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3년 4월 10일 서편제 개봉과 단성사의 역사 1
1990년을 전후하여 부활의 기지개를 편 한국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생산했는데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등 독재 정권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던 소재들이 영 화화되어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빨치산의 자식으로서 분단과 그로 인한 상처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임권택 감독이 주목한 것은 <태백산맥>이었다. 그러나 이 10권짜리 대하 소설을 두어 시간짜리 영화로 녹여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나리오 작업도 엎치락뒤치락 시간을 한없이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임권택 감독은 또 한 번 ‘쉬어가는 작품’으로 다른 영화에 손을 댄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서편제가 1993년 4월 10일 개봉된다.
판소리에 미친 판소리꾼과 그가 거느린 두 의붓 남매가 풀어놓는 고름같은 사연들과 그를 휩싸고 도는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그 하늘과 땅 위에 울리는 낭랑한 사설로 기억되는 영화 <서편제>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더 좋은 것이 이 소리 속판이야.”라고 을러내는 아버지는 득음(得音)을 위해 그 딸의 눈을 멀게 하고 일찍 아버지를 떠나 버린 아들은 수십 년 세월을 돌아 눈먼 누이와 마주하는 기구한 스토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의 소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장기상영되는 와중에 간판의 그림 색채가 햇빛에 바래자 급히 화공을 불러 간판을 덧칠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서편제>는 오래도록 단성사 간판을 장악했고 급기야 단성사 단관에서만 113만 4천여명이라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기록을 세워 버리고 말았다. 한국영화 90년 이래 최대의 이변이자 경사였다.
1300만 관객 운운하는 요즘 시대에 비춰 보면 우스울지 모르나 곰곰 생각해 보자. 단성사는 만원사례를 이뤄야 수백 명 정도의 극장이었고 하루 6회 상영이 고작이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100만을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매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삼켰다가 눈물범벅이 된 사람들을 토해내면서 극장 단성사는 대한제국 시절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웠던 동대문 시장 상인들부터 지배인 박승필, 영화감독 나운규, 깡패 김두한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서편제 개봉일을 맞아 단성사의 기나긴 역사를 한 번돌아다보자.
우리는 개국의 시기를 놓쳐 근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끝내 외국의 식민지가 된 불행한 근대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요즘 한국인들 못지 않게 커피를 즐겼고 전깃불을 본 조선 사신들은 미국 전기 회사에 찾아가 조선에 전깃불을 켜게 도와 달라고 졸랐다.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괄목할만큼 성장한 영화도 다르지 않았다. 1903년께에는 벌써 ‘활동사진’들이 서울 곳곳에서 상영되면서 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있었으니 말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게 1895년이었는데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을 지나 조선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다.
1907년 6월 얼마 전만 해도 좌포도청의 서슬이 시퍼렇게 좌정하고 있던 종로 3가에 번듯한 2층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동대문시장의 거상이었던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합심하여 세운 이 건물의 이름은 ‘단성사’(團成社 ). “단결하여 뜻을 이루자.”는 뜻으로 이 이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된다. 하지만 단성사 그 자체의 설립 목적은 일단 영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단성사는 퇴물 기생 (그래봐야 나이 스물 갓 넘은 이들이었지만)들의 공연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판소리부터 서양 노래, 만담부터 모창 등 일종의 개인기까지, 단성사 무대에 선 사연 많은 기생들의 공연은 뭇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어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최초의 근대적 ‘연예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단성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설립 이후로 10년이 넘어 지나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박승필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꽤 뛰어난 수완의 기획, 연출가였다. 일찍이 광무대라는 극장을 열고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 모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그는 1917년, 단성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를 인수하고 이를 신극(新劇)과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키워 나간다.
우선 박승필이 주목한 것은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이란 극 와중에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무대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연극의 자료 화면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항상 외국 풍경 일색이던 활동사진의 영상 속에 오늘 아침에도 지나갔던 요릿집 명월관이나 장충단 공원이 등장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실로 새롭고도 신기한 체험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토>였다. 비록 연극과 뒤섞인 활동사진이었을망정 조선인이 찍은 영상이 조선인의 극장에서 구현된 최초의 사례였다. 1962년 공보처는 이 역사적인 날을 ‘영화의 날’로 삼았고 이후로도 이 날은 영화인의 축제 대종상이 열리는 날로 두고두고 기억된다.
<의리적 구토> 등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고 기세등등한 박승필이었지만 곧 부아가 치미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 고전 <춘향전>이 일본인 감독 하야가와 마쓰지로의 손으로 영화화되어 상영된 것이다(1923). 일찍이 광문사 시절에 전국 순회 공연을 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단원들과 땅을 치고 울었던 기억이 선연한 그로서는 보통 떨떠름한 일이 아니었다. 왜 춘향전을 왜놈의 자식이 감독하고 난리란 말인가. 거기다 입장료는 다른 공연의 몇 배인 1원을 받아도 조선 사람들은 꾸역꾸역 줄을 서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서는 정도가 아니라 단 8일만에 1만명을 돌파하는 대 흥행기록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자 박승필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씩씩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춘향전>은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부업공진회 (박람회 격의 행사) 에 때맞춰 만든 거란 말이다!” 그는 당장 단성사에 ‘영화 제작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박승필은 사업가일 뿐, 프로듀서나 촬영 감독이 아니었다. 여기서 당시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등장한다. 그는 극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설랑 일본에 가서 촬영 기사로 일하다가 관동 대지진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와 있던 촬영 기사 이필우를 염두에 두었다. 이필우는 오케이를 했지만 박승필은 역시 사업가, 검증 안된 찰영 기사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일단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정구 대회를 한 번 촬영해 와 보라고 한다. 이필우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고서야 박승필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본격 영화가 크랭크인된 것이다. 무슨 내용의 영화였을까? 애들이 보기에는 좀 내용이 잔인하고 슬픈 동화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끈질기게 요즘 애들에게도 보여지는 ‘전래동화’ <장화홍련전>이었다.
단성사 전속 성우 최병룡과 우정식이 장쇠 역과 사또 역을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각각 담당했다. 로케이션 장소는 지금도 고려대 앞에 있는 개운사 (당시는 영도사)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교외(?)였을 이 절에서 배우들은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촬영을 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이 영화는 당연히 단성사에서 1924년 9월 5일 개봉된다.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2932
그러나 이 <장화홍련>의 성공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2년 후인 1926년 10월 1일이 왔다. 이 날은 경복궁 앞에 떡 하니 괴물처럼 버티고 선 조선 총독부 건물이 준공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해방된 한국의 중앙청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그 우람한 건물이 들어서고 성장(盛裝)을 한 일본인들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조선 총독부의 새 보금자리를 경하하고 있었을 무렵,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20분인 단성사에서는 또 다른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도 했고 독립군 부대를 찾아나섰으나 “학생들은 총 들고 싸울 게 아니라 공부로 애국하시오.”라는 나이 든 독립군의 충고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던 한 청년이 바야흐로 영화 하나를 만들어 막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불순한 내용이 있다.” 하여 이 영화의 전단지를 죄다 압수해 버린 사건은 훌륭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서울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청년이 영화 감독과 주연과 각본을 도맡아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쳐 버린 이 영화는 이후 한국 영화사, 아니 남과 북을 통틀어 표현한다면 ‘민족 영화사’에서 일종의 시조(始祖)로서 떠받들어지는 존재가 된다. 청년의 이름은 나운규, 영화의 제목은 <아리랑>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아리랑’ 주제가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깔리고 그 위로 유장한 변사의 나레이션이 흘렀다.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 왜 그 청년이 미쳐 버린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 7년 전의 기미독립선언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정신줄 놓아 버린 이웃들의 사연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된 종기처럼 돋아 있었고, 그들은 삽시간에 영화에 몰입했다.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여동생을 탐내는 부잣집 마름, 그리고 광인의 친구 등이 엮어 내는 사연은 영화이면서 현실이었고 허구이면서 진실이었다. 광인 청년은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마름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는데 그제야 실성에 벗어나 본 모습을 되찾는다. 자신이 한 일을 깨달은 청년의 비장한 한 마디.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 순사에 끌려 고개를 넘어가는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구슬프게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배웅한다. 이 영화로 단성사에서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개봉 직후보다는 점차 입소문 덕에 흥행몰이를 한 <아리랑>은 급기야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아우성치는 관객들을 통제해야 할 만큼의 인파에 직면했다. 극장 유리창이 깨져 나갔고 영화를 한 번 본 사람들도 또 다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나운규 자신의 말에서 그 이유를 캐 볼 수 있다. “.... 이 한편에는 자랑할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까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나운규, 한길사) - 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 삼천리 (1930.7)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윤도현의 시원스런 목소리로 울려 퍼졌던 ‘아리랑’, 남북 단일팀이 결성되면 으레 ‘국가’(國歌)로도 불리워지는 노래 ‘아리랑’이 한국인들의 귀를 파고들기 시작한 곳도 단성사였다. 사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민요라기보다는 아이 영화의 주제가격으로 ‘창조’된 노래였다. 하지만 없는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역시 나운규의 회고를 들어보자.
“내가 지었습니다. 나는 국경 회령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교 때에 청진에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나운규 작사 작곡이라 할 만한 이 아리랑을 단성사 음악대가 끄적인 악보를 들고 불렀던 이는 단성사 소속 가수였던 이정숙이다. 한국 영화사 최초의 영화 음악 주제가라 할 ‘낙화유수’를 영화가 상영되는 무대 아래에서 불렀던 그녀는 ‘아리랑’이 상영될 때에도 무대 아래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영화 ‘아리랑’ 주연 여배우였던 신일선의 회고) “문전옥답은 어디를 가고 쪽박 살림살이가 웬말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구슬프게 목을 꺾으며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관중들은 엉엉 울기 일쑤였고 드물게는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목청도 있어 임석경관 (당시 극장에는 경찰관 전용석이 있었다)을 바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금자탑이 서고 그 후로 한국인 모두의 노래가 되어 버린 노래의 산실이 된 곳. 그곳이 단성사였던 것이다.
1932년 단성사의 오랜 동안 이끌어 온 박승필이 죽었다. 나운규를 일본인이 만든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독립시켜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도록 후원했으나 일제의 검열이나 기타 이유로 흥행에서 참패를 거듭한 데다 단성사 소유 문제를 놓고 벌어진 복잡한 송사의 뒤끝에 몸과 마음이 쇠잔해진 탓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성사장(葬)으로 치러졌다. 영화계의 거목이라 할 윤백남의 조사는 애잔하고 비장하기 짝이 없다.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해 피 흘리다가 화살이 다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기생들의 공연장이었던 단성사를 버젓한 극장으로 탈바꿈시킨 사람, 한일합방 소식에 퍼질러 앉아 통곡했으며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에 부아를 터뜨리고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그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인물의 이른 (향년 57세) 퇴장이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오랫 동안 단성사 지배인으로서 박승필을 보좌해 온 박정현이었다.
그러나 단성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다. 영화 자체의 조류가 변했다. 변사가 사설을 읊어대고 가수가 무대 아래에서 가녀리게 노래 부르는 무성 영화의 시대가 가고 토키 영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불멸의 명화로 이름 높은 <사랑은 비를 타고>가 바로 이 전환기를 소재로 잡고 있거니와, 단성사는 토키 시설을 갖추고 쾌적한 객석을 갖춘 일본인들의 극장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힘들여 토키 시설을 완비한대도 1920년 이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로는 도무지 경쟁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단성사는 1934년 대공사에 들어간다. 봄에 시작한 공사는 그 해가 다 가서야 완공됐지만 그것도 뾰족한 수는 못 됐다. 적자는 쌓이고 빚은 늘어만 갔다. 박정현은 동분서주하면서 단성사를 지키려 했지만 일본인 형사와 변호사, 깡패들까지 끼어든 고약한 경영권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939년의 어느 날, 단성사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대륙극장’으로 그 이름마저 바뀐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영화인이면서 또 하나의 ‘단성사맨’이라 할 박정현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몇 년간은 우리 민족사와 영화사와 그리고 단성사의 암흑기였다. 아시아 전역을 뒤덮은 전쟁판 속에서는 상영할 만한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영화를 수입할 루트도 막혀 버렸다. 그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 단성사가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6년 초,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敵産) 관리인과 종업원들은 ‘대륙극장’이라는 일본인들의 대륙 침략 야욕을 상징하는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이름 ‘단성사’를 되찾는다. 단성사의 굴곡 많은 역사에서 또 한 번 새 출발을 기약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시내 종로 3정목 대륙극장은 일본 제정 때 강제로 단성사를 매수하야 대륙극장으로 고쳤는데 오는 구정부터 다시 단성사로 개칭, 부활하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 속에 단성사의 이름은 되찾았다. 그러나 그 영화(榮華)를 되찾게 해 줄 영화(映畵)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유만세>니 <윤봉길 의사>니 해방 분위기에 걸맞는 영화가 몇 제작되기는 했지만 일제 때부터 이어져온 극장들의 간판을 장식하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부족했다. 단성사는 영화보다는 악극단의 공연장으로 즐겨 쓰였고 또 해방 공간의 특징으로 기억되는 좌우의 격렬한 대립 와중에 양측의 집회장 노릇도 했다. 그 치열한 대결도 일단락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선 지 2년이 되던 어느 초여름 날, 일요일 오전 영화를 즐기러 단성사에 온 관객들은 갑자기 영화가 중단되고 흘러나온 장내방송에 기겁을 하고 일어서게 된다. “휴가 중인 장병들은 즉시 부대에 복귀해 주십시오. 북괴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해 왔습니다.”
서울 전역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을 거치면서도 단성사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한때 종로의 라이벌이던 극장 우미관은 전쟁통에 잿더미가 됐고 조선극장은 이미 일제 때 불타 버렸으니 종로의 터줏대감은 단연 단성사였다. 전쟁 후의 팍팍한 세상에서 영화는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에 터잡은 단성사와 맞은편 피카디리를 꼭지점으로 퇴계로의 대한극장이 또 다른 편의 꼭지점을 이루며 남북을 연결하는 ‘극장 벨트’를 형성한다. 그 사이에 스카라, 명보, 국도, 세기극장이 간판을 올렸고 국제극장, 아카데미극장, 중앙극장 등이 광화문과 을지로, 명동 주변에 좌정하고 있었다. (“극장 - 한국영화의 또 다른 역사” - 조희문” 에서 인용)
넘치도록 흘러들어오는 미국 영화들과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한국 영화들은 이 극장들에서 연인 상영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극장마다 조금씩 특징이 있었다. “70밀리 시네마스코우프”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우람한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아라비아의 로렌스>같은 스케일 거대한 작품들을 주로 취급했고 광화문의 아카데미 극장은 정동길을 걷는 연인들을 겨냥한 로맨틱한 영화들을 주로 틀었다. 그럼 단성사는 무엇으로 유명했을까? 주로 액션물과 서부극을 주로 상영한 영화관이었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들, 홍콩 무협 영화들, 각종 액션 활극들이 주로 단성사를 무대로 하여 상영됐던 것이다. 그 이유는 종로의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단성사 뒷골목은 소위 기생들이 많은 홍등가였다. 종로 일대가 유흥가였다. 그리고 그 일대는 깡패들이 많았던 우범지대였다. 그래서인지 주로 액션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액션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그 때문에 당시 영화계에서 ‘액션영화’ 하면 단성사로 통했던 것 같다. 또 액션물은 학생들도 좋아했는데 인근에 경기고, 덕성여고, 창덕여고 등 학교가 많아 학생들도 극장을 많이 찾았다.” (단성사 전 상무 이용희의 인터뷰 중 -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50년대 종로 3가 인근에는 ‘종삼’으로 유명한 사창가가 형성돼 있었고 이 ‘종삼’의 사창가가 정리되면서 ‘588’과 ‘미아리’가 생겨났으리만큼 그 역사는 뿌리가 깊었다. 그 ‘업소’ 종사자들, 그리고 인근의 학생들이 손쉽게 즐겨 볼 수 있는 영화를 주로 틀자면 화끈하고 시간 때우기 좋은 액션 영화가 제격이었으리라.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1955년 일어난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을 읽어 보자.
1955년 1월 29일 김동진이라는 남자가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다. 동대문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깡패 이정재가 자신에게 조봉암, 신익희 등 40여 명에 인물들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지시에 기가 질린 김동진은 이 명단을 폭로하고 시경에 신고했다. 이후 김동진은 잠적했는데 이에 분노한 이정재와 역시 정치 깡패로서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동진이 영화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성사에 그가 좋아하는 서부 영화를 연일 상영한다. 마침내 김동진이 단성사 앞에 나타났을 때 이정재의 부하이자 조카뻘이었던 이석재는 김동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죽지는 않았으나 중상이었다. 이정재는 살인교사죄로 체포됐다가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검사가 교체되는 촌극 끝에 풀려났고 이석재만 구속된다. 이것이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이다. 극장 안에서는 서부극의 건맨들이 스크린 속에서 속사 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극장 밖에서는 진짜 악당들의 총질이 백주 대낮의 서울 대로를 울렸던 것이다.
기실 액션영화나 활극을 주로 간판에 내세웠다는 것은 극장가의 명문으로 불리기에는 좀 아쉬움이 있었다. 흥행의 보증수표라 할 007 시리즈는 피카디리와 단성사의 주요 경쟁 품목이었다고 하니 (위 이용희 인터뷰 중) 왕년의 한국 영화의 산실 단성사에 걸맞는 포토폴리오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단성사는 단성사였다. 1977년 추석 ‘추석특선프로’로 한국 영화 흥행사에 길이 남을 영화 하나를 쏘아올린 것이다. <겨울여자>였다. 김호선 감독에 한국 영화의 영원한 히어로 신성일이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장미희가 열연했으며 곁들여 김추련, 송재호, 박원숙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만 58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국내 영화 흥행 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의 포스터 문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수십 편의 외화를 마다하고 왜 명문 단성사는 이 영화를 특선(특별히 선정)했을까!”
앳된 여자 주인공 '이화'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성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갈등을 묘사하고 파격적인 현대 여성의 성(性) 모랄을 담은 <겨울 여자>의 남녀 주연은 당연히 신성일과 장미희였다. 그런데 이 엄연한 전제를 무시한 일대 사건이 단성사 간판 위에서 벌어진다.
당시 극장의 얼굴은 단연 간판이었다. 개봉관들의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화공’이라고 불리우며 대접을 받았고 그들은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과 주인공들의 극적인 모습을 간판에 담았다. 당시 <겨울 여자>의 간판을 그린 단성사 화공 백춘태씨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구레나룻이 시커먼 놈이 찾아와서는 간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달라는 거야,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일이 끝나도록 기다리다가는 포장마차로 날 데려가더군. 그래 이름만 넣어주겠다고 했더니 꼭 그림이어야 한대. 며칠 동안 찾아오는 정성이 기특해서 '에라 욕 한번 먹자' 하고 걔를 신성일보다 크게 그렸지. 개봉날 난리가 났어. 신성일 측에서 가만 있겠어? 미술부 문 닫고 도망쳤지."
이 구레나룻 시커먼 청년은 영화 <겨울여자>에서 여주인공 이화와 사랑을 나누는 운동권 청년 정치학도 석기 역을 맡은 영화배우 김추련이었다. 김추련과 장미희가 남루한 다방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남아 있거니와 당대의 배우 신성일을 뒷전에 세우고 자신을 단성사 간판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당찬 배우 김추련은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것처럼, 김추련은 2011년 11월 8일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유서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이 세상과 이별하고 영원한 ‘겨울 남자’로 남는다.
<겨울 여자>는 무려 100일 동안 연일 전회 매진 행진을 펼친다. 추석 특선 프로로 나온 영화가 해를 넘기고 구정 특선 프로까지 이어졌고 3월이 되어서야 그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말한 바대로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당시 내리막을 걷고 있던 한국 영화는 그로부터 13년 동안 그 기록을 깨지 못한다. 한국 영화의 암흑기라고나 할까. “돈 주고 한국 영화 안 본다.”는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 하나가 또 단성사 간판을 박차고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1990년 6월 9일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였다.
7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내리막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겨울여자>의 흥행 기록은 영원히 깨지기 힘들게 보일 정도로 한국 영화의 수준과 흥행은 바닥이었다. 한국 영화의 산실이라 할 단성사도 스크린쿼터를 채우기가 무섭게 헐리웃 영화의 간판을 내걸기 일쑤였고, 한국 영화로 10만이 넘었다면 대단한 성과로 신문 지상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며, 영화제작사들은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면피용으로 한국영화를 싸구려로 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태흥영화사를 이끌던 이태원 사장은 좀 달랐다. 태흥영화사 역시 헐리웃의 20세기 폭스사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단성사에 주로 내걸어 재미를 보았던 회사였지만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라 할 임권택과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며 서로 신뢰를 쌓았고, 한국영화 제작에도 열의를 보였던 것이다.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만다라>나 <백치 아다다>,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씨받이> 등 진중한 영화를 연속하여 제작해 온 임권택 감독에게 이태원 사장은 색다른 제안을 하게 된다. 쉬어가는 의미로 가벼운 액션물 하나 만들자는 것. 소재는 일제 시대 깡패 김두한. 임권택 감독은 내심 언짢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반열에 오른 자신에게 왜 그런 카드를 내미느냐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년에 B급 또는 그 이하 수준의 액션영화를 수도 없이 찍어 냈던 임권택 감독은 어찌 어찌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영화 <장군의 아들>이 1990년 6월 개봉한다. 단성사에서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영화 이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던 박상민은 이렇게 회고한다.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하고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스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날 보던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악'하고 기절하는 거예요." (이데일리 2009.8.25 인터뷰 중) 영화에서 뜬 사람은 그 뿐이 아니었다. 명문대학생이었던 신현준은 김두한의 상대역인 하야시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영화 내내 짤막한 스포츠 머리로 출연한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으로 살았던 하야시의 풍모를 묘사한 설정이 아닌가 했는데 몇 년 전 신현준이 ‘무르팍 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영화 출연에 반대한 아버지 손에 깎인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스타 하나 없이, 생 초짜 배우들을 데리고 크랭크인을 감행한 이 영화는 단성사 한곳에서만 67만 8946명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단성사 극장에게도 <장군의 아들>은 감회가 서린 작품이었다. 단성사의 1차 전성시대라 할 1920-30년대를 무대로 한 영화였고 김두한의 ‘나와바리’였던 우미관은 일제 시대 단성사와 치열한 업계 라이벌이었다. 또 김두한이 일본 경찰 유도 사범이었던 마루오카와 대결을 벌이는 곳은 바로 ‘단성사’ 앞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도했던 명동과는 달리 조선인들의 상권과 영향력이 살아 있었던 일제 시대 종로, 그리고 그 한복판에 위치했던 단성사의 초상은 영화 속에서도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한때 단성사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던 불우한 꼬마 김두한, 주먹 하나로 종로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단성사 지배인에게 용돈도 받아 쓰던 왈패 청년 김두한의 이야기로 한국 영화 부활의 축포를 거하게 쏘아 올렸으니 단성사로서는 참 신기한 인연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장군의 아들>도 신호탄에 불과했다. 90년 역사의 단성사 최고의 순간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얘기는 앞 포스팅에서 했으니 반복 않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서편제>가 기폭제가 된 한국 영화는 <쉬리>를 낳고 <실미도>를 생산하고 <JSA>를 창조하고 <괴물>을 그려내면서 세계 속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후 새로워진 영화 환경 속에서 멀티 플렉스 극장의 맹공세에 견디지 못한 단성사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멀티플렉스형 단성사로 새단장을 했다. 2005년 2월 3일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종로 3가에 우뚝 선 단성사 7층과 8층의 벽은 수천 개의 이름 석 자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인 협회에 등록된 배우와 감독과 기타 촬영 스탭들의 이름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단성사에 깊이 맺혀 있거나 스쳐 지나갔던 빛과 땀과 눈물의 총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단성사의 운명은 순조롭지 못했다. 각지에 극장 체인이 생겨나면서 “버스 타고 종로 가서 영화 보고 커피 한 잔”의 생활 패턴은 사라졌고, ‘100년 역사’ 단성사에 유달리 애정을 줄 만큼 문화적 촉각이 발달한 우리 사회도 아니었다. 2008년 최종 부도를 맞은 단성사 건물은 여러 차례 공매에 부쳐졌다가 유찰되는 아픔을 겪으며 현재는 폐쇄되어 있다. 이제 단성사에서는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 어느 주인을 만나 그 명맥을 이어갈지는 모르나 적어도 현재로는 그렇다.
옛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졌거니와, 아니 아예 새 건물이거니와 그래도 종로3가의 ‘랜드마크’였던 단성사 자리에 들어선 건물을 지나면 항상 내 마음은 과거의 철길로 달린다. 저 건물 7층과 8층의 벽을 빼곡이 채웠던 7800여 명의 이름 석 자. 그들이 혼신을 다해 만들었던 영화, 그 영화를 보겠다고 엄동설한이건 삼복더위건 장사진을 치며 몰려든 관객들, <아리랑>을 보며 울면서 관객들이 합창하던 아리랑 소리가 들려오고, 어렸을 적 백설공주가 저렇게 생겼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장미희가 호쾌하게 웃고 있는 <겨울여자> 포스터도 떠오르고, <장군의 아들>을 보고 나온 후 단성사 앞에서 폼을 잡으며 덤벼라 마루오카! 하며 까르르 웃던 청춘의 내 친구들이 지나가고, <서편제>의 유명한 진도 아리랑 장면에 나오는 돌담길을 가 보겠다고 부득부득 청산도행 뱃길에 오르던 객기의 이정표가 싱긋 웃으며 내 시선을 맞는 추억여행의 철도. 그 시발점 중의 하나가 종로 3가 단성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