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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4.4 대한극장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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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6년 4월 4일 대한극장 서다

 

전쟁이 끝난 뒤의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물론 한국 영화도 60년대의 전성기를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가슴을 녹여 주고 가난과 피로를 잊게 해 주었던 것은 홍수처럼 밀려들었던 헐리웃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애수>를 보면서 전쟁으로 찢어진 연인들의 슬픈 운명에 자신들을 대입시켰고 뒤돌아서 떠나는 총잡이의 뒤에서 “세인! 컴 백!”을 부르짖는 꼬마를 보면서 아련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수요를 위하여 뭔가 쌈박한 극장이 필요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시장 김형민(나와 이름이 같군)과 아들을 전쟁에서 잃었던 밴플리트 전 (前) 미 8군 사령관이었다.

 

1955년 서울 시장이었던 김형민은 서울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을 위해 극장을 세울 것을 결정했고 밴플리트 중장은 미국의 20세기 폭스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기 정화 시설을 가동시켰기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건물이었던 대한극장이 1956년 4월 4일 탄생하게 된다. 그 좌석 시스템까지도 미국에서 직수입했고 2천석의 웅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대한극장은 개관 몇 년 후 70mm 대형 화면을 갖춘 국내 유수의 극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밴플리트 중장은 “대한극장에 10만 달러 융자를 주선해 주었는데 그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보증인을 선 자신한테 빚 독촉이 왔다.”며 하소연을 한 일도 있었다니 (김운용 전 IOC 위원장 증언) 내막은 좀 더 복잡한 모양이다.

 

대한극장이 설 무렵은 한창 헐리웃에서 대작 영화 붐이 불 즈음과 맞물리고 있었다. 대한극장의 70밀리 ‘시네마 스코우프’는 여타 극장들의 기를 죽이는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영화는 다른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했다. 오로지 대한극장에서만 오리지널 그 감동(?)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마 샤리프의 사슴같은 눈망울이 설원의 대지 위에 노을처럼 깔리던 영화 <닥터 지바고>도 대한극장의 스크린에 담긴다. 다른 극장의 스크린으로는 그 웅대한 영상의 맛배기를 도무지 담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 지루하긴 하지만 스케일 컸던 전쟁영화 <도라 도라 도라>도,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도 대한극장의 몫이었다.

 

대한극장의 성가를 있는 대로 드높인 영화라면 역시 <벤허>였을 것이다. 영화 시사 후 “오 하느님 이 영화를 진정 제가 만들었나이까?”라고 했다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탄은 그대로 영화 카피가 되어 포스터에 주먹만한 글씨로 나붙었다. 지금 보면 좀 조잡하긴 해도 미니어처를 동원한 열띤 해전(海戰) 장면과 실사로 찍은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주로 대표되는 이 불멸의 명화가 들어설 곳은 대한극장 외에 달리 없었다. (스카라 극장도 70밀리 스크린을 보유하긴 했는데 대한극장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다) 서울 인구 300만에 훨씬 못미치던 시절 무려 70만 명의 관객이 대한극장 문턱을 닳게 만들었으니 그 열풍을 짐작할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한 극장에서 250만 관객을 동원한 셈이다.

 

그런데 대작 영화는 대개 그 러닝타임이 길다. 대작 영화를 즐겨 상영하던 대한극장은 매우 불미스러운 소동에 휘말리기도 한다. 1970년 1월 8일자 한국일보에 따르면 대한극장의 사장과 상무, 영사 주임과 기사가 줄줄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던 대작 영화를 잘라먹고 상영하다가, 즉 한 번 더 틀어 돈을 벌려는 욕심에 30분 가량을 잘라머고 상영하다가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 영화의 제목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당시 경찰은 <사운드 오브 뮤직>도 잘라 먹었던 혐의를 잡고 수사 중이라 했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대한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기 전, 마지막 70밀리 영상의 고별작으로 선택된다. 대한극장이 자랑하던 대형 화면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상영됐던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나도 간만에 충무로 전철역을 찾았었다. 간만에 보는 피터 오툴, 앤터니 퀸, 오마 샤리프의 얼굴들은 지금도 선연하거니와 그날 나는 이름은 잘 모르겠으되 그 마스크는 여러 영화에 걸쳐 목격하여 분명히 익숙한 한 노배우가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초 개봉되었던 1962년은 가히 충무로의 전성시대였고 대한극장이 그 독보적인 지위를 자랑하던 때였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라비아의 노련한 왕자 파이잘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전쟁은 끝났소. 늙은이들끼리 협상을 했지. 젊은이는 전쟁을 좋아하지. 전쟁 속에서 희망과 자유를 추구하지. 그러나 평화는 늙은이들의 악덕으로 만들어간다오. 불신과 경계라는 늙은이들의 악덕 말이오.” 전쟁 영웅 로렌스에 대한 해고 선언(?)으로 들리기도 하고 처연한 위로로 들리기도 하는 저 말을 전쟁 소리에 귀에 못이 박히는 밤,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기도 하고 DVD를 통해 다시 듣고 싶기도 하다.

 

1956년 4월 4일 우리나라 영화의 한 역사가 세워졌다. 대한극장. 지금 대한극장은 대한극장이 아니다.



1979.4.5 중원 고구려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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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4월 5일 중원 고구려비 발견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즉 한강유역과 오늘날의 충북, 강원도 일대까지 호령한 역사는 꽤 길다. 장수왕이 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이래 백제는 개국 이래 터전이던 한강 유역을 잃고 피난 수도같은 웅진으로 물러섰고 신라는 진흥왕 때까지는 소백산맥을 넘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고구려가 남한 지역에 남긴 유적은 거의 없다. 워커힐 뒷산의 고구려군의 보루나 연천에 남아 있는 고구려성 정도? 그런데 1979년 4월 5일 무려 1500년 전 고구려의 위세를 짐작케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중원 고구려비.

 

중원(中原)은 중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충청북도에도 있다. 이 이름은 신라 시대 충주 일대를 중원경으로 불렀던 것의 흔적이다. 통일신라시대 그 지역은 국토의 중심이었으니까. 충주 중앙탑은 신라 국토의 동서남북단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그 지점에서 만났다고 하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충청북도 중원에서 고구려인들이 세운 석비가 발견된 것이다. (이하 글은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를 거의 베꼈음)

 

그를 발견한 건 전문 조사단이 아니었고 향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동호회원들이었다.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 고등학교 교사 김준식, 중원군 문화공보실장 5인의 멤버들이 구성한 동호회’ 회원들은 주말이면 폐사지 같은 곳에 가서 답사를 하고 기와도 수집하는 매우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문화공보실장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마을 앞에 돌 하나가 서 있다고 해서 입석리입니다. 백비(-글자 없는 비) 같긴 한데 한 번 그 돌 구경 가실래요들?”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회원들은 중원군 가곡면 용전리 입석마을로 향한다. 이 문화공보실장 김예식은 군수 치적 홍보와 언론사 상대하는 본연의 임무에 더하여 자신의 할 바 하나를 마음 속으로 꼽고 있었다. 1977년 충주를 방문한 동국대 황수영 박사의 말이었다.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하면 꼭 연락해 달라.” 북한산부터 마운령 황초령까지 순수비를 세웠던 진흥왕인데 개국 이래 처음으로 소백산맥 넘어 한강 상류에 이른 그 감회를 어찌 남기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진흥왕 순수비를 고대하는 이들의 근거였다.

 

입석리에 이른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비를 살펴보다가 눈을 의심한다. 어렴풋하게나마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國, 守, 土 이렇게 읽어내려다가 뜻밖의 글자에 막힌다. 안성(安城) 웬 충청북도에 안성 지명이 나오나? 그러나 그건 동호회원들의 오해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것은 고모루성(古牟婁城 )이었다. 즉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고구려의 성이었다. 동호회원들은 그것이 조선의 비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비가 마을 앞에 서 있던 것 자체가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조선 시대 이 비를 경계로 토지를 나누기도 했다고 하는 전설이 서릴 정도였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입석은 그 앞에서 아들 낳게 해 달라고 비는 장소였고, 대홍수 때는 그 밑둥째 큰 물에 뽑혀 버려 다시 세워지기도 했던, 그야말로 동네의 터주대감같은 입석이었던 것이다.

 

이 비석이 혹시 진흥왕 순수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풀지 않던 김예식 공보실장은 마침 일본학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방문한 황수영 박사에게 이 비를 보인다. 황수영 박사 역시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황수영 박사는 일본 학자들을 수발하고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와 동호회원들이 탁본을 떠 왔는데 그날 오후 충주의 한 다방에서 이 탁본은 다방의 병풍 안에 나붙는다. 그리고 일행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등의 글자들이 해독되는 가운데 00대왕(大王)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진흥대왕이다!! 꿈에 그리던 진흥왕 순수비가 마침내 등장한 것인가 하는 흥분이 다방을 폭발시킬 듯 고조됐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에게 말했다. “충청북도는 정 선생네가 계속 조사해 왔으니까 정 선생이 계속 조사하시오.” 이것이 1979년 4월 5일이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정밀한 조사가 실시됐고 며칠 후 서울에서 급거 내려온 한 학자는 탁본을 보자마자 00이 ‘진흥’이 아닌 ‘고려’임을 읽어냈다. 또 대사자니 사자니 하는 고구려 관직들이 계속 출몰했다. “고구려비다!”

 

고구려비였다. 광개토왕비처럼 사면에 글씨가 새겨진 사면비였으나 두 면의 글씨는 거의 없어졌다. 동네에서 빨래판으로 써서 그렇다는 풍설이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빨래판으로 사용된 것은 청주에서 발견된 청주 운천동 사적비라고 한다. 이 비는 신문왕 때 “삼한을 통일하고 위업을 떨쳤다.”고 위세등등하게 세운 비인데 빨래 방망이 흔적이 역력한 채 발견됐다. 중원 고구려비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1500년을 버티고 평버만 입석으로 서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물론 대장간 기둥으로 사용돼 그 쇠들을 가느라 글자들이 마모됐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 비가 세워질 무렵은 삼국의 각축이 그야말로 한창일 때였다. 고구려 동천왕 때 처음 교분을 튼 신라는 이후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속국 신세로 전락한다. 광개토왕이 5만대군을 경주까지 파견하여 왜군을 무찌른 이래 고구려는 신라를 제대로 된 나라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 고구려비에서 신라는 그저 동이(東夷)일 뿐이었다. 신라도 그 지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늘날의 삼척 지역에서 고구려 장수를 기습해 죽이는 것, 박제상이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킨 것, 백제와 동맹을 맺은 것, 그리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 “수탉들을 죽여라!”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를 말하는 듯)고 신라내 주둔하던 고구려군을 전멸시던 시기, 고구려의 정점과 쇠퇴를 잇는 시기에 세워진 것이 이 중원 고구려비였다.

 

이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남한에 남긴 거의 유일무이한 문자적 기록으로 가치가 높으며 고구려의 깃발이 한반도 중부에 미쳤던 시대의 증거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비에서 고구려보다 신라에 관심이 더 간다. 지정학적으로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요동을 틀어쥔 고구려나 요서와 산동에 진출했던 백제와는 달리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데에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고구려에 빌붙어야 했다. 그러면서 가야와 싸워야 했고 백제와 밀접한 관계였던 왜와는 사생결단을 여러 번 내야 했다.

 

이 고구려비에 나타난 신라는 동쪽 오랑캐였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위세에 형제의 의를 다짐하는 약소국이었다. 하지만 그 난관을 딛고 일어섰고 고구려비가 서 있던 중원 지역을 장악하고 결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룬다.

 

고구려 역시 위대했다. 우리 역사에서 중국과 대등한 천하관을 가진 나라로서 사방을 랑캐로 칭하며 그 천하관에 반하는 세력을 징벌하고 중국의 분열을 틈타 동북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우리는 그 강역의 넓음이 아니라 , 그 강성함의 긍지가 아니라 그들이 흥한 이유와 망한 이유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웬지 그 시대의 신라에서 더 배울 점이 많음을 느낀다. 고구려비에서 신라를 읽는 이유다.



1990.4.6 영화 파업전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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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0년 4월 6일 파업전야 개봉

 

“민주노조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이 땅을....”로 시작하여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로 끝나는 노래가 있다. <철의 노동자>. <전대협 진군가>와 요상하게 짬뽕이 돼서 너와 나 너와 나 부르다가 ‘승리의 그 한길로’가 튀어나오거나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다음에 “아 전대협이여”가 뒤섞이는 혼란이 있었던 이 노래는 가수 안치환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한 영화의 주제가였다. <파업전야>

 

그 영화가 개봉된 것이 1990년. 그 후 세월을 거치면서 안치환이 한국에서 알아주는 가수가 됐듯,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어느덧 한국 영화의 중견들이 됐고, 되어 있다. 장동홍 감독을 비롯, <접속>의 장윤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알 포인트>의 공수창 등 쟁쟁한 이름들이 그때 <파업전야>라는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영화 내용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김일성 주석 만세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과격한 선동 내용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 시작에서 개밥같은 식당 밥 등 작업 환경에 견디다 못한 싸움이 소개되고 그게 실패로 돌아간 뒤 ‘동성철강’에는 고난의 세월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이 보이자 공장 주임은 고향 후배인 한수를 구사대로 삼아 이에 대처한다. 한수는 위장취업자를 고발해서 쫓아내고 회사는 노조 결성 주동자들을 해고한다. 출근투쟁이 이어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외면하던 한수는 뜻밖의 복명을 만난다. 한수의 여자친구 미자네 공장이 파업에 들어간 것. 괴로워하던 한수는 노조 결성을 시도했던 원기를 만나는데 이 원기가 돌아가는 길에 ‘제임스 리’ (이때 유명했던 노조 파괴자)의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농성을 시작하고 여기에 또 깡패들이 투입되자 한수는 들고 있던 공구를 쳐들고 동료들과 함께 깡패들을 향해 달려나간다.... 뭐 그 정도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흡사 바늘에라도 찔린 듯 호들갑을 떨었다. “모든 예술 가운데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레닌의 말을 어디서 들은 건지 이 영화가 틀어지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영화 상영을 봉쇄하겠다고 나섰다. . 하지만 “몇 달간 쉬고 있던 기계를 (영화 촬영지는 실제 파업 중인 공장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밤새워 보수하고 기름칠을 하여 기계를 돌리고 조언은 물론 엑스트라도 마다하지 않은” 도움으로 완성된 영화가 개봉되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1990년 4월 6일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종로구청은 득달같이 대표 김명곤을 고발했고 영화사 장산곶매에는 압수 수색 영장이 떨어졌다. 무슨 중세 시대 밀사처럼 몸에 필름을 칭칭 감은 사람들이 각 대학가로 스며들었고 16밀리 영사기도 분해해서 반입됐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보겠다는 대학생들과 못본다는 공권력간에는 일대 회전이 벌어졌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이 곧 투쟁”이었던 시대였다.

 

대회전의 절정은 전남대학교에서 있었다. 당연히 경찰들이 시비를 걸 것이지만 단순한 전투조 수준이 아니라 항일 빨치산처럼 지리산에서 합숙 훈련도 하며 무술을 익혔다는 전설이 무성한 정예 오월대 등이 버티는데 별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면서 이 광주의 후예들은 그만 입을 딱 벌리게 된다. 헬리콥터가 그 굉음을 내며 전남대 상공을 비행하는 가운데 1천명이 넘는 전경들이 죽기살기로 덤벼들었고 포크레인으로 정문을 뜯어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아마 영화 한 편에 그 정도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된 일은 세계사에 남을 것이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개그콘서트같은 일이 벌어졌다. 중앙일보에 난 장동홍 감독의 회고. “당일 날 필름이 못 갈 것 같아서 미리 갖다 놨다. 총학에서 필름과 영사기를 보관해놓고, 상영 당일에 영화를 틀 수 있게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갑자기 어디를 간 거다. 금고에 필름을 보관했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급해서 용접공을 불러서 금고를 뜯었다. 근데 옆에서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다. 저걸 뜯었는데, 안에 필름이 없으면 어떻하지라는. 그런데 정말 없는 거다. 큰일났다 싶을 때 어떻게 그 담당자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나중에 하는 말이 사람들한테 혼란을 주려고 말을 한 게 금고에 넣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다른 곳에 감춰 놓은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세월이었고 더 대단한 영화였지 않은가.

 

나는 그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뭣 때문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영화 볼 자유를 위해 전경들과 함께 쎄쎄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특히 그야말로 시덥잖은 북한 영화를 상영할 때도 그랬다. “<인어공주>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참 대담한 뻥으로 수식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를 지켜내기 위해 학교에 들어온 전경에게 돌을 던져 댈 때는 사실 기분도 좋지 않았다. 내가 저런 3류 애니 지키자고 지금..... 하지만 다음날까지도 툴툴거리던 내게 지금은 미국에서 유유자적 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친구 녀석이 한 말은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데모하고 소리지르고 했던 거...... 맘대로 책 좀 보자 영화 좀 보자 그런 거 아니었나? 주사파든 뭐든 왜 내 대가리에 든 거 가지고 왜 시비냐는 거 아니었나? 그걸 가지고 피곤해 하면 안되지 않냐? 북한 영화 틀자 말자의 싸움은 아니었거든."

 

그랬다. 내 맘에 드는 영화 하나를 찍어 보겠다고,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틀어 주겠다고, 검열 같은 거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구속되고 수배 받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하나 보겠다는데 전경이 들어와 캠퍼스를 쑥밭으로 만들고, 영화를 본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학생들이 곤죽으로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창작의 자유,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차츰차츰 허용된’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싸워서 따낸’ 역사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날. 영화 <파업전야>가 1990년 4월 6일 개봉됐다. 그리고 2013년 4월 6일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한 이유로 간첩이니 조사하라느니 생뚱맞은 소리가 나부낀다. 이걸 보면 장동홍 감독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18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현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젊은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비록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DVD 출시할 때 인터뷰)



1969.4.7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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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9년 4월 7일 껍데기는 가라

 

대학 들어온 다음 제일 싫었던 것 중의 하나, 책 좀 치우고 생각 좀 안하고 놀고 싶은데 웬 놈의 선배들이 만나면 물어보는 게 “무슨 책 보니?” “요즘 고민이 뭐니?”. 아 지금 얘긴데 정말 짜증났다. 별로 읽고 싶지도 않은데 한 번 읽어 보라고 안겨 준 책도 많았고 “너 그건 당연히 읽어 봤겠지?” 하면서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압박을 주던 책도 한 두 권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이 <껍데기를 벗고서>. 내 무엄한 동기 한 명이 “아 나는 껍데기 깠는데 뭘 또 벗으란 말이야”라고 투덜거린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책이었다. 차치하고, 그 책은 선배들이 읽으라고 한 책 중에선 그래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신입생들에게 나름 다른 세상과 시각을 친절하게 알려 주는 책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 책의 ‘껍데기’라는 표현은 그 책 제목을 정한 사람의 창작이 아니었다. 그 표현의 지적 소유권자는 <껍데기는 가라>를 노래했던 시인 신동엽이었다. 내 기억에 <껍데기를 벗고서> 안에 <껍데기는 가라> 또한 소개되어 있었다. 80년대 신입생 치고 농담으로든 진지하게든 이 싯귀를 읊조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리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 쓰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럽다. 이 시를 처음 읽으면서도 그랬다. 껍데기와 알멩이라는 흔한 단어가 이렇게 구별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뭔가를 상징하면서 단어의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구나. 이미 변질한 사람들 많았던 사월의 껍데기들을 버리고, 동학 농민 전쟁의 아우성도 그 알멩이만 챙기고자 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참 생생하고 쟁쟁하게 귀를 울렸다. 입으로 읽으면서도 귀에 울리는 거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마지막 구절이 더 귀에 담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일찍이 문재(文才)를 드러내 아버지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던 신동엽.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 신동엽에게 글을 가르쳤고 책과 붓을 마련해 아들의 공부를 지원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사범학교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그렇게 험난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학창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양쪽 다에게 끌려가서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고 하니까. 그러다가 토지개혁 미실시와 친일파 척결의 유야무야를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끼어들었다가 덜커덕 퇴학을 맞는다. 그래도 교원 자격은 있어서 국민학교 교사가 되지만 바로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가 대학생이 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쇠붙이들이 내는 포성과 총성을 접하게 된다. 6.25가 터진 것이다. 부랴부랴 고향 부여로 내려오지만 부여 역시 인민군에게 함락된다.

 

인민군들은 그의 사범학교 경력과 인텔리로서의 지식을 높이 샀던 듯, 또는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듯 하다. 신동엽은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이 된다. “인민군의 뒤를 바싹 따라 북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들어와 신속한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각 군에도 북로당원들이 내려와 군당위원장이 되었다.... (그들이 조직한) 각종 동맹은 해당자들에게 맹원 가입을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불응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반동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성민엽 저 신동엽 평전 중) 그러나 전황이 뒤바뀌면서 그의 감투는 죽을 죄명이 됐고 신동엽은 산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그는 부산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에 학적을 올리게 되는데, 안심도 잠시 그는 국민방위군 소집에 응해 집결지로 향하게 된다. 인민군 문선대까지 됐다가 인민군 포로로 전락한 뒤 포로 수용소 내 벌어진 좌우의 학살극을 지켜봤던 트라우마를 지니게 됐던 시인 김수영처럼, 신동엽 역시 전쟁 발발 몇 달 사이에 평생 지우기 힘든 상처를 안게 된다.

 

국민방위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흑역사다. 세상에 전쟁을 한다는 나라에서 장정들을 뽑아 군대를 편성하는데 그 예산을 사령관이 떼먹고 휘하 장교들이 해 처먹은 나머지 그 수조차 어림짐작할 수 없는 장정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간, 도무지 말도 안되고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건이었다. 신동엽도 그 일원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다. 굶주릴 대로 굶주린 그는 냇물에 코를 박고 참게를 생으로 잡아먹으며 아사를 면한다.

 

굶주림과 병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국민방위군 소집 청년이 된 뒤에야 그는 사상범의 혐의를 피할 수 있었지만, 1950년 여름과 그 해 겨울로 이어지는 몇 달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고 그의 시 세계에 드리워졌을 것이다. 따발총과 M1 소총, 공습의 굉음과 섬뜩한 총검 사이에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그에게 쇠붙이란 얼마나 혐오스런 것이었을까. 성숙하지 못하고 무르익지도 못한, 섣부른 적의와 살의들이 난무하던 그 시대의 내음이란 얼마나 매캐하고 삭막했을까. 이쪽으로 고개 돌리면 빨갱이가 되고 저쪽으로 고개 돌리면 반동분자가 되던 세상은. 신동엽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어느 편에도 가담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야만이었다.”

 

그가 부인 인병선을 만나게 된 사연도 범상하지 않다. 그가 서점에서 알바 비슷하게 일할 때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던 인병선을 만나게 되는데 데이트 3일째, 인병선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우뚝 서 버리는 남자에게 놀란다. 인병선의 아버지는 인정식. 일제 시대 좌익 경제학자였으나 일제 말기 친일 행각이 뚜렷했고 6.25때 납북된 인정식이었다. 신동엽은 놀란 눈빛으로 말한다. 인정식 선생을 존경하며 그의 책을 다 읽었노라고. 빨갱이의 딸로 마음 고생을 했던 인병선으로서는 “마음을 쉽게 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동엽이 인정식을 존경했다면 그의 이력을 잘 알았을 것이고 일제 말기 인정식의 행각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동맹 선전부장이었다가 산사람이 됐다가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됐다가 공군 간부후보생에 합격까지 했던 그가 인정식의 인생유전을 탓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1959년 문단에 처음 등장했고 1960년 4.19 혁명을 거리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한다. <껍데기는 가라>는 그즈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세상의 극을 오가며 죽을 고비와 살 구멍을 수시로 오갔던 그에게 세상은 껍데기투성이였을 것이고 알멩이는 너무도 멀리 있거나 손을 뻗을수록 멀어졌다. 그는 그 안타까움을 노래했고 고향을 휘감아 도는 역사적인 강 금강을 노래했다. 그렇게 10년을 반짝 시인으로 활동한 후 1969년 4월 7일, 국민방위군 때 허겁지겁 잡아먹었던 참게의 복수였던 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1974.4.8 행크 아론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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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4년 4월 8일 신이시여 끝났습니다. 행크 아론의 외침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동네 야구에서는 똑똑한 투수 하나 있으면 만사가 끝나는 법이고 프로야구에서 골든글러브 팀을 꾸려도 투수가 시원치 않으면 그 팀은 구멍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야구 역사에서 최고 상좌를 차지하는 것은 삼진왕이 아니라 홈런왕이다. 20세기 전반기의 불세출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엉뚱하게도 ‘위인전’ 목록에 올라 있을 정도니까. 사실 그는 야구를 잘한 것 이외에는 별로 영웅의 풍모가 없는 아니 솔직히 범상한 인간 이상으로 쳐 줄 만한 것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가 총 714개의 홈런을 치고 수만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은퇴한 뒤 감독직을 희망했지만 그 어느 팀도 그를 감독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감독 못하는 인간이 누구를 감독한단 말이야?”

 

그러나 그의 714개 홈런은 그로부터 40년 동안 전설이었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의 홈런왕이 한 해 30개-40개 정도에서 결정되고 이승엽이 절정의 기량을 선보일 때 50개를 넘은 정도임을 고려할 때 714개 홈런을 치려면 이승엽이 14년 동안 그의 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대충 그 수치의 높이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1974년 4월 8일 깨진다. 행크 아론이라는 흑인 선수에 의해서였다.

 

행크 아론의 대기록이 세워지게 된 계기는 715개째 홈런이 터지던 날로부터 꼭 27년 전, 1947년 4월 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만 해도 ‘니그로 리그’라고 해서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경기를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감히 흑인과 백인이 한 구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대서양과 록키산맥이 마르고 닳도록 있을 수 없던 즈음이었다. 그런 가운데 브루클린 다저스 (LA 다저스의 전신) 단장 브렌치 리키는 그야말로 파천황의 실험을 하게 된다.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스카우트하여 경기에 내보낸 것이다.

 

1954년 4월 9일 재키 로빈슨은 보스턴 브레이브즈와의 경기에서 기습번트로 출루하고 득점을 올린다. 메이저리그 사상 흑인의 첫 득점이었다. 센트루이스 카디날스같은 팀은 흑인과의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나섰고 꼴통 백인들은 로빈슨의 신변마저 위협했으며 동료들도 그를 멀리했지만 불굴의 재키 로빈슨은 1947년 신인왕을 쟁취하는 기염을 토한다. 매니저 리오 두로쳐가 로빈슨을 왕따시키는 선수들에게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얼룩말이든 관계없어. 로빈슨은 야구를 잘해. 우리 구단에 돈을 잘 벌어 준다고. 그 돈이 없으면 너희들 다 다른 구단에 팔아먹어 버릴 거야. 알아?”라고 으름장을 놓을만큼.

 

로빈슨이 낸 파열구 사이로 여러 흑인들이 메이저 리그에 발을 디뎠고 1954년 한 흑인 선수가 메이저 리그의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가 행크 아론이었다. 행크 아론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착실하게 홈런 수를 쌓아 나갔다. 1965년 400홈런, 1968년 500홈런, 1973년 700홈런..... 그의 홈런 수가 백인의 전설 베이브 루스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는 상대편 투수 뿐 아니라 수많은 백인 팬들의 적의의 대상이 된다. “너는 결코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지 못할 거다. 검둥아. 내 총구가 네 시커먼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 따위의 편지는 협박 편지 축에도 들지 못했다. 3천통의 협박 편지가 쏟아졌다. 그는 항상 덕아웃에서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옆에 있다가 누구 총알에 귀신이 될 줄 몰라 선수들이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행크 아론은 그 위협 속에서도 의연했다. 그에 따르면 그는 홈런을 친 자신의 공이 펜스를 넘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공을 때린 뒤에 일단 1루로 무조건 전력 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지 앞에서 협박은 무의미한 법. 어쩌면 그는 전력질주 과정에서 니그로 리그 시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식당 주인이 자신이 먹던 식기를 깨 버리던 소리를 (짐승이 먹은 그릇이라고) 뼈아프게 곱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73년 시즌을 그는 홈런 713개로 마감했다. 그리고 다시 출전한 1974년. 베이브 루스의 기록은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4월 4일 신시내티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아론은 두 경기 중 한 경기만 출전하고 싶다고 한다. 홈구장에서 기록을 갱신하고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 커미셔너는 그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는 베이브 루스와의 타이 기록을 신시내티와의 경기에서 세운다. 그 다음 경기에서는 무안타로 마무리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후일 대통령이 되는 지미 카터 조지아 주지사를 비롯, 5만 명의 홈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1974년 4월 8일 행크 아론은 왼쪽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715개라는 전인미답의 반열에 오른다. 기록만큼은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좌익수가 담을 타고 넘으며 잡으려 했으나 무위였다. 인종차별의 본고장이었던 조지아 주하고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향 애틀란타에서 5만 관중의 환호 속에서 살해 위협을 받던 흑인 선수는 백인 영웅의 기록을 허물어뜨린 후 환호하지도 않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딸은 혹여 있을 납치에 대비하여 FBI의 경호를 받고 있었고 홈플레이트에서 아들을 맞은 행크 아론의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의 간절한 모성애였다. 누군가 총을 쏘면 대신 맞겠다는 각오로 아들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론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행크 아론의 기록도 깨졌다. 왕정치에 의해서, 그리고 메이저 리그에서는 배리 본즈에 의해서. 행크 아론은 둘 다에게 담담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라는 인간이 또 한 번 빛을 발한 것은 배리 본즈가 약물 파동에 휩싸였을 때였다. 배리 본즈의 약물 의혹을 이유로 홈런왕을 다시 행크 아론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이는 이렇게 반박하며 본즈를 옹호했던 것이다. "본즈가 더 이상 기록 보유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 통산 홈런 기록을 고치려고 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모든 기록들을 고쳐야할 것이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동이 될 것. 우리가 어떻게 보든 간에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본즈의 것이다.” 그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깨면 너 죽여 버릴 것이라고 아우성을 친 수천 명의 백인들의 뺨을 후려치는 감동이었다.

 

아이의 방에 있는 위인전에서 ‘베이브 루스’를 본다. 그러나 아무리 까뒤집고 생각해 봐도 베이브 루스는 행크 아론에 미치지 못한다.


1914.4.9 탐피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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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4년 4월 9일 탐피코 사건

 

멕시코는 한창 혼란 중이었다. 디아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멕시코 혁명을 이끈 마데로가 대통령이 됐지만 그는 확실한 개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던 중 자신이 임명한 국방장관 우에르타의 쿠데타를 만난다. 이 배후에 있었던 것은 미국, 특히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 헨리 윌슨이었다. 이 대단한 대사는 우에르타를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마데로의 망명을 전제로 대통령직을 묵인하는 협약을 맺는 등 숫제 멕시코 총독처럼 굴었다. 하지만 우에르타는 약속을 깨고 마데로를 죽였고, 저 유명한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등 쟁쟁한 이들이 반기를 들어 멕시코는 참혹한 내전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던 미국 역시 우에르타를 흰눈으로 보게 된다.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멕시코가 유럽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과거 먼로 대통령이 제창한 ‘고립주의’란 미국 스스로 고고히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은 내 차지니 유럽이 깝죽대지 말라는 뜻이었거니와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가 유럽 열강과 친밀하게 지내는 풍경은 영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전쟁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까지 멕시코 땅 거의 절반을 집어삼킨 적이 있는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제 발 저림이었지만. 우에르타는 미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독일과 영국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됐다고 어깨를 펴고 있었다. 멕시코 토지의 1/4, 산업 역량의 40퍼센트가 미국 손에 들어가 있던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너무도 물정 모르는 자세.

 

그러던 중 1914년 4월 9일 미국은 마침내 우에르타의 멱살을 쥘 기회를 만난다. 미 군함 돌핀 호의 선원들이 연료 구입을 위해 멕시코의 탐피코 항에 상륙했는데 이것이 허가받지 못한 상륙이라 하여 멕시코 연방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그 억류 기간은 자그마치(?) 한 시간 반이었다. 소식을 들은 멕시코 군 지휘관은 기겁을 하고 즉시 방면을 명령했던 것이다. 아무리 원칙을 지켰다고는 하지만 무슨 간덩이로 미군들을 줄줄이 잡아왔더란 말이냐. 옴브레.....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미군은 1시간 반의 구금의 댓가로 엄청난 요구를 토해 낸다. 미국은 책임자를 구속하고 성조기를 내건 후 사과의 예포 21발을 발사하라고 뻗댄다. “우릴 승인도 안하는 양키들이 웬!” 우에르타는 분노하며 기싸움을 벌였지만 미국은 다음 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기를 실은 독일 배 이피랑가 호가 베라 크루즈 항에 입항한다는 소식을 들은 윌슨 대통령은 즉시 미군을 보내 항구를 점령해 버렸다. 이 모든 일련의 사태의 배경에는 또한 석유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탐피코 인근에서 막대한 석유가 발견된 직후였다. 우에르타는 영국의 석유 회사를 등에 업고 있었고 미국은 그것을 빼앗으려 들었던 것이다. 결국 우에르타는 쫓겨났고 미국과 미국의 석유회사 록펠러사는 그 뒤를 이은 카란사 정권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카란사가 호락호락 말을 듣지 않자 금새 다른 세력을 지원해 그 목을 졸랐다. 이라크 후세인을 이슬람 과격파로부터의 중동 수호자로 찬미하다가 하루 아침에 천하 최악의 독재자로 전락시킨 그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눈에 띄게 노골적이었다. 하루 20만 배럴의 석유를 토해 내던 양질의 유전 탐피코는 그렇게 미국의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항상 그런 나라였다. 자신의 탐욕 앞에서는 그럴 수 없이 정직했고 그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순수한 악으로 그득했던 나라였다. 그런데 세계 역사에서 힘깨나 쓴 제국 치고 그러지 않은 나라는 또 어디였을까. 로마부터 몽골까지 영국에서 중국까지 미국과 달리 도덕성을 발휘하거나 그 힘을 올바른 데 썼던 제국은 사실 없었다. <삼국지>에 나온 얘기였던가. 큰 나라에는 힘이 있고 작은 나라는 그 힘에 맞서는 지혜가 있다고. 제국은 항상 있었고 제국의 주변부 나라들은 제국의 힘에 맞서고, 때로는 복종하고 종주먹을 쥐었다지 않고 가 싹싹 빌었다가 팔색조로 변신하면서 그 생존을 이어온 것이 역사이기도 했다. 자못 궁금하다. 지금 세계 유일의 제국으로 남아 있는 미국과 그에 자칭 맞짱 타칭 땡깡을 부리는 북한 사이에서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우리의 피를 보지 않고 우리의 생존을 이어갈 수 있을지.

 

탐피코 사건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결국 미국의 각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미의 물결이 멕시코 전역을 뒤덮었지만 미국은 한 치의 손해도 보지 않고 멕시코의 이권을 장악했고 자신에게 방해되는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갔다. 오늘 우리는 후일에 어떻게 비치게 될까.


1993.4.10. 서편제 개봉과 단성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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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김 - 웹진에 연재했던 거 모음 

산하의 오역

 

1993년 4월 10일 서편제 개봉과 단성사의 역사 1

 

 

1990년을 전후하여 부활의 기지개를 편 한국 영화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생산했는데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등 독재 정권 시절에는 상상도 못하던 소재들이 영 화화되어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빨치산의 자식으로서 분단과 그로 인한 상처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임권택 감독이 주목한 것은 <태백산맥>이었다. 그러나 이 10권짜리 대하 소설을 두어 시간짜리 영화로 녹여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시나리오 작업도 엎치락뒤치락 시간을 한없이 잡아먹었다. 그 와중에 임권택 감독은 또 한 번 ‘쉬어가는 작품’으로 다른 영화에 손을 댄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서편제가 1993년 4월 10일 개봉된다.

 

판소리에 미친 판소리꾼과 그가 거느린 두 의붓 남매가 풀어놓는 고름같은 사연들과 그를 휩싸고 도는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그 하늘과 땅 위에 울리는 낭랑한 사설로 기억되는 영화 <서편제>는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더 좋은 것이 이 소리 속판이야.”라고 을러내는 아버지는 득음(得音)을 위해 그 딸의 눈을 멀게 하고 일찍 아버지를 떠나 버린 아들은 수십 년 세월을 돌아 눈먼 누이와 마주하는 기구한 스토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의 소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장기상영되는 와중에 간판의 그림 색채가 햇빛에 바래자 급히 화공을 불러 간판을 덧칠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서편제>는 오래도록 단성사 간판을 장악했고 급기야 단성사 단관에서만 113만 4천여명이라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기록을 세워 버리고 말았다. 한국영화 90년 이래 최대의 이변이자 경사였다.

 

 

1300만 관객 운운하는 요즘 시대에 비춰 보면 우스울지 모르나 곰곰 생각해 보자. 단성사는 만원사례를 이뤄야 수백 명 정도의 극장이었고 하루 6회 상영이 고작이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100만을 넘긴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매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삼켰다가 눈물범벅이 된 사람들을 토해내면서 극장 단성사는 대한제국 시절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웠던 동대문 시장 상인들부터 지배인 박승필, 영화감독 나운규, 깡패 김두한 등등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서편제 개봉일을 맞아 단성사의 기나긴 역사를 한 번돌아다보자.

 

 

우리는 개국의 시기를 놓쳐 근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끝내 외국의 식민지가 된 불행한 근대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요즘 한국인들 못지 않게 커피를 즐겼고 전깃불을 본 조선 사신들은 미국 전기 회사에 찾아가 조선에 전깃불을 켜게 도와 달라고 졸랐다.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괄목할만큼 성장한 영화도 다르지 않았다. 1903년께에는 벌써 ‘활동사진’들이 서울 곳곳에서 상영되면서 사람들의 넋을 빼앗고 있었으니 말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게 1895년이었는데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을 지나 조선에 상륙해 있었던 것이다.

 

1907년 6월 얼마 전만 해도 좌포도청의 서슬이 시퍼렇게 좌정하고 있던 종로 3가에 번듯한 2층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동대문시장의 거상이었던 지명근, 주수영, 박태일이 합심하여 세운 이 건물의 이름은 ‘단성사’(團成社 ). “단결하여 뜻을 이루자.”는 뜻으로 이 이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된다. 하지만 단성사 그 자체의 설립 목적은 일단 영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단성사는 퇴물 기생 (그래봐야 나이 스물 갓 넘은 이들이었지만)들의 공연장으로 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판소리부터 서양 노래, 만담부터 모창 등 일종의 개인기까지, 단성사 무대에 선 사연 많은 기생들의 공연은 뭇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어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최초의 근대적 ‘연예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단성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설립 이후로 10년이 넘어 지나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박승필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꽤 뛰어난 수완의 기획, 연출가였다. 일찍이 광무대라는 극장을 열고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 모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그는 1917년, 단성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를 인수하고 이를 신극(新劇)과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키워 나간다.

 

우선 박승필이 주목한 것은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이란 극 와중에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무대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장면을 필름으로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즉 연극의 자료 화면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항상 외국 풍경 일색이던 활동사진의 영상 속에 오늘 아침에도 지나갔던 요릿집 명월관이나 장충단 공원이 등장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실로 새롭고도 신기한 체험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의리적 구토>였다. 비록 연극과 뒤섞인 활동사진이었을망정 조선인이 찍은 영상이 조선인의 극장에서 구현된 최초의 사례였다. 1962년 공보처는 이 역사적인 날을 ‘영화의 날’로 삼았고 이후로도 이 날은 영화인의 축제 대종상이 열리는 날로 두고두고 기억된다.

 

<의리적 구토> 등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고 기세등등한 박승필이었지만 곧 부아가 치미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 고전 <춘향전>이 일본인 감독 하야가와 마쓰지로의 손으로 영화화되어 상영된 것이다(1923). 일찍이 광문사 시절에 전국 순회 공연을 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단원들과 땅을 치고 울었던 기억이 선연한 그로서는 보통 떨떠름한 일이 아니었다. 왜 춘향전을 왜놈의 자식이 감독하고 난리란 말인가. 거기다 입장료는 다른 공연의 몇 배인 1원을 받아도 조선 사람들은 꾸역꾸역 줄을 서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서는 정도가 아니라 단 8일만에 1만명을 돌파하는 대 흥행기록을 세우는 지경에 이르자 박승필은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씩씩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춘향전>은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부업공진회 (박람회 격의 행사) 에 때맞춰 만든 거란 말이다!” 그는 당장 단성사에 ‘영화 제작부’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박승필은 사업가일 뿐, 프로듀서나 촬영 감독이 아니었다. 여기서 당시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등장한다. 그는 극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설랑 일본에 가서 촬영 기사로 일하다가 관동 대지진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와 있던 촬영 기사 이필우를 염두에 두었다. 이필우는 오케이를 했지만 박승필은 역시 사업가, 검증 안된 찰영 기사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일단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정구 대회를 한 번 촬영해 와 보라고 한다. 이필우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고서야 박승필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본격 영화가 크랭크인된 것이다. 무슨 내용의 영화였을까? 애들이 보기에는 좀 내용이 잔인하고 슬픈 동화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끈질기게 요즘 애들에게도 보여지는 ‘전래동화’ <장화홍련전>이었다.

 

단성사 전속 성우 최병룡과 우정식이 장쇠 역과 사또 역을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각각 담당했다. 로케이션 장소는 지금도 고려대 앞에 있는 개운사 (당시는 영도사)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교외(?)였을 이 절에서 배우들은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촬영을 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이 영화는 당연히 단성사에서 1924년 9월 5일 개봉된다.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2932

 

그러나 이 <장화홍련>의 성공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2년 후인 1926년 10월 1일이 왔다. 이 날은 경복궁 앞에 떡 하니 괴물처럼 버티고 선 조선 총독부 건물이 준공식을 가지는 날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해방된 한국의 중앙청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그 우람한 건물이 들어서고 성장(盛裝)을 한 일본인들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조선 총독부의 새 보금자리를 경하하고 있었을 무렵, 그곳으로부터 걸어서 20분인 단성사에서는 또 다른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도 했고 독립군 부대를 찾아나섰으나 “학생들은 총 들고 싸울 게 아니라 공부로 애국하시오.”라는 나이 든 독립군의 충고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던 한 청년이 바야흐로 영화 하나를 만들어 막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불순한 내용이 있다.” 하여 이 영화의 전단지를 죄다 압수해 버린 사건은 훌륭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서울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청년이 영화 감독과 주연과 각본을 도맡아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쳐 버린 이 영화는 이후 한국 영화사, 아니 남과 북을 통틀어 표현한다면 ‘민족 영화사’에서 일종의 시조(始祖)로서 떠받들어지는 존재가 된다. 청년의 이름은 나운규, 영화의 제목은 <아리랑>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아리랑’ 주제가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깔리고 그 위로 유장한 변사의 나레이션이 흘렀다.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 왜 그 청년이 미쳐 버린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조선 사람은 없었다. 7년 전의 기미독립선언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정신줄 놓아 버린 이웃들의 사연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된 종기처럼 돋아 있었고, 그들은 삽시간에 영화에 몰입했다.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여동생을 탐내는 부잣집 마름, 그리고 광인의 친구 등이 엮어 내는 사연은 영화이면서 현실이었고 허구이면서 진실이었다. 광인 청년은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마름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는데 그제야 실성에 벗어나 본 모습을 되찾는다. 자신이 한 일을 깨달은 청년의 비장한 한 마디.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 순사에 끌려 고개를 넘어가는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구슬프게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배웅한다. 이 영화로 단성사에서는 대폭발이 일어난다.

 

개봉 직후보다는 점차 입소문 덕에 흥행몰이를 한 <아리랑>은 급기야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아우성치는 관객들을 통제해야 할 만큼의 인파에 직면했다. 극장 유리창이 깨져 나갔고 영화를 한 번 본 사람들도 또 다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나운규 자신의 말에서 그 이유를 캐 볼 수 있다. “.... 이 한편에는 자랑할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까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나운규, 한길사) - 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 삼천리 (1930.7)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윤도현의 시원스런 목소리로 울려 퍼졌던 ‘아리랑’, 남북 단일팀이 결성되면 으레 ‘국가’(國歌)로도 불리워지는 노래 ‘아리랑’이 한국인들의 귀를 파고들기 시작한 곳도 단성사였다. 사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민요라기보다는 아이 영화의 주제가격으로 ‘창조’된 노래였다. 하지만 없는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역시 나운규의 회고를 들어보자.

 

“내가 지었습니다. 나는 국경 회령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교 때에 청진에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나운규 작사 작곡이라 할 만한 이 아리랑을 단성사 음악대가 끄적인 악보를 들고 불렀던 이는 단성사 소속 가수였던 이정숙이다. 한국 영화사 최초의 영화 음악 주제가라 할 ‘낙화유수’를 영화가 상영되는 무대 아래에서 불렀던 그녀는 ‘아리랑’이 상영될 때에도 무대 아래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영화 ‘아리랑’ 주연 여배우였던 신일선의 회고) “문전옥답은 어디를 가고 쪽박 살림살이가 웬말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구슬프게 목을 꺾으며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관중들은 엉엉 울기 일쑤였고 드물게는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는 목청도 있어 임석경관 (당시 극장에는 경찰관 전용석이 있었다)을 바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금자탑이 서고 그 후로 한국인 모두의 노래가 되어 버린 노래의 산실이 된 곳. 그곳이 단성사였던 것이다.

 

1932년 단성사의 오랜 동안 이끌어 온 박승필이 죽었다. 나운규를 일본인이 만든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독립시켜 ‘나운규 프로덕션’을 만들도록 후원했으나 일제의 검열이나 기타 이유로 흥행에서 참패를 거듭한 데다 단성사 소유 문제를 놓고 벌어진 복잡한 송사의 뒤끝에 몸과 마음이 쇠잔해진 탓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성사장(葬)으로 치러졌다. 영화계의 거목이라 할 윤백남의 조사는 애잔하고 비장하기 짝이 없다.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해 피 흘리다가 화살이 다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기생들의 공연장이었던 단성사를 버젓한 극장으로 탈바꿈시킨 사람, 한일합방 소식에 퍼질러 앉아 통곡했으며 일본인이 만든 춘향전에 부아를 터뜨리고 조선인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그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인물의 이른 (향년 57세) 퇴장이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오랫 동안 단성사 지배인으로서 박승필을 보좌해 온 박정현이었다.

 

그러나 단성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다. 영화 자체의 조류가 변했다. 변사가 사설을 읊어대고 가수가 무대 아래에서 가녀리게 노래 부르는 무성 영화의 시대가 가고 토키 영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불멸의 명화로 이름 높은 <사랑은 비를 타고>가 바로 이 전환기를 소재로 잡고 있거니와, 단성사는 토키 시설을 갖추고 쾌적한 객석을 갖춘 일본인들의 극장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힘들여 토키 시설을 완비한대도 1920년 이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로는 도무지 경쟁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단성사는 1934년 대공사에 들어간다. 봄에 시작한 공사는 그 해가 다 가서야 완공됐지만 그것도 뾰족한 수는 못 됐다. 적자는 쌓이고 빚은 늘어만 갔다. 박정현은 동분서주하면서 단성사를 지키려 했지만 일본인 형사와 변호사, 깡패들까지 끼어든 고약한 경영권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1939년의 어느 날, 단성사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면서 ‘대륙극장’으로 그 이름마저 바뀐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한국 영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영화인이면서 또 하나의 ‘단성사맨’이라 할 박정현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몇 년간은 우리 민족사와 영화사와 그리고 단성사의 암흑기였다. 아시아 전역을 뒤덮은 전쟁판 속에서는 상영할 만한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영화를 수입할 루트도 막혀 버렸다. 그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 단성사가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6년 초,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敵産) 관리인과 종업원들은 ‘대륙극장’이라는 일본인들의 대륙 침략 야욕을 상징하는 이름을 버리고 원래의 이름 ‘단성사’를 되찾는다. 단성사의 굴곡 많은 역사에서 또 한 번 새 출발을 기약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시내 종로 3정목 대륙극장은 일본 제정 때 강제로 단성사를 매수하야 대륙극장으로 고쳤는데 오는 구정부터 다시 단성사로 개칭, 부활하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 속에 단성사의 이름은 되찾았다. 그러나 그 영화(榮華)를 되찾게 해 줄 영화(映畵)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유만세>니 <윤봉길 의사>니 해방 분위기에 걸맞는 영화가 몇 제작되기는 했지만 일제 때부터 이어져온 극장들의 간판을 장식하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부족했다. 단성사는 영화보다는 악극단의 공연장으로 즐겨 쓰였고 또 해방 공간의 특징으로 기억되는 좌우의 격렬한 대립 와중에 양측의 집회장 노릇도 했다. 그 치열한 대결도 일단락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선 지 2년이 되던 어느 초여름 날, 일요일 오전 영화를 즐기러 단성사에 온 관객들은 갑자기 영화가 중단되고 흘러나온 장내방송에 기겁을 하고 일어서게 된다. “휴가 중인 장병들은 즉시 부대에 복귀해 주십시오. 북괴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해 왔습니다.”

 

서울 전역을 잿더미로 만든 전쟁을 거치면서도 단성사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한때 종로의 라이벌이던 극장 우미관은 전쟁통에 잿더미가 됐고 조선극장은 이미 일제 때 불타 버렸으니 종로의 터줏대감은 단연 단성사였다. 전쟁 후의 팍팍한 세상에서 영화는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에 터잡은 단성사와 맞은편 피카디리를 꼭지점으로 퇴계로의 대한극장이 또 다른 편의 꼭지점을 이루며 남북을 연결하는 ‘극장 벨트’를 형성한다. 그 사이에 스카라, 명보, 국도, 세기극장이 간판을 올렸고 국제극장, 아카데미극장, 중앙극장 등이 광화문과 을지로, 명동 주변에 좌정하고 있었다. (“극장 - 한국영화의 또 다른 역사” - 조희문” 에서 인용)

 

넘치도록 흘러들어오는 미국 영화들과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던 한국 영화들은 이 극장들에서 연인 상영되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극장마다 조금씩 특징이 있었다. “70밀리 시네마스코우프”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우람한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아라비아의 로렌스>같은 스케일 거대한 작품들을 주로 취급했고 광화문의 아카데미 극장은 정동길을 걷는 연인들을 겨냥한 로맨틱한 영화들을 주로 틀었다. 그럼 단성사는 무엇으로 유명했을까? 주로 액션물과 서부극을 주로 상영한 영화관이었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들, 홍콩 무협 영화들, 각종 액션 활극들이 주로 단성사를 무대로 하여 상영됐던 것이다. 그 이유는 종로의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단성사 뒷골목은 소위 기생들이 많은 홍등가였다. 종로 일대가 유흥가였다. 그리고 그 일대는 깡패들이 많았던 우범지대였다. 그래서인지 주로 액션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액션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그 때문에 당시 영화계에서 ‘액션영화’ 하면 단성사로 통했던 것 같다. 또 액션물은 학생들도 좋아했는데 인근에 경기고, 덕성여고, 창덕여고 등 학교가 많아 학생들도 극장을 많이 찾았다.” (단성사 전 상무 이용희의 인터뷰 중 -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50년대 종로 3가 인근에는 ‘종삼’으로 유명한 사창가가 형성돼 있었고 이 ‘종삼’의 사창가가 정리되면서 ‘588’과 ‘미아리’가 생겨났으리만큼 그 역사는 뿌리가 깊었다. 그 ‘업소’ 종사자들, 그리고 인근의 학생들이 손쉽게 즐겨 볼 수 있는 영화를 주로 틀자면 화끈하고 시간 때우기 좋은 액션 영화가 제격이었으리라.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1955년 일어난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을 읽어 보자.

 

1955년 1월 29일 김동진이라는 남자가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다. 동대문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깡패 이정재가 자신에게 조봉암, 신익희 등 40여 명에 인물들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지시에 기가 질린 김동진은 이 명단을 폭로하고 시경에 신고했다. 이후 김동진은 잠적했는데 이에 분노한 이정재와 역시 정치 깡패로서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던 임화수는 김동진이 영화광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성사에 그가 좋아하는 서부 영화를 연일 상영한다. 마침내 김동진이 단성사 앞에 나타났을 때 이정재의 부하이자 조카뻘이었던 이석재는 김동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죽지는 않았으나 중상이었다. 이정재는 살인교사죄로 체포됐다가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검사가 교체되는 촌극 끝에 풀려났고 이석재만 구속된다. 이것이 ‘단성사 앞 저격 사건’이다. 극장 안에서는 서부극의 건맨들이 스크린 속에서 속사 연기를 펼치고 있었지만 극장 밖에서는 진짜 악당들의 총질이 백주 대낮의 서울 대로를 울렸던 것이다.

 

기실 액션영화나 활극을 주로 간판에 내세웠다는 것은 극장가의 명문으로 불리기에는 좀 아쉬움이 있었다. 흥행의 보증수표라 할 007 시리즈는 피카디리와 단성사의 주요 경쟁 품목이었다고 하니 (위 이용희 인터뷰 중) 왕년의 한국 영화의 산실 단성사에 걸맞는 포토폴리오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단성사는 단성사였다. 1977년 추석 ‘추석특선프로’로 한국 영화 흥행사에 길이 남을 영화 하나를 쏘아올린 것이다. <겨울여자>였다. 김호선 감독에 한국 영화의 영원한 히어로 신성일이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장미희가 열연했으며 곁들여 김추련, 송재호, 박원숙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만 58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국내 영화 흥행 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의 포스터 문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수십 편의 외화를 마다하고 왜 명문 단성사는 이 영화를 특선(특별히 선정)했을까!”

 

앳된 여자 주인공 '이화'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성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갈등을 묘사하고 파격적인 현대 여성의 성(性) 모랄을 담은 <겨울 여자>의 남녀 주연은 당연히 신성일과 장미희였다. 그런데 이 엄연한 전제를 무시한 일대 사건이 단성사 간판 위에서 벌어진다.

 

당시 극장의 얼굴은 단연 간판이었다. 개봉관들의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화공’이라고 불리우며 대접을 받았고 그들은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과 주인공들의 극적인 모습을 간판에 담았다. 당시 <겨울 여자>의 간판을 그린 단성사 화공 백춘태씨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구레나룻이 시커먼 놈이 찾아와서는 간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달라는 거야,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일이 끝나도록 기다리다가는 포장마차로 날 데려가더군. 그래 이름만 넣어주겠다고 했더니 꼭 그림이어야 한대. 며칠 동안 찾아오는 정성이 기특해서 '에라 욕 한번 먹자' 하고 걔를 신성일보다 크게 그렸지. 개봉날 난리가 났어. 신성일 측에서 가만 있겠어? 미술부 문 닫고 도망쳤지."

 

이 구레나룻 시커먼 청년은 영화 <겨울여자>에서 여주인공 이화와 사랑을 나누는 운동권 청년 정치학도 석기 역을 맡은 영화배우 김추련이었다. 김추련과 장미희가 남루한 다방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남아 있거니와 당대의 배우 신성일을 뒷전에 세우고 자신을 단성사 간판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당찬 배우 김추련은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것처럼, 김추련은 2011년 11월 8일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유서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이 세상과 이별하고 영원한 ‘겨울 남자’로 남는다.

 

<겨울 여자>는 무려 100일 동안 연일 전회 매진 행진을 펼친다. 추석 특선 프로로 나온 영화가 해를 넘기고 구정 특선 프로까지 이어졌고 3월이 되어서야 그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말한 바대로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당시 내리막을 걷고 있던 한국 영화는 그로부터 13년 동안 그 기록을 깨지 못한다. 한국 영화의 암흑기라고나 할까. “돈 주고 한국 영화 안 본다.”는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 하나가 또 단성사 간판을 박차고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1990년 6월 9일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였다.

 

7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내리막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겨울여자>의 흥행 기록은 영원히 깨지기 힘들게 보일 정도로 한국 영화의 수준과 흥행은 바닥이었다. 한국 영화의 산실이라 할 단성사도 스크린쿼터를 채우기가 무섭게 헐리웃 영화의 간판을 내걸기 일쑤였고, 한국 영화로 10만이 넘었다면 대단한 성과로 신문 지상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며, 영화제작사들은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면피용으로 한국영화를 싸구려로 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태흥영화사를 이끌던 이태원 사장은 좀 달랐다. 태흥영화사 역시 헐리웃의 20세기 폭스사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단성사에 주로 내걸어 재미를 보았던 회사였지만 한국 영화계의 거장이라 할 임권택과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며 서로 신뢰를 쌓았고, 한국영화 제작에도 열의를 보였던 것이다.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만다라>나 <백치 아다다>,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씨받이> 등 진중한 영화를 연속하여 제작해 온 임권택 감독에게 이태원 사장은 색다른 제안을 하게 된다. 쉬어가는 의미로 가벼운 액션물 하나 만들자는 것. 소재는 일제 시대 깡패 김두한. 임권택 감독은 내심 언짢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반열에 오른 자신에게 왜 그런 카드를 내미느냐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년에 B급 또는 그 이하 수준의 액션영화를 수도 없이 찍어 냈던 임권택 감독은 어찌 어찌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영화 <장군의 아들>이 1990년 6월 개봉한다. 단성사에서였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영화 이전만 해도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던 박상민은 이렇게 회고한다. “오디션을 보고 촬영을 하고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스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날 보던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악'하고 기절하는 거예요." (이데일리 2009.8.25 인터뷰 중) 영화에서 뜬 사람은 그 뿐이 아니었다. 명문대학생이었던 신현준은 김두한의 상대역인 하야시 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영화 내내 짤막한 스포츠 머리로 출연한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인으로 살았던 하야시의 풍모를 묘사한 설정이 아닌가 했는데 몇 년 전 신현준이 ‘무르팍 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영화 출연에 반대한 아버지 손에 깎인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스타 하나 없이, 생 초짜 배우들을 데리고 크랭크인을 감행한 이 영화는 단성사 한곳에서만 67만 8946명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단성사 극장에게도 <장군의 아들>은 감회가 서린 작품이었다. 단성사의 1차 전성시대라 할 1920-30년대를 무대로 한 영화였고 김두한의 ‘나와바리’였던 우미관은 일제 시대 단성사와 치열한 업계 라이벌이었다. 또 김두한이 일본 경찰 유도 사범이었던 마루오카와 대결을 벌이는 곳은 바로 ‘단성사’ 앞이었다. 일본인들이 주도했던 명동과는 달리 조선인들의 상권과 영향력이 살아 있었던 일제 시대 종로, 그리고 그 한복판에 위치했던 단성사의 초상은 영화 속에서도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한때 단성사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던 불우한 꼬마 김두한, 주먹 하나로 종로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단성사 지배인에게 용돈도 받아 쓰던 왈패 청년 김두한의 이야기로 한국 영화 부활의 축포를 거하게 쏘아 올렸으니 단성사로서는 참 신기한 인연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장군의 아들>도 신호탄에 불과했다. 90년 역사의 단성사 최고의 순간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서편제>였다. 이 얘기는 앞 포스팅에서 했으니 반복 않기로 한다. 분명한 것은 <서편제>가 기폭제가 된 한국 영화는 <쉬리>를 낳고 <실미도>를 생산하고 <JSA>를 창조하고 <괴물>을 그려내면서 세계 속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는 것이다.

 

이후 새로워진 영화 환경 속에서 멀티 플렉스 극장의 맹공세에 견디지 못한 단성사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멀티플렉스형 단성사로 새단장을 했다. 2005년 2월 3일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종로 3가에 우뚝 선 단성사 7층과 8층의 벽은 수천 개의 이름 석 자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인 협회에 등록된 배우와 감독과 기타 촬영 스탭들의 이름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단성사에 깊이 맺혀 있거나 스쳐 지나갔던 빛과 땀과 눈물의 총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단성사의 운명은 순조롭지 못했다. 각지에 극장 체인이 생겨나면서 “버스 타고 종로 가서 영화 보고 커피 한 잔”의 생활 패턴은 사라졌고, ‘100년 역사’ 단성사에 유달리 애정을 줄 만큼 문화적 촉각이 발달한 우리 사회도 아니었다. 2008년 최종 부도를 맞은 단성사 건물은 여러 차례 공매에 부쳐졌다가 유찰되는 아픔을 겪으며 현재는 폐쇄되어 있다. 이제 단성사에서는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 어느 주인을 만나 그 명맥을 이어갈지는 모르나 적어도 현재로는 그렇다.

 

옛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졌거니와, 아니 아예 새 건물이거니와 그래도 종로3가의 ‘랜드마크’였던 단성사 자리에 들어선 건물을 지나면 항상 내 마음은 과거의 철길로 달린다. 저 건물 7층과 8층의 벽을 빼곡이 채웠던 7800여 명의 이름 석 자. 그들이 혼신을 다해 만들었던 영화, 그 영화를 보겠다고 엄동설한이건 삼복더위건 장사진을 치며 몰려든 관객들, <아리랑>을 보며 울면서 관객들이 합창하던 아리랑 소리가 들려오고, 어렸을 적 백설공주가 저렇게 생겼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장미희가 호쾌하게 웃고 있는 <겨울여자> 포스터도 떠오르고, <장군의 아들>을 보고 나온 후 단성사 앞에서 폼을 잡으며 덤벼라 마루오카! 하며 까르르 웃던 청춘의 내 친구들이 지나가고, <서편제>의 유명한 진도 아리랑 장면에 나오는 돌담길을 가 보겠다고 부득부득 청산도행 뱃길에 오르던 객기의 이정표가 싱긋 웃으며 내 시선을 맞는 추억여행의 철도. 그 시발점 중의 하나가 종로 3가 단성사였다.



1965.4.11 목포의 눈물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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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5년 4월 11일 목포의 눈물 이난영 가다

 

어느 해였던가 <그 섬에 가고 싶다>가 개봉됐다. 그럴듯한 한국 영화에는 거의 빠지지 않는 배우 안성기가 나오고 문성근도 한몫하는 가운데 인민군으로 가장하고 섬에 들어와 자신들을 환영하는 ‘빨갱이’들을 색출하는 이경영까지. 숨죽이고 지켜본 이 영화가 나에게 남긴 것은 꽤 많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였다. 대충은 알았지만 그렇게 귀에 착착 휘감긴 적은 처음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영화 <고지전>에서 <전선야곡>을 들은 사람들의 감흥 정도 될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면 열심히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모종의 복수를 하고 되돌아오는 배 위에서 노를 저으며 한 아낙네가 부르는 노래였다. 그 연기를 한 사람이 설경구 이하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을 발발 떨게 만들었던 최형인 교수라는 건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노래만큼은 영화를 보고도 한참 동안 내 코와 입을 놓아 주지 않았다. 사아아고옹의 배애애앳노래....

 

목포의 개항은 빨랐다. 1897년 그 문을 열었고 일본인들이 떼로 몰려와 살았으며 일제 시대 때에는 조선의 5대 도시로까지 불렸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요즘 목포에 가도 산중턱이나 골목 곳곳에는 일본식 지붕을 한 집이 처마에 처마를 잇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마지막 본 목포는 2007년이었다. 그 기준이다) 호남선의 종점이자 바다에서 떨어지는 첫 호남 땅 목포의 전성기는 단연 일제 강점기였다. 그리고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1930년대였다고 한다.

 

"내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든지 그렇지마는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기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 하늘을 우러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내 노래를 싣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 항구, 저 항구에서 또 다른 항구, 이렇게 전 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1939년 인터뷰 기사- 오마이뉴스 2006.3.31 중)"라고 얘기했던 한 여가수도 그 정기를 받고 자랐다.

 

그녀의 이름은 이난영이었다. 그녀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 복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듯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고 전해지고 그녀도 초등학교 4학년 이상 교육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하고 있던 제주도로 건너가면서 그녀의 음악적 재능이 눈에 띈다. 그녀가 아이를 봐 주던 일본인 집주인은 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보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난영의 목소리에 혹한 것이다. “아 이 아이노 목소리노 좋다데스.” 그녀는 막간 가수로 주인의 극장 무대에 서게 된다. 또 이를 계기로 가극단의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1930년대 가장 두드러진 ‘민족지’라면 조선일보였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기자들이 판을 쳤던 그 시대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를 능가하는 항일 민족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국의 주요 도시의 ‘애향심’을 주제로 한 노래 공모를 한 것은 그 숱한 활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수천 편의 응모작 가운데 1위를 한 것이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노래’였다. 여기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레코드사에서 제목을 살짝 비튼 것이 <목포의 눈물>이었으며 이 노래를 부른 영광을 차지한 것이 이난영이었다. 공전의 히트.... 라는 말로밖애는 이 노래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식민지 조선의 그 팍팍한 현실에서 25만 장의 레코드가 팔려나갔다면 말 다한 것이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 어디서건 조선인들은 귀를 기울이며 가사를 달달 외우고 눈을 감고 젓가락을 두들겼다. 목포의 노래만은 아니었다. 부산이건 원산이건 항구의 추억을 가진 이들에게 목포의 눈물은 곧 부산의 눈물이기도 했고 원산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이난영이었으니 가히 톱스타랄 밖에. 문화평론가 최규성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걸그룹은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이난영,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4인조인 ‘저고리 시스터스’다.”라고 하거니와 이난영은 최초의 걸그룹 멤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지만 전란통에 김해송은 납북됐다. 당시 북한의 문화예술인에 대한 집착은 꽤 대단했다. 최은희같은 배우도 납북당했다가 구출됐고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 도중 폭격을 받는 틈을 타서 탈출했다. 김해송은 납북되었다고도 하고 월북했다고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얼마 못가 죽었다는 것이다. 한편 납북자와 월북자를 구분할 만큼 눈이 밝은 세상이 아니었기에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김해송의 노래는 된서리를 맞았고 작곡가를 바꿔서 살아남기도 했다. 그 가족, 이난영의 가족들의 형극이야 더 보탤 것도 없었으리라.

 

그 고생 속에 이난영은 부모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아이들을 화려하게 길러냈다. 김시스터스가 그들이다. 그들은 미 8군 무대에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라스베가스에서 고액 납세자 랭킹을 다툴 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냈다. 빌보드차트 7위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오늘날 싸이의 대선배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난영은 그들과 영화를 같이 하지 못했다. 한국에 남은 그녀는 후배 가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김시스터스는 어머니의 발목을 잡은 남인수를 못마땅해했다고 하지만 이난영은 잠시나마 남인수와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폐병 환자였던 남인수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그런데 남인수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작곡가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날 마지막 소원처럼 그 본처를 불러들인 이 남인수, 이난영과 살던 집을 덜렁 본처에게 줘 버렸다고 한다. 이런 황당할 데가. 하지만 이난영은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마침내 남인수가 떠나 버렸을 때 이난영은 또 한 번 목포의 눈물을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술로 살았다. 아마도 그때마다 목포의 눈물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그러던 1965년 4월 11일 이난영은 갔다.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도 없이 홀로 누운 침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조선일보 1965.4.13) 고인의 시신 주변에는 양주병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식은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6.3의 악몽이 있어서인지 집회와 시위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녀의 장례식은 특별 케이스로 허가됐다고 전한다. 그리고 회현동의 그녀의 집에서 오늘날의 세종문화회관 근처까지 거의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행진했고 시민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그녀를 보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하나로 한 시대를 장식했던 가수는 그렇게 갔다. 



1989.4.12 이경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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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9년 4월 12일 이경현의 비극

 

고3때 하숙을 했다. 아침 등굣길의 경우 40분이 족히 걸리는 거리의 학교에 배정받은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우리 집은 ‘교대앞’ 전철역에 있었다. 교대는 부산 교육대학교, 부산교대를 의미한다. 일요일 집에 왔을 때 바람 쐰다는 핑계로 캠퍼스도 거닐어 보고, 축제 때는 구경도 가서 이름으로 뿐만 아니라 풍경으로도 기억되는 학교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캠퍼스,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아 고딩을 들뜨게 했던 그 평화로운 학교도 80년대를 빗겨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86년 2월까지는 시위 한 번도 없이 잠잠했지만 졸업식에서 전단이 뿌려지고 그 해 말에는 10여일의 수업거부라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고 6월항쟁 때에는 교생 실습 나간 4학년들까지도 신분상 불이익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

 

1988년까지는 이른바 유화국면이었다. 물론 백골단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야 여전했지만 전반적으로 몽둥이의 각도는 낮았고 방패의 날은 둔했다. 그러나 89년 초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와 문익환 목사님 방북 등으로 공안당국이 조성되면서 상황은 변했다. 학생들을 잡아채는 손아귀에 인정과 사정이 사라졌고 심지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협 사격을 벌이는 일까지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경찰이 들어온 것을 89년도에 처음 보았거니와 부산교대처럼 여학생 많은 학교의 경우 경찰은 스스럼없이 군홧발을 들이밀곤 했다.

 

1989년 4월 12일도 그런 날이었다. 4월 7일 서울교대생 남태현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부산 교대에서는 남태현 학생에 대한 추모 집회가 열렸고 그 집회가 거의 끝날 즈음, 교대 전철역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전경 대열은 교대 교문을 박차고 들어가 학생들을 덮친다. 일단 물리력에서 상대가 안되는 싸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백골단도 혼비백산한 양들의 목줄기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처럼 사방을 내달렸다. 그 와중에 한 여학생이 쓰러졌다. 그리고 머리에 강력한 타격을 받았다. 전경이 방패를 내리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경찰은 부인했고 넘어지며 돌에 부딪쳤다고 주장했다. 그 애매한 정황은 법정 판결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도망가는 원고 이경현을 뒤쫓던 진압경찰 중의 누군가가 이 사건 발생 지점에서 이경현의 오른쪽 아래 부분의 신체 일부를 가격하거나 심하게 밀어 버렸고, 같은 원고는 그 충격으로 중심을 잃고 길바닥에 넘어지면서 길바닥과 그 곳에 널려있는 깨어진 돌조각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이 사건 상해를 입었다고 추단된다.”

 

86학번으로서 부산교대 윤리교육학과 4학년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교사 생활을 꿈꾸던 이경현은 그 길로 뇌사 상태에 빠져든다. 경찰의 막가는 진압이 부른 비극이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꼼짝없이 누워 있던 그녀의 곁으로 역사의 격류는 사정없이 흐른다. 바로 내가 다닌 고등학교 옆에 있던 동의대학교에서는 5.3사태로 전경들이 죽었고, 조선대에서는 이철규가 죽었다. 그 와중에 열사의 시신 부여안고 평양에 가자고 왈츠를 췄고 통일의 꽃은 평양에서 피어났다. 동유럽이 무너지고 서른 잔치는 끝나버렸다. 그녀의 동기들은 선생님이 됐고, 이윽고 새까만 후배들도 학사모를 쓰고 교단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누워 있었다.

 

10개월이 지나고서야 겨우 눈을 떴지만 이미 발생한 뇌손상과 후유증으로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능은 서너 살 정도에 오른쪽은 마비됐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넘어져 버려 깨진 안경 유리에 눈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문재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국가에 손배소를 내기도 했지만 법정은 “방패로 찍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불법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국가의 손해를 35%만 인정했다. 억울했지만 상고할 여력이 없었다. 그 돈이라도 받아 병원비를 해야 했다. 그 기막힌 세월 동안 이경현은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마비된 오른손을 대신한 왼손으로.

 

그래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대생들은 해마다 4월 12일이 되면 4.12의 비극을 상기하며 이경현의 이름을 곱씹었고 이경현을 돕고자 만든 ‘참빛교육사업회’ 동기 후배들은 학교측에 이경현에게 명예 졸업장이라도 주자는 청원을 한다. 그 청원이 받아들여진 것이 2007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만 얼굴을 움직여 그녀의 기쁨을 표현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굳어 있었다.

 

그러나 부산교대 학군단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칼을 세워 만든 문을 통과하면서, 전시된 자신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중견 선생님이 된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엷은, 때로는 짙은 웃음을 얼굴에 그렸다. 그 서글프게 흐뭇한 풍경과 오른손을 잃은 그녀가 왼손으로 그린 정성스런 그림들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경현 명예 졸업”을 구글링하시면 된다.

 

 

그 이후 6년 동안 그녀의 삶은 검색되지 않는다. 6년 전에는 활발히 가동된 듯 보이는 홈페이지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지 없는 주소로 나온다. 그즈음 한겨레신문 2월 14일자에 나온 아버지의 인터뷰는 그래서 짠하다.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경현이를 보고 갔던 3명이 대통령이 됐지만 경현이는 아직도 군사독재정권과 싸우고 있다...... 참여정부가 끝나면 민주화보상 심의조차 받을 수 없는게 아닌가 걱정된다.” 그때가 2007년 그 다음해에는 삽질하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왔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시대가 올 것인가를.

 

 

어머니는 “나와 남편이 죽고 나면 경현이는 누가 돌보느냐”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리고 기사에 따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머니와 어버지의 말을 곁에서 듣고만 있던 이씨의 눈에서도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는데 그 상처가 이룬 영광을 휘감은 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들을 뒤로 하고 바삐 길 달려온 많은 친구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냥 슬픈 날이다. 2013년 4월 12일 부산 교대에는 4.12를 상기하는 플래카드가 나붙어 있었을까. 하나라도 걸려 있었다면 다행이겠다. 정말로 


2002.4.13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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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2002년 4월 13일 가수여 잘 자라 - 현인 별세

 

일제 강점기 시절 그만큼 팔자가 좋은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스탠더드 석유 회사 직원 노릇도 하고 마이니찌 신문 기자도 할 정도의 인텔리였던 바, 일점 아쉬움도 부족함도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젊은이 자신도 다재다능했다. 후일 대여섯 개의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할 만큼 머리도 좋았고 학교 배구 선수로 발탁될만큼 운동 신경도 걸출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물론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면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일본인 여인과 재혼을 하는 등 가정환경의 변화 속에서 젊은이는 육사의 꿈을 접고 음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일본 최고의 음악 학교라 할 우에노 음악 학교에 입학하지만 아버지는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학비를 일절 보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역시 그런다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팔자가 아니었다.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장 그를 모셔가려는 축은 아무도 없었다. 성악 교수를 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는 포연처럼 사라졌고 악극단원이 되어 새 인생을 살아야 했다. 막바지에 다다른 일본의 발악적인 징용을 피하기 위해 서해 바다 건너 상해로 피신, 그곳에서 가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귀국한 그에게 하나의 전기가 된 노래는 <신라의 달밤>이었다. 신라의 바바바바바밤이여~~~ 하고 요즘도 곧잘 익살스런 유머의 대상이 되는 그 노래. “1947년 고려영화협회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명동 시공관에 올렸다. 현인이 소속된 악단을 초청한 것은 관객 끌기 수법이었다. 바로 여기서 불후의 '신라의 달밤'이 발표됐던 것이다. 민족 해방을 감동적으로 그렸던 영화가 끝나자 현인의 노래 순서가 왔다.” (주간한국 추억의 LP- 현인편)

 

그가 부른 신라의 달밤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관중들의 엉덩이를 찌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호소력있는 목소리에 듣는 이의 몸도 떨려나올 듯한 바이브레이션과 그에 걸맞게 잘생긴 외모 앞에서 관중들은 열광했다. 기립박수가 터져나왔고 앙코르는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됐다. 현인은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됐다. <비내리는 고모령>도 대히트였고 <고향 만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노래를 중단한다. 자신의 뜻에 항상 반대였던 아버지였지만 해방과 귀국 이후 아버지를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로서는 그 죽음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도닥여 다시 무대에 서게 한 사람이 며칠 전 얘기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었다.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모든 한국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는 한국전쟁이 터진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현인은 자기 집 다락방과 시골을 전전하며 납북을 피한다. 그렇게 악전고투의 인공 치하와 국군의 반격을 겪으면서 그는 이후 그의 노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명곡을 노래하게 된다. <전우여 잘 자라>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던 날 이 노래의 작사자 유호는 청파동 언덕빼기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거침없이 한강변으로 내달리는 것이 보였고 한강 다리는 이미 끊겼다. 그때 불쑥 한 국군 병사가 나타났다. 철모도 없고 흙투성이 헝겊 군화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나 서울을 지키지 못한 군인의 분노만큼은 이글거리며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떨어지자 총을 팽개치고 효창공원 언덕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석 달 뒤 서울 탈환을 한 후 유호는 그 병사를 기억하며 감회를 가사로 적었고 시골로 몸을 피했다가 나타난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현인 특유의 창법과 어우러진 이 노래 역시 빅히트였다.

 

소설 <태백산맥>에 보면 빨치산들이 이 노래 가사를 바꿔서 “반동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만큼 전쟁 중 이 노래의 호소력은 컸다. 단순한 사기앙양용 노래가 아니라 전쟁의 슬픔과 ‘사라진 전우’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담긴 노래였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 심지어 이 노래는 4.19 때 동료를 경찰의 총에 잃은 학생들이 눈물로 부른 노래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경무대로 경무대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1.4 후퇴를 겪고 일진일퇴의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무렵, 또 하나의 현인의 노래가 탄생한다.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사 문예부장 직함을 갖고 대구에서 살던 박시춘에게 친구 강사랑이 가사 하나를 디밀었다. 대구 시내에 넘쳐나던 피란민들의 비참한 몰골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적은 가사라는 것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음 이거 좋은데? 박시춘 역시 감이 왔다. 당장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단 하루만에 완성을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그것은 작사가 강사랑의 사상 문제(?)였다. 강사랑의 처남이 1948년 여순 사건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즉 그런 빨갱이의 친척이 만든 가사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특무부대장의 호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그 오지랖 넓은 특무대장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면서 이 노래는 레코드로 찍어낼 수 있었다. 역시 가수는 현인이었다.

 

일제 때부터 그 우람한 교각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볼거리를 제공하여 부산의 명물이었던 영도다리. 많은 피난민들은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보기요!” “무됴건 영도다리로 오라. 알갔네?” “영도다리만 기억해 응 영도다리만!” 를 되풀이하며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영도다리”를 주입시켰고 실제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영도다리에서 가족을 찾아 서성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가수 현인의 고향이기도 한 영도는 이미 피난민들의 움막집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고달픈 피난 생활 속에서 애인인지 동생인지 모를 금순이를 찾는 애절한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정도가 아니라 파고들어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돼 버렸다.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 보자.”는 노래는 당시 영도 다리를 오가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노래가 아니라 그냥 울부짖음이었다. 현인의 노래는 그 울부짖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내로라 하는 천하의 현인이 패배를 인정한 사람이 남인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또한 전쟁통의 수천만을 들었다 놨다 했던. 1959년 요즘의 ‘나가수’같은 두 톱스타 가수의 대결이 벌어졌다고 한다. 문화일보에 실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에 따르면 남인수의 응원단장은 막둥이 구봉서가 맡고, 현인의 응원단장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나서서는 이 두 가수가 번갈아 부르면서 일대 ‘대결’을 벌이는 장관이 펼쳐졌다고 한다. 하지만 남인수가 “낙화유수”를 부르면서 남인수 우세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후일 정두수에게 현인이 “그 양반을 도저히 못 당하겠더란 말이야. 정말 타고난 가수야. 백년에 한 번 탄생하기 힘들다는 불세출(不世出)의 가수 말이야. 어찌나 잘 부르던지….”라고 토로했다고 하니 (위 기사 중) 현인도 그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 셈이다.

 

그 뒤로도 현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파산하여 전재산을 들어먹기도 하고 결혼도 세 번씩이나 했다. 하지만 1991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신곡을 발표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2000년까지도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할 정도로 건강한 그였지만 당뇨가 도진 이후에는 그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고 구봉서 등 절친한 동료 후배들의 방문도 사절할만큼 조용히 살다가 2002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노래로 위로를 받았던 수많은 금순이들과 금돌이들의 애도를 받으며.


1865.4.14 링컨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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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65년 4월 14일 에이브러햄 링컨의 마지막 날

 

영화 <링컨>을 얼마 전에 봤었다. 프롤로그가 인상적이었다. 지나는 병사들과 소탈하게 얘기 나누는 한 키 큰 남자. 그리고 흑과 백의 병사가 읊어대는 저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그리고 인민들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죽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쟁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은 내전이다. 형제끼리 피붙이끼리 일단 싸움이 나면 그 격렬함은 말도 못할뿐더러 화해하기도 어렵다. ‘가족이니까’ 덜 지독할 것 같지만 오히려 ‘가족이라서’ 더 치를 떤다.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전쟁은 남북전쟁이었다. 반미를 표방하는 분들이 내 온 통계대로 미국은 대외 전쟁을 그치지 않은 나라이지만 그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에서 죽었다. 링컨은 그 전쟁의 본의아닌 도발자이자 지휘자이자 마감하는 자로 미국 역사에 남게 된다.

 

영화 <링컨>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그에게 붙여졌던 별명대로 ‘정직한 에이브’만은 아니었다. 또한 인간의 자유와 흑인의 권리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를 관철한 고결한 위인만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이전 그는 이렇게 얘기할 정도니까.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검둥이가 정치,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 검둥이에게 선거권이나 배심원의 권한을 주는 것, 검둥이가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검둥이가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한 검둥이는 우리처럼 살 수 없으므로 상층과 하층 계급은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상층의 지위는 백인들에게 할당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북전쟁 중에도 그는 흑인들에게 이렇게 쏘아부친다. “이 전쟁의 이유는 당신들이 여기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의 최대 목표는 연방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노예를 해방시켜서 연방이 유지된다면 그렇게 하겠다. 노예 해방을 포기하여 연방이 유지된다면 또 당연 그렇게 하겠다.”

 

그의 주 관심이라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유지였다. 물론 그 자신 노예제에 대한 본원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기는 했고 노예제를 싫어하여 노예주를 벗어나 다른 곳에 가 살았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으며 그리고 노예에 대한 끔찍한 학대를 목격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노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해방자로 이끈 것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떨쳐 일어나 왕 없는 나라, 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이 다스리고 의회가 그를 견제하는 통일된 공화국에 대한 신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고 한 독립선언서는 링컨으로 하여금 “이 인종이니 저 인종이니, 어떤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모든 모호한 말들을 버립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의 단일한 국민으로서 뭉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선언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했다. 저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 또한 이렇게 시작한다. “여든 하고도 일곱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전쟁의 승리자 치고는 놀라울만큼의 관대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묘사된 북군의 아틀란타 포위전같은 아픔이야 전쟁판에 흔한 일이었지만 서로의 최후의 자존심까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승패가 갈린 후의 예의는 대체로 지켜졌다. "(남군은)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을 하고 입에 달고 살아 그게 별명이 돼 버린 율리시즈 그랜트였으나 남군 사령관 리가 자신의 칼을 풀어 건네며 항복을 표하자 그 칼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남군이 자신의 말을 타고 고향에 돌아갈 것을 허용한다. 복수를 외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남군의 총칼에 죽어간 북군의 유해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남부를 완전히 점령하고 계엄을 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링컨의 대답은 그의 두 번째 취임사였다. 나는 게티즈버그의 연설만큼이나 이 연설의 한 구절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마태복음 18장 7절) 미국의 노예제가 이런 죄 중 하나고, 신의 섭리 아래 일정 시간동안 이 죄가 계속되어 왔다면, 신께서 죄를 저지른 남군과 북군 모두에게 이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게 했다면, 그 때문에 신이 그를 믿는 이들의 기대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전쟁이라는 벌이 빠르게 지나가버리길 조심스레 희망하고 열렬하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신께서 250여년간 노예들의 보답없는 노동으로 쌓아올린 모든 부가 없어질 때까지 이 전쟁이 계속되길 원하신다면, 3천년 전 말씀하신대로 채찍에 맞아 흘린 땀이 칼로써 되갚아질 때까지 지속되길 원하신다면, 그 역시도 "진실하고 의로운 신의 법"일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의를 갖지 말고, 모든 이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신께서 우리가 향하도록 이끄시는 정의를 굳게 믿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이 전쟁을 참아낸 사람과 미망인과 고아를 돌보기 위해, 우리들과 온 나라들과의 정의롭고도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with firmness in the right as God gives us to see the right, let us strive on to finish the work we are in, to bind up the nation's wounds, to care for him who shall have borne the battle and for his widow and his orphan, to do all which may achieve and cherish a just and lasting peace among ourselves and with all nations.)

 

이 연설을 한 지 한 달 열흘 뒤 링컨은 악의를 참지 못하고 증오를 숨기지 못한 남부의 광신자 윌 부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뒷머리에 총을 맞아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위대한 인물이 갔습니다.”라고 서럽게 울었던 스탠턴은 한때 링컨의 암살 기도에 가담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고 변호사 시절 링컨에게 최악의 모욕을 줬던 인물이었다.

 

멋진 성경 말씀 배운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이 말을 해 줄 사람이 너무나 많도다.


1902.4.15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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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3년 4월 15일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

 

예전 교과서에서 우리 민족은 993회였던가 하여간 그 비슷한 횟수의 외침을 받아 왔다고 배웠다. 방대한 기록에서 그 횟수를 하나 하나 기록한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다지 유쾌한 통계는 아니다. 또 어느 정도까지를 침략으로 봐야 하는지, 또 우리는 침략한 적이 없는지의 궁금증도 따르기는 하지만 일단 제쳐 두자. 여하간에 역대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그 평생에 전쟁을 한 번도 겪지 않았다면 복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국방 분야에 관심과 힘을 쏟게 마련인데 역대로 그 국방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간 세월보다는 삽질과 허당으로 점철된 역사가 더 길었던 것은 안스러운 일이다. 특히 임진왜란 뒤가 그렇다. 혹심한 전쟁을 겪으면 뭔가 배우는 게 있게 마련이고 지배층이 교체되거나 사회에 새 바람이 불거나 하는 것이 상례인데 조선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전쟁에서 그렇게 피를 보고도 국방력 강화는 뒷전이었다. 일본군이 쌓은 성을 공격하느라 그렇게 애를 먹었으면 일본의 축성술과 방어 전술을 수용했음직도 한데 조선 후기에 쌓은 성이나 전기에 쌓은 성이나 거기서 거기다. 임진왜란 때 기껏 개발하고 도입했던 화약무기들은 발전 없이 정체됐고 17세기의 대포를 19세기에 쏘다가 서양 열강을 마음껏 웃기기도 했고 결국 일본의 군함이 열어젖힌 개화(開化)를 맞아야 했다.

 

그때라고 부국강병의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지고 열강들과 수교를 하고 국제무대에 등장한 이래 고종 임금부터 개화를 꿈꾼 혁명가까지 조선이 망하고 말리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다. 다들 강한 군대와 번듯한 나라를 꿈꾸었고 그것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리라 생각했다. 다만 그러기에는 세상에 대한 눈치가 너무 없었고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탐욕이 막강했으며 스스로 강해지려는 청년보다는 외세에 의탁하는, 즉 수영을 배우기보다는 튜브에 의지하여 파도 타기만 즐기려는 어린애와 같았다.

 

청나라도 그랬지만 조선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중의 하나는 툭하면 인천항에 모습을 드러냈던 열강의 군함들이었으리라. 태평양은 고사하고 제주도에 갈 때도 염라대왕 알현 걱정을 해야 했던 노 젓는 나무 판자 배가 아니라 집채만한 덩치의 화륜선, 거기다 까마득한 거리에서도 척척 쏘아 맞히는 대포까지 장비한 위에 나부끼는 해당 국가의 깃발은 가히 간절한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리라. “우리도 군함을 갖고 싶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처지로 군함을 갖기란 1960년대 한국이 항공모함을 운용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왔다.

 

1903년 4월 1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발주하고 일본의 미쓰이물산합명회사가 납품한 ‘군함’이 인천항에 모습을 드러낸다. 고종 황제는 이 배에 ‘양무’(揚武)라는 이름을 붙인다. 양무호. 오죽이나 무(武)에 대한 갈망이 컸으랴. 이제 황제 폐하가 거둥하시고 인천 백성들이 늘어선 가운데 장대한 열병식과 함께 전라좌수영이니 경상우수영이니 하는 ‘수군’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근대적 해군 건설을 선언하시는 감동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수순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배의 삯을 지불하지 못해 일본이 인도를 거부했던 것이다.

 

양무호는 하릴없이 인천항에 닻을 내리고 있다가 넉 달만에 대한제국에 인도됐다. 어쨌건 감격스러운 순간이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그 감격은 세 동강 네 동강이 난다. 원래 그 배는 군함이 아니었다. 팰라스 호라는 이름의 영국의 상선이었던 것을 일본이 인수하여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던 배였다. 일본은 이 배를 25만원 주고 샀는데 이 망할놈의 영국놈들이 사기를 친 것을 알게 된다. 즉 성능은 생쥐인데 석탄은 하마처럼 먹었던 것이다. 하 이 처치곤란을 어찌하나 고심하던 중에 찾아온 국제적 호구가 대한제국이었다. “우리도 해군이 필요한데 배 좀 파시오.” 아이고 덴노 헤이까 반자이. 일본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값을 퉁긴다. “아 이거 우리도 아까운 배인데 많이도 말고 55만원 만 내시오. 까짓거 한국이 해군을 가진다는데 이웃 좋다는 게 뭐겠소.” 

 

낡아빠진 상선이었다가 석탄운반선이었던 팰라스 호가 별안간 대포를 탑재하고 군함같이 보이도록 얼키설키 두드려 맞춰진 후 ‘양무호’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은 대충 그런 사연이었다. 어찌어찌 한국측에 인도는 됐고 근대식 항해술을 접해 본 (일본 상선학교 견습생) 신순성이라는 분이 함장을 맡게 됐다. 그러나 양무호는 제대로 된 항해 한 번 못해 보고 다시 일본에 의해 징발된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배 한 척이 귀한데 지난 번에 팔아먹었던 아니 참 양보했던 그 배 어디 갔소?” 양무호는 바로 일본군에 징발돼서 일본의 전쟁에 활용되다가 더욱 노후해 버린 뒤 아예 군함 아닌 선원실습용으로 쓰이다가 1909년 아예 일본에 되팔렸다. 가격은 4만여 원. 그리고 일본의 수송선으로 이용되다가 1960년 철광석을 싣고 싱가포르로 가던 중 침몰하여 그 운명을 다한다.

 

고종 황제는 배 한 척을 더 들여왔었다. 이름하여 광제호. 이 배는 상선을 개조한 배 아닌 진짜 군함이었지만 이 배 역시 침략자를 향해 대포 한 번 못쏴보고 일본 해군으로 편입됐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해방까지 보게 되는데, 그때 일본인들의 철수선으로 이용된다. 즉 식민 통치 끝에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최후의 군함을 타고 자기네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양무호와 광제호도 자신들의 서글픈 운명에 탄식을 금치 못했으리라. 왜 우리 팔자는 이렇단 말이냐.

 

국제적 호구였던 대한제국.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지혜보다는 구색 맞추기에 눈이 더 돌아갔던 그 어리석음은 과연 우성 유전으로 남아 있을까 열성 유전자로 사라졌을까. 조급하지만 허세가 넘쳤고, 의욕적이었지만 순진하였으며 그래서 엉뚱한 놈 배불리기 일쑤였던 자주국방의 신화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헬멧부터 장갑차까지 어뢰에서 헬기까지 돈을 트럭으로 갖다 부었던 사업들이 속 빈 강정이 된 꼴을 여러 번 보았거니와, 미국과 북한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자마자 F35 사 주겠다며 방방 뜨는 몰골은 1903년 4월 15일 바가지를 썼는지도 모른 채 “우리 군함 양무호”를 고대하던 대한제국 관료들과 고종 황제들의 얼뜬 표정을 연상시켜서 입맛을 쓰게 만든다.

 

국방은 국가가 국민에게 베푸는 제 1의 복지다.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자고로 우리 역사에서 발생했던 국방의 문제는 대개 국방을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그를 엄한 놈들이 자기 주머니 챙기는 화수분으로, 자기 권력 지키는 개로 전락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마 바닷 속 고철이 된 양무호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1954.4.16 어느 서북청년단원의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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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4월 16일 어느 서북청년단원의 총살

 

영화 <지슬>이 화제다. 이 영화에서 거의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처럼 보이는 군인은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노인을 칼로 몇 번이나 찔러 그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내 어머니도 빨갱이 손에 갔소.” 라고 뇌까리는 그 사람. 그는 군인이었지만 군인이 아니더라도 그 말씨를 구사하는 수백 명이 설치고 있었다,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하지만 군대식 편제를 갖추고 함께 합숙하며 무력을 키운 사람들. 그들은 서북 청년단이었다. 서북이라는 뜻은 관서와 관북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즉 함경도 사람도 있었고 황해도 사람도 있었지만 평안도 출신들이 꽤 많았다.

 

일제 시대 이전부터 조선 서북 지역, 즉 평안도 지역은 개화의 물결을 빨리 수용했던 지역이었다. 특히 기독교의 성장이 눈부셨다.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웠던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울 정도였고 선천같은 곳은 군민 가운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수가 더 적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심 깊은 곳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구절을 숭상하는 붉은 군대가 들이닥치고 뒤이은 공산화 과정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대거 넘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빨갱이들에게 빼앗겼다는 분노가 턱밑까지 차 있었고 이 분노는 구약성서 속 신이 보여주는 ‘진멸’(盡滅)의 의지로 승화된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지금도 남아 있는 종로 YMCA 회관 강당에서 그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다. 그들이 그 실력을 선보였던 것은 1947년 3월 1일 전국 각지의 3.1절 기념식장에서였다. 이들은 좌익 계열의 기념식을 습격하여 잔인한 테러를 가하면서 그 악명을 천하에 떨치기 시작했다. “다 쓸어버리라우.” 그들이 부르는 서북청년단가는 우리도 아는 독립군가를 개사한 것이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그들에게 서북은 이민족에게 폐허가 된,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이었다. 자신들은 바빌론 유폐 중인 셈이고.

 

이 서북청년단의 사업부장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이가 있었다. 그가 김성주다. 평안북도가 고향으로 꽤 유복하게 살았다는 그는 해방 이후 일가족과 함께 월남한 ‘삼팔 따라지’ 중의 하나였다. 그는 돈 나오는 구멍을 아는 사람이었다. “(서북청년단은) 배급표 과다할당이란 소박한 단계에서 적산물자 불하라는 좀 더 과감한 대규모의 협잡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서청 간부들은 이러한 협잡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미 군정청을 ‘건너마을 과방(果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협잡에 김성주(사업부장, 섭외부장)가 큰 역할을 했다. 김성주는 “미군 장교와도 개별적인 선을 대어 소위 보급작전에서 많은 수확을 얻어냈다.””(임대식 “제주 4-3항쟁과 우익 청년단” <제주 4-3 연구> 215쪽)

 

김구 암살 후 “애국청년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던 그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까지 올라갔지만 청년단의 분화와 이합집산 과정에서 얼마 못 가 팽을 당하고 만다. 서북청년단 위원장에 훗날 치안국장까지 차지하는 문봉제와도 살기어린 눈초리를 주고받는 처지가 되었고. 그 와중에서 그가 토해낸 한맺힌 말들은 그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암살자 안두희의 상관이었던 장은산 포병사령관도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갔던 판이었으니 그가 평온하게 죽기는 그때부터 이미 그르지 않았나 싶다.

 

팽 당한 이후 벌어진 전쟁판에서 그는 마침내 “어서 가자 서북에”에 동참한다. 진격하는 UN군에게 편승하여 평양으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또 한 번 이승만과 충돌한다. 군사 작전권을 헌납하기는 했으나 이승만의 기조는 줄곧 “한반도는 내가 다스린다”였다. 새로이 수복된 북한 지역도 당연히 자신이 지명한 이가 다스려야 한다고 봤고 실제로 평남 지사를 임명하여 파견한다. 그러나 UN군, 측 미군의 반응은 “누구 맘대로”였다. 북한 지역에 UN군의 군정(軍政)을 편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UN군측에 의해 임명된 평남 지사가 바로 김성주였다. 이승만이 파견한 사람들은 김성주측에 의해 물을 먹거나 UN군측에 쫓겨나 남쪽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평양 시민 앞에 연설하는데 나타나지도 않는 불경죄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 아마 펄펄 뛰었을 것이다. 자기 말 안듣는다고 참모총장을 포살하라고 으르렁거리던 양반이니 아마 능지처참을 시키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격이 불같다.”고 했던 관서 사내 김성주도 재빠르게 변신을 시도한다. 이승만에 맞서는 조봉암 진영에 찾아와 이승만에 대항해 싸우겠다고 했을 때 입을 벌린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 때문에 조봉암 진영은 그를 수용한다. “그가 서청에 있으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한 걸 우리도 알고 있었지요. 김구 암살에 협력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단독선거에서 실력행사를 했었고, 그라나 자기도 이승만과 싸우고 싶다고 한다고 조봉암 선생이 의견을 물어오더군요. 우리는 오히려 조봉암 선생을 공산당으로 몰아 붙이면서 국민과 유리시키려는 이승만 진영의 공작이 심했기 때문에 김성주 같은 인물을 선거본부에 두는 것이 유용하기도 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지요. (신창균 증언, 한국현대사인물 발굴)

 

그 선택은 결국 김성주의 죽음을 부른다. 이승만은 어떻게 하든 김성주를 잡을 요량이었다. 1953년 여름 헌병대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연행된 그는 “정부시책에 불만을 품고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이승만 대통령 살해음모를 꾸민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7년 징역을 구형받는다. 이 시기에 대통령 살해 음모를 꾸미고 징역 7년이라면 혐의가 없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정도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선고공판 3일을 남기고 면회간 가족들은 선고가 무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며칠 뒤엔 사형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떴다. 변호사도 모르고 가족도 모르는 사형 선고. 그리고 시신도 온데간데 없었다.

 

4.19 이후에야 김성주의 최후가 밝혀진다. 1954년 4월 16일 그는 감옥에서 나와 원용덕 헌병 사령관의 집으로 끌려온 후 원용덕의 운전병의 권총에 총살된다. 시신은 근처 방공호에 파묻혔다가 화장돼 버린다. 물론 가족에게는 일언반구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후일 그 어머니와 아내가 시신이라도 찾아달라고 진정하여 조사가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원용덕의 집에서 나온 이승만의 친필 밀서는 이승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짐작케 한다. “김성주는 내가 임명한 문봉제를 해치려는 자이며 손원일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으니 극형에 처하라...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하라” 이런 인간이 국부라면 그 애비에게서 나온 자식이 참 가련하지 않은가


1960.4.18 4.19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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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4월 18일 4.19 이브

 

1960년 4월 전국적으로 심상찮은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부정선거가 한 달 전에 있었고 며칠 전에는 물고기가 파먹은 고교생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이때만 해도 학생운동(?)의 주력은 고등학생들이었다. 각지의 ‘고삐리’들이 먼저 교문을 박차고들 나와서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다. 부산고등학교에서 휘날린 선언문 한 구절을 읽으면 요즘 고딩과는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

 

그 굼뜬 대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동국대생 김칠봉의 증언에 따르면 4월 14일 고려대,성균관대,홍익대 등 학생들이 모여 4월 21일 총궐기를 결정했고 그에 상응하는 준비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21일 D데이를 앞두고 김칠봉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소식을 듣는다. “고려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이 모의에 참여했던 고려대 대표 김금석은 먼 훗날 “40년 동안 고려대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고 술회하거니와 4월 18일 벌어진 시위는 고려대가 ‘먼저 치고 나간’ 셈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폄하할 수도 없는 것이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미 4월 16일 신입생환영회를 기화로 시위를 벌이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고 18일의 시위는 그 재시도였던 것이다.

 

 

점심 시간을 틈타 학생들이 사이렌을 울리려 하자 학교측이 이를 막아섰다. “동을 뜨는” 수단을 잃어버린 고려대생들은 목소리를 사이렌 대신 사용했다. “인촌동상 앞으로!” “인촌동상 앞으로!” 사이렌은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었겠지만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사람들의 육성은 고려대생들을 격동시켰다. 내가 그 데모를 주동했노라고 하는 사람은 꽤 되는데, 그 시위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이었다. 법대생 홍영유의 회고에 따르면 1시경 모여든 사람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인원으로는 안된다고 여긴 홍영유가 도서관에 들어가 시위의 시작을 알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루루 학생들은 가방을 싸고 우당탕 의자들이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4.18 고대 시위의 시작이었다.

 

 

이제 수천 명이 된 고려대학생들은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섰다. 안암로터리와 대광고등학교에서 경찰과 충돌했지만 고려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는데 성공한다. 광화문 앞에서 고려대생들은 교가를 부른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퍼져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이 노래를 작곡한 이는 후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한몸에 새긴 작곡가 윤이상이다. 그는 고대 교가를 두고 이렇게 얘기한 바 있었다.

 

“교가를 부르는 것은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읍니다…… 이 교가가 현재나 장래에 여러분의 학교에 대한 감회와 항상 같이 할 수 있기를 작곡자로서 바라는 바이요……이 노래가 여러분의 진리의 탐구와 애교심에 통하여 길이 좋은 반려가 되었으면 이상에 없는 소망이겠습니다.” 최소한 1960년 4월 18일 그 소망의 반은 이루어졌다.

 

처음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이어서 그랬는지 정부의 대접도 고등학생들 때려잡을 때와는 달랐다. 홍진기 내무장관이 특명을 내려 구속학생들을 석방했고 총장 유진오의 권유로 시위를 끝낸 뒤에는 경찰 백차를 앞세우고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백차의 선도까지 받은 고려대생들이 의기양양 을지로를 거쳐 종로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사단이 발생한다.

 

 

깡패들이 고려대생들을 습격한 것이다. 약 100여명의 깡패들이 흉기와 둔기를 들고 학생 대열을 들이쳤고 삽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반공청년단 종로 지부장이었던 임화수, 그리고 이른바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 똘마니들이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계획된 습격”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2004년 4월 시사저널에서 인터뷰한 ‘낙화유수’ 김태련은 그게 우연이었다고 증언한다. 3.15 선거 지지 관제 시위를 위해 깡패들이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충돌은 우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또 박수를 유도하며 행진하는 고대생에게 한 깡패가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웬 데모냐.”고 시비를 걸었고 이에 발끈한 단순한 고대생들이 몰려들자 깡패들이 그에 대응한 것이라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대로변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온 서울 시내를 들끓게 한다. 김태련은 “고대생들이 그때 반공청년단 사무실이 있던 종로 4가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연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니었다. 깡패들이 정당의 연설회를 방해하고 권총으로 야당 정치인을 쏘던 시절 발생할 수 밖에 없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동대문 사단의 오야붕 이정재와 임화수는 목이 매달리게 된다.

 

 

깡패에게 두들겨 맞은 이들 외에도 그날 처참하게 짓밟힌 고대생들은 더 있었다. 대오가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43명의 고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계속 농성을 전개하다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4월 18일이 저물었다. 깡패에게 습격당한 고려대생들의 소문은 서울 시내를 폭풍처럼 휩쓸었고 대학생이고 고등학생이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 새끼들을 그냥.....” 4월 21일의 연합집회는 바로 이틀 앞으로 당겨졌다.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은 그렇게 우리 역사에 다가오고 있었다.




1960.4.19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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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인 이유

 

우리는 흔히 4.19 하면 ‘젊은 사자들’로 기억한다.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늙은 독재자를 끌어내린 정경으로 4.19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4.19에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오히려 ‘어린 사자들’이다. 4.19를 가져온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4.19에서 죽어간 186명의 선열 가운데 대학생은 22명이다. 그리고 고등학생은 36명이다. 대학생보다 더 많은 고등학생이 죽어갔다. 국민학생과 중학생을 합친 희생자도 19명이다. 초중고생의 희생자는 대학생을 압도한다.

 

3.15 부정선거 후 서울에서 최초로 일어난 시위 역시 고등학생들이 주도한다. 3월 17일 성남고등학교 학생 4백명은 마산 사태의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다. 영등포 일대에서 치열한 시위를 벌이던 그들 가운데 100여 명이 잡혀 들어갔고 “대가리 피도 안마른 놈들”의 시위를 경찰은 처절한 몽둥이질로 응징한다. 이후 교장에게 애들 잘 관리하라고 타박을 했을 때 교장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 친일파로 이름 높은 장군 출신의 교장 김석원이었다. 친일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망정 그 순간 김석원을 바라보며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다잡고 있었다.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첫 시위 역시 대학이 아니었다. 하루 전날 깡패들에게 공격당해 피 철철 흘리며 돌아왔던 인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소식에 치를 떨던 대광고교생들은 오전 8시 30분 경 시위를 시작한다. “우리는 제 2세 국민으로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역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은 핏발 지고 때묻은 역사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 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묻은 국사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3학년이 선봉에 서고 1,2학년이 뒤를 따랐다. 종로 5가에서 경찰과 깡패들의 공격을 받고 혜화동에서 또 한 번 박살이 난다. 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은 당시 혜화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을 격동시켰다. “형님들 뭐하십니까?” 악을 쓰며 끌려가는 동생들의 울부짖음은 상아탑에 갇혀 있던 대학생들의 가슴에 천불을 질렀다. 안그래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名文)이라 할 선언문을 발표하며 거리로 나선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지금의 두타빌딩 자리에 있었던 덕수상고 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이 학교에서는 두 명이 희생되는데 그 중의 한 명이었던 김재준은 종로 4가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하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붕대로 상처를 싸맨 후 소방차에 매달려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조준 사격에 의해 심장이 꿰뚫리고 만다. 동성고등학교는 거의 모든 전교생이 시위에 나서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장과 교사들이 그 주위를 지켰다.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서는 무려 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민주화운동사업회 자료 중) 당시 동북중학교 2학년이었던 강예섭은 그날의 정황을 이렇게 시로 썼다. “ 어른들은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 “우리가 지은 죄로 저애들이 피를 흘린다”고 /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서(?)를 남긴 사람은 한 명. 진영숙이라는 열 다섯 여중생이었다. (이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그녀는 데모대가 탄 버스에 올라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구호를 외치다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그때 대한민국은 지지리도 못사는 나라였다. 그 해 독립한 아프리카 나라들보다도 못살았고 북한은 라이벌이라는 이름이 무색할만큼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며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로 인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으로서의 자긍심을 획득한다. 이승만이 했다는 말처럼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서지 않는 국민은 죽은 국민” (영감탱이 말은 잘한다)일진대 힘 앞에서 공손하지만은 않고 불의 앞에서 눈 내리깔지만은 않는,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아는 사람들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북한이 “수령님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로 수십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남한 사람들은 차례 차례 등장하는 독재자들에게 기가 죽는 듯 보이다가도 기어코 일어나 그들을 끌어내리고 혼쭐을 냈다. 그 에너지의 차이가 결국 오늘날의 남북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4.19였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들고 일어선 고교생들의 힘,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하고 편지를 썼던 여중생의 강단, 총에 맞아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붕대를 감은 채 죽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던 고교생의 뜨거운 의기, 그것들을 잊거나 잃으면 우리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검군과 권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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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검사를 빗대 이 글을 끄적였지만 오늘은 한 경찰관의 이름과 사연만 바꿔 다시 올린다. 




삼국사기에 보면 이런 인물이 나온다. 대사라는 벼슬을 지낸 구문의 아들 검군. 대사(大舍)라는 벼슬은 신라 관등 가운데 12번째 벼슬로 4두품에게도 허락된 것이었으니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였다고 보긴 어렵겠다. 검군도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라 했으니 고만고만한 벼슬아치였을터. 서기 627년 가을 음력 8월 이른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이는 바람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우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 사량궁의 관리들은 작당을 해서 나라 창고의 곡식을 나눠 착복한다. 그런데 검군만이 그를 받지 않았다. 이에 다른 사인들이 검군을 꼬드긴다.

 

"아니 다들 받았는데 왜 자네만 마다하는 건가? 적어서 그래? 그럼 좀 더 신경써 줄께.".

 

사람 사는 건 천 년 전이나 2천 년 전이나 다를 것이 없다. "새끼 혼자 잘난 척은" 하면서 침을 찍 뱉는 치들도 있었을 것이고 괜히 걱정해 주는 체 하면서 "모난 돌이 정 맞어. 다 자네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하면서 "자 내가 신경 좀 썼네" 하면서 두둑한 곡식 주머니 내미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검군은 '웃는다'. 정색을 한 것이 아니고 웃는다. "내가 명색이 이찬 나으리의 자제 근랑의 문도로 이름을 걸어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을 했는데 옳은 일이 아니라면 천금을 준대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소."

 

또 한 번, 사람 사는 것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있었고 그를 중뿔난 놈으로 몰아부치고 조직에 해를 입히는 존재로 폄하하여 그를 찍어내고야 마는 쥐새끼같은 소인배들은 항상 더 많이 있었다. 검군의 동료들이 그랬다. 그리고 좀 더 막나가는 이들이었다. " 이놈을 죽이지 않으면 말이 새나갈 거야. 그럼 우린 다 죽는 거라고." 작당을 한 그들은 이미 양심 같은 것은 손톱처럼 잘라 버린다. 그들은 드디어 검군을 독 먹여 죽이기로 하고 그 음모의 술자리로 부른다.

 

검군은 그를 초대한 자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랑으로 모시던 이찬의 아들 근랑을 찾아가 이별을 고한다. "오늘 이후에는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근랑은 크게 놀랐다. 두 번 세 번 이유를 물은 뒤에야 검군은 '대략' 내막을 밝힌다. 소상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음모를 꾸며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고해 바치고 도움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님을 뜻할 것이다.

 

근랑이 말한다. "왜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 그러자 검군은 이렇게 답한다. "제 목숨이 두려워 남을 죄에 빠지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

 

거듭 거듭 예나 지금은 다를 것이 없다. "그냥 내가 피해보고 말지 일 시끄럽게 만들기 싫습니다." 라는 얘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무지하게 많이 듣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쓸쓸히 사라지는 이의 뒤켠에서 얼마나 많은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지 알지 않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자신이 사실을 밝히고 발고한들 자신의 동료들보다 더 해쳐먹었을 '담당 관청'의 관원들의 행태가 어떨지는 검군 그리고 그를 이끄는 화랑인 근랑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았겠는가. 오늘날의 우리들도 검군 같은 이들이 부딪치게 되는 그 높고도 살벌한 장벽의 두려움에 대해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검군은 이런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죄를 짓기는 죽기보다 싫고 죄에 가담하지 않자니 죽을 만큼 답답하고, 차라리 나 혼자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근랑은 갑자기 위엄을 잃는다. 그리고 임전무퇴를 뼈에 새긴 화랑으로서는 상상 못할 비겁한 소리를 입 밖에 낸다. "그...그럼 어떻게 도망이라도 가지 그러나."

 

그때 검군은 하늘같이 모시던 화랑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굽은 건 저들이고 곧은 건 저인데 되레 도망가는 것이 어찌 대장부겠습니까." 이때 근랑의 표정이 어떠하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누군가의 희생을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무능한, 그러나 고귀한 신분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검군은 동료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곳으로 갔다.

 

동료들은 검군에게 사과의 뜻으로 술자리를 펼쳐 놓고 (酒謝) 사죄하였다. 그런데 그 음식에는 독이 섞여 있었다. 검군은 이를 알고도 음식을 꿋꿋이 먹었다 (劒君知而强食) 그리고 죽었다. 독 기운에 온몸이 굳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검군 앞에서 그 동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장담하는데 “녀석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악한 치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안타까와하면서 “조금만 생각을 고쳐 먹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고, “검군 때문에 다 죽을 수는 없잖아. 처자식이 몇 명인데.” 하면서 애써 위안하는 새가슴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리라 그러나 결론은 같다. 그 모두는 살인자들이었다. 살인의 공모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생매장한 파렴치한들이었다.

 

네 번째로 말한다. 사람들이 벌이는 일은 서기 627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검군의 비장함을 본다. 어느 날, 대한민국 경찰서의 한 수사과장은 국정원이라는 거대하고 비밀스런 조직의 조직원이 선거에 개입한 사건을 배당받는다. 한창 선거판이었고 1위를 달리던 여당 후보나 그 뒤를 쫓던 야당 후보나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역시 오래 전부터 권력의 눈치 쫓기는 하이에나에 뒤지지 않는 경찰 수뇌부 또한 재빠른 줄서기에 나서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때 권은희 수사과장은 “경찰의 명예를 걸고 수사하겠다.”를 입에 담는다. 비록 경찰의 역사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추한 얼룩으로 그득하다 해도 그녀는 처음 제복을 입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그 순간을 잊지 않았으리라. “나는 대한민국 경찰이다. 불의를 응징하고 법을 수호하며 시민을 보호하는 대한민국 경찰이다.” 그리고 전국을 뒤흔드는 이 사건에 냉정하게 접근한다. 마치 화랑의 낭도였음을 죽음까지 불사하는 긍지로 삼았던 검군처럼.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냉정하지 못했다. 수사를 돕고 바람막이를 하기는 커녕,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상전들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당신들 이러면 위법이다.” 경찰이, 범죄를 밝히는 앞에서는 가족과 친지도 없어야 할 경찰이 범죄의 증거조차 내놓지 않으려는 꼬락서니 앞에서 경찰의 명예를 지키려던 수사관은 떨리는목소리로 항변했으리라. 그러나 파렴치의 역사는 천년을 두고 흐른다.

 

법을 수호한다는 경찰관들은 “국정원 직원 김씨가 제출한 하드디스크 등을 김씨에게 돌려주려고 시도하다가 수서경찰서 수사팀의 강한 항의를 받고 계획을 철회”하는 얼척없는 짓거리를 했다고 한다. 살인범 잡아놓고 살인 도구를 공손히 건넸다는 얘기다. 그 뿐이 아니다. “(국정원 직원 글에서) 특정 정당과 관련한 어떤 패턴이나 경향이 보인다는 분위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 새누리당 쪽에 불리한 수사 내용을 언론에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지시란 여러 가지의 복합이었으리라. ”권 과장 왜 그래? 알만한 사람이.....“하는 압박과 “권 과장 승진해야지?” 하는 회유와 “권 과장이 그래봐야 권 과장만 다치네. 자네를 생각해서 그래,.”하는 비겁한 위로까지 범벅이 된 혐오스러운 혓바닥의 여러 갈래였으리라. 그 독사들, 독사만도 못한 구더기들은 수사의 책임자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켰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발표를 했다. 끝내 이 오욕을 참지 못한 경찰관은 마침내 자신의 경찰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독배를 든다. 이 사실을 세상에 밝힌 것이다.

 

다섯 번째로 말한다. 검군은 그렇게 죽었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 할 만하다.”는 어느 군자(君子)의 평으로 끝난다. 자기 낭도의 어이없는 죽음에 분노한 근랑이 그 생쥐 같은 관리들을 징치했다거나 검군에게 독을 먹인 동료들이 후일 자신들의 죄를 늬우치고 그 묘소에서 통곡했다거나, 성난 백성들이 관리들 목을 매달고 의로운 검군을 추모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의 흔적조차 비치지 않는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인가. 이미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지난 일을 꼬장꼬장 끄집어내는 경찰관 하나 옷 벗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상이 뭐 그런 거지 하면서 소줏잔이나 들이키며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인가. 자신이 선택한 경찰, 법의 수호자이자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경찰의 명예, 역사적으로 빛난 적보다는 추한 적이 더 많았던 그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경찰관이 검군의 동료들보다도 더 사악하고 비열하며 추악하고 지랄맞은 경찰 탈을 쓴 시러베아들들에게 당하는 꼴을 지켜보면 되는 것인가. 과연 천오백년을 두고 우리 백성들의 DNA는 그렇게 변동이 없는 것인가.

 

그녀는 사법고시를 패스했고 그 경력으로 경찰에 들어온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 경력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경찰에 투신한 이유로 “ 휴대폰 충전기가 방전으로, 4일간 통신수단이 되질 않자 아버님께서 서울로 상경에 신림동 고시촌 주변 파출소를 찾아가 딸을 찾는 부친을 경찰관들이 모시고 원룸까지 찾아왔던” 고마운 기억을 들었다. “국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로서의 경찰을 꿈꾸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직을 걸고 폭로한 사연을 우리 역시 캐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보호해야 한다. 국정원 직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국정원장이 그를 지시한 정황이 확연한 마당에, 공권력이 그를 두둔하고 비호하고 은닉하려 한 사실이 경찰관의 입으로 폭로된 판국에 저 정직한 경찰관 하나를 이 시대의 검군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아니 대관절 무슨 낯으로 아이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1950.4.20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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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0년 4월 20일 보스턴을 제패한 한국인들

 

이번에 테러로 얼룩진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우리 나라와 인연이 깊다. 그 인연의 시작은 굵디 굵었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시민들은 경악했다. 유서깊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웬 황인종 한 명이 다리 길고 덩치 좋은 서양인들을 척척 제치고 1위로 골인한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그는 무국적자(?)였다. 즉 그때만 해도 정식 정부가 없었던 한국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서윤복이었다.

 

그는 고려대학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려대학생이 아니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원로 정치인 이철승이 그 진가를 알아보고 총장도 모르게 스카웃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입던 헌옷으로 유니폼을 대신했고 동대문 근방에서 헌 스파이크슈즈를 구해 밑창의 못을 빼고 리어카 바퀴의 고무를 잘라 대충 기워 만든 신발을 신고 그는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했다. 감독 손기정은 남다른 감회 속에 서윤복을 껴안고 펑펑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정식 국적은 없지만 서윤복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큼직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히틀러에게 받은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렸고 승자로서 환한 미소 한 번 보여 주지 않았던 손기정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좀 씁쓸한 이면도 있었다. 이 보스턴 마라톤 팀의 코치는 남승룡이었다. 원래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우승 후보는 남승룡이었고 마라톤 경력으로보나 나이로 보나 남승룡은 손기정의 선배였다. 하지만 그제나 지금이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앇습은 유구했던 것 같다. 남승룡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해방 이후 출전하는 보스턴 마라톤 대표팀에서도 그는 반강제로 감독 아닌 ‘코치’를 맡아야 했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당연히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는 코치 겸 선수로 출전했던 바 서른 여섯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완주했으나 10위(13위라고도 하는데)에 그쳤다. 그 나이에 보스턴 가도를 달렸던 것은 어찌 되었든 한 번 1위로 국제 대회를 제패하는 기억을 가져 보리라는 집념 때문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하나 더. 서윤복의 유니폼에는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도 박혀 있었다. 미군정 치하라는 특수한 상황의 반영이기도 했고 미군정의 재정적 지원이나 승인 없이는 출전조차 어려웠던 당연한(?) 형국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서윤복의 마라톤 제패는 세계를 경악시켰고 한국을 뒤흔들었다.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의 휘호를 선물하며 감격했고 인천 시민들은 집집마다 돈 30원씩을 거둬 환영대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여기서 또 별로 웃기지 않는 유머를 구사한다. “나는 몇십년 독립운동을 해도 신문에 별로 안났는데 자네는 두 시간 반 뛰고 나보다 더 유명해졌네.” 하여간 교활한 영감탱이 같으니. 당신이 한 행동이 신문에 다 났으면 대통령이 되지도 못했어!

 

하지만 보스턴과 한국의 인연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절정은 1950년 4월 20일 찾아온다. 보스턴 시민들은 또 한 번 경악한다. Korea라는 나라 이름은 서윤복으로 인해 가물가물 기억하겠는데 이번에는 이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들이 보스턴 마라톤 1,2,3위를 모두 차지해 버린 것이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가운데 함기용은 나이 불과 열아홉살, 양정고보 3학년생이었다. 즉 고3이 세계를 뒤흔든 큰일을 낸 것이다. 이번에는 그 셋 모두의 유니폼에 태극기만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풀코스는 몇 번 뛰어 보지도 못한 이 함기용은 눈보라가 날리는 악천후 속에서 50위 밖으로 처져 있었다. 그러다가 스퍼트를 내기 시작해 연이어 선수들을 제치더니 최윤칠마저 “선배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추월해 버렸다. 얼마나 빨리 뛰었던지 보스턴 마라톤 코스 가운데 마의 코스였던 상심의 언덕 (Heartbreak Hill)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만 지쳐 버렸다. 그리고 뛰지 않고 걸었다. 뛰다가 또 걸었다. 그러기를 세 차례. 그래도 다른 선수들은 그에게 범접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가 막힌 언론들이 “Walking Champion"이라고 불렀을까.

 

또 한 번 감독으로 와서 “나도 했고 서윤복도 했는데 너희들이 못할 게 뭐냐?”면서 된장국을 손수 끓여가며 응원했던 손기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신생 대한민국 전체가 뒤집혔지만 미국 현지에서도 이 희한한 마라톤 강국의 청년들에 관심이 많았다. 2위를 차지한 송길윤의 인터뷰는 더욱 재미있다. 미국 언론들이 “마라톤을 잘하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이 전라도 군산 출신 장정은 “김치!”라고 대답하여 동양의 신비한 식품(?) 김치에 대한 궁금증을 유포시켰던 것이다. 아마도 김치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트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영광스런 보스턴 금메달은 아쉽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의기양양 귀국한 지 두 달만에 전쟁이 터졌고 금메달리스트 함기용은 보스턴 대회 금메달을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파묻고 피난을 떠났다. 그런데 고향 춘천에서 숨어 지내던 중 그는 국군에게 체포된다.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복장이 엇비슷한 군인들을 만나 섣불리 “인민군 만세”를 부르짖었는데 그들은 인민군과 격전을 치르고 눈에 핏발이 선 국군들이었다. 함기용은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때 필사적으로 외친 것이 “내가 보스턴 마라톤 1등한 함기용입니다!”였다. 국군 가운데 그를 용케 알아본 사람이 있어 생명을 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보스턴 금메달의 신화는 그를 살렸지만 훗날 금메달 묻은 곳에 가 보니 금메달은 누가 벌써 파 갔더라고 한다.

 

2004년 4월, 함기용의 고향 춘천에서는 54년만의 환영대회가 열린다. 원래는 당연히 보스턴 제패 후 고향 춘천에 내려와 꽃다발 세례를 받고 카퍼레이드를 벌여야 옳았겠지만 전쟁은 그를 무산시켰던 것이다. 춘천 시장은 54년 전 함기용이 써야 했던 월계관을 씌워 주며 뒤늦은 축하를 전했고 함기용은 “고향은 떠나 있어도 언제나 고향”이라며 감격을 감추지 않았다. 전쟁은 함기용에게 금메달과 차후의 영광을 앗아가 버렸지만 보스턴 우승은 그의 목숨을 살리고 반세기 후까지도 그를 기리는 명예로움으로 남는다.


 

1944.4.21 주기철 목사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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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의 순교

 

기독교가 그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끝내 잃지는 않았던 것은 거개가 욕망으로 타락하고 권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끝내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고 말하며 욕망에 저항하고 권세에 맞서 싸웠던 소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 예수천당” 따위의 주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를 드리며 왜곡된 현실과 약한 자를 짓밟는 억압자들에 대해 싸웠던 역사 또한 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권세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요 권력자는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들”이라며 일부 정신나간 선교사들이 딴 생각 하지 말고 예수만 믿고 천당 티켓 따라고도 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부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구절을 되뇌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유관순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그랬고, 독립만세에 가담하지 않은 가톨릭 성당에 뛰어들어 “당신들은 조선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기독교인들이 그랬으며, 짐승보다 더한 일본 경찰의 악형을 받으면서도 독립 의지를 꺾지 않은 숱한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농촌에 뛰어들어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상록수>의 주인공 같은 이들이 그랬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가 끝이 없어 보이고 탄압도 거세지면서 조선 기독교도 점차 타협과 변절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신사참배 문제는 그 핵심이었다. 일제는 처음에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교리를 존중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중일전쟁 이후 파쇼 체제가 공고화하면서 일종의 기싸움처럼 기독교에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 기독교는 속속 무릎을 꿇는다. 최초로 굴복한 것은 감리교였다.

 

 

1936년 양주삼 초대 총리사가 신사참배 수용을 선언했고 1938에는 최대 교파라 할 장로교마저 무릎을 꿇는다. 전국 27개 노회 대표 목사 27명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들 목사는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신앙문제도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라고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해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 교회는 일제 시대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반대한 것 같이 얘기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 유명한 한경직 목사도 스스로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이라 고백했거니와 장로교 대부분, 장로교 지도자 대부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신도 대부분은 신사참배 대열에 가세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기독교가 2천년을 흘러온 것은 그렇듯 권세에 영합하고 굴종하는 대세에 거스르는 정의파들이 꼭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다. 그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 가르치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지만 몸이 안좋아 낙향했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기도한다. 이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됐고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 중 가장 빛나고 가장 혹독했던 시간이 열린다.

 

 

이미 평양에 오기 전 1935년, 장로교 목사들이 모인 금강산 온정리 수련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일제라는 미쳐가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적이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침례인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침례인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 하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이 설교는 끝맺지 못했다. 기절초풍을 한 일본 경찰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난리를 치렀던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했다. 이 정도 되면 일제의 눈엣가시가 아니라 눈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았을 것이다. 일제는 툭하면 주기철 목사를 잡아가둔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찬성한 평북노회장이 심은 기념 식수를 도끼로 베어버리자 주기철 목사를 잡아들였고 경상북도 의성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기독교인들을 일망타진할 때에도 그 배후 혐의로 먼 평양까지 찾아가 주기철 목사를 끌고 왔다.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재연된 대부분의 고문은 이때 자행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기독교인들처럼 주기철 목사는 그야말로 “빵잽이”였고 모든 일의 배후였다.

 

 

그때 그를 괴롭힌 것은 고문만이 아니었다. 고독감도 있었다. “70여명의 동지가 하루 아침에 다 잡혀 왔고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동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본에 항복하곤 했다.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두 사람의 동지가 나가버리고,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나가버리고...12월이 다 돼 가니까 그 수많은 동지가 다 나가버리고 마지막 네 명이 남아 끝까지 항거했는데, 그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감, 외로움은 정말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독재 정권의 고문 기술자들도, 기업의 노조탄압자들도 심지어는 인간을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반대하는 바리새인같은 기독교인들도 즐겨 내세운 수법 중의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아니 다 넘어왔는데 왜 너만 이러니?” 일제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곤죽이 되도록 고문한 다음에는 반드시 속삭였을 것이다. “아무개도 넘어왔다데쓰. 이러면 너만 다친다데쓰,”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민족 전체를 억누르고 짓밟는 권세에 항거했고, 핍박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한 예수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였다.

 

 

“예수의 삶 전체는 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죄인을 (구원하기)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죽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일 것인가.” <예수의 양(蘇羊) 주기철>,김인수 저,홍성사

 

의성경찰서에서 풀려나와 그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산정현 교회 강단에 올라 남긴 설교는 한국 기독교사에 남는 명설교일 것이다. 그는 산정현교회 수천 성도 앞에서 유언같은 설교를 남긴다. 그는 자신이 옥중에서 한 다섯 가지 기도를 얘기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주옵소서. 한두번 받는 고난은 감당할 수 있으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기게 해 주옵소서. 내 어머니와 처자를 주께 맡깁니다. 의에 죽고 의에 살게 하시옵소서. 제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어쩌면 이 기도는 오늘도 덕수궁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할 기도인지도 모르겠다.

 

 

일제는 다시 주기철 목사를 투옥했다. . 이제는 친일 기독교 노회까지 가세하여 주기철 목사를 목사 직에서 파면 처분하고 가족들까지 목사 사택에서 내쫓는다. 하지만 교회 교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기철 목사 가족이 살던 집 담 너머로 곡식이며 먹을 거리들을 던져 넣었다. 가족들은 그걸 ‘만나’라 불렀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맬 때 하느님이 내려준 그 음식. 만나는 이렇듯 하느님만이 내리는 게 아니다. 곤궁에 처한 자, 위험에 빠진 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내미는 온정과 공감의 행동들은 모두 만나가 되는 것이다.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마지막 면회를 한다. 형무소장은 병보석으로 석방해 주겠다고 하지만 아내는 그를 거절한다. “당신은 승리하셔야 합니다. 살아서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주기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형무소 안에서 죽겠다고 말한다. 의연하게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처럼. 그러나 돌아서면서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은 예수처럼 인간적이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그리고 그날을 넘기지 않고 주기철 목사는 세상을 떠난다.



2004.4.22 룡천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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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4년 4월 22일 룡천 폭발 사고

 

2004년 4월 22일 거대한 폭발이 평안북도 용천군을 뒤흔들었다. 용천은 신의주로부터 조금 남쪽에 위치한 압록강 하구의 도시이며 중국과 마주보고 있고 화교들도 적잖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북한 중앙통신에 따르면 “1톤 폭탄 100발 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고 룡천역 반경 1킬로미터가 폐허로 변했다. 사망자는 북한 당국이 초기 집계한 사람만 154명에 부상 1300명이었다. 신의주 일대의 모든 차량이 용천으로 쏟아져들어왔고 북한은 이례적으로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그 도움을 청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여러 나라 정부들과 국제 기구 및 단체들에서 인도주의적 지원 용의를 표시하고 있는 데 대해 평가한다.”

 

그런데 폭발이 났을 때부터 이상한 소문은 유령처럼 국제 사회를 떠돌았다. 이것이 우발적인 폭발이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노린 암살 기도라는 것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열차가 룡천역을 통과한 몇 시간 뒤에 폭발이 일어났으며 현장에서 휴대폰을 기폭장치로 한 시한폭탄 흔적이 발견되었다거나 심지어 운반 중이던 스커드 미사일이 폭발한 것이라거나 주변에서 아랍인들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눈에 띄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북한의 발표로는 인화물질에 불꽃이 튀어 사태가 발생했고 그 원인은 비료의 원료인 질산암모늄이라고 했다. 이 질산암모늄이란 놈이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미국의 악몽으로 남아 있는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발 사건에 쓰인 놈이 바로 질산암모늄이었던 것이다.

 

위키리크스에 의해 공개된 CIA의 보고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현정은 현대 회장에게 자신을 노린 암살 음모임을 인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정은 회장이 회사 경영진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기록한 이 문건에 따르면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룡천 통과 후가 아니라 통과 30분 전이었다고 하며, 자신의 통과 시간을 정확히 파악한 누군가가 폭발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었고 이 사건 이후 김정일은 인민군에 대한 신뢰도를 더욱 높였다고 되어 있다.

 

우연한 폭발인지 아니면 정교한 음모의 소산인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수천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참사가 청천벽력으로 북한의 한 도시를 덮쳤다는 것이다. 특히 비극적인 것은 룡천 소학교였다. 학교가 무너져 버려 수업을 받고 있던 수십 명의 학생들이 건물 더미에 깔려 숨졌다. 이날의 비극을 묘사하면서 북한의 중앙 통신은 27일발 기사로 용천 소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이렇게 소개한다.

 

“룡천소학교(인민학교) 교사인 한은숙씨(32)는 수업 도중 강력한 폭풍으로 학교건물이 붕괴되면서 교실에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와 김정일 동지의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모신 다음 7명의 학생들을 구해내고 자신은 희생되었으며, 한정숙 교사(56)도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사망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룡천에 펼쳐진 수령 결사 옹위의 숭고한 화폭”이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교사가 가장 먼저 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아이들을 구하고 죽은 것은 장한 일이나 아이들에 앞서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모셨던'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는지.

 

이런 사실이 북한 인민과 지도자의 굳건한 연대를 말해 준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룡천 폭발로부터 60년 전 인류가 겪었던 최대 규모의 폭발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벌어졌다. 그 폭발이 일어났던 것은 일본 히로시마였다. 수만 명이 동시에 불타 버리고 온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고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지옥같은 고통 속에 죽음을 기다리거나 미친 듯이 폐허를 질주하던 그 현장에서, 상처투성이의 일본 공무원 4명이 무언가 무거운 함을 들고 달리면서 이렇게 외쳐 댔다. “어진(御眞 - 일본 천황의 초상화)이다! 어진이다! ”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은 경례하고 일어설 수 있는 자들은 90도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했으며 누워있던 자들은 몸을 일으켜 머리를 숙였고 일어설 수 없는 자들은 길을 비켰던 것이다.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위력을 직격으로 맞은 도시의 사람들이,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말이 ‘어진’을 구하려고 기를 쓰고 화상을 입고 나뒹구는 가운데에서도 일어나 그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에 펼쳐진 천황 폐하 만세의 숭고한 화폭”이었던 셈이다. 과연 이 두 나라 백성들의 멘털리티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대체 누가 이들의 ‘예의’를 예찬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누가 뭐래도 광기였다. 아미테라스 신의 후예인 천황이 다스리며 유사 이래 한 번도 외세에 굴하지 않은 긍지 드높은 일본인으로서 그 중심인 천황 폐하를 모시는 충량한 신민으로서 전장에 나가 벚꽃같이 지고 원자폭탄을 두들겨 맞고도 어진 앞에서 절했던 일본인들은 미쳐 있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행차할 때 일반 백성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야 했고 천황이 들먹여지면 벌떡 벌떡 일어서는 것이 일본인들의 ‘예의’였다. 고위 공무원들조차 천황 앞에서 아차 범절을 어기면 그 목이 날아갈 정도였다. 천황을 알현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한 번 보지도 못한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젊은이들은 미군 군함의 굴뚝으로 비행기를 몰아 들어갔다. ‘총폭탄’이 되어서 말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기 이틀 전 외국인들을 시사회에까지 초청했다는 영화 ‘소원’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자강도 희천 발전소 건설 부대 중대장 김옥철 대위가 울먹이며 집으로 들어온다. “당신.... 기념 사진 찍었어요?”라며 아내도 감격에 겹다. 이유는 두 번이나 장군님과의 기념 사진을 놓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기어코 장군님의 자애로운 배려로 기념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라면 그들은 룡천 폭발이 아니라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자식보다는 그 사진을 택할지도 모른다. 아이들보다 먼저 초상화를 챙긴 룡천 소학교 교사처럼 말이다. 그들과 일제 말기의 일본인들과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이 질문을 참으로 많이 던져 봤지만 ‘통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에게서 뚜렷한 대답을 들은 바 없다. 그저 “그 차이를 모른단 말이야?” 라는 비분강개 외에는. 룡천 폭발 사고 날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그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1959.4.23 의지의 친일파 박중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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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4월 23일 의지의 친일파 박중양 사망

 

어제인가 뭔 일이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끄적인 바 있는데 이 인물에 마주치면 사실 그 말을 박박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1959년 4월 23일 당시로서는 징하게도 장수한 나이인 여든 일곱에 그 생을 마감한 박중양이라는 사람이 그다. 그는 일제 시대 각 도지사 및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상위급 친일파다. 하지만 그는 시류에 편승하여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거나 윤치호처럼 친일을 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못했던 회색분자와는 거리가 천만리 떨어진, 그야말로 신념에 찬 친일파였다.

 

개화의 소용돌이가 조선을 몰아칠 무렵, 그는 똑똑한 젊은이였고 세상 물정을 잘 알았다.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면 안된다고도 생각했고 개화파에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그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사태가 찾아든다.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자객에게 사살되어 그 시신이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것이다. 유약하고 서글픈 망국의 군주로 이미지 메이킹이 되어 있지만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매우 집요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옥균을 죽이러 연달아 자객을 파견했고 마침내 성공하여 그 시신이 돌아오자 노량진 백사장에서 그 시신을 토막내어 종로에 내건다. 이미 열강 각국과 수교를 한 처지로 외국인들도 자신들과 건배하며 조선의 앞날을 논하던 잘생긴 조선 청년 관료가 시신이 되어 당하는 꼴에 치를 떨었을 테지만, 약관 나이의 박중양은 분통을 터뜨린다. “이런 짓은 야만인보다도 못하다.”

 

한 번 삐딱한 눈에는 모든 것이 삐딱해 보이는 법이다. 조정래의 어느 소설에 보면 오물로 그득한 기찻간 변소에서 한 조선인이 “조선놈들은 하여간 더러워!” 식으로 얘기하면서 자신도 변기에 오줌을 누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오물을 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박중양은 이 야만적인 나라에 대한 혐오감을 덕지덕지 쌓아 나간다. “이런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관비(官費)로 일본 유학길에 만난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이후 일생을 규정하는 이가 된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제 잘난 맛에 살며 조선인을 괴롭히는 동료 일본인 학생들과는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박중양을 대해 주었고 박중양은 이에 감읍한다. 그런데 자신을 유학 보낸 나라 정부는 역적 박영효가 일본에 있다는 이유로 자객을 파견하여 (박영효를 찾기 위해) 유학생들 꽁무니나 쫓고 있다는 걸 알고는 더욱 정나미를 떨어뜨린다. ‘왜? 또 죽이고 시체 끌고 가서 토막내려고? 이 야만종들.’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는 하늘같이 모시던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물에 빠졌을 때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어 그녀를 구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감격하여 사례를 하려 하자 단호히 사양하며 받지 않는다 . 거기다 놀자판이던 일부 유학생들과는 달리 똘똘하고 영민한 모습까지 갖춘 조선 유학생에게 이토는 열렬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이토의 양자라고까지 소문이 났지만 박중양에 따르면 ‘은사’였지 ‘양아버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중양은 해방된 뒤에도 이토공(公)이라고 입에 달고 다녔으니 양아버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조선 사람들같이 “공공 정신이 없고,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과 허세가 심한” (이건 박중양과 일본인들이 조센징에게 붙인 딱지고, 수십년 동안 호남 사람들이 받아온 누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신의 있고 성실하며 힘있는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점차 그의 신념이 되어 갔다. 조선인이었지만 그는 일본인이었다. 대구 군수를 지낼 때 그는 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구 성곽을 허문다. 성곽 때문에 조선인 상권을 넘보지 못했던 일본 상인들의 요구에 응해서였다. 그가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전송할 정도였다.

 

3.1운동이 벌어지자 ‘자제단’을 조직하여 운동의 확산을 막았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가 보기에 만세 군중은 쥐뿔도 없는 것들의 집단 최면에 불과했다. 그리 세상을 깔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해도 박중양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유능했고 그만한 힘을 과시했다. 일본인 관료들이 우습게 놀다가는 박중양한테 박살이 났다. 그 별명이 ‘박작대기’였던 바 웬만한 일본인들은 물론 하늘같은 판사 정도는 지팡이 끝으로 가리키며 “자네 왔냐?”고 물을 수 있던 조선 천지에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오늘날 속리산 말티재 길은 충북도지사 시절 법주사 올라가다가 고갯길에 차가 멈추자 당장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라고 호령하는 바람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이 왔다. 웬만한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죄상을 빌거나 이광수같이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라고 못난 소리를 하고 앉았을 때 그는 초지일관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약을 바싹 올리는 것은 기본, 해방 공간의 좌우대립을 보면서 “독립할 자격”을 논하며 비웃기도 했다. 여기에 열받은 사람들이 성토를 하거나 간혹 멱살을 잡아올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악을 썼다.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

 

3.1절 기념식에 일제 시대의 관헌들이 축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가가소소했고 니들 중에 창씨개명 안한 놈 나와 보라고 염장을 질렀다. “오늘날에 당하여 국가건설에 노력하는 것은 독립운동자이거나 아니거나 불문하고 차별은 없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3.1절 의식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의 조롱이 상당 부분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승만 같은 건 미군만 나가면 봇짐 싸느라 바쁠 것”이라고 낄낄댄 것은 흡사 예언과도 같지 않았던가.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등을 조롱하다가 기소되기도 하고 정신병원에도 가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일생에 한 번도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시세에 영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조지훈의 수필 지조론에서 이렇게 묘사될까.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이걸 읽으면서 박중양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었나. 북한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죽창에 찔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한 남한의 친일파 세상에 비분강개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에 공감하면서도 일면 그의 초지일관의 이유와 그의 생각의 흐름이 궁금하다. 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무일푼으로 떠난 일본 유학 때부터 반민특위에서 그 일기장을 압수하기 전날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가 출판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윤치호의 일기와 더불어 나는 이 일기의 내용이 몹시도 궁금하다. 독립운동사의 감동만큼이나 그의 기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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