 위대한 시위가 있었던 날로서
역사에 기록될 오늘 나는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백년 전,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의 상징적 그림자의 주인공인, 한 위대한 미국인이,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중대한 법령은 억압적 불평등의 불길에 타들어가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위대한 희망의 횃불로서 다가왔습니다. 그 법령은 그들의 길었던 구속의 밤을 종식하는 기쁨의 새벽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백년이 지난 후에도, 분리의 수갑과 차별의 쇠사슬에 의해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슬픈 불구의 상태입니다. 백년이 지난 후에도, 물질적 번영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빈곤의 섬에서 흑인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년이 지난 후에도, 흑인들은 미국사회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풀이 죽고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수치스런 상황을 알리고 바꾸고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수도에 온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헌법과 독립선언문에 숭고한 단어들을 써넣었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상속받게 될 약속어음에 서명하였습니다. 그 약속어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백인들처럼 흑인들에게도, 생존,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보장된다는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시민들의 피부색과 관련하여서만은 지금까지 그 약속어음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 신성한 의무를 존중하지 않고서, 미국은 잔고부족이라고 표기되어 되돌아 온 수표, 부도수표를 흑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중략)

(지금의)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흑인들이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고 적당히 만족할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만약 이 나라가 예전의 그 일상으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면,
거친 깨달음을 얻게 될 것 입니다. 흑인들이 그들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전까지 미국에는 휴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저항의 회오리바람은 정의가 출현하는 밝은 날이 올 때까지
우리나라의 기반을 흔들 것입니다.

(중략)

인권운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쯤 당신들은 만족하겠느냐?"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이 경찰들의 만행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의 희생자가 되는 한.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여행의 피곤으로 무거울 때 고속도로의 모텔과 시내의 호텔에서 잠자리를 얻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이주의 권리가 (그저) 작은 구역에서 큰 구역으로의 이동인 한.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이 자존심을 박탈당하고 "백인 전용"이라 쓰여진 문구에 자신들의 존엄성을 강탈당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조차 할 수 없고 뉴욕의 흑인들이 투표할 대상이 없다고 믿는 한. 절대로, 절대로,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정당함이 거대한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거대한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여기에 왔다는 것을 나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좁은 감방에서 이제 막 나왔습니다. 여러분들 중 일부는 자유에 대한 당신의 요구가 당신을 박해의 폭풍 앞에서 부서지게 하고 공권력의 만행이란 바람에 비틀거리게 했던 곳에서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의미있는 고통에 익숙해진 노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고통도 과분하다 여기고 보상을 받으리란 믿음으로 계속 해나가십시요.

돌아가십시요, 알라바마로, 남부 캘리포니아로, 조지아로, 루이지애나로, 북부 도시들의 빈민가와 흑인거주지로, 어떻게든 지금의 이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그리고 변화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서 돌아가십시요. 절망의 계곡에서 몸부림치지 말자고,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오늘 여러분께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과 내일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을 우리는 자명으로 유지한다"라는 이 나라 강령의 참뜻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로 무더운, 억압의 열기로 무더운, 저 미시시피마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 색깔로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개별성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는 알라바마주, 연방정부의 법과 조치를 따르지 않겠다는 발언을 내뱉는 주지사가 있는 알라바마주, 언젠가는 바로 그 알라바마주에서, 어린 흑인 소년들과 어린 흑인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들과 어린 백인 소녀들과 형제자매로서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들은 메워지고, 모든 언덕과 산들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이것이 내가 남부로 돌아갈 때 함께 하게 될 신념입니다. 이 신념으로서,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깎아 희망의 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써, 우리는 우리나라의 소란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교향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써, 우리가 언젠가는 자유로워 질 것이라 믿으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며, 함께 감옥에 가고, 함께 자유를 위해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날이, 이 날이 모든 하나님의 자식들이 새로운 의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중략)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는 마침내 자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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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8.29 지퍼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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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87년 8월 30일 유진오와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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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1,1987년 8월 30일 유진오와 홍난파


서울대는 꿈도 꾸지 말고 니 꼬라지가 연대 스타일은 아이다. 고대로 해라." 과는 대충 정해 놓고 학교를 고민할 때 담임 선생님이 내지른 한 마디로 내 진로는 결정됐다. 그래서 정식으로 원서를 넣기 훨씬 이전부터 고려대학교라는 학교에 꽤 관심이 많았다. 또 그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낳았던 학교이기도 했고. 87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
고개를 돌리고 딴 곳을 쳐다보는 그 장면도 고대에서 있었던 일이며, 전대협 의장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는데다가 기타등등 그 학교 이름이 들먹여지는 일들이 꽤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일이 1987년 8월 30일 한 사람의 사망으로 불거진다. 그 이름은 현민 유진오.

그때 사회 선생님이 "우리나라 헌법을 만든 사람"이라고 소개했거니와 그 소개가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 않았던 법학자. 일제 시대 KAPF,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큰 테두리에서 그에 공감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그려낸 '동반작가' 중의 하나. 그리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오래 하면서 그때 학교를 다닌 이들에게는 영원한 스승님처럼 마음 속에 좌정했던 이. 박정희에 맞선 야당 지도자이기도 했고 야권 후보 단일화의 결단을 내려 박정희의 숨을 가쁘게 하기도 했던 정치인. 유진오가 죽었다. 당연히 빈소는 고려대학교 안에 차려졌고, 고위층부터 옛 제지들까지 분향의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9월 1일 아침 9시부터 다섯 명의 교수가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문영, 권창은, 이상신, 이만우, 윤용 교수였다. 그들은 "고려대학교는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인즉슨 현민 유진오의 업적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서, 또 친일 경력의 소유자로서 '민족고대'에 그 빈소를 두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의 성명서 내용 일부를 보자. "....어떤 삶을 살아왔든지를 불문에 붙이고 고인을 과대미화시킴으로써 그것이 악을 방관·조장하고 현재의 비리마저 정당화시키는 데 악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행과 통념에 아부·순종하기보다는 이에 도전하여 이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진정한 지성인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교육자로서 이미 일제 치하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을 노래했었고, 해방 직전까지도 "우리(일본 제국)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외치는 등 친일행각의 전력도 있거니와 야당 당수로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처참한 광주의 불행과 직결된 정통성을 결여한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으로 다시금 변신했던 고 유진오 씨의 빈소가 고대에 차려진다는 것은 비교훈적이라고 생각하여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항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학생들이 가세했다 2백여명의 학생들은 빈소로 몰려가 조화 가운데 7개를 철거하고 즈려밟았다. 아마도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던 조화였으리라. 파장은 컸다. 유족들은 빈소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영원한 고대의 스승"은 안암동이 아니라 대학로에서 세상과 이별해야 했다. 5인방 교수들이 말한 바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은 극단적인 파열음을 낸다. 교우회는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흥분하여 교수들을 제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고 어떤 고대 교수들은 '사죄의 서명'운동에 들어갔으며 학생 몇 명은 붙들려 갔고 교수들에게도 소환장이 날아갔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서진영 조광 교수 등 10여명의 교수들은 "5인의 교수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에 반대한다."는 재반박 성명도 터져 나오는 등 대한민국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유진오라는 인물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과도 같은 파문이었다.


고려대 5인방 교수들의 성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또 다른 느낌을 가진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반성없는 과거였고, 그를 통한 과대 미화와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통념과 관행이었다. 즉 "이런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감히 현민 앞에서! 어르신 가시는 데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라는 폭력적인 분위기에 맞선 지식인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 주도자 이문영 교수조차 "친일보다는 국정자문위원이 더 문제"라고 회고했거니와, 유진오 정도 되는 인사의 친일 행각을, 그것도 죽은 사람 앞에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특이한 분위기의 나라에서 드러낸다는 것 매우 의미가 큰 일이었다.

그런데 유진오의 친일행각은 사실 노골적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 그의 글을 보면 어이없고 낯뜨거울만큼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폐하 만세, 대동아성전 만세로 귀결되고 있다. 그때까지 사실 현민의 그 행적은 "불문에 붙여지고"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1987년 유진오는 죽을 때를 잘 골랐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친일'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요즘에 현민이 죽었다면 아마 그는 조화 몇 개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라 상욕을 들으며 북망산으로 떠나야 했을지 뉘 알겠는가.

장준하 선생의 철천지 원수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 건도 그렇고 박근혜 후보에 대한 얘기도 그렇고 "친일파"라는 말이 홍수를 이룰 지경으로 많이 쓰이는 요즘이다. 우리 역사의 잘못 꿴 첫단추를 통탄하는 건 좋다. 유진오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 행각은 알려져야 하고, 이미 백골이 진토되었을망정 반민족적 행위로 호의호식했던 이들의 행동을 낱낱이 밝혀 후세의 귀감으로 만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1987년도 아닌 2012년에 "친일파 척결"이 선거의 이슈로 부상하고 정치적 공격의 소재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친일파는 없다. 친일 행동을 직접적으로 한 이들은 모두 무덤 속에 들어가 있으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살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수 있다고 연좌제의 공식 부활을 선언하지 않는 한, 21세기에 "친일파 척결"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일은 선거로 정권을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혁명의 칼바람으로도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친일' 논의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고 논리 비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41년 8월 30일에는 또 한 사람의 위인이 죽었다. 홍난파였다. "고향의 봄"부터 "울 밑에 선 봉선화"까지, "엄마 앞에서 짝짜꿍"에서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까지 우리 모두가 즐겨 불렀고 우리 아버지들이 가슴 적시며 불렀던 많은 노래들의 지은이다. 그는 1937년 죽기 4년 전까지 투옥될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그리 고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중일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까지 일본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 4년으로 인해 그는 친일파의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역으로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가 기념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 4년으로 그의 이전의 보석같은 노래들을 친일파의 산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그의 일생과 우리의 자산이 아깝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아는 것이다. 불문에 붙이지 않는 것이다. 통념과 관행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것이다. 친일파를 친일파라고 부르지 못하던 시절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다면, 친일파라는 얘기가 너무 쉽고도 성찰 없는 낙인으로 전락하는 때에 대한 경계도 필요할 것 같다. 친일파는 친일파다. 하지만 우리는 또 공부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경로로 친일파가 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떤 심리에서 그랬으며 그를 우리와 우리 후대가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지 친일파이니 돌아볼 것이 없다는 식이 되면 곤란할지도 모른다. 이 말을 하면 누군가 "바로 그게 친일파 비호 논리였소!"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친일파들은 친일 행적 자체를 숨기려 했고,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했다. 즉 제대로 된 논의 자체를 봉쇄했다. "친일파 척결 세력"들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진오와 홍난파..... 일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와 정치인, 음악가와 문학가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를 '교훈적'으로 승화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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