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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1.22 원산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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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9년 1월 22일 원산 총파업 결의 

발단은 1928년 9월로 거슬러 오른다.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영국계 석유 회사 Rising Sun의 문평 석유 저장소에서 일본인 관리자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일이 생긴다. 고타마라는 이름의 이 일본인의 손버릇은 이전부터 유명했다. 그는 툭하면 손바닥을 조선인 노동자들의 뺨을 향해 휘둘러 노동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또 다시 구타가 발생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팔뚝을 걷어부쳤다. “고타마를 잘라라. 맞고는 일 아이하겠다!” 문평공장 노동자들은 고타마 해임을 비롯하여 5개 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간다. 

함경남도 덕원은 원산과 지척이다. 조선 시대 개항이 이뤄지자마자 지역 유지들이 합심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이 할 ‘원산학사’를 세운 기억도 그렇고,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하여 1921년쯤에는 이미 원산노동회가 결성되었을만큼 원산은 ‘괄괄한’ 고장이었다. 이 원산노동회는 1925년 11월 세포 단체를 직업별로 정리하여 원산노동연합회, 즉 원산노련을 결성해 두고 있었다. 이들은 1927년 6월의 원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경험도 있었다. 이 원산노련이 문평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인 관리자들은 3개월 후에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노라고 약속하지만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고, 두고 보자는 약속 치고 이행되는 법 없다. 석 달 뒤 원산노련이 요구 조건을 다시 정리하여 내밀자 사측은 “우리는 외부세력 개입 없이 우리 직공들과만 얘기하겠다.”는 주장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저 핑계는 그 후 90년 동안 이 땅의 사측에 의해 즐겨 쓰인다) 원산노련은 격노한다. “아니 이 간나새끼드르 우리르 속인 거 아이니?” 또 원산상업회의소, 즉 원산의 기업가들의 조직과 일제 당국은 1월 초 있었던 부두노동자 임금인상 요구에 ‘닥치고 해고’로 답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남은 것은 전면충돌이었다. 마침내 원산노련은 1월 14일을 기해 문평 공장 노동조합에 파업을 명령하고 산하 조직에 문평 관련 작업을 거부할 것을 지시한다. (아! 21세기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산업별 연대) 그리고 1929년 1월 22일 조직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언한다. 

두량(斗量)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 23일에는 결복(結卜)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24일에는 원산 중사(仲仕)노동조합·제면노동조합 등이 속속 파업에 참여했다. 원산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노조 소속이 아니었던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면서 함경남도 원산 항구는 완전히 마비된다. ‘총파업’ 우리 역사에서 성취된 적이 거의 드문 단어가 원산 시가지를 뒤덮었고 부두 하역, 화물 운송, 교통 모든 것이 올스톱되고 만다. ‘원산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1929년이라면 만주 사변 직전이다. 즉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향한 침략과 파시즘의 광기를 향하여 보폭을 넓힐 때였고 그들에게 원산의 강력한 노동자 조직은 눈에 가시였고 뽑아야 할 가시였다. 일제 당국은 요즘 말로 하면 용역이나 구사대라 할 ‘자경단’을 조직함은 물론 인근의 19사단 병력까지 출동시켜 노동자들에 맞섰다. 원산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 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떤한 일이 돌발할런지” (동아일보 1929.1.26) 

이때 사측이 자행한 행동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말이 절로 나온다. 일단 앞서 말한 공권력의 위압은 기본 사양이었다. 경찰과 군대가 동시에 원산 시내를 쩔그렁거리며 행진했고 사설 폭력배들까지 설치고 다녔다. 노조를 깨기 위해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거나 노노갈등을 부추겨 파업 동력을 약화시키려 들었던 것도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함남노동회’라는 단체였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실로 눈물겹게 싸웠다. 80년 후의 후생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한 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구호 하에 석 달 치의 파업 기금을 마련해 놨으며 규찰대는 폭력배들의 난동과 경찰들의 협박으로부터 본대를 지켜 냈다. 그러나 80여 일 동안 싸움을 계속하면서 전선은 이곳저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노조 간부들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인한 공백 이후 ‘영입’된 서울에서 온 변호사 김태영의 위원장 대리 취임이 결정적이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피해 없이 수습하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김태영의 유화적인 제스처는 노동자들의 어께에서 기를 뺐고 노조를 부수려는 이들의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무 조건 없는 복귀”를 호령하는 일제 당국과 사측에 김태영이 응한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물론 그 싸움을 계속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을까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말했던 바대로 일본은 이 파업을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힘 다해 쓰러지는 것과 힘 다하지 못하고 꺾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법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무리한 수를 쓰게 된다. 지도부에 대한 신뢰도, 승리에 대한 확신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원한이 사무친 함남노동회, 즉 어용 노동 단체를 공격한다. 1929년 4월 1일과 3일. 

일본 경찰은 환호를 내지르며 “폭력 불순 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공권력의 촘촘하고도 철저한 노조 와해 공작을 통해 원산노련은 곧 무력해졌고 4월 6일 전설의 원산총파업은 와해된다.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키리라.”고 노래한 적기가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3년 굶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함경도 사람이 아이오! 우리는 각오가 돼 있소!”라고 목청 돋우던 노동자들의 아내들도 쓸쓸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은 어차피 걸림돌이면서 동시에 디딤돌이다. 원산 총파업은 그 패배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80여 일을 끌었던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의 이력 하나만으로도 향후 100년의 역사에 우뚝 서기에 넉넉하다. 뼈아픈 실패는 또 다른 승리를 향한 전진의 깔창이 되고,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는 법이니까. 또 깨지고 또 길을 잃더라도 그만큼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후퇴하더라도 결국은 그 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또한 기억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피를 나누지 않는 유전으로 전해진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이주하도 원산 총파업에 그 정치 사회적 삶의 태를 묻었다. 그 외 원산 총파업을 경험한 이들은 80일의 전설을 간직하고 퍼뜨리면서 그들의 역사적, 개인적 삶들을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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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청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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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이 덜 된 보통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두들겨 패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마는 그 중의 한 사람은 교사였다. 교실에서 떠들었다는 이유로 친구 둘을 불러 세워 넣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던. 아이들이 툭툭 뺨을 건드리는 척하자 여지없이 튀어나와서 이 새끼들아 이렇게 때리라고! 하며 뺨을 후려 갈기고 아이들의 서로 뺨때리기가 점점 강도가 더해지는 것을 엄숙하게 지켜보던. 그리고는 “정신 좀 차려라 이것들아.”라고 뇌까리던.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하여간 어린 마음이었지만 공포보다는 증오가 머리를 채웠던 기억이 난다. "씨바 저기 선생이가.” (슬프게도 우리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썼다.)

 

그 교사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일벌백계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공동책임(?)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율적 처벌’의 한 형태로 그 기막힌 볼거리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서로 때리고 맞는 매로 그 어린 뺨들이 발개지고, 매 맞는 고통과 치밀어 오르는 부아로 이마까지 시뻘개지고 나중에는 서로에 대한 엉뚱한 오기까지 발휘하여 서로를 때리기까지 그 선생이라는 직함의 호로자식은 마치 정의를 집행하는 판관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그 선생도 아이들이 느껴야 했을 고통과 상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소싯적에 그런 일을 당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 그는 그 고통에 둔감했고 처벌과 징계를 내리는 절대권자로서 아이들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어린 마음에서건 지금의 중년의 마음으로서건 그 교사는 용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존엄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실격이었고 좁혀서 한 어른으로 보아도 함량 미달의 인간이었다.

 

서초구청에서 주차 관리 일을 보던 청원경찰 한 분이 별안간 돌아갔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심장마비일 수도 있고 팔자가 그게 다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사의 판단보다도 역학적인 결론보다도 나는 그가 죽음을 맞지 전 치러야 했던 횡액에 대해 몸서리치는 분노를 퍼붓게 된다.

 

그는 근무 중 지고하신 서초구청장님께서 탑승하신 차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 안내를 소홀히 한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 이런 일은 구청장님보다는 그 아래 사람들이 더 열을 내게 마련이다. 사장님을 보고도 딴짓하느라 인사를 안 하는 후배에게 “임마 눈 똑바로 보고 다녀.”라고 힐난을 했듯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도의 호통은 당연한 것이고 “이러려면 때려 치워!”까지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조직의 수장이고, 그 조직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위인의 행차가 담당 직원의 착오로 지연되거나 방해받았다면.

 

그런데 서초구청에서 이 불운한 주차 관리 청원 경찰들에게 내린 징계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 “삶의 질 세계 1등 도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서초구의 고위 공무원은 청원경찰들이 혹한 속에서 언 손을 비비고 딱딱해진 발을 녹일 수 있는 초소의 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했다. 물론 “정신 차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흐트러진 ‘책임감’을 다잡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내 이런 추위가 없었다는 1월 초의 청룡언월도 같은 겨울 바람 속에 사람을 내동댕이친 것은 훈계가 아니라 고문이었고 편달이 아니라 폭행이었다.

 

나이 마흔 여덟의 중년이 그 칼바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껑충껑충 뛰면서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황량한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을 풍경을 상상해 보라. 히터로 데워진 차에서 내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청사로 종종걸음치는 가운데 “허허 겨울은 추워야지”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차라리 무슨 차든 들어와라. 그냥 서 있기는 힘들다.’ 손을 사타구니에 넣고 이를 악물면서, 개도 개집이 있는데 사람이 들어갈 초소에 굳건히 채워진 자물쇠를 보면서 그들은 대체 무슨 심경이었을까. 나 같으면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니라 속이 터져서 죽었을 것 같다. 속이 타서 화상으로 죽었을 것 같다. 속이 뒤집혀 내장파열로 죽었을 것 같다.

 

청원경찰의 죽음이 그 얼차려 같은 근무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서초구청은 그 인간 이하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기껏 한다는 말이 “15만원 상당의 오리털 파카와 스키 장갑과 장화”를 사 주는 등 ‘최선’을 다해 왔다는 변명이라면 내 30만원짜리 오리털 파카 하나 사 줄 테니 초소 폐쇄령을 내린 행정지원국장에게 입혀 하루 동안만 옥외근무 시키기 바란다. 그것도 모자라 “원래 주차장 근무는 옥외 근무가 기본이다.”라니. ‘눈, 비 등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초소에서 근무하는 것’이라니. 나는 또 한 번 터져나는 분통으로 이를 갈며 물을 수 밖에 없다.

 

“너희들이 사람이냐.”

 

좋지 않은 기상에 눈과 비는 포함되는데 영하 16도의 추위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냐? 그 추위에 초소에서 몸 좀 녹이고 있었다고 해서 초소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일이 광명천지 대한민국에서 허용되는 일이냐. 너희 서초구청장의 몇 분간의 지체가 몇 사람을 하루 종일 그 추위에 개 떨듯 떨게 만드는 것이 사람의 할 짓이냐. “1시간 근무 후 2시간 휴식”했으니 밖에서 일한 건 얼마 안된다는 게 너희들의 변명이라면 대답하라. 초소가 잠긴 마당에 어디에서 휴식했는가. 민원실에라도 들어와 있었던가? 동네 다방에 가 있었던 것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이에게, 그 고통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자신의 권력의 소재로 삼는 이에게 우리는 욕설을 퍼붓는다. 어릴적 나의 담임 교사는 그래서 욕을 먹었고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에게 나는 여전히 증오를 품고 있다. 이제 그 짓을 자행해 놓고도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이들을 고발하겠노라 으름장을 놓는 철면피 앞에서 웃통을 벗겠다. 고발해 봐라. 이 글에서 사실이 아닌 것이 있다면 그 고발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역으로 나는 당신들을 고발한다. 구청장님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를 인간 이하의 형벌을 통해 모욕 주고 고통을 주며, 그 굴욕을 감당하게 만든 파렴치한으로. “오리털 파카 15만원씩이나 주고 사 줬는데.....”라며 그 파렴치의 치부를 알랑한 천조각으로 감추는 비루한으로, 그러고도 늬우침이 없이 “주차장 근무는 옥외근무가 기본”이라는 그 무지막지하게 뚫린 입을 가진 악덕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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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23 영원한 상록수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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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5년 1월 23일 영원한 상록수 지다 

“선생님, 선생님과 영원한 이별을 짓는 이 자리에 이 슬픈 마음을 누를 바 없어 눈물로 이 글을 선생님 영전에 바쳐 고별을 지으려 하는 어린 것들의 심장이 터지려 하나이다.” 추도사를 읽는 아이는 울음이 북받쳐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박박머리 아니면 상고머리의 아이들의 새까만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뒤에 서 있던 어른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물론 수염 허연 할아버지들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오늘날은 안산시 본오3동으로 빽빽한 도시의 일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교육과 문화 혜택이 전무한 오지였던 샘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총출동한 듯 했다. 조문객은 1000여 명, 근자에 보기드문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최용신이라는 나이 스물 여섯의 처녀였다. 

그녀는 함경남도 원산 부근의 덕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마마 자국이 선연했던 그녀는 학교 졸업 "조선이 살려면 농촌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생판 찾아와 본 적도 없고 연고도 없는 경기도 안산으로 스며들었다. 당시의 농촌이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찾아와서 애들을 가르치느니 뭘 해 보자느니 하는 모습에 그리 관대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냉대와 오해도 잇달았지만 최용신은 끈덕지게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2008년 구술된 최용신의 옛 제자 이덕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8살 때까지 변화없는 생활을 했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것이다’ 생각했지. 1931년 11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샘골 예배당 강습소를 찾게 됐지. 지금도 그 길이 눈에 선해. 최용신 선생님을 만나고 새 세상이 열렸어. 신식공부를 했어. 노래, 체조, 동화듣기..... 선생님은 언제나 이 말씀을 하셨어. ‘너희들은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꾼이 될 수 있다.’ 어느날 5리정도 떨어진 우리 집에 선생님이 방문하셨어.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초가삼간 흙마당에서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어머니 이 아이는 자라서 크게 됩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 내시고 자랑으로 키우십시오. 곁에 있던 내게 살아 생전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 

최용신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샘골을 방문한 교사이자 신학자 김교신은 최용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주 눈물을 보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인과 대화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큰 자취를 남기고 갔는지를 깨닫는다. 김교신이 읽는 그녀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그녀의 활약은 눈이 부시다기보다는 눈을 뜨겁게 한다. 도시 처자가 시골에 와서 뭘 안다고 깝치냐는 흰눈들 앞에서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맸으며 한글강습소를 세우고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가르쳤으며 산수, 수예, 노래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샘골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태극기를 희미하게 그려두고 수업을 하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하니 가히 그녀는 민족과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생각까지도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한때 강습소 학생이 110여명에 이르자 강습소가 잘되는 꼴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 당국이 개입하여 학생 수를 60명으로 제한한다. 그러자 최용신은 여기서 탈락한 아이들을 따로 꾸려 밤에 가르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YWCA의 지원이 끊겼다. 최용신은 강습소 경비를 대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 막대한 과로와 스트레스 속에 그녀는 재충전과 못다한 공부를 위해 고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귀국해서 고향으로 정양을 가 보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누워만 계셔도 좋다.”고 사정하는 통에 다시 샘골로 갔지만 여기서 그는 장협착증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걸려 세상을 뜬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샘골 강습소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진로는 어찌 하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뭘 못해 봤다거나 뭘 얻지 못했다거나 하는 스물 여섯 처녀의 안타까움은 유언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실행에 옮긴 진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이들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사랑하고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망해 버린 나라의 애국자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고향에서부터 정혼한 사이였고 열 여섯 살에 약혼을 한 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는 기간 10년” 후 결혼하기로 한다. 최용신은 마마 자국이 심한 편이었고 미인도 아니었지만 약혼자이자 두 살 연하였던 김학준은 그 사람됨에 반해 끈질긴 구애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10년을 몇 달 남기고 청천벽력 같은 약혼자의 죽음에 접한 김학준은 하늘이 무너지듯 슬퍼했다. 장례식 때 시신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할 만큼. 후일 최용신의 묘를 이장할 때 관 위에는 김학준의 코트가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미 옷감은 거의 삭아 단추 정도만이 남아 있었지만. 

김학준은 이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1975년 세상을 떴다. 김학준은 돌아가면서 자신을 옛 약혼자 최용신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부인에게는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심경을 넉넉히 알았던 아내는 남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최용신은 옛 약혼자 김학준과 함께 나란히 누워 한때 그녀의 젊음이 태양처럼 빛났던 곳을 굽어보고 있다. 정말로 찌질하고 입에 담기조차 불쾌한 인간들도 역사의 흐름 속에 허다하게 흩뿌려져 있지만 동시에 쳐다보기조차 어려울 만큼 깨끗하고 눈부신 사람들도 그에 지지 않게 많았다. 최용신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크고 밝은 별이었다.

1981.1.24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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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1년 1월 24일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남다 

남북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손으로 꼽는다고 한다. 일단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기본으로 하고 “아리랑” 정도는 함께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 레파토리는 뚝 끊길 것이다. 북한에서 한국 방송 좀 본 사람들은 남한 대중 가요를 흉내낼 수도 있겠고 일부 남한 사람들도 ‘휘파람’이나 ‘반갑습니다’ 정도는 어설프게 부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예는 못된다. 그런데 남북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하나 더 있다. ‘ 고향의 봄’이다. 이미 해방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의 입에 들러붙었던 이 노래의 작사자는 이원수다. 그리고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무려 열 다섯 살 때였다. 소파 방정환이 운영하던 잡지 <어린이> 동요 가사 부문에 응모했는데 거기에 덜컥 당선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의 회고다. 이 노래 가사가 태어난 배경은 진달래꽃 예쁘기로 이름난 창원 천주산이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으로 고향을 떠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 ‘고향’은 전국 방방곡곡에 다 있었고 ‘고향의 봄’은 그들 모두의 울음보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여기에 홍난파가 붙인 처연한 가락까지 곁들여졌을 때 그 노래를 끝까지 제대로 부를 수 있었던 조선인과 한국인은 드물었을 것이다. 

15세에 이런 노래를 지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에게는 더 신기한 선배(?) 하나가 있었다. 그건 이원수보다 1년 앞서서 <어린이> 잡지에 동시 부문에서 떡하니 입선작을 낸 최순애였는데 입선 당시 최순애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오빠 생각’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1920년대는 흡사 1980년대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3.1항쟁으로 폭발한 민족적 열기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고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황해 바다를 넘어 침략자에 저항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몸을 던졌다. 유독 슬픈 이별이 많았던 시대, 아직 칭얼대며 조르는 동생에게 어느 오빠는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오마.”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설랑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을 떠났던 풍경 그대로가 이 ‘오빠 생각’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기럭기럭 기러기는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는 슬피 울건만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오지 못하는 혈육을 둔 사람 조선 팔도에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열 여섯 이원수는 열 둘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 잡지에 등단한 인연으로 그들은 펜팔 친구가 됐고 꾸준히 편지가 오가며 그 속에서는 연정이 싹텄다. 그리고 둘은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청하고 그를 응낙한다. 원조 접속 커플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둘이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 날, 이원수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최순애가 기다리는 수원으로 향했다. 무슨 색 옷을 입고 갈 것이라는 007 미팅 식의 약속까지 철석같이 한 상황. 그런데 목을 학처럼 늘이고 기다리던 최순애 앞에 이원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제 시간 열차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최순애는 플랫폼을 떠나지 못했다. 아 이 원수같은 원수. 그러나 그녀에게 날아든 것은 또 하나의 청천벽력이었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원수는 그로부터 거의 1년간 옥에 갇히게 되는데 최순애의 집에서는 ‘빵잽이’ 사위를 달가와하지 않았고 최순애에게 다른 혼처를 제시하지만 최순애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출감 후 이원수는 최순애의 집에서 몸을 회복했고 이윽고 결혼식을 올린다. 이원수는 ‘오빠’가 되었고 최순애는 이원수 평생의 ‘봄’이 되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축복을 안겨 준 이원수였지만 그의 일생은 그에 걸맞는 영예만으로 차 있지는 않았다. 그는 동심을 노래했지만 그저 맑고 파랗고 티없는 동심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알고 배고픔이 있고 눈물이 맺힌 아이들의 멍든 가슴을 오히려 더 절절하게 노래했다. 이 동시를 보면 노래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달밝은 밤 귀뚜라미 쓸쓸한 소리 / 겨울 온다 눈 온다 처량한 소리 / 마른 잎이 바수수 떨어집니다. 여보시오 벌레님 울지 말아요. / 마른 잎이 달래면서 한 숨 질 때에 / 파란 달도 가만히 눈물집니다”「가을밤」(1926년 어린이) 그리고 그 노래는 몇 년 뒤에 나온 이원수의 시도 흡수한다. “찔레꽃 하얗게 피었다오 /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찔레꽃」(1930년 신소년) 

그는 카프 계열의 경향주의적 문인들과 꾸준히 관계를 유지했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좌익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그는 월북했다가 돌아왔다고도 하고 혐의를 벗기는 하지만 전쟁 후 좌익으로 몰려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외국으로 나가 볼 기회를 지닐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들에 대해 끊임없이 따뜻한 시선을 던졌고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칼날같이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 그는 친일파라는 딱지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일제 말기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용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 (半島の光)‘에 발표한 것이 드러나면서 친일파 명단에 등재된 것이다. 그는 동시에서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지원병을 위해 후방에서 병역봉공을 다해야 한다고 표현했으며, 수필에서는 편지글 형식을 써서 어린이들이 하루바삐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이 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노력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를 ‘친일파’라고 규정할 자신은 없다. 그의 수많은 업적과 문필에 비추어 그가 어떻게 썼는지 모를 친일 글 몇 편으로 그를 친일파로 단죄하는 것에 약간의 회의를 느낀다. 그의 친일 행적이 밝혀진 뒤 ‘고향의 봄’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친일파였다고 해서 고향의 봄을 부르지 말아야 하는지,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을 부르며 어두운 밤하늘과 숲길을 헤치고 나가던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외면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남과 북의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노래인 ‘고향의 봄’을 굳이 치지도외할 이유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를 굳이 친일파로 규정하여 우리 기억에서 삭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81년 1월 24일 한국 아동문학의 전설이라 할 이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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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26 서울역 압사사건과 특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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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사건과 특종 기자 

그 해 설날은 양력으로 1월 27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의 대이동’은 매한가지라서 그 해에도 서울역은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요즘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이야 자가용도 있고 버스도 많고 비행기도 특별기를 띄우지만 1960년 당시에는 철도가 거의 유일한 지방행 교통수단 이었다는 것이겠다. 서울역은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총 집결지였다. 그 아수라장의 귀성전쟁에 비하면 요즘의 귀성전쟁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다. 내일 고향에 이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각오에 충만한 귀성전쟁의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울역을 메우고 있었다. 철도청도 대목이었다. 서울에서 10시 50분에 떠나는 호남선 열차의 표 판매량은 평소의 세 배였다. 입석 표도 동날만큼 표를 팔아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사람들을 태우려면 당연히 기차를 더 연결해야 했다. 덜컹 덜컹 차량들을 부산하게 연결하여 완성한 시간은 불과 출발 5분 전. 이것은 무엇을 얘기할까? 당연히 그때에야 개찰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4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역무원의 거친 목청과 통제 앞에 육상 선수 스타트 자세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땅 신호와 함께 개찰구를 향해 내달았다는 뜻이다.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지 않았는가. 

와아아아 사람들은 내달렸다. 좌석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맹렬하게 달렸다. 좌석이 있다 한들 뒤늦게 탔다가는 좌석 근처도 가지 못하고 몇 시간을 두 발로 버팅기는 고문을 당해야 할 판이었다. 모두가 럭비 선수가 됐고 육상 선수가 됐다. 노약자들은 버둥거리며 뛰었지만 젊은이들의 힘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계단 한켠에서 한 명이 크게 비틀거리더니 허우적거리며 넘어졌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한겨울이었고 계단 곳곳엔 얼음도 맺혀 있었기에 넘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악 악 비명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그 위를 또 다른 사람들이 넘어져 그 위를 덮었고 억지로 그 무더기에 합쳐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던 사람들은 파도와 같이 내밀리는 인파의 무게에 결국 그 위에 엎어져 비명을 질렀다. 이미 아래에 깔린 사람들의 입에선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숨이 막혀 가는 동안에도 귀성객들은 몰려들었다. “사람 죽어!” “밀지 말란 말이야 임마.” “경관! 경관!” 악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향에는 가야 했고, 기차는 타야 하는 사람들의 홍수는 좀체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 현장에 한 기자가 있었다. 설 귀성 풍경을 촬영하러 서울역에 죽치고 있던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 그는 한국 사진 저널리즘의 대부라고 불리워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 기억에 선연한 여러 사진들이 그의 셔터에서 나왔다. 석 달 뒤 벌어진 고대생들의 4.18 시위에서 깡패들에 맞아 널부러진 학생들을 찍은 것도 그였고 월남에 파병되는 아들 앞에서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섰던 어머니를 포착해 낸 이도 그였다. 그는 서울역에서 사람들이 뒤엉킬 때 그곳에 있었다. 
그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 본다. “ 두번째 개찰구를 돌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줄이 끊어졌다고 아우성이더군요. 개찰구를 넘어가 보니 밟혀죽고 쓰러진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어요. 그때부터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45장짜리 필름에서 34-35장을 들여 현장을 다 찍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나는 그의 프로근성에 일점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거기서 카메라를 놓고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반대편에 설 것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고 카메라는 인명 구조 도구가 아니라 역사와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그 현장에서 기자는 그의 ‘특종’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다음 행동에서는 조금 의아해진다. 찍을 만큼 찍은 뒤, 그의 표현대로 그 아수라장 뒤에서 기차에 올라타 난간 붙잡고 있는 이들까지 찍은 뒤였다면 그는 기자가 아닌 한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서 그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넘은 이기심을 보여 준다. 그의 회고를 다시 그대로 옮겨 본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었는데 기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현장만 깨끗이 치우면 그만이다.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온 철도국 직원들에게 사상자들을 빨리 옮기라고 고함을 쳤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세요. 여기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여기도 빨리! 용산 철도병원으로 가세요!" "서대문 적십자병원, 그리고 서울대병원!!" 마치 사고수습본부에서 나온 요원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끔씩 잽싸게 셔터를 눌러댔다.” 

물론 그가 사람들의 생명보다 특종을 중시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회고 군데 군데에서 배어 나오는 ‘특종 독점’의 욕망의 그림자가 그 빛나는 기자 정신에 아롱져 보이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도 특종을 했다는 생각에 기쁨이 한량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과장임에 분명하고 실제 그러기야 했을까 애써 두호하면서도 '기쁨이 한량이 없었다‘는 표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내가 그 후배였으면 술자리에서 몇 대 맞더라도 "선배 그 따위로 말하지 마쇼. “라고 술잔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의 세계는 비정하다고 한다. 입사 면접 때 “나는 사진으로 말할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어떤 임무도 사진으로 증명할 것이다.” 고 면접관을 쏘아보았던 기자 정범태는 진정한 프로였다. 비정하고 지독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장면을 찍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휴머니즘을 발휘하여 카메라 내려놓고 사람들 구호에 나섰다면 사람 한 둘은 구했을지 모르나 그 장면을 역사에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로였다. 하지만 나는 1960년 1월 26일의 저 특종사진들을 볼 때마다 내가 프로가 될 수 있을까를 자문하게 되곤 한다. 과연 30명이 넘는 생명이 꺼져가는 과정을 보고서도 특종을 잡았다는 기쁨에 젖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구하려는 마음보다는 특종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뭐해 빨리 사람들 옮기시오!”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까. 결론은 나는 프로가 못된다는 것이다. 

1960년 1월 26일 고향길에 숨져간 원혼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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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27 장공 김재준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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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7년 1월 27일 장공 김재준 역사 속으로 

형편없는 날나리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이랍시고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야 예장은 뭐고 기장은 뭐고 합동은 뭐고 통합은 뭐냐 고신은 또 뭣하는 거냐.” 즉 개신교 내부의 교파들의 차이를 묻는 것일 게다. 사실 교리 차이는 없다. 오히려 역사의 문제고 실천의 차이가 있을 뿐. 조선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의 땅 조선에 몰려들면서 ‘나와바리’가 겹치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네비우스라는 선교사가 조선 땅을 나눠서 선교하자는 제안을 한다. 호남, 충청은 미국남장로교, 호주 장로교는 경남,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회, 평안 황해 경북은 미국 북장로교가 맡기로 한 것이다. 떡 받아먹을 사람 의견보다는 떡 줄 사람들이 알아서 정한 이 ‘분할’은 현대 기독교의 역사를 형성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은 지금 ‘고신’ (고려신학)이라 불리우는 이들인데, 이들은 호주 장로교 선교 지역인 경남을 중심으로 했고 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버젓이 했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 교단에 반기를 들고 갈라져 나와 ‘고신’을 표방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의 중심은 평안 황해 일원이었고 이들은 매우 보수적인 교리를 고수하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주축을 이뤘다. 어느 목사가 “교회에서 여자가 조용히 해야 하고 여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2천년 전의 일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이 진리는 아니다.”라고 설교했다가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제소된 이들을 혼찌검을 내고 그 주장을 철회토록 할 정도였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한울 중) 

그런데 캐나다 본국의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구역이었던 함경도에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닌 선교사들이 꽤 활약했고 이들은 간도 지역까지 발을 넓히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도 결합했다. 용정에서 자란 문익환과 윤동주의 신앙의 결은 그래서 “믿슙니다”와 다르고, 1901년 함경북도 최북단 경흥에서 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은 향용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신교의 주류와는 남한강과 북한강처럼 갈라진 것이다. 

1947년 장로교 내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교장 김재준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성서무오설을 비판하여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김재준 교장이 주장한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다닥 집어 넣어서 그대부터 그 사람은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로 삼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던 바와 같이 조선신학생들 일부는 격렬히 반발했고 또 역시 앞서의 종교 재판 (여자는 잠잠하라 사건) 때 재판장 노릇을 했던 평안도 출신 목사 박형룡은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인가하여 사실상 조선신학교의 존재를 부정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분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해괴한 말을 하기도 하는데) 

전쟁 중에 다시 통합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지만 교수진은 보수색 일색. 분란이 그치지 않은 끝에 한국 예수교 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이단’으로 선고한다. 여기서 갈라져나 온 것이 ‘기장’ 즉 기독교 장로회다. 김재준은 그 교파의 시조(?)가 된다. 교세로 따지면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발끝도 못 따라가지만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라면 최소한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무당같은 주문을 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예수교 장로회 내 ‘합동’은 뭐고 ‘통합’은 뭐냐. 나중으로 미루자. 

김재준은 ‘꼴통 기독교’, 즉 인간을 하느님의 부속품 취급하고,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절대적인 진리이며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행태를 이단시했던 강퍅한 기독교를 벗어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막막한 공간을 유영하며 인간의 역사(歷史)를 통해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따랐던 사람이었다. 그는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등 “불의에 가득 찬 시대에 있어 예언자의 용기”를 강조했으며 “어쨌든 권력자는 하느님의 기름을 부은 자”라는 일제 시대 선교사들과 해방 이후 보수적 목사들의 편리한 규정에 반발했다. 당연히 그의 일생은 투쟁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에 세 가지의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복음을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성경주의적 ‘책 종교’로 전락시키는 위험이고, 둘째는 몰역사적이어서 사회참여와 비판을 오히려 비판하는 타계주의적 신앙이며, 셋째는 물량주의적 성장론에 빠져버린 데서 오는 세속화의 위험이었다. (김재준 평전 - 김경재 저 중) 그는 성서 속에 나타난 출애굽의 정신과 예언자들의 정의와 예수가 선포한 사랑이 단순한 영적 구원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임을 설파했고 그를 현실 속에서 구현했다. 

60세 이상은 대학에서 물러나라는 박정희의 말에 한국신학대학교 (조선신학교의 후신)를 물러나야 했던 김재준은 그의 회고록에서 아주 짧은 글 하나가 독재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었노라고 말한다.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 학생 등이 망동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누가 몰지각하냐?’는 식으로 반격하는 발언을 어느 신문에 발표했다. 그게 박의 독재지향성에 대한 나의 선전포고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서 전면에 나선 그는 본의아닌 망명길이 되어 버린 74년의 캐나다 딸 방문 이전까지 국내에서 벌어진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누군가 “목사가 무슨 투쟁이냐?”고 딴지를 걸면 “예수 역시 싸움을 일으키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가 의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렸겠는가.”라고 맞받아쳤으며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물음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라고 맞받았다. 

10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한국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던 목사 김재준은 그가 죽기 여드레 전, 성고문 사건과 건국대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등으로 정권이 악행의 극단을 달리고 그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을 즈음, 함석헌과 함께 유언같은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한다. “국민(씨알) 여러분! 우리는 이 이상 상전 모시는 종의 시대에 살지 맙시다. 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국민 여러분밖에 이 나라를 바로잡을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20세기의 첫 해 한반도의 극변방에서 태어나 시대의 무게를 지고 나가며 허공에 뜬 십자가를 지상에 뿌리박으려 노력하던 한 목사의 마지막 설교이기도 했다.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버거운 적을 상대로 투쟁한 이이면서 제자의 건강을 위해 모진 눈보라를 뚫고 간어유 한 병을 전하고 돌아가던 살뜰한 스승 (강원룡 목사의 회고)이었고, 살인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제자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라고 독려하던 바위같은 스승 김재준 목사가 1987년 1월 27일 역사 속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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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5 어느 추락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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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6년 2월 5일 어느 추락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오늘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시신 투쟁’ ‘시신 시위’라는 단어가 눈을 찌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동료들이 그 시신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비윤리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는 말일 게다. 그 단어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나 역시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의 관이 전선의 일부가 되는 풍경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다. 비록 고인의 열망이 어떠하였고 그 뜻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처음으로 만났던 ‘열사’ 조성만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그래도 숱한 장례식에 참석했고 노래 부르고 누구 누구 살려내라고 부르짖기도 했던 내가 이런데 중앙일보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장례 투쟁’을 조직하고 시신이 전선의 한가운데 놓이게 만든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정권과 기업에 있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목을 매달아 죽여 버린 인혁당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해 불태워 버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시국과 관련한 죽음 앞에서 힘 가진 이들이 즐겨 기도했던 것은 그 시신의 신속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이 집중했야 했던 것은 일단 시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왜 피가 돌고 살이 뜨거웠던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썩어 진물이 나는 시신으로 변했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이었다. 

1996년 2월 5일도 그랬다. 아파트 촌이 되어 버리기 이전의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4리 수지2구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일산과 분당으로 봉화를 올린 경기도 신도시 건설붐은 용인 수지 지역에도 밀어닥쳤고 자기 땅은 아니나마 그곳에 터 잡고 살던 이들은 오갈데없는 처지에 놓였고 밀어닥치는 철거반에 맞서 망루를 쌓아 올렸다. 용산참사 때 봤던 그 망루와 비슷한. 2월 5일 동절기 철거는 없다던 약속을 깨고 공권력과 용역 깡패들이 몰려들었다. 경황 중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두들겨 맞을 사람은 두들겨 맞고 몇 명의 마을 주민과 학생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그런데 망루의 1층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쪽의 증언으로는 용역들이 ‘방화’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믿고 싶지 않다. 어쨌든 불은 망루를 휘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사람 살려 하는 공포스런 비명이 망루 위에서 터져나왔지만 깡패들과 전경들은 망루 아래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해머와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들을 휘두르며 불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의 집을 두들겨 부쉈다. 불길은 계속 치솟았고 LP가스통을 건드렸다. 불길은 더욱 힘을 얻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들의 멱살을 잡을 듯 날름거렸고 열기와 유독가스는 몇 평 안 되는 망루의 가엾은 농성자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래도 불을 끄려는 노력은 없었고 철거는 계속됐다. 멀쩡한 사람들이 타 죽을 지경인데도. 그 흔한 매트리스 하나 깔리지 않았고 소방차도 오지 않았다. 

지옥의 악마들이 혀를 찰 현실의 지옥불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결심을 한듯 망루 담을 넘어섰다. 그리고 18미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명과 툭 툭 둔탁한 소음. 검은 꽃잎들이 계속해서 땅으로 추락했다. 그 가운데 세 아이의 어머니 신연숙도 있었다. 허리가 나가고 머리가 깨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현장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펼쳐졌다. 무려 20여분 동안 용역 깡패들은 이들을 방치했고 대한민국 공권력은 사람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이웃들을 막아선 것이다. 설마 떨어지랴 싶어 당황을 했던 건지 임무를 완수한 건지 그들은 부리나케 철수해 버렸다. 한참 뒤에야 병원에 옮겨진 사람들 가운데 신연숙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법에도 규정된 가이주단지 이전, 영구임대 주택 제공 등을 외치며 세 아이와 내 남편 발 뻗을 자리는 달라던 한 주부는 1996년 2월 5일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는 높이의 5층 망루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안치된 동수원 병원 영안실에는 또 ‘사수대’가 꾸려졌다. 또 언제 경찰과 깡패들이 들이닥쳐 시신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은 한참 뒤에야 치러졌다. 그 죽음의 책임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평온한 새벽 망루로 쫓겨 올라간 이들에게 불길이 뒤따랐고 결국 불길보다는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을 택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그 아비규환에 버려져 있었다. 고이 묻을 수 있었을까. ‘이성을 찾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죽음을 시신투쟁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과연 그 시신 부여잡고 으아아아악 피를 토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들을 두고 ‘시신을 팔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래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시신을 볼모로 하면 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진중공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관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경우 크레인으로 관을 들어 올릴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미쳤구나” 싶었다. 하지만 생존이 예절에 앞서는 경우는 없다. 고(故) 최강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그 동료들에게는 138억의 손해배상이 걸려 있다. 그 모두의 삼십 대 후손까지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해도 갚지 못할 동그라미들의 쇠사슬. 회사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손해배상을 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피를 말리고 간을 쪼아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러다가 최강서 노동자는 죽었다. 힘들다고 울먹이면서 죽었다. 관을 떠메고 하는 시위에 눈살 찌푸리기 전에 대체 저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하는 게 응당하지 않을까. 

경기도 화성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또 이를 이용하여 ‘시신 투쟁’을 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들렸다. 이전과 다른 것은 그 비난이 고인이 일했고 해고됐던 회사의 노동조합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복직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간 옛 동료의 영혼이라도 ‘복직’시켜 주자는 동료들에게 이 노동조합은 ‘명예사원’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제시하더니 급기야 고인의 해고자 동료들에게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노동자로서는 차마 못할 소리까지 토해 놓고는 장례식도 끝나기 전 그 영전에 모인 조의금까지 들고 사라졌다.

지난 12월 19일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주워섬기기조차 버거운 죽음의 홍수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솔직히 죽음의 소식이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두려울만큼 많은 이들이 죽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죽음들은 결코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고 심약한 이들의 자포자기도 아니었으며 ‘열사’가 되려는 영웅심 때문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1996년 2월 5일 망루에 올라갔던 중년의 여인의 심경. 자기 집은 부숴지고 애들은 울부짖고 불길은 올라오고 소방차는 오지 않고 열기는 몸을 죄어 올 때 어른거리는 저 땅바닥, 그냥 뛰어내리라고 손짓하는 그 시커먼 땅바닥이 그 앞에 왔을 뿐이다. 그 땅바닥에 나는 태연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애써 그럴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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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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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전염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웃으면 따라 웃게 되고 영문도 모르고 웃게 되고 결국은 모두가 함께 웃게 된다던가. 그래서 복이 온다던가. 하지만 나는 오늘 한 웃음에 울컥한다. 그 웃음에 동참하고 싶지만 마음 한 구석이 구겨지고 눈이 뜨거워져서 웃지 못한다. 분위기만 보면 어느 회사에서 MT를 와서 한바탕 놀아 제낀 후 집에 가기 전 포즈를 취한 것도 같고, 누가 장가 시집간다고 해서 모인 동창들이 간만에 김치!를 부르짖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아니다.

7년 전 그들은 전 세계 기타의 30퍼센트를 생산하는 유망한 중소기업 콜트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무지 망할 리가 없고 망할 수도 없는, 1996년 이후 10년간 누적 순이익이 170억원에 이르렀던 회사에 별안간 ‘경영 위기’가 닥쳤고 노동자들은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됐다. 그로부터 7년 동안 노동자들은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다. 공장을 점거했고 대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지만 또 정반대의 판결을 받고 아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엄동설한의 어느 새벽 공장에서 쫓겨나 내동댕이쳐졌다. 공장 부지를 매입한 이가 그들을 주거침입으로 고발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들어간 공장에서 그들은 저 사진을 찍는다.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돼 있다. 무엇이 그리 흥겨운지 그 입들은 함지박처럼 벌어져 있고 있는 폼 없는 폼을 다 잡으면서 그 기분을 발산하고 있다. 청춘을 다 바쳐 일한 공장에 다시 들어올 수 있어서일까.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니다.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정말 저 사람들은 기뻐서, 신나서 웃고 있는 것이다. 강산이 바뀌고 코흘리개 초딩이 머리 굵은 중딩이 될 때까지의 그 세월 동안 월급 한 푼 못받고 싸워 온 사람들이 뭐가 좋아서, 무슨 신이 나서 저렇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짝다리 짚고서 환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들은 잠시 후 경찰이 들어와 자신들을 끌어내리라는 사실을 전달받은 뒤였다는데.

무슨 이야기들을 했을까. 언젠가 후지 락 페스티발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뮤지션 오조 메들리의 라울 페치코가 자신들을 무대에 올려 함께 노래했을 때의 감동을 이야기했을까. 처음 농성할 때 파들파들 떨던 아무개가 어느 새 깡패가 되어 있노라고 비웃으며 배꼽을 잡았을까. 또박또박 반박하는 여자 노동자에게 말려 말 한 마디 못하고 얼굴만 시뻘개지던 회사 간부의 토마토같던 얼굴을 떠올렸을까. 개처럼 끌려나와야 했던 공장, 이번에는 경찰이 들어와 영창으로 낚아채 간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맑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빛날 수 있을까.

과장되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사진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수백억 흑자가 쌓인 기업이 한 해 적자 봤다고 휘두르는 칼날에 하루 아침에 목이 잘리는 아픔도, 공장을 빼돌려 외국으로 튀어버린 뒤의 망연함도, 7년 동안 이어진 엄동설한과 삼복더위 속 농성과 싸움의 지겨움도, 이제는 공장 부지까지 남에게 팔려 버린 막다른 골목에서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흑암 앞에서도 저렇게 관솔불 같은 웃음을, 사람은 지을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퍼뜨릴 수 있다는 것. 그것보다 더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데 하물며 저렇게 풍부한 감성의 사람들이 기타를 수십년 수 년 만졌다면 음악적 감수성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터, 저들은 저 웃음을 남긴 뒤 노래를 불렀을 지도 모른다. <사노라면>이나 <자 이제 다시 우리 시작이다> 같은. 이미 머리 희끗희끗해진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자고 가슴 쫙 펴자고 깔깔대고 ‘절망만큼의 성숙, 그 깊이만큼의 희망’을 노래하며 경찰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이윽고 경찰이 왔을 때 그들은 열심히 저항했다. 노동자로서의 태를 묻고 뼈가 굵은 직장, 그 현장에서 떨려나지 않기 위해 어떤 이는, 저 웃음을 웃고 있는 여성들 가운데 몇 명은 창문에 매달려 버텼다. 지금 이 시간 저 사진 속의 인물들 중 따뜻한 방 안에서 이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두 군데 경찰서에 분산 수용되었다지만 그들은 그래도 한데 모여서 다시 웃고 있을 것이다. 다친 데는 없는지 물으면서 내일은 뭐할 건지 얘기하다가 또 누군가의 우스개에 배를 쥐고 웃으며 서로의 어깨에 힘을 불어넣고 있을 것이다. 사진 속, 오늘의 나의 영웅들에게 경의를.


2002.1.29 군산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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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2년 1월 29일 군산의 비극 

2002년 1월 29일 오전 11시 쯤 전북 군산 개복동의 유흥업소 카드체크기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곧이어 불꽃이 튀었다. 전기누전이었다. 인근의 물건들로 튄 불꽃은 이내 불길이 되어 그 지옥같은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발견한 것은 주방장 아주머니. 너무 당황한 아주머니는 “불이야!” 소리도 까먹은 채 밖으로 뛰쳐 나왔다. 옆 건물로 달려가 불이 났다고 얘기한 뒤에야 소방대가 출동했지만 이미 불은 번질 대로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회식 후 정신없이 자고 있던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15명의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발생 3시간 뒤 군산시와 소방서는 합동으로 이렇게 발표했다. “이번 사건은 대명동 화재사건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종업원들이 전날 술을 마시고 잠들어 술기운에 2층 창문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1층으로 몰려내려오다가 사망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대명동 화재라는 단어에 주목하자. 이곳은 군산에서 가장 번다한 사창가 골목이었다. 이른바 ‘쉬파리 골목’이라 불리우던. 2년 전(2000) 화재가 났을 때 성매매 여성들은 불길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타 죽거나 질식해 쓰러졌다. 이유는 포주가 설치한 쇠창살이었다. 

여성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포주는 쇠창살을 둘러쳤고 그 안에서 애타게 구원을 호소하던 성매매 여성들이 죽어갔던 사건이었다. 화재는 단 5분만에 진압됐는데 그 사이 5명이 죽었다. (영화 <이끼>의 한 장면을 생각해 보시면 된다) 이 사건으로 실컷 여론의 몰매를 맞았던 공무원들로서는 이 사건과 그 사건이 다르다는 선을 우선적으로 긋고 싶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했을까. “여종업원들이 조금만 침착했어도 2층에 있는 유리창문을 깨고 비상사다리를 통해 빠져 나갈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해 대형 참사를 당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쇠창살은 없었지만 밖으로 난 창은 베니어 합판으로 막혀 있었다. 반대편의 창 역시 시멘트로 발라 버려 밖에서는 창이지만 안에서는 벽이었다. 즉 피해자들은 그나마 창살 사이의 햇볕조차 받지 못하고 일상을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2층에서 비상시 탈출하도록 만들어진 비상계단이 있었지만 그곳 창문은 빈틈없이 못이 박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출입구는 특수하게 제작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감금이었다. 뜨거운 불길 속에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컴컴함 속에 15명의 생명들은 쇠창살 너머 손을 뻗어 볼 새도 없이 죽어갔다. 

그런데 업주 측은 “베니어합판은 보온용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우겼고 관계기관은 그 말을 받아서 감금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잇단 취재와 증언으로 사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개복동에서 얼마 전까지 일했던 여성은 언제나 문은 잠겨 있었고 ‘삼촌’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는 2년 전 지척의 대명동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닮아 있었다. 
“힘든 하루였다. 부모가 보고 싶다. 희망 없는 미래,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갈까.” (개복동) “나 좀 도와주세요. 제대로 인간답게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요. 이 정도면 옛날에 죄값은 다 치른 것 같은데 제 생각만 그런가요.” 

유족들은 이런 지경으로 여성들을 방치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선 승소했지만 2심에서는 패배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 유족들은 정부로부터 공식 배상을 받게 됐다. 그런데 그 죽음으로 유족들이 배상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망자 15명 가운데 13명이었다. 2명은 고아였던 것이다. 정말로 뜻하지 않게 이 세상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나이 스물 댓까지 제대로 된 보살핌 한 번 받지 못한 채 세상의 바닥에서 모진 꿈만 꾸면서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별안간 주위를 감싼 화마에 휩싸여 고단한 삶을 마친 두 명의 고아 여성은 배상 명단에서도 빠져 있었다. 저 위에서 얘기한 발견된 메모는 혹시 그녀 중 하나의 것이 아니었을까. 부모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면서 절망적으로 끄적인 그녀의 마지막 흔적은 아니었을까. 

군산 개복동 화재는 성매매 여성들의 처참한 인권 실황을 흉측하게 드러냈고 이로 인해 들끓는 여론은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제정의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8년.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위헌이 제청됐고 오히려 이 법으로 인하여 성매매가 근절되기는 커녕, 더욱 음성화하고 조직화하며 오히려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차라리 성매매를 합법화하여 제도권 내에 진입시키고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어디에도 손을 들지 몰라 엉거주춤을 춘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한다고 해서 성매매가 뿌리뽑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산 개복동에서 보듯 일종의 브레이크는 필요했다고 보고 성매매 특별법이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고도 본다. 반면 브레이크만 가지고는 주변을 씽씽 추월해가는 불법 차량들을 다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합법화의 길을 밟는다면 대관절 어디까지 국가가 개입하고 관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나오고 거기에서 나는 또 한 번 길을 잃고 만다. 보건복지부에서 성매매 단가를 정할 수도 없고 경찰이 “변태 성매매 강요 신고센터”를 운용할 수도 없고.. 

그저 다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제도가 들어서든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상식과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없이는, 그리고 가난 때문에, 그리고 본인의 의사와 반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겠다. 사람을 ‘똥치’로 대우하는 한,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여기는 한, 도망갈까봐 쇠창살을 둘러치고 베니어합판으로 창문을 막는 한, 그리고 깡패를 동원해서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 머리채를 잡아오는 일이 있는 한 성매매가 합법이든 불법이든 군산 개복동은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이겠지. 즉 불법과 합법이냐는 헌법재판소에 물어 볼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볼 일이겠다. 우리나라의 사람 대접은 과연 나아졌는가. 나아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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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30 어느 열심히 살았던 인간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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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6년 1월 30일 어느 열심히 살았던 인간의 최후 

1956년 1월 30일 원효로 1가. 지프차 한 대가 옥인동 육군 특무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별 두 개를 어깨에 매단 작달막한 장군이 앉아 있었다. 별안간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좁디 좁은 길에서 차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운전병은 차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한 치라도 주저하다간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지금 운전병이 모시고 있는 이는 별 넷 짜리가 떼를 지어 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군부 내의 실세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었다. 운전병이 득달같이 달려가는 찰나 근처에 숨어 있던 괴한들이 차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있던 김창룡에게 권총을 쏘았다. 나이 서른 여섯 (실제 나이 마흔)의 특무대장은 아이쿠 소리를 내며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양치성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구걸을 일삼다가 동냥을 베풀어 주는 일본인들로부터 일본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고 일본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되고 조선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일본에 대한 충성과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이들에 대한 적의로 풀었던 일본군 밀정. 이는 김창룡의 인생 경로와 유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영흥잠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측량 기사를 했다고 하니 성실하고 머리도 좋았던 것 같다. 일본어는 기본으로 하고 중국어도 유창했던 그는 만주철도회사 (만철)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역무원으로 근무하는데, 여기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이근면하고 머리 잘 돌아가는 조센징을 어여삐 여긴 일본인 역장이 그의 등을 떠밀어 관동군 헌병학교에 입대하도록 한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밀정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한다. 중국의 비밀 공산당원이었던 식당 주인의 조직을 염탐하기 위해 그 점원으로 들어가 성실히 일하고 심지어 영하 40도의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 밥을 해 바쳐 가며 충성을 다한 사례는 유명하다. 그렇게 신임을 얻은 후 그는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조직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를 무력화시킨 공로로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오장이 된다. 영화 <아리랑>의 양치성이 일본을 다녀온 이후 “일본은 대궐 조선은 헛간”이라고 자조하고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에 충성했던 것처럼, 김창룡 또한 오장 계급장을 달았을 때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조선 천지에서 그만큼 ‘열심히’ 산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데 덜컥 일본이 패망했다. 김창룡이 충성을 다한 관동군도 패잔병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들은 해방됐다고 난리였지만 김창룡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에 남을 수도 없었던 그는 떨떠름하게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지만 왕년의 관동군 오장, 악명높은 밀정의 이력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철원에서는 왕년의 관동군 동료가 그를 고발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고 이번에는 사촌형제의 밀고로 잡혀서 두 번째로 사형 선고를 받지만 또 몸을 빼어 삼팔선 이남으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설 땅을 잃은 그는 남한에 와서 또 한 번 그의 재주를 ‘열심으로’ 발휘할 자리를 얻는다. 그에게 남은 것은 관동군 밀정으로 얻은 정보원으로서의 재주와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명을 다해 그 두 가지를 모두 발휘한다.

“여자들 붉은 치마만 봐도 경기를 한다.”는 쑥덕거림이 있을만큼 ‘빨갱이’에 민감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사적인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즉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은 죄다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이 “전기고문으로 지져 버리면 아무 말이든 불지 않을 놈이 어디 있느냐? 이 버러지같은 놈아!”라고 일갈했던 것은 그 단면의 하나다. 국방부 전사에서조차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서 희생된 장병들 가운데 억울한 이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총살대 위에서도 대한민국 만세와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짖으며 죽어갔음을 증언하고 있으니 김창룡이라는 이의 빨갱이 사냥이 얼마나 혹독했으며 동시에 얼척 없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번은 공군 장교 40여명 전원을 잡아들였는데 (여기에는 후일의 공군 참모총장도 끼어 있었다) 놀란 김정렬 대령 (6월 항쟁 이후 5공 정권의 총리를 맡았던 그 사람이며, 한국 공군의 원로)이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온 김창룡의 대답은 공안당국 어록의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아직까지 증거는 없으나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서.” 

처음 한국군 경비대에 들어갈 때 그는 면접에서 “일본군대에서 배운 좋은 것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에 몸 바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징그러울 만큼 열심히 그 ‘몸’을 바쳤다. 사후 그 부하들이 증언한 조작 사건들 제목만 읊어도 그날 해는 저물 정도로.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으나 공 앞에서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은 용공으로 몰았다.”

이 김창룡이 성공적으로 숙군을 치러 내 6.25 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국군의 내부 이반이 없었고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았다며 김창룡을 떠받드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고자 한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그 사람은 그 가치와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유령은 좀체 저승으로 가지 않은 채 한반도 위를 떠돌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멀쩡한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아무나 보고 종북거리는 전직 아나운서나 자기 맘에 거스르면 다 종북인 양 설치는 전직 진보 논객이나 다 그 빙의의 희생양 같으니 말이다. 

김구가 죽었을 때 문상조차 가지 않았던 이승만은 몇 번씩이나 빈소를 찾았고 전군의 가무음곡을 금하고 조기를 내걸라는 지시를 내리며 그 심복의 최후를 기렸다. “대한민국이 망했구나.”가 김창룡의 죽음을 접한 휘 일성이었다고 하니 그 충격과 슬픔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을 망친 혐의는 김창룡을 죽인 사람들이 아니라 김창룡 자신에게 더 크게 돌아갈 듯 싶다. 그의 삶도 그러했지만 당장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4.19 때 이승만 정권이 그리 맥없이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분분한 것이다. 

김창룡의 비문을 쓴 것은 한국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였다. 그냥 감상해 보자. 모든 기록은 뒤집어서도 읽어야 한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추서)은 4289년(1956년-필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 아 -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김창룡은 지금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호국의 신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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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2.6 조지 6세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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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2년 2월 6일 영국왕 조지 6세 서거 

“이혼녀와의 결혼을 동의할 수 없음이라. / 나중에 부적격하다고 판가름날 것이기에
섬나라 왕은 쫓겨나야 할 운명이니 / 엉뚱한 자가 그 대신 옥좌를 차지하도다. ”

만약 정말로 16세기에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예언시를 쓴 것이 정녕 맞다면 나는 그의 예지를 인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예언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이 성취되었기 때문이죠. 1936년 12월 정확히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이유와 배경으로 영국왕 에드워드 8세는 퇴위하고 엉뚱한 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국왕과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영국 국민들과 내각은 용납할 수 없었고 수상은 퇴위 후 결혼이냐 연인과의 결별이냐를 선택하라고 왕에게 상주합니다. 이때 에드워드가 남긴 말 한 마디는 매우 멋드러집니다. 
“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and to discharge my duties as king as I would wish to do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 왕으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더 이상 지탱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노라.) 

이렇게 사랑을 위해 왕관을 내던진 로맨틱 가이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에드워드 8세는 왕가의 골칫덩이였다지요. “백성은 나를 일컬음이라.”고 한 말로 유명한, 책임감 백퍼 충전의 아버지 조지 5세는 이 왕세자를 두고 “이 녀석은 내가 죽으면 단 1년 내에 망가져 버릴 거야!”라고 호언했지요. 나이 마흔 되도록 장가도 안가고 숱한 여자와 염문을 뿌리는 거까진 좋은데 왜 사귀는 사람마다 유부녀 아니면 이혼녀인지 이 엄한 부왕은 환장할 밖에요. 하지만 세월이 가서 조지 5세도 죽습니다. 말썽쟁이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긴 하지만 이내 사단이 나죠. 앞서 말한 심프슨 부인 문제가 터진 겁니다. 그 바람에 벼락치기 왕위에 오른 이가 그의 동생 조지 6세입니다. 작년에 영화 <킹스 스피치>를 보신 분들은 아 그 말더듬이? 라며 킬킬거리시겠죠. 네 바로 그분입니다. 

허우대 멀쩡하고 말도 잘하는 형에 비해 동생은 어려서부터 말더듬이였고 유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 (유모가 정신질환자였다는군요) 위에 병을 얻어 평생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왕이 될 생각은 꿈에도 않고 그저 자신이 평생 사랑하리라 맘 먹은 아내와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한세상 보내면 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왕이 된 겁니다. 이 심약한 왕은 아내를 붙들고 펑펑 울었답니다. “내가 와...와....왕이라니! 내....내...가 왕이라니!” 어디 왕 뿐입니까. 1차대전 이후 미국한테 자리를 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황제 폐하인데 말이죠. 어머니에게 달려가 못하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 모양이지만 도리가 있나요. 

하지만 세계는 이 준비 안된 왕이 제대로 국왕 수업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기고만장이 절정에 달한 히틀러는 연신 유럽을 향해 장광설을 퍼부으며 독일인의 ‘레벤스라움’ (생활 영역)을 주창하고 있었지요. 퇴위한 형은 은근 히틀러를 찬양하면서 딴지를 걸고 있었고 전쟁의 시침은 착착 디데이 에이치 아워를 향해 움직여 갔습니다. 그리고 국왕 조지 6세가 말더듬이 교정 훈련을 한창 받고 있었을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서막이 오릅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들을 향해 연설하게 됩니다. 영화 속 그 장면이죠. 

“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이 암울한 시간이 어쩌면 역사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이 땅과 해외에 나가있는 영국 국민들에게 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여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국민 여러분, 멀리 해외에서 듣고 계신 국민 여러분, 마음을 모아 주십시오. 침착하면서도 결연한 자세로 다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영화에서는 완전 불독 형상의 윈스턴 처칠이 명연설이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실제 조지는 잘 해 냈습니다. 여유도 있었습니다. 언어치료사 라이오넬의 회고에 나와 영화에도 반영된 얘기지만 “복모음 발음이 좀 이상했습니다 전하.”라고 하자 “나인 줄 알라고 일부러 그랬어.”라고 맞받을만큼 말입니다. 하지만 조지 6세의 역할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와 왕비는 런던의 반이 잿더미가 되는 나찌 공군의 폭격 속에서도 버킹검 궁을 지켰습니다. 1940년 9월 폭격 때는 버킹검 궁이 직격탄을 맞습니다. "우리가 서로 멍청히 바라보는 순간 폭탄은 우리를 지나 안뜰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왕비 엘리자베드) 그러나 그 경황 중에 부서진 건물 틈 사이로 런던의 이스트엔드가 보이자 왕비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이제 버킹검 궁에서 이스트엔드가 보이네요.” 

관리들이 안달복달을 하며 왕과 왕비의 피신을 권유하지만 둘은 버킹검을 떠나지 않습니다. 버킹검이 폭격을 받은 바로 그날 오후 왕비는 폭격 맞은 이스트엔드를 돌며 집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조지 6세는 곳곳의 전장을 방문하며 군인들을 격려했고 지중해의 영국령 몰타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상공세를 물리치고 끝끝내 섬을 지켜내자 순양함에 올라타고 몰타를 방문하여 몰타 시민 전체에게 성 조지 훈장을 수여합니다. (이 훈장은 지금도 몰타의 국기에 새겨져 있지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열흘 전에는 몸소 진중으로 뛰어들어 병사들과 만나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런 왕이었기에 God save the king으로 시작하는 영국의 국가는 영국군들의 피를 끓게 했고 영국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전쟁이 끝났을 때 미친 듯 환호하는 영국인들은 버킹검 궁 앞으로 몰려와 We want king!을 연호하게 된 것이겠지요. 

전쟁의 스트레스와 그를 달래려던 흡연은 그의 건강을 허물었지만 그는 역시 허물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미 인도의 황제는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파키스탄의 국가원수로 남아 있었고 영연방의 영수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친선 사절 노릇을 했지요. 남아공에 갔을 때 흑인들의 접촉을 가로막는 백인 경찰들에게 기겁을 하고는 “게슈타포 같은 놈들”이라고 힐난했을 만큼 절도 있고 경우 있는 왕이기도 했고요. 그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나이 쉰 일곱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지요. 하지만 말썽쟁이 형 때문에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는 평을 듣던 왕정을 반석 위에 올려 놨고 그 딸은 6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이 조지 6세의 삶을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왕이 없었을까.” 그러면서 자답하게 됩니다. “뭐 그 백성에 그 왕 아니었겠어.”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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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7 죽음의 천사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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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2월 7일 죽음의 천사는 어디로 갔을까 

한창 배추머리 김병조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로서 절정의 줏가를 달릴 때였어. 그 프로그램의 클로징이었을 거야. 난데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죽 읽더군. 보통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위인들이나 잘 알려진 스타나 비슷한 위상의 사람들이었지. 그 가운데 한 이름이 나왔어 멩겔레.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줄을 이었지. 그 다음 김병조의 멘트는 이것이었어. “이상은 이 방송을 볼 수 없는 분들입니다.” 즉 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거지. 멩겔레. 조지프 멩겔레는 그즈음 완전히 죽은 것으로 판명났지만 바로 전까지도 살았네 죽었네 말이 많았던 사람이었지. 

요제프 멩겔레는 의사였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독일인답게 성실한 의사였지. 탁월하지는 않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의 논문 제목을 봐서야. 그의 논문 제목은 “인종에 따른 턱의 구조 차이”였어. 즉 인종에 따라 그 신체 구조가 명확하게 다르며, 역으로 그 신체 구조에 따라 인종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 바로 나찌의 논리였어. 나찌는 사람의 얼굴을 자로 대 가며 열등인종인지 우등인지를 가렸다. 이게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그 검사를 통해 “완벽한 아리안 인종”의 판정을 받은 유태인들의 예로 알 수 있어. 그러니 탁월한 의사라고는 볼 수 없겠지. 

하지만 그는 성실했어. 자신의 의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또 주어진 임무를 위하여 그는 빈틈없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확한 독일인이었지. 1943년 아우슈비츠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의사로 부임한 그는 그 성실성과 정확성을 끔찍하게 발휘하지. 그는 도망치다가 잡힌 유태인 소년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면서 그 죽음의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했다고 해. 사람의 피부가 어떻게 불에 타고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며 언제 숨이 끊어지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지. 연일 아우슈비츠에 실려오는 유태인들 주위를 돌아다니며 그는 그의 모르모트들을 골라 낸다. 인간 모르모트들은 일단 행복했어. 첫째 가스실로 끌려갈 위협은 없었던데다가 중노동에 시달리던 다른 유태인들보다 밥도 괜찮게 먹였거든. 

멩겔레가 특히 관심을 보였던 연구는 쌍둥이들에 대한 연구였어. 그가 아우슈비츠에 근무한 기간은 21개월, 그는 연일 실려오는 수용자들 가운데 쌍둥이를 특별 관리했지. 그래서 그의 손에 걸린 쌍둥이가 무려 1500 쌍이라고 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금발의 푸른 눈의 ‘아리안 족’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쌍둥이를 대량 생산(?)하려는 심산도 있었다니 멩겔레의 관심이라기보다는 히틀러의 관심이라는 게 옳겠지. 

실험은 다양했어. 쌍둥이 중 하나에게 온갖 독성 물질이나 세균 등을 퍼붓고 그와 다른 하나를 비교하는 실험, 아예 둘을 즉사시키고 즉시 해부하여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실험 등등. 그 가운데 참 기가 막히는 건 눈 실험이었어. 눈동자 색깔을 바꿀 수 있을까 보기 위해 쌍둥이들의 눈에 물감을 떨어뜨려 ‘염색’을 기도했던 거지. 그 외에도 멩겔레는 기상천외한 실험들을 서슴없이 했어. 쌍둥이들의 생식기를 바꿔 본다거나 샴 쌍둥이처럼 둘을 붙여 버린다거나 하여간 동물 실험을 하는 사람들도 상상 못할 일을 버젓이 했지. 


작게는 10만, 많게는 4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의사 멩겔레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근처가지 육박하자 수용소를 탈출해. 1945년 1월 초,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고 숨어 지내는데 이 죽음의 천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았지. 의사 뿐 아니라 변장에도 귀재였던 그는 유럽을 탈출해 남미로 가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를 전전한 끝에 브라질의 한적한 밀림에 정착해서 친구에게서 빌린 볼프강 게르하르트라는 가명으로 평생을 유유자적 살다가 죽어. 예순 여덟 나이에 수영을 즐기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니 죽음 치고는 매우 안락하고 평화로운 죽음이었지. 전직 모사드 (이스라엘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 에이탄에 따르면 그는 모사드에 의해 은신처까지 파악됐었다고 해. 하지만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악질 나찌 체포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멩겔레 검거를 포기해야 했다는군.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돼 이스라엘 법정에 서는 걸 본 멩겔레는 더욱 더 꽁꽁 숨어 버렸고. 그 뒤 멩겔레는 꼬리를 밟히지 않았어. 

2009년 묘한 기사가 나왔어. 브라질의 칸디도 고도이라는 독일인 마을에서 여성 5명이 임신을 할 경우 그중 1명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쌍둥이를 출산한다는 거야. 이와 관련해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나치 과학자 요세프 멩겔레의 실험 결과가 아니냐는 주장을 편 거지. 평균적으로 쌍둥이는 80명의 여성 가운데 한 명 꼴로 낳는데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거 아니냐는 거지. 멩겔레는 1960년대 초반 그곳을 자주 방문해서 의료 행위를 했었고 거기서 그의 실험을 브라질에서까지 계속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지. 그만큼 그의 그림자는 깊고도 길었다. 

하지만 진짜 악은 그 그림자 뒤에 숨어 있는지도 몰라. 실상 김구를 쏜 안두희처럼 그는 그 배후의 거대한 세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일개 군의관에 불과했거든. 물론 그는 사람을 장난감 취급했고 쥐보다도 못하게 대우했던 건 명백한 사실이지. 하지만 그가 공포의 실험 후 작성한 보고서를 보낸 빌헬름 황제 연구소는 그 모든 서류를 불태우면서 혐의에서 벗어났고 그에게 그 실험을 명령했던 상관들도 정확하게 처벌받지 않았어. 멩겔레는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항변했을지도 모르겠다.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말로 수만 명을 죽인 이들은 당당하게 대로를 활보하다가 명예 누리며 죽었는데 자기는 왜 가명으로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느냐고 말이지. 그리고 일본 731부대의 의사들처럼 미군과 협상하여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것을 억울해했는지도 몰라. 

나쁜 놈들은 항상 자신이 덜 나쁜 놈이며 자기 뒤에 진짜 악당이 있다고 떠벌이지. 그런데 슬픈 건 그게 항상 공나발만은 아니라는 점이야. 그 진짜 나쁜 놈들은 대개는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하수인들이 행한 악의 댓가를 향유하는 한편, 용도 폐기된 허수아비를 대중에게 내 주고 몽둥이를 들려 주면서 맘껏 두들겨 패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격려하기까지 하지. 사람들은 그 허수아비를 쫓다가 허수아비를 조종하는 놈들은 잊게 되고 허수아비를 때려잡고서 “정의의 승리”를 노래할 때가 많지. 그때 그 진짜로 나쁜 놈들의 기분은 어떨지 심히 궁금해. 사람들은 그럴 때 천벌이 필요하다고들 하겠지. 또 지옥이 있어주어야겠다고 하겠지. 신은 또 그럴 거 같아. “니들이 못한 일을 왜 나보고 하라고 그러니?” 조제프 멩겔레가 1979년 2월 7일 죽었다. 그는 지옥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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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2.8 지오다노 브루노 사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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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2월 8일 지오다노 브루노 사형 선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눈코입매가 다 다르듯 모든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없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여러 단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도 나같이 생각할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고 또 다른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점이죠. 거기서 오해가 일어나고 다툼이 생기고 배신이 벌어지고 드물게는 죽고 죽이는 놀음까지도 벌어져 왔음을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으니까요. 

1600년 2월 8일 그 이름부터 확실한 이탈리아 사람인 지오다노 브루노가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그는 무려 8년 동안 감금되어 자신의 생각을 철회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했고 결국 불태워 죽여 버리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나이 쉰 둘 삶의 최후를 대중의 구경꺼리로 불 잘 먹는 불쏘시개로 내줘야 했던 그는 감금된 방 안에서 촛불에 손을 댔다 뺐다 하면서 고뇌했다고 합니다. 왜 그라고 갈등이 없었겠어요. 저 괴팍한 갈릴레이도 굴복하여 목숨을 건졌고 브루노 자신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준 코페르니쿠스도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폭로함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했던 걸 아는데 말이죠. 하지만 브루노는 그의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런 당당한 말을 남깁니다. “화형대에 선 나보다 판결을 내리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쉰 둘의 인생 동안 그는 그야말로 부평초같은 인생이었죠. 도미니크회 사제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의 머리 속은 너무나도 자유로왔고 복잡해서 단순하기를 강요하는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었죠. 그가 생존했을 때부터도 천 이백년 전의 니케아 종교 회의 때 이단으로 정죄받고 사멸되다시피 한 아리우스 파의 가르침을 다시 들고 나오는가 하면 무려 130여 회나 교회법을 어겼다고 고발된 정도로 독특한 주장을 펼쳤죠. 

부평초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요즘의 국경으로 치면 스위스에서 영국까지 몇 나라 도시를 드나들면서 살아가야 했죠. 생판 엉뚱한 소리를 일삼는 그가 한 곳에서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죠.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도 여러 번이었으니까요. 카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몇 번 이단으로 몰리고 심지어 살인자로까지 고발되는 가운데 개신교를 수용하게 되지만 이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는 개신교와도 맞지 않았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하면서도 일종의 제한된 천구, 유한한 우주를 조심스레 설정했던 코페르니쿠스를 훌쩍 넘어서서 “태양과 지구 또한 많은 항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브루노는 개신교도의 눈에도 가시였겠죠. “너는 태양아 여호수아 위에 머무르라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코페르니쿠스를 바보라고 부른 루터나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한 캘빈이나 브루노가 이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코. 하지만 이 괴짜 신학박사는 유럽 각국을 누비며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한때 영국에 잠입한 프랑스 스파이 노릇도 했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하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고 기억술의 대가 흉내를 내며 귀족들을 농락하는가 하면 희극을 써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그에게도 아픈 추억은 있습니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캘빈파 교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한 뒤 생명의 위협에 시달린 끝에 그 비판을 철회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던 겁니다. 천하의 미스터 꼬장꼬장 브루노로서는 매우 회복되기 힘든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요. “신앙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캘빈의 주장은 틀렸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존엄하다.”고 주장했던 위협에 못이겨 스스로의 주장을 철회했으니 말입니다. 

그의 후원자로 행세하던 귀족이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되레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고 브루노는 기나긴 감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캘빈파에게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온갖 협박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은 거죠.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거둬들이지 않은 죄로 생명을 내줘야 했던, 근대의 첫 순교자이거나 중세 시대의 마지막 희생자가 된 거죠.

그로부터 수백년 후 그의 이름은 미국의 노동운동가 스파이스에 의해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그는 최후 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진리를 외치다 죽은 선인들이여. 소크라테스여 예수여 ..... 그들은 죽었으되 진리는 살아 있다. 나 또한 그들을 따를 것이다. 자 준비는 끝났다. 어서 사형 집행인을 불러라!” 그에게 브루노는 예수와 같은 반열에 올라 설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을 받는 나보다 판결문을 읽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질려 있다”고 조소한 그 배짱을 본받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스파이스도 죽는 순간만큼은 브루노의 결연함을 따르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루노의 몸뚱이가 불태워지던 날 로마의 신문 하나는 이런 기사를 싣습니다. 

“목요일 날 아침에 꽃의 광장에서 나폴리 놀라 출신의 그 흉악무도한 도미니코 수도사가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그 매우 고집 센 이단자는 우리의 신앙을,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다른 교리들을 기분에 따라 제 멋대로 만들어 냈다. 이 흉악무도한 자는 고집스럽게 자신이 만든 교리들을 위해 죽기 원했다. 그는 자신은 순교자로서 죽으며, 그렇게 죽기를 원하며, 자신의 영혼은 화염 속에서 천국으로 올라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말한 진리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실제로 브루노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 내민 십자가를 의연하게 외면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교리, 즉 인간은 존엄하고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거절함으로써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되었던 그가 1600년ㅁ 2월 8일 의연하게 사형 선고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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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2000. 2. 9 괴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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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9일, 1950년 2월 9일의 괴물 

2000년 7월 한국 환경 단체에 한 한국인 미군 군무원으로부터 특이한 제보가 하나 들어옵니다. “지난 2월 9일 미군 군무원 맥팔랜드가 유독 화학 물질인 포름알데히드 475ml 들이 420병을 한강에 무단 방류하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제보자가 한강은 우리의 식수원인데 그런 걸 무단 방류할 수는 없다고 만류하자 이 맥팔랜드 거친 말을 내뱉으며 명령합니다. “조또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너 바보야?” (Do what fuck I tell you. Are you stupid?) 결국 시키는 대로 이행해야 했던 한국인 군무원은 그 후유증에 며칠간 병가를 내야 할 정도였다지요. 거듭 생각해 봐도 용납이 안된 한국인 군무원은 미군 상부에 이 사건을 보고합니다. 그때 그가 들은 답변이 “물에 희석하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2월 9일 한강에 퍼뜨려진 포름알데히드는 그렇게 물에 희석되어 날아갔는지 서해 바다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마 미군측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거긴 너희들 식수원도 아니잖아. 그냥 너희들도 자주 이용하는 폐수 처리장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개겼습니다. 환경단체가 이를 폭로했지만 미군의 공식 반응이 나온 건 열흘 뒤. 그나마 45일간의 감봉을 받은 후에는 승진까지 합니다. 환경단체가 수질 관리법 위반 등으로 당국에 고발하지만 맥팔랜드는 한국 경찰의 수사를 받기는 커녕 SOFA에 근거하여 출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 8군은 그가 영내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뻗대었지요. 한국 관리가 공소장을 전달하기 위해 미8군을 찾았다가 “일 없으니 돌아가시오.”라는 문전박대를 당한 것도 수 차례였습니다. 

그 고발이 그나마 검찰의 수사로 쭉정이같은 열매를 맺은 것은 1년 뒤였습니다. 그것도 약식 기소 벌금 500만원. 그런데 이즈음 민주 정부 하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던 사법부가 직권으로 이 사건을 재판에 회부합니다. 하지만 미군측은 또 SOFA를 내세웁니다. “공무집행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한국 재판부는 재판권이 없다.”면서 맥팔랜드는 출석조차 거부하지요. 결국 피고인이 없는 상태에서 재판은 진행돼서 실형 6개월이 선고됩니다. 무려 4년만. 맥팔랜드와 미군측은 항소하고 2004년 12월에 있은 항소심에서야 그렇게도 얼굴 보기 힘들었던 맥팔랜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과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1심과 2심 재판부는 일관되게 평화시 미군 군속의 재판권은 한국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2심의 경우 죄질은 중하지만 처음으로 재판에 출석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내리게 됩니다. 물론 맥팔란드는 ‘유감’을 표시하면서 퇴정 중 취재진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후 상고했다는 보도는 없는 걸로 봐서 맥팔랜드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모티브가 됩니다. 학창 시절 한강 다리를 기어올라가는 뭔가를 목격했다는(?!) 봉 감독은 이 영화를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는데 마침 이 사건이 터졌고 “원자폭탄 실험이 고질라를 만들었듯” 이 사건은 그의 오프닝을 장식하게 된 것이라죠. 영화 속에서 미군이 한 말 기억나십니까. “한강은 크고 넓어요. 작업해요. 이건 명령이요.” 잘 모르긴 하지만 언젠가 만난 그쪽의 전문가는 포름알데히드 자체가 그렇게 큰 환경적 영향을 끼쳤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어쨌든 한국 법 뿐 아니라 미군의 내규까지도 어긴 행동이었고 그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미군은 그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괴물이 됐고 영화 <괴물>의 모티브를 제공했습니다. 

영어 제목은 다르지만 우리말 제목은 같은 존 카펜터 감독의 공포 영화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극의 고립된 기지에서 정체 모를 외계 생명체가 사람과 개의 몸 속에 들어가 그를 복제해 내고 다른 희생양을 노리는 줄거리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극 기지의 요원들은 서로 서로를 의심하며 더 큰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누가 괴물인지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사실은 나를 노리는 괴물일지 모르며 내가 방심하는 순간 내 생명을 빼앗아 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 영화의 긴장을 놓치 않는 끈이죠. 마지막 장면에서 부상당한 주인공 앞에 홀로 남은 동료가 나타나는데 그조차 괴물인지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영화는 끝납니다. 

사실 이런 플롯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복제인간의 제국>이나 <바디 에일리언> 그리고 최근에 개봉된 <인베이더>까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활용한 영화들이었죠. 그 공포의 연원 가운데 하나는 1950년 2월 9일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의 발언으로 시작합니다. 별 볼일 없는 연방 상원 의원이었던 매카시는 1950년 2월 9일 버지니아 주의 작은 소도시 휠링에서 공화당 부녀 회원들을 모아놓은자리에서 “미국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그 명단을 보유하고 있다.”는 폭탄 선언을 한 겁니다. 그리고 이는 매카시즘으로 불리우는 빨갱이 사냥의 태풍의 진원지가 됩니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였던지라 그 성마른 여론에 떨어진 매카시의 불똥은 이내 미국이라는 광야를 사르는 들불로 화하고 맙니다. 매카시는 금새 스타덤에 올랐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미국 내의 빨갱이들을 몰아내자고 외치지만 그는 205명 가운데 단 한 명의 공산주의자도 고발해 내지 못했지요. 205명은 57명으로 다시 10명으로 줄었고 마지막으로 혐의를 두었던 이는 중국하자 라티모어였습니다만 이것조차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이 순풍이든 역풍이든 휘날리는 종잇장들은 있는 법. 빨갱이 사냥으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국가 연주 중에 엉덩이를 긁은 사람도 혐의를 받았다.”는 명배우 험프리 보가트의 말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그것은 공포였지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국무성에, 심지어 백악관에, 내가 뽑는 의원 후보 중에 하나가 괴물에 의해 복제된 복제인간으로서 암약 중일지 모른다는 공포 말입니다. 그리고 공포를 느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대담해집니다. 즉 상식과 경우를 망각한 채 자기 방어에 나서게 되고 그 방어에 대한 죄책감을 삭감하게 되죠. 그 일이 미국에서 무려 4년 동안 벌어지게 됩니다. 광풍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 여러 사람들의 밥줄이 끊기고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감옥살이를 경험한 뒤에야 미국은 제정신을 찾습니다. 그리고 매카시는 술을 퍼먹다가 간질환으로 사망하죠. 

50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 두 사건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2000년의 포름알데히드 방류 사건에서 미군 군무원 맥팔랜드와 그를 두호한 미군은 오만이라는 괴물의 복제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2월 9일의 매카시의 연설은 공포와 야만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그 왕성한 복제력을 자랑하며 활동을 개시한 날이었습니다. 그럼 결국은 또 우리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괴물들로부터 자유로운지. 오만이라는 괴물로부터 결코 침해받지 않았으며 공포와 야만의 괴물은 우리들을 범접하지 못하였는지, 혹시 언제 복제됐는지 모르게 우리는 괴물의 일부로 동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카펜터의 영화 <괴물>에는 어떤 실험을 통해 괴물임을 알아내고, 그 순간 괴물이 인간의 피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시각 효과가 등장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실험이 가끔 필요하지 않을까요. 특히 자기 맘에 안들면 다 종북이라는 사람들 그 오만과 야만의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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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10 숭례문 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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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숭례문 아 숭례문 

구정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좌석 하나 빈 곳 없는 KTX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객차 내 모니터에 이상한 글자들이 떴다. “숭례문 화재 발생, 긴급 진화 중” 아이들 챙기고 짐 내리느라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충 짐 정리한 후 옷 갈아 입고 소파에 걸터앉아 리모콘 버튼을 누른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숭례문, 하지만 그 이름보다는 ‘남대문’에 더 익숙한 옛 도성의 문루가 활활 붙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보 1호라고는 하지만 왜 그게 국보 1호인지 모르겠다고 툴툴대던 남대문. 솔직히 중국이나 서양, 하다못해 일본의 성에 비해서도 그 규모가 우람하거나 외양이 특출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던 남대문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 그 낡은 목재들이 그저 불쏘시개가 되어 낼름거리는 화신(火神)의 혓바닥에 삼켜지는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느낌으로 가슴팍에 꽂히고 있었다. 마치 늘상 구박하곤 했지만 그저 내 옆을 지켰던 오랜 친구가 불길에 휩싸인 집 창 안에서 나를 보고 서글프게 웃으며 작별의 손짓을 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지. 

숭례문이 완공된 것은 1398년 음력으로 2월 8일이었다. 610년 동안 왕자의 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 6.25 등 별별 난리를 다 겪으면서도 그 형상을 유지해 온 숭례문은 그렇게 속절없이 불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필사적으로 진화에 나섰지만 겨울 바람에 바싹 마른 목재들은 순식간에 시커먼 잿더미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문루에 내걸린 현판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천하의 말썽장이였지만 글씨 하나는 호방했던 양녕대군의 글씨. 임진왜란 때 유실됐는데 밤마다 한 구덩이에서 서광이 비춰 이상해서 파 보니 그곳에서 다시 발견됐다는 전설이 서린 그 현판, 관악산에 등천하는 화기를 막기 위해 세로로 걸었다는 그 현판이 꽁꽁 언 땅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로부터 나와 아내는 거의 아무 말도 없이 10분 가까이 그 화면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망연한 서운함과 까닭모를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닌 듯 했다. 어떤 후배는 TV를 지켜보다가 택시 잡아타고 남대문을 불러 불타 오르는 남대문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왜 그랬냐는 짖궂은 질문에 도무지 자기도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그뿐이 아니었다. 흉측한 몰골이 가려지기 전 숯덩이가 된 문루를 인 돌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탄하고 안타까움을 토해 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600년 동안 한 도시의 사람들을 굽어보던 숭례문이 없어진 것은, 하필이면 우리 대에 깡그리 불타 없어진 것은 많은 이들이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숭례문을 그렇게 불태운 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한 노인이었다. 그는 ‘토지 수용 보상금’이 적다는 이유로 관청과 시비하던 중 얼마 전에는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가 미수에 그쳤고 이번에는 숭례문에까지 불을 질렀다. 그에게 주어진 토지보상금은 9천만원. 그는 4억원은 되어야 한다고 우겼다. 가족들조차 그만하면 됐다고 설득했지만 노인의 욕심은 스스로를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 억울함은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뒤 노인은 멀쩡하게 동네 경로당에 출근하여 쓰리고에 피박을 부르짖었다고 했다. 체포된 뒤 현장 검증을 할 때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시킨 것”이라며 정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며 노무현을 탓하다가 그는 엉뚱한 사람에게 미안해했다. “다음 이명박 대통령께 미안하다.”고 했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는 뇌까렸다. “문화재는 복원하면 되고.” 얼마 전 그를 인터뷰한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이 방화범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 하면서도 여전히 토지보상금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한심한 인생에게 뭐라고 외치고 싶은 맘 지금도 굴뚝같지만, 그 노인의 심경으로 들어가 본다면 일면 이해가 아니 가는 것도 아니다. 대법원장에 총리 후보들도 귀신같이 땅을 사서 백배 천배 이득을 본 사람들이 흔하고 주변에 들리는 얘기마다 아무개 아무개 집 근처에 대로가 나서 떼돈을 벌었다는 소리인데 자신의 땅이 수용대상이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만세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2남 2녀 다 출가시키고 생계가 막막한 편도 아니었지만 말년에 굴러들어온 호박을 맞아 조상님 음덕을 기리는 것이 우리의 상식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게 반토막도 아니고 1/4 토막이 난 것이다. 방화범 노인의 아내 말대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 돈! 을 외치지 않을 재간이 있었겠는가. 역시 그 아내의 말대로 “자기 집을 태우려면 태우지 어떻게 나라 재산을 태웠을꼬” 하는 게 우리의 상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를 옹호할 맘은 추호도 없으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미안해했던 차기 대통령이나 시세 차익으로 100배의 차익을 벌어들였던 전 인수위원장같은 이들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버일까? 억측일까? 

2008년 2월 10일은 숭례문이 불타 내린 날이고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 라는 밑과 끝이 동시에 없는 구호를 앞세운 대통령이 취임을 보름 앞둔 날이었다. 어린쥐 달라고 해야 오렌지 쥬스라도 얻어먹는다는 영어 몰입의 시대였고 “부자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 되느냐?”는 해괴한 질문이 천연덕스럽게 통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쥐구멍에 볕이 들었다 환호하다가 그 볕이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고 분격한 그 생쥐같은 노인에게만 우리는 분노를 퍼부을 수 있을까? 그런 인간 쓰레기들을 모아 삼청교육이라도 시켜야 할까?

숭례문은 무너졌다. 임진왜란의 불화살도, 병자호란의 대포알도, 6.25의 폭격도 절묘하게 피해 간 숭례문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70 노인의 신나 한 통에 잿더미가 되었다. 더 무너질 것은 없을까. 더 불탈 것은 없을까. 언제까지 우리는 '미친 놈들'에게 욕설만 퍼부어야 할까.

 

1905.2.11 최초의 야구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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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2월 11일 최초의 야구 경기 

20세기가 채 밝아오기 전의 1899년 15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모여 기독교 청년 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천명하고 그를 도와 줄 것을 국내외에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바람은 곧 응답을 받았다.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기독교 학생회 YMCA 조직이 결성됐고 해외에서도 한국의 기독교 청년 조직 YMCA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이 잇따랐다. 나이 서른의 열정적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바로 이 한국 YMCA 창설의 임무를 띠고서였다. 

고참 선교사 언더우드에 따르면 “매우 젊고 정력적이며 열정적인 청년”이었고 역시 선교사 게일도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인재가 왜 이런 오지에 와서 고생을 하는지 정말 대견스러운 일”이라고 찬미할 정도로 반듯한 젊은이였던 그가 우선 노력한 것은 바로 한국말 익히기였다고 한다. 선교를 하려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는 한국인 청년과 어울려 등산을 다니며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그럴듯한 한글 이름도 지었다. ‘길례태’가 그의 한국 이름이었다. 그는 1901년 황성 YMCA 간사가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종로 YMCA 회관을 건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는 YMCA의 산파 이외에도 한국 스포츠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더우드가 말한바 유달리 ‘정력적’이었던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스포츠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테니스를 치는 외국 외교관들더러 “왜 그 힘든 것을 하인 시키지 않고 직접 하느냐?”고 물었다는 대한제국 관료들과는 달리 한국의 청년들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다. YMCA가 임시로 들어 있던 종로 태화관 앞에서 미국 공사관을 경비하던 미군들이 캐치볼을 하며 놀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질레트는 무릎을 쳤다. “요걸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자.” 질레트는 즉시 야구용품을 미국에 주문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야 배트와 글러브 등이 사상 최초로 한국에 등장했다. 

골대 두 개 세우고 거기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룰을 지닌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매우 복잡한 룰에 둘러싸인 경기였고 그 규칙 하나 하나를 습득시키기 위해 질레트는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수비수를 방해하거나 심지어 밀쳐 버리는 주자가 없나, 태그당하지 않겠다고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주자가 없나, 파울을 치고도 번개처럼 베이스를 도는 이가 없나 하여간 질레트는 수십 수백 번이나 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래도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배트가 없으면 곡괭이 자루를 휘둘렀고 글러브가 없으면 가죽으로 손을 싸서 받으며 한국인들은 야구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초기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마침내 1905년 2월 11일 공식적인 첫 야구 경기가 열린다. YMCA 대 한성 덕어학교 (독일어학교) 학생들의 대결. 

우리가 봤던 영화 <YMCA 야구단>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무방한 풍경이 펼쳐졌다. 단발한 개화 신사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상투를 틀고 배트라고 하기엔 민망한 나무 방망이를 휘둘렀고 땋은 머리 휘날리며 홈으로 달리는 소년 주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엉망진창이었던 황성 YMCA 야구단은 곧 국내 최강의 야구팀이 됐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후발 약팀들은 “타도 황성”의 기치를 내세우며 칼을 갈았다. 질레트는 이 조선 최강팀을 거느리고 평양 원정에 나서는 등 야구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조선 최강이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케 했던 사건도 있었다. 보무도 당당히 일본 원정에 나선 YMCA 야구단이 와세다 대학에게 23대 0으로 코가 깨지는 등의 참사를 당한 뒤 동포들의 원망이 두려워 비밀리에 귀국했던 것이 그 예가 되겠다. 

질레트는 야구를 도입한 사람이면서 농구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의 일은 점차 스포츠보다는 사회적인 영역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양심적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YMCA의 책임자로서 그는 불온 사상의 온상으로 지목되던 기독교 청년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조작 사건을 통해 민족운동가들을 굴비 두름 엮듯 끌고 갔던 이른바 105인 사건을 보면서 질레트는 격노했다. 특히 YMCA 부회장인 윤치호가 잡혀간 것은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105인 사건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서신을 영국 에딘버러 기독교 선교협회에 보냈고 이게 중국 언론에 보도됨으로서 일제의 눈의 가시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그를 조선에서 내보내려고 기를 썼고 결국 중국으로 간 질레트에게 “조선의 사회운동에 개입하지 않으면 귀국하여 계속 YMCA를 맡아도 좋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죄없는 윤치호를 즉각 석방하라 그러면 돌아가겠다.”고 맞섰다. 그 뒤 질레트는 중국에서 활동하면서도 계속 한국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고 상해 임시 정부에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한 그의 다짐은 일제의 농간에 막혀 이뤄지지 못했으나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딸을 잃었고 그 딸은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그 딸의 태를 묻고 시신을 묻은 한국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벌어지는 야구의 향연을 보면서 그는 108년 전의 그날을 그리면서 싱긋 웃어 볼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그 석방을 귀국 조건으로까지 내걸었던 옛 동료 윤치호에게는 서툰 한국 말로 이렇게 묻지는 아니했을까 “미스터 윤. 당신 나랑 일할 때 당신은 똑똑하고 열정적인 한국 청년이었는데 어쩌다가 당신의 일생을 그렇게 낭비한 거지요?” 질레트가 선교 활동 와중에 조선 독립 운동을 후원하는 동안 윤치호는 “독립만세는 바보짓”이라며 냉소를 흘리면서 되지 않을 일에 피 쏟고 땀 빼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으니까.

1985.2.12 2.12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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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사라는 건 변덕이 심합니다. 때론 급류지만 때론 아주 완만한 곡류를 흘러 땅을 감아돌고 그러다가 폭포를 이루어 모든 것을 쓸어내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폭포 다음에는 대개 넓디넓고 단조로운 장강을 이루기도 하구요. 거슬러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정치 체제를 결정한 건 87년의 6월 항쟁입니다. 밉든 곱든 좋든 싫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을 규정하는 건 87년 6월 항쟁이고 그 뒤에 이뤄진 9차개헌이고 그를 통해 이뤄진 제 6 공화국입니다.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참여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결국은 5년 단임제에 충실한 6공화국에 속합니다. 우리가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도 대략 4월에 총선을 치르는 것도 결국은 그 꼬리에 닿는 것이죠

하필이면 그 추운 12월에 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전두환의 퇴임 임기에 맞추기 위해섭니다. 전두환이 1981년 2월 25일 제 12대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이에요. 말끝마다 자기는 7년만 하겠다고 했으니 1988년 2월 25일에는 퇴임해야 했고 최소 그 두 달 전에는 다음 정권의 임자가 정해져야 했던 거죠. 그래서 부랴부랴 선거가 치러진 거고요.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권 교체 세레모니는 항상 2월 25일에 이뤄지게 된 겁니다. 그건 올해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과거는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퇴장합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전에 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시 우리 역사의 한 전환점이었습니다. 85년이면 대학가에서 세 명만 모여도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던 83년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고 신군부가 사형 선고를 내린 김대중이 미국에 갔다가 귀국했으며 그와 김영삼이 손을 잡고 만든 신당의 태풍이 밀어닥칠 때였죠. 법률상 국회의원 선거일은 꽃 피고 새 우는 3월 중순에 치러도 충분했습니다. 임기 만료 20일전까지만 치르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정부는 엄동설한 중이라 할 2월 12일로 선거일을 발표했습니다. 구정 전에 선거를 치러 과열과 혼탁을 막겠다고 했지만 진짜 목적은 한창 세를 불리며 바람을 일으키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당이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전에 선거를 치르려는 데에 있었겠죠. 거기다가 정치 규제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로서는 당시 송원영 후보 말모냥 “100미터 경주를 하는데 자기들은 80미터 지점에서 뛰겠다는 것”이었죠. 

그때만 해도 ‘합동연설회’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트럭 개조한 차 타고 다니며 짬날 때마다 사람 모이는 곳마다 열변을 토하는 게 아니라 모일 모시에 모 학교 운동장에 모여 그 지역구의 선량들의 ‘합동 연설’을 들었던 겁니다. 당시 부산진구의 합동 유세가 제 모교인 양정초등학교에서 열렸고 고등학생이 되기 직전의 까까머리를 한 저는 그 유세에 참여했었습니다. 물론 구경꾼으로서죠. 

2.12 총선을 앞둔 분위기는 가히 만석보 터진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부산진구 신민당 후보였고 후일 보사부장관을 지내는 김정수의 열변은 당시까지도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던 초보 고딩을 패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5.16 쿠데타가 결국 5.17 전국 계엄령을 낳았고 그는 5.18 광주로 이어졌다.” 그의 선거 캠프가 뿌린 유인물의 왼쪽 첫머리는 저 유명한 사진, 즉 고개를 숙인 대학생의 멱살을 잡고 곤봉을 내리치려는 공수부대의 얼굴을 시커멓게 가린 그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5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들었습니다. 간첩들이 횡행하고 복면을 한 괴한들이 국군과 싸운 아수라장 무법 천지의 야차들이 다름아닌 공수부대였다는 것도 말입니다.

많은 이름들이 등장했던 선거였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사형수 이철이 성북구에 출마했고 한때 한나라당 대표로서 그 빛나는 매부리코를 수시로 들이밀었던 강삼재도 마산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부산 시장 후보로 나왔던 김정길은 몇 번 미역국을 마신 끝에 “이번에도 저 김정길을 영도 다리 울며 건너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외치며 부산 중 동 영도에 출마했었지요. 서울 동작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헌병대장 출신의 허청일 후보에게 “군 출신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암모니아를 퍼붓기도 했고, 대학생들은 신당 후보를 따라다니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지요. 

그 해 2월 11일,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놀아 보겠다고 마구 쏘다니던 즈음 어둑어둑한 양정로터리 부근에서 대여섯 명의 청년과 아주머니들이 손팻말을 들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기권만은 하지 맙시다. 부정선거에 이용됩니다.” “누구를 찍든 기권은 하지 맙시다.” 기권을 하게 되면 그 명부를 이용한 대리투표를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누구를 지지하자도 아니고 부정선거에 이용될 수도 있으니 기권만은 말아 달라는 그들의 호소는 투표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게도 찡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그 거리를 지나던 많은 이들 역시 그랬을 겁니다. 투표율은 이승만 축출 이후 최고였습니다. 84.6 퍼센트. 1985년 2월 12일은 엄동설한 중이었지만 동토를 뚫고 분출하는 물줄기가 터진 날이었고 군홧발에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스스로의 힘과 의기를 확인했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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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2.13 드레스덴과 아서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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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5년 2월 13일 드레스덴과 아서 해리스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으레 돈 많이 들이고 볼거리 확실한 헐리웃 영화가 눈 앞에 그려지겠습니다마는 사실 이 단어는 매우 무시무시한 뜻을 지니고 있어요. 한 블록 (block)을 날리는 (bust) 위력을 지닌 폭탄을 뜻하거든요. 대략 4-5톤의 폭탄이면 한 블록을 날릴 수 있는 ‘블록버스터’로 불리웠던 거죠. 이 말의 탄생은 1945년 2월 13일 저녁 느지막히 시작된 드레스덴 대공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독일의 고도(古都)이며 엘베 강변에서 맞는 저녁놀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는 그날 영국 공군 랭카스터 폭격기 796대, 미국 공군 B17 폭격기 311대가 그로부터 이틀 동안 합동으로 퍼부은 폭탄들에 불바다가 됩니다. 

오래된 도시답게 낡은 목조 건물들을 태우기 위한 소이탄을 위주로 뿌려진 이 대공습에 드레스덴은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정확히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수의 사람들이 그날 그 자리에서 타 죽거나 질식해 죽거나 화상을 입고 절규하다가 지쳐서 죽어갔습니다. 함부르크, 쾰른 등 대공습이 진행된 도시는 많았지만 드레스덴은 특히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죠. 그 중 한 소녀의 증언을 옮겨 볼까요. “엄마는 내게 젖은 담요를 덮어 주고 키스해 주며 어서 달리라고 외쳤다. 나는 다시 엄마를 보지 못했고 거리는 불바다였다. 다리가 녹아 길에 들러붙은 채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지천이었다.” 

드레스덴은 이렇다 할 대공 무기도, 폭격에 맞설 독일 공군의 비행기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 폭격기 조종수들은 그야말로 드라이브하면서 사과 던지듯 유유자적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그럼 많게는 10만 적게는 4만의 사람들이 시체가 되는 이 폭격이 과연 전략적으로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글쎄요. 그에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젓습니다. 1945년이면 이미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쓸어버리면서 베를린을 향해 탱크 캐터필러를 굴릴 때였고 서부전선의 독일군도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즉 전쟁의 축은 이미 기울었고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를 폭격으로 날려 버릴 합리적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마뜩지 않아 하는 미국까지 끌어들이며 ‘동부전선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이 폭격을 감행합니다. 여기에는 한 인물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아서 해리스. 영국 포격사령부 사령관

식민지를 전전하면서 이 일 저 일을 하다가 비행기에 눈을 뜬 그는 1차대전에 참전했고 적기를 격추시킨 공로로 훈장도 받고 입신하게 됩니다. 전후 아랍의 영국 식민지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아랍인들이 말썽을 부리면 일단 폭탄 하나 안겨 주고 얘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 모양이구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태세가 완비된 사람이었고 그 와중에 죽어갈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따위는 그야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습니다. 

“적군 수십만의 시체보다 영국군 한 명의 뼈가 더 귀하다.”거나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다.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던 이 공군 장관은 전략적 목적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많은 고통을 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실제로 드레스덴이 그렇게 곤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베 강에 놓인 철교는 멀쩡했다는 사실은 영국 공군이 어떤 목적을 지녔던 것인지를 여실히 입증해 주죠.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임명된 것”이라는 그의 선언에 이르면 그가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그는 공군 원수까지 되지만 전후 그의 폭격 전술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고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수행한 업무에 따른 포상을 받지 못하자 이에 항의하고 영국을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 버립니다. 그 후 그의 폭격 전술에 머리를 저으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이 이 똘끼 흐르는 장군에게 준남작의 작위를 주어 아서 해리스 경(卿)이 되지요. 그리고 아흔 두 살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1984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죽은 8년 뒤에 불거집니다. 1992년 이 사람의 동상이 세워진 거죠.

그때까지도 폭격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던 드레스덴의 나라 통일 독일은 이에 반발하고 양국은 껄끄러운 관계에 돌입하지만 그래도 아서 해리스의 동상은 버젓이 섰고 “(그의) 폭격기 사령부에게 국가는 빚을 지고 있다.”는 문구가 그 발밑에서 빛난다고 합니다. 엘리자베드 여왕의 모후가 그 동상을 제막했는데 그때 “아서 해리스는 전범이오!”라고 누군가 소리치는 소동이 있었고 어떤 독일인은 “히틀러도 하루에 10만 명을 죽이지는 못했소!”라고 절규했지만 영국은 오불관언 해리스의 동상은 지금도 엄존하고 혹시 모를 해꼬지를 대비해 24시간 경계를 받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다 그런 건지도 모르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 이기는 게 장땡인 것이 전쟁인 이상, 아서 해리스만을 욕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황이 기운 상태에서 그런 식의 도살자(그의 별명) 노릇을 했던 이의 동상까지 세우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 다양하죠. 아서 해리스같은 이가 있는 반면, 드레스덴에 미군 포로로서 수용되어 있던 커트 보네컷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는 경비병들과 함께 지하 고기 저장고로 들어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그 참상을 목격하고서 <제 5 도살장>이라는 소설을 씁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잠깐 빌렸던 그의 책의 구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죠.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 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그는 평생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지르는 전쟁과 학살의 범죄에 대해 항의했으며 노구를 이끌고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을 제에 비애국적 행동이라는 비난이 잇따르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 그가 영국에 갈 일이 있었다 해도 아서 해리스의 동상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보네컷이 그 앞에 설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Good morning Butcher?"(안녕? 도살자)였을까요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였을까요. 

그의 소설 가운데 한 구절을 더 들고와 봅니다. 지구인 빌리가 어떤 행성에 가서 하는 말입니다. “ 한 행성의 주민이 어떻게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태초 이래 무의미한 살육에 열중해온 행성에서 왔습니다. 내 나라 사람들이 급수탑에 넣고 산 채로 삶아 죽인 여학생들의 시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자기들이 절대 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에 차 있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삶아져 죽은 여학생들의 오빠와 아버지들이 살육한 인간들의 지방으로 만든 촛불로 밤을 밝혔습니다. 지구인들은 우주의 골칫거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니 내게 비결을 좀 가르쳐주세요. 내가 지구로 가져가서 모두를 구원할 수 있게요. 어떻게 한 행성이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까?” 

찔리는 단어들이 있죠? 특히 “절대악과 싸우고 있다는 긍지”. 그저께 우리는 그런 모습의 극을 봤지요. 인민들 굶어죽어도 미국에 맞서는 무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벽창호 정권과 기어이 그 시도를 즈려밟고 말겠다며 악의 축 북한에 대해 눈을 부라리는 미국. 그리고 그 와중에 한국인 수백만을 ‘무의미한 살육’에 돌입시킬지도 모를 핵무기는 함경북도 길주의 복잡한 갱도에서 불을 뿜고 말았습니다. 드레스덴이 이 땅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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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4 어느 고독한 기타맨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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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4년 2월 14일 어느 고독한 기타맨의 죽음 

젊어서 한번쯤 기타에 홀려보지 않은 사람이 그리 흔할까마는, 이 사람의 경우는 좀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틈만 나면 기타를 잡고 흥얼거렸고 그렇고 그런 동료들과 어울려 음악을 한답시고 여러 밤을 지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후 들어오신 새어머니, 그리고 완고한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즐거움은 기타 밖에 없었다. 공부 잘 해서 명문대학을 간 학생들도 대학가요제 나간다고 기타 연습하다가 머리통에 기타가 떨어지곤 했다는데 공부든 돈이든 일생에 유용한 곳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젊은이의 부모가 그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고 물 보듯 투명하다. 거기다 그는 사고 목록의 맨 끄트머리이자 하이라이트인 사고마저 달성한다. 어느 여자와의 사이에서 덜커덕 애를 낳은 것이다. 

여자 고르는 안목도 좋지 않았던지 여자는 애를 낳은 후 이내 남편과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래도 기타를 놓지 않고 뚱땅거리는 남자에게 그 부모는 인내심을 잃었다. “썩 나가 없어져라. 이 밥버러지야. 그놈의 기타 들고 어서 없어져 버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집을 남자는 허위허위 나와야 했다. 딸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딸을 데리고 나갈 엄두는 꿈에도 나지 않았다. 딸은 할아버지의 호적에 등재되어 자랐다. 

“너는 아버지랑 사냐 할아버지랑 사냐.”는 놀림을 받으며 자란 딸을 만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집에 와서 멋들어지게 기타를 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딸은 오랜 동안 가슴에 새겨 넣어 두었다. 그 뒤 열일곱이 됐을 때 딸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라한 추억 속의 멋진 기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초라한 밤무대의 싸구려 악사였다. 어린 날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딸은 모질게 마음 먹는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버릴 거야.”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 남은 딸은 다시 아버지를 찾는다. 이미 여러 해 연락이 끊긴 터라 자신의 힘으로 찾기 어려웠는지 딸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의뢰하여 그 주인공이 된다. 이제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버지와 스물 여섯의 딸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딸을 만난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기구한 삶을 꾸려온 아버지가 그  딸을 만나  어깨를 어루만지며 눈물 짓고 딸이 차려주는 밥상을 앞에 하고 가슴을 쳤던 것은 2003년 말이었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살았던가. 이미 늙어버려 손도 둔해지고 음악적 성취도 무망해진 그는 기타를 놓아 버리고 현대중공업 하청공장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역시 술 마시면 기타 잡고 노래 구성지게 불러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던 그는 싸구려 악단의 악사로 일하면서 세상의 쓴맛단맛 다 본 처지였지만, 하청업체에서 발생하는 기상천외한 불평등과 불공정에 분노했다. 현장 소장에게 두들겨 맞고 민주노총에 가서 하소연한 것은 자갈처럼 널린 사연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청업체 사장이 월급 소급분을 빼돌린 것을 알고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고 ‘하루 일당을 제끼는’ 작업 거부를 조직, 소급분을 토해 내게 만든 일은 그 인생에서 흔치 않았던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마음회’라는 사내 모임을 만들어 하청 노동자들의 슬픔과 애환을 모아 목소리를 내고 힘을 키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싸구려 악단의 기타리스트는 그렇게 하청 공장의 조직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하청업체 뿐이 아니라 현대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이었고 또 하나, 왕년의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화석이 되어 버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그의 해고 사유가 된 유인물에서 그는 여실히 드러난다. "자칭 세계1등 조선소 현대 조선소에게, 인터기업 사장은 각오하라, 최윤석 집행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현대조선소, 인터기업, 그리고 최윤석 집행부. 그가 외친 주장을 들어 보자. 여기에는 ‘임금 인상’조차 없다. "연말 성과금, 설,휴가, 하기휴기비 지급, 일당(상용일급제)직의 주차, 월차, 연차, 연장근로가산임금, 예비군훈련 법정 근로시간 인정" 뿐이었다. 다 빼놓고 ‘주차’ 한 단어가 눈에 띈다. 정규직들에게 주어진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대지 못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와야 하는 사람들. 그걸 보고도 무심한 ‘노동조합’에게 하청 노동자가 된 기타리스트는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2003년 말은 그에게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임한 시기였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딸을 만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동시에 2003년 12월 31일 현대 측은 하루 아침에 그의 전산 기록을 말소하여 출입을 통제했다. 즉 쉽게 말하면 해고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아무데도 발디딜 데 없는 허공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2004년 2월 14일 평생 고독한 기타맨이었고 외로운 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는 현대중공업 내 4, 5도크 뒤 선실생산부 사무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그 죽음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의 유서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는 시신을 앞에 두고 농성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된 56일간의 ‘장례 투쟁’에 감히 눈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초콜렛이 산처럼 쌓인 가게들을 지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딸을 그리며 쓸쓸히 죽음을 향해 걸었던 한 남자, 박일수가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유서같은 편지를 일부 옮긴다. 

“너도 알다시피 전산처리 해서 삭제된 거 때문에 장기적인 것은 실현이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해. 'KBS추적60분'에 경위서 및 자료, 유서 등을 소포로 보냈다. 내 목숨 귀한 것 나도 알아, 그런데 주어진 눈앞에 보여진 상황이 노동에 관련한... 현대중공업 하청문제의 곪고 썩어있는 것들이 모두가 껍데기뿐이니, 법에 호소해야 그리고 신고하면, 법적으로 처리해주는 형식적인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니냐. 이것은 아니다 싶다. 갖고 있던 생각, 보고 느낀 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나 한계에 부딪치는 것에 대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다는 못 바꾸더라도 20-30%라도 바꿔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의 죽음으로 사회가 개혁되길 바란다. 그냥 살아봐야 쥐새끼 같을 뿐이다. 

(중략)

하청노동자 고통줘서 쥐어짜서 주면 피해자는 누구냐 이거야. 자기 논 팔아서 자기가 하느냐 이거야. 지 챙길거 다 챙겨가고는 썩게 하느냐 이거야. 비정규직 문제 구체적인 해결은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안된다. 힘을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고 이론인 듯 싶다. 나도 희망이 왜 없겠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이면서 박일수라는 한 고독했던 사람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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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2.15 이한영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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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그의 본명은 리일남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었다. 성은 두음법칙을 적용한 이씨가 됐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하라”는 뜻의 한영으로 했다.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사람이었고 1982년 스위스 유학 도중 남한으로 ‘귀순’ (북한도 종종 행했던 ‘납치’라는 사람도 있고 이한영본인은 “미국에 가기 위해 한국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한 뒤 그는 이한영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2월 15일 그의 아파트 계단에서 총을 맞고 죽는다. 범인은 두 명의 괴한이었다. 군사독재의 몇 안되는 은혜로 범죄조직조차 총기를 보유를 할지언정 사용할 경우 조직의 소멸을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일반 탈북자가 아니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것이다. 즉 김정일은 이한영의 이모부였다. 

이 사건은 종종 영화 속 모티브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강호와 강동원이 나온 영화 <의형제>에서다. 영화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지만 이한영은 혼자 죽었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다. 아니 무슨 놈의 킬러가 귀신도 모르게 사람을 제거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웃들이 다 알만큼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같은 곳에서 총을 쏜단 말인가. 그리고 이한영이 ‘간첩’이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은 추후 번복됐고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들어진 25구경 권총은 무려 1백여 종류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한영의 행방이 심부름 센터에 의해 알려졌고 그 와중에 돈을 받고 그를 도와 준 경찰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공작원이라면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세상을 아주 잘 활용한 셈이다. 

이 사건을 두고 나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의 주장을 들었다. 한 명은 장기수 영감님, 또 한 명은 탈북자, 또 한 명은 보안과 형사였다. 장기수 영감님에 따르면 이한영은 납치됐고 이용만 당하다가 이용 가치가 다하자 안기부가 해치운 것이라고 했고 보안과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북한 공작원이 한 짓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탈북자의 의견은 또 달랐다. “남북이 합작해서 죽여 버린 거임다. 이미 이한영 가는 북이 보기에는 웬수덩어리였고 남쪽에서 보자문 골칫덩어리였지요. 돈 달라 뭐 해 달라 요구조건도 많았고 책 내고 어쩌고 하는 것도 다 돈 벌자는 것이었지요. 북조선에서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정보기관들끼리 내통을 했갔지요. 맘대로 하라. 우리는 개의치 않갔다. 그러니 그리 대담하게 설친 거 아니갔슴까?” 

안기부는 후일 체포된 부부간첩을 심문한 결과 이한영을 쏜 것은 ‘최순호’라는 이름의 공작원이 이끄는 공작조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후 최순호인지 누구인지 모를 한 명이 은행 CCTV에 희미하게 잡힌 것을 제외하면 한국 경찰과 정보기관은 사건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그리고 이한영은 길지 않은 생을 마치고 저승길로 떠났다. 

그는 북한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었고, 오히려 남에서보다 북에서 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남을 택한 (또는 택함을 강요받은) 후 오히려 기대만큼 화려하지 못한 남한 생활의 팍팍함 속에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었다고 하니까. KBS 국제방송 러시아 담당 PD로 잘 지냈으면 별 일이 없었을 테고 예쁜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왕년에 잘나갔던 로열 패밀리의 버릇은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이한영 자신을 한탕에 눈 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당연히 사업은 연전연패였다. 핀치에 몰린 그가 한 행동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이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같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안기부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결심이었고 그의 바닥이었다. 

사람이 바닥을 보이면 그 뒤에 오는 것은 공포다. 그는 북한의 이모부가 자신을 죽일지도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딸의 신변을 우려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기부도 “이런 식이면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식의 경고를 당연히 보냈을 테니 이한영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공포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가기를 열망했다. 북을 등지고 나왔지만 남에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그는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 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출국금지자’였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해외여행 정도는 일도 아니었건만. 

그는 항상 북한의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젊은 혈기에 사로잡혀 섣불리 조국을 등져 버린 것도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섣불리 행동하다가 쫄딱 망한 후에야 어머니에게 손을 벌린 못난 아들, 급기야 대놓고 자신의 신분을 떠들어 대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철없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정체 모를 (개인적으로는 북한 공작원이 맞다고 보는데) 누군가의 총에 맞아 그 기구한 삶을 마쳐야 했다. 그는 특별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폼내기 좋아하고 딸을 무진장 사랑했던, 허영 많고 계산 짧은 보통의 한국 남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인생을 가로막았고 때로는 목을 죄었고 결국은 총탄이 되어 그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후일 가족은 법원에 국가가 이한영의 보호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를 제기했고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이한영의 유족에게 9천여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이것은 법원이 인정한 '경감사유‘에 의해 좀 깎인 액수였다. 법원은 국가 책임을 60퍼센트로 인정했고 “국정원의 권고와 만류를 무시하고 스스로 언론기관과 인터뷰하고 수기를 출판하는 등 사건 원인의 한 부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을 40퍼센트로 돌렸다. 6대4. 남과 북을 이한영 피살 사건의 피고로 불러 재판에 세웠을 때에도 비슷한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분단의 희생양이란 도처에, 항상 발생한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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