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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3.13 김마리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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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3월 13일 김마리아 꿋꿋하게 죽다 

1919년 3.1 항쟁이 터지기 전의 전조(?)는 많았다. 그 가운데 우뚝 선 봉우리라면 역시 2.8 독립선언일 것이다. 일종의 ‘적의 심장부’라 할 일본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으니 일본 제국주의로서는 한 방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꼴이었다. 동경에서는 드물게 함박눈이 내리던 1919년 2월 8일 조선 유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연행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당 대표는 11명, 모두 남자였다. 이 사실에 입술을 깨물던 여자 유학생이 있었다.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장이기도 했던 김마리아였다. 

그녀의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만했다. 숙부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와 절친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두루 교유하던 사람이었고 그 영향으로 정신여학교 재학시절 김마리아는 항일의식을 뚜렷이 드러내는 글을 짓는 등 될성부른 떡잎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찍이 기독교인이 됐던 부모처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란 그녀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이끈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이루기를 즐겨 기도했다고 한다.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연행됐으나 곧 풀려난 그녀는 이광수가 썼던 2.8 독립선언문을 옷 속에 감추고 꿰맨 채로 국내로 들어온다. 그 선언문을 들고 김마리아가 찾은 것은 천도교 본부였다. 3.1운동 천도교 대표 중 1인이며 후일 독립선언문의 인쇄를 맡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한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남녀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김마리아는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향할 것을 힘써 권하였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실천중이며 또 지난 1914년(갑인년)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하여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하였다.” 김마리아는 스님들 보면 지옥 간다고 아우성치고 단군상 목이나 자르는 오늘날의 ‘개독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독교인이었다. 

“조선 여자는 조선 사회에 적합하고 유용하도록 하며, 조선 사회에 헌신할 만하게 가르침이외다.” 라고 얘기했던 그녀는 조선 여성들이 남성들에 뒤지지 않고 조선 독립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고향인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기운을 불어넣던 그녀는 3.1 항쟁이 터지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고 역시 곧바로 체포됐다. 그녀는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는다.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김마리아 자신의 회고) 그러나 김마리아는 지지 않았다. “너희들 할대로 해라. 그런들 나라 사랑하는 생명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6개월 동안 온갖 악형을 당한 후 석방된 뒤 그녀는 몸도 추스르지 않은 채 모교 교단에 선다. 일종의 위장이었다. 학교 교사를 한다는 것을 방패막이로 그녀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지속적인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그러다가 1919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체포된다. 또 한 번 횡액을 치르는 김마리아. 일본 검사의 기록을 훔쳐보면 이렇다. “김마리아는 여자로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를 가졌음으로 그 대담한 태도와 거만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 더욱 가증한 것은 오연히 ‘나는 일본의 연호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면서 서력 일천구백 몇 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의 신민이 아닌 비국민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 호랑이를 능가하는 권세를 지닌 일본 검사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일본 검사는 탄복을 하고 만다. “너는 영웅이다. 너를 낳은 어머니는 더한 영웅이다.”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 박용옥저 중) 

이후 1921년 조선을 탈출하여 상해로 건너간 그녀는 거기서 임시정부 활동을 돕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못다한 공부에 매진한다. 그녀에게 있어 공부란 또 하나의 실천이요 조선의 아쉬움을 깨닫는 일이요, 그 부족함을 공유하고 함께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조선에는) 입과 붓으로 일을 하되 실천궁행하는 이가 없는 듯합니다. 남들의(외국의) 살림살이를 보니 이상이 실현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여자는 남녀 동등, 여자 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합니다.” 

귀국을 하려 했으나 일제는 경성에 들어오지 말 것, 그리고 신학만 가르칠 것을 조선으로 귀국을 허가했다. 그녀가 터를 잡은 것은 원산의 마르타 신학교였다. 1933년 그녀가 귀국할 때 이광수는 이런 시를 써서 그녀를 찬미했다. 

누이야 네 가슴에 타오르는 그 사랑을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손 내민 조선을 안아주오 
안아주오!
누이야 꽃 같이 곱고 힘 있고 깨끗한 몸을 
뉘게다 주랴 하오? 
뉘게다 주랴 하오? 
네 앞에 팔 벌린 조선에 안기시오
안기시오! 
누이야 청춘도 가고 사랑도 생명도 다 가는 인생이요 
아니 가는 것은 영원한 조선이니 
당신의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바치시오, 조선에!

자기는 청춘과 사랑과 생명을 엉뚱한 놈한테 바칠 태세를 갖추던 춘원 이광수의 영탄이 좀 어이없기는 하지만 안창호가 “그녀같은 사람 열 명만 있어도 조선은 독립됐다.”고 하던 김마리아는 돌아왔다. 그러나 가시밭길은 계속됐다. 그녀가 조선에 돌아온 뒤 보낸 10년은 일제의 광기가 극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만주사변은 이미 일어난 뒤였고 중국에 전쟁을 걸었고 급기야 미국의 진주만을 들이쳤다. 그 와중에 아예 조선민족을 없애버리겠다는 듯 민족말살정책은 극에 달했고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거의 모두 손뼉 치고 고개 숙이는 신사 의식을 치렀고 과거 그의 동료들은 학병에 나가 대동아성전에 몸바치라 악을 써대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기독교인으로서, 또 조선 사람으로서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 그녀는 물고문 도중 이물질이 들어간 코 안에서 생긴 질병과 그 외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달라는 것. 수저 한 벌이 그녀의 유품의 전부였을만큼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쉰 두 살 독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평생 사모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빼놓지 못할 지운 김철수. 조선공산당의 핵심 멤버였고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갈라서 여운형과 함께 했지만 여운형이 암살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던 지운 김철수가 그였다. 그는 김마리아를 몹시 사모했고 주위에서도 맺어주려고 애를 썼으나 김철수는 고향에 조강지처가 있음을 들어 거부했다. (이때는 고향의 처가 있건 말건 이른바 신여성과 교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기) 

김철수는 벽에 두 명의 사진을 걸고 “용서하라”는 뜻의 ‘서호’(恕乎) 자를 써 붙여 놓고 보면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는 일생을 무장 독립 투쟁에 바치다가 옥사한 일송 김동삼. 그리고 김마리아였다. 배신과 변절, 복수와 살인의 추악한 파노라마가 펼쳐진 한국 현대사를 김철수는 이뤄지지 못한 사랑 김마리아를 바라보며 흘러보냈다. 누군가를 평생 사랑했지만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또한 잊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극받았던 김철수, 그리고 그가 평생 지켜본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죽어서나 행복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김철수에게도 공감이 간다. 그런 사랑도 괜찮고 가능하구나 싶어서. 

1944년 3월 13일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김마리아가 죽었다.


1994.3.14 교사들의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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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4년 3월 14일 교사들의 양심선언 

요즘 뜨는 드라마 <야왕>을 볼 때 느끼는 건데 권상우라는 배우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최고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씨발 대한민국 학교 다 좃까라 그래~!”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그의 일생일대의 연기였고 리얼리즘의 극치였고 두고두고 남는 명대사로 빛날 것이다. 그런데 이 학교는 어느 학교였을까. 영화 속에서는 ‘정문고등학교’로 등장하고 말죽거리를 ‘나와바리’로 한 학교라면? 그 수수께끼는 이 영화의 유하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선도부원 역을 한 이종혁, 그리고 하다못해 엔딩 타이틀 곡을 부른 김진표까지 한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에서 쉽게 풀린다. 우연의 일치였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출과 연기만큼 진솔한 것은 없는 법. 

두 번째 퀴즈. 정준호가 떴던 코믹 조폭 영화 <두사부일체>에서는 아주 황망한 학교 하나가 등장한다. 교장이 앞장서서 성적을 조작하고 학교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르던 학교, 급기야 학교 간 조폭이 열 받아 “학교를 접수한다.”고 똘마니들을 출동시키고 아이들을 때려잡는데 일가견이 있던 교사가 눈물의 양심선언을 하는 희한한 학교. 영화에 등장한 학교의 이름은 상춘고등학교였다. 교장 이름은 상춘만. 

권상우가 좃까라고 외쳤던 정문고등학교와 두사부일체의 상춘고등학교를 합치면 그 학교의 이름이 나온다. 상문고등학교. 그리고 단군 이래 최대의 사학비리의 주도자였던 교장의 이름은 상춘식. 나에게 상씨라는 성씨가 있음을 처음으로 알려 줬던 그의 복마전이 1994년 3월 14일 강남경찰서 기자실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강남경찰서 기자실을 찾은 7명의 상문고등학교 교사들은 지금껏 교사의 양심을 허물어 가며, 짓밟혀 가며 감내해야 했던 상문고 내의 기상천외한 비리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영어 채점을 하고 있는데 교감과 학년 주임이 와서 31점 받은 박모군이 영어 수를 받을 수 있도록 34점으로 고치라고 강요했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가 김포 세관 간부더군요.”

“이야기 나온 그 학생 세계사 채점을 하고 있는데 비슷한 요구가 있어서 거절했더니 교감이 와서 왜 말을 안듣냐며 직접 고쳤습니다.” 

“어느 회사 이사의 아들이 ‘우’가 나온 것을 교감이 직접 ‘수’로 고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교사들은 숫제 통곡을 했다. 너무도 쌓인 것이 컸으리라. 교사의 양심으로 똘망똘망한 눈이 충혈되도록 공부를 하고 코피를 쏟는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가 김포세관 간부가 어디 이사라는 이유로 ‘수’를 챙겨가는 모습에 허파가 뒤집혔으리라. 그것도 ‘교감샘’ ‘교장샘’이 앞장서서 그 짓을 했으니. 거기다가 찬조금은 어찌나 탐관오리식으로 거두었는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교사는 자기 월급으로 그것을 메워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교육청 감사관이 긴급 출동하여 상문고등학교에 쳐들어갔으나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버티는 통에 멀거니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고, 교직원들이 취재진의 접근을 막으면서 증거가 될 시험 답안지들을 불태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생 보기를 물로 알고 교사 보기를 졸로 알아도분수가 있지, 상춘식 교장은 <두사부일체> 영화 속의 상춘만 교장보다 더한 인간이었다. 영화 속에서 상춘만 교장은 이렇게 얘기한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조선 땅에는 널린 게 선생이야." 상춘식 교장은 교육청 감사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조선 땅에서는 사립학교 주인이 장땡이야.” 

이렇게 한 학교를 말아먹고 수십억 돈을 챙기고 성적을 조작하여 뭇 선량한 학생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상춘식은 끝까지 상문고등학교에 돌아오려고 기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다. 1974년 14평 연탄 아파트에 생활하던 사람이 1994년에는 200억 원이 훨씬 넘는 거부가 됐다는 보도가 있었으니 세상에 그런 재테크 수단을 뺏기고도 눈에 불을 켜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1999년 상춘식 교장의 처 이우자는 행정소송을 냈고 이에 승소, 관선이사들의 업무가 정지됐다. 그 이전에도 이우자 등 상춘식의 측근이 이사회로 복귀하려는 기도를 학생들과 교사들이 들고 일어서 저지했던 바, 행정소송의 재판부는 “교사들이 불법적인 실력 행사로 재단의 이사진을 바꿀 수도 있다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감자탕에도 못들어갈 개뼈다귀같은 판결로 상문고 학생들과 교사들을 경악시켰다. 

이후 상문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기나긴 싸움에 들어갔다. 그 하이라이트는 2001년 상문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벌어진다. 이날의 주인공은 장방언이라는 사람이었다. 94년 당시 교감으로 교사들이 성적 조작의 주범으로 지목한 그 사람이고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 이 인간이 교장이랍시고 입학식에서 훈화하겠다면서 학교에 발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이 학부모들에게 했다는 말은 이른바 교육자라는 사람의 얼굴이 어느 정도 두꺼울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전교조 교사들에게 속지마세요. 어머니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94년도에 나는 위에서 시켜서 한 죄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험한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아가리를 열 십자로 찢어버릴라. 끝내 그는 졸업생들에게 학교 밖으로 끌려 나갔고 상춘식 일당은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하여 학교에서 손을 떼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몇 안되는 “정의가 승리한” 순간. 

상춘식이라는 물건과 그 하수인으로 감옥까지 갔다 와 놓고도 교장을 맡겠다고 그 철면을 들이밀던 장방언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복마전을 일궈 놓을 수 있었을까. 그건 한 교사의 양심선언 중 일부 증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상교장은 학교를 입시사관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을 옥죄어 명문대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면 모든 부정이 덮어진다는 것이 상교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상춘식이라는 주범은 많은 공범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방언을 위시한 그 똘마니들은 물론, 명문대학교 많이 입학시키면 그걸로 장땡이라고 여기고 무슨 인성교육이니 뭐니 하는 한가한 소리하는 교사들을 멸시하던 학부모들, 그리고 그 자제들이 모두 그들의 공범이었던 셈이다. 그러고보면 나도 어느 새 그 공범이 되어 있다 젠장.

1960.3.15 꽃잎처럼 떨어진 12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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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3월 15일 꽃잎처럼 떨어져간 열 두 명 

1960년 3.15 선거는 가히 부정선거의 집대성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부정투표법이 동원됐다. 대리투표, 공개투표,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꿔치기(올빼미식), 투표용지 미리 채워두기, 야당 관리인 협박해서 내쫓기, 야당에 기표한 용지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드는 피안호식 등 기상천외하고 어마무시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자행됐다. 선거 분위기는 거짓말 조금 더 보탠 야바위판이었고, 손 대면 톡 하도 터질 듯한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형성됐다. 이때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은 ‘고딩’들이었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이 최초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3월 8일에서는 대전에서, 10일은 충주에서, 14일에는 부산의 8천여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괄괄한 성품으로 유명한 항구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3월 13일 간 크게도 파출소 앞에서 마산상고 학생 두 명이 시험 답안지 뒤에 “백만학도여 궐기하라” “자유당 때려부수자”고 적어 뿌리다가 체포된 것은 그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 답안지를 잘 기억해 두시라) 3월 15일 선거날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정선거에 분노한 민주당 마산시당 청년들은 일찌감치 데모를 준비한다. “이기 어데 선거가. 콱 쎄리 문데삘라 마.” 

그들은 오전 10시에 선거 포기를 선언한다. 그리고 표를 도둑맞은 것에 분노하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형성, 마산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산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지프차 지붕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해산을 종용하던 경찰서장 앞에 맹랑한 고등학생이 나타난다. 지프차를 꾸역꾸역 기어오르더니 마이크를 낚아챈 것이다. 뭐라고 구호를 외치려 했지만 분노한 경찰서장은 늑신하게 곤봉으로 이 학생을 두들겨 패 버렸다. 그러나 무자비한 폭력은 대개 분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 직이겠다!” 시위대 역시 폭발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에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방차는 물대포를 뿜었고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곤봉에는 인정이 없었다. 시위대도 자유당 마산당사, 서울신문 마산 지사 등을 불지르며 맞섰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린 어둠 속에서도 시위대가 수그러들지 않자 경찰은 마침내 실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개시한다. 탕 탕 탕. 카빈총소리가 날카롭게 마산의 밤하늘을 울렸고 시위대로 거리에 서 있던 생때같은 젊음들이 픽픽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한 명은 마산고등학교 1학년 13반 반장 김용실이었다. “마산 몽고아이스케키 집 아들이었고 키도 크고 잘생긴 야구부 포수” (친구 김건일 시인 증언)였던 그는 피를 뿜으며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뜻밖에도 그 소년을 알고 있었다. 1년쯤 전 무슨 일로인가 다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노인을 병원까지 업고 왔던 그 소년이 총알에 맞은 중상자로 병원에 실려 온 것이다. “용실이다. 총 맞은 사람이 용실이다.” 이때의 정황을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지난해 술 취한 노인/ 술 취해/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업고/ 병원에 왔다/ 병원 간호부들이/ 업고 온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었다/…1년뒤/ 그 소년 김용실이/ 총 맞은 시체로 병원에 실려왔다/ 간호부들이 울었다/ 그 착한 용실이가/ 그 착한 용실이가/ `빨갱이'로 죽어서 왔어/ …서로 내동생 내 동생 하던/ 그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우째 이런 일이....간호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더 황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원에 들이닥친 경찰들은 시신이 되어 실려 온 김용실 등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고 그들이 빨갱이들이라고 우겼다. 협조(?)를 거부하는 병원장에게는 권총까지 들이밀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내세운 ‘불온문서’란 바로 이틀 전 마산상고 학생이 거리에서 뿌렸던 답안지였다. 그 답안지 뒤에는 뻘건 글씨로 인민공화국 만세가 쓰여져 있었고 피도 묻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총을 맞은 김용실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답안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검사는 간호사들에게 물었다. 그때 간호사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거 없었습니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고 하는 발뺌이 아니었다. 동생같이 듬직하던 한 소년의 죽음 앞에서, 서슬푸르다 못해 살기가 도는 경찰들 앞에서 간호사들은 또박또박 말한다. 검사는 곧 필체의 주인이 조서를 작성한 경찰관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3.15 하면 으레 김주열의 최루탄 박힌 참혹한 모습만 떠오르지만 그날 시위에서 열 두 명이 죽었다. 네 살 개가해 버린 어머니의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생활하며 구두닦이로 열심히 살아가던 나이 스물의 오성원, 구공탄 장수 아버지를 도와 리어카를 밀면서 야간 중학교라도 가겠다며 밝게 웃던 김영호,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고학하며 마산고등학교 졸업장을 거머쥔 지 며칠 안된 김영준, 중학교 졸업 후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방을 버리고 기계를 잡았던 전의규 모두가 새파랗던 너무도 새파랗던 청춘들이었다. 국립경찰은 그들을 쏘아 죽이고 그 호주머니 안에 불온문서(?)를 집어넣었고 누가 내 아들을 죽였느냐며 경찰서에 찾아온 엄마의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고은의 만인보 중 김영호의 아버지 깁위술의 심경을 노래한 시. 


나는 하루 150환을 버는 막일꾼이올시다
구공탄 배달하는 막일꾼이올시다
허위허위
비탈길 오르면
한겨울에도 내 몸에서 하얀 김이 한 소쿠리씩 피어납니다

나는 구공탄 친구올시다
나는 구공탄 쓰는 
언덕배기 가난한 집들 친구올시다

내 자식놈은 야간학교 고학생이올시다
김영호올시다
구공탄 배달 김위술의 아들 김영호올시다

마산 남성동 파출소 찾아가
어는 놈이 내 자식 때려죽였느냐
어느 놈이 내 자식 죽였느냐고
부르짖는 내 마누라마저
수갑 채워 형무소 보낸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올시다

내 자식 총 맞은 뼈 그대로
땅에 묻었습니다
마누라는 콩밥 먹고 나왔습니다
정신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구공탄 리어카 끌고
오르막길 오르고
내리막길 내려갑니다

영호야
영호야
영호야
속으로 불러봅니다
소리내어 불러봅니다
오늘 빈 리어카하고 나하고 비탈길 굴러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자식 잃은 막일꾼이올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열 두 명의 이름 

김영호(당 19세), 김용실(당 18세), 김주열(당 17세), 
김영준(당 20세), 전의규(당 18세), 김영길(당 18세),
김효덕(당 19세), 김삼웅(당 19세), 오성원(당 20세), 
김종술(당 17세), 김평도(당 39세), 강융기(당 20세).

1968.3.16 미라이 학살 , 좀비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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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학살, 좀비와 인간

1968년 봄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은 바짝 독이 올라 있었다. 월맹의 구정대공세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미국 대사관이 한때 공격받는 등 뜨거운 맛도 봤던데다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들의 준동에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신경이 곤두선 미군들은 곳곳에서 무리수를 펼쳤고 1968년 3월 16일 최악의 참사를 빚어내고야 만다. 미군 제 23사단 11여단 20연대 소속 1대대는 남베트남 쾅과이 주 일대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들은 구정대공세 기간 부비트랩과 베트콩의 공격으로 적잖은 동료를 잃었고 복수심에 불탔다.

베트콩 준동 마을로 꼽힌 성미 마을을 두고 연대장은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대대장은 “가옥을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고 가축을 죽이라.”는 한국전쟁에도 즐겨 사용된 ‘견벽청야’ 즉 게릴라 근거지로서의 기능을 박멸시키는 작전을 명령한다. 이후 중대장은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저항군”을 다 쓸어버리라고 휘하 소대에게 지시했는데 입대한 지 넉 달 되고 좀 띨띨하다고 소문났던 켈리 소위 휘하 병력은 이 명령을 “민간인 포함해서 다 쓸어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런 명령을 받았을 수도 있고) 

켈리 소위 이하 소대원들은 미라이 마을 (실제는 성미 마을인데 미군 지도에는 자신들이 지칭하는 대로 미라이 마을이라고 돼 있었다)로 투입됐다. 게릴라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하지만 미군들은 미라이 마을 사람들을 마을 중앙으로 모이게 했다. 미라이 마을 사람들은 긴장했지만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남베트남 공화국 시민이었고 우리로 치면 주민등록증이 엄연한 사람들이었다. 미군들이 거칠게 그들을 마을 가운데로 몰아갈 때에도 그들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연신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자신들이 무고한 베트남 시민임을 표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살인 허가를 취득한 군인들에게 그것은 밑씻개로도 못쓸 종이조각일 뿐이었다. 

학살은 시작됐다. 찰리 소대에 이어 투입된 다른 대대원까지 합세하여 그들은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노소의 차별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국그릇만한 총상을 남기며 쓰러져 갔다. 어떤 이는 사지가 토막나기도 했다. 또 젊은 여자의 경우 성폭행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런 식으로 560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자유의 십자군을 자처하던 미군 병사들은 흡사 좀비처럼 사람 사냥을 나섰고 눈에 보이는 대로 죽였다. “훈련받은 지침이 떠올랐고 난 마구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노인, 여자, 아이, 물소, 모든 것을. 그들은 적이었다. 난 그들의 목을 따고, 손을 자르고, 혀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머리 가죽을 벗겼다.” 

좀비영화에서 보듯 득시글거리는 좀비들 가운데에는 인간도 끼어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극에 기가 질린 한 병사는 “명령이다 놈들을 죽여!”를 부르짖는 장교와 고참 좀비들의 이빨에 물어뜯기기도 싫었고 좀비가 되어 죄없는 사람을 찢어발길 수도 없었다. 그가 택한 길은 자신의 발등을 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인간은 몇몇 더 끼어 있었다. 말단 사병의 몸으로 명령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학살극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이 전쟁광 좀비들이 벌이는 짓을 똑똑히 지켜 보면서 언젠가는 이 미친 짓을 폭로하고 말리라 다짐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건 표적이 없는 대학살이다!”

종군기자 로버트 해벌은 미라이 학살을 담은 필름을 미군 당국에 제출했지만 자신의 개인 카메라에도 그 끔찍한 기록을 낱낱이 담아 빼돌렸고 C중대원은 아니었지만 동료의 증언으로 사실을 파악하게 된 미군 병사 론 라이덴하워는 닉슨 대통령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수십 군데에 미군 부대원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거의 메아리가 없는 일이었다 싶었지만 이를 발판으로 1969년 미라이 학살에 대한 심층보도가 나오게 되고, 미라이 학살은 세상에 알려진다. “정부에 속고 사는 미국민들을 위해, 타락된 미국의 인간성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미라이 학살을 세상에 토해 낸 허쉬 기자의 코멘트. 

좀비들이 M16을 휘두르던 미라이에서 인간은 몇 명 더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작전을 지원 나온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 그는 헬기를 조종하다가 좀비들의 광란을 목격하고 헬기를 착륙시키고 켈리 소위에게 달려간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겁니까, 소위님?” “명령받은 대로 내 일을 하고 있소.” 
“무슨 명령이란 말이오?” “명령은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요.” 
“저 사람들은 인간이야. 비무장한 민간인들이라고요 소위님,” 
“톰슨. 이건 내 쇼야. 내 담당이라고. 신경 꺼.” 

어쩔 수 없이 헬기로 돌아간 톰슨, 그러나 그는 계속 현장을 주시하던 중 가까스로 몸을 숨기고 있던 베트남 양민들이 좀비들의 손에 발견되는 것을 목격한다. 소총을 들이대려는 좀비들을 보면서 톰슨은 자신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한다. “착륙한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헬기는 마치 천사처럼 좀비들과 양민들 사이에 착륙했다. 기관총 사수들이 좀비들을 겨누는 가운데 톰슨 중위는 사격중지를 부르짖었고 그는 민간인 10여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긴 뒤 본부로 돌아온 그는 책상을 치며 분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세상에 알려야 해!” 

그러나 좀비들의 사회에서 인간은 왕따였다. 미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지고 켈리 중위를 비롯한 혐의자들이 법정에 섰을 때 증인으로 나섰던 톰슨은 엄청난 왕따와 협박을 감수해야 했다. 그가 장교 클럽에 들어서면 장교들은 눈짓을 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협박도 부지기수였고 무슨 마피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현관에는 동물의 사체가 던져지기도 했다. 심지어 하원의 몇몇 의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돼야 할 건 바로 당신”이라며 톰슨을 겁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톰슨은 버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라고 분노하던 그 마음으로. 그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자신이 살린 소녀를 만났을 때 아마도 그는 평생에 잘한 일로 자신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하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새끼들은 쏴 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 버려.” 

학살 책임자 켈리 중위(로 제대)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그나마 3년 뒤 닉슨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 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백 명의 양민을 죽인 책임은 결국 누구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휴 톰슨을 내세워 스스로의 죄의식을 던다. 톰슨과 당시 기관총 사수들에게 무공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미라이는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긴 했으나 그 치욕을 감당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성미 (미라이) 마을에 가면 학살 박물관이 서 있고 베트남전의 참상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그 박물관에는 한국군의 사진이 딱 한 장 걸려 있다. 그 사진은 이렇게 표기돼 있다고 한다. “Korean mercenary"(한국인 용병) 그래 우리도 베트남에 갔었지.


1982.3.18 부미방 그리고 김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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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3월 18일 부미방과 김은숙 

부산에는 대청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남포동 근처의 번화가이며 근처에는 부산 굴지의 백화점이던 유나백화점과 미화당 백화점이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동네의 랜드마크는 단연 미국 문화원이었다. 밝은 색 외벽을 하긴 했지만 뭐가 위압적으로 보이던 건물 위로는 성조기가 나부끼던 그 건물은 1982년 검은 연기를 토해 내며 불타오른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이른바 ‘부미방’이 터진 것이다. 

항쟁에 나선 광주 시민들조차 미국 항공모항의 입항에 “우리를 도우러 왔다.”고 고무되었을만큼 이른바 ‘반미의 무풍지대’ 한국에서 미국 문화원이 방화로 불타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엄연히 웬 여자 두 명이 기름통을 들고 왔고 그걸 들이붓고 불을 당기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근처 국도극장 3층에서는 팜플렛이 뿌려졌다. 명백히 계획된 방화였고 시위였다. 그리고 방화에 가담한 이들이 외친 구호는 전두환의 그 드문 머리털을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

경천동지(驚天動地). 적어도 남한의 하늘도 놀랐을 것이고 그 땅은 분명히 움찔거렸을 것이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공안당국은 눈을 까뒤집었다. 사건 발생 14일만에 이 경천동지할 사건의 주인공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문부식과 김은정. 그리고 그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김현장이 체포됐고 문부식과 김은정을 돕고 유인물을 뿌렸던 대학생들도 모두 체포됐다.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기에 부미방 사건 하면 그 둘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실상 미 문화원 방화라는 엄청난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은 김은숙을 비롯한 여학생들이었다. 휘발유통을 들고 들어가서 뿌리고 나무젓가락에 알콜을 뭉친 솜덩이를 끼워 만든 ‘방화봉’에 불을 붙이고 기름에 불을 당긴 것은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주범(?) 김현장은 천 리 밖 원주에 있었고 문부식은 앞 건물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김은숙과 문부식은 연인 관계였다. 그들의 첫만남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가 문부식과 김은숙을 소개팅시켜 주기로 했는데 문부식이 만남 장소 약도를 잘못 그려 주어 만남이 불발됐는데 어느 날 김은숙은 씩씩거리며 문부식의 강의실을 찾아갔다. “당신이 문부식이죠? 약도를 똑바로 그려 줬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휑 하니 나가버렸다니. 그 후로 연이 없었던 그들은 문부식이 복학한 후 함께 3학년을 다니면서 친해졌다. 둘은 그야말로 역사적 사건을 함께 치른 한 쌍이 된다. 자수하기 전 신부의 주례로 혼인 예식까지 거행하지만 둘은 부부로 살지 못했다. 바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사형이라는 아득한 선고를 받았고 (문부식) 짐승같은 남자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고문을 받아야 했던 (김은숙) 그들의 젊음과 일상의 행복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김은숙은 출소 후 담담하고 묵묵하게 현장을 지키며 살았다.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책을 내고 동화도 쓰는 작가이면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와 함께 평화시장 인근에서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의 교장으로 활동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잘 건사할까의 고민으로 때문에 하루 4시간밖에 못 자면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는 그녀는 뜻밖에 위암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임수경씨는 트윗으로 이 사정을 알린다. “ 그녀가 치열하게 살았던 격랑의 80년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겨져야 할까요. 그녀는 지금 지치고 외롭고 아프고 가난합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위어갑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아득한 기억 속의 화석이 되어 버린 그을음같은 이름 부미방과 김은숙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 냈다. 죽기 얼마 전 입원해 있던 녹색 병원 로비에서는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환자복 위에 스카프를 두르고 휠체어에 탄 채 나타난 그녀는 1주일도 안된 기간 6천만원의 돈을 모아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멀리서 이렇게 부족한 저를 위해서 와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희망을 전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꼭 낫도록 하겠습니다." 병마에 지치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녀는 그 공연을 준ㅂ비하던 임수경씨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희망을 이야기해야 된다.” 즉 환자 위로한답시고 우울한 분위기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은숙은 쉰 둘의 나이로 2011년 세상을 떴다. 죽음 직전 거의 의식을 잃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깨어나 “사랑해!”를 부르짖은 후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고은 시인은 그녀륽 ‘숨은 꽃’이라고 불렀다. 바람맞힌 남자를 찾아가 대차게 한 마디를 쏘아 주고 나왔던 말괄량이 여대생, 대낮에 기름통을 들고 미국 문화원 문을 박찼던 당찬 처녀는 그렇게 어두운 곳, 손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그 소담한 꽃을 묵묵히 피워내다가 일찍 시들고 말았다. 


1982년 3월 18일 스물 넷의 여대생이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1992.3.19 안녕 프란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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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2년 3월 19일 안녕 프란체스카 

언젠가 드라마 <프란체스카>를 보면서 나는 엉뚱한 사람이 자꾸 떠올라 시청에 방해를 받았었다. 그건 프란체스카 도나 리. 즉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비슷한 사람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라고 종종 오해를 받았고 6.25때 쌕쌕거리고 하늘을 날던 F86 전투기를 두고 오스트레일리아 군 비행기, 즉 호줏기라고 부르며 “이박사 처갓집 비행기”라고 부르기도 했다지만 그녀는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그녀는 이혼녀로서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제네바 여행 중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중년의 동양 신사를 만났다. 인연이려고 그랬는지 그녀는 여행 직전 읽은 책에서 Korea라는 이름을 알았기에 동양 신사에게서 Korean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낯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동양 신사의 행적이 실린 신문을 스크랩하여 전달할만큼 호감을 가졌다. 느낌이 이상했던 어머니는 즉시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 고집불통 딸은 계속 동양의 신사와 서신을 교환하며 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합석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이도 많은 동양 신사라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 어머니의 한탄이었다. 

그 동양 신사는 이승만이었고 둘은 결혼한다. 신부 프란체스카 양 나이 서른 넷. 신랑 이승만 군의 나이는 장장 쉰 아홉. 프란체스카의 작고한 아버지의 나이가 이승만과 동갑이었다. 필시 장모는 이승만보다도 어렸으리라. 둘은 평생 서로를 '마미‘ ’파파‘라고 불렀다는데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을 파파라 부른 것은 그렇다고 치는데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에게 마미라고 부르는 풍경은 피식 실소를 새어나오게 만든다. 

어쨌든 부부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독립운동가의 좌장급이었던 이승만 (해방 후 좌익이건 우익이건 최고 지도자 후보로는 이승만을 꼽았으니)의 파란 눈 신부는 한국 사람들을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에게 온 초청장에는 “(부인은 두고) 혼자만 와 주십사”가 박혀 있기 일쑤였고 어떤 이들은 대놓고 프란체스카를 배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꿋꿋이 버텼고 이승만을 도우며 미국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둘 사이의 금슬은 꽤나 좋았던 것 같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가문에서 익힌 가부장제를 미국 생활 수십 년 동안에도 전혀 버리지 않은 이승만의 뜻을 잘 따라 주었고 망국의 가난한 망명객에게 꼭 필요한 비서 노릇도 해 주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귀국했고 대한민국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 

그녀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人)의 장막을 친 서양의 마귀할멈”부터 평생 한국 초대 대통령의 아내로서의 품위와 검소함을 잃지 않았으며 침몰한 남편의 명예를 끌어올리려 노력하며 살다 간 영부인까지. 그 와중에 도무지 이분의 활동 영역을 짐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증언들도 역사의 우물 속에서 길어올려져 있기도 하다. “우리는 여성공작원들을 수백 명이나 보유했는데 모두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가 제공했다. 모두 영화배우인 데다 미모가 출중했다.” (미 공군 특수부대 준장 아더홀트) 

언젠가 책방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를 읽은 적이 있다. 그 회고록에서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철저한 팔불출을 고수하며 자신보다 반 세기나 더 나이를 먹었던 남편을 옹호하고 예찬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프란체스카 여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 남편이 점점 더 무서워졌다. 

“전쟁은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50년 7월17일)” 

이 기도가 프란체스카의 귓전을 울렸다는 것은 이승만이 이 기도를 영어로 했다는 이야기다. 둘은 거의 평생 영어로 소통했고 프란체스카는 늘그막까지도 한국어를 알아듣긴 했으나 제대로 말하지는 못하는 처지였으니까. 전쟁 중에 영어로 울부짖는 한국 대통령.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저 기도 와중에 보도연맹 학살을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면서 자신들이 작성했던 보도연맹원들을 쏴 죽이고 찔러 죽이고 태워 죽였던 것을 상상하면 저 기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들으셨을지 궁금하다.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권총 한 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 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야’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 

죽을 각오로 머리맡에 권총을 챙기는 각오를 한 그 사람과 대전으로 도망온 뒤 충남지사 관사에 KBS 대전방송과장을 불러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됩네다.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고 내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시오. 내가 방송한 것을 서울에서 여러 번 재방송하도록 하고,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네다.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거라는 말도 해서는 안됩네다.”라고 당부하고선 국군이 의정부 탈환하는 등 잘 돼 가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전국에 틀어제낀 그 사람은 정말 동일인이란 말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도플갱어와 살았던 게 아닐까. 

“한밤중에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련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 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50년 10월12일)”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를 불신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자신에게 항거하며 일어섰다가 총을 맞은 대학생들 앞에서도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지요.” 하며 눈물을 흘릴만큼 눈물이 흔한 사람이었다. 그 눈물을 닦은 뒤 이승만은 재판도 필요 없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서를 쓰기도 했고 자신의 유력한 도전자를 목매달아 버리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끝내 도플갱어의 한쪽 면을 깨닫지는 못했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믿지는 않았을, 아버지같은 동양 신사를 평생 사랑했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한 세기 가까운 생을 마치고 이화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의 초대 퍼스트 레이디였다.

1943.3.20 빙허 현진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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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3월 20일 현진건 가다 

고등학교 때 국어2를 배우면서 고문(古文)은 그야말로 고문(拷問)이었지만 현대문학은 즐거웠다. 물론 재미지게 읽는 소설 가운데 밑줄 쫙 긋고 은유나 직유냐 주제를 잘 드러내는 시어는 무엇이며 이 작가는 무슨 파에 다른 작품들은 무엇이 있는지 외워야 하는 것이야 역시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미처 접하지 못한 근현대 문학 작품들과 마주하는 일은 수험생이라는 수형생활에 한 자락 비춰진 햇살과 같았다. 그 가운데 인상깊었던 작가는 빙허 현진건이었다. 

그는 ‘사실주의’ 유파로 분류됐던 바, 아니나다를까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듯 그 풍경이 그려져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운수 좋은 날>이었다. 김첨지라 불리우는 인력거 장수가 병든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일하던 중 웬일로 대박을 만나 술을 들이켜고 설렁탕 한 주전자까지 사들고 가는 행운을 잡았지만 집에 들어서서 마주한 것은 아내의 싸늘한 시신과 그 마른 젖을 쪽쪽 빨아대고 있던 아들이었다. 김첨지는 아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앤터니 퀸의 추억의 명화 <길>을 명화극장 시간에 보면서 풍각쟁이 앤터니 퀸이 구박해 마지않던 젤소미나의 죽음을 듣고 무너져 내리던 모습이었달까, 그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는 남편 오는데 안 일어난다고 발로 차 대다가 그예 머리 맡에 주저앉아 눈물 흘리고 마는 빈한한 식민지 백성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어디 그 뿐인가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는 적으니……. 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중략)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로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라고 떠벌이는 <술 권하는 사회> 주인공의 주정은 흡사 술자리에서 지금도 종종 내 목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대구 태생이다. 그 문재(文才)를 비롯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복이 많았지만 처복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부인 이씨는 대구의 부잣집 딸이었다. 연상인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서 처음엔 데면데면했고 그 처갓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불편하게 생활하기도 했지만 현진건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평생 아내만을 사랑한 남자였다. <빈처>에 나오듯 가난 때문에 투정부리는 아내에게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라고 고함을 지르다가도 “왜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근본이야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감동을 먹고서는 “일찍이 장가든 것을 매우 후회하여 어떤 남학생과 어떤 여학생이 서로 연애를 주고받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공연히 가슴이 뛰놀며 부럽기도 하고 비감(悲感)스럽”던 과거를 뉘우치며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라고 질질 짜고 마는 팔불출은 다름아닌 현진건 자신이었고 못난 조선 남편들, 한국 남편들이었던 것이다. 
<술 권하는 사회>를 쓴 작가답게 그는 술 실력이 무지하게 셌다. <벙어리 삼룡이>의 나도향과 월탄 박종화 등등과 어울리면 대포잔으로 60잔 정도는 가볍게 해치우던 그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 직장 남성들 최대의 로망을 단행한다. 점심 시간에 낮술을 벌겋게 먹고 들어온 그는 복도에서 동아일보사 사장(김성수라고도 하고 송진우라고도 한다)과 마주친다. 그런데 이 술 취한 사회부장 사장에게 대뜸 반말을 던졌다. “사장이구만?” 사장을 알아봤으니 인사불성도 아닌데 “허허 취했구만” 하며 너그러이 피하려는 사장에게 코를 갖다 붙인다. “그래 취했다. 네가 사장이라고 술 한 번 받아 줘 봤나? 받아 줘 봤으면 얘기를 해 봐.” 그러면서 우리의 현진건 선생은 기세 좋게 뺨을 올려 부친다. 짜악~~~~~ 이 시대 월급쟁이들 대부분이 평생을 꿈꾸나 평생 동안 해 보지 못하고 죽는 그 로망! 

사장도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 날 “내가 술 안받아줬다니 가세!” 라고 받아넘겼고 아침에 출근해 놓고도 죽이려면 죽여라 빳빳이 고개들고 있던 현진건은 그때가 돼서야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 현진건은 창의문 밖에 집이 있었는데 “술이 취하여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창의문 고개를 넘어오면 그곳의 촌민들은 ‘또 동아일보의 현 선생이 술이 취하여 돌아오는군’하고 이불속에 든 부부들이 대견해하면서 마주 웃었다.”고 한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기자협회보 1968년 4월호 

그 술 실력에 배포에 유수 신문사 사회부장에 거기다 그는 미남이기까지 했다. 그가 떴다 하면 기생들은 그 옆 자리를 쟁취하려고 손톱을 세웠고 그와의 인연을 엮어 보려고 아등바등이었다니 대체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서너 개는 구했지 싶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는 그 앞에 펼쳐진 쾌락의 진창밭에서 거의 독보적일만큼 고고했다. 술은 인사불성 두주불사로 퍼먹으면서도 아무한테 수작 한 번 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폭풍이 들이닥친 것은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였다.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를 살짝 지워 버린 걸 보고 자극받은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이 작당을 해서 손기정 가슴팍의 대문짝만한 일장기를 박박 지워 버렸을 때에도 그는 사회부장이었고, 그 음모를 묵인하고 동조했다. 그 사단을 지켜보면서 현진건은 독립운동하다가 옥에서 죽어간 형과 그 형을 따라 목숨을 끊은 형수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1년을 옥살이하고 “언론계에서 일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풀려나왔던 그는 이후 신문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빈한한 삶을 살았다. 외동딸을 월탄 박종화 가에 들여보낼 때 이미 그는 폐결핵과 기타 병으로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좀체 주례를 안서기로 유명했던 최남선이 주례에 선 이 결혼식이 끝난 지 두 달만에 세상을 뜬다. 그가 마지막에 관심을 쏟았던 것은 역사 분야였다. 총독부의 방해를 받아 끝맺지 못한 그의 역사 소설의 주인공은 백제의 무장 흑치상지였다. 신라와 당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으나 결국은 당에 투항하여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임존성을 함락시켰고 신라 아닌 당에 들어가 당의 장수로 싸우다가 누명을 쓰고 죽어간 흑치상지를 현진건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의 기일을 맞아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작가’ 현진건의 한 마디를 맺음으로 올려 둔다. 그 대에나 지금 대에나 유용한 말인 듯 싶어서.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이나 쉴 일이 아니오,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

2001.3.21 정주영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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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3월 21일 정주영에 대한 단상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지만 어느 골방에서의 토론 와중에 ‘숙청’의 문제가 대두된 바 있었다. “먼 훗날 해방의 그 날에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 하는 어마어마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가사를 서정적인 멜로디에 실어 부르던 시절이었으니 나이 스물 어간의 젊은이들이 객기어린 살생부를 작성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때 지금은 현대 쪽 어디에서 월급 받으며 사는 것으로 아는 한 선배가 말을 이었다. 

“숙청은 적을수록 좋지요. 노태우? 죽여야지. 전두환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정주영은 죽어야지.” 

요즘에사 삼성 제국 건희 황제가 한국 재벌의 태두로 누구나 인정하지만 1987년 삼성 제국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죽은 뒤 한국 재벌의 으뜸은 단연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치기어린 숙청(?)의 리스트 맨 윗단을 장식하는 한국 자본가의 대표였다. 그 숙청 논의(?)가 있은지 2년쯤 뒤 정주영은 막대한 세금을 두드려 맞더니 “돈 없어 세금 못내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때 열심히 데모들 했지만 졸업하고 현대에 취직했던 선배들이 학교에 와설랑 울상을 하면서 통일국민당 입당원서를 보여 주며 모일까지 이걸 채워야 한다며 푸념하던 그 무렵, 정주영을 숙청해야 한다던 선배는 현대에 입사원서를 넣고 있었다. 


지금도 젊기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내 “더 젊었던 날의 초상” 중 일부를 장식했던 정주영의 편린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그렇게 드라마틱했다.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그 역동성에 관한한 다섯 손가락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 통천에서 아버직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했던 소년이었던 그가 어떤 인생 역정을 걸었는지는 굳이 적지 않으려 한다. 나보다 더 잘들 알고 계실 테니까. 그냥 내 추억 속의 정주영만 엮어 보겠다. 


그의 이름이 각인된 것은 아무개 가수와의 스캔들로서였다. 중딩 시절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통통한 인상의 가수가 한동안 뜸했는데 글쎄 그예 정주영의 애를 낳고 왔다는 소문이었다. “진짜가? 그리 이쁘지도 않은데. ” “아 씨바 정주영이는 그런 스따일을 좋아한다 안카나.” 등등에서 시작하여 “정주영 아들들 엄청 많잖아. 그게 다 엄마가 다르다 아이가.”는 위험한 헛소문(?)까지 나도는 가운데 거의 모든 여가수들이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 으레 정주영과 연결됐다. 각자 홍콩에서 미국에서 어디에서 몸 풀고 왔다고. 


워낙 유명해서겠지만 후일 대통령 선거에 나와 관련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굳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위로 변명하지 않았다. 단 좀 그답잖은 쩨쩨한 답변을 하기는 했다. “남들 하는 만큼 바람도 피워 봤습니다.” 그의 이 ‘바람’ 행각은 소설가 백시종의 소설 ‘돈황제’에 적나라하게 문학적으로 승화되지만 그렇다고 그는 7공자니 뭐니 엽색행각으로 아버지 회사 말아먹었던 이들과 같은 차원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자전거 타냐?” 라는 질문에 “그러문요!”라고 대답하여 배달원 직을 따냈던 젊은 날의 정주영의 배짱은 그의 호색 습관만큼이나 평생을 통해 관통했다. 유조선을 가라앉힌 물막이 공사라든가 500원 지폐의 거북선을 보여 주며 외자를 끌어들여 현대중공업을 세운 것이라든가 어떻게든 국산차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일로매진한 것이라든가 “주판알 튕기지 마!”라면서 시멘트 공장의 생산 라인을 통째로 뒤바꿔 경부고속도로 최고의 난공사를 해결한 것이라든가. 과장도 있고 부풀려지기도 했겠으나 그는 분명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 배짱(?)은 기이하게 적용되기도 했다.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요구 중의 하나는 ‘두발 자율화’였다. 애 딸리고 백발도 희끗희끗한 노동자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관리하고 조인트를 까 버리기도 했으며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된다”는 반헌법적인 발상도 서슴지 않았다. 그 배짱의 진폭도 컸다. 결국 출범한 노조를 방문해서는 "이왕 할 거면 현대답게 세계 최고의 노조가 돼라.”는 화끈한 축사를 남긴 몇 달 뒤에는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넣는 폭력배들을 고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가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대던 해에 그는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자신을 창조하고 있었다.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고 돌아왔을 때 당시 통일운동을 주창하던 학생운동 정파는 그 반대파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아야 했다. “임수경이 통일의 꽃이면 정주영은 통일의 할아버지냐?” 그때 차마 대답은 못하고 씩씩거리던 친구들의 얼굴은 지금도 깨소금 대용이거니와, 한 번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보겠노라며 그 인생 최대의 똥배짱을 부렸다가 일생일대의 망신을 당하고 별별 꼴을 다 보고, 또 김동길 같은 이에게는 별별 꼴을 다 보인 이후 그는 대북 사업에 매진한다.


결국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을 현실로 만든 것은 그였다. 저 꼴통스러울만큼 자주적이고 끔찍할만큼 옹골찬 북한을 감동시켜 평양에 그 이름을 딴 체육관을 짓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1998년 6월 16일 그가 간척사업으로 만든 땅에서 기른 소 500마리를 싣고 판문점을 열어젖히고 북쪽으로 향하던 순간일 것이다. 기 소르망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부른 이 장관의 맨 앞에는 정주영이 탄 까만색 다이너스티가 달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사람은 죽을 때 자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데 소떼 앞에서 그의 차창에는 그의 80평생의 순간순간이 슬로우비디오로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명암이 있다. 빛과 그림자가 있고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있다. 그건 적으로 삼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주영을 숙청 대상으로 꼽았던 젊은날의 치기를 후회하고 싶은 맘은 없지만 그저 악한으로만 치부하고 색마로만 비난하고 노동자 옆구리에 식칼 꽂은 자본가로서만 이를 갈았던 데에 그쳤던 (그 자체가 나빴다는 게 아니라) 것은 후회가 된다. 적어도 그는 오늘의 건희제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물론 이러면서도 건희제에게서 배워야 할 점을 외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정주영은 그 허다한 공과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을 우리에게 남긴 이이기도 하다. 그가 인상이 쥐같기도 하고 뱀같기도 한 고려대학교 운동권 하나를 취직시키고 사장까지 시켰던 것을 뜻한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이 세상을 떠났다. 


1992.3.22 어느 육군 중위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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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밤이었다. 준수하게 생긴 육군 중위 한 명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그는 백마부대 즉 9사단 28연대 2대대 6중대 소속 소대장 이지문 중위였다. 9사단은 12년 전 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명령으로 전방에서 탱크를 빼돌려 서울로 진입했던 바로 그 부대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온 이유는 12년 전과 정반대였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부재자 공개 기표, 중간검표 등 군대 내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의 압살을 고발했다. “여당 후보를 지지할 것과 공개 투표를 강요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적잖은 갈등을 느끼고 있고 무엇보다 동료, 선배 장교들에게 돌아갈 불이익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국방부는 경악했다. 아니 운동권 출신의 작대기 두 세 개짜리가 튀어나가서 떠들어댄 것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두 개를 단 육군 중위이자 소대장이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뭐 저런 놈이 장교가 됐지? 저런 운동권이 어떻게 ROTC가 됐어? 그러나 이지문 중위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 동기였던 동아리 선배에 따르면 이지문 중위는 “87년 6월 정도에나 데모를 따라나가 봤을까 그 뒤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고 그냥 수업 잘 들어가던 범생이”였다.

튀지도 않고 나대는 성격도 아니었던, 오히려 내성적이었다는 육군 장교가 어떻게 군대 안의 선거 부정이라는, 당시만 해도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동시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던 치부를 폭로하게 됐을까. 사회평론 길지 (아 이 추억의 이름) 3월호에서 이지문은 이렇게 얘기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저도 설명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앞자리에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술취한 남자 두 사람이 타서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자꾸 치근덕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리를 바꿔주었지요. 그리고 나니 이 술취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까봐 은근히 겁이 나대요. 내가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자리에만 있었으면 아마 가만히 있었어도 됐을 겁니다. 부정선거 고발도 바로 그런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병이라면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탈영이라 나갈 수 없었을 테고, 또 우리 부대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었으면 못했을 텐데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1시간 안에 광화문까지 도달하는 버스가 있었으니까요."

다른 자리에만 있었어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그가 국으로 제대 기다리는 육군 병장 이 병장이었다면 아마 양심선언은 없었을 것이다. 눈 딱 감고 연대장 시키는 대로 1번 찍어 눈앞에 보여 준 뒤 “이 병장 제대 며칠 안남았지? 말년 휴가에 특박 더 끊어 줄까?” 하는 자상한 배려를 받으면 됐을 것이다. 육군 쫄다구 주제에 무슨 민주주의고 나발이냐 말이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충성 명예 단결’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지문 중위로 하여금 과연 이 행위가 누구에 대한 충성이며, 얼마나 그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나아가 이 옹졸한 단결 아닌 담합이 필요한지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역시 단결(?)로 이지문 중위에 맞선다. 전 부대원 수백 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지문 중위는 갖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불명예 제대한다. 입사 전 확정되어 있던 삼성그룹 입사도 당연히 취소된다. 그러나 익명의 제보들은 쏟아져 나왔고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용기들은 군 부재자 투표 제도를 개선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간단한 예 하나만 들면 된다. 우리 군은 70만 대군을 헤아린 반면 5년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0만표 차이로 당선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지문 중위의 직속 상관인 중대장은 육사 출신의 글자 그대로 FM의 군인이었다고 한다.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는. 그는 선거 관련 정신 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나야 했다. 양심선언 후 헌병대에서 마주했을 때 이지문 중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그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서까지 찍혀있으니까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이 멋진 장교는 기자들이 “이지문 중의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입을 떼고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물의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예리하게 바라본 듯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내뱉아야 했다. 이지문 중위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기가 진짜 군인이라면 목을 걸고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옹호해야지, 그게 진짜 군인이지, 비겁하게 거짓말이나 하고 있는 놈이었다고,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라고 중대장 김 대위를 욕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은 한 용감한 젊은 군인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92년 바로 그 선거에서, 지금은 홍싸데기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한때 야당의 맹장이었던 홍사덕의 지역구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흑색 유인물을 뿌리다가 덜미를 잡힌 일도 있었을만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선거판은 개판이었다. 과연 그때 경찰서에서 참담한 표정 짓고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명색 정보기관 요원으로서 홍사덕의 치부(?)를 담은 찌라시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고 싶었을까. 내가 이 짓하려고 안기부 왔나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본업’인 자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20년 전의 얘기를 했다. 하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인 연고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요즘이다. 국가정보원 원장님은 대놓고 선거 개입을 요구했고 나름 좋은 대학 나오고 그래도 엘리트 공무원으로 자부심 충만한 7급 공무원들은 댓글 놀이를 해야 했다. 그 짓을 진심으로 애국이라고 믿는 돌대가리들도 있기야 할 것이다. “여당 지지가 32퍼센트밖에 안되어 북한의 선전재료가 되고 있다.”고 병사들에게 강조한 이지문 중위의 연대장처럼. 하지만 전직 가카의 학교 후배로 알려진 국정원 댓글녀 김씨, 돌돌 만 목도리 위로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던 그녀는 과연 그 일을 좋아서 했을까. 좋아요 댓글 달고 반대 표기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을까. 그 의문 와중에 국정원장, 한 국가의 정보기관장이라는 작자는 그를 보다못해 외부에 누출한 이를 잡고자 눈에 불을 켰고 그를 파면시켰다. 그 비양심도 모자랐는지 도둑 퇴임식을 하고 태평양 건너갈 기획을 하고 있었다. 쥐들도 찍찍거리고 혀를 찰 작자 같으니. 

1992년 3월 22일 양심선언을 했던 이지문 중위는 이렇게 기대를 했다. “(저는 떠나고) 중대장님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우리 소대 사병들은 군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고 각자 사회를 보는 눈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양심적이면 항상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20년 후 오늘, 우리와 우리의 나라는 과연 그 기대에 충실한가.

1964.3.24 6.3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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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4년 3월 24일 6.3의 시작, 3.24 데모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가 저술한 <70년대 캠퍼스>라는 책이 있다. 말이 70년대지 그 이전의 60년대 초반부터 유신 시절까지 그 시대를 통틀어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박정희 정권과 그에 맞서 싸운 학생들의 면면과 사연과 비화들을 편년체와 열전(列傳)체를 섞은 느낌의 구성으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소회 가운데 하나는 데모 따위와는 안드로메다처럼 먼 거리에 있을 듯 여겨지는 인사들의 이름이 뜻밖에도 적잖이 출몰한다는 것이다. “어 이 양반도 이렇게 열심히 데모를 했었어?” 하는 헛웃음이 한 두 번 나오는 게 아니다.

 

5.16 군사 정변을 겪은 후 ‘젊은 사자들’은 잠잠했다. 장준하의 사례에서 보듯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낡은 정치판을 좌악 쓸어 버린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의 호감이 존재했고 박정희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리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쉬울 리가 없지. 사범학교 나와서 소학교 교사 하다가 아니꼽게 노는 일본인 교장에게 술상을 엎어 버리는 호기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큰 칼 차고 돌아오겠다고 만주군에 입대하더니 일본에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혈서까지 썼다는 소문인데 해방 후 돌아와서는 인망 높던 형을 따라 남로당에 입당, 군사 총책까지 됐다가 죽음 직전에서 만주군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고 쿠데타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고 선언한 사람을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운동권 내부에서도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며 5.16은 민족주의 군사혁명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1964년 봄이 오면서 캠퍼스에는 점점 반항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계기는 한일회담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전략상 한국과 일본이 국교도 없이 삐딱하게 지내는 것은 영 마뜩지 않은 일이었다. 이는 1962년 미국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에게 케네디 대통령 알현을 미끼로 내건 조건에서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미국에 오는 길에 도쿄를 들러 이케다 총리와 이야기 좀 하고 오라.” (동아일보 2012.11.5) 그 전에 이미 케네디는 박정희에게 친서를 보내 놓고 있었다.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주시오. 박 장군.” 여기서 케네디는 박정희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는 설도 있다.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그 ‘마법의 탄환’을 맞고 죽은 후에도 미국의 기조는 변함없었고 등을 떠밀린 한국 정부와 아쉬울 것 없는 일본 정부는 결코 결렬할 수 없는 협상을 지루하게 이끌어가야 했다. 그것이 윤곽이 드러났을 때 학생들은 격노했다. 드디어 1964년 3월 24일 3.24 데모가 서울대, 고려대 등 일부 대학에서 벌어진다. 이 3.24 데모를 기획하고 준비한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 그룹 가운데 하나는 경북고 인맥이었다.

 

1960년 2.28 데모를 벌여 4.19의 봉화를 띄웠다는 자부심으로 그득했던 이 대구 사나이들 가운데 법대 학생회장으로 정정길(이명박 정부 대통령실장)을 당선시킨 1등 참모였으며 이후 진용을 나눠 공부를 택해 도서관에 들어갔다가도 데모를 조직할 때에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그 비상한 머리로 작전을 짜던 이가 있었다. 그가 글쎄 박철언이었다.

 

3월 24일 이전에도 시위는 계속 준비되고 있었으나 정권의 감시와 학생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 등으로 계속 무산됐다. 고려대학교에서는 3월 18일 장준하 함석헌 초대 강연을 기화로 시위를 조직하려 했지만 학교측이 이를 눈치를 채 버리고 결사반대하는 통에 무산됐고 연세대는 3월 22일 시위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그러던 중 총학생회실로 한 학생이 뛰어든다. “서울대가 24일날 데모하기로 했다!” 이 중요한 정보를 물고 온 사람의 이름은 최장집. 우리가 아는 그분이었다.

 

3월 24일이 왔다. 지금의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현승일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형성했고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시위 문화 하나를 선보인다. ‘화형식’이었다. 그들은 왕년의 매국노 이완용과 이케다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를 들고 불태웠다. “나라 파는 한일회담 중지하라.” “평화선을 사수하자.”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 차마 내세우지 못했지만 실상 불태우고 싶었던 것은 제2의 이완용이라 불리워도 좋다며 기염을 토하던 김종필이었다.

 

고려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고 (여의도 아님) 연세대학교와 대광고등학교 등도 가세했다.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학생시위대가 광화문 앞까지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6월 3일까지 이어진 한일회담반대시위의 효시였다. 며칠 뒤 이 3.24 시위의 의의를 두고 고려대학생들의 좌담회가 열렸다. 이 좌담회에서 “일본인상사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것들이 하는 재미롭지 못한 것들이 벌써부터 발호하고 있어 일본에 의한 경제적 예속을 극히 우려하는 바입니다.”라고 기염을 토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번 데모의 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정부에 아무런 반응도 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분연히 말해 좌중의 동의를 이끌어낸 상과대 총학생회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명박이었다.

 

꼭 50년 전. 그야말로 다양한 면면, 그 이후 두 배로 다양해지는 면면의 젊음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젊은 피를 무기로 ‘구악’을 몰아내겠다면서 구악 뺨치는 ‘신악’을 창조하던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저들의 인생 역정과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일치시킬 수도 없고 대입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꼭 반 세기 전 ‘젊은 그들’을 추억하면서 얼굴에는 실없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웃음이 얼굴을 채운다. 그래 그들도 그럴 때가 있었구나. 그들 또한 역사의 일부분이었고 우리는 그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 하기사 얼마전 경기도지사 촬영을 다녀온 후배는 자기가 찍은 김문수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극렬한 빨갱이였으며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만큼 부지런한 혁명가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았으렸다. 그렇게 역사는 호수가 아니라 강이다. 흘러간다. 같아 보이지만 항상 다른 모습으로


1911.3.25 트라이앵글 화재와 퍼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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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1년 3월 25일 트라이앵글 공장의 비극, 그리고 퍼킨스

 

원래는 네덜란드인이 세운 뉴 암스테르담이었고 영국인들이 점거한 뒤에는 새로운 요크(York)가 된 뉴욕은 미국이라는 용광로를 채운 수많은 이민들이 그 두려운. 또는 설레는 발들을 디디던 항구였다. 인종전시장으로서의 뉴욕의 역사는 그대로 미‘합중국’의 역사다. 타이타닉 호가 향하던 항구도 뉴욕이었고 영화 <대부>에서 비토 콜레오네가 미국에 입성한 곳도 뉴욕이었다. 뉴욕 중심가의 마천루부터 뒷골목의 쓰레기장까지 층층시하 빈부격차가 드리워진 가운데 맨 바닥은 당연히 초보 이민자들이었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와지고 “기회의 땅”에서 기회를 얻기 위해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일해야 했다. 그 가운데에는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의 의류 공장도 있었다.

 

1911년 3월 25일 뉴욕 최대의 섬유공장이었던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사에서 불길이 솟았다. 공장은 고층 건물의 7층에서 9층까지를 쓰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화재 발생조차 뒤늦게 알았거니와 그들은 불만큼이나 끔찍한 공포에 맞닥뜨린다. 출입구가 잠겨 있었던 것이다. “손버릇 나쁜” 노동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기업주가 문을 잠갔던 결과였다. 소방차의 소방 호스는 6층 이상 물을 뿜을 수 없었고 출구가 없는 불구덩이의 지옥도가 트라이앵글 공장에 펼쳐졌다. 불이 무서운 사람들은 창문으로 몸을 던졌고 몸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운 이들은 불길 속에서 속절없이 타죽거나 질식해 죽어갔다.

 

그들은 대부분 이민자들이었다. 얼마든지 싸게 부릴 수 있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의 홍수 속에서 기업주들은 배짱을 튕겼고 오만을 부렸고 인간을 팽개쳤다. 열 세 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살인적인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장은 얘기할 거리도 못됐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번번이 짓밟혔다. 그리고 1911년 3월 25일 뉴욕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잃어야 했다. 창문에 두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도 두려웠지만 바닥도 쳐다보기 싫은 소녀들은 눈을 감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누구나 짐작할 기도를 시작했다. 살려 주소서. 살려 주소서. 하지만 데려 가시려거든 고통없이 데려가소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슬픔과 무력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 가운데 프란시스 퍼킨스라는 여성도 있었다. 뉴욕 소비자연맹의 사무총장이었던 그녀는 여성 및 소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탄하며 노동조건 개선 운동을 벌여 왔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녀는 즉시 직업안전법 투쟁에 뛰어든다. 일찍이 빈민들을 도와 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 험악한 갱단 두목 목전에 뛰어들었던 그녀에게 불타는 건물 창 안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하던 열 네 살의 두 소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화인(火印)과도 같았다. 그녀는 탐욕을 포기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설득하고 노동자들을 깨우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여성 근로자의 작업 시간을 주 54시간으로 제한하자는 운동을 벌일 즈음 (우리나라 기업가들 이거 보고 또 한국 사람 일 안한다고 개탄할라) 만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녀를 눈여겨 보았고 1932년 그녀를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각료로 임명한다. 노동자들 편만 드는 장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업주들과 “여자는 조언을 하는 존재이지만 그로부터 명령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평생 애정을 쏟은 노동자들조차 어딜 여자가~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 반대를 타고넘으며 12년간 장수했다. 굽힐 건 굽히고 지킬 건 지키면서.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서 그녀는 굳이 튀려 하지 않았다. 장관석에 앉지 않고 장관 부인석을 찾아 앉았다. 구태여 득시글거리는 ‘마초’들에게 본질적이지 않은 싸움의 구실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 12년간 그녀는 “아동노동제한, 주당 40시간 노동시간제, 고용보험, 최저임금제, 30%에 달하는 노조가입률” 등 지금은 상식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꿈 같았던 성과들을 이룩해 낸다.

 

노동 분야에서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후일 미국이 야만적 행위임을 사과했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집단 수용을 반대한 각료가 그녀였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백한 노조 지도자를 추방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녀는 이로 인해 탄핵의 위기를 맞는다.) 2차대전 기간 중 모든 미국인들은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는 법령을 반대하여 루스벨트로 하여금 이를 포기하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2005.3.14 Scinece Times, 김형근 객원위원)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12년 동안 노동부 장관직을 지켰고 (그녀를 알아본 루즈벨트도 대단한 사람이다.) 적어도 1932년 이전의 노동과 1945년 이후의 노동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를 평생 한 길로 가게 만들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1911년 3월 25일의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는 가장 굵직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속절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뉴욕 시민들은, 미국인들은 잠자던 그들의 양심을 깨워야 했고 퍼킨스는 그 양심에 호소하고 기업주의 탐욕에 맞서면서 새로운 상식을 세워 나갔던 것이다. 미국이 참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나라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가진 힘 가운데 하나는 그 거대한 압박의 무게, 지구를 지배하는 힘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저항하는 미약한 빛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국에는 그 빛들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최소한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할 줄 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도 전자의 미덕은 많았다. 그러나 후자는 어떠한가.

 

우리나라 최고의 공장이라 할 삼성그룹의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이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희한한 ‘유전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수십 명이 이미 죽었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죽음들 앞에서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묻는 질문보다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는 외면이 더 만연하고 창가에서 기도를 올리며 죽어가던 소녀들을 보며 발을 구르던 미국 시민들의 분노는 “그래도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해.” 하는 야무진 착각 앞에서 무력하다. 프랜시스 퍼킨스가 다시 살아나 한국에 온다면 아마도 그녀는 한국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요? 어떻게 당신들은 이럴 수가 있지요?” 그 대답으로 뒤늦게나마 이 영화에 보탠다. 전에도 시도했지만 뭐 복잡해서 안했는데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어졌다. http://www.anotherfam.com/index.php.


1983.3.26 짱구 세계 챔프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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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3월 26일 짱구 챔피언 되다 

왕년에 복싱 좀 본 분만 보시오... 아니면 재미없음 



한국 프로복싱에서 마의 숫자가 두 개가 있었다. 하나가 3이고 하나가 6이었다. 초대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3차방어전에서 무너진 이후 홍수환이며 유제두며 염동균이며 챔피언에 오른 이들은 줄을 이었지만 아무도 3차 방어전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수환이야 한국 프로복싱사에서 길이 남을 테크니션이고 유제두는 동양 타이틀을 20차를 넘게 방어한 불세출의 철권이었지만 세계 타이틀은 거머쥐기가 무섭게들 풀어야 했다. 그 벽을 깬 것은 재주라고는 맞는 재주 밖에 없다는 혹평을 들었던 소매치기 출신의 복서 김성준이었다. 그는 졸전 끝에 2차 방어를 마치고 3차 방어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열전으로 3차 방어를 해 냈다. 하지만 4차에서 그의 타이틀은 끝났다.

그 뒤 박찬희와 김철호 등의 복서가 4차방어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6차 방어전에서 무너졌다. 그것이 한국 복서의 한계다 싶었다. 일본의 구시켄 요코가 13차 방어를 성공하는 모습을 부러워할 뿐이었고 10차 방어전이다 15차 방어전이다 하는 것은 허영만의 만화 무당거미에서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롱런을 이룩한 첫 챔피언이 1983년 3월 26일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장정구였다. 

장정구는 그 전 해 메뚜기같이 툭툭 튀어나니던 키 큰 왼손잡이 파나마의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근소하게 졌다. 그만하면 선전이었다. 아마튜어 시절 일본의 전설이라는 구시켄 요코를 아작냈던 실력파 복서 김치복이 사파타에게 도전했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승리를 헌납했던 것에 비추어도 그랬다. 하지만 이 패배는 장정구에게 명약이 된다. 장정구는 오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패배를 복기했고 왜 졌는지를 철저하게 곱씹었다. 

“사파타전의 패배 덕에 상대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15차 방어를 이루어내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사람들은 흔히 패배를 자신의 책임보다는 상대의 강함이나 악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패배를 아파하되 잊어버리려 애쓴다. 하지만 장정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패배만한 명약은 없다. 장정구는 사파타와 재대결을 가졌고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끝에 19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다. 

이후 그는 15차 방어전이라는, 그때까지의 한국 복서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특히 그의 주먹이 불을 뿜었던 것은 일본 복서들에게였다. 한국의 세계 챔피언 김환진을 무너뜨린 도까시키 가쓰오를 곤죽으로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일본 도전자 가운데 경기 종료 공 소리를 들은 것은 단 한 명이었다. 장정구 자신 일본 선수를 만나면 전의가 솟았다고 하거니와 장정구의 전성기 시절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태 이후 독립기념관 건립까지 이어지던 시절과 묘하게 일치한다. 

장정구의 전적은 화려하다. KO승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치른 마흔 두 번의 경기 중 세계 챔피언 출신의 선수들과 치른 경기만 열 일곱 번이었다. “김치 먹는 족속이 고기 먹는 족속 이기냐?”는 열등감이 일상이던 시절, 상대의 이름값 앞에서 지레 주눅들던 때 장정구는 누구를 만나도 거침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장정구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변화무쌍이었다. 뭔가 통하지 않으면 즉각 다른 패턴으로 돌았고 또 한 번 잘 통했다고 그 공격을 되풀이하지도 않았다. 장정구의 스타일은 있었지만 그 스타일은 매 경기마다 다르게 발현됐다. 그래서 그의 경기는 재미있었다. 스트레이트 하나는 국보급이었지만 그 국보밖에 칠 줄 몰랐던 최충일과 달랐고, 아론 프라이어 (주니어 웰터급의 역대 최강자로서 장정구와 비슷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앞에서 눈도 못 맞췄던 김상현과 달랐으며 만용을 부리며 다가서다가 페더급의 강자였던 페드로사에게 아작났던 김사왕과도 달랐고 화려한 테크니션이었지만 정직하기 이를데없던 박찬희와도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어떤 변칙도 기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장정구는 한국 복서 가운데 가장 어퍼컷을 잘 치던 선수였다. 

그의 최후는 드라마틱했다. 15차 방어를 마친 후 은퇴와 컴백을 번복하면서 그는 또 한 번 챔프에 도전한다. 1991년, 그가 최초로 챔프가 된 뒤 8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이 경기를 선연히 기억한다. 장정구는 강타자였던 태국 선수를 착실히 공격했고 세 번이나 다운을 빼앗는 등 챔피언을 목전에 둔다. 


그런데 마지막 12회. 그는 그 유리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다가 그만 카운터를 얻어맞고 거짓말같이 패배하고 만다. 그건 잘못된 정보 탓이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다운을 빼앗았는데 채점 결과가 동점이라는 정보가 전해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장정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섰다가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그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한다. 캔버스에 나뒹구는 장정구를 보며 얼마나 황망했던지. 

가끔 그의 복싱을 추억한다. 도까시키 가쓰오를 때리다가 때리다가 지쳐가던 중 레프리가 무방비로 두들겨 맞는 도까시키에게 KO패를 선언했을 때 캔버스에 엎드려 버린 것은 장정구였다. 그는 패자보다 탈진할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승자였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킬 줄 알던 복서였다. 1983년 3월 26일 장정구가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1924.3.27 사람다운 사람들은 암태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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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4년 3월 27일 사람다운 사람은 암태에 산다.

 

요즘 노래에 자주 나오는 여수 앞바다도 그렇지만 목포 앞바다도 다도해다. 하늘에서 한반도를 그리고 붓을 휘두를 때 떨어진 먹방울같은 섬들이 바다에 가득이다. 그 가운데 암태도라는 섬이 있다. 목포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섬인데 토지가 비옥하여 인구가 한때 1만을 넘었다는 섬이며, 한때 “사람다운 사람은 다 암태에 산다.”는 말이 돌만큼 섬 사람들의 ‘사람됨’을 인정받았던 특이한 이력의 섬이기도 하다. 그럼 사람다운 사람은 암태에 산다는 말은 왜 나왔을까.

 

그것은 1923년부터 1924년 어간,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유래한다.

그즈음 이 섬의 지주들 가운데 실력자는 문재철이라는 이였다. 그는 약 140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로서 많은 농민들이 그 소작을 부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라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강원도 철원과 충청도 당진에도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글자 그대로의 대지주였던 그는 무려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했고 이 터무니가 없는 착취에 진저리가 난 농민들은 점차 고개를 들고 주먹을 쥐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중심에 선 사람이 서태석이라는 이였다. 그는 20대의 이른 나이에 8년 동안이나 암태면장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일제에 고분고분한 ‘면서기’가 아니었다.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감옥에 간 것이다.

 

1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그의 머리는 더욱 불온(?)해졌다. 민족 의식에다가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까지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향 암태는 지주와 마름의 횡포 하에 온 섬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자작농 집안이었지만 기꺼이 소작농들의 지도자가 된다.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하여 외모부터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섬이나 지리산 피아골 같은 데는 더러 엉뚱하게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장골들의 후예(민중봉기의 주모자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주모자 서태석도 그런 사람의 후손이다." (송기숙,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중)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과 1리 이상의 소작료 운반 비용은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구했다. ‘아랫것들’의 요구가 순순히 받아들여진 적은 인류 역사에 없다. 소작료 반을 잘라먹겠다니 세상에 이런 불상놈들이 있는가 지주들은 눈을 부릅떴고 소작회원들은 추수를 거부한다. 이때 문재철을 비롯한 지주들이 한 행동은 요즘에도 흔히 보는 것들이다. 밤중에 찾아가 소작농들을 협박한다든가 “다 지주으른 말 듣는다고 했는디 자네만 왜 그렁가?” 식으로 얼르면서 배 치고 등 쓰다듬는 식. 또 역시 항상 그렇지만 관헌들도 있는 사람 편이었다. 목포 경찰서는 경찰들을 대거 암태도에 상륙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던 중 1924년 3월 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가 열린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소작인들은 뭉쳐 일어섰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서태석이었다. 동학군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선대의 한을 품고 암태로 들어왔고 형제들이 한 섬에 모여 살지도 못하고 각각 다른 섬에 거주했던 남모를 사연을 지닌 서태석은 소작인의 단결을 목청껏 외치며 지주들의 횡포와 수탈을 고발했다. 면민들은 ‘아싸리하게’ 뜻을 모았고 암태도는 지주와 소작의 정면 충돌로 불을 뿜게 된다. “분쟁이 생기면 소작료를 내지 않고 파작해 버립시다! 결의를 어기는 사람하고는 모든 것을 끊어 버리자구요!  그 와중에 지주 문재철의 부친의 덕을 기린다는 송덕비를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소작민들과 문씨측 청년들이 충돌, 일제 관헌이 개입한다. 소작인 50여명이 체포됐고 그 가운데 13명이 목포로 끌려가 투옥된 것이다.

 

이에 전 섬이 들고 일어났다. 청년회고 부인회고 할 것 없이 천 명이 넘는 섬 사람들이 섬을 떠나 뭍으로 나와 ‘아사동맹’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불렀다는 소작인의 노래.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뼈빠지게 일하여도 살수가 없거든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도민들은 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법정 안에서 또는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죽자는 결의였다. 남녀노소가 정말로 밥 한 술 넘기지 않고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 삼아” 버텼다.

 

 

일제 경찰도 혼비백산했고 암태도민들의 의로운 투쟁에 전국이 들썩였다. 김병로를 위시한 시국 사건 전문 변호사들이 다투어 변호를 자청했고 경남 고성부터 해외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 급기야 일본 경찰이 부랴부랴 중재에 나서 문재철과 소작회는 다음과 같은 합의에 서명하게 된다, “소작료는 4할로 인하하고, 구속자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 소작인들의 승리였다.

 

서태석은 이후 조선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며 1930년대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렸다. 심신 모두가 피폐해 버린 그는 암태도의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며 누이가 살던 다른 섬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소변도 요강으로 받아 동네 꼬마에게 내가게 하는 지경이었다니 그 참담함이야 오죽했을까. 그가 1928년 경 지었던 시처럼 “울어볼까 웃어 볼까.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앞에는 더 큰 산이요 물을 건너도 또 건너도 앞에는 더 큰 물이다. 이 산 이 물 또 산 또 물이 있으리니 갈까보나 말까보다 험한 산 물길을. 진리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응당 있는 줄 알지마는 피곤한 팔다리 더 가 줄 바이 없다.” 같은 심경이었겠지. 그러나 그는 또 이렇게 이어 부르며 그의 파란 많은 인생을 돌아봤으리라.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 보자. 무쇠팔뚝 돌 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넣어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 다 없어질 때까지. ” (장안대학교 박천우 교수의 ‘100년 편지’ 중 )

 

 

1943년 광복을 두 해 앞둔 어느 날, 그는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환갑을 한 해 앞둔 쉰 아홉. 소작료 인하를 부르짖으며 소작농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해서일까. 벼 포기를 굳게 움켜쥔 채였다. 그의 조선공산당 행적 때문에 일제 때는 물론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가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고 현충원에 몸을 누이게 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꼭 60년 되던 해, 2003년이었다. 이제야 그는 움켜 쥔 벼 포기를 놓고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을까. 1924년 3월 27일 그의 ‘무쇠 팔뚝 돌팔뚝’이 암태도민들을 떨쳐 일어나게 했다



1969.3.28 아이젠하워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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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9년 3월 28일 아이젠하워 별세

 

어렸을 적 들었던 잡다한 유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죽으면서 한 말은? “아 이젠 hour(시간)가 없구나.” ‘아 이젠 하워’를 빗댄 유머였다. 그 아이젠하워,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육군 원수. 2차대전 때 나찌 독일을 굴복시킨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1969년 3월 28일 표표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군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즐겨 비교된다. 맥아더는 미 육군 사관학교를 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아이젠하워는 61등에 그쳤다. 맥아더는 승승장구하여 최연소 장성이 되고 육군 원수까지 줄달음쳐 올라갔지만 아이젠하워는 그의 동기들 가운데에서 늦게 소령을 단 편이었고 맥아더의 부관으로도 근무했다. 나중에는 별 다섯 개를 함께 단 처지였지만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경로의 차이는 그렇게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차이는 바로 그 둘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무척이나 오만하고 자존심이 센, 귀족적 성향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서 그는 흡사 왕같은 호사를 누렸고 그런 문화에 익숙했다. 고집이 셌고 일단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대통령의 말조차 그 의 귀에는 좀 큰 새가 파닥거리는 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놀라운 군사적 성공도 거두었지만 황망한 전략적 실수도 못지않게 범한다. 그 오만함을 꿰뚫어 본 사람 중의 하나가 모택동이었다. 모택동은 “맥아더의 오만함에 감사한다. 우리는 그가 오만하면 오만할수록 승리를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럼 아이젠하워는 어땠을까. 어떤 사람이 점심은 맥아더와 저녁은 아이젠하워와 함게 나누는 행운을 누린 일이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맥아더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알았다. 그런데 아이젠하워랑 저녁을 먹으면서는 내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알았다.”

 

아이젠하워의 진가는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으로서보다는 온화한 중재자로서 더 빛났다. 고집불통의 ‘패튼 대전차군단’의 지휘관 패튼, 그에 한 치도 뒤지지 않는 무뚝뚝한 영국인 몽고메리, 패망한 나라의 망명정부 수반인 처지에 자존심 하나는 대기권에서 놀았던 프랑스인 드골 등을 두루두루 어루만지고 조율하고 때로는 아우르면서 자칫하면 삐거덕거리다 못해 덜컹거렸던 연합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유연하게 지켜냈다. 저녁을 함께 한 사람의 기분을 맞춰 주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한 겸손함과 친화력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다.

 

하나 더 그에게 중요한 미덕이 있었다면 그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하고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그를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의 보유자였다. 유럽에서 나찌 독일이 항복했을 때 아이젠하워의 참모들은 종전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근사하고 멋지게 남길까 고민했고 여러 안들을 사령관들에게 올렸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그저 사실만 간결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로 그 모두를 일축한다. "연합군의 임무는 1945년5월7일 현지 시각 02시41분부로 완료되었다." (정진홍 저,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중)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 전쟁을 일단 끝낸 것도 그였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아시아인의 전쟁은 아시아인의 손으로”의 원칙 하에 한국 전쟁을 끝맺고 한국군을 증강시킨 후 미군은 철수시킨다는 복안을 세웠다. 북진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심지어 자신을 겁쟁이로까지 몰아붙이는 신생 독립국의 완고한 대통령은 적당히 무시했고 그가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에 들렀을 때는 환영식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경무대에 들르지도 않았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의 39도선 북진 주장도 물리쳤다. 그는 한국전을 휴전으로 끝맺겠다는 명료한 결심을 하고 있었고 그를 차근차근 실행에 옮긴다. 한국 현대사는 그렇게 형성된 구도를 따라 60년을 흘러오게 된다. (휴전, 한미상호방위조약 등)

 

 하지만 그의 기일을 맞아 가장 인상 깊게 떠오르는 것은 1961년 그의 퇴임 연설이다. 영화 JFK의 프롤로그에도 등장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의 퇴임 연설은 항상 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찔렀던 그의 일처리 방식과 닮아 있다. 그리고 50년 전이 아니라 마치 지금 의 누군가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저 한 번 읽어 보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밤 저는 국민 여러분께 작별의 인사말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4번이라 큰 전란이 일어났던 지난 반세기 이후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중 3번의 전쟁에는 미국도 개입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방대한 규모의 방위산업체를 설립, 유지해야 했습니다. 350만 명의 미국인들이 직접적으로 군사기관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군사적 안보에 미국 기업 전체의 순익보다 많은 비용을 쓰고 있습니다....... (중략)

 

이러한 거대 군사기관과 거대방위산업체 간의 결합은 이제까지의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현상으로 부득이하게 생성된 것임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산복합체에 내포돼 있는 숨은 의미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것이 경제와 정치, 정신적인 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모든 도시와 주 의회, 연방정부기관을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정부는 군산복합체가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 잘못된 권력으로 발생할 재앙의 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 상존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겁니다. (중략)

 

앞으로 쓰여질 기나긴 역사를 따라 미국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이 우리의 세상이 가공할 공포와 증오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피하고, 그 대신 상호 신뢰와 존중의 자랑스런 연합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 가장 약한 자도 우리 (미국과)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평화를 위한) 회의 탁자로 와야 하며 우리처럼 우리의 도덕, 경제, 그리고 군사력에 의해 보호 받아야 합니다. 그 탁자는 과거 많은 좌절로 상처투성이가 돼 있지만 전장(戰場)의 고뇌 때문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군축은 상호 존중과 신뢰로, 계속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성스럽고 고상한 목적을 지니고 의견의 차이를 조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전쟁의 공포와 그에 따르는 슬픔을 목격했던 사람으로서,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공들여 건설된 오늘의 문명이, 전쟁 재발시 모두 다 파괴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 밤 지속적인 평화가 우리 앞에 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행히도 나는 전쟁을 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꾸준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 민간인으로서, 나는 세계가 그 길을 따라 전진하도록 돕는데 아무리 미약한 일이라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이 퇴임연설을 다시 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1927.3.29 월남 이상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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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7년 3월 29일 월남 이상재

 

한국 위인전을 들여다보면 거개가 엄숙하고 근엄하고 비장하고 열렬하며 진지하고 결의에 찬 사람 투성이다. 위인전 속의 위인들이 실실거리고 농담하고 객쩍은 소리로 사람들 웃기는 풍경은 거의 읽은 적이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유머 감각이 떨어지는 탓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왜 그럴까. 그건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선 이가 그렇게 실없는 소리 하고 놀라치면 대번에 ‘체통 생각하세요.’가 날아오고 ‘아랫 사람’이 아니라 ‘윗분’이 넥타이 풀어 머리띠 매고 노래방에서 사람들 웃기면 점잖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 기이한 문화 탓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하도 나이 답지 않게 젊은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다 보니 주위에서 “체통 지키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 그럼 내가 청년이 돼야지 애들더러 노인 되라고 하랴?” 라고 시원스레 눙친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월남 이상재다.

 

이상재는 1850년 생이다. 그러니까 병자수호조약으로 나라의 문이 열릴 때 이미 스물 일곱의 장년(당시 기준으로는)이었고 그 후 격동의 구한말의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이었다. 우선 ‘보빙사’로서 미국을 최초로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 아더 체스터에게 날아갈 듯한 큰절을 올렸던 조선인 중의 하나가 그였다. 그의 공식 복장은 여전히 사모관대 차림이었다. 이 희한한 외양의 동양인을 신기해 한 미국 악동들이 짖궂게 굴다가 돌을 던지는 등 심하게 장난을 쳤다. 이에 호위 경찰관이 한 명의 덜미를 잡아 유치장에 처넣었는데 다음날 뜻밖에도 사모관대 차림의 이상재가 나타나 말한다. “애들이 장난 친 거 가지고 이러는 거 조선 공사관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냥 호인도 아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의 호감을 지니고 있던 고종이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찌 생각하더냐를 물었을 때 월남은 이렇게 대답하여 고종의 심기를 뒤틀어놓는다. “전하께서 선정을 베푸시면 호의를 가질 것 같사온데 그렇지 않으시면 있는 호의도 거둘 거 같더이다.” 아마도 고종은 평생 이런 식의 “너 하기 나름이야”는 처음 들어 봤을 것이다. 또 고종의 면전에서 고종에게 올라온 온갖 청탁 서류 등을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우냐!” 일갈하며 몽땅 화롯불에 던져 넣었다는데 고종이 충신이라며 좋아했다는 얘기가 정설이지만 실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뒤 이상재가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헌의 6조를 앞장서 제출하는 등 비위에 거스르자 감옥에 가둬 버리는 것이다. 곤장 40대는 덤이었다. 그런데 이 감옥살이 중에 이상재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감방 동기가 이승만이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들어서고 을사늑약으로 민영환이 자결하고 자신의 선배였던 박정양도 분을 못이겨 세상을 떠나자 이상재도 자결로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한다. 그때 그를 뜯어말린 것이 YMCA 총무 질레트 (한국에 야구와 농구를 들여온 선교사)였다. 이후 그는 색다른 방식의 민족운동에 나선다. “구국 운동의 주체로 청년 학생을, 방법으로는 국제적 종교 사회운동을,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적 보편주의와 평화주의를 선택했다.” (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어딜 가나 그는 허물없는 농담과 거침없는 유머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일본군 사령관이 감기로 고생한다고 하자 “그놈의 감기는 대포로 쏘아잡지 못하나?” 라고 쏘아부쳐 머쓱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일화 축에 들지도 못한다. 강연장에 순사가 그득 들어와 있는 걸 보고는 “때 아닌 개나리 (개 + (순경) 나리)꽃이 활짝 피었군.”이라며 눙쳐서 좌중을 발딱 뒤집기도 했고, 이완용 송병준 등을 만나서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선수들이니 일본으로 이사를 가시오.”해서 얼굴을 흙빛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수주 변영로도 어릴 적 이상재에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 영민한 소년에게 이상재는 그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놀렸다. “변정상씨 변정상씨!” 단단히 화가 난 변영로 “노망이라도 나셨습니까?” 대드니 “그럼 니가 변정상의 씨지 다른 놈의 씨냐?” 하며 껄껄 웃어 변영로의 입을 막았던 것이다.

 

이상재는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폭동이 날 수도 있다.”면서 서명을 사양하는 이상재에게 한용운은 평생 절교를 선언했거니와 이상재가 죽었을 때 한용운은 그 장례위원이 되는 것조차 사절했다. 이런 예로 그의 인생은 “평생 소나기를 피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는 평이 있기도 했다. 즉 비타협적인 무력 투쟁보다는 체제 안에서 청년들의 기개를 살리고 그 교육에 힘쓰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자치론같은 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향할 때에도 이상재는 그의 영역 안에서 일제에 눈을 내리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에서 신채호같은 비타협적 무장 투쟁론자까지 함께 하는 조직 신간회가 이미 병석에 누워 있던 그를 대표로 뽑을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1운동에 민족 대표로서 참여를 거절했으나 그는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된다. 거기서 그는 서슬 푸른 일본 검사 앞에 손바닥을 내민다. “한 번 손바닥 한 번 붙여 보우” 검사가 긴가민가 하며 손바닥을 대자 이상재는 냉큼 손을 거두면서 일갈한다. “봐요 억지로 붙인 건 떨어지게 마련이라니까. 한국 일본도 그래.” 조선일보사 사장을 오래 역임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빚밖에 없었다. 누군가 땔감이나 하라고 두둑히 내민 봉투를, 바로 다음에 온 고학생이 빈곤을 호소하자 냉큼 봉투째 들려 보내고는 “그러시면 어떡합니까?”라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형편이 아는 놈이 또 갖다 주겠지?” 하며 송아지 눈을 떠서 끝내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던 인정많고 능청스럽고 인간미 넘치는 노인의 전 재산은 쌀 27가마 분의 빚이었다.

 

1927년 3월 29일 “일제 시대 최대의 사회 단체, 좌우합작단체 신간회” 회장 이상재가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53.3.30 고호가 빛을 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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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53년 3월 30일 고호가 빛을 본 날

 

1987년 3월 30일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 한 부유한 여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한 점이 등장했다. 미술애호가들은 물론 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됐다. 그것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의 주인공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였던 것이다. “쟈넹에게 작약 그림이 있고, 코스트에게 접시꽃 그림이 있다면, 나에겐 해바라기가 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상을 나타내는 태양에의, 또 생명에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듯하다.“고 열렬히 해바라기 찬가를 불렀던 고흐의 해바라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탐스럽다고 할 열 네 송이의 해바라기가 다시 세상에 나와 자신의 값어치를 평가할 것을 요구했으니 관심이 쏠릴 밖에.

 

낙찰을 받은 이는 일본의 야스다 화재해상손해보험사였다. 낙찰가는 무려 3천9백만 달러. 아마 고흐가 보석에서 짜낸 물감으로 그렸어도 그 가격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후 고흐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일본인들이 싹쓸이하게 되는데 (고흐 말년에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은 더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렸다) 이를 일본인들의 짝사랑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고흐 역시 일본의 화풍을 열렬히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강렬한 색채는 일본 판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고 그가 남긴 자화상 가운데 어떤 작품에는 그 배경에 삐죽이 솟아오른 후지산이 있기도 하다. 사후에는 수천만 달러에 팔릴 지언정 생전에는 수십 프랑도 제대로 벌지 못했던 가난한 화가 처지에 일본 판화는 수백점을 수집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쨌건 야스다 보험사는 고흐에게 크나큰 생일 선물을 준 셈이다. 그 경매가 이뤄지던 날은 고흐의 생일이었고 그로부터 134년 전인 1853년 3월 30일 고흐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흐가 첫 아이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고흐보다 먼저 가졌던 아이를 사산했고 고흐도 그렇게 온전하게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춘기 때 그린 자화상을 보면 두상의 좌우대칭이 어긋나 있는데 이는 출산 당시에 모종의 충격을 받은 흔적이라고 한다. 그 뒤 고흐의 평생을 지배한 과도한 집착과 열정, 그리고 조울도 그렇게 생겨난 것일까.

 

그는 요즘 말로 하면 현실 부적응자였다. 그림 파는 가게 점원이 그림을 사러 온 손님의 예술관을 성토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사라고 강요한다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이고 설사 내가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이해한다고 해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악을 쓸 것이다. 본격적인 화가 (그의 대부분 작품은 최후 10년에 주로 걸쳐져 있다)에 나서기 전 그는 종교에 빠져 전도사 노릇도 한 적이 있었다. 노릇을 한 게 아니라 그것은 그의 필생의 꿈이었다.

 

벨기에의 어느 탄광촌에서 임시직 전도사가 된 그는 그야말로 어부와 세리와 창녀들의 빛이 된 예수처럼 일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광부들은 일요일이 되면 쓰러져 잠들어 교회에 올 처지도 못됐다. 거기서 무슨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랴. 고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 “네 소유를 모두 남에게 나눠 주고” 탄광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설교하며 부대꼈다.

 

그런데 이런 전도사를 달갑잖아 하는 것은 그쪽 개독교나 이쪽 개독교나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임시직’ 전도사 딱지를 떼지 못하고 탈락한다. “설교도 못하고 전도사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광부들처럼 굴었다.”는 이유였다. 고흐는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을 경험한다. “전도사직을 잃었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를 부르짖으며 그는 한탄한다. 바로 그 순간 하늘 위의 하느님은 가슴을 치면서 “내가 널 그거 하라고 보낸 게 아니란 말이다.” 라고 구름 위를 뛰고 계셨으리라.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비참함의 극단이 파놓았던 탄광 속, 그리고 광부들의 삶 속에서 체득한 경험과 기억은 이 천재 예술가의 혼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겨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최고라고 치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두고 남긴 그의 코멘트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일용할 양식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를 비롯해서 <올리버 트위스트>의 디킨스, <레미제라블>의 위고 등등의 책을 탐독했고 책들에서 묘사된 가난한 이들, 착취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을 수시로 표시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광부들이 하얀 눈을 배경으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지. 사람들이 지상으로 나올 때면 어찌나 새카만지 꼭 굴뚝 청소부처럼 보인단다. 그네들이 사는 집은 숲이나 언덕에 흩어져 있고 오두막이 대부분이야. 광부와 직조공들이 나는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에 알려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아니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사람들을 그림으로 보여줄 작정이야.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참 행복할 거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렇게 외로왔던 것도 ‘예쁘게 더 예쁘게’ 일변도이던 당시의 화풍과 동떨어졌던 이유도 있다고 한다. (이건 미술사 시간에 주워들은 얘기)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고 한 것이나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라는 편지에서 나는 고흐가 왜 위대한 화가인지를 알게 된다.

 

“친구가 되는 것, 형제가 되는 것, 그래, 사랑이야말로 감옥을 여는 열쇠이다.”라고 갈파했던 이 불운한 열정의 화가,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동생에게 허풍스런(?) 결연함을 보였던 가난한 화가, “나 때문에 네가 가난해졌겠다. 네 돈은 꼭 갚으마. 안되면 영혼이라도 주마.”라고 토로하던 가련한 형이 1853년 3월 30일 세상에 왔고, 그로부터 134년 뒤 또 한 번 찬연하게 빛을 발했다. 그 달러의 빛을 고흐 자신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겠지만.


2001년 3월 31일 영화 그리고 실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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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3월 31일 영화 <친구> 그리고 실제 <친구>

 

우리 아들 얘기로 “아빠는 공부만 했던 범생이였을 것 같다.”고 하는데 범생이의 속뜻은 ‘공부만 했던 찌질이’일 것이다. 임마 내가 공부만 했으면 하버드를 갔지 얘기하면서 부인하고 싶지만 기실 나는 놀 줄 모르고 일탈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범생이였다. 야간 자율학습 때 창문을 넘어 도망간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나가서 놀다가 들어온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른바 논다는 아이들의 세계는 실로 별세계였다.

 

하물며 ‘물레’와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학교 내의 양대 폭력 서클과는 인연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 번 학교 뒷산에서 엄청난 규모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는 것도 그 일원이랍시고 깝치던 반 녀석 하나가 밀대걸레에 맞고 실신해 버린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녀석은 이른바 시다바리 정도였다) 언감생심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물레와 사탄의 존재가 고마운 것도 있었다. 사실인지 모르나 이들은 이미 부산 시내 조폭들로부터 ‘관리’를 받고 있었고 애들 코묻은 돈 삥뜯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무튼 우리 학교에 삥뜯기 소문은 없었다. 그들을 관리했다는 조직도 기억에 있다. ‘칠성파’와 ‘20세기파’ 그러니 2001년 3월 31일 개봉했던 영화 <친구>를 보면서 서울내기들과는 감회가 달랐을 것이다.

 

곽경택 감독은 개인적으로 영화 감독보다는 소품 감독을 하면 더 위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시대적 풍경을 재연하는 분야에는 거의 봉테일 감독 수준이지만 스토리텔링은 유감스럽게도 그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개인적 소회니 시비 금지) 어쨌든 그가 선보인 부산의 영상은 서울 와서 반세기를 살아도 골수 롯데팬인 부산 출신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 또래보다는 살풋 윗세대의 이야기지만 그 풍경과 골목은 그대로 나의 부산 시절과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를 리뷰할 생각은 없고, 이 영화에 그려진 칠성파와 신 20세기파 얘기를 해 보자.

 

칠성파는 명실상부한 국내 굴지의(?) 폭력 조직이다. 서울을 석권하고 전국구의 위명을 획득한 호남 조폭들도 부산의 칠성파 두목 이강환에게는 범접을 삼갔다. 피난 시절 전국에서 뒤섞인 피난민들 사이의 건달들로 구성된 ‘세븐 스타’가 그 연원인데 원래 두목은 이강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강환은 그로부터 조직을 인계받는데 여기서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유오성의 은퇴한 조폭 아버지 주현의 캐릭터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후배 두목에게 아들을 두고 “저 셰끼는 인가이(인간이) 안될 셰끼다.”라고 일갈하던 그 주현.

 

동아일보 조성식 기자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 보면 이강환은 소아마비로 한쪽 팔이 불편한, 조폭으로서는 실격인 몸이었지만 “몸보다 몇 십배 더 큰 간”으로 험악한 항구의 밤거리를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여기서 차두리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영화를 기억하신다면 유오성을 차창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던 배우 기주봉을 떠올리시면 되겠다. 옛 선배의 아들을 거둬(?) 주던 그 무표정한 캐릭터 말이다. 이 이강환의 절대권력에 저항하던 게 20세기파였다.

 

1985년 보스 김영춘이 은퇴하면서 그 부하들이 새로이 규합한 게 ‘신20세기파’인데 남포동 일대의 오락실 골목을 주무대로 칠성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물론 칠성파의 위력에는 많이 못미쳤지만. 이 둘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자면 과거 대학가의 NL과 PD라고 보면 된다. 대세는 NL이었지만 아득바득 지지 않고 고개 쳐들던 PD의 관계를 설명하면 이해가 용이할 것이다.

 

영화 속 유오성이 칠성파의 행동대장이었고 장동건이 신20세기파의 행동대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은 실제로 부산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광동 한모 살해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 한모는 신20세기파였고 그를 죽인 정모는 칠성파였는데 둘이 그렇게 죽고 못사는 절친은 아니었다고 한다. 중학교부터 달랐고 이른바 노는 아이들 가운데에서 친분을 쌓은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한모는 일찌감치 조폭 세계로 가서 똘마니부터 컸고 정모는 좀 늦게 뛰어들었지만 머리가 비상해 꽤 빨리 ‘컸다고’ 한다. 어쨌건 친구 사이였던 그들의 관계는 조직의 다툼 사이에서 금이 갔고 서로를 죽고 죽이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수십 번을 찌른 건 아니었고 가스총으로 기절 시킨 후 네 번의 칼질로 한 친구는 죽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정모가 직접 한 건 아니었다.

 

기이하게도 정모를 체포한 형사는 정모의 선배였다고 한다. 당연히 곽경택 감독의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살인교사 혐의를 부인하는 정모에게 “친구를 직이도록 사주했다고 인정해라. 그래 자꾸 오리발 내미는 거는 진짜 깡패가 아이다!”라고 자존심(?)을 건드렸고 정모는 결국 그를 인정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처럼 쪽팔려서였는지 아니면 또 달리 보호해야 할 형님이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징역 10년형을 받고 복역했다고 한다. 친구 영화 개봉 때는 감옥에 있었지만 만기가 2005년쯤이었으니 벌써 사회에 나왔을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고.

 

개인적으로 영화 <친구>에는 호감이 별로 없다. 네 친구의 우정을 백그라운드로 깔고 있어서 그런지 형사들이 걱정할 만큼 조직폭력배들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했거니와 영화 속 캐릭터도 조금은 판에 박힌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그 영화가 내게 던진 하이라이트는 추억이었다. 서울 배우들이 외국어처럼 배우기 어려웠다는 말투, 시커먼 교복과 모자, 그라나다 승용차, 범일동 철길 골목, 단체 영화 관람과 화장실에서의 싸움박질, “어디랑 어디가 붙었다!” 소리에 우우 달려나가던 청소년들의 뒷모습. 그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그 풍경은 추억이었지만 영화 속 사람들의 행동은 현실이라는 것. 비록 폭력배뿐 아니라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의 배도 칼로 찌를 줄 알고, 뭣도 아닌 자신의 ‘조직’의 안위를 공공의 이익보다 더 중시하며,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단지 “쪽팔릴 뿐”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우리 사회에도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드는 것.


1970.4.1 부라보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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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1일 해태 부라보콘 탄생

 

전쟁이다 뭐다 해서 분위기 무거운데 가벼운 얘기 하나. 1970년 4월 1일 한국 아이스크림 업계에 독보적인 존재 하나가 태어났다. 바로 부라보콘이었다. ‘브라보’가 아니고 ‘부라보’였던 이유는 ‘크림’보다는 ‘구리무’가 익숙하던 시대와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일단 이 아이스크림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생김새에 있었다. 이른바 ‘하드’ 형태, 나무 막대기에 꽂은 얼음덩이를 먹던 시대에서 최초의 깔대기형 모양, 즉 ‘콘’ 형태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중앙일보 최지영 기자에 따르면, 1968년 해태제과에 근무하던 진홍승 박사는 상부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는다. 막대기에 얼음덩이 꽂은 ‘아이스케키’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보라는 것. 해외여행을 가면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 진박사는 유럽의 낙농 선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 아이스크림의 세계를 탐험한 뒤 덴마크의 호이어사로부터 설비를 도입한다. 비싼 돈 주고 기계 사고 기술 도입하여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려 했지만 재료도 문제였다. 우유에 탈지분유를 넣어야 했는데 대한민국 천지에 그런 것이 없었다. 이 시기에 선진문물의 창구라면? 당연히 주한미군. 주한미군에서 탈지분유를 얻어서는 협력사에 갖다 디민다. “꼭 이대로 만들어 주시오.”

 

원래 덴마크 사람들은 아이스크림 위에 요즘 우리처럼 탐스러운 초콜릿이나 아몬드를 박아 먹었다. 그런데 당시 초콜렛은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고 아몬드는 한참 뒤 '롯데 아몬드 초코렛‘에서 한국인들은 그 정체를 파악했던 바, 부라보콘 따위에 뿌려댈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항상 대안은 있다. 심심풀이 오징어의 커플, 땅콩. 공급지는? 남대문 시장. 부라보콘 위에는 땅콩이 얹어졌다. 그런데 포장지도 문제였다. 아이스크림을 싸고 있는 포장지인데 물기를 어떻게 막나..... 이번엔 담배가 해결했다. 담배 포장지 회사와 머리를 맞댄 끝에 은박지 포장지를 개발한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감싼 과자, 즉 콘도 문제였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의 습기로 금새 눅눅해지는 단점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고 아이스크림의 온도 맞추기도 난관이었다.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라보콘이 1970년 4월 1일 세상에 나왔을 때 부라보콘은 그야말로 ‘아이스크림을 지배하는 자’가 된다. 도매상들이 회사로 몰려와 회사 정문을 봉쇄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일도 아니었다. 부모들은 아이스케키보다는 완연히 비쌌던 (50원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도 있다) 부라보콘을 사 내라는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돈 없는 아이들은 부라보콘 쥐고 천국에 간 표정 짓고 있는 친구들 앞에서 “한 입만? 응 한 입만?”을 애타게 호소해야 했다.

 

그렇게 팔린 부라보콘이 40년간 무려 40억개, 이를 늘어놓으면 총 68만㎞. 경부고속도로를 800여회 왕복하고 지구를 15바퀴 돌 수 있는 양이었다. 1972년 남북 정상회담 때 당시로서는 북한에 대해 내세울 게 적던 한국 정부 관계자가 대뜸 부라보콘을 들이밀었다. 아이스크림을 탐닉하던 북한 관계자의 날카로운(?) 반응은 “이거 미제 앙이오?”였다고 한다. 이때다 싶었던 남한 관계자 부라보콘의 포장지와 회사와 그 주소를 확인시키며 “이거 국산이오~!”를 부르짖었다고 한다.

 

불후의 cm송 “12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둘이서 만납시다,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부라보콘 아이스크림은 해태 아이스크림은 해태” 는 가수 이장희씨와 콤비였고 기타세션맨으로 유명했던 강근식씨다. 그는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이 브라보콘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시간이 오후 한 시라는 거에요. 그런데 한 시라고 하면 재미가 없고, 12시라는 것이 훨씬 재미있게 다가가는 것 같아서 12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CM송 요청을 받은 즉석에서 기타 하나를 뚱땅거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 전 정엽과 윤도현이 이 CM송 대결을 하는 걸 보고 한 후배가 “밤 열 두시인지 낮 열두 시인지 밤이라면 되게 개방적인 노래였다.”고 아는 체하는 걸 바로 밟아 줬다. “그때는 밤 열 두시면 통금이라 집 밖에도 못나가 임마.” 그렇다 낮 열 두시였다.

 

부라보콘은 나와 동갑이다. 그렇게 마흔 세 해를 꼬마들과, 연인들과 또 가끔 즐기는 어른들의 별미로 함께 해 왔다. 그 느낌을 전달하는 최고의 에피소드는 역시 1977년 성신여대 부속고교 (현 건대부고) 2학년 영(英)반의 이야기일 것이다. 어떤 내기에서 영반 학생들은 수학 담당 김학민 선생님을 이겼다. 당시 가격은 100원. 내기에서 진 김학민 선생님은 이렇게 적었다.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으로. 우에웨웨 야유가 있었겠지만 선생님은 나가 버리셨다. 그런데 이 약속을 그들은 기억했다.

 

2000년 무렵, 영반 학생 중의 하나였던 박충희씨는 조마조마했다. IMF의 파고가 높던 때였고 해태제과는 근근히 버티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부라보콘이 혹시나 생산이 중단되지 않을까, 그러면 약속도 깨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는 그 마음을 담아 해태제과에 보냈고 해태제과는 그 편지에 와락 감동하고 만다. 20년 전 가격으로 100원에 부라보콘을 잔뜩 제공했고 백발의 선생님과 수십 명의 중년 아주머니들은 눈물을 글썽이는 추억의 만남을 갖게 된다.

 

부라보콘은 항상 절대강자는 아니었다. 1987년 출시된 월드콘이 그 빅사이즈로 소비자를 끌어들여 1992년 마침내 부라보콘을 쓰러뜨리고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IMF 때는 정말로 생산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부라보콘을 살린 것은 역시 그 부라보콘이었다. “그래도 부라보콘인데......” 부라보콘을 보고 자라고, 그걸 핥으면서 행복감에 젖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거지반이었던 것이다.


증보) 1984.4.2 어느 병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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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4.4.2 어느 병사의 죽음 



1984년 4월 2일 새벽 강원도 화천의 한 군부대에서 총성이 울렸다. 국방부는 허원근이라는 일병이 “누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채 휴학 후 입대한 것을 비관하던 중 상급자의 가혹 행위와 질책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 이상한 점, 허원근 일병에게는 누나가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건 조사 과정에서 착오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를 믿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왼쪽 가슴에 총구를 대고 M16을 쏘았으나 뜻대로 죽지 않자 오른쪽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돌려 최종적으로 자살에 성공했다는 것이 국방부의 발표였다. 이에 따르면 허원근 일병은 〈X 파일〉에 등장하는 외계인이나 초능력자에 해당하는 생명체이지, 붉은 피와 여린 살을 가진 인간일 수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허원근 일병은 그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다고 우겼다. 외계인을 자식으로 둔 바 없는 아버지는 당연히 이에 의문을 제기했고 대한민국 국방부와 자식 잃은 아버지와의 기나긴 진실 게임은 무려 26년이라는 세월을 잡아먹게 된다. 가족들은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국회에 청원서를 내고 행정기관에 탄원서도 제출했지만 상대는 “태산도 조약돌로 만들 수 있고 조약돌도 태산으로 만들 수 있는” 군대였다.

 

가족들의 목소리나마 진지하게 들어 주고 그 의문에 대답한 국가 기관은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가 처음이었다. 사건 발생 18년 만이었다. 2002년 의문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M16 소총을 반자동 위치에 놓고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 그리고 머리에 한 발씩 맞았는데 이를 두고 자살로 판단한 군의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상식적인 결론을 내놓았다. 이게 왜 상식적인지 이해가 안 된다면 군을 다녀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니 예비역들에게 물어 보면 된다. 아마도 M16이라는 소총의 위력에 대해 질릴 정도로 듣게 될 것이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위원회가 “당신들 못 믿겠다”고 선언한 이상 국방부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국방부특별조사단이 구성되어 사건을 재조사했다. 참여정부의 국방부 특별조사단은 전두환 정권의 헌병대와 똑같은 결론을 낸다. 역시 허원근은 외계인이거나 초능력자라는 것이었다. “중대장의 가혹 행위에 견디다 못해 M16 세 발을 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과 머리에 쏘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2004년 2기 의문사위원회가 재조사에 착수했을 때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국방부 특별조사단장으로서 허원근은 외계인이었다는 투의 발표를 되풀이 암송했던 정 모 장군은 의문사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1기 의문사위원회 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 조사 결과를 나한테 먼저 알리지 않고 언론에 발표하면 당신들 다 죽어!”

 

한바탕 난리가 나고 의문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자 정 모 장군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경상도 톤’ 때문에 오해를 빚었을 수 있다는 군인답지 않은 변명으로 일관한다. 전두환 정권이나 노태우 정권의 일이 아니라 자그마치 참여정부 때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로도 정 모 장군은 아무 탈 없이 승진하여 1군 사령관을 거쳐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

 

2기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과정도 가시밭길이었다. 군 당국의 무성의는 말할 계제도 못되고 심지어 총을 쏘면서 조사단원들을 위협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국방부는 “불법 조사에 대한 자구책”이라고 강변했다. 국군을 공비로 가장시켜 사건을 조사하러 온 국회의원들에게 총격을 가한 1공화국 때 이야기가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이런 황망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하게도 조사 결과는 국방부특별조사단의 그것과 달랐다. 2기 의문사위원회 역시 자살이 아님을 주장하고 용의자까지 제시한다. 한 사건을 두고 두 국가 기관이 외나무다리 위의 양처럼 뿔을 세운 이상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2010년 2월 법원은 1심에서 허 일병의 죽음이 타살이었음을 인정하고 국가로 하여금 부모에게 배상할 것을 명령한다. 판결문은 국방부가 얼마나 치사했고 용렬하였는지 적시하고 있다.

“사고 당일 허 일병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나 당시 대대장과 보안사 간부 등은 자살로 위장하기로 의견을 모은 뒤 구체적 지시를 내렸고, 부대원은 물청소로 사망 흔적을 지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 헌병대는 요구한 대로 진술하라고 중대원에게 가혹 행위를 하는 등 조작 및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양쪽 가슴과 머리에 구멍이 나서 돌아온 아들이 ‘자살’했다고 눈 하나 깜짝 않고 26년 동안 우겨 온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 앞에서 아버지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제대한 지 한참 지나 이제는 원혼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이 아는 진실의 조각을 제시하려던 이들에게 군대의 명예 운운하며 압박을 가하는 군인들은 어떻게 비쳤을까.

 

명예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세워 가는 것이며 명예가 두려워할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허위와 기만임을 대한민국 군대는 오래도록 잊어 왔다. 천안함 사태나 기타 군내에서 불거진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끝없는 불신 앞에서 왜 우리를 믿어 주지 않느냐며 가슴을 치는 군인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한 군이 쌓아올린 자업자득임을 알아야 한다. 27년 전 세 발의 총탄을 양쪽 가슴과 머리에 맞고 죽어 간 한 청년의 ‘자살’은 그 허다한 ‘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1948.4.3 이 땅에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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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8년 4월 3일 이 땅에 들여다 놓지 말아야 할 것

 

<극락도 살인사건>이었나 그냥저냥 여름밤 납량특집으로 봤던 영화가 있었다. 실화라고 뻥을 치는 마케팅으로 화제를 낳았던 영화였는데 너무 피칠갑이 진해서 보기에 좀 편치 않았던 영화였다. 거기에 보면 영화의 주요한 복선 중 하나로 “이장이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 놨다.”는 쪽지가 등장한다. 그 정체는 임상실험용 약이었고 그 약의 부작용으로 환각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처참하게 난도질하며 죽어간다.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놓은 결과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 곳곳에 봉화가 솟았다. 끔찍한 이름 4.3의 시작. 그 후로도 오랫 동안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화산섬을 피에 젖은 유채꽃밭과 주검 널린 한라산으로 대변되는 참상으로 얼룩지게 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와 있던, 그리고 그 뒤 육지에서 건너온 신생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들은 글자 그대로의 대량학살의 주인공들이 된다. 그 참상의 면면과 사연을 되짚고 싶은 마음은 없다. 분명한 것은 4.3의 시작이 설사 당시와 오늘날의 우익들이 주장하는 대로 ‘빨갱이들의 대한민국 말살 책동’이었다고 하더라도, 제주도에서 공권력이 벌인 행동은 결코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제주도민 30만 중 얼마가 죽어도 좋다.”는 경찰 총수와 그에 못지않은 군대 지휘관은 그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과 맞서야 할 적을 구분하지 않았고 그 모두를 ‘쓸어버림’으로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마치 왕년의 미군에게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일 뿐”이었듯 그들에게 “좋은 빨갱이란 죽은 빨갱이”일 뿐이었고 어린아이를 총검으로 받았던 난징 대학살의 일본군의 잔인성은 제주도 4.3을 진압하던 대한민국 공권력과 그들이 고용한 깡패들 사이에서 스멀거리며 부활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이 의미가 없고, 적으로 정해진 집단을 제거하는 데에 이유와 기탄이 없는, 오히려 그런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신쯤으로 자기최면을 거는 기이한 괴물의 사고는 이때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역(異域)같이 다른 풍경에 말까지 선 외딴 섬에서 그들은 ‘싹쓸이’의 효율성을 체득한다. 4.3의 무서움이 제주도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그 싹쓸이의 악마성이 곧 뭍으로 옮아갔고 좌익과 우익은 사생을 가르는 판갈이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역사 때문이다. 여수와 순천을 장악한 14연대의 좌익들은 제주도의 복수를 단행했고 진압군은 그에 못지않은 피로 갚았다. 그리고 마침내 터진 전면전에서 패퇴하는 국군과 경찰은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찌르는” 무시무시한 대학살을 전개했다. 나찌는 몇 년 동안 수백만 명을 죽였고 캄보디아도 비슷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대충 두 달 동안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남녀가 없었고 노소도 없었다. 여자는 더 독한 빨갱이로, 자식은 빨갱이의 씨인 죄로, 노인은 빨갱이를 낳은 죄로 죽었다.

 

이미 한반도는 광기에 휘말려 있었다. 만약 국군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고 부산항까지 인민군이 장악했다면 또 다른 싹쓸이가 행해졌을지도 모르고, 그 가능성은 여순반란 당시 반란군의 ‘반동 처단’의 양태를 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또 이쪽의 광기는 그 후로도 면면히 이어져 광주항쟁의 싹쓸이로, 멱 감는 아이들에게까지 총을 쏘아붙인 야만으로 세습된다.

 

4.3은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좌와 우 가운데 누가 정당했냐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적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깃털보다도 가벼워져야 했던 사람들의 목숨과 새털을 불어 버리듯 생명들을 취했던 그 세월들을 반성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그 야수성은 수시로 발현될 것이고 언제 우리 자신이 야수로 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 우리의 부드러운 생살을 찢고 눈과 귀와 코 없이 이빨과 발톱만 그득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4.3은 들여놓지 말아야 할 괴물을 우리 땅 안에 들인 것이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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