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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4.24 형평사와 강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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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3년 4월 24일 형평사와 강상호

 

‘백정’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누구에게 함부로 썼다가는 칼 맞을 일이거니와 조선 왕조 말기 심지어 개화기 이르러서도 백정이란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천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기와집과 비단옷은 금물이었고 그 좋은 혼례식날도 말을 타다가는 봉변을 감수해야 했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양반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설설 기던 농민들까지도 백정이라면 흰눈부터 떴다.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백정을 벌레보듯 했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서다가는 뉘 집 멍석에 돌돌 말려져 누구 몽둥이에 유명을 달리할 지 몰랐다. 심지어 일제가 들어선 뒤에도 그랬다. 법적으로는 평등했지만 호적이라 할 민적(民籍)에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경상도 하고도 진주는 전통 깊은 도시였다. 역으로 말하면 고정 관념이 낙락장송처럼 뿌리 박혀 있는 동네였다. 진주에 최초로 생긴 기독교 교회인 봉래 교회에서 일이 벌어진다. 처음 교회를 개척한 커틀 선교사는 예수는 믿겠는데 백정은 인간이 아니니 내보내라는 희한한 신자들 앞에서 아연실색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따로 예배를 보았는데 1909년 부임한 리알 선교사는 이를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 (좀 배워라 요즘 개독교인들아), 백정들과 일반인(?)들과의 동석 예배를 추진한다. 백정들이 쭈뼛쭈뼛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4백명 교인 중 3백명이 아우성을 치며 일어선다. “내사 백정하고는 같이 천국 안갈끼라!” 리알 선교사도 보통내기가 아니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면서 버텼다. 그러나 때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억지에 진다. 개독교인들이 국회의원들을 들볶아 차별금지법안을 파기시킨 오늘날처럼 이때도 리알 선교사는 결국 우매한 백성들에게 굴복한다. 49일간의 분쟁 끝에 결국 종전처럼 따로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진주 지역에 적잖은 파문을 던진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를 부르짖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일반인(?)들이고 백정들이고 가슴 속에 의문 한 자락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 없이 진주냉면 칼칼한 육수는 무엇으로 내며 진주비빔밥 고명의 하이라이트는 뭘로 장식한단 말인가. 또 진주는 진주민란의 기억과 갑오농민전쟁의 기운이 일종의 정신적 유산으로 전승되던 동네였다. 멸시는 받았을망정 새롭게 들어서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력을 쌓은 백정 집단과 역시 과거와 단절한 청년 지식인층 사이에는 점차 연대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건이 터졌다.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여러번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100원을 기부하고 진주 제3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주변 학생들의 구박에 못이겨 자퇴하고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시켰으나 여기서도 쫓겨났다. 그후 진주에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日新高等普通學校)가 설립되어 구장으로부터 노력봉사에 응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노력봉사를 하면 입학이 보장되는 줄 알고 다른 70여명 백정들과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창립위원회측으로부터 백정은 입학시키지 않겠으며 부역한 댓가는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http://cafe.daum.net/historystory/dta/26?docid=YkBHdta2620071023160032에서 인용)

 

이 사건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는다. 1923년 4월 24일 마침내 ‘형평사’라는 우리 역사에 매우 소중한 이름의 단체가 그 깃발을 올린 것이다. “我等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임을 고창하며 형평사는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고 부르짖는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백정 출신 장지필도 있었지만 주목해야 할 사람은 양반 출신 강상호다.

 

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호소한다. (서울신문 2004.4.10) 백정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거부하자 그는 아예 백정의 자식 두 명을 양자로 들여서는 그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학교로 데려다 주며 차별 철폐를 외친다. 일찍이 국채보상운동을 진주에서 주도했고 3.1운동을 주도하여 옥살이도 했고 진주 정촌면 가좌리에 살 때는 마을 사람들의 세금까지 대신 내 주었던 그는 원래 진주의 천석꾼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여기서 형평의 이름이 나온다)는 신념에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천석꾼 재산은 밑빠진 독으로 고스란히 빠져든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식들 교육을 못 시킬 정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해방 뒤 인민위원장 (다른 직책이라는 설도 있다) 같은 좌익 쪽 감투를 섰던 관계로 남아 있던 재산까지 반공 세력에게 몽땅 뜯겼다고 한다. 그가 고통 속에 1957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들이 치렀다. 형평장 (전국축산기업조합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쳐났다. 그때 옛 형평사원에 의해 읽혀진 조사를 인용해 본다. 백 마디 말보다 강상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 인권 평등을 부르짖으십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 오던 50만의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아마 그 장대한 장례 행렬을 굽어보며 강상호는 그래도 자신의 삶이 값진 것이었음을 재삼 깨닫고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니 그 값을 따질 인격이 아니었으매, 그 일로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엿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고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에 기뻐하며 웃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 때문에 편안히 앉아 밥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아들의 증언) 강상호, 천석군 재산을 스스로 바치고 빨갱이로 몰려 남은 재산도 강탈당했다는 비운의 인물 강상호는 그래도 1923년 4월 24일 형평사를 생각하며 웃었을 것이다.


1937.4.26 게르니카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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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 게르니카

 

스페인에는 바스크 인들이라는 좀 특이한 소수 민족이 있다. 유럽 대륙 전체가 인도 유럽 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지만 바스크 어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민족인지 그 초기 역사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에 초승달 깃발을 꽂았을 때에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던 깐깐한 사람들이었다. 중세 기사의 무용담으로 유명한 <롤랑의 노래>에서는 기사 롤랑이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 후위를 맡았다가 이슬람 군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롤랑을 공격한 것은 이슬람군이 아니라 바스크 인들이었다고 한다.

 

오랫 동안 독립을 유지해 왔지만 스페인이 하나의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통일되면서 바스크 역시 그 지배 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바스크인들이 스페인에게 동화되기는 어려웠다. 1936년 스페인의 식민지 모로코에 주둔하던 프랑코 장군이 공화파 정부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지극히 파괴적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바스크인들은 주로 공화파 편을 들었다. 공화파가 바스크 인들에게 더 많은 자치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한 때문이었다. 수천년 동안 강대한 제국과 압도적 다수의 이민족 사이에서 버텨 온 끈기는 내전에서도 빛을 발했다. 바스크는 까탈루니아와 더불어 공화파 최대의 요새이자 최후의 거점이 된 것이다.

 

게르니카는 이 바스크인들의 고도(古都)였다. 이 도시의 상징인 오래된 참나무 아래에 바스크인들이 모여 정책을 결의하고 스페인의 지배자에게 바스크인들의 자치권이라 할 ‘푸에로’라는 특권을 요구했던 전통이 면면한 바스크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그리고 1937년 4월 26일은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인구 6천 명 가량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중심가는 호객과 흥정 소리로 요란했다. 프랑코의 군대가 바스크의 중심지인 빌바오 지역을 죄어들어오고 있었고 바스크인들의 수십개 대대가 그에 몰려 후퇴 중이었지만 장날은 장날이었다. 그러나 오후 4시 30분 불길한 종소리가 게르니카의 평화를 깬다.

 

뎅 뎅 뎅.... 교회의 첨탑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다. 곧이어 우람한 몸집의 독일의 하인켈 폭격기 한 대가 독수리 날듯이 도시 상공에 나타나더니 도시 중심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그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을 뒤덮은 비행대대가 게르니카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한다. 전쟁 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헤르만 괴링 독일 공군 사령관은 이 폭격이 독일이 새로이 개발한 공군력의 시험 무대였다는 진술을 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실상의 목표는 게르니카 주변의 다리들이었다고 한다. 다리들을 끊어 공화파 군대의 퇴로를 끊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인켈 폭격기, 융커 52 전투기 등은 다리 뿐 아니라 시내를 폭격했고 한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특히 소이탄은 최신 개발 무기로서 이 오래된 도시의 태반과 도시에 살던 이들 다수를 삽시간에 불살라 버렸다.

 

게르니카에는 몇 개 대대의 수비군이 있긴 했지만 독일 공군을 상대할 대공포대 따위는 변변히 없었고 독일 공군은 그야말로 사람 없는 들을 가듯, 오리 사냥을 하듯 폭탄과 기총 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주장으로는 1600명, 후일 조사로는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뒤 프랑코 측은 “공화파들의 자작극”이라고 강변하지만 타임지 특파원 조지 스티어가 이 평화로운 마을을 박살내 버린 현장을 고발하고 독일이 폭격 사실을 인정하면서 게르니카의 비극은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게르니카의 참극 이후 바스크인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래서 자신들의 아이들이라도 살려 보고자 약 2만 명의 아이들을 배에 태워 탈출시킨다. 이들이 유명한 ‘바스크의 아이들’인데 이들은 각국 정부의 냉대 속에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오랜 수용소 생활을 거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이 오래된 도시의 비극에 치를 떤 사람 가운데 하나가 파블로 피카소였다. 공화파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에 그릴 그림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범죄적 비극에 분노하여 단 한 달만에 가로 세로 7.7미터 3.49미터의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게르니카. 절규하는 사람들, 토막난 손발, 부러진 칼, 울부짖는 말과 멀뚱멀뚱 그 참상을 깔아뭉개는 듯한 소.... 게르니카의 비극은 피카소의 화폭에 그대로 남았다. 피카소는 스페인이 민주화될 때까지는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다음에야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게르니카 시는 독일에 게르니카 폭격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1997년 피폭 60주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가하여 공식 사과하고 독일 의회는 게르니카에 경제적 지원을 의결한다. 물론 그것으로 60년 전 죽어간 수백 명의 민간인들의 억울함이 씻길 리는 없지만 그래도 독일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대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깍듯이 사과했다. “침략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다.”고 우기는 일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셈이다. 일본 대사를 불러 강경하게 항의하는 우리 나라 외교부 차관의 모습을 보면서 당연히 그래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몃 멈추게 되는 이유는 자국민들 수십만을 제주에서, 또 전국 각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던 정부가 그에 대해 일언반구 사과가 없는 모습을 두고 일본인들은 또 어찌 생각할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쳐서다. 우리 정부는 ‘학살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않다’고 할 것인지.

 

게르니카는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의 전초에 불과했고, 그 뒤에 벌어진 비극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의 사건이었다. 이후 게르니카는 곳곳에서 확대 재생산됐다. 그 가운데에는 한국도 있었다.


 

1937.4.27 그람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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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7년 4월 27일

 

몇 년 후 전 유럽을 지옥불같은 전쟁의 ㅋ도가니로 쓸어넣는 나찌 독일 공군이 스페인의 공화파 마을 게르니카를 쑥밭으로 만든 날이 1937년 4월 26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한 천재적 이탈리아인이 그 고된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그람시.

 

이 사람이 한국 사회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2004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소지섭이 옥탑방에 사는 하지원을 방문한다. 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내민 하지원에게 소지섭은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를 건넨다. 그리고 던지는 한 마디 “ 그람시 알아요? 계급은 중세 시대에만 있던 게 아니에요. 그놈들의 헤게모니가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행복하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니까 헛된 신분 상승의 꿈을 꾸고 있는 하지원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원도 책을 읽었는지 조인성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의 헤게모니가 우릴 바보로 만들어." 이 꽃남꽃녀들의 대사 몇 마디로 그람시는 졸지에 검색 순위 수위권을 차지하고 출간된지 엄청 된 그람시의 책들이 별안간 대형서점 서가에 눕혀지는 호사를 맛보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는 긴말하지 않겠다. 아 물론 정확하게 표현하면 긴말할 게 없다. 대학 때 세미나라면 도망만 다닌 주제에, 요즘의 한국 법무부 장관과 비슷한 꼴통 이탈리아 검사가 “이 자의 두뇌 활동을 20년간 멈추어야 한다.”고 피를 토했던 그람시의 저 유능한 두뇌와 방대한 저작을 어찌 운위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이탈리아의 남부 사르디니아 출신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 시칠리아, 그 다음이 사르데냐다. 둘 다 이탈리아 땅이지만 이탈리아의 ‘남부’에 들어간다. 이탈리아에서 남부란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한국으로 치면 조선 시대 평안도와 대한민국의 전라도를 합친 정도일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준 분단 국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실제 북부의 분리독립 움직임까지 있다고 하거니와 북부인들이 남부인들에게 가지는 인상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도둑놈 투성이라는 인식이 크다고 하며 하물며 100년 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남부의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어릴 적 하녀의 실수로 그만 척추에 부상을 입고 평생 곱사등이로 살아야 했고 키는 150센티미터를 넘을까 말까 했다. 그의 나이 스무살이 넘도록 어머니는 그의 수의와 관을 준비하고 있었을 정도로 허약한 몸이었으나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가자 열한 살의 나이로 사환을 하며 집안을 도와야 했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야 했다.

 

후일 자신의 아들에게 준 편지의 내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뭔가 좋은 일을 하나 하고자 한다면 불평을 하거나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깽깽거리며 울지 말고 그 일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어렸을 적 고생이 막심했던 아버지로서의 경험담이자 꼰대 노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곱추에 난쟁이처럼 키가 작았던 그였지만 신은 그에게 누구보다 우수한 머리를 주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 기관지 <오르디네 누오보-새질서>의 명편집장이었다. 그는 원고에 유난히 깐깐한 편집장이었는데 그의 “이 따위는 글도 아니야!” 소리에 피눈물 흘린 기자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물론 편집 회의 끝나면 기자들 또는 기타 청년들과 어울려 소탈하게 즐기는 면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데 그람시는 1921년 소련에 이탈리아 공산당 대표로 파견되면서 행운을 만난다.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늘씬한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시기가 나에게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하거니와 그에게 행운은 하나 더 있었다. 후일 그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그의 옥중수고를 정리해낸 처형, 즉 아내의 언니를 얻은 것이다. 그 이름은 타냐.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그의 입지는 위태로와진다. 한 15살난 소년이 뭇솔리니를 암살하려 했다는 중대한 음모(?)가 발각되고 잇따른 검거 선풍 속에 그는 구속된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오히려 감옥에서 더 발휘된다. "매일 6개의 신문을 읽고 매주 8권의 책을 읽으며 ” 꿈 속의 혁명을 가다듬었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고 교류하며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전한다. 이것이 유명한 그람시의 <옥중수고>로 우리 곁에 남아 있거니와, 그는 ‘헤게모니’ ‘진지전’ ‘기동전’ 등등 공부해야 할 개념들을 여럿 확립해 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교도소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마르코폴로는 13세기에 동방견문록을 썼고 그람시는 20세기에 그 방대한 옥중수고를 썼는데 김남주 시인은 우유곽에 철사로 시를 써야 했으니)

 

그에게 가장 실질적으로 다가섰던 질문은 “"왜 이탈리아에서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더 지지하는가?" 였다. 이 질문은 이탈리아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극동의 한 반도국을 대입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대중은 가장 광범한 의미에서 스스로 조직하지 않고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독립하지도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노동 대중 못지 않게 지식인의 역할 또한 강조했고, 또 "대중봉기를 통해 공산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권력이 장악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여 유토피아가 온 것 같이 여겨지던 러시아 혁명에도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그는 미래를 꿈꾸었으되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은 혁명가였다.


“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대신 우리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평생을 괴롭힌 신체적 결함과 허약한 몸, 열악한 감옥 생활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절 속에서 그는 자신의 석방운동을 벌인 로맹 롤랑의 경구에서 따온 유명한 관용어구를 남긴다. “지성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그의 편지에서 이런 익살스런 기억을 남기고 있다. “당신이 안토니오 그람시오 라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 시칠리아 사람은 그럴 리가 없어! 라고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어요. 안토니오 그람시는 거인이야! 당신같은 꼬마가 아니야!라고 하더니 인사도 없이 떠나지 뭡니까. ”

 

나는 그 ‘시칠리아 인’의 눈썰미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대충만 훑어 봐도 그람시는 링컨 정도의 키에 레닌의 포스에 룩셈부르크의 형형한 눈을 다 가진 듯한 초인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엄혹한 이탈리아 파쇼체제와 그 감옥을 ‘의지로 낙관’하면서 버텼고 그 세월을 후대에 <옥중수고>로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이런 말에서 뚝뚝 묻어난다.

 

"불멸성이란, 한 사람이 죽은 뒤 그의 가장 고귀한 행동이 되살아나서, 인간의 의지를 넘어 역사의 보편적 과정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는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1902.4.28 비운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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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0년 4월 28일 비운의 결혼식

 

명나라 수도 베이징이 외적도 아니고 국내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에 의해 함락될 즈음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황후를 자결케 한 후 딸을 찾는다. 나이 열 다섯 살이었던 공주는 아버지의 소매를 붙들고 울기만 했다. 이를 바라보던 숭정제 이를 악물고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어찌해서 황실에 태어났더냐.” 그리고 왼 소매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리친다. 이 공주는 죽지는 않았지만 한쪽 팔이 잘린다. 차마 다시 내리칠 수는 없었던지 숭정제는 자리를 떠났고 여섯 살 난 다른 공주는 그 칼에 죽는다.

 

“어찌하여 황실에 태어났느냐?”는 숭정제의 절규에서 보듯, ‘망한 나라의 황족’만큼 애매하고 기구한 신분도 없을 것이다. 그 이치는 대한제국에서도 생생하게 적용된다. 일단 황제 자신의 호칭이 상황제에서 태왕으로 격하됐다. ‘덕수궁 이태왕’ 뒤를 이은 순종은 ‘창덕궁 이왕’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아들, 즉 ‘친왕’(親王)과 공주들의 여생에도 숱한 파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곱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로 지명된 사람이었다. 후사가 없는 순종의 후계자가 된 것인데 스무 살 연상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그가 황태자가 된 것은 머리가 큰 의친왕보다는 꼬마 영친왕이 다루기 쉽다고 본 일본측의 야욕과 그 이복형들을 경계한 이완용의 책략과 더불어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의 작용도 컸다고 전해진다.

 

망해 가는 나라의 황태자라는 이 모순된 팔자의 험준한 고갯길은 황태자가 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그는 황태자는 일본에서 교육받아야 하나는 억지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끌려간다. 이때 고종 황제가 자신의 아들에게 참을 인(忍)자를 써 주며 격려했다고 하는데 글쎄 열 한 살 짜리가 뭘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알 수나 있었을는지. 결국 영친왕은 인질이었다. 일본식으로 교육받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그는 마음대로 귀국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일본에서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자랑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친모였던 엄비가 “아들을 보고 싶은 정은 상민이나 왕이나 다를 바가 없거늘 약속을 저버린 그런 말이 어느 입에서 나올 수 있는가. 몰인정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 고 격노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엄비는 살아생전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

 

어머니 임종도 못한 영친왕은 또 한 번 황망한 일을 겪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약혼자가 정해지고 발표된 것이다. 영친왕도 어이가 없었겠지만 그 상대 또한 기가 막혔을 것이다. 상대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의 딸이며 히로히토 황태자의 배필 물망에까지 올랐던 마사코였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쯤 한국에서 온다는 황족을 마중하기 위해 온 가족과 함께 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억조차 없는 당시의 이웃나라 황족이 자신의 배필이 될 줄이야.

“.....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하다니! 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이방자 여사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 중 ) 벼락을 맞은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영친왕이 한국을 떠나기 전 약혼했던 처자 민갑완이었다. 졸지에 파혼당한 아버지는 홧병으로 죽고 그녀는 수십 번의 혼담을 물리친 채 평생을 혼자 살게 된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은 일본의 황족 마사코와 결혼한다. 원래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식 나흘 전 고종이 세상을 떠나 버려 1년이 미뤄진 것이다. 약혼 기간 동안 만남을 가지며 정을 쌓기도 했고 마사코는 “털끝만치도 격을 느끼는 마음이 일지 않으며 뵙고 나서는 그리운 마음이 들 뿐”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과연 그랬을지는 잘 모르겠다. 싫다고 물릴 수 있는 결혼도 아니었고 둘의 처지도 그럴 처지가 아니었지 않은가. 환영하는 사람들도 적었다. 일본이야 그렇다고 치고 조선인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아버지 삼년상도 끝내기 전에 장가를 그것도 일본 여자한테 들다니!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던 이은은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이므로” (독립신문. 1920.5.8) 마사코의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식 당일에도 조선 청년의 수류탄 공격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첫아들 이진도 조선 방문 길에 생후 8개월만에 죽는데 그 죽음을 둘러싸고도 말이 많았다. 초콜렛 색 덩어리들을 연신 토해 냈다는 의사의 증언을 근거로 독살설이 파다했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들은 일본인의 피가 섞인 황손이 못마땅하여 조선측에서 독살을 감행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식 사인은 소화불량으로 기록돼 있다. ( 물론 그게 가능성은 제일 높다고 본다 ) 영친왕은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나라의 군대 장성까지 진급한다. 영친왕의 최종 계급은 중장. 조선인이 달았던 최고의 계급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립운동 진영에서 그의 망명과 독립운동 가입을 권하기도 했다는데 영친왕의 대답은 미지근했다. “내가 만일 망명이라도 하면 조선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소. 너희 왕도 도망갔으니 너희들도 잘 대우해줄 필요가 없다고 조선인들을 개돼지 같이 부릴 것이오……” 글쎄 이미 개돼지처럼 부리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해방이 왔다. 영친왕 가족은 다른 일본의 귀족 가문들과 함께 일체의 특권과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방자 역시 ‘망한 나라 황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수십만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이 됐다. 영친왕은 귀국을 열망했지만 단호한 장애물이 있었다. 그건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를 자처하던 이승만의 존재였다. 자신을 흡사 왕으로 여기던 이승만 대통령은 왕년의 황태자의 귀국에 딴지를 걸었고 여권조차 내 주지 않는다. 이승만이 쫓겨날 때까지 영친왕은 일본에서 그 팍팍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야 식물인간이 된 영친왕은 이제는 한국 사람 ‘이방자’가 된 부인과 돌아오지만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한다. 박정희 정권은 구 황실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이방자 여사에게 맡기려고 했고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가 설립한 숙명 학원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숙명여대 기존 재단측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숙대재단 운영진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이들은 즉각 들고 일어났고 언론 및 학생들과 연계해 이방자 여사를 몰아붙였다. ‘쪽바리 여자 나가라!’, ‘왜놈 돌아가라!’, ‘게다짝 물러가라!’와 같은 표어들이 주요언론 및 숙대 교정 곳곳에 등장했다.” (한대신문 2010.5.1자) 결국 이방자 여사는 재단 참여를 포기하게 된다.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한국사회가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불행한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후회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방자 여사는 지금도 과히 사각지대에서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려운 장애인 돕기를 실천하며 여생을 보냈다. 명색 황제의 딸이었지만 쓰시마 도주 가문의 청년과 결혼해야 했던 덕혜옹주가 실성해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거둔 것도 이방자 여사였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의 남편 소오 다케유키가 만남을 청하자 “덕혜옹주가 받았던 정신적 학대의 기억 때문에 병세가 악화될까 두렵다.”고 단호히 거절했고 급기야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문전박대한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의 병간호를 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아마 이것은 이방자 여사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1920년 4월 28일 결혼의 날은 이방자 여사에게 어떻게 기억됐을까.


1932.4.29 홍코우 공원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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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2년 4월 29일 홍코우 공원 막전막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일종의 노철광과 같다. 땅을 팔 필요도 없이 관심만 두고 찾는다면 광맥이 널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한 역사의 광산 위에 시멘트가 덕지덕지 덮여 있어서 우리 발 밑에 어떤 역사들이 묻혀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당신이 아는 독립운동가를 전부 대 보라고 할 때 열 명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그 질문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윤봉길이다.

 

1932년 4월 29일 그가 상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이라는 천장절 기념식장을 도시락 폭탄과 물병 폭탄으로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이야기는 초등학교 애들도 주워 섬기는 일인지라 구태여 다시 상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윤봉길은 그 폭탄 한 방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윤봉길은 안중근과 달리 고향도 충청도고 해서 최소한 남한에서는 그 기념사업이 가장 잘 되어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며 그 사람됨과 일화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오늘은 그분보다는 홍코우 막전 막후의 일들을 좀 돌아보고 싶다.

 

우선 홍코우 공원에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일본 군대가 잔뜩 몰려와 있었던 것은 1차 상하이 사변에 기인한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인들과 상해 거주 일본인들의 충돌로 말미암은 무력 충돌이었다. 그런데 이 충돌 전에 또 한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그건 1월 8일 일어난 이봉창의 의거였다. 이봉창은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의 질이 나빠 실패했다. 이걸 중국 신문이 “한인(韓人) 이봉창의 폭탄이 적중하지 않았다.(未中)”고 기사를 쓰자 일본 군부가 격노했던 것이다. 원래 한 사건의 원인은 대개 중첩되게 마련이다.

 

중국군은 처음에는 잘 싸웠으나 무력에서 우세한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고 마는데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전 일본군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맞는다. 이름하여 천장절. 그들은 이를 기념한 열병식과 더불어 상하이 전승 기념식을 홍코우 공원에서 연다. 1부 열병식이 끝나자 거기에는 단상(壇上)이든 단하이든 거의 일본인들만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만들기 쉬운 국기인 일장기를 흔들던 일본인들 사이에는 잘생긴 청년 하나가 물통과 도시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윤봉길이었다.

 

그 도시락과 물병을 가져온 사람은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중국군에 복무중이던 김홍일이었다. 그는 이봉창의 실패가 폭탄의 성능 때문이라는 말에 절치부심 중국인 향차도 (백범일지에는 왕백수라고도 한다)와 함께 폭탄을 제조했는데 사실 성공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한 번의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즈음 윤봉길은 앞으로 내달았다.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던 우에다 일본군 9사단장이 갑자기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윤봉길의 폭탄은 용서가 없었다. 단상은 쑥밭으로 변한다.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을 김홍일. 그는 우리 역사에 ‘오성장군’으로 기록된다. 중국군에서 계속 복무하여 별 두 개를 달았고 이후 한국군에 복무하면서 별 셋을 추가했다. 윤봉길의 의거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움으로써 장개석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의 역량을 재평가하도록 했던 김홍일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살아남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세운 사람이다. 지리멸렬의 방어전 끝에 서울을 3일만에 빼앗긴 후 패잔병들을 그러모아 한강 방어선을 치고 6일을 버텨 낸 사람이 그였다. (3일을 버티지 못하면 미군측은 상륙조차 못한다고 경고했었다)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중 가장 멋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장군은 미소로 그어지는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인해 어디서나 눈에 띠었다.” (해롤드 노블, Embassy at War)

 

한편 윤봉길의 폭탄을 맞아 죽은 사람은 두 명이다. 우선 시라카와 시게노리 일본군 중국 주둔군 사령관이 죽었다. 그 자리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니 윤봉길의 폭탄은 제대로 임자를 찾아들어간 셈이다. 그리고 일본 거류민단장이 죽었다. 중상자는 많았다. 그 가운데 두 명을 들어 보자. 일본 3함대 사령관이자 해군 중장이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파편에 한쪽 눈을 잃었다. 이 노무라는 후일 외교관으로 변신하는데 일본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계기, 즉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 주재 일본 대사였다.

 

흔히 일본군이 비겁하게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전에 선전포고를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암호를 번역하고 외교 문서로 다듬는 가운데 그만 진주만 공격은 행해지고 말았다. 미국은 루스벨트가 분노에 차서 말한 바 "Day in infamy" 측 치욕의 날을 선전포고 없이 맞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악당의 사도가 되어 뒤늦은 선전포고를 전달한다. 이 선전포고장을 들이민 후 돌아나오는 그 앞에서 무수한 플래쉬가 터졌다. 아마도 남은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싶었겠지만 그래도 외교관으로서 그는 웃음을 띄운다. 부드럽고 온유하게. 하지만 이미 그 웃음은 왜놈(Japs)의 비열한 미소에 불과했다. 윤봉길에 의해 한쪽 눈을 날린 노무라는 그렇게 일본의 파멸의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전쟁이 끝났다. 히로히토 천황이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야 한다”며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뒤 일본 제국의 정식 항복 조인이 미국 군함 미주리 호 (스티븐 시걸이 주연한 오락 영화 언더 시즈를 기억하시는지? 그 무대가 바로 미주리 호다)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기록 영화를 보면 절뚝거리는 다리로 지팡이를 짚은 항복 사절의 대표가 등장한다. 그 이름이 시게미쓰 마모루. 윤봉길의 의거 당시 중국 주재 외교관이었다. 그는 윤봉길의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외무 대신이었고 거만하게 도열한 미군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일본 제국의 몰락의 상징이었다.

 

윤봉길의 의거는 시라카와 대장을 죽이고 가와바타 일본 상해 거류민단장을 죽인 사건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전력과 후일이 담긴 사건이었고 우연의 일치 같지만 결국 그 폭탄을 만든 사람은 신생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고 그 폭탄 맛을 본 사람들이 태평양 전쟁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한다. 우연같지만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레고도 아니고 퍼즐도 아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유기체처럼 이어지고 우연같은 필연을 이끌어 낸다. 1932년 4월 29일은 그래서 쉽사리 잊혀지는 날이 아니다.


1887.4.30 정동교회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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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87년 4월 30일 정동교회 서다

 

노래 <광화문 연가>의 배경은 겨울이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변해 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하지만 이 노래는 딱히 계절을 타지 않는다. 새싹 돋는 봄이든 찌는 여름이든 낙엽 지는 가을이든 이 노래 가락이 들리면 서울에서 웬만큼 산 사람들이라면 마음 속으로나마 정동길의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정동(貞洞)이라는 동네의 이름의 시작 역시 매우 로맨틱하다. 조선 왕조를 창건하고 한양이라는 도시로 새 도읍을 삼았던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보다는 후에 맞아들였던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 신덕왕후 강씨에 더 마음을 주었던 모양이다. 이 후처 강씨가 죽자 이성계는 완고한 고집쟁이 모드로 돌입한다. “무조건 도성 안에 묻어라.”

 

도성 안에서는 능을 조성하는 법이 아니라고 신료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성계는 과거 왜구들을 물리치던 기세로 자신의 결정을 반영시킨다. 그리고 근처에 절을 세워 그 절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잠을 잤고 왕후의 명복을 비는 독경 소리를 듣고서야 밥을 먹었다고 하니 천하의 용장 이성계도 해바라기성 순정남의 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 신덕왕후의 무덤이 정릉(貞陵)이었고 정릉 일대는 ‘정동’의 이름을 얻게 된다. 이성계는 정릉을 어루만지며 나도 죽으면 당신과 함께 묻히리라 중얼거리며 이렇게 노래했을 지도 모른다.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도다 눈 덮인 조그만 절간이.”

 

로맨틱한 추억에는 서글픈 기억이 따라붙게 마련, 계모를 철저하게 미워했던 태종 이방원은 이 무덤을 파헤쳐 동대문 밖으로 내쳐 버린다. 그 능에 쓰인 석재는 청계천 다리 축조에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지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덕분에 서울에는 또 하나의 ‘정동’이 생겼다.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이 그곳이다.

 

개항 이후 ‘hermit kingdom' (은자-隱者의 왕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조선의 수도에도 서양의 외교관들이 등장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과 수교하면서 그들에게 공관의 부지를 제공해야 했는데 그것이 경운궁과 정동 일대였다. 서울 도성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마포와 양화진 가도의 진입로 격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도 있었고 그 일대가 번잡하지 않고 빈터가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건 이로써 정동은 구한말 서울에서 가장 ‘개화된’ 거리가 됐다.

 

얼마 전 드라마 <제중원>에 ‘톰 소여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 등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이 별안간 등장하여 항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마크 트웨인은 러일전쟁 때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기반으로 하지만 역사적 팩트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강철군화>의 잭 런던 등 여러 서방 언론인들이 한국에 왔던 건 사실이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 병원이라 할 제중원 역시 서양 선교사들이 많은 정동에 좌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쑥한 정장의 서양 인사들이 커피잔을 들고서 외교가에서 즐겨 쓰이던 프랑스 어로 대화를 나누고, 고만고만한 기와집 추녀 끝에 번듯한 양옥들이 들어선 사이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가 팔짱 끼고 걸어다녔던 정동은 일종의 이방지대와도 같았다.

 

정동은 주지하다시피 외국인들의 공간이었고 동시에 신학문과 개화 바람의 진원지였다. 1885년 최초의 신식학교라 할 배재학당이 정동에 세워졌고 이 나라 여성 교육의 시초라 할 이화학당도 정동에 터를 잡았다. 훗날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하는 언더우드 학당도 정동에서 지붕을 올렸고 (이후 연지동으로 이전) 오늘날은 잠실로 이사간 정신여고의 전신인 정신여학교의 출발지도 정동이었다. 그리고 1887년 4월 30일 “정동길 언덕길에”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들어선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인용한 것이다. 기타 다른 날짜를 드는 주장도 많고 그 이전에도 예배를 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자료를 따른다)

 

시절이 아무리 하수상해도 젊음은 젊음이다. 젊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통제와 인습도 앞장서 무너뜨리는 존재이며, 또 젊은이들이 모인 거리에서 사랑이 피어나지 않는 법은 없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철석같이 지켜지고 기독교 예배당에서조차 휘장을 두르고 남녀를 구분했으며 때가 되면 부모가 정해 주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던 암울한 시대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배재학당을 세웠던 아펜젤러 목사가 1883년 신도인 강신성과 과부 박신실의 결혼의 주례를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신식 결혼으로 보인다. (강준만 저, 한국 근대사 2권 “을미사변에서 아관파천까지”) 또 1892년에는 이화학당 여학생 ‘황씨’와 배재학당 남학생의 결혼식도 열렸다.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신랑은 ‘프록코트’도 입은 서양식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정동길을 오가던 젊음들을 환호하게 했던 극적인 순간은 역시 1899년 7월 14일 예의 정동교회에서 열린 배재학당 학생과 이화학당 여학생 두 쌍의 합동 결혼식일 것이다.

 

신랑은 이후 미주이민선교를 개척하였던 민찬호, 문경호 두 젊은이들이었는데 그들의 뜻에 함께 하기로 한 이화학당 여학생들을 신부로 맞은 것이다. “이 혼인에 대하여 희한한 것은 대한 풍속에 아들을 쌍둥이로 길렀으면 혹 한날 한시에 혼인함이 있거니와 타성(姓)의 년기(年紀)도 같지 아닌 사람들이 어찌 한 자리에서 한 때에 혼례를 행할 수 있으리오. 대한 개국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오.....대한 풍속에 매파(媒婆)가 있어 남자와 여아가 당초에 그 심지와 덕행과 제도를 서로 알지 못하고 백년 행할 큰일을 경홀이 작정하거늘......대한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모두 교중 사람끼리 혼인을 하였으면 대한에도 어리석은 풍속이 차차 고칠 줄 아노라. (<조선 그리스도인회보Ⅱ p.161 (대한그리스도인회보 제 3권 제 29호 1899. 7. 19일자.)

 

이후 ‘연애 결혼’은 정동길 곳곳에서 꽃 피었고, 대한의 청춘남녀들은 경운궁 돌담길을 거닐며 사랑의 달콤함과 실연의 아픔, 이별의 쓰라림과 만남의 기쁨을 함께 만끽하기 시작한다. 아마 처음으로 교회에서 신식 결혼을 올린 강신성도, 최초로 프록코트 입고 면사포 쓴 신부 맞은 이름 모를 배재학당 학생도, 그리고 민찬호와 문경호 모두 세월이 간 뒤 다시 찾은 정동길, 아직도 남아 있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에서 영글었던 그들의 사랑을 추억하며 빛나게 웃었으리라.

 

 

나는 이 노래를 쓰라린 추억으로 부른다.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교회당이 한 세기도 넘어 전에 생겼다


1986.5.1 어느 택시 기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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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6년 5월 1일 한 택시노동자의 죽음

 

변형진은 강화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조차 입학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더 보탤 것이 없다. 시커먼 교복과 교모 한 번 못 써 보고서 그는 구두창 공장에서 가죽을 기워야 했고 연탄 공장에서 숯검덩을 얼굴에 묻혀야 했다. 어렸을 적 동네 연탄 가게 총각이 “깜장 마후라는 연탄집 아저씨~~ 아가씨야 이 내맘 잊지 말아라. 이래뵈도 세수하면 미남이란다.”라고 노래하며 동네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는데 술 좋아하고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는 그도 아마 비슷한 노래 부르며 시름을 달랬을지도 모르겠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그가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된 것은 나이 서른 넷 되던 해였다. 이곳 저곳을 거쳐 그는 삼환택시라는 택시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 택시 회사 사장이 좀 걸물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군대식 조회를 실시했고 115명의 기사들을 택시 43대에 10-12 시간씩 내돌리면서도 연장수당 한 푼 주지 않는 강심장이었다. 그것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세차비까지 택시 노동자들에게 부담시킨 것은 강심장에 털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당연히 기사들의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술 사주는 데에는 1등이고 오지랖은 바다처럼 넓었다는 그는 운행 도중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나른 것도 여러 번이고,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를 대신해 그 부모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병구완까지 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니까 주변에 꼭 하나씩은 있는, 제 셈속은 차리지 못해도 남 안되는 꼴은 못보는,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지만 희귀한 건 분명한 인간형이었던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런 사람 꼴을 못보는 성품이니까.

 

이런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른 말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잘 쓰는 말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다. 법이 누구 편인지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런 법이 어디 있나면서 상대의 부당함을 성토한다. 세차비 내지 못하겠다고 하자 3일 동안 운행 정지 시켜 버리고는 월급에서 까 버리는 삼환택시 사장에게도 그는 그렇게 따졌을 것이다. 아니 사장님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사장은 기탄없이 경찰을 불렀다고 한다. 경찰이 파출소로 연행을 해도 별 혐의가 없어 두 팔 벌리고 풀어줬지만 변형진이 따지고 들 때마다 사장은 112 다이얼을 돌렸다. “법은 내 편이야 임마.”를 시위하듯이.

 

삼환 택시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자고 외치던 노동조합장이 해고됐다. 이에 격렬히 항의하던 변형진은 완전히 회사 눈 밖에 났고 어느 날 희한한 이유로 해고의 쓴잔을 들게 된다. 회사에서 운행 나가는 길에 사장 차와 맞닥뜨렸는데 공손히 서서 사장님 가시는 길을 바라본 뒤 나가지 않고 그 앞을 웽~~ 나가 버렸다는 이유로 해고장을 날려 버린 것이다. 이른바 불경죄라고나 할까. 사납금을 삥땅한 것도 아니고 사고를 낸 것도 아닌데 사장님 차 앞을 불경스럽게 지나간 것이 해고 사유가 되는 세상이었다. (해고의 유연화라는 건 이때로 돌아가자는 얘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웃통 벗어던지고 이게 말이 되냐며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던 변형진은 1986년 4월 30일 스스로 몸에 불을 당기고 만다. 신나를 끼얹고 항의하는 그 앞에서 사장은 뒈질 테면 뒈져 보라고 하고 있었다니 보통 이상으로 나쁜 놈이었던 것 같다. 변형진을 병원으로 옮긴 뒤 달려온 가족들에게 회사는 이미 변형진은 죽었으니 합의금이나 맞춰 보자고 설레발을 떨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변형진은 힘겹게라도 숨을 쉬고 말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1986년 5월 1일 평생을 모진 꿈만 꾸었던, 그 와중에도 남 좋은 일은 혼자 다 시키던 택시 노동자 변형진은 죽었다. “미안하지만 이 길 밖에 없었다. 노동자들도 떳떳하게 잘 사는 세상이 와야 할 텐데.....”가 유언이었다. 죽음을 투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결코 권장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몸뚱이에 불을 지르는 것 밖에는 달리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게 만드는 사회는 살아있는 괴물의 사회다. 변형진이 죽어간 그 한강 성심 병원에는 오늘도 변형진처럼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현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김학종씨가 입원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을 물려 줄 수 없다.”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세월은 간데없는데 왜 그 말들은 이리도 의구한가.

 

한 번도 조직노동자인 적 없고 이제는 조직원이 될 자격조차 상실한 처지에 메이데이라는 단어가 부활하기도 전의 1986년 5월 1일 죽어간 한 노동자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뭔가 씁쓸하고 슬프다.


1885.5.2 콩고 자유국 지옥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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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85년 5월 2일 콩고 자유국 지옥의 왕국 성립

 

벨기에는 유럽에서는 꽤 신생국가에 들어간다. 1839년이 돼서야 그 독립을 승인받은 나라기 때문이다. 1830년대까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 속에 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선언한다. 네덜란드 왕은 벨기에 땅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지만 열강의 이해 관계에 따라 벨기에는 독립을 쟁취하고 레오폴드 1세를 국왕으로 모신다. 이 독일 귀족 출신의 왕의 아내는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의 딸이었다. 이 사이에서 오늘 이야기할 왕자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이 왕자는 전반적으로 둔했다고 한다. 장가를 들어도 ‘음양의 이치’를 몰라 코치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니 어련했을까. 공부 성적도 시원찮았는데 유독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건 ‘지리’였다. 국왕이 되어 레오폴드 2세로 불리우게 된 뒤에도 그의 관심은 지리였다. 그리고 신생 독립국으로서 이미 전 세계를 갈라먹고 있는 인근 국가들이 자기네 깃발들을 꽂아 놓은 세계 지도를 보며 책상을 쳤다. “우리 벨기에 것은 없단 말이냐.”

 

여기서 또 다른 인물 한 명을 돌아보자. 헨리 모턴 스탠리. 어디서 많이 듣던? 그렇다 바로 그 사람이다.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박사를 원주민 마을에서 찾아냈고 “Dr. Livingston? I presume..... " (리빙스턴 박사님 맞으시죠?)라는 역사적인 대사를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신문 기자이면서 탐험가면서 동시에 악당이기도 했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콩고강에 이르는 자신의 탐험 내내 원주민들에게 채찍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렀고 탐험(?)을 방해하는 원주민들을 아낌없이 죽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표현에 따르면 “단호한지는 몰라도 추한” 남자였던 스탠리를 주목한 것이 레오폴드 2세였다. 지리를 좋아했던 레오폴드답게 그는 스탠리를 후원하여 아직은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 내륙을 살피도록 했다.

 

1878년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은행가들의 도움으로 상(上)콩고 연구위원회를 창설했다. 콩고 강을 따라 콩고 오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려는 목적이었다. 후일 ‘콩고 국제 협회’로 이름을 바꾸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으며 스탠리는 오늘날의 콩고 일대를 휩쓸고 다니며 “전혀 원주민 추장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백 개의 조약을 맺었다. 거기에는 원주민들의 주권을 레오폴드가 설립한 ‘협회’에 양도한다는 엄청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열강들은 해안 지역은 몰라도 아프리카 한복판의 내륙 지역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레오폴드 2세는 후일 그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는 윌리암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군주의 한 분이다. 기독교 문명에 봉사하고, 백성들의 복리를 촉진하고 지혜, 자비, 정의로 통치하려는 높은 이상을 가지신 분” (레오폴드 왕의 유령- 무우수 출판사)이라 찬양받을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북부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자행하는 노예 사냥에 분노하는 척 했으며, 원주민보호협회 명예 회장으로서 “오로지 콩고에 문명의 빛을 주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레오폴드의 거짓말과 콩고 벨기에 왕 치하의 국제 식민지로서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립지대 정도로 간주한 열강의 판단을 거쳐 벨기에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콩고 땅은 레오폴드의 ‘사유지’가 된다. 1885년 5월 2일이었다. 그리고 콩고 땅에는 지옥이 깃든다.

 

처음 레오폴드 2세가 눈독을 들인 것은 상아였다. 콩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요구하는 상아를 대령하느라 죽을둥살둥 뛰어야 했고 상아들을 나르느라 어깨 살이 짓물러야 했다. 할당량에 미치지 못하거나 잠시 게으름이라도 피울라치면 바로 죽음의 벌이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아는 양반이었다. 유럽에서 고무 타이어가 발명되자 레오폴드 2세는 환호성을 지른다. 콩고에는 고무나무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그때부터는 고무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역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죽이거나 손발을 잘라 버렸다.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뒤 고무 생산 작업을 시키고 만족할만한 성과에 이르지 못하면 인질들을 죽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 전체가 집단자살하기도 했다. 최소 5백만, 최대 1천만에 가까운 대학살이 일어났다.

 

이 콩고 ‘자유국’의 한 관리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원주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머리 수백개를 잘랐다. 그러면 이후로 죽 엄청난 (고무) 공급이 있었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도적이다. 나는 백명을 죽였으나...그 덕분에 다른 5백명이 살 수 있었다.” 고무 생산량이 달린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그렇게 보고서를 썼다. “더 많은 팔다리를 잘라내겠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 조셉 콘라드는 콩고를 여행하면서 사람의 머리로 쌓은 담벼락 같은 끔찍한 풍경에 치를 떨었고 이를 모티브 삼아 <어둠의 심연>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이걸 수십년 뒤의 베트남으로 무대를 바꿔 만든 영화가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가 점차 폭로되고 국제 여론이 끓어오르자 벨기에 정부는 콩고를 국왕의 사유지에서 벨기에 식민지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이미 콩고에서 거둬들인 천문학적 수입을 사적으로 써 버린 레오폴드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벨기에 정부에게 자신의 ‘콩고 자유국’을 매각하게 된다. 즉 벨기에 정부는 콩고 자유국을 레오폴드 개인으로부터 샀던 것이다. 정식으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뒤에도 식민 통치는 여전히 혹독했고 채찍질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손발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하니 그나마 콩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레오폴드 2세는 꽤 소탈하고 격의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 검소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시장에 자주 나가 서민들과 어울리기에 임금인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그의 방 문전에 아이 하나가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임금이 물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ㅡ. 임금님이 보고싶어서 기다린다고 하자 「봐보았자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 하며 들어갔다.” (이규태 칼럼 중) 그런 사람이 최고 천만 명을 죽인 학살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처벌도 천벌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죽었다. 그는 1909년 죽었는데 그의 추도식이 대한제국의 명동성당에서도 열렸다. 이때 이완용이 참석했다가 이재명이라는 청년의 칼에 죽을 뻔한 일도 벌어졌다. 그나마 이완용이라도 죽었더라면 레오폴드는 사후에 좋은 일 하나라도 했다고 쳐 줄 텐데



1989.5.3 동의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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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  다시 옮겨 둠 

산하의 오역

 

1989년 5월 3일 동의대의 5.3

 

80년대의 거친 역사의 두루마리에는 5.3 이라는 날짜는 두 번 굵직하게 새겨져 있다. 한 번은 86년 인천에서 격렬하게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던 5.3 사태이고 또 한 번이 바로 89년 동의대학교에서 경찰관과 학생들의 대치 중에 화재가 발생해 경찰관들이 불에 타 죽고 추락사했던 바로 그 5.3이다.

 

동의대학교는 내가 다닌 고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집이 멀어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던 무렵 괜시리 대학생들 틈에 끼어보고 싶어서 동의대 도서관을 이용한 적도 있고 동의대 출신들이 연달아 대학가요제를 석권할 무렵, 그들이 떴다는 이야기에 호기심 많은 누나 부대의 일원이 되어서 산중턱을 깎아 만든 그 학교 고갯길을 낑낑대며 올라간 것도 한 두 번은 넘는다.

 

그래서 89년 5월 3일은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섰다. 동의대 학생 시위대가 교문 밖으로 진출했을 때 시위대에게 위협사격으로 카빈총을 난사했던 파출소는 내가 족히 1천번은 더 지나쳤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억류된 백골단 몇 명이 끌려 올라갔을 그 고갯길은 여전히 가팔랐을 것이다. 화마가 여러 경찰관의 목숨을 삼켜 버린 도서관 7층 역시 대학생인양 의젓하게 책상에 앉아 성문종합영어를 보던 그때 그 자리 아니었던가.

 

5공 비리와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쩔쩔매던 노태우 정권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현대중공업 사태 이후 공안 통치를 전면 확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마치 촛불시위를 겪고 '떼법' 타도를 부르짖었던 이명박 정권과 같은 양상이었다. 공안 정국의 전개 역시 화툿장 짝처럼 똑같았다. 농성이 시작되자마자, 아무런 예고나 선무방송이나 협상의 노력도 없이 백골단을 진입시켰고 고층빌딩 농성 진압에 필수적인 매트리스도 깔지 않았다. 그리고 원인이 분명치 않은 화재가 일어났고 경찰관 들은 화마의 희생양이 되거나 애처롭게도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기름으로 난 불이라 물로는 소화가 안된다는 현장 지휘관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물대포를 쏘아대는 가운데 시민이 떨어져 죽었던 용산 사태와 다를 바가 적었다.

 

 

동의대 사태는 누가 뭐래도 불행한 사건이었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으며 공권력의 집행자로서는 용서받기 힘든 성급함과 서투름과 무모함을 종합구성물로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다. 또 독재 정권과 그에 빌붙은 학교 당국과의 투쟁 (부정 입시 문제가 시위의 이유였다)의 와중에서 벌어진 일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 와중에 있었던 불행한 일"로 기억하지 그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격상되어야 할 사건으로 인정하지는 못하겠다. 더우기 그 유공의 댓가로 보상금을 받아야 했는가에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동의대 사태의 진상 규명을 밝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항상 제기하는 것은 무성한 혹 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 의혹들을 풀어 줄만한 '소문의 진상'을 나는 속시원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 마치 KAL858기가 안기부에 의해 폭파되었다는 의혹은 무수했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것처럼. “자 그럼 도대체 누가 뭘 어떻게 했다는 말이냐.”

 

89년의 동의대, 경찰이 자기 졸병들을 7층에 몰아넣고 화염방사기를 쏘지 않은 한, 어떤 경찰이 미리 도서관 7층에 잠입해서 대량의 화염병을 쌓아놓고 동료 경찰이 도서관에 진입하는 순간 터뜨려 버리지 않은 한, 속절없이 져 버린 7명의 목숨에 학생들은 법적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크게 도의적으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때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죄로 숨져야 했던 대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반미전사가 아닌 방화범으로 지냈다는 문부식씨의 옛 고백은 그래서 재삼재사 귓가를 맴돈다. 해야 했던 일일지언정, 필요했던 싸움일지언정 스스로 초래해야 했던 컬래트럴 데미지 (부수적 피해)에 대해 무감하다면 그 세력의 도덕성은 발밑에서 무너지고 합리화의 벽은 난공불락으로 높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의대 학생들은 무감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을 찾아다니며 사죄했다고 하고 함께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픔을 자기 것으로 했다면 굳이 유공의 표창을 자임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 보상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뉴스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지는 뼈저린 비애가 아직 마르지 않았을진대 그 영광을 사양할 이유가 없다고만 해야 할까. 그 영광은 과연 사수해야만 할 것인가. 동의대에서 끔찍한 화상을 입은 한 전경은 말도 못하고 손가락이 늘러붙어 글씨도 쓸 수 없게 되자 발가락에 펜을 끼워 달라고 하여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효도하지 못하고 떠나 죄송합니다. 이제 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는 사태 발생 23일 후에 죽었다. 그 부모 앞에서 과연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영광이 빛날 수 있을까.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은 크나큰 공도 세웠지만 적잖은 실수와 오류도 저지른 것이 사실이며, 본의 아닌 피해를 예기치 않은 사람들에게 입힌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프락치로 오인한 (또는 실제로 프락치일 수도 있었던) 학생을 취조(?)하다가 때려 죽인 학생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사실 구타에 주동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상해치사범으로서 그 죄를 뒤집어쓰고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었다. 이른바 잡범이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양심수' 의 명단에 끼지도 못했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선택이 참담하게 존경스럽다. 정권의 프락치 활동이 얼마나 자심했는지는 누구나 안다. 정권의 만행에 대응하여 일군 제반 투쟁은 분명 민주화 투쟁이라 할 것이지만, 그 와중에 일어난 일 전체를 민주화 운동의 휘장으로 감쌀 수는 없지 않겠는가.

 

동의대 사태에서 숨져간 경찰관들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그 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그들의 표창과 보상에는 끝내 손을 들 수 없을 것 같다. 동의대 사태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우리의 오늘을 이룬 (요즘은 어찌 된 게 그 시절로 다시 돌아온 것 같지만) 그 지난한 투쟁의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태의 관련자들에게 유공의 표창을 드리기에는 우리가 덜어야 할 아픔이 너무 많다. 5월 3일은 1986년 인천 5.3 사태가 있던 날이다. 그 포스팅을 했더니 페친이 생생한 기억을 올려 주셨다. 시위대 틈을 뚫고 들어왔다가 고립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전경이 공격받는 와중에 그 험한 각목질을 받고도 매달려 있던 전경이 보도블록으로 머리를 때리자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그 전경은 5월 3일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물론 내가 너무 예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되묻는 것은 과연 우리가 그렇게 대범하다면 저들은 더 대범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949.5.4 대한민국 국군 흑역사 2개대대 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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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9년 5월 4일 2개 대대 월북 사건 

“한국 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 기실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미 판가름난 일이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대답 못하겠다는 통진당 이정희 의원이 불쌍할 뿐, 전면전이라는 지옥의 문고리를 잡고 힘차게 끌어당긴 건 북한이라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부인하지 않는다. 비록 “38선 일대는 상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6.25는 그것이 확대된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전면전의 개전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의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쌍방간에 벌어진 무력 충돌과 후방 교란과 선전전의 양태를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단이 공고해지는 과정이었고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 불씨가 지펴지는 시간이었고 전쟁과 분단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가로놓여진 사건들이 연거푸 고개를 디밀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 5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은 실로 극적인 사건 두 개를 동시에 맞이한다. 

하나는 육탄 10용사 사건이다. 1949년 5월 전쟁 전까지는 남쪽 땅이었던 개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인민군이 38선 남부에 있던 송악산의 고지들을 점령하자 국군이 이를 탈환하고자 반격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민군들이 구축해 놓은 토치카들. 그걸 부술 수 있는 방법은 육탄 돌격 밖에 없었고 (또는 일본군에게 배운 버릇을 버리지 못했고) 10명의 병사들이 폭탄을 안고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한 것이다. 국회에서도 추모 결의안이 통과되는 등 한바탕 난리법석이 있었는데 평양방송에서 이 육탄 10용사 가운데 최고참 서부덕 이등상사 등 두 명이 멀쩡히 우리는 살아 있다며 방송을 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은 육탄 10용사의 신화에 아주 큰 누가 되고 있긴 하지만. 

같은 날 동부전선에서는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다. 오늘날 래프팅이 인기를 끄는 내린천은 한국 하천으로는 특이하게 남에서 북으로 흘러 소양강에 합류한다. 지금이야 한참 남쪽 땅이지만 당시의 내린천은 38선을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대를 지키는 6여단 8연대의 두 대대장은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군내 남로당 인맥에 대한 숙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모총장 이응준이 38선을 지키는 장교들을 함부로 조사할 수는 없다 거절하긴 했지만 그 이름도 끔찍한 김창룡이 이미 자신들을 조사하겠다고 설친 것도 알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육사 2기 동기생 한 명이 불어버린 명단으로 친했던 동료들이 끝장나는 것을 낱낱이 보고 있었다. 그 육사 2기생의 이름은 박정희였다. 

표무원과 강태무라는 이름의 두 대대장은 남로당원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설도있다. (해제된 소련 정보 문서에는 북한 첩보원이 대대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은 1949년 5월 4일 황당한 일을 벌인다. 1대대장 표무원은 대대 병력을 이끌고 대북 시위에 나서는 것처럼 38선을 넘고는 “포위됐으니 항복하자.”고 나선 것이다. 일부 병력이 반항하자 인민군에게 위협 사격까지 요청하여 겁을 준다. 그래도 수백명의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꼼짝없이 또는 환희에 차서 인민군에 ‘귀순’하게 된다. 2대대장 강태무의 경우는 좀 더 처참했다. 많은 부대원들이 저항했고 위장 귀순해 있던 인민군이 중대장에게 투항을 설득하자 중대장이 이 인민군들을 사살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의 한국군이 북한으로 월북해 버린 사건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좌익도 있었을 것이고 어영부영 묻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한국군으로서는 영원한 흑역사를 기록한 셈이다. 

강태무는 공격(?)에 나서기 전 따라 나서겠다고 자청하는 한 장교에게 “너는 여기에 남아라.”고 지시한다. 그 장교의 이름은 정승화. 후일 12.12 때 전두환에게 곤욕을 치르는 참모총장 정승화는 아차 하면 북으로 끌려갈 뻔 했다. 이 사건 이후 숙군 작업은 더욱 더 치열하고 혹독하게 전개된다. 약 5천여 명의 좌익 혐의자가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문에서 쫓겨난다. 김일성은 6.25가 터진 후 강태무의 가족을 특별히 찾아 북송하고 인민군이 된 국군들을 자신들의 주둔지로 보내 가족들을 챙기게 하는 등 이 월북의 주인공들을 후대하지만 6.25 때 박헌영이 기대했던 남한 내부의 동조자들을 싹쓸이했던 가장 큰 계기는 바로 표무원과 강태무의 월북이었다. 

이 일로 백전노장 이응준 참모총장이 물러나게 되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 전쟁 초기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 준 채병덕이다. 또 황망한 월북 사건 후 국군은 복수 계획을 세운다. 방법은 월북 사태의 역이용. 또 한 부대가 월북하겠다는 거짓 전갈을 인민군에게 보낸 후 매복을 통해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매복 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인민군과 충돌하면서 산통이 거의 깨졌는데 막판에 한 부대가 인민군 추격대를 격멸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이걸 사직리 전투라고 부른다. 육탄 10용사의 송악산 전투나 사직리 전투 등에서 승리한 국군은 인민군을 묘하게 얕잡아보게 되고 이 근거없는 오만 또한 6.25 초전의 실패를 부르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표무원과 강태무는 둘 다 인민군에 복무하며 전쟁을 치루고 살아남는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 빅뱅의 탑과 권상우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민군 766부대의 지휘관이 강태무였다. 둘은 천수를 누리며 인민군 장성으로 종생했으며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는 조선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는 최상의 영광을 누리다가 죽었다. 둘 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했을까. 하여간 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가느다란 물줄기들을 꽤 여러 개 돌려 놨던 사람들이었다. 

사진은 월북 대대원들에 대한 평양시민 환영대회

 

1983.5.5 중공 민항기 불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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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착륙

 

한 달쯤 뒤 6월 8일에는 춘천 시민들에게 큰 선물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반세기 동안 춘천의 노른자위 자리에 턱 하니 좌정하고 있던 미군 페이지 기지가 2005년 미군 병력이 철수한 뒤 8년에 걸친 공사와 정리 끝에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50년간 이 캠프 페이지에도 별 일이 다 있었지요. 근처에 고엽제를 파묻었다는 미군 퇴역 군인의 증언 때문에 난리가 난 곳도 이곳이었고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기지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은 것은 1983년 5월 5일이었을 겁니다.

 

어린이날이었습니다. 날씨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어린이날 나들이객으로 전국 유원지며 놀이동산이 붐빌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오후를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찢어 놓습니다. 공습경보였지요. 불과 석 달 전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를 몰고 넘어와 휴전 이후 첫 사이렌이 울린 바 있었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더 그 소리에 긴장합니다. 이번엔 정말이구나! 진짜 전쟁이구나. 김정은 이하 북한 군부가 목이 찢어져라 전쟁불사를 외쳐도 별 신경쓰지 않는 요즘과 달리 당시 한국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를 체화하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슈퍼로 튀어 라면과 생필품을 집어들었고 피난짐을 싸기도 했습니다. 공습경보를 울린 항공기는 납치된 중공 민항기였습니다.

 

심양을 이륙한 중국 국내선 민항기. 여자 1명이 낀 6명의 납치범들이 권총을 쏘며 조종실에 난입, 남쪽으로 가자고 요구합니다. “남쪽으로 가자면 어디란 말인가.” 승무원의 질문에 범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한성(漢城)으로 가자.” 곧 서울로 가자는 말이었지요. 기장은 남쪽으로 향하던 중 기지를 발휘하여 북한 영공을 통과합니다. 평양 상공에서 선회하면서 뭔가 대응이 있어 주기를 고대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북한 당국은 이 비행기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예고에 없는 고위층 방문으로 생각했던 건지 평양 방공망이 무능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범인들은 눈치를 챘고 다시 기장 머리에 총을 들이댑니다. “한성! 한성으로 가자니까.”

 

민항기가 휴전선에 접근하자 남한측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고 서울 등 중부 지역에는 공습 경보가 울립니다. 그리고 범인들의 바램과는 조금 다르게 이들은 춘천의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합니다. 활주로를 벗어나 철조망 직전까지 치달았으니 자칫하면 대형참사로 치달을 뻔 했죠. 어쨌든 ‘중공’ 민항기는 휴전 이후 처음으로 그 오성홍기를 남한 땅에 선보이게 됩니다. 이 초유의 사태를 맞아 군이고 안기부고 청와대고 할 것 없이 발칵 뒤집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민항기 불시착 당일 중공으로부터 외교 전문이 날아든 겁니다. “교섭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 달라.” 명의는 중공 민항국장이었습니다. (2011.7.4 연합뉴스 - 외교열전) 중국 정부가 남한 정부에 전문을 보낸 것은 휴전 이후 처음이었던데다가 이례적으로 재빠른 발걸음이라 남한 정부도 놀랄 수 밖에 없었죠. 불과 이틀만에 중국에서 33명이라는 대규모 협상단이 몰려옵니다.

 

김상협 당시 총리가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다.”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중공 민항기의 존재는 당시만 해도 철천지 원수의 나라에 가깝던 중국과 한국 사이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됩니다. 일단 이때 처음으로 공식 문서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호를 서로 사용했고 정부와 정부간의 공식 협상이 이뤄집니다. 중국측은 기체와 승객, 납치범까지 돌려받길 원했지만 한국측은 납치범의 경우 국내법으로 처벌하겠다고 버팁니다. 자유중국이라고 불리던 대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또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났던 것을 기화로 ‘수리중’이라는 이유로 비행기를 쉽게 내주지 않죠. 결국 5일만에 한국측 입장이 거의 받아들여진 채 협상은 마무리됩니다. 승객들은 선물 실컷 받고 누릴 거 다 누린 다음 본국으로 돌아갔고요.

 

그런데 좀 이상한 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 만만디의 중국인들이 의외로 “빨리 빨리”의 한국적 풍습에 젖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전광석화같이 일을 추진했던가. 그 이유는 피랍 승객 중에 중국 최고의 미사일 전문가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합뉴스 2011.7.4) 적성국가인 한국이나 그 후견자 미국이 그런 유능한(?) 인재를 발견했다면 언제든 “정치적 망명” 따위의 꼼수로 빼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몸이 달아도 바싹 달아오른 거죠. 그래서 한국이 뭐라고 하든 하오 하오 하면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1983년 5월 5일, 그때까지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빽빽이 들어서 있던 죽의 장막은 걷혀지게 됩니다. 중국이 대만을 대표하여 명동의 대사관을 차지하고 대만 사람들이 분노에 떨며 밀려난 것은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역사는 참 엉뚱한 데에서 자기 길의 서막을 울리는 일이 많습니다. 한성으로 가자던 비행기 납치범들은 아마 자신들의 행동이 한국과 중국 양국이 서로에게 그 문을 여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공산 지옥에서 자유를 찾은 영웅들로 대만에서 환영받았던 그들 가운데 일부의 말로는 매우 불행했다고 전합니다. (역시 애를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다가 체포됐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요.) 어쨌건 1983년 5월 5일은 하나의 새로운 역사의 선로가 철컥거리며 자리를 잡았던 날이었습니다.


1963.5.6 강소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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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5월 6일 강소천 별세

 

강소천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는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열에 두 셋일 테지만 그의 작품을 들이대면 장담컨대 열 명 전부 아! 그 사람이야? 하면서 고개를 상하로 크게 끄덕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난다면 다이얼 111을 돌려 국정원에 간첩 포상금 신청해도 된다. 그는 이 노래들의 작곡가다. “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 눈이 내리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어디를 몇 개 더 덧붙여 보자. 동물원에 가면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동물의 노래.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내친김에 더 가보자.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을 우리들에게 선물한 것도 그고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고 꼬마들로 하여금 떼창을 하게 했던 이도 강소천이다. “옥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라는 슬픈 유관순을 노래한 이도 같고 ‘부모님의 은혜’와 늘상 헛갈리는 노래이면서 한국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노래 중의 하나인 (존경하는 스승 없는 사람은 예외) ‘스승의 노래’도 강소천의 작품이다.

 

이쯤 되면 강소천이 어느 정도로 대한민국 사람들의 동심에서 어느 정도의 영역을 차지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함경도 고원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일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고 월남한 것으로 미뤄 기독교 집안에 더하여 꽤 유복한 환경이었던 듯 싶다. 그의 어린 시절 벗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오리 전택부다. YMCA 총무와 사상계 주간을 지냈고 추억의 토크쇼 <사랑방 중계>에서 영화 평론가 정영일과 원종배 아나운서와 호흡을 맞췄던 그분. 이분은 조선 학생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스트라이크를 조직했던 강골이었지만 그 친구 강소천은 이렇게 부드러운 동시로 일제에 반항한다.

 

“이몸은 무궁화에 벌이랍니다 /고운꼿 피여나라 노래부르며

이꼿서 저꼿으로 날러다니는 / 조고만 무궁화에 벌이랍니다.

이몸은 무궁화에 나비랍니다 /고운꼿 피여나라 춤을추면서

이꼿서 저꼿으로 날러다니는 / 조그만 무궁화에 나비랍니다. (하략 - 무궁화에 별나비 중)

 

대한제국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등장한 이래 무궁화는 금기어에 가까운 단어였다. 무궁화 보급 운동을 폈던 남궁억이 고초를 겪은 일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일제는 “보기만 하면 눈에 핏발이 선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옛 나라의 상징 무궁화의 기억을 즈려밟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무궁화’를 노래한다는 것은 심약하기만 한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 친구 전택부는 강소천이 누군가를 평하며 “ 아직 거칠기는 하지만, 매우 좋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강소천의 영향을 받아 동시를 끄적이던 강소천보다 두 살 연하의 문학청년. 그는 윤동주였다.

 

해방 이후 함경북도 청진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북한 정권에서는 그다지 플러스 요인이 못되었다. 기독교인에 대지주 집안. 국군과 UN군이 북진했다가 급히 후퇴할 때 그 역시 필사적인 철수에 동참하고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기적적으로 LST에 올라탔던 피난민 중의 하나가 된다.

 

강소천이 초주검이 되어 상륙한 것은 거제도였다. 지주의 아들로 커서 분필만 잡았던 이 서생은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 절박한 생존의 위기에서도 그는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 그 해맑은 미소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학교에 찾아가지만 교장 선생이 뒷덜미를 잡는다. 그때 어영부영 이름을 밝히게 됐을 때 교장은 깜짝 놀란다. “강소천 선생님이십니까?” 놀란 것은 강소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나를아는구나! 강소천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남에 정착하고 다시 글을 쓰게 됐지만 언제까지나 그의 관심은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동화였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어린이’였다. 어른들이 벌인 전쟁통에 산산조각난 동심들을 어루만지고 다독이고 어깨를 두드리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품 활동의 목표였다. “어린이의 자유스런 성장과 발전을 돕기 위해서 아동문학가는 좋은 작품으로 꿈을 일깨워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친구 최태호에 따르면 강초선은 항상 어린이들의 생활과 심리를 연구했다. 함께 얘기하고 글짓기 작품을 열심히 읽고 아동 심리 관련 도서를 읽고 아동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힌 뒤 비평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글과 표현에 '병적일만큼‘ 집착했다니 그야말로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동화와 노래를 위해 강소천이라는 돌을 계속 스스로 다듬고 깎아 냈던 것 같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왜 어려운 한자를 가르치는가. 우리 글처럼 쉽고 아름다운 글이 어디에 있다고!” 그는 당연히 한글 전용 찬성론자가 된다.

 

전쟁과 복구, 가난과 시련의 1950년대 전국에는 고아들이 넘쳐났고 장바닥의 시레기 한 줄기를 가지고도 굶주린 부랑아들간에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동생 업은 열 살 소녀가 시장바닥에서 구걸했고 빵을 훔쳐서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입에 구겨 넣고 우물거리며 씹으며 우는 아이들도 흔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소천은 어린이 헌장을 작성한다. 그는 마치 작품 활동을 하듯 꼼꼼하게, 정성스럽게 글의 바느질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는 1957년 5월 5일 한국동화작가협의회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는 위험한 때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나 부량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일평생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말년에 가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아냈던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드러낸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꿈을 찍는 사진관>이 그렇고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 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 본다, 나만 혼자서.”라고 노래한 <그리운 언덕>이 그렇다. 결국 1963년 어린이날을 하루 지난 5월 6일 강소천은 세상을 떠난다. 어쩌면 그는 떠나면서도 슬퍼하는 동료들 위에서 동요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금강산 찾아가자 1만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노는 아이들 위에서 이렇게 읊조렸을지도 모르지.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같이.... 새나라의 기둥 되자 우리 어린이."



1983.5.7 신중철의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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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5월 7일 신중철의 귀순 

어느 해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1983년은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한 해였다.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넘어오면서 휴전 후 최초로 공습경보가 울렸고 중국 민항기가 피랍되어 북한 영공을 통과해 남한의 춘천에 불시착했다. 이를 통해 남한은 왕년의 철천지 원수 중공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부르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의 호칭을 받는 첫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0월에는 전두환 (나는 이 자에게만큼은 대통령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을 노린 북한의 아웅산 테러가 있었다. 그 가운데 5월 7일 뜻밖의 인물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인민군 13사단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 군사대학 졸업자이며 군관학교에서 김일성의 아들 김평일과 1,2등을 다툰 엘리트 장교였다. 또한 한국군으로 보면 영관급은 되어야 할 참모장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나름 북한에서는 잘나가던 장교임은 맞아 보였다. 풍문에 따르면 고위 장교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설도 있지만 하여간 무슨 사고를 쳤을 것이다. 기자회견에서처럼 “서울의 자유를 동경하고 있었고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알고” 이에 힘입어 귀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한 실상을 알면 인민군 70퍼센트가 귀순할 것”이라는 말도 흰소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당시 북한은 지금의 북한은 아니었으니까. 

이 신중철 대위는 제 4땅굴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이 땅굴이 진짜 땅굴을 숨기기 위한 위장 땅굴이며, 신중철은 이를 위해 파견된 위장간첩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반면 그 정보가 시원찮았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바로 한국군 소령으로 변신한다. 

그는 인민군 엘리트 장교 출신답게 한국군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4년만에 중령을 달더니 귀순 8년 후에는 무궁화 셋 대령을 어깨에 매다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물론 끌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국군 엘리트로서도 쉽지 않은 승진이었다. 그는 그 자체로 정보의 보고였던 것이다. 

“신씨의 귀순은 우리 군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병에서 출발해 수색대대장에 오름으로써 북한군의 전술(戰術)을 제대로 공부한 군인이었다. 북한군의 대대(大隊)전술 이론과 실무를 체계적으로 익힌 최초의 귀순자이기도 했다.우리 군은 그를 통해 전시(戰時)의 북한군이 어떤 체계로 움직이는지를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신씨를 통해 북한의 전술체계를 속속들이 파악함으로써 방어 위주로 짜여 있던 우리 군의 전시 작전개념에 공격개념이 추가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월간중앙 2001.7, 南과 北 어디에도 뿌리 못내린 ‘浮草인생’55년)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남한 사람보다 더 패기 있고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결혼한 과정도 재미있다. 환영 대회에서 꽃다발을 건넨 여학생에게 ‘꽂혀서’ “저 여학생 연락처 좀 주시라요.” 해서 과감하게 접근했고 띠동갑 연하 아내를 맞게 된 것이다. 이북에 처자식을 두고 온 사람치고는 너무도 빠른 변신과 결단. 군 생활도 튀었다. 운동 경기를 하더라도 상관을 배려해서 져주기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아 상관의 심기에 일희일비하는 한국군 장교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눈치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비윗장을 건드리는 얘기도 많이 털어놨다고 한다. 특히 구타 문제. 

“북한에서 13년 동안 군생활을 했지만 나는 단 한번도 맞거나 때려본 적이 없다. 인격대 인격끼리 만나 어떻게 패고 맞을 수 있느냐.”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구타 근절’이 성취되지 않은 한국 군대에서 ‘구타 사고’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시작된 것은 이런 신중철의 타박 때문도 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인민군의 군기는 유지되며 어떻게 군대는 돌아가는가. 지만원을 만난 신중철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북한 사단장은 토의 주재를 참 잘 합니다. 소위도 사단장을 마음대로 비판하지요. 진나게 토의하면 결론이 나옵니다. 사단장이 결론을 요약하지요. 그래서 박수를 치는 겁니다. 남한에서는 그 박수치는 걸 강제로 치는 것이라고 교육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정작 민주군대라고 하는 한국 사단에서는 예외 없이 사단장이 황제더군요.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대령도 사단장에게 제대로 소신 있는 말을 하지 못하더군요. 절절 매는 대령들이 대부분이구요. 전시에 어떻게 작전을 위한 토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매우 위험합디다.” 

자신의 정보 가치와 그를 통한 공헌, 그리고 그를 이쁘게 본 사람들의 배려로 대령까지는 승승장구 올라갔지만 언감생심 별은 어려웠을 것 같다. 아마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한국 사람도 그런 장교 별 달기 힘들다는 것을. 김일성이 죽었을 때 그는 대령이었다. 대선배(?) 김신조와 만난 자리에서 신중철은 조심스럽게도 이런 말을 한다. “누구보다도 김일성이 밉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쪽에서도 ‘잘죽었다’ 식의 반응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김일성 분향소가 설치됐다고 대역죄마냥 몰아치던 그 즈음, 이 언론 보도를 스크랩한 기무대원은 신중철 대령의 ‘국가관’에 대해 어떤 보고서를 올렸을까. 


“20년을 살아도 도무지 적응이 안돼.” 그가 남긴 말이다. 군 동료들과의 관계가 엉킨 상황에서 홧김에 또는 시위용으로 낸 전역원이 덜컥 받아들여져 제대한 뒤 그에게 밀어닥친 한국 사회는 똑똑한 그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고를 낸 뒤 본인은 한다고 했는데 사후 조처 미숙으로 뺑소니 처리가 되어 교수 임용에서 탈락했을 때는 정말 눈앞도 암담했을 것이다. 결국 가정 생활도 파탄을 맞았고 그는 이발소 안마사와 함께 중국으로 출국한 것이 드러나 또 한 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오랫 동안 그 존재를 숨겨 온 이중간첩 아닌가 하는 영화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고 실제로 그는 한국군 대령이었으니 그가 넘어왔을 때 이상의 정보 가치를 두르고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일단 그를 부인했다. 그냥 평범한 도피행각이라는 것이다. 모처에서 그를 발견해 귀국을 종용했다는 소식까지 나와 있다. 

그 뒤 신중철의 이름은 검색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남과 북 모두에서 인정받을만큼 똑똑한 군인이었던 그는 지금 어느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한국 정보 요원 팔에 끌려 고개를 숙인 채 귀국해서 어느 변두리 단칸방에서 안마사와 살림을 차리고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혹자의 추정대로 여유작작한 웃음을 띠고 압록강을 건너 연락부 요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무는 영웅이오!” 소리를 들은 뒤 북한의 처자식을 만나 살아가고 있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일생 또한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사이의 험로에서나 피어날 수 있는 불운한 꽃이었다는 것만은 알겠다.


 

의북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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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정신과 의사들을 만나고 돌아다닐 때 (일 때문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들은 얘기가 있다.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치료가 어려운 일종의 ‘암’에 가까운 증상이 있는데 그것은 의부증 또는 의처증이라는 것이었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멀쩡한데 한 사람에 대하여 미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정상적으로 사회생활도 하고 돈도 잘 벌고 대인관계도 괜찮은데 자기 배우자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인 사고 체계가 발동되고 질투망상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런즉 문제의 질환을 가진 배우자는 생으로 목숨을 끊을만큼 괴로운데도 주변에서는 병을 가진 사람을 두고 “참 좋은 사람이 마누라 (또는 신랑) 하나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며 동정하거나 그 배우자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언젠가 의처증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를 가까스로 빼내 인터뷰를 하는데 그 30분 동안 전화가 100통이 넘게 찍혔다. 아내는 거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아무리 옆에 있던 친구(여자)가 나랑 같이 있다고 얘기를 해도 남편은 “지금 어디야?를 반복했다. 그 남편의 머리 속에서는 지금쯤 아내가 누구를 만나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모텔방에서 뭘 하고 있으리라는 망상이 쑥쑥 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의사는 내게 진귀한 사례 하나를 들려 줬다. 환자가 자신의 친가 식구들에 의해 끌려오는 일은 매우 드문데 하루는 어머니가 아들 손목을 잡고 왔더라고 한다. 이유인즉슨 이렇다. “딸네 집에 갔다가 딸이 없어서 아들네에 늦게 왔지요. 열쇠가 있어서 벨을 누르지 않고 집에 들어갔는데 며느리가 한 손은 침대에 한 손은 우리 애 손에 묶여 있는 거예요. 기겁을 하고 물었더니 애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거예요. ‘엄마 내가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잖아. 그때 이 여자 애인이 온다고. 그걸 막으려면 이 수 밖에 없어.’ 얘가 미쳤구나 그때 알았죠.”

 

질투망상에 빠진 이들은 앞서 말했듯 그 증상만 제외하면 거의 정상적인 생활인들이다. 그래서 그 광증을 의심받지 아니하며 되레 사람들은 그 망상을 믿거나 동조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위의 남편처럼 상대방의 ‘바람 피우는 능력’을 매우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저 여자는 번개같이 애인을 맞아들이는 능력이 있으며 저 남자는 잠깐만 한눈을 팔면 다른 여자 치마폭을 들추고 있다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잠든 동안에도 애인을 침대에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다고 믿듯이. 또 하나 더 그 특징을 추가한다면 질투 망상에 빠진 이들은 매우 많은 ‘증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망상은 그들이 수집한 ‘증거’에 의해 더욱 공고화됐다. 아내 앞에 3분 이상 서 있던 이상한 벤츠 승용차는 기사가 화장실에 갔다 왔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와의 밀담을 나누기 위해 그곳에 서 있었다. 남편의 와이셔츠에 묻은 붉은 자욱은 절대로 육개장 국물이 아니라 립스틱의 흔적이었고, 밤늦게 걸려왔다 말없이 끊긴 전화는 백퍼센트 애인의 전화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증거’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배우자를 족치고 옥죄고 주변에 그 배우자의 부정을 폭로(?)하며 통탄해 마지 않았다.

 

외관상으로도 멀쩡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 하나 하지 않으며 사회 생활 잘하고 애들 잘 키우는 사람이 특정 대상에게만 미쳐 돌아가니 의처든 의부든 참으로 발견도 어렵고 고치기도 힘든 질병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요즘 전혀 새로운 질병의 출현에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짓게 된다. 그 병의 이름은 의북증이다.

 

정말 그렇게 생기지 않은 사람들이, 고등교육도 받고 사회에서 인정도 받는 사람들이 ‘북한’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것이다. 거기까지야 그렇다고 친다. 배우자의 부정을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너 북한 좋아하지? 종북이지?” 하는 광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북한이라는 존재는 홍길동보다도 우월하고 전우치보다 신묘한 재능을 가진 대상으로 치부되며 “눈깜짝할 사이 내 마누라를 훔쳐가는” 마누라의 애인같은 능력자로 등극한다.

 

그래서 모든 해킹은 다 북한이 한 것이며 수도권의 지하철과 가스관과 수도관을 일일이 피해 가며 휴전선 넘어 수원까지 땅굴을 팠고 광주항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인민군을 침투시켰으며 급기야 윤창중이 미국 방문할 것을 미리 알고 민주당의 박지원이 자신이 알던 여성을 인턴으로 취직시켜 윤창중을 옭아매는 계책을 세웠고 한국 외교관 가운데 성골만 간다는 미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도 종북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망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 그것만 똑같은가. 참 증거들은 많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르는 탈북자가 “그때 광주에 인민군이 갔댔시오” 한마디 한 건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고 “박지원이 그날 미국에 있었다,”는 게 윤창중 제거를 위한 종북들의 음모론의 주요 재료가 된다. 그러다보면 “윤창중 의병”이니 “이 기회에 종북 논객들 다 고발하시라,”는 광증이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알만한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들 손 잡고 정신 병원에 온 시어머니의 심경이 된다. “얘 가자. 어쩌다 네가 이렇게 됐니.”

 

질투망상을 가진 사람들의 마지막 특징 하나는 절대로 이혼을 하거나 상대방을 놔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 사랑을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고 배우자의 피를 말리고 스스로를 망쳐 나간다. 의북증 환자들도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자이며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믿으며 스스로 애국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광증 속에 자신들의 공화국을 죽이고 있다.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자유는 헌법상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대한민국 헌법의 팔목을 잡아 비틀어 자신의 침대에 묶어 놓고 있다. “북한은 번개같은 넘이어서 언제 들어와서 널 유린할지 몰라!”를 부르짖으면서 말이다.

 

정신과 의사들에게 진지하게 권고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집단 정신병에 대한 진지한 임상적 접근을 해 보기 바란다.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질투망상이 아니라 한 집단에 대한 과도한 피해망상이 탄생시킨 이 ‘의북증’은 정신병의 ‘암’이 아니라 ‘AIDS'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돕는 길을 찾아달라.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치고 나의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의술을 베풀겠노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신 의사 선생님들의 결의에 찬 선언을 기대한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의 안전을 해치는 질병이며 적극적인 치료와 사회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광주에 인민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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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민군이었다

 

TV 조선과 채널 A, 종편방송의 양웅이 일제히 새로운 사실을 들고 나왔다. 1980년 5월의 광주에 인민군이 대거 투입됐었다는 것이다. 몇 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 특공대가 계엄 하의 광주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듣기 전 나는 무릎을 치며 환호했다. “역시 그랬었구나.”

 

“인민군이 광주에 왔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33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리듯 하고 그만큼 머리를 괴롭히던 썩은니가 빠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이제사 80년 광주에 대한 거대한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0년 5월 18일 우리가 익히 봤던 바 트럭에서 몽둥이를 들고 뛰어내리며 광주 시민들 속으로 뛰어들었던 ‘공수부대’라는 부대가 절대로 국군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매일 마다 기상하면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하는 육군 복무 신조를 외우던 그 군대가 아니었다. 아니 그 군대일 수 없었다.

 

한 번 제대로 맞으면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는 박달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양복을 입었건 학생이건 나이가 많건 적건 남이건 녀건 그 정수리를 향해 몽둥이를 내려찍고 군화발로 밟고 그 뾰족한 군홧발로 인체의 모든 약한 부분을 헤집던 그들이 어떻게 국군이란 말인가. 그들은 인민군이었다.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괴수 김일성과 그 아들내미 김정일만을 위해 충성하며 인민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만화 <똘이장군>의 늑대들같은 부대. “약한 자를 보면 신경질이 나지요~”라며 헐벗은 인민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그 군대였다.

 

80년의 그 군대는 국군이 아니었다. 4.19 때 계엄이 떨어진 서울 시내에 군대가 출동했을 때 그 앞에서 “우리를 쏘시오 그러면 데모도 다 없어지리다.”하며 한 신사가 울먹이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국민의 군대입니다. 사격 명령이 떨어지면 차라리 돌아서서 아스팔트를 쏘겠습니다.”고 야무지게 대꾸하던 청년 소위를 배출한 대한민국 국군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모 형제의 처참한 죽음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과 가슴팍을 조준하여 M16 소총을 쏘아부쳤던 그들, 그것도 오늘처럼 부처님이 오셨던 날에 대놓고 시민들을 살상해 버리는 군대가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이란 말인가. 그들은 인민군이었다.

 

어렸을 적 지겹도록 봤던 <배달의 기수>나 드라마 <전우>에서 국군은 어린 아이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흡사 예수처럼 거룩한 사람들이었다. 드라마 <전우>에서 전쟁 고아 하나가 전선에서 뭔가를 줍고 있을 때 인민군이 그를 조준해 죽이자 지금은 작고한 탤런트 강민호 (소대장역)가 필사적으로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가 생사를 확인한 후 아이가 고개를 떨구자 미친 듯이 일어나 이 개새끼들아 울부짖으며 기관단총을 난사하던 장면은 기억에도 선연하다. 그럴진대 광주 시내 교외에서 미역 감고 놀던 아이들을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던 군대가, 30여명이 넘는 미성년자들을 쏘아 죽이고 때려죽인 군대가 어떻게 국군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인민군이었다. 북괴군이었다. 공산군이었다.

 

드라마 <전우>에서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여 인민군 포로를 학살하려는 병사들을 장교가 막아서는 장면이 있었다. 인민군 포로들을 치료해 주며 “비록 우리가 총을 들고 싸우고 있으나 우리는 한 동포가 아닌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가슴 뿌듯했던지! 그런데 1980년 광주에 투입됐던 그 부대는 항복하겠다고 총 쏘지 마라고 걸어나오는 사람들까지 해치웠고 시신들 뒤에 번호를 매긴 뒤에 질질 끌고 다녔고 부상자들까지 죽도록 두들겨 팼다. 그들은 절대로 국군일 수가 없었다. 결단코 국군이면 안되었다. 괴뢰군이었고 김일성의 졸개들이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같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러니 “광주항쟁 때 수백 명의 북한 특수부대가 출동했다.”는 탈북자의 고백이 어찌나 고맙고 속시원한지. 그로부터 수십 년 가슴 속에 담고 있었던 의문이 이제 풀리매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이제 공안당국은 온 힘을 기울여 80년 광주 시내에 나타나 시민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대검으로 난자하고 임산부부터 꼬마까지 가리지 않고 총을 쏴댔던 인민군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 수괴라 할 대간첩 전두환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다음 사형 선고 다음 날 바로 목을 대롱대롱 매달기 바란다. 대규모 인민군 병력이 대한민국 국민의 목숨을 빼앗은, 울진 삼척 사태 이후 최대의 참사의 진실을 분명히 밝히고 지금도 암약하고 있는 적색 분자들을 소탕해 주기 바란다. 이는 자유를 사랑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프라이드를 믿는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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