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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2.16 마릴린 먼로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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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2월 16일 마릴린 먼로 한국에 오다 

그녀가 죽은 지도 반 세기가 지났지만 그래도 ‘세기의 섹스 심벌’이라면 그 이름이 빠지지 않으며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부여잡으며 웃는 그 장면은 지금은 하나의 전 설적인 순간이 되어 남아 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몇 편 본 적 없고 그녀가 죽고 한참 뒤에야 세상 빛을 본 처지이지만 마릴린 먼로의 이름은 까마득한 옛날 여배우 아닌 바로 그저께 돌아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밤에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질문에 ‘샤넬 넘버 파이브’라고 대답하여 질문하는 기자의 넋을 빼놨던 에피소드나 빨갱이로 몰린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여 남편이 양심을 걸고 매카시즘과 맞설 때 그 옆에 있었던 일이나, 케네디 형제들과의 염문이나 뭐 하여간 무궁무진한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4년 2월 16일에는 그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됐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프고 버려진 땅 중의 하나였던 한국에 그녀의 화려한 미소가 등장한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공식적으로 행했던 세 번의 결혼 가운데 첫 상대는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던 제임스 도어티였다. 그때는 마릴린 먼로도 아니었다. 노마 진 베이커라는 이름의 열 여섯 살 소녀였을 뿐.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지만 노마 진 베이커의 팔자는 그렇게 공장 노동자의 아내로 아이 낳고 남편 월급 아끼며 살아갈 깜냥이 아니었다. 배우를 꿈꾸던 그녀는 헐리웃으로 갔고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 있던 남편과는 이혼했다. 마릴린 먼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그녀는 일약 세기의 섹스 심벌로 두둥실 떠올랐고 두 번째 신랑은 첫 번째 신랑과는 대기권과 땅의 차이가 있는 전설적인 스타를 고른다. 메이저 리그의 스타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고 메이저 리그 MVP를 세 번씩이나 차지했으며 헤밍웨이의 고전 <노인과 바다>에도 등장하는 불세출의 스타. <노인과 바다>에서 “돌아오면 야구 얘기나 들려 주세요” 하는 꼬마에게 노인은 “양키즈가 이기게 마련이지.”라고 대답하고 꼬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라고 맞받자 노인은 “양키즈에는 대(大) 디마지오가 있지.”라고 호언을 하는 것이다. 하여간 뉴욕 양키즈가 자랑하는 스타 군단 가운데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정도를 제외하면 상석을 양보하지 않을 대단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순간 대스타 디마지오보다는 “먼로의 남편”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별이란 더 밝은 별 앞에서는 그 빛꼬리를 내리는 법 

그들은 1954년 1월 14일 결혼했는데 “우리 결혼했어요”를 꼬리표에 매단 이 스타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것은 일본이었다. 초청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이었다고 한다. 미국과 사생결단을 치른지 10년도 안됐지만 일본은 이 거물 스타 커플의 일본 방문에 전국이 들썩였다. 그야말로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신혼을 즐기는 이 커플 앞에 미군 장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조 디마지오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지금도 한국에는 많은 미군들이 고생을 하면서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오신 김에 한국을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디마지오는 정중히 거절의 멘트를 날렸는데 이때 미군 장교의 반응은 불세출의 야구 스타를 한없는 엄지왕자로 만들고 말았다. “저는 부인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만.” ‘조 디마지오 부인’ 보다는 자신을 보면 자지러지며 환성을 내지를 병사들 앞의 마릴린 먼로를 더 선호했던 탓일까. 마릴린 먼로는 신혼여행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마릴린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이건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1954년 2월 16일 흡사 오늘날의 아프간 비슷했을 한국에 마릴린 먼로가 왔다. 국내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와 백성희가 나가 마중을 했고 미군의 하늘같은 장성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그녀가 왔다. 이후 그녀가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왔을 때 풍경을 보자. “미모의 여왕을 직접 눈앞에 보고자 비행장에 모여든 약 6백여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흥분된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루었다. 군복을 입었으나 와이셔츠 단추를 절반이나 끼지 않고 젖가슴이 보일랑말랑 하는 것이 사병들의 흥분을 더욱 돋우는 것 같았다. ”마릴린 먼로 ‘여사’가 전선으로 가가 위하여 미리 준비된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기대에 어그러진 사병들은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느냐"고 묻자 "곧 돌아오겠다"고 마치 어머니가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이 애교를 부렸다. 먼로 여사는 앞으로 4일간 한국에 체류할 것이다.” (1954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그녀는 10여 차례 공연을 통해 미군 병사들을 만났다. 어느 공연 때에는 미친 듯이 환호하는 병사들 위로 저공비행을 요청하여 손 키스를 보내는 짜릿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수천 명의 남자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헬기 조종사는 “당장 기수를 올려라! 먼로가 다치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안된다.”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엄동설한.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훤히 드러낸 드레스 차림으로 공연을 했다. 섹시 스타의 열정으로, 그리고 때로는 고향에 두고 온 병사들의 애인처럼 달콤하게. 평생을 환호 속에서 살았던 그녀이지만 그렇게 극적이고 그렇게 열정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은 드물었을 것이다. 신혼의 남편까지 독수공방시키고 등장한 한국의 무대에서 그녀는 흡사 하나의 여신이었다. 그 기억이 그녀가 “가장 인상깊었던 방문지는 한국”이라고 회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난 아주 따뜻했어요. 마치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그때까지는 청중이 두려웠어요. 어떤 청중도 말이죠.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머리가 멍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쩔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내리는 눈 속에서 환호하는 군인들 앞에 섰을 때 난 처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그저 행복할 뿐이었어요.” (마릴린 먼로의 회고 - 광기와 우연의 역사 2 - 자작나무 중) 

그녀에게 청중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무대가 주는 행복감을 만끽한 한국 공연은 그녀 자신에게는 그렇게 유익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신혼여행 중 아내에게 버림받은(?)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은 274일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헌신적이고 고전적인 아내상을 바랐던 디마지오와 무대의 참맛을 알아버린 먼로의 결혼 생활이 안정적일 수는 없었겠지만 디마지오가 평생을 혼자 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먼로 뿐이었다고 되뇐 것에 비하면 아쉬운 이별이었다. 1954년 2월 16일 마릴린 먼로는 그 일생에서 가장 기쁜 4일을 엉뚱한 땅에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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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17 중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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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2월 17일 중월전쟁 

중국은 사방의 이민족과 국가들을 오랑캐라 불렀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 그리고 자신들을 중화라 일컬으며 사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 들었고 힘이 넘치면 그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그 주변 나라들도 때로는 각을 세우기도 하고 충돌도 불사하면서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현실적 힘으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동이에 해당하는 우리나 남만에 해당하는 베트남이나 비슷했다. 두 나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득한 춘추전국 시대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중국 또는 그 대륙의 지배자에 맞서서 아득바득 싸웠고 때로는 물리치고 대개는 너 잘났다 숙여 주면서 독자적인 국가와 문화적, 언어적 공동체를 꾸려 온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당나라의 침략 이후 그 군대에 의해 영토가 병합된 적은 없었지만 베트남은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때까지 수시로 중국 또는 그 지배자의 직접 지배 하에 들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언제나 침략자들을 물리쳐 왔다. 영화 <하얀 전쟁>에서 베트남 노인이 뇌까리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왔다가 물러갔고 프랑스인들이 왔다가 갔고 미군들, 그리고 따이한들도 왔다가 (쫓겨) 갈 뿐이었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나라 미국도 베트남에서 쓴맛을 봤고 베트남은 통일됐다. 여기에는 중국의 지원도 꽤 컸다. 호지명이 모택동과 파안대소하며 회담하는 사진에서 보듯 그들은 사회주의의 형제들처럼 보였고 기실 호지명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신뢰를 받고 또 그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호지명조차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중국에 먹히느니 프랑스에게 굽실거리는 게 낫다.” 그런데 중국도 사실 다른 마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발해를 교묘하게 이간질하면서 (한 해는 신라 사신을 상석에 앉히고 다음 해에는 발해 사신을 상석에 앉히는 식으로) 끝까지 두 나라가 서먹함을 풀지 못하게 한 것처럼, 중국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도 통일 베트남의 등장을 은근히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이 남베트남 패망 직전 남베트남 정부에게 제시한 대안 중의 하나는 일종의 친중국 세력 연합이었다.) 

‘베트남 해방’이 성사된 이후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들을 호되게 때리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는 대탈주를 감행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반공 교육 소재로 즐겨 활용된 ‘보트 피플’도 그 단면의 하나다. 또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소련편을 들었고 이런 일련의 사태는 중국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중국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면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대해서 그랬다. 베트남은 동남 아시아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편이었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늘상 줘 터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중국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정을 자행할 제 크메르 루즈는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피의 보복을 감행한다. 

미군을 물리친 긍지 높은 베트남군은 1978년 크리스마스날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베트남군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크메르 루즈를 축출한다. 베트남 역시 인도차이나에 베트남을 정점으로 한 일종의 대 베트남 블록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 당했던 대로의 식민 통치 방식을 캄보디아에 적용한다. 베트남 인들의 대량이주라든가 양국민의 통혼(通婚) 장려라든가. 각설하고 이 침략은 중국을 자극했다. 아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해방전쟁 때 그렇게 도와 줬는데 이번엔 우리 발밑을 판단 말이야? 양국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졌고 ‘불굴의 오뚜기’ (不倒翁) 등소평은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꼬마 녀석을 혼내 줘야겠소.” 미국이야 아플 것이 없었다. “뭐 그러시든가.”가 기본 입장이었으리라. 베트남이 한 번 혼나는 것이야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1979년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대군은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조금 이상한 전쟁이었다. 6.25 때 중공군은 38선 이남까지 치고 내려왔고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겠다는 기세까지 보였지만 이때는 “한 수 가르치는 전쟁” 정도의 제한전을 일찌감치 표방했다. 베트남 북부 지역을 장악한 뒤 수도 하노이의 목을 죄어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철수시키는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실상 베트남 정규군은 거의 캄보디아에 투입돼 있었고 베트남 북부 지역의 수비군의 주력은 민병대였다. 

하지만 이 민병대는 보통 민병대가 아니라 해방전쟁에서 질리도록 미군과 싸우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문화혁명 뒤끝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군에게 매운 맛을 보여 준다. 그들은 중국이 지원했던 무기로 중국 탱크를 때려부쉈고 미군을 처리한 그 수법으로 중국군을 골탕먹였다. 주요 거점에서는 전멸을 불사하고 항전하면서도 중국군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중국은 격렬한 소모전을 펼쳐 국경선 일대의 소도시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뿐이었다. 어차피 베트남을 먹자고 시작한 전쟁은 아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지만 중국군은 “하노이로 가는 길을 뚫었다”면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물론 철수하는 도중의 베트남 영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국이 베트남의 정예 민병대에 창피를 당한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실상 사망자와 피해는 베트남에 더 많았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피해 규모를 밝힌 바 없다) 어차피 베트남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국경분쟁은 그로부터 10년을 더 끌었고 수많은 양국 군인들이 국경의 산악지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등소평은 중월전쟁을 계기로 낙후된 중국 군대에 충격을 받았고 군 현대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더욱 강력해진 중국은 지금 남지나 해 전체가 자기네 바다라는 식의 억지로 베트남은 물론 필리핀과도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베트남 정부 수뇌부는 베트남 전 종료 이후 처음으로 동원령을 시사하기도 했다. “중국이 바다에서 까불면 우리는 육로로 베이징으로 간다.”고 호언하면서. 

중월전쟁이 터진 날 중국을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미 중국이 북한 유사시 두 시간 내에 평양에 입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놨다는 보도도 있거니와 여전히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면서도 결코 통일된 한반도를 바라지 않는 심사를 가지고 있고, 중월전쟁 당시 망신을 당한 엉성한 군사력과는 차원이 다른 군비 증강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 수 가르치는’ 식의 중국식 개입은 옛날 옛날 한옛날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웃 치고는 너무도 비대한 이웃 중국의, 하필이면 그 정치적 중심부에 지척으로 붙어 있어서 그 민감함의 정도가 베트남에 비하면 댈것도 아닌 나라의 국민으로서, 더군다나 분단된 나라의 한쪽이 핵무기를 가졌다면서 호언하는 국면을 맞아 어찌 소회가 없을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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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2.18 대대장 사단장 사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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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2월 18일 대대장 사단장 사살하다 

육군 28사단은 무적태풍부대라고 불리우는 전방 부대입니다. 휴전선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태풍 전망대를 운용 중이며 임진강이 최초로 남쪽으로 유입되는 지점을 맡고 있어서 간첩도 여럿 잡아 표창도 많이 받은 부대죠. 그런데 이 28사단은 불시에 사단장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대입니다. 6.25의 그 난리통을 치르면서도 사단장이 계급장 떼고 도망간 적은 있어도 총에 맞아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이 전사했지만정상적인 부대를 이끌고 있지 않았었고 김백일 소장이나 이용문 준장은 비행기 사고로 죽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된 1959년 육군 태풍부대 사단장이 총을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범인은 인민군 특공대도 아닌 예하 1대대장이었습니다. 1959년 2월 18일의 일이고, 그 해 10대 뉴스로 선정된 사건이었죠. 

사연인즉슨 상관인 6군단장 백인엽 (어 재수없는 이름이죠.... 백선엽의 악명높은 동생)이 정찰 훈련을 참관하겠다는 지시를 내려서 사단장 서정철 준장은 대대정찰 시범을 실시한다고 예하부대에 명령하지요. 그 정찰 시범이 실시되기 전날 서정철 준장은 1대대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훈련이 진행 중이었고 이에 시정 지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대대장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이의를 제기했고 사단장은 이에 뚜껑이 열립니다. 


까라면 까는 거지 말이 많아부터 빠져 가지고 등등의 멘트가 당연히 튀어나왔겠죠. 할아버지를 전 법무부 장관으로 두고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군사 경험이 많았던 군인이었으니 이런 식의 부하의 항명을 더더욱 용납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휘봉으로 배를 콱콱 쑤시면서 몰아붙이는데 1대대장 정구헌 중령 역시 소문난 엘리트 군인으로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처지여서 그랬는지, 곱게 관등성명 외치면서 시정하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맞대응을 합니다. 그러자 사단장의 주먹이 득달같이 날아갔죠. 


사실 요즘 군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한국군 현실로 보면 꼭 불가능했던 것도 아닌 것이 그때 사단장 나이는 서른 아홉, 대대장 나이는 서른 넷의 새파란(?) 나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훈련을 지시한 백인엽 군단장은 서른 여섯이었지요. 고만고만한 나이에 별이다 무궁화다 갈리고 계급이 깡패라고 조인트 까이고 두들겨 맞으니 눈에 불이 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대충 끝냈으면 되는데 연대장이 뜯어말려 사단장이 대대장실로 들어가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 중령은 대대장실로 들어가기 전 사단장이 권총을 장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들었다라고 주장합니다). 사단장이 아예 나에게 총을 쏘려는구나 생각한 정 중령이 대대장실에 들어가자 사단장은 “꼴도 보기 싫으니 뒷문으로 나가라.”라고 소리를 지르죠. 이때 정중령은 뒷걸음질쳐서 문을 나갔다고 하니 이미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나가면거 그는 자신의 권총에 장탄을 했고 따라나오는 사단장에게 총알을 퍼붓습니다. 사단장은 비명도 못지르고 죽고 말지요. 

당연히 정 중령은 초유의 하극상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동료들에 따르면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군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하사관 요원의 확보였습니다. 군대의 등뼈라고 말은 하지만 처우도 불량하고 사병들한테 치받히고 장교들한테 짓밟히기 일쑤였던 하사관, 즉 장기복무 (전문용어로 말뚝)를 지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부대별로 부대장들은 예하 장교들에게 어떻게든 하사관 자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온갖 회유와 협박, 심지어 가정방문(!)까지 해 가며 하사관 지원을 받으려고 발버둥쳤다고 합니다. 28사단 역시 상급부대인 6군단으로부터 무진장한 압박을 받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구헌 중령은 대대장직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지망하지 않은 사람을 양심상 도저히 반강제적으로 지망케 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합니다. 당연히 1대대의 하사관 지망율은 사단 꼴찌였구요. 군단장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사단장은 이를 못마땅해했고 결국은 그 갈등이 작전 상의 이견다툼으로 불거져 나와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둘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정구헌 중령은 부사단장이 쌀을 상납하라는 요구를 거절할만큼 강직한 사람이었고 사단장 서정철 준장도 사병들에 대한 ‘정량 급식’을 이행하지 않은 이들만큼은 용서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군인이었다지요. 하지만 이 둘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죽이게 됩니다. 

<노병의 증언>에 나오는 당시 작전참모의 말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6군단장은 절대 하사관 지원자 확보문제에 대해서 사단에 강요한 적이 없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나섰다. 정 대대장이 연대장과 함께 동행하여 군단에 자수할 단계에서나 재판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은 군의 명예와 군단장의 책임문제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 것을 염려하여 문제를 축소 조작한 것으로 본다.” 결국 백인엽 군단장 이하 대한민국 군대는 사건의 핵심을 비껴서 한 혈기넘치는 대대장의 또라이짓 정도로 이 사건을 축소했고 그렇게 유야뮤야 한 사람의 총살로 문제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정구헌 중령은 “밝히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말하면서 담담하게 죽어갑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70노모와 처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는것이 미안하며, 앞으로 자신의 개인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구타하거나 혹사시키는 군대 악습이 없어지길 빈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양심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 자부한다. 깨끗이 죽는다.” 그런데 그 악습은 50년이 지나도록 근절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언에서 말한 구타와 혹사의 악습은도 그렇거니와 두루뭉술한 사고처리와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 그리고 '안되는 일 되게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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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19 남북의 스승 손정도 목사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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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월 19일 분단된 양쪽의 스승 소천 

대학 입학할 때 선배들은 악착같이 ‘분단조국’ 연호를 썼다. 좀 달리 쓰면 ‘통일염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고 투쟁성 넘치는(?) 사람들은 ‘미제강점’이라는 연호를 굳이 끌어대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따지면 올해는 분단조국 69년이 된다. 그 분단의 세월은 자성 강력한 자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철가루처럼 N극과 S극으로 끌어당겼다. 누구든 그 한쪽을 강요받아야 했고 그 선택을 거부한 사람들은 대개 배겨내지 못했다. 그렇게 양쪽에서 미움받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지만 양쪽 모두에서 존경받고 추앙받는 사람은 열 손가락도 안되지 싶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1931년 2월 19일 세상을 떠난 목사 손정도라는 사람이다. 

그는 평안도 강서 사람이고 고을에서 행세깨나 하는 유림의 자제였다. 그런데 어느날 평양에 가던 길에 유숙하게 된 조 목사라는 사람에게서 기독교라는 것을 접하고 그만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마치 사울이 빛을 보고 돌변한 것처럼, 갓 쓰고 상투 튼 청년 손정도는 당일로 예수의 사도가 되고 만다. 젊은 혈기 새로운 종교의 열기에 넘친 그는 당장 상투를 잘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신주를 다 파묻고 사당마저 박살내 버린다. 당연히 친척들은 이 패륜아를 때려 죽이겠다고 들고 일어났다. 

손정도는 성경의 야곱처럼 도망하는 처지가 됐고 다행히 평양의 선교사의 비서 겸 한국어 교사 자리를 얻고 숭실학교에도 입학한다. 그의 동기 가운데에는 조만식이 있었고 그 선배 가운데에는 김형직이 있었다. 김형직.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그는 바로 김일성의 아버지였다. 

그가 숭실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7년 평양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평양 대부흥.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와 과오를 토로하면서 그 회개의 열기가 신도들로 번져 나가 일대 신자 수의 격증을 불러온 사건을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이 열기에 휩싸였고 손정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는 좀 특이했다. 그는 복음만큼이나 나라와 민족을 고민하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8절 말씀이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손정도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대한제국’으로 바꿔 읽었다. 그 기한과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성령’이 임하시고 또 핍박받는 이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구원자를 위하여 증거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마침내 독립이 올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앞에 2천만 명의 동포들이 그 앞에 늘어서는 환영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스스로에게 선포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이걸 봤으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목사가 됐다. 하얼삔에서 목회를 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엉뚱함 혐의를 뒤집어쓰고 잡혀가서는 무지무지한 고문을 받는다. ‘죽음이 더 그리운’ 고문을 받던 중 순교자들의 환영에 사로잡혔다가 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너를 아노니 너는 두려워 말라.” 손정도 목사 고문 받다가 춤을 춘다. 일본 경찰은 이놈이 미쳤구나 어안이 벙벙하여 고문을 멈췄다고 한다. 주님은 참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신다. 그리고 사람 따라 다르게 역사하신다. 

그 고초를 치른 후 서울로 온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 등에서 목회를 한다. 그는 그때까지도 남녀를 가르고 있던 휘장을 걷어 버린다. 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동시에 설교하며 정동교회를 2천명 규모의 교회로 부흥시킨다. 그의 설교를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던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이화학당의 소녀 유관순도 있었다. 그녀가 만세 부르다가 스러져 간 3.1 운동 이후 손정도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열심히 활동한다. 그러나 그를 진저리치게 만든 것은 임정 내부의 파벌 싸움이었다.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지방색을 가르는 파당싸움을 말아야 한다. 좁은 나라 한 핏줄의 겨레가 무슨 남도니 북도니, 호남이니, 영남이니 하며 네 갈래 열 갈래로 갈라져 싸우는가? 이는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다.”고 설교하던 그는 임시정부의 동지들을 매섭게 꾸짖었다. “우리가 독립운동 5년에 한 일이 무엇이오. 서로 죽이는 일만 하였소. 죽음에서 나오지 못하면 삶을 얻지 못하오.” 

그는 만주 길림으로 갔다. 중국인들의 횡포 속에서 조선인들이 타향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땅을 개간하고 터전을 일구던 곳. 독립운동의 꿈을 안고 고국을 떠난 젊은이들이 모여 있던 곳. 그곳에서 손정도 목사는 자신의 가산을 다 팔아치워 학교와 교회를 세운다. 그리고 ‘농민호조사’(互助社)를 조직하여 농민공동체를 형성하는 한편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그는 왕년의 중학 선배 김형직의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있는 것을 알았고 그를 백방으로 손 써 빼내는 한편 친자식같이 거둬 준다. “손목사가 아니었다면 감옥 생활을 10년쯤 더 했을 것이며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라고 감복한 젊은이는 김성주. 후일의 김일성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각지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또 조국을 전하고 희망을 전하던 목사,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 (김일성의 표현)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 19일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은 평생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고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의 1,2부를 그에게 할애하는 정성을 베풀었다. 또 자신과 유달리 친하게 지냈던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 손원태(미국 거주)를 기어코 초청하여 8순 잔치를 평양에서 열어 주었고 손원태는 사후 평양에 묻혔다. 

이렇게 말하니 친북인사 가족 같지만 손정도 목사 자신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고 그의 장남은 손원일.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다. 6.25때 부산항으로 직행 침투하려던 인민군 선박을 격침시켜 부산의 안전을 확보한 이이고 인천 상륙 작전 등 작전에서 해군 참모 총장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한국 해군은 2008년 실전배치된 잠수함에 ‘손원일함’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는 당연히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남과 북 모두로부터 존경받으며 그 아들들 또한 공평하게 남과 북에 그 유해를 두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별종. 손정도 목사가 1931년 2월 19일 그 치열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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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2.20 빛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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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2월 20일 빛의 결혼식 

한 여대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전남대학교 사학과 76학번이었다. 향용 그렇듯이 집안에 데모꾼이 있으면 그 집안 상당히 피곤(?)해진다. 그녀의 오빠들이 그랬고 박기순은 일찌감치 오빠의 지기들이었던 윤한봉이니 김남주니 하는 광주 지역의 운동권 괴수(?)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될성부른 떡잎(?)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8년 6월 학내 시위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한다. 

학교로부터 거부당한 박기순은 또 하나의 학교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것은 야학이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야학을 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있던 이들에게서 야학 제안을 받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야학만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 번 마음 먹으면 똑소리가 났던 그녀는 자신의 학교 인맥들을 야학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들불야학이었다. 그녀와 함께 한 이름 가운데 윤상원이 있었다. 후일의 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 “고등학생은 나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어린 동생들을 내몰고는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던 청년. 

강학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해서 야학교사를 이리 불렀다)으로서 학강 (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해서 야학 학생을 이리 불렀다)들과 어우러지는 한편, 박기순은 위장취업자가 되어 노동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코뜰새없는 긴장과 과로의 연속. 하지만 그녀에게는 피붙이만큼이나 소중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민족의 새아침이 밝아오는가.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자” (들불야학의 노래 중) 

1978년의 크리스마스. 통금이 엄연하던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젊은 청춘들이 밤을 하얗게 밝힐 수 있는 몇 안되는 날이었고 다음 날도 그녀는 야학에 쓸 땔감을 찾기 위해 강학, 학강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다가 겨우 오빠 집을 찾아 몸을 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죽음. 동료들은 넋을 잃고 슬퍼했다. 광주의 또순이 박기순의 이름은 이미 광주를 넘어서 있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황석영이 조사를 읽었고 김민기가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가 택한 노래는 ‘상록수’였다. 아마 2절에서 사람들은 울었을 것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녀가 죽은 지 11개월 뒤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왔지만 그 봄은 봄이 아니었다. 꽃샘추위의 열 배 쯤 되는 동장군이 워커발에 대검 꽂고 그 봄을 덮쳤다. 광주는 그 흉악한 동장군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광주항쟁이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앞서 말한 박기순의 동료, 박기순이 야학으로 끌어들였고 박기순이 죽었을 때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고 울먹였던 윤상원은 그 항쟁의 한복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그리고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 박기순과 윤상원의 친지들이 모였다. 그들은 조촐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한 여자와 그녀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결국 그녀의 뜻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할 한 남자의 영혼 결혼식이 열린 것이다. 신랑 윤상원 신부 박기순. 친지들은 두 불운했지만 빛났던 청춘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광주에 있던 황석영의 집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한 노래굿 “넋풀이" (일명 빛의 결혼식)를 녹음하고 있었다.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의 둔탁한 레코드 버튼을 연신 누르며 그들은 몇몇 노래들을 불렀다. “에루아 에루얼싸”도 있었고 이미 불리워지던 곡들도 있었지만 전혀 새로운 노래 하나가 테이프에 실리고 있었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몇몇 구절을 따온 가사를 만들고, 79년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팀으로 출전, 은상을 탔고 81년의 험악한 시기에 간 크게도 광주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5.18을 추모하는 노래 <검은 리본>을 불렀던 김종률이 작곡한 행진곡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노래굿 상에서 이 노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였다고 한다. 청춘의 사랑도 접고 명예 따위 구하지 않고 이름은 가명으로 바꿔 가면서 세상의 그늘을 걷던 사람들, 이 그늘을 없애리라 맹세했던 한 남자와 한 여자. 한다 하는 유지들은 꽁무니를 빼고 시민들도 가슴을 치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그날 도청을 지키고 죽어간 사람과 그에게 크나큰 감동과 슬픔을 안겨 주었던 사람. 

그래서 원래 가사는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였다. 하지만 가사는 사람들의 입 속에서 “앞서서 나가니”로 바뀐다. 그렇게 가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그날 녹음이 끝난 뒤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하나씩 품고, 혹여라도 경찰의 눈에 띄더라도 같이 잡히지 않고 한 명이라도 도망갈 수 있게 저만치 떨어져 걸었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 뒤 숨죽여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을 통해서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청춘들이 윤상원으로, 박기순으로 빙의됐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펼쳐진 80년대의 불의 바다의 불방울들이 됐다. 

<아침이슬>은 해금되던 날 노태우도 김민기를 찾아와 함께 불렀고, 퇴임연설을 마친 가카께서도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시위대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실 수 있는 노래였지만 이 노래만큼은 그들의 영역이 될 수 없고 되지도 않았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노래는 박기순과 윤상원. 진실로 열심히 살고 뜨겁게 죽었던 이들의 영혼이 서린 노래이고 아울러 그 뒤를 따르고자 했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열정과 한숨이 마디마다 음표마다 배어 있는 노래이니까. 1982년 2월 20일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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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2.21 신채호 투쟁을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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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6년 2월 21일 단재 신채호 투쟁을 멈추다

어느 나라든 어느 민족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한국인들은 ‘변절자’나 배신자를 싫어하는 정서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조 때 신숙주가 아무리 유능한 명신이었다 해도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려다가 죽은 성삼문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숙주나물’로 남거나 가깝게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김민석이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노무현을 버리고 정몽준에게 달려갔던 이후 완전히 맛이 가버린 일은 그런 정서를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하여간 참 일편단심 독야청청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딴에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현실 속에서 그렇게 곧고 꼬장꼬장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늘상 패해 온 역사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거죠. 한국 현대사에서평생을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비타협적으로 또한 열정적으로 살다 간 사람의 리스트를 작성하자면 1936년 2월 21일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간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단재 신채호.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요 아나키스트이자 무장투쟁론자였던 이분의 생애를 몇 글자로 줄이는 것은 무망한 일입니다. 다만 그분이 어떤 성품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는 몇 가지 일화에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1910년 잃어버린 나라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던 단재는 잠시 오산학교에 머물렀는데 그때 오산학교 교사 하나는 단재 신채호의 행동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단재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어느 방향으로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지요.

솔직히 그게 일종의 기벽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산학교 교사는 이 신채호에게 이런 인물평을 남깁니다. “단재는 결코 뉘 말을 들어서 제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남의 사정(私情)을 보아서 남의 감정을 꺼려서 저하고 싶은 일을 아니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참 까칠한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신채호의 단면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뉘 말을 듣고 제 소신을 고쳤던” 고쳐도 많이 고쳤던 춘원 이광수라는 점이죠.

어렸을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신채호는 영어도 기이하게 배웁니다. 영어에 능통한 우사 김규식을 선생삼아 영어를 배우는데 김규식은 그만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되고 맙니다. “문법과 철자를 꼼꼼히 익히란 말이오.” 라고 가르치려는 김규식에게 신채호는 “단어는 뜻만 알면 되는 거 아니우?”하고 대들었을 뿐 아니라 “I am a boy"를 읽으면 꼭 우리말처럼 조사를 넣어 ”I는 am a boy"라고 읽었고 한문을 해독하듯 한 문장을 읽은 뒤에 ‘하여슬람’ 하는 추임새를 넣었다기 김규식의 복장이 터질 밖에요. neighbour를 읽으면서는 네이그후부어라고 읽어서 묵음을 빼고 읽으라고 하자 내가 영어 읽는 데 영국 법 따를 것이 무엇이냐면서 대들었다니 뭐 더 볼 것이 없겠죠. 하지만 그는 그 고집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멸망사 같은 것을 줄줄 읽어대는 실력을 쌓았다니 천재는 천재였구나 싶습니다.

어이없다 싶을만큼 고집이 세지만 그 고집에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에는 타협이 없었던 인물이 신채호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사 문제였습니다.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쓴 조선혁명선언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죠. “(학교에 가면)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명존(素棧鳴遵)의 형제' 라 하며, '삼한 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 라 한 일본 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소잔명존은 일본의 전설에 나오는 ‘천황’이고 한강 이남은 임나일본부 쯤을 얘기하겠죠. 일찍이 성균관 박사를 지낸 신채호가 이런 일본의 왜곡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했고 “애국심의 원천은 역사”라는 믿음으로 우리 역사에 드리운 그늘을 걷는데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조선 상고사>를 비롯한 그의 역작들은 그 결과겠죠.

학문적 시각에서 보면 <조선 상고사>는 한계가 눈에 보이는 저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반도에 갇혀 있던 역사 인식을 만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해석하고 그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신용하 교수) 그의 업적은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요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사회의 유동 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저는 이 말을 “1만년 전부터 내려온 찬란한 우리 고대사”를 외치는 분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라고 써내려가는 그의 앙다문 입매를 그려 보면 그의 일생이 얼마나 고단하였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라고 선언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외교를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은 댕댕이 지옥에 둬야 하며 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는 놈들은 어등 지옥에 가야 한다” (신채호의 소설 ‘꿈하늘’ 중) 면서 열불을 내던 그에게도 그 평생은 ‘아와 비아’의 부단한 투쟁의 과정이었을 테니까요.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고 영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읽었던 괴팍하기까지 한 선비. 자신을 포함하여 그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던 비타협적 독립운동가.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공헌한 역사가 신채호는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사망합니다. 그는 일제 강점 이후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여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았고 해방 이후로도 60년 동안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죠. 신채호 선생의 후손은 이 고집센 할아버지 덕에 외가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신채호의 기일, 신채호의 말 하나를 곱씹어 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바로 노예정신이다.”

2006.2.22 홍도야 우지마라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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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6년 2월 22일 홍도야 울지 마라 역사 속으로

요즘은 그런 곳이 거의 없지만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뽕짝을 합창하던 추억은 언제 떠올려도 슬몃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두만강만 강이냐 소양강도 강이다로 시작해서 전국의 강이란 강은 죄다 섭렵하고 천동산 박달재부터 연락선 돌아드는 오륙도까지 헤집고 나면 목들이 잔뜩 쉬어 있곤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중의 하나 “홍도야 울지 마라.” 홍도오오야아아 울지 마아라아아아아 오빠아아아가 이이이이이이있다.... 누군가 이 익숙한 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면 백코러스랍시고 오빠가 있다~~ 오빠가 있다~~ 누군가 깝쳐서 깔깔대게 했던 노래. 그 노래의 가수 김영춘씨가 2006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여든 여덟살. 장수도 하셨고 가수 생활도 오래 했지만 그는 천상 “홍도야 울지 마라”의 가수였다. 이로써 “홍도야 울지 마라”와 연이 얽혔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우선 배구자라는 여자. 그는 구한말 유명했던 팜므 파탈 배정자의 조카였다. 무용가로서 입신하여 꽤 잘 나갔는데 최승희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하자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후 그녀는 흥행의 귀재였던 홍순언과 함께 악극단을 조직해서 성공을 거두고 동양극장이라는 극장을 설립하게 된다. 회전무대까지 갖춰진 본격 연극용 극장이었다. 1936년 여름 ‘단종애사’ 같은 작품을 띄웠다가 이왕직 즉 구 조선 왕실측의 요청으로 일찍 간판을 내린 후 무슨 연극을 올려 볼까 고민하던 연출자 박진 앞에 홍순언이 대본 하나를 내민다.
“이거 한 번 고려해 보라우.” 그는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연출가 박진이 보아하니 얼마 전 입단한 배우 겸 작가 임선규가 자신에게 보였던 대본이었다. 신파란 신파는 다 들어가 있는 유치찬란에다가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이었던지라 고개를 크게 내저었지만 홍순언도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 했다. “기럼 이케 극장을 공으로 돌릴 거가. 함 해 보자마.”예나 지금이나 사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고용인의 도리. 하지만 제목만큼은 도무지 참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은 이렇게 바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용은 그야말로 신파였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 오빠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 광호는 집에서 정해 준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홍도를 사랑한다. 둘의 사랑을 인정한 시아버지 덕분에 홍도는 광호와 결혼하게 되지만 시어머니 자리와 약혼자를 빼앗긴 옛 약혼녀 혜숙은 홍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남편 광호가 유학을 간 틈을 타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혜숙은 온갖 방법으로 둘을 이간질하고 부정한 아내로 몰아부친다. 마침내 돌아온 남편도 홍도를 외면하자 홍도는 분노를 못이겨 혜숙을 비녀로 찌른다. 아 이때 홍도의 뒷바라지로 순사가 되어 있던 오빠가 그 앞에 나타나고 혜숙은 손을 내밀며 울부짖는다. “오빠 어서 나를 잡아가시우”

여주인공은 스물 갓 넘은 차홍녀가 맡았고 오빠 역은 황철이 맡았다. 연극은 대성황을 이뤘다. 뭣보다 기생들이 떼로 몰려와서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오빠와 남동생 또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에게 홍도의 슬픔은 너무나도 쉽게 공유됐고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건달들도 기생들 따라 왔다가 꺼이꺼이 울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 들었다. “현금만 받음” 팻말을 붙여 놨어도 보리 한 주머니 들고 와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이도 있었고 급기야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출동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질서를 잡기도 했다.

이 흥행을 계기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차홍녀가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세출의 명곡 하나가 주제가로 스크린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아는 “홍도야 울지 마라”였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서구가 작사하고 가수 김영춘이 부른 그 노래. 이 주제가가 또 빅 히트를 하면서 다시 연극 흥행에 불이 붙었다. 무대에서 오빠가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부르면 온 관객이 다 따라 불렀다. 그러면서 누구나 홍도가 되고 그 오빠가 되어 펑펑 울다가 눈두덩이 부푼 채로 극장을 나갔다. 가수 김영춘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으뜸 가수로 우뚝 섰다.

여배우 차홍녀도 스타가 됐다. 홍도 한 번 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든 장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배역처럼 불운했다. 북부 지역 순회 공연을 마쳤을 때 무대 뒤에서 쓰러질만큼 지쳐 있었던 그녀는 철원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엎드리고 있는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유달리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는 그 짧은 접촉으로 천연두를 옮고 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키운 연출가 박진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녀는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거지들이 훌쩍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저 고운 배우가 우리 같은 사람 돕다가 저렇게 됐다고.

남자 배우 황철과 극작가 임선규는 해방 공간에서 이북을 택했다. 황철은 1948년 월북했고 전쟁 중에는 팔을 잃었다. 의수를 하고서 계속 연기 생활을 했고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이 홍도의 오빠가 죽었을 때 북한 정권은 사회장으로 그를 예우한다. 극작가 임선규의 경우는 좀 기구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역시 테러와 체포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함께 월북을 택한다. 아내의 이름이 인민여배우로 이름 높은 문예봉이었다. 하지만 수십년 간 만인의 여동생인 홍도를 만들어낸 이 신파극 작가는 살벌한 혁명과 생경한 구호를 그 예술적 기질에 담아내기에는 무리였던지 아내에 비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

‘홍도야 우지 마라’에 얽힌 사람들 가운데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었던 사람이 영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 김영춘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홍도야 우지 마라’를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홍도야 우지 마라>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작사가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이었다. 그의 말년은 지극히 쓸쓸했다고 전한다. 하루 하루 지리할만큼 긴 하루를 깎아 나가면서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러 대스타로 두둥실 떠오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그때 조우했을 차홍녀의 앳된 얼굴, 폐병쟁이 임선규의 허연 얼굴, 귀공자 스타일의 황철 등등의 면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2월 22일 김영춘을 마지막으로 홍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01.2.23 노동자 이옥순 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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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2월 23일 노동자 이옥순 영면

80년대 후반 “나 이제 주인되어”라는 수기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원풍모방노동조합 총무였던 이옥순이 쓴 책이었죠., 원풍모방노동조합이라면 지금 북한의 김정은 체제와 맞먹는 독재체제였던 유신 시절도 버텨냈던, 저 냉혹했던 70년대를 버텨낸 몇 안되는 민주노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노동자가 되고 그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조직 노동자가 되고 그 간부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후의 삶에 이르기까지를 담담하게 쓴 책이었어요. 그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장면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이렇습니다.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그런 고민을 토로합니다. “곗돈을 타게 되는데 이걸 동생 학비로 쓸 건지 결혼비용으로 쓸 건지 모르겠어.,” 그런데 이옥순은 동료들의 반응에 놀랍니다. 거의 모두가 결혼 비용쪽에 손을 든 거죠. 이유는 “지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러다 처녀귀신 되면 어쩌려고?”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하고 싶었던 거고,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옥순은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놀러갔다 돌아오면 분명 동생 학비로 쓰일 것”이라고요. 이옥순을 비롯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앞가림을 하기에는 그 앞을 가려 줘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지요. 본의 아니게 그들은 오지랖이 넓을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가운데 오지랖이 더 넓었던 사람들은 곗돈 타서 동생 학비 대는 오지랖에 그치지 않고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과연 여기서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는 없는지, 왜 법에 보장된 권리를 고스란히 포기하고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이옥순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80년 전두환이 그 군홧발자국을 남한 전체에 찍은 후 위원장이 수배되고 노조 간부 4명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는 상황 하에서도 원풍모방은 버티고 있었고 이옥순은 그 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 가을 최후의 날이 옵니다.

추석을 앞두고 별안간 노조 간부들에 대한 해고 통보가 나붙었고 회사는 이 게시판에 철망을 치고 경비까지 세웁니다. 회사의 정면 도발이었지요. 찌질한 남성들은 전부 빠져 나가 회사 편에 붙은 상황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부를 지키고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들이닥치는 깡패들의 허벅지를 물어뜯고 경찰의 방패에 매달리면서 마치 늑대들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는 어미들처럼 몸을 내던집니다. 이옥순이 “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지” 울부짖도록 말이죠. 아마 그녀들에게 평소에 “경찰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으면 열이면 열 “세상에 어떻게 경찰한테 개겨? 말도 안돼.”라고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옥순은, 그리고 그녀의 동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곗돈을 결혼자금으로 쓸 것”이라고 호언하면서도 결국은 동생 학비에 쏟아부어야 했던 그녀들의 현실처럼 말입니다. 닷새간의 공방. 서울 대림동을 마비시켰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최후는 참혹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5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경찰의 몽둥이에 쫓겨 맨발로 6차선 도로를 달리며 울부짖어야 했으니까요.

그 끔찍한 세월이 끝나고 감옥과 수배를 왔다갔다 하며 청춘을 다 보냈던 이옥순 앞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1990년 비전향장기수 후원 기관인 ‘나눔의 집’에서 자원 봉사를 하다가 통혁당 사건 관련자로 18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권낙기라는 사람을 만난 거지요. 마흔 셋의 노총각과 서른 여섯의 노처녀의 만남.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이옥순은 비전향장기수들 사이에서 “우리 며느리”로 불리웠고 노동운동가에 이어 ‘통일운동가’의 직함을 갖게 되지요.

남들은 권태기에 접어들 나이에 그들은 그제야 단란한 가정의 행복감을 알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키우는 재미를 알게 됩니다. 한약 도매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은평구에 집도 하나 장만했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도 눈을 떼지 않고 살던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닥칩니다. 잔기침이 멈추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을 맞은 겁니다. 그 몇 달 후 비전향장기수들 수십 명이 북한으로 송환되는데 그 장기수들은 이옥순에게 남한에서 번 돈을 억지로 쥐어 주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녀를 북한으로 초청하는데 장기수들과 북한 당국은 이옥순에게 북한 특산이라는 암 치료제까지 건네죠. 하지만 역시 이옥순은 이옥순이었습니다. 귀국해서 어떤 여성 운동가가 암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약을 뚝 떼서 줘 버립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 말이죠

나는 말년의 이옥순 부부가 헌신한 통일운동의 대의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 남편이 어느 강연에선가 신문지상에선가 “장기수들은 간첩이 아니라 통일사업을 하러 왔다가 잡힌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접하면서는 코웃음을 친 적도 있지요. 북파공작원들에게 통일운동가라는 직함을 붙일 자신이 없는 이상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교활하게 어리숙한 사람들 속여 잇속차리려고 그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일 겁니다. 실제로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은평구에 마련했던 그 집을 팔려고 하는데 부동산업자는 그 집을 와 보고 손을 내저었다고 합니다. 세들어 사는 가구들이 있었는데 그 세가 너무 터무니없이 낮아 그를 용인할 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던 거죠. 어떻게든 해 보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권낙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말 못하네.” 그 아내에 그 남편이었던 겁니다.

2001년 2월 이옥순은 뉴스 플러스 잡지와 인터뷰를 합니다. 그녀가 죽기 달포쯤 전이었지요. 병세는 완연했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게 대답하던 그녀는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은 눈물겹고 처량하고 인간적입니다.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투옥, 고문, 도피,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우리 두 사람의 40년 세월이 너무 한스러워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남편, 세상이 너무 고맙습니다.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잡지가 나온 2주 후 그녀는모진 꿈으로 점철됐던 세상을 뒤로 하고, 목숨처럼 아꼈던 두 딸과 남편을 남겨 두고 떠나갑니다. 2001년 2월 23일이었습니다.




.1916.2.24 소록도의 비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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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6년 2월 24일 소록도의 비가(悲歌)

조선 태종 때 일본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바칩니다. 근데 이 코끼리는 금새 골칫거리가 됩니다. 먹기는 무지막지하게 먹어대어 떠맡는 관청마다 비명을 질렀고 좀 성이 나면 돌보는 사람을 상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유배됐다고 하는 곳이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인데 이곳은 노루섬, 즉 오늘날의 소록도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녹도’라고 불리우기도 한 이 섬은 녹도만호가 관할했는데 이순신이 아꼈던 유능한 장수 정운이 바로 이 녹도만호였지요. 맑은 바다와 온화한 기후를 낀 조용한 섬이었던 녹도, 즉 소록도에 1916년 2월 24일 뜻밖의 운명이 들이닥칩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빈민 치료 기관을 설립하는데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역시 곳곳에 이 자혜의원을 증설하게 됩니다. 조선 사람이 고와서 그랬다기보다는 식민 통치의 긍정성을 선전하고 또 조선에서 생활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 등도 고려한 정책이었지요. 그 와중에 병의 특성상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판단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격리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물 잘 나고 기후 좋고 육지와도 가까운” 소록도였습니다.

소록도 서쪽 일부에 병원 부지가 정해지자 조선 총독부는 직원들을 보내 주민들의 토지 ‘매입’에 나섭니다. 그 매입 과정이 어떤 식이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협박과 회유에 못이긴 사람들이 나간 터에 1916년 2월 24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그 문을 엽니다. 조선총독부령 7호, 조선 땅에 세워진 19번째 ‘자혜의원’이었지요. 그리고 100여명의 환자들이 육지로부터 끌려오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청준의 두꺼운 장편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보신 분들은 그 섬 곳곳에 배어 있는 울음같은 한숨과 토악질같은 울음,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의 한과 설움이 뱉어낸 피비린내를 느껴 보셨을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짝을 이루려면 단종(斷種) 수술을 받아야 했고 소록도의 영주들로 군림한 일본인 원장들의 횡포에 죽을 고생을 다해야 했지요. 일본인 원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단종 수술대에 오른 환자 이동의 시는 사뭇 눈물겹습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를 방문하게 되면 몇 가지 그 역사와 관련한 볼거리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제 시대 세워진 비석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하나이 젠키치 2대 원장의 창덕비(송덕비)도 그 중의 하나죠. 초대 원장은 환자들에게 일본 옷을 입히고 일본식 생활을 강요한 반면 그는 조선 풍습을 존중하고 환자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습니다.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慰安會)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相助會)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라고 창덕비가 기록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조선인 환자들 사이에서 “하나이 원장은 스스로 한센병의 고통을 모르면 환자를 돌볼 수가 없다 하여 환자들 틈에서 자고 몸을 만졌고 그래도 안되자 환자의 피를 수혈하여 환자가 되어 죽었다.”는 좀 말도 안되는 전설까지 창조할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량한 일본인상은 일제 말기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슈호 마사토같은 사람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죠. 의욕적인 성장 정책(?)으로 환자 정원을 수백 명 단위에서 7천명으로 늘려 놓은 그는 환자들을 중노동에 동원하여 소록도 전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가꿉니다. 정원석으로 쓸 돌을 캐고 건물을 짓는데 손가락도 짓무른 환자들이 닥치는 대로 동원됐고 급기야 슈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하는 망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슈호 원장은 자신의 동상 앞에서 도열한 환자들의 사열을 받다가 한 환자의 칼에 찔립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기에 범인은 칼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쇳덩이에 가까웠던 흉기를 손에 묶고 있었지요. 경북 성주 출신이었다는 이춘상이라는 환자는 이렇게 부르짖었답니다. “너는 환자들에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그렇게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역사는 그런 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해방 이후에도 참혹한 사태는 이어졌습니다. 소록도에는 해방이 늦게 왔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고 풍랑으로 육지와의 연결도 늦어 8월 18일에야 알게 됐죠. 한국인 직원들은 일본인 원장에게 병원 이양을 요구했고 일본인들은 그를 수락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 후 의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과 직원들을 축으로 한 그룹이 병원 운영을 놓고 대립하지요.

여기서 말들이 엇갈리지만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에 따르면 병원 직원들은 병원 물자를 빼돌리려고 했고 의사들이 이 사실을 환자들에게 알리자 주민들이 격분하여 직원들을 습격하게 됩니다. 오재석 등 직원들은 환자주민 대표를 뽑아 협상하자고 한 후 그 명단을 확보해서는 고흥에서 치안대를 불러와서 무려 84명의 환자들을 생으로 죽여 버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환자들이 한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며 “어떤 사람은 총 세 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처넣었다”지요. (한겨레21. 2005.8.31자)해방 1주일 뒤에 벌어진 비극이었죠.

소록도를 몇 년 전 들르긴 했는데 업무적으로 간 거라 단 1시간 섬에 있다가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경치와 분위기에 흐는히 젖었던 기억이 나고, 꼭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거기에 서린 굽이굽이 사연들을 재우쳐 돌이킬 기회를 가지겠노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총독부령 7호로 또 다른 운명을 맞았던 남해안의 작은 섬 소록도는 우리 역사의 파도 속에 감춰진 우리들의 ‘게토’였고 때로는 ‘아우슈비츠’였습니다.

1986.2.25 필리핀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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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피플 파워

조선 순조 때 제주도에 기이한 외모의 사람들이 표착한다. 150년쯤 전에 조선에 왔다는 박연(벨테브레)와 하멜과는 또 다른,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고 광대뼈는 유난히 튀어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없었다. 제주 목사는 이들을 서울에 보고하고 서울 정부는 으레 하던 대로 청나라에 이들을 보냈다. 그런데 청나라도 귀찮았는지 정말로 몰랐는지 우리도 대관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조선에 되돌려 보냈다. 이 불쌍한 표류민들은 제주에서 요령성 심양까지 수천리 길을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목사도 별 수 없었다. 먹을 것이나 주고 조선말이나 익히라고 할 밖에. 그런데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흑산도 홍어 장사꾼 문순득이었다. 문순득은 놀랍게도 그들과 말이 통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송, 즉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문순득도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까지 흘러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한 파란만장한 사나이였는데 그 와중에 익힌 여송 말을 건네자 이 필리핀 사람들은거의 뒤집어지고 말았다. (문득 문순득이 타갈로그 어를 했는지 스페인 어를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결국 문순득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인들은 국적을 회복(?)했고 임금은 그들에게 여송 송환령을 내린다. 이렇듯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일찍부터 우리와 인연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가 필리핀에서 노예로 팔렸고 가톨릭 성인 김대건 신부가 공부한 곳도 필리핀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필리핀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한국 공무원들의 단골 연수지였고 오늘날 미국 대사관과 문화관광부가 들어앉아 있는 쌍둥이 건물의 설계자였다

하나 더 들자면, 한국 야당의 색깔처럼 돼 있는 노란색 역시 그 유래는 필리핀에서 왔다. 1986년 2월 25일 장기 집권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시킨 20세기의 드라마 필리핀의 피플 파워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던 것이다. 이걸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이 그 상징색을 갖다 썼고 그 이후 ‘황색’은 ‘민주당’ 내지 ‘민주화세력’의 색깔이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2월 25일의 필리핀 혁명은 우리 6월 항쟁의 전주곡과 같은 사건이었다.

왕년에는 열혈 반일 게릴라였던(또는 그렇다고 주장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을 닮았고 두 번 연임한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을 짓밟은 후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은 남한의 박정희를 닮은 그에게 암운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그의 유력한 라이벌이었던 상원의원 베그니노 아키노의 암살부터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 그를 웬 젊은이가 총을 쏘았고 (그렇다고 주장되고) 그 젊은이는 편리하게도 필리핀 보안군에 사살됐다. 아키노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아키노를 누가 죽였는지는 7천만 필리핀 국민들이 다 알고 있었다. ‘마르코스가 니노이 (아키노의 애칭)를 죽였다.’

아키노를 대신한 것은 그 부인 코라손이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투쟁 (lavan)을 뜻하는 손가락 L자 표시와 노란 깃발로 필리핀을 뒤덮었다. 그리고 1986년 운명의 대통령 선거일이 찾아왔다. 마르코스는 왕년에는 필리핀이 한 수 가르쳐 준 나라 남한이 즐겨 저지르던 부정선거를 여지없이 자행했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종료가 아니라 시작이었다. 필리핀 주교 회의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야당은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이때 스타일을 구긴 건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었다. 세계 각국이 필리핀의 추이를 주시하며 마르코스의 당선 축하를 유보하고 있는데 소련은 버젓이 축전을 보냈고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야당도 부정을 했는데 뭘”이라며 어정쩡한 가운데 마르코스 정부에 집착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섰다.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부정선거 무효를 온몸으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라모스 참모총장과 엔릴레 국방장관의 반란이었다. 이들 역시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르코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던 필리핀 군부에서 용기 있는 결단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라모스 참모총장은 한국전쟁 참전자였다. 중공군 고지를 기습하여 70여 명을 죽였지만 필리핀군은 단 한 명도 사상자가 없었던, 이리고지 전투의 수훈자였다. 라모스는 휘하 장교들과 기관단총을 메고 시위대에 합류했고 엔릴레는 군중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마르코스는 마침내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에게 이들에 대한 진압령을 내린다. 엔릴레 측도 단호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마르코스를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월 22일 필리핀의 정신적 지주라 할 하이메 신 추기경이 가톨릭 소유 베리타스 (진리) 방송에 등장했다. “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우리 국민들의 단결과 지지를 위해 아귀날도 병영 (반군의 거점)에 모여 주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두 군인 친구들에게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아귀날도 병영은 하나의 성지가 돼 버렸다. 친 마르코스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했지만 그 앞을 수녀들이 막아섰고 뒤이어 수천 수만 명의 군중이 틀어막았다. 죽음을 무릅쓴 노란색의 물결. 신부들은 설교 대신 연설을 택했고 수녀들은 그 앞에서 성호를 긋고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을 꺾고 누르려던 압제의 우두머리를 마침내 몰아냈다. 1986년 2월 24일. 이 사건은 한국 신문에도 대서특필됐고 “다음은 한국”이라는 암암리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때 5공 정권이 허둥지둥 “한국과 필리핀은 다르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냈지만 분위기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교묘하게 순번을 고른다.

하나 더 추가할 것. 원래 필리핀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공화국의 긍지, 스스로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역사, 동남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높은 국민 교육 수준과 낮은 문맹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강력한 시민 단체, 뿌리 깊은 지방 자치의 전통 등이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에는 빨리 도달했을지 모르나 그를 뒷받침할 사회 경제의 민주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이익 집단이나 계급적, 직업적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 의해 조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 부조 관계를 가진 연결망에 의해 이뤄진다"(미국 정치학자 란데)는 말이나 “의회 의원을 포함한 주요 관직 584개를 소수의 ‘가문’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학자 심블란의 말처럼, 스페인 통치 이래 필리핀을 지배해 온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보호와 후원을 등에 업고, 가문의 지배 하에 있는 식구(?)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고 자기들끼리의 독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기동했으나 그 기동은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부유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나와바리’를 구축하고 그 안의 가난한 유권자들의 ‘대부’가 되고 ‘묻지마’ 지지를 획득하는 순간, 그 민주주의는 상갓집 개도 물다가 뱉을 헝겊 막대가 되고 말았다. 2월 혁명도 그랬다. 민주주의의 적을 타도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올 시스템에 대해서는 필리핀인들이 별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고 할만한 상황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암살당한 베그니노 아키노나 그 아내 코라손 아키노나 대지주 집안이었다.

필리핀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턱도 없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필리핀을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재벌 총수 한 사람을 위해서 행정부 수반이 사면권을 행사하는 어이없는 상황, 삼성에 밉보이면 죽는다는 상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꼬락서니가 필리핀에서 빛나는 가문의 영광의 한 단면같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가난의 대물림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그 고리를 끊는 일이 파천황만큼이나 어렵게 인식되는 사회, 용은 4대 강쯤에서나 나는 것이 당연하고, 한때 오색빛깔 용들이 출몰했던 개천들은 특목고와 자사고와 어린쥐의 열풍 속에 죄다 복개된 나라라면 필리핀으로 가고 있는 정황이 아닐까.


1802.2.26 빅토르 위고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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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02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 태어나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바탕 ‘대선 멘붕 힐링 무비’로서 극장가를 쓸고 지나간 후 ‘레미제라블’의 완역본이 서점에서 각광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802년 2월 26일 그는 나폴레옹이 아직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과 왕당파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조합인데? 하고 갸우뚱할 필요 없다. 바로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의 출신성분이니까. 아버지는 아들 빅토르가 자신의 뒤를 잇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 아들은 나이 열 네 살 때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샤토브리앙은 그 작품보다는 그가 즐겨먹은 스테이크 이름으로 유명하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라고 들어나 봤나)

빅토르 위고는 그가 꿈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작가가 될 운명이었다. 원래는 왕당파적 성향이 있었지만 부르봉 왕조 최후의 왕인 샤를 10세의 정부에 의해 희곡 대본을 검열받고 무대 공연이 금지되자 점차 자유주의적인 쪽으로 그 성향이 변해 간다. 프랑스 자체도 격변이었다. 그가 ‘파리 드 노트르담’ 즉 노틀담의 꼽추를 쓸 때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불을 뿜어 부르봉 왕조가 막을 내렸고 ‘시민의 왕’ 루이 필립이 왕이 됐다. 후일 레미제라블의 주요 무대가 되는 이 1830년대에 위고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는데 그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의 애인이자 숭배자가 되는 여배우 줄리엣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서였다. 줄리엣은 이후 50년이 넘도록 위고의 반려자가 됐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위고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위고의 아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도 바람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위고가 바람만 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일으킨 봉기, 1832년 6월 봉기의 현장 근처에서 그 처참한 모습을 지켜 본다. 그가 열심히 희곡을 쓰고 있을 때 총소리가 난무했고 잠시 뒤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걸레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젊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신이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봉기가 끝난 후 아낙네들이 그 핏자국을 지우며 “그들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 텐데”는 어쩌면 그 현장에서 위고가 중얼거린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기획된 것은 1840년이었고 그로부터 위고는 근 20년 동안에 걸쳐 기획하고 저술하고 수정하고 다듬는다. 혁명과 반동, 전쟁과 폭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짓밟히고 외면되고 저버려졌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선인과 악인들의 파노라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개를 형성하고 뼈대를 갖춰 가게 된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위고의 코멘트 하나. “단테가 시로써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쩌면 <레미제라블>이 국적과 세월을 넘어 각광받는 이유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 지옥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굶어죽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야 하는 지옥, 그 지옥 앞에서 “자기 빵을 도둑 맞는 빵집 주인의 공포”를 걱정해야 한다고 우기는 어느 나라 일등신문의 칼럼이 칼춤을 추는 지옥.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고상한 문체와 어휘를 버렸다. 그래서 후일 작품이 완성된 후 사실주의 소설가 플로베르 등에 의해 저속하고 부정확한 단어를 썼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굳이 비교가 가능하다면 <태백산맥>의 그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번역도 없이!) 감당해야 했던 난감함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1848년 또 한 번의 혁명인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건설될 무렵에도 위고는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한림원 의원으로, 학파의 거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밀었고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공화국 대통령의 첫 손님으로서 위고는 의기양양 대통령궁 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강남 좌파’ 같은 형국이었고 그래서 욕도 여실히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 ‘대 나폴레옹의 작은 조카’가 공화정 정신을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흉내내 황제가 됐을 때 위고는 격노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온 귀족으로서, 한림원 의원으로서의 고상한 신분을 내던지고 펜 대신 삽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는데 가담했고 시민들의 저항을 호소하며 거리를 누볐다. 누군가 위고에게 “(선동) 팜플렛을 써야 할 때입니다”라고 하자 위고는 다음과 같은 명답을 남긴다. “아니오! 지금은 무기를 들어야 할 때요!” (“캐비어 좌파의 역사” 양영란 옮김, 워드앤코드) 나이 쉰에 이른 위고는 그의 소설 속 마리우스가 되어 시가전에 나선다. 국회의원도 픽픽 총에 맞아 나가 떨어지는 긴박함 속에서 그는 구사일생을 경험한다. 그를 구한 것은 장발장이 아니라 그의 평생의 애인 줄리엣이었다고 한다.

그는 추방되어 영국령 건지 섬에 머무르며 계속 글을 쓴다. 줄리엣과 함께 있으면서도 쥴리엣의 하녀들까지 자신의 여자로 삼는 왕성한 바람둥이 기질을 발휘하면서 그는 19년 감옥 생활을 한 장발장을 창조했고, 쥴리엣으로부터 코제트의 이미지를 완성시켰고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비감하게 끝난 1832년의 폭동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우스와 앙졸라의 폭동 30년 만에 (1862) 레미제라블을 완성했다. 그 전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빈곤한 생활에 의한 남자의 추락, 굶주림에 의한 여자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들의 쇠약이라는 현대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 작품과 같은 책도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지로 그의 <레미제라블>은 “이상한 운명과 싸우고 괴로움을 견디어 낸 위대한 사람” (장발장 묘비문)들의 희로애락과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그를 옥죄는 역사의 칡넝쿨을 절묘하게 묘사해 인류 문화사의 보물로 남게 된다.

1871년 파리 코뮨에서 그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호화롭게 살았던 그의 과거보다는 레미제라블의 작가답게 파리 코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좀 이견이 있긴 하지만)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열렬한 왕정주의자로서 전제 정치의 신봉자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점차 그는 조금씩 변하여 1848년에는 마침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단명했던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 그는 위고를 공화주의자라 하여 국외로 추방했다. 1871년에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뮨을 지지했다. 보수파의 최우익에서 그는 서서히, 더구나 견실하게 사회주의 좌익으로 옮겨갔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 반동으로 변하는데 위고는 정반대였다.”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레미제라블을 썼지만 역으로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이 빅토르 위고라는 예술가의 위대성은 더욱 커져 간 것은 아닌지.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나이 들면 이상해지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노.

1952.2.27 배정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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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2년 2월 27일 배정자의 일생 

그녀의 고향은 김해였다. 밀양부의 아전이었던 아버지가 역모 혐의를 쓰고 민씨 척족에게 피살당한 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관비가 돼 끌려갔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눈까지 멀었다는 얘기도 있으니 배정자 아니 그때까지는 배분남이라고 불리웠던 여자 아이의 유년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다 하겠다. 이후 절에 맡겨져 통도사에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이 여자 아이는 절에서 염불 외고 경 읽을 팔자 또한 아니었다. 절에서 뛰쳐나와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동래부사 정병하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개화파 인사로서 일본에 망명와 있던 안경수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김옥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옥균은 총명해 뵈는 이 소녀를 정성껏 도와 주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소개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배분남을 숫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먹이고 입히며 가르쳤다. 공부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이미 이 눈치 빠른 소녀를 밀정으로 써먹을 심산을 굳히고 있었다. 이토가 배분남에게 준 이름이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였고 배정자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은 그녀의 일생을 그 누구보다 일본에 충성스러운 조선인으로 규정지었다. 그녀는 김옥균의 밀서를 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일본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국내 진입에 성공하는데 그건 다름아닌 을미사변때 민비 살해에 가담한 군인 우범선 (농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을 암살한 고영근의 신임장을 이용해서였다. 그녀는 화려하게 한양의 상류 사회에 복귀한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화술,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밀정, 즉 정보원으로서 진가를 발휘했던 사례 중의 하나는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행을 저지한 것이다.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수차례에 걸쳐 선언했지만 일본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고 결국 전쟁은 대한제국에서 벌어질 운명이었다. 이에 친러파들은 고종을 평양 내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몽진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배정자에게 “너도 같이 가자꾸나.”라고 얘기를 흘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누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중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 냈다. 

고종 황제에게 이토의 오만방자한 서한을 전달하여 그 일로 노여움을 사 절영도, 오늘날 부산 영도로 귀양보내지기도 했던 배정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의기양양하게 한양으로 돌아오고 을사조약 이후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을 주무를 때 가히 최고의 절정기를 누린다. 그 오빠가 한성판윤 즉 서울시장으로 벼락출세를 할만큼. 그녀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을만큼. 그녀는 철저하게 일본인이 돼 있었고 일본이 동양의 맹주로서 뒤떨어진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본의 믿음에 충실했다. 한일합방이 됐을 때는 몸져 누운 몸으로 만세를 불렀던 것은 그 일례일 뿐일 것이다. 

이토가 죽은 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헌병 사령관 아카시였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출병하는 일본군에 배정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미모와 화술로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 와중에 마적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마적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니 스파이로 치면 정말 대단한 능력의 보유자였다. 그 뒤에는 만주 일본 공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인들의 동태를 사찰하고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 공으로 그녀는 ‘중추원 참의’에까지 오른다. 그녀는 정말로 ‘몸과 마음을 바친’ 친일파였다. 아니 그냥 일본인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적의 자식으로 관비가 됐다가 기생으로 팔려갔다가 여승이 됐다가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조선 땅을 떠나 이국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자에게 민족 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조선이란 멸시와 천대의 눈길과 퀴퀴한 냄새와 남루한 입성의 사람들로 기억되는 ‘저주 받은 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수 명의 남편을 갈아치우고 애인이 끊일 때가 없었으며 밀정 노릇에서 은퇴할 환갑 바라보는 나이에도 30년 연하의 애인을 두고 있었던 이 에너지 넘치는 여자에게 조선은 과연 어떻게 비쳐졌으며 일본은 또 어떻게 비쳐졌을까. 무언가를 숭배할수록 그에 반하는 대상에 대한 경멸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힘이든 신이든 돈이든 외국이든. 아마 배정자도 그랬을 것이다. 

해방이 오고 그녀는 반민특위에 끌려간 여섯 명의 여성 가운데 부동의 1순위였다. 하지만 “일본이 이길 줄 알았다.” (서정주)나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이광수)의 찌질함과는 달리 일본 제국 최고의 밀정 중 하나였던 배정자의 사과는 시원스런 구석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겠습니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배정자도 풀려났으나 너무나 밀정 행각이 뚜렷하고 유명했던 그녀는 다른 친일파들처럼 화려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1952년 2월 27일 전쟁의 포화가 여전히 불을 뿜던 가운데의 어느 날, 하필이면 배정자의 여든 두 번째 생일이었던 그날, 배정자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 앞을 스쳐갔을 남자들, 철모를 때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첫남편 전재식, 두 번째 남자 현영운, 마적 두목, 전라도 갑부의 아들 조모, 30년 연하의 순사 등등의 인물들 가운데 그녀가 가장 크게 떠올린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였을 것이다. 그녀의 삶을 실질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고국의 누구도 아닌 일본인이었다. 배정자는 스스로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60.2.28 대구에서 솟은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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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타오른 불꽃

‘동방의 모스크바’ 대구의 별명이었다. 1946년 10월의 민중봉기부터 대구 경북 지역의 좌익세는 꽤 강력했고 전쟁으로 한바탕 싹쓸이가 진행된 뒤에도 도시 분위기는 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눈에 가시 중의 하나였던 ‘대구매일신문’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라 할 대구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거니와 대구는 어디에 내놔도 그 반골 기질이 뒤지지 않는 고장이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하필이면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가서 급서하자 이승만에 반대하던 많은 국민들은 실의에 찼다. 신익희도 호남선에서 배를 쥐고 쓰러졌고 조봉암은 이승만이 죽여 버렸다. 그나마 야당의 거목이라 할 조병옥마저 저렇게 됐으니 어쩌면 이승만 박사란 양반은 어쩌면 운이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전직 가카를 우러러 그렇게 말하듯이. 그런데 희망은 작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여든을 넘었으니 아니할말로 어느 날 화장실 가다가 쓰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통령에라도 야당 후보를 당선시킨다면 그래도 위안이 될 터였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치를 정권이 깨닫지 않을 리도 만무. 그들은 막대한 부정선거는 물론 치졸한 선거 개입에 나선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시내 고교들에 일제히 등교령이 떨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 많았던 섬유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출근령이 전달됐다.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전날 토요일에 급작스럽게 단축수업을 실시하거나 조기퇴근을 시키더니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토요일은 자유당 대구 유세였고 일요일은 민주당 대구 유세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 유세장에 갈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놓으려는 정권의 얄팍한 술책.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다”는 찌질함의 극치는 그때의 이 대통령 정권도 마찬가지로 발휘했다.

경북고등학교는 갑자기 시험을 앞당겼고 대구상고에서는 난데없는 졸업식 송별회 연습이 거행됐다. 대구여고에서는 어설픈 무용대회가 펼쳐졌고 별안간 떨어진 소집령에 학생들이 반발하자 그럼 영화라도 보자고 애걸하는 곳도 있었다. 어떤 경북고등학교 재학생의 추억에 따르면 영화 단체 관람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서 영화 <철도원> (추억의 이탈리아 명화)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가운데 으뜸은 대구고등학교였다.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유달리 자연친화적이었던지 이 날 ‘토끼사냥’을 핑계로 제자들을 불러냈다. 몽둥이 하나씩 들고 산자락을 뛰어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상을 뛰어넘는’ 찌질한 정권의 행동에 학생들은 불똥이 튄 듯 분노한다. 이기 뭐고? 2월 27일 토요일, 경북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 이대우, 대구고등학교 학생회장 손진흥 등 대구 시내 학교 대표 7-8명이 이대우 학생의 집에 모였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가시지 않은 ‘고딩’들. 그러나 그들의 각오는 사뭇 비장했다. “이거 하고 나면 우리는 퇴학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낀데 감옥 갔다 와서 취직은 우예 하고 뭐하고 먹고 사노.” 그러던 그들은 뜻밖의 노래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유정천리’. (대구일보 김풍삼 고문 증언) “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즉 감옥도 가고 취직도 안되고 인생 조질 거 같으면 까짓거 두메 산골에 들어가 감자라도 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경상도 특유의 확인 구호도 있었으리라. “댔나?” “댔다!”

다음날 손진흥은 진창밭이 된 길을 자전거를 낑낑거리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시위 결정을 재확인했다. 교사들의 만류가 완강해 시위가 무산된 곳도 있었지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은 거리 진출에 성공했다. “인류 역사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고,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디 그 어느 역사책 속에 있었던가?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선언문 중) 대구 중앙로를 내달리면서 그들은 부르짖었다. “일어서라 동방의 횃불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경찰이 가장 곤욕을 치른 것은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때였다. 경찰은 곤봉을 들었지만 학생들은 토끼몰이에 쓰려던 작대기를 쳐들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대구고등학생들을 겨우 진압한 경찰들은 대구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무지하게 욕했을 것이다. “언넘이 토끼사냥 한다 캐가꼬!!!!” 그렇게 2.28 시위가 대구를 진동했다. 이 시위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그 두 달 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 시위의 전초라는 점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후 반세기 가까이 한국 사회를 진동했던 학생 시위의 시발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한국 ‘청년학도’의 깃발을 처음 들어올린 것은 시대를 고뇌하던 명문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시위는 다른 시위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시민들이 그 시위에 뛰어들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을 여전히 강고해 보였고 학생들은 무더기로 잡혀가고 징계를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정말로 “가련다 떠나련다”를 불러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소해 보이는 불똥들은 이미 바짝 말라 버린 들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불똥들은 3.15 부정선거라는 기름 세례를 받으며 불길로 화했고 불길은 들불로 타올라 이승만으로 하여금 “가련다 떠나련다 프란체스카 손을 잡고~~~”를 부르며 하와이로 가게 만들게 된다. 2월 28일의 대구가 없었으면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고 3월 15일의 마산이 없었으면 4월 19일의 서울이 없었다. 적어도 1960년 2월 28일의 대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 자격을 갖춘 도시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권력에 저항하던 그 앳된 의지들이 어느 세월엔가 “한 집 건너면 청와대와 연결되는” 환상들로 둔갑했는지. 2.28 데모에 나섰던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우리 나라 현대사를 어떻게 아도를 쳤는지.

그렇게 역사는 가끔 어처구니없는 역설과 황당할이만큼의 역전을 즐긴다. 그래도 2월 28일 ‘유정천리’를 부르며 자신들의 미래를 희생하겠노라고 종주먹을 내밀고 눈을 빛내던 까까머리 검은 교복의 고등학생들은 여전히 우리 역사의 희망이고 자산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는 위대했다.


1937.3.3 일송 김동삼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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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3월 3일 일송 김동삼 옥사 

1923년 상해에서는 그 전에는 당연히 없었고 그 후로도 드물었을 행사 하나가 열린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그 내부의 파벌 다툼은 잦아들 줄을 몰랐고 어떤 이들은 임정의 미적지근함을 비판하여 떠나기도 했으며, 미국이다 러시아다 해외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입장들도 저마다 다 다른 상황, 어쨌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필요했다. 1923년 1월 3일 그 꿈이 이루어진다. 국내와 중국 상하이, 북경,만주,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인 것이다. ‘국민대표회의’의 개막. 그럼 그 의장은 누구였을까. 각지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그 회의를 이끈 이로 추대된 이는? 그는 안창호를 비롯한 쟁쟁한 인사들의 추대를 받아 의장직을 맡은 이는 김동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퇴계의 수제자로 이름 높은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고 경북 안동 사람이다. 안동이라는 곳은 참 재미있는 고장이다. 꼬장꼬장하고 꽉 막힌 양반들의 근거지이면서 수백 명의 진취적인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수제자라 할 학봉 김성일의 후예인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앞(川前)마을 출신만 해도 독립유공자가 수십 명이 넘는다. 의성 김씨 종손이었던 김용환은 이른바 파락호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종손 재산을 노름판에 다 털어붓고 심지어 외동딸의 장롱까지도 노름판에 갖다잡히는 망나니로 소문났던 김용환은 사실상 노름판을 빙자해 독립 운동 자금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집안에 독립운동가도 많고 자신도 그 화를 입은 적이 있는 터라 철저한 위장으로 평생을 지샌 결과였다. 김동삼 역시 그 의성 김씨의 일원이었다. 

일찍이 신문화에 눈을 뜬 그는 이 보수의 고장 안동에서 개혁지향적인 동료들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우고 개화에 앞장선다. 그는 협동학교의 발기인이었다.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은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찌기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한가, 우리 안동 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협동학교 발기인) 그러나 인습의 힘은 무서웠다. 위정척사 외치는 안동의 의병들은 '일본놈처럼' 머리 깎은 신식학교를 공격, 교사 세 명이 죽는 참극을 빚었던 것이다. 

학교 교장을 맡은 유인식은 집안으로부터 절연을 당했고 안동 보수 유림의 반발은 학교를 폐교의 위기로까지 몰아갔지만 이 위기로부터 학교를 구한 것 또한 김동삼을 비롯한 청년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최고의 ‘꼴통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침내 1911년 협동학교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김동삼은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고국을 떠난다. 석주 이상룡 등 안동의 진취적 유림들과 뜻을 함께 하고 아버지 김대락 이하 전 가족이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가장 고루한 고장의 진취적인 행렬. 안동에서 온 가족이 행랑 챙겨 만주로 떠나버린 것은 100가구를 넘었고 그 총원은 1천명을 헤아렸다. 김동삼의 고향 내앞마을, 한때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룬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만 150여명이었다. 

만주에서 김동삼은 안동에서 그가 하던 대로 학교를 세우고 사람을 길러 냈다. 그는 ‘남만주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무장투쟁론자였으며 좌우와 지방을 망라하는 단일한 민족 대오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김긍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국 동삼성 즉 만주의 동포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겠다는 뜻으로 김동삼이라는 이름을 지어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첫머리에 언급한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표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한 이래 그는 만주로 돌아와 무장투쟁에 골몰했다. 두 번이나 상해 임시정부 국무원에 임명됐지만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사돈 이원일의 회고처럼 “사돈이 된 이원일 선생의 회고록에는 "담요 한 장을 메고 싸구려 좁쌀 떡으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도 싸이혜라는 여름신발을 신고 백여 리씩 걸으며” 동포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일경에 체포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0년 형을 언도받은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는데 거기서도 의기를 잃지 않아 함께 수감돼 있던 사회주의자 김철수에 따르면 그의 위세는 당당했으며 수감자들의 지도자격이 되어 형무소장을 무릎꿇려 사과하게 만들었던 강골이었다고 한다. 그가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8년만에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를 챙긴 것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한때의 동료 최린과 마주했을 때 “최린은 이미 죽었다!”고 일갈하고 최남선이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 주고 가자 그 돈을 들고 십리를 달려가 최남선에게 던져 주고 돌아올 만큼 서릿발같은 성격의 만해였지만 김동삼의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옮긴 뒤 하염없이 울었다. 평생에 그렇게 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만큼. 김동삼의 유언은 짤막하고 비장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무엇하느냐.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독립되는 것을 지켜보리라.” 그리고 한용운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 사람이 아니고 어찌 대사를 이룰 수 있으랴. 

1937년 3월 3일 김동삼이 죽었다. 그 후손들의 고생은 여전하고 오히려 더욱 비참했다. “ 일송의 아내는 만주로 간 후 남편을 만난 것이 두 번뿐이었다. 가족을 돌보던 동생은 1920년 독립군의 무력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맏손자 장생은 해방 후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다가 행방물명이 되었다. 만주에 남은 가족들은 마적 때문에 땅을 일군 취원창을 떠나야만 했고, 공산화 이후에는 취원창에서의 땅이 넓었다고 지주 계급으로 분류되어 고난을 당했다. 일송의 맏아들 정묵은 그때 맞아서 앓다가 195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 일송의 부인이 역시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맏며느리 이해동은 남편과 아들을 잃고 후에 귀국을 했다. 일송의 손녀 덕생은 남편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신의주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 늦게 본 딸 영애는 58년이 지난 1989년에야 국립묘지에 있는 일송의 가묘에 성묘를 할 수 있었지만 국적 문제로 힘들어하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김희곤 저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1954.3.5빨간 마후라 김영환 준장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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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월 5일 해인사를 구한 빨간 머플러 지다 

고 신상옥 감독의 영결식장. 난데없는 공군 군악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숙연해 마땅한 영결식장의 분위기와 걸맞지 않는 신나고 힘찬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건 “빨간 마후라”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로 시작하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흥얼거리는 구전가요의 지위에 오른 이 노래는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였고 공군측은 이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특별히 이 노래를 바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역시 센스 있는 공군) 

빨간 마후라 하면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 하면 빨간 마후라. 그런데 이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1952년 3월 5일 애기를 몰고 비행 도중 산간지대에 추락, 숨진 김영환 준장이었다. (사망 시 대령) 그는 일본 관서대학 법대를 졸업했지만 일본학생항공연맹에 가입, 비행기 조종술을 익힌 사람이었다. 함흥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 중 종전을 맞았다. 어 친일파? 발끈하실 분도 계시겠으나 넘어가자. 조선 인민군 공군의 아버지라 할 이활도 일본 항공학교 출신이니까. 

미군정 하에서 국방경비대는 창설됐고 육군은 물론이고 해군도 그 대오를 갖춰 갔지만 공군은 가장 지지부진했다. 미군정이 한국에 공군을 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종할 사람이나 있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군 창설을 전제로 7인의 장교들이 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하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산파들이 된다. 그 가운데 김영환은 유달리 쾌활하고 구김살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의 사무실에 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웬 비행기들이 한강다리 아래를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 기절초풍할 소식에 진위를 알아보니 미국에서 막 도입된 훈련기를 잡아탄 세 명의 악동들이 친 장난이었다. 김영환과 김신 (백범 김구의 차남), 그리고 장성환이라는 이였다. 김정렬의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김정렬은 (김영환의 사촌형이기도 한데) 노발대발하여 이들을 영창을 보냈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장난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이화여대에서 민원이 들어왔다. “웬 비행기들이 학교 위를 저공비행해 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난리가 났소!” 김정렬 총장은 또 한 번 얼굴을 붉혀야 했다. “내 이놈들을 그냥!” 

전쟁이 터졌다. 김영환을 위시한 공군 장교들은 초반에는 연습기 위에 올라타고 수류탄을 까서 떨어뜨리며 싸웠고 전투기를 갖추게 된 다음부터는 갖가지 작전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다. 이 전쟁 와중에 탄생한 것이 빨간 마후라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있다. 하나는 이 장난기 가득한 파일럿 김영환이 사촌형수를 만나러 왔다가 그 붉은 색 치마를 보고 “형수! 그 치마 천 남았으면 나 마후라 하나 만들어 주! 조종복에 잘 어울리겠소!” 해서 싹둑싹둑 잘라 만든 마후라를 매고 돌아온 것이 전 공군에게 퍼졌다는 설 하나, 비행 중 전투나 불의의 사고로 착륙하게 되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고 판단하고 시장에서 빨간 인조견을 구해 만들었다는 설 하나. 그 어느 것이든 빨간 마후라의 원조는 김영환이었다. 그런데 막상 불시착한 뒤 그는 빨간 마후라가 필요없었던 것 같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중 섬진강변에 불시착한 뒤 근처에 그득한 빨치산들 때문에 동료들이 애가 타서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호위하는 가운데 그는 여유작작 수영을 즐겼다고 하니까. 

이런 걸물이 가장 빛나던 순간은 역시 1951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리산을 위시한 소백산맥에는 빨치산들이 무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산사람’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을 오가며 ‘제2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산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한 구조물을 폭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구조물이란 뜻밖에도 가야산 해인사였다. 8만대장경이 있는. 

정찰기는 연막탄을 해인사 경내에 떨어뜨렸다. 이제 네이팜탄 몇 개 떨어뜨리면 천년 고찰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아울러 몽골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지성으로 조각했고 임진왜란의 참화도 피했던 불굴의 기념물 팔만대장경도 땔감이 될 판이었다. 그런데 편대장 김영환은 공격을 머뭇거린다. “뭘 하고 있나?” 하는 독촉과 “적들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하는 부하의 채근을 들으면서 편대장 김영환은 중대한 명령을 내린다. “공격하지 마라. 공격하지 마라.” 그는 해인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안 장경각에 든 천년의 세월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강 다리 아래를 비행기로 통과하여 사람들을 기겁시킨 악동은 그렇게 국보를 구한다. 명령불복종을 따지며 “사찰이 나라보다 귀하냐?”고 힐난하는 미군 장교 앞에서 이 왕년의 악동 김영환 편대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라보다 귀한 사찰이야 없겠소만 해인사는 공비(토벌)보다는 귀하지 않겠소.” 

우리 나라 어디를 가도 문화재 앞의 팻말에는 대부분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까마득히 옛날에 창건되거나 조성되었는데 몽고 침략, 임진왜란 아니면 모모한 화재로 불타 없어진 뒤 다시 지은 것이라”는 식이다. 자칫하면 해인사 역시 그 이름에 오를 뻔 했다. 우리 역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오리지널’ 문화재도 자취도 없이 사라질 번 했다. 하지만 그를 막은 건 여유작작한 하늘의 사나이 최초의 빨간 마후라 김영환이었다. 그는 최후까지도 마치 전설같았다. 강릉 공군 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1954년 3월 5일 대관령 어느께에선가 자취도 없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수색대가 그의 흔적을 더듬었지만 그의 애기도, 그도 태백산맥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비행기 위에서 굽어보는 경치에 감탄하다가 바다에라도 빨려들어간 것인지, 하늘로 솟았던 것인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김영환 준장 (추서)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니 세상에 그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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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3.6 수사반장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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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6일 수사반장 전파 타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와 용의자가 함께 보며 몰입하던 드라마가 있었다.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비트 강한 주제 음악과 함께 떠오던 흑백 화면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에 젖어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수사반장 최불암과 그 주변에서 심각한 표정 짓고 있던 형사들, 험악하지만 사연이 있던 범인들이 등장했던 드라마 <수사반장>이 1971년 3월 6알 첫 전파를 탔다. 

최불암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방송 초기에는 제작자와 연기자들의 열정에 비해 그 반응이 시원찮았다고 했다. 자신과 김상순 조경환 등 탈렌트들은 경찰 연기를 위해 경찰서 견학도 다니고 멋있게 범죄자를 제압하는 훈련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최불암은 당시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로 부하 형사 역의 김상순보다도 나이가 세 살이나 적었던지라 중년의 반장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희끗하게 물들이고 이마에 주름살까지 그려 넣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경향신문 1997.10.4 인터뷰 중) 수사반장 제 1회에는 이후 그후로도 오랫 동안 브라운관을 장식하는 여배우 김영애가 아리따운 여경으로 나오기도 했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MBC 자체의 기획이라기보다는 정부의 지침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고도성장 시대는 수많은 시대의 멀미와 탈락과 아픔을 낳았고 범죄 또한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나쁜 놈들 때려잡는 뭐 그런 드라마 없나?” 고위층의 이런 뜻이 전달됐고 경찰 드라마가 기획됐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별 인기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조기종영의 뜻을 표했고 최불암은 이에 광고까지 직접 따내고 다니며 드라마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또 드라마 또한 생명력을 갖게 되면서 본연의 ‘계몽’ 아닌 사회적 리얼리티와 현실의 아픔을 건드리게 되면서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한다. 

최불암의 극중 역할은 ‘박 반장’이었다. 그가 하얀색 (흑백TV로는 하얀색으로 보일 밖에) 바바리 코트를 입고 골목을 걷다가 범죄자의 습격을 받아 쓰러지는 장면은 내 5살 무렵의 몇 안되는 기억으로 남아 있거니와 바바리코트의 박 반장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이나 도무지 탤런트 최불암과 떨어지지 않는 이미지였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최불암에게 바람난 남편을 잡아 달라고 쳐들어온 부인도 있었고, 엉뚱하게 최불암을 찾아와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고 눈물을 흘리는 전과자들도 숱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최불암 아저씨도 훌륭했다. 그들에게 “행상이라도 하라”며 사준 리어카가 한 두 대가 아니었다니. 

의외의 일이지만 수사반장을 그렇게 많이 봤어도 스토리 전편이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기억의 잔상에 남아 있는 것은 사건의 고비고비마다 상대를 측은하게, 다 안다는 눈빛으로,“왜 그랬니? 이놈아” 하는 아버지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박 반장의 모습이다. 이를테면 아마도 최인호의 소설의 모델이 됐고 다른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카빈총 강도 사건, 자신의 가족을 인질극 끝에 죽여 버렸던 사건을 극화했을 때, 나는 그 스토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와 자살로 끝난 그 현장에서 박반장이 실려 나가는 시신을 보면서 지었던 표정만큼은 선연하게 간직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참담함과 경찰관으로서 이런 참극을 막지 못한 죄책감, 인간으로서 못볼 꼴을 봐야 했던 자괴감 등이 뒤범벅이 되어 말없이 시신들을 쫓던 그 얼굴 말이다. 하나 더 들어 볼까. 무슨 사연인지 사람을 죽여 장독대에 감췄던 젊은 여자에게 최불암이 장독을 열어 보라고 한다. 이미 박 반장은 그녀가 범인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독을 열자 나타난 것은 간장 뿐. 코너에 몰리다가 벗어난 듯 반색한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됐죠?라고 묻자 박 반장은 이렇게 얘기했다. “한 번 저어 봐. 손을 넣어서.” 그때 무너지는 여자, 그리고 그를 냉철하게 지켜보면서도 득의양양하기보다는 안타까와했던 우리의 박 반장. 

물론 현실과도 다른 점은 많았다. 그 시절 강력계 형사들은 수사반장처럼 신사적이지 않았고 때려 조지고 고문을 통해 답을 내는 경우도 많았기에 어떤 범죄자들은 경찰들에게 “왜 수사반장처럼 안하냐.”고 했다가 작살이 나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고 한다. 또 우리는 <살인의 추억>에서 보았지 않은가. 연쇄살인범을 쫓다가 시위 진압에 동원되어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채야 했던 강력반 형사의 슬픈 리얼리티를. 하지만 <수사반장>은 나쁜 놈들 때려잡는 정의의 경찰의 구도에서 벗어났고 (또는 벗어나게 됐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로 남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기억. 데이트하던 남녀가 불량배들의 습격을 받는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도망갔던지, 빌었던지 하여간 혼자 무사했고 여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이에 한맺힌 남자는 깡패들을 기어이 찾아내 그들을 죽인다. 남자를 체포하는 수사반장. 그때 남자의 표정과 박 반장의 얼굴. 말없이 남자의 등을 떠미는 조경환 형사와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는 김상순 형사. 적어도 그 순간 나에게 그들은 탤런트가 아니었다. “씨바 이 새끼를 잡아넣는 게 맞는 거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투덜거리면서 퇴근해서는 자기들 같아도 그랬을 거네 그러면 안되네 하면서 말싸움할 법한 형사 아저씨들이었다. 

<수사반장>은 80년대 초반 1차 폐지됐다. 그 이유 또한 웃긴다. 최불암씨의 증언. “5공 출범 이후 새로 온 사장이 드라마 세 개를 폐지시켰어요. <113수사본부> <암행어사> <수사반장> 이유는 5공에서는 반공태세가 잘 돼 있고 암행할 이유도 없고 치안도 안정돼 있으니 이런 드라마는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다는 거였죠.” 그러나 5공의 판단은 틀렸다. 시청자들은 수사반장의 폐지에 항의했고 얼마 뒤 부활했고 80년대 10대 사건 시리즈를 재연하면서 그 화려한 막을 내렸던 것이다. 사회가 발전할 수록 범죄의 그늘은 깊어졌고 그 그림자는 빛의 세기만큼이나 칠흑같이 검었던 것이다. 박반장이 남긴 명언처럼 “빌딩이 높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졌던” 것이다. 

1937년생 김상순 형사와 1940년생 최불암 박반장은 아직 생존해 있지만 조경환 형사와 막내 형사 노릇 했던 남성훈 형사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다시금 그들의 명복을 빌며 아울러 우리 곁에 있는 수사반장과 형사, 그리고 수사반장에서 40여 회에 걸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이계인씨, 역시 범인역 단골이었던 변희봉씨 등의 건승을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띠 띠리 디리리리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1898.3.10 만민공동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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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의 시작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 거리는 부산했다. 단발 입고 양복 입은 개화 신사부터 아직 상투에 갓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 머리를 땋은 소년들, 나무꾼들, 장사치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종로 거리로 몰려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발걸음과 표정은 단호하기 이를데 없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0만을 밑돌았지만 종로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1만을 넘어섰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인구 천만 잡고 50만의 인파가 종로를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러시아 놈들에게 나라를 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우렁차게 연설을 시작하자 종로 바닥은 그대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난무하는 집회장이 되어 버렸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왕이 황제가 되고 왕국이 제국이 됐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열강들은 다투어 대한제국의 이권을 뜯어갔고 러시아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베베르 공사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그 뒤를 이은 스페이에르 러시아 공사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이 무렵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은 오늘날의 부산 영도였다. 

러시아는 경치좋은 태종대가 있는 이 섬을 조차하여 자신들의 해군 함대의 석탄 저장소를 두고자 했다. 독립협회 등 한국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잇단 성토대회를 열었지만 친러파가 장악한 정부는 절영도 (영도) 조차를 허용할 기세를 보였다. 거기에 한러은행이라는 것이 생겨서 러시아의 경제적 침략까지도 염려되는 국면에 이르자 독립협회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보고 대규모 집회를 조직한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의 시작이었다. 현공렴, 홍정후, 이승만(우리가 아는 그 사람) 등이 백목천 파는 가게 다락에서 사자후를 토했고 의장은 쌀장수 현덕호였다.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그들의 연설에 동조했고 허약하기 이를데없는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제국을 만만한 호구에 깨지 못한 은자(隱者)의 나라로 보고 있던 서양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시민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틀 뒤 3월 12일에는 또 수만 명이 몰려 러시아를 성토하며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번에는 한 발 더 나갔다. 시위대 군인들이 해산을 시도하자 돌을 던져 그들을 물리쳐 버린 것이다. “절영도 조차 반대! 아라사놈들 물러가라.” ‘깨어있는 시민’은 언제나 무능한 정부에 위협적이다.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했고 러시아는 요동으로 석탄 저장소를 옮겨야 했다. 

한 번 자신의 위력을 인식한 대중만큼 용감한 존재도 드물다. 서울 시민들은 연일 토론회를 열며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자주독립의 미래를 열변에 실었다. 초기에는 독립협회가 주도했으나 이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달에 걸쳐 집회가 이어졌고 급기야 10월 1일에는 철야 시위가 시작됐다. 근대적 법제도의 실시와 간세배들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무려 12일 동안 시민들은 덕수궁 앞에서 철야하면서 황제에게 탄원한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 와 장작으로 기부하고 열정적인 시민들은 한뎃잠을 자며 그 시위를 지켰다. 결국 정부가 또 한 번 굴복한다. 박정양, 민영환 등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래도 만민공동회는 끝나지 않았다. 근대적 의회 설립과 간신배 축출 요구는 지속됐고 점차 격화됐다. 박정양 등 관료들까지 참여한 관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그 개막 연설자는 뜻밖에도 백정이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이 대신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토해 낸 부르짖음은 이러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전제군주로서의 권력을 포기할 수 없던 고종은 이미 만민공동회를 짓밟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6월께에 이미 독립협회에 맞선 황국협회를 조직해 놨었고 3차 만민공동회에서 결의되어 제출된 헌의6조를 받아들이는 체 하면서 전국의 보부상들을 집결시켜 만민공동회를 습격한다. 이 와중에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지만 11월 말 쏟아지는 초겨울비 속에서 서울 시민들은 감동적인 시위를 벌인다. “일반 농민, 나무꾼, 종로의 시전 상인들, 기생과 찬양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 심지어 걸인과 아이까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더 단호했다. 외국에게는 갈대보다 못하게 휘청거렸던 정권이지만 자국 국민들의 개혁 호소에는 철권을 휘둘렀고 이간질을 서슴지 않았으며 제 백성을 사주하여 제 백성을 쳤다. 백성들이 그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충성을 다짐했던 군주는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위해 백성들의 뒤통수를 쳤다. 결국 자신의 백성을 패배시킨 군주, 내부로부터의 개혁의 싹을 잘라버린 군주의 나라는 7년 뒤 외교권을 잃었고 12년 뒤에는 나라 자체의 이름이 없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1898년의 봄부터 겨울까지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은 뭔가 바뀔 것 같은 희망과 뭔가 바꾸고 싶은 열정으로 그득했다. 마치 110년 뒤의 ‘촛불 시위’처럼. 연일 철야하면서 서울 거리를 뒤덮고 공권력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스스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가 어떻게 끝났고 그 뒤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보면 더럭 겁이 난다. 스스로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시민의 요구가 위정자나 기득권층의 사사로운 이권에 질식하는 나라가 잘 될 리가 없었다는 것은 만민공동회의 전말이 입증하고 있으므로. 2008년 서울 거리를 뒤덮었던 100만 서울 시민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

1919.3.11 열여섯의 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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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9년 3월 11일 열 여섯 살의 독립만세 

노래 <이 산하에> 2절은 이렇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춘삼월 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메인 그 함성 소리 고요히 이 어둠 깊이 잠들고 바람 부는 묘지 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이 2절은 기미년 3.1 항쟁을 노래한 것이다. “3.1운동” 하니 어떤 어린 친구들은 새마을 운동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같던데 3.1 운동은 무려 7500명이라는 사람들이 죽어간 유혈항쟁이었다. 물론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인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만세 시위를 통해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전 세계에 입증시켰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의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항쟁은 시작됐고 기독교 천도교의 거점이라 할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3월 10일 이후는 만세 소리가 완연하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학생들이 경부선과 호남선 열차를 타고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독려했으며 고종 황제의 장례식 참관을 위해 상경했다가 지방으로 내려간 이들이 전한 만세 시위 소식은 남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반도 동남쪽 끄트머리의 부산도 그랬다. 부산은 옛날부터 왜관이 있던 곳이고 최초의 개항지였으며 1919년쯤에는 일본인이 부산 인구의 반을 차지할만큼 그 기세가 등등했다. 당연히 우글거리는 상전들을 모시고 사는 부산 사람들의 속은 편할 리가 없었다. 그 감정을 불쑥 드러낸 것이 1916년 전차 사고로 인한 시위다. 오늘날의 부산 범일동 부근에서 전차가 조선인 4명을 치고 그 중 1명이 사망하자 삽시간에 모여든 부산 시민들은 돌팔매를 퍼붓고 전차를 뒤집어 버렸고 이를 저지하려고 달려온 순사가 탄 전차마저도 박살을 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차에 3월 1일의 소식이 전해졌으니 부산 역시 조용할 까닭이 없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내려온 서울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읽어 주며 부산 학생들을 독려했고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부산의 독립만세의 일성을 가장 먼저 터뜨린 학생들은 뜻밖에도 나이 열 여섯의 앳된 일신여학교 (오늘날 동래여고) 학생들이었다. 그 주역은 교사 주경애였다. 그녀는 부산상업학교 등 부산의 다른 학교 교사,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3월 10일 수업을 마친 후 상기된 표정의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모여들었다. 

“어머니께서 저를 출가시킬 때 쓰려고 장만해 둔 혼수감 목양목을 어머니 몰래 끄집어내서 기숙사로 가지고 와서 초저녁에는 기숙사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밤 열 시가 넘어 불빛이 창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이불로 창을 가리고 목양목에다 대접을 엎어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붉은 물 검은 물로 칠해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일신여고 졸업생 김반수의 증언) 

나이 열여섯. 요즘으로 치면 중3과 고1을 왔다갔다 하는 나이. 댕기 머리의 앳된 여학생들이 쪼르르 기숙사로 숨어들어 혹시나 누가 무슨 눈치라도 챌까봐 밤 늦도록 벽장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던 풍경을 떠올려 본다. 잔뜩 겁은 먹었겠지만 서로 서로 쉿 쉿 입에 손가락 대 가면서 초침 가는 소리만 고대하던 벽장 속의 소녀들을. 혼숫감으로 사용할 천 움켜쥐고 대접을 얹어 동그라미를 그리고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위에 태극을 그려넣던 모습을. 그렇게 그들은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해가 기울었을 때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밤새 만든 태극기 100 여장을 옷 속에 감추고 교문을 나선다. 그 대열에는 외국인 교사들도 합세하고 있었다. 밤 아홉 시의 부산 좌천동 거리. 콩당거리는 가슴을 태극기로 다독이던 이들이 기어코 부산 경남 최초의 만세 소리를 내지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이게 우리 국깁니더 받아가이소. 조선은 독립했습니더. 만세 부릅시더. 만세 부릅시더. 시민들의 호응도 열렬했고 시위는 밤 11시까지 이어진다. 경악하여 출동한 일본 경찰이 여학생들과 교사들을 연행하면서 일단 마무리되긴 했지만 여학생들은 그 서슬 시퍼런 경찰 앞에서도 맹랑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뺏으면 돌려 달라고 웁니더. 하물며 우리는 나라를 돌려 달라는 건데 뭐가 나쁩니꺼.” (일신여학교 학생 김응수) 

학교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학생들은 6개월, 교사들은 1년 6개월 선고를 받는다.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거사에 참여했던 여교사 임말이와 그 동생 임망이(학생)이 친척이던 경찰에게 논의 전말을 다 털어놓은 뒤 석방되자 이 두 ‘배신자’의 추방을 전교생이 요구했고 열흘간의 동맹 휴학 끝에 결국 이 둘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옥중의 교사와 학생들이 돌아올 때까지 졸업식을 거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버텼다고 한다. 일신여학교 시위는 이틀 뒤 동래고보의 만세 시위로 이어졌고 이어 만세 소리는 부산 경남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신여학교가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결코 잊지 못할 박차정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인)과 유신 독재에 맞서 투쟁했던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박정희 대통령도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야당의 맹장 박순천 등의 맹렬 여성들을 낳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 박시연, 학생 김반수, 심순의, 김응수, 김탄출, 김신복,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김봉애, 김복선, 이명시...... 1919년 3월 11일 부산을 뒤흔들었던 만세의 주인공들이다. (사진 속 주정애는 주경애가 맞는 거 같은데...)

1945.3.7 레마겐의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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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넣기 산하의 오역 

1945년 3월 7일 레마겐의 철교 

존 길러맨이라는 헐리우드 영화 감독이 있다.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영화 두 개만 대면 바로 아 아!! 하면서 고개를 상하로 크게 끄덕일 것이다. 재난영화 <타워링>과 1976년 여배우 제시카 랭을 기용하여 리메이크한 괴수 영화 <킹콩>의 감독이다. 그가 1969년 만든 전쟁 영화 하나가 있는데 바로 <레마겐의 철교>라는 영화다. 가끔 현충일날 재방송되곤 해서 제목이라도 스치고 지나간 기억이 많은 2차대전 전쟁 영화다.

레마겐은 지금도 인구가 2만이 좀 안된다는 독일의 소도시다. 이 레마겐이 유명해지고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남게 된 것은 그 도시 앞을 흐르는 라인강에 놓인 다리 때문이었다. 다리의 이름은 루덴도르프, 즉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영웅으로서 러시아군을 격멸시킨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자이며 히틀러의 맥주홀 봉기 때 히틀러와 뜻을 같이 했으나 후에는 히틀러를 악마라고 부르며 히틀러를 수상으로 기용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는 아래 세대의 무덤을 팠습니다.”라고 전보를 보내기도 했던 독일군의 옛 원수(元帥)를 기념하기 위한 다리였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군은 발지 전투같은 독일군의 사력을 다한 반격을 무찌르면서 점차 독일의 목을 죄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앞을 막아서는 주요한 독일의 방어선 가운데 하나는 자연이 쳐 둔 것이었다. 바로 라인 강이었다. 원래 연합군은 공습을 통해 라인강 다리들을 폭격했었다. 독일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엔 독일군들이 라인 강에 놓인 즐비한 다리들을 폭파하면서 미군들의 라인 강 도하를 막으려 했다. 당연히 미국의 진격을 저지하고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작전을 펴던 미군 9 기갑사단 라인 강을 공략 중이었던 연합군 미국 9 기갑사단 30수색대대 소속이었던 에버트 버로즈 소위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기가 막힌 풍경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멀쩡한 다리 하나가 라인 강 위에 버젓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다리가 남아 있었던 이유는 라인 강 건너편에 아직 남아 있던 독일군들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장군 폰 브룩은 책임감 강한 소령에게 강 건너의 독일군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최후의 순간까지 사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미군이 이 다리를 발견한 이상 루덴도르프 다리는 하시라도 빨리 폭파돼야 했다. 반대로 미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다리를 확보해야 했다. 뒷 얘기지만 아이젠하워는 이 다리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 무게만큼의 금(金)과 맞먹는 다리” 이 레마겐 철교를 둔 공방전을 그린 영화가 <레마겐의 철교>다. 

<레마겐의 철교>는 흔해빠진 2차대전판 배달의 기수와는 좀 성격이 다르다. 미군도 그렇고 독일군도 그렇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군대나 악마의 졸개들로 그려지지 않는다. 노획 물자를 챙기려다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군 병사도 있고 진급 욕심 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날리는 미군 장교도 나오며, 이길 수 없는 전투에 부하들을 내몰면서 인간적 고뇌에 시달리는 독일군 장교, 그리고 목숨을 걸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독일군 하사관도 영화의 주요한 축이 된다. 다리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물론 그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는 하지만 끝내 미군에 점령된 열흘 뒤에는 아예 허물어져 버렸던 다리를 지키고 빼앗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간다. 

독일군에게는 다리를 폭파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장치에 기폭장치가 가동되지 않거나 어느 하사관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폭파에 성공했지만 다리는 멀쩡하게 남아 있는 기가 막힌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전자의 경우 강제로 징발돼 온 폴란드 인 기술자가 도화선을 잘라 버렸다는 설이 유력하고 두 번째는 폭파에 필요한 화약 계산을 잘 못 했거나 필요한 화약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 속에서는 TNT 품질이 나빴던 걸로 소개된 거 같은데) 부족한 장비와 병력을 이끌고 사력을 다했지만 끝내 연합군을 저지하지 못한 방어 책임자는 후방의 사령부로 달려가 지원 요청을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게슈타포였다. 

히틀러는 방어책임자 이하 관련자 전원 총살을 명했고 명령불복종, 즉 다리 폭파를 완수하지 못한 죄로 영화 속 크루거 소령, 레마겐 철교 방어 책임자는 총살을 당한다. 그 뿐 아니라 크루거를 도와 레마겐 철교 폭파에 사력을 다한 공병대원들도 슬프게도 아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영화 속 사형 집행 장면. 총살을 기다리는 크루거의 귀에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그때 크루거의 질문 “Ours? theirs?" 즉 “우리 비행기인가 적기인가?”를 묻는다. 그러자 총살대가 대답한다. “Enemy plaens,sir." (적군 비행기요.)” 그때 크루거는 전쟁 영화의 명대사라 할 대사 하나를 남긴다. “But, who is the enemy?" (그런데 누가 적이지?) 

“처음에는 왜 싸웠는지 알았는데 하도 오래 싸우다 보니 이제는 모르겠어.” 라고 고백하던 영화 <고지전>의 인민군처럼 크루거 소령도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다리를 폭파하려고 그 기를 쓰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한 자신이 명령 왜 불복종죄로 사형대에 서야 하는지, 과연 적은 누구고 아군은 누군지 갈수록 불분명해졌을 것이다. 전략적으로는 중요한 다리였지만 기실 레마겐의 철교는 그다지 즐겨 이용되지도 않았고 전투의 후유증과 이제는 미군 것이 된 다리를 폭파하려는 독일군의 포격으로 무너진 뒤에는 재건되지도 않았다. 사실상의 무용지물이던 다리가 수천 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누가 그랬다. 전쟁은 잘못된 결혼같은 거라고. 안하면 미칠 것 같고 마치 신이 내린 운명이라 착각하기도 하고 무리한 결정까지도 서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존재. 

핵무기 틀어쥐고 정전협정 파기 선언을 해 버린 철없는 나라를 머리에 이고 사는 백성의 하나로 전쟁이 실감날만큼은 아니지만 걱정될만은 한 단어로 다가와 버린 지금, 무슨 수를 쓰든 내 후배들과 내 조카들과 이르면 내 아들같은 아이들이 총을 들고 ‘조국’ 같은 걸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은 없게 되기를 바랄 밖에. 그들이 “근데 누가 적이지?”를 뇌까리다가 고개를 떨구는 일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를 소망할 밖에. 


1945년 3월 7일 레마겐 철교가 숱한 희생을 뒤로 하고 미군에게 점령됐다.

1918.3.8 스페인 독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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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월 8일 스페인 독감의 시작 

1918년 3월 8일 미국 캔사스 주 퍽스톤 기지의 병원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다. “3일 열병”이라 할 정도로 고열과 몸살을 3일 정도 앓은 뒤 낫긴 하지만 꽤 오랜 후유증이 있었다. 하지만 전염성은 대단했다. 3일 뒤 3월 11일에는 미 육군 기지에서 100명이 넘는 인플루엔자 환자가 보고됐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긴 해도 죽을 병은 아니어서 웬만하면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들이 보내져야 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 군인들의 발걸음을 따라서 인류 역사 최고의 전염병이 될 ‘스페인 독감’이 그 죽음의 촉수를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해 봄 스페인에는 독감이 대유행했다. 국왕 알폰소 13세부터 수백만이 독감에 걸려 관공서가 마비되고 전차가 설 정도였다. 프랑스에서도 그랬고 프랑스와 사생결단을 내고 있던 독일에서도, 그와 맞붙은 영국군 내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군 작전에 차질을 줄 정도였다. “연대를 어디어디에 투입하라!”고 명령하고 병력 현황 보고를 받으니 “총원 5천 사고 3천 사고명 독감으로 후송, 현재원 2천” 이런 보고가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 스페인으로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었다. 전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왜 스페인 독감이란 말인가. 그건 스페인이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보도관제가 없어 대규모 전염병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감은 여름이 되면서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스페인 독감은 성가신 바이러스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신하고 있었다. 8월경 프랑스의 브레스트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인플루엔자 환자가 재발했을 때 스페인 독감은 공식적으로 첫 살인자가 된다. 그리고 이 소리 없는 살인자는 군대의 이동과 사람들의 여행과 이주에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뒤의 참상은 가히 지옥이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 안될 정도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죽어간 시신을 둘 곳이 없어 길거리에 쌓아둬야 했고, 동료가 기침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보건성 직원이 출동해 보니 룸메이트 4명이 죄다 죽어 있더라는 일화는 얘깃거리에도 못들었다. 인도에서는 웬만한 나라의 인구에 해당한다 할 사람들이 죽었고 북극 가까운 에스키모 마을들은 여럿이 전멸했으며 태평양상의 사모아 섬에서는 90퍼센트의 인구가 감염되어 그 중 30퍼센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사망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최소 2천만, 많게는 1억명까지 잡기도 한다. 

일제 강점 하의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무오년 독감이 그것이다. 육십갑자상 무오년은 기미년의 전 해이니 기미독립선언이 있던 바로 전 해, 1918년에 조선 전역은 “무오년 독감”으로 기록된 독감에 7백만여 명이 감염됐고 14만 명이 죽어 나갔다. 물론 조선 총독부의 통계이니 사망자는 더 될 것이다. “경성에서 독감(毒感)으로 사망한 사람이 268명인데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119명이다.”(매일신보 11월12일자) “서산 1군에만 8만명의 독감 환자가 있고, 예산·홍성서도 야단이다. 감기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나 된다.”(매일신보 12월3일자) 이 병의 유행으로 들판에 곡식이 여물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지경이라 했고 쌀값은 폭등했다. 인심은 흉흉해졌고 가뜩이나 일본인들의 횡포에 배가 아프던 조선인들에게 굶주림까지 이어지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어갔으니 이 또한 3.1운동의 또 다른 배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인류는 그 당시 이 인류 역사 첫째 아니면 둘째를 다툴 살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전자 현미경이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페스트나 콜렐라같은 굵직굵직한 세균들의 멱살은 잡을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그 존재조차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캐나다의 한 의사가 동토의 얼음 위에서 죽어간 한 에스키모 여인의 허파에서 바이러스 조직을 떼 냈다. 냉동 상태로 죽어서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도 굳어버린 조직. 하지만 그는 바이러스 추출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47년 뒤 그는 스페인 독감을 연구하던 미군 병리학 연구소 타우펜버그 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여자의 허파 조직을 구할 수 있소.” 타우펜버그 박사는 그 조직을 받아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05년 10월 마침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발견을 발표한다. 

냉동상태에서 재생된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했다. 쥐 정도는 우습게 죽였고 원숭이도 죽였다. 인수공통(人獸共通) 전염병으로 얼마전 유행한 조류독감과 비슷한 형태였던 이 바이러스의 부활 앞에서 어떤 과학자들은 환호했지만 어떤 과학자는 이렇게 반대했다. “그렇게 커다란 위험부담을 안고도 바이러스 부활에 나서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정히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연구할 수도 있는데.” (리처드 에브라이트)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한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을 빌리면 된다. “내가 발견한 바이러스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제 인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자연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며, 이러한 경우 자연은 아주 무서운 테러리스트입니다.”

한 시대 인류의 태반을 감염시키고 억 단위의 인구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의 바이러스는 21세기에 부활하여 현재 미군이 관할하는 어느 연구소엔가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바이러스는 연속적으로 변이하여 인류를 기습하는 변종에 저항하는 항생제나 백신의 원료가 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줄 흉기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이 그렇게 감추려고 했던 핵 관련 비밀들이 스리슬쩍 소련으로 흘러갔던 일을 떠올리면 그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노출될지 모른지 않는가. 실제로 한때 우리를 경악시켰던 사스 바이러스도 유출됐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있는데.... 아니할말로 미국 정부조차 요긴하게 그 바이러스를 공격 무기로 써먹는 수법을 개발하고 있는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두고 보면 타우펜버그 박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자연은 인간을 공격하기는 하지만 의도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으니까. 결국 테러리스트는 인간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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