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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1.1 슬픈 독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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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04년 1월 1일 슬픈 아이티 독립기념일 

세상 일이란 게 그렇습니다. 항상 옳은 쪽이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고), 승리하더라도 그게 녹녹히 이뤄지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탈탈 털어도 드물지요. 되레 정말 역사에 진보는 있는 것인가,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1804년 1월 1일 독립한 아이티의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지요. 

먼저 세계 지도나 지구본을 갖다 놓고 아이티라는 나라를 찾아 보세요. 카리브 해상 쿠바 옆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위치한 섬나라인데 그 섬의 상당 부분은 그나마 도미니카 땅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 아이티는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나라죠. 원래는 당연히 에스파니아 땅이었다가 프랑스로 넘어간 뒤 이 지역은 프랑스령 생도밍그라고 불리며 번창했습니다. 유럽의 어느 항구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입출항했다고 하면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가겠죠. 주요 산업은 설탕과 커피 재배였고 그로 인해 프랑스에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줬습니다. 

커피나 사탕수수 재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그 일손들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검은 손들이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티에는 강력한 백인들의 지배 하에서 흑백 혼혈인 뮬라토가 백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다수의 흑인 노예들을 또한 경멸하면서 살아가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령 도밍그에도 불어오고 뮬래토들은 백인 지배층에 대해 반항하지만 철저하게 두들겨 맞지요. 본격적인 저항은 흑인 노예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이에 의해 시작됩니다. 흑인 노예의 아들이었지만 일찍 자유의 몸이 됐고 교육도 꽤 받았던 사람이었지요. 이미 나이가 꽤 들어 ‘영감’ 소리를 듣던 그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을 외치며 항쟁에 돌입합니다. “나는 자유와 평등이 생 도밍그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생 도밍그를 탐낸 영국이 생도밍그를 공격하여 수도를 손에 넣었을 때 생도밍그 섬의 대표는 프랑스 국민회의장에 나타나 생도밍그의 실태를 알리고 인권과 자유의 확대를 요청합니다. 이에 감동한 프랑스 국민의회는 노예제 철폐를 선언하고 프랑스에 저항하던 흑인 노예 군대는 당장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하며 영국군을 두들겨 부숩니다. 이를 지휘했던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 장성의 계급장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을 몰아낸 뒤 총독 다음의 실력자가 된 투생은 인종간의 화해와 통합을 기조로 한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에 불만을 제기하는 흑인 노예들 앞에서 물과 술을 섞어 버린 후 “술과 물을 구분할 수 있겠나? 우린 이렇게 섞여 살 수 밖에 없단 말이야!”라고 설득했던 예는 유명하죠. 하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듯한 놈”이라는 경멸을 받게 마련입니다. 투생도 그래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부터 신뢰를 적잖이 잃지요. 거기에 유럽 대륙에 초대형의 적수가 나타납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은 이미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해 가던 투생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매제 르클레르가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프랑스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지만 끝내 프랑스군에 체포되고 말죠. 그가 프랑스로 압송되기 전 남긴 말은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너희 프랑스인들이 베어낸 것은 도밍그의 자유라는 나무의 줄기일 뿐이다. 뿌리로부터 이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깊숙이 그리고 셀수 없이 뻗어 있는 뿌리들로부터.”

이 ‘흑인 자코뱅’은 1803년 4월 프랑스에서 사망하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프랑스는 생도밍그에서 철수합니다. 흑인 노예들의 저항도 저항이었지만 황열병이라는 열대성 전염병은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만큼 무서운 놈이었죠. 거기에 영국의 해상 봉쇄가 계속되면서 생도밍그 저항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마침내 1804년 1월 1일 생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으로 지구상 최초의 흑인 독립국,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국 (미국에 이어) 으로 지구상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독립은 기쁨보다는 슬픔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예제가 엄존하던 세상에서 노예들의 반란으로 선 국가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지배층에게도 용납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싫은, 일종의 ‘금단의 나라’였습니다. 자본주의 일색의 지구상에 갑자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했답시는 작은 섬나라가 등장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대통령 제퍼슨부터 남아메리카의 독립 혁명지도자들까지 아이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죠. (참고로 이웃 사촌 미국은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합니다) 더구나 아이티인들은 백인들의 식민지 포기에 대한 댓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 환산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받습니다. 이는 프랑스 1년 예산에 가까운 돈이었다지요. 이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을 하겠다는 위협 앞에서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에 빚을 져야 했고 이 빚은 두고두고 아이티인들의 대를 이은 채무가 됩니다. 그들이 그 빚(?)에서 놓여난 것은 거의 1백년 뒤였다고하니 아이티인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을지 대충 짐작이 가겠지요. 

프랑스의 경제적 지배는 또 다른 탐욕스런 지배자 미국에 의해 끝장나고 미국은 아이티를 점령하지만 이때 아이티인 수만 명이 미군의 손에 학살당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조종을 받는 대를 이은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의 지배를 받으며 아이티는 오갈데없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해서 아이들에게 진흙 과자를 먹이고 아이들은 흙에 사는 기생충으로 주어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나라가 됐습니다.


2013년 1월 1일은 아이티 독립 209주년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아이티 국민들일망정 그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만 그들이 지내온 나날을 생각하면 차마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토록 빨리 역사의 진보를 이뤄 낸 나라, 노예들의 혁명으로 독립을 일궈 낸 나라의 오늘을 생각하면 당혹감을 넘어서는 허망함이 눈앞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과연 오늘 아이티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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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1.2 사보이 호텔 습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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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5년 1월 2일 사보이 호텔 피습 사건 

어느 나라든 지하 세계는 있습니다. 제 18대 대통령 당선인께서 대선 토론회에서 “지하 경제의 활성화”를 주창하셔서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 기억이 새롭지만, 꼭 그 분의 표현을 들지 않더라도 공식적인 세상과는 또 다른, 으슥한 뒷골목의 문화와 음습한 지하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법이죠. 그 지하 세계를 대표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깡패가 되겠습니다. 자기들끼리는 건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혹은 협객이라는 희한한 단어도 사용하는 모양입니다만 뛰어봐야 벼룩이고 기어봐야 바퀴벌레, 깡패는 깡패입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결국 깡패입니다. 협객은 얼어죽을. 일본 깡패들과 각을 세웠다 뿐이지 종로 상인들에게 삥 뜯으면서 거드름 피우고 살던 깡패고 노동자들 파업하는 데 들어가서 생사람을 불태워 죽인 (자기 말로) 살인자죠.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던 와중에 종로구청이 글쎄 왕년의 ‘야인’들에게 감사장을 주겠다면서 불러모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종로라서 종로상권에 도움을 주었다나요. 

그 자리에는 김두한의 친구였던 김동회씨도 등장하셨고, 일제 시대 100대 1로 싸워 이겼다는 전설의 사나이 ‘당개’ 윤봉선씨도 생존해 계시더군요. 그런데 왕년의 명동 신상사 신상현의 이름에서 저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신상현씨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 다음 세대의 ‘야인’들이 바로 조양은이고 김태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20년 후면 조양은 김태촌도 ‘협객’으로 떠받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쓴웃음이 났던 거죠. 

깡패들 얘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들에 비해서는 좀 덜 유명하지만 만만찮은 주먹으로 이화룡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얼마나 빠른지) 박치기당하는 모습은 안보이는데 쓰러지는 건 보인다.”는 전설을 낳았던 평양 박치기의 대가지요. 이 사람은 동대문의 정치 깡패 이정재와 맞서서 명동을 근거지로 활동했는데 그 행동대장이 앞서 말하는 신상현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기에 신상사로 불리며 서울의 주먹 대장으로 군림했지요. 이 신상사파의 아성에 깊은 금을 긋고 나아가 우리나라 지하 주먹 세계의 판도가 바뀌는 사건이 1975년 1월 2일 신년 벽두에 일어납니다. 명동 사보이호텔 피습사건이죠. 

왜 이 사건이 그렇게 터닝 포인트인가 하면 서울의 지하 세계를 호남의 주먹들이 장악하기 시작한 시점이면서, 그나마 깡패 세계에 남아 있던 낭만, 즉 칼 휘두르는 놈을 경멸하고 무기 들면 양아치라고 생각하던 문화의 종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호남 주먹이 연합해서 신상사를 친 건 아닙니다. 호남 주먹은 오종철이라는 이와 박종석이라는 사람의 세력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는데 신상사를 친 건 오종철의 꼬붕이었던 조양은이었죠. 이들은 야구배트와 회칼을 휘두르면서 대명천지에 명동 사보이 호텔을 기습합니다. 신상사파는 이 일로 큰 타격을 입고 서서히 퇴장하죠. 그런데 또 신상사파와 가까웠던 호남 깡패들이 또 한 명의 슈퍼 스타(?)를 서울 무대에 데뷔시킵니다. 바로 그게 김태촌입니다. 
(이 글이 페북에 오른 며칠 뒤 김태촌이 죽었더군요..... ) 

조양은의 자서전 <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꽃> (아아 이 솟구치는 촌스러움)에 따르면 둘은 피비린내나는 ‘3년 전쟁’을 치릅니다. 김태촌은 계속해서 조양은을 노렸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조양은의 형님격이었던 오종철을 공격해서 아킬레스건을 잘라 버리죠. 조양은도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하고요. 그런데 이 전쟁을 치르면서 이 두 깡패는 자연스럽게 서울의 암흑가의 양대 산맥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뒷 얘기는 대충 아실 겁니다. 둘 다 제버릇 개 못주는 깡패가 되어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도 익히 들으셨을 거고요. 

정초부터 웬 깡패 얘기냐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들의 역사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두한이 종로통 깡패를 넘어서서 용산 기관사들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정치 깡패였음은 본인이 자랑스레 회고한 바와 같고 (심지어 이승만에게 사람 그만 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앞서 말한 이화룡은 서북 청년단 감찰부장이었으며 김태촌은 1976년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벌어진 각목 사태의 주역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에게 복수(?)할 때 그 옆을 수행했던 이는 김태촌의 옛 부하였지요. 그리고 요즘 조폭들이 즐겨 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용역’ 사업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면 떨떠름의 도가 커집니다. 결국 그들은 항상 더 큰 이권의 빛을 향한 주광성 기생충이었으며, 주먹보다 더 센 권력들은 그들을 즐겨 이용하며 공고한 아성을 지키고 그에 도전하는 이들을 짓밟아 왔던 겁니다. 

서글픈 일면도 있습니다. 김태촌은 불량 청소년 시절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깡패들에게 붙잡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유리창을 다 깨 버립니다. 하느님 따위 없어! 착하게 살면 뭐할 것이여? 이거겠죠.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깡패의 길에 접어듭니다. 아마 1975년 1월 2일 목숨 걸고 방망이 들고 회칼 휘두르며 사보이 호텔로 뛰어들던 젊은이들 역시 그런 상처를 갖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겠죠. 

또 하나 더. 1975년 1월 2일의 사보이 호텔 피습 사건 이후 서진룸살롱 사건에 이르기가지 호남 깡패들이 서울에 진출하여 판을 치는 통에 조폭 = 전라도의 인식이 팽배해졌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진짜 ‘대부’는 부산의 칠성파 두목 이강환이었고 제아무리 전국구 조폭이니 서울의 맹주니 해도 부산 칠성파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했으며 언감생심 부산 진출 또한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호남 주먹들이 고향을 떠났던 것은 고향에서는 뜯어먹을 것이 적었기 때문이었지요. 부산의 칠성파는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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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3 한국의 발자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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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2년 1월 3일 한국의 발자크 사망 

문학에 문외한임을 전제로, 더구나 시의 세계와는 서울과 샌프란시스코와의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문외한도 무식쟁이도 언론의 자유가 있는 (있다고 말해지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감히 궁금증 하나를 토로한다면 저는 왜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그렇게 운위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 비해 그리 빼어난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만인보’는 문학적인 성취보다는 20세기 한국의 일종의 단체 인물화(?)로서 역사에 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만인보 가운데 하나를 꼽아보면 이렇습니다.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를 멜로물로 그리는 사람 /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를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 /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과거 / 언제나 현실이되 / 현실인양/ 비현실적인 회한의 반동이었다. "

고은이 그다지 친절하다고는 볼 수 없는 단어들을 동원하여 묘사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작가 이병주입니다. <알렉산드리아> <관부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등 열거하기 어려운 저서와 수많은 글들을 남긴 소설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지리산>으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고은 시인이 왜 저런 냉담한 평가를 내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리산>으로만 비추어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에 반대하지만 말이죠. 

저는 고등학교 때 <지리산>을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빨치산’ 또는 ‘파르티잔’이라는 단어가 시민권을 얻기 전이었고 저는 지리산 ‘공비’들이 누구였는가를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요. 즉 북한 괴뢰 집단이 파견한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들, 종간나 새끼들 부르짖으며 따발총 휘두르던 무장집단이 아니라 나와 익숙한 사투리를 쓰고 북쪽과는 별 관련도 없는 이들이 자신의 이념에 따라, 또는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자처해야 했던 이름이 ‘빨치산’이라는 걸 말이죠. 아울러 저는 <지리산>이 <태백산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실 <태백산맥>은 7권 이후 급격히 작가의 시점이 변화하는 걸 느꼈고 주요인물들의 입체감이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주인공 김범우도 그렇고 나약한 지식인 손승호도 그랬고 귀추가 주목되던 심재모같은 정상적인(?) 군인도 곁가지로 빠져 버리고 갑자기 이태식이나 조원제가 주인공이 되는 빨치산 전기(?)같이 되어 버려서 이거 뭐지?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반해, <지리산>은 해방 전 진주 중학의 일본인 교장부터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사형을 감수하는 순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여자 순이, 때로 정의감에 불타지만 그 정의감을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생각이 많은 박태영 등 등장인물들의 하나 하나의 재질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만져질 정도로 생생했었거든요. 

물론 동지들 고맙소 하면서 수류탄으로 부하들과 함께 자결하는 염상진의 무덤 앞에 하대치가 이끄는 빨치산들이 투쟁을 다짐한 뒤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태백산맥>이 80년대 정서에는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을까’라고 쓴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된 감정으로 넋을 잃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던” 박태영에 더 공감이 갔으니까요. 이병주가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 말을 들으면 그 공감은 배가 됩니다.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각오로 쓴다. 민족의 거창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내게는 없다. …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적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그리고 더 역사의 묵직함을 알려주는 사실 하나. 그가 <지리산>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72년 9월 유신 직전이었습니다. 

일찍이 5.16 쿠데타 이후 “내게는 조국이 없다. 산하(山河)가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의 논설을 썼다가 미운털이 박혀서 자그마치 10년 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동안씩이나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그는 공화국의 죽음이라 할 유신 앞에서 폭음하면서 “내가 사마천이 되어 소설로 이를 비판하겠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그의 지점이랄까 한계랄까 그 스스로 설치한 영역이랄까 하여간 뭐 그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사마천은 그가 꺼낼 수 있는 분노의 최대치였다는 것이죠. 그는 사마천이 될지언정 결코 진시황을 노린 형가는 될 수 없었고, 그 자신 평생 부끄러워했던 일본군 학병이 되는 동안 지리산으로 숨어 버리고 저항을 꿈꾼 하준규 (실명 하준수)는 되지 못했을 거라는 거죠. 

사실 그게 범인(凡人)에게는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만, 그에게는 평생 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우익에게는 좌익분자로, 좌익에게는 악질 반공분자로 종종 몰리면서 살았습니다. 대학 시절 이병주의 <지리산>을 들먹이는 제가 묘한 눈빛을 보냈던 선배들에게 무안했던 기억은 후자를 대변할 것이고 문단의 후배가 “선배님 빨치산이셨죠?”라고 물어오자 격노하여 술잔을 내던지며 주먹을 휘둘렀던 이병주 본인의 오버는 전자를 설명할 수 있을 겝니다. 그래서일까요 그가 각혈하듯 내뱉은 한 마디는 제 가슴을 공감과 지지의 북과 종소리로 크게 울려 댑니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으로 되는 것이라야 한다.” <삐에로와 국화> 중

그가 별세한 이후 그의 기념사업회가 성립됐을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 늘어선 사람들의 구성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일단 공동위원장은 제 대학 시절과 맞닿아 있는 6공화국의 서슬퍼랬던 검찰총장 정구영, 그리고 김윤식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원들의 명단에는 임현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리영희 교수와 더불어 저 유명한 5공의 실세 허문도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 이름들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러모을 수 있었던 사람. 하지만 어떤 진보적인 평론가에게는 “문학사적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혹평까지 들었다는 작가 이병주가 1992년 1월 3일 죽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 알프스가 있었듯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고 했던 유려한 문체의 작가가 수많은 유작을 남긴 채 평생 어지러웠던 나라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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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4 1.4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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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1월 4일 1.4 후퇴 

조영남이 부른 노래 중에 “내 고향 충청도”라는 노래가 있다. 뭔가 구수한 멜로디에 정이 뚝뚝 떨어지는 가사가 버무려진 노래.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 싶은 곳.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이 정다운 노래의 원 가사는 좀 얼떨떨할 만큼 분위기가 다르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노래의 원곡 가사는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고향 충청도’의 주인공이 충청도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전혀 따사롭지 않다. “내 고향 충청도”의 첫 가사.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내 고향 충청도.” 1.4 후퇴. 

1.4 후퇴는 1950년 가을 이후 북진하던 한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한 과정을 총괄하는 단어다. 1951년 1월 4일 일제히 후퇴를 시작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날 서울은 텅 비어 있었고 바로 다음날 중국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이미 12월 초에 시작한 평양 철수, 12월 중순 시작한 흥남 철수 이래 한반도 중부는 피난과 후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경의선을 달리는 열차는 평양 이남의 피난민들을 지붕 위까지 싣고 기적을 울렸고 서울 시민들은 전세가 이상하게 되어 간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 연인 서울역 앞에 장사진을 쳤다. 

서울 시민들에게 공식 소개령이 떨어진 건 흥남 철수가 완료되던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그를 전후하여 서울을 탈출한 것은 80여만 명..... 당시 서울 인구 1백만 잡고 8할이 서울을 떠났던 셈이다. 서울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경우 1월 3일쯤 되면 거의 유령도시에 가까웠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은 남부여대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작전에 차질을 빚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후 전쟁에서 “도살 작전”을 펼쳐 중공군을 밀어올리게 되는 이 강골 군인은 “유사시 무기를 써서라도” 피난민을 통제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기우임을 깨닫게 된다. 이미 한국인들은 생존의 방식을 체득하고 질서정연하게 한줄로 서서 혹한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피난 과정을 지켜보고 리지웨이가 남긴 기록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은 천정을 보게 만든다. 

“부교의 상하류에는 인류사의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혹한 설풍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채 얼지도 않은 강 위를 미끄러지며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얕은 얼음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는 있었으나 누구 하나 이웃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우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 소리만이 가팔랐고 이따금의 탄식만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1967, Korean War)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군인들만 서로에게 악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채 얼어붙지 않은 강물을 건너는 중 이웃이 살얼음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그를 돕기는 커녕 행여 내 발밑이 꺼질세라 저만치 돌아가야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울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음아 날 살려라 걷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누가 죽는 것 따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1951년 1월 2일 마지막 피난 열차가 서울을 떠났다. 열차 안은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열차 지붕 위에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찼다. 흔들리는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과 맘을 집중했지만 깜빡 하는 사이에 열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그곳이 아마도 시흥역에서 안양역 사이였나 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열차 한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나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수백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먼 곳까지 나둥그러져 있었다. 철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철길을 따라 걸어 온 우리들은 이곳을 피해 갈수는 없었다.

몇몇 다른 피난민들의 말로는 어제 밤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기차에 많은 피난민들이 곳간차(庫間車) 지붕 위까지 수천 명이 매달리며 올라탔는데 이미 적진(敵陣)이 되어 몇 번이고 비행기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이 열차는 이미 적진 안에 있어서 곧 폭격을 하겠다! 피난민 여러분들은 빨리 내려서 걸어 가시요!" 라고 했다는데 일부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그냥 기차에 매달린 채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14세 소년이 겪은 한국전쟁,http://dae6.tistory.com/ 중) 그 후퇴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다.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배우기 위해 자신의 편견과 입장을 극복하여 객관화된 사실 그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도 소중하다. 전쟁을 대하는 자세 또한 그렇고, 그를 겪은 이들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그렇다. 전쟁이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이라는 데에 공감한다면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규명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칠 때 역사는 미래를 향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련이 몰락한 후 소련 측의 비밀 문서까지 몽땅 공개되어 김일성과 박헌영과 스탈린의 대화까지 죄다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6.25가 남침인가 북침인가”의 질문에 명색 진보정당 대표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얼렁뚱땅 무식을 폭로하는 형국이라면 그 진보가 과연 1.4를 경험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전쟁 반대’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 반대를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면서도, 당장 전쟁의 방아쇠가 될 민간인 거주 구역 포격에 대해서는 “포격을 하게 만든 책임”을 먼저 묻는 진보가 1.4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까. 전쟁을 겪은 세대, 이후의 냉전을 가장 처절하게 경험한 세대가 가장 강경하고 완고하게 후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진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들을 꼴통으로 치부해 버리면 되나? 

전철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잔뜩 얼었다가 풀리는 한강물을 보았다. 1951년 얼어붙은 한강 위를 필사적으로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 위에 오버랩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비극은 다시 없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지난 5년은 그 비극으로 어떻게 하면 더 근접할까 치달아왔던 세월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 모두의 정권이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5년은 어떨 것이며, 어때야 할까. 그리고 자칭 ‘진보’의 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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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5 김지섭의 폭탄, 그리고 황옥, 김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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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 폭탄 그리고 황옥 김시현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 앞에는 ‘안경다리’라고 불리는 니주바시 다리가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살아 있는 신으로서 일본 국민들의 범접할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던 천황이 사는 궁궐로 들어가는 다리. 그 다리에서 궁성을 향하여 폭탄이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4년 1월 5일이었다. 조선인 김지섭. 경상도 안동 출신의 의열단원이었다. 

영특하고 배움이 빨라 합방 전 보통학교 교사와 재판소 서기 및 통역 (일본어를 2개월만에 독파했다고)이 되었던 그는 그 이력으로 한세상 잘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합병 이후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전에도 교류가 있던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할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1923년 3월의 폭탄 반입 사건이었다. 모두 36개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와서 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폭파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총독부와 일본 경찰이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이 거사는 사전 탐지되어 김지섭과 의열단장 김원봉 등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황옥, 김시현 등은 체포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이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조선인들이 이를 틈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이성을 잃은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의 조선인 학살을 감행한다. 무려 6천 여명의 조선인이 이국 땅의 원귀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들 또한 격분한다. “이 쪽발이 새끼들을 쳐죽이고 말겠다.” 김지섭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제국 의회가 열려 일본 총리 이하 고관대작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이 들렸고 김지섭은 김원봉에게 달려간다. “기회요. 나보다 일본말 잘하는 사람이 없고 기분은 좀 나쁘지만 생김새도 일본놈 비슷하니 내가 적임자요. 내가 가서 놈들을 때려잡겠소.” 

마침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김지섭. 그는 폭탄 세 개를 품고 있었다. 그를 도운 것은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김지섭들은 일본인들의 도움을 못 미더워해다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들은 신의를 지켰다. 남해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양반의 본고장 안동에서 자란 사람답게 김지섭은 유려한 한시를 지어 읊는다. 그는 한학에 능통했다. 
“표연히 이 한 몸 만 리 길 떠나갈 때 (萬里飄然一粟身) 
배 안엔 모두 원수이니 벗할 이 뉘 있는가 (舟中皆敵有誰親)
(중략)
오늘날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今日潛踪浮海客)
그 몇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을 하였던가 (昔年嘗膽臥薪人)
이미 걸은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此行已決平生志)
다시는 고국을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不向關門更問津)

그러나 석탄 화물선 바닥에 숨어 바다를 건넌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폭탄은 습기를 머금었고 본디 성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지섭은 항해 와중에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제에 일본 천황의 궁성에 폭탄을 던지리라 마음 먹는다. 그래서 1924년 1월 5일 폭탄 세 발을 던지지만 모두 아쉬운 불발에 그치고 그는 체포되고 만다. 

재판정에서 그는 재판정을 압도하는 일장연설을 토한다. “이 사건의 예심정에서 판사는 나에 대하여 너희들이 지금 독립이니 무엇이니 떠들고 있으나 만일 지금 독립을 시켜 준다고 하면 과연 너희가 독립하여 살아갈 방도가 있느냐고 했으니 이건 일개 판사의 몸으로 우리 2천만 민중을 모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조선의 독립선언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다..... 조선 민중은 굶어죽고 맞아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선고를 받는 것은 광영이다. 사형 아니면 무죄를 내리라!” 

그를 변호한 것은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후세 다쓰시였다. 그는 조선 독립운동의 대의와 인명살상 없음 등을 이유로 무죄를 다투는데 한 대목에서 김지섭의 타박을 받는다. 후세 변호사는 당국이 경찰을 스파이로 활용, 독립운동 단체에 몰래 잠입시키는 이른바 프락치 공작의 부당성을 지적했는데 김지섭은 이를 강하게 부인한다. “황옥을 밀정이라 함은 웃기는 일이다.” 

여기서 황옥은 일본 경찰의 경부라는 꽤 높은 지위에 있던 이의 이름이다. 일본 경찰은 실제로 조선인 경찰을 의열단에 위장 가입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엄선된 이가 황옥이었다. 황옥은 이른바 ‘고등계 형사’였다. 그런 일을 한 자체로 친일파 혐의를 벗어나기는 무망하지만 그의 행적은 미스테리하기까지 하다. 고등계 형사로 복무하면서 그는 적잖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고, 앞서 언급한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 때에는 직접 폭탄 반입에 나서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고등계 형사로서 밀정 노릇을 했다고 현재까지도 의심받고 있으며, 의열단에 가입한 뒤에도 이중스파이로 의심받았던 황옥과 굳게 맺어졌던 것은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시현이었다. 둘은 의형제를 맺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황옥은 대담하게 폭탄에 총독부 공용 물건 딱지를 붙여 국경을 통과시켰지만 또 다른 밀정에 의해 정체가 폭로되고 김시현과 함께 체포되는데 막판에 김지섭을 국외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김지섭으로서는 후세 변호사가 황옥을 밀정이라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3명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와 같았다. 김지섭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지만 감옥에서 석연치 않게 옥사한다. 그는 옥중에서 이런 시를 남겼다. “ 한국의 선비들은 푸른하늘만 쳐다보며/ 만사 무심하게 세월만 보내네/ 15년전(1910) 오늘의 원한을 생각하면 / 살아 나라에 보답 못하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해방이 왔을 때 황옥은 반민특위에 나가 그의 상관이었던 악질 친일 경찰 김태석 (강우규 의사를 체포, 고문했던 황옥 자신의 상관)의 죄상을 고발한다. 이때 황옥이 밀반입한 폭탄의 소재를 고발했던 친일경찰 권상호도 함께 고발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뒤 서울에 남아 있던 황옥은 납북되고 “외국군 철수”를 부르짖는 평양 방송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김지섭과 안동 동향이었던 김시현의 경우는 더 기구하다. 

의열단원으로서 열혈 행동대원이었던 김시현의 피는 중년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던 것 같다. 김시현은 심문을 받던 중 비밀 누설을 할까 두려워 그 혀를 깨물다가 혀의 일부가 끊겨 나가 평생 혀짧은 소리를 내야 했을만큼 ‘독한’ 사람이었다. 원래 아호는 ‘학우’였는데 취조하던 검사가 ‘도대체 뭘 구하자는 것인가 ’하구‘(何求)라고 해라.’고 타박하자 그예 호를 하구로 바꿔 버리기도 했다. 이 하구 김시현은 해방 이후 김구가 안두희에게 죽는 것을 보고는 “이건 이승만 짓이다. 독립운동을 같이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여버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1952년 의열단 동지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김지섭의 폭탄처럼 그 총도 불발이었고, 김시현은 18년 7개월의 일제 시대 옥살이에 더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10년의 옥살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 암살 기도로 인해 그는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다. 

1924년 1월 5일 일본 천황의 궁성을 향해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거친 숨결과 슬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었고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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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6 단양 적성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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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8년 1월 6일 단양 적성비 발견 

과거는 어차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천지를 뒤흔든 사건도, 수만 명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슬픔도 몇 대를 지나치면 대개는 새털처럼 가벼운 과거가 되어 끝도 없고 바닥도 없는 시간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죠. 인간은 그를 방지하고자 기록을 하고 전설로 만들고 신화로 꾸미지만 남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역사는 동화에 나오는 페르시아 미녀처럼 꽁공 감싸고 있던 베일을 내던진 과거의 민낯을 우리에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1만 8천년 전의 황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줬고 투탄카멘 왕의 무덤은 3천년만에 열렸고 우리 무령왕릉은 1500년 뒤의 후손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굵직굵직한 건수들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의 유물이 나와 수백 수천년전의 사람들의 숨결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기적같은 일이 종종 발생하지요. 이를테면 중국 집안시 즉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근처의 도로공사 중 한 돌비석의 깨진 파편이 발견됩니다. 그건 고구려 정벌을 기념하는 기공비였어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국내성을 함락하고 ‘불내성’(不耐城), 즉 견뎌내지 못할 성이라는 멸시 섞인 이름을 붙인 후 그 공을 찬미하는 비를 세웠는데 그 일부였지요. 관구검 기공비라고 불리우긴 하는데 관구검 이름은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에 동원된 오환족 선우의 공을 기념하는 비석 같기도 하지요. 어쨌든 긍지 높은 고구려인들이 그걸 가만 뒀을 리가 없죠. 산산조각을 내서 땅에 파묻었을 텐데 그 일부가 발견된 겁니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에는 삼국 시대 산성이 있습니다. 그리 높은 산자락은 아니지만 병풍 같은 소백산맥 뒤로 하고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임을 짐작할만한 곳이죠. 성도 꽤 튼튼하게 쌓아져서 삼국 시대가 끝난 뒤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고 버려진 성 치고는 그 자취가 오래도록 선연하게 남아 있었지요. 개국 이래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중부로 진출하는 것이 국가적 소망이었던 신라가 마침내 죽령을 넘어 확보한 교두보 격이니 정성스레 쌓았겠지요. 성에 올라서면 단양의 또 하나의 전설의 무대 온달산성 성벽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서로 호응해 가면서 이 일대를 지켰겠지요. 1978년 1월 엄동설한의 겨울 단양 적성에 운명의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그저 버려진 성이었던 적성 안에는 토기와 기왓장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조사단장이었던 정양호 교수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을 찾으면 맥주 한 병을 준다는 현상금(?)을 내걸고 성 안 조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글자면 세 병!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간밤에 왔던 눈 때문에 성 안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조사단원들의 신발도 온통 흙투성이가 됐지요. 그런데 아침에 올라올 때 봤던 삐죽이 튀어나온 돌덩이, 그래서 옛 건물의 주초석인가 싶은 돌덩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정양호 단장은 등산객들이 등산화 흙을 털기에 딱 좋았던 그 돌덩이에 손을 댔지요. 진흙을 털고 얼음을 헤친 순간 그는 기절할 정도로 놀랍니다.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큰 대 (大)

조사단은 그야말로 흥분에 빠집니다. 그 뒤에 나타난 단어는 亞官, 대아관(大亞官), 즉 신라의 관등명이었습니다. 신라비다! 장갑들 벗어! 손으로 한다! 주위 학생들에 따르면 정양호 교수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고 하지요. 하기가 1500년의 인연이 자기와 맺어진 셈이니 역사학자로서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할 정도의 행운이었겠죠. 날이 어두워 일단 나뭇가지로 비석을 덮고 내려온 조사단은 다음날 다시 올라가 발굴을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날밤 정양호 교수 이하 조사단의 심경과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어땠을까요 부어라 마셔라였을까요 쥐죽은 뒤 목욕재계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까요. 

어쨌든 등산객의 신발을 털어주던 그 돌덩이는 신라의 진흥왕이 세운 척경비, 즉 국경 개척을 기념한 비임이 밝혀집니다. 거기에는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에 등장하여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이름 신라 장군 이사부도 출몰하고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도 그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퀴퀴한 종이에만 의지하던 우리 고대사의 일부가 돌고래처럼 역사의 수면 위를 박차고 오른 겁니다. 정식 한문체가 아니어서 해독도 쉽지 않았고 비석 윗부분은 끝내 발견되지 않은 일부의 비였지만 그래도 그 비석 하나로 고대사 교과서는 다시 쓰여지게 됩니다. 경향신문에 연재된 <고고학자 조유전과 함께 떠나는 한국사 여행> 적성비편에 따르면 이 발견으로 가장 크게 낭패를 본 사람은 일본인 사학자 미이케 겐이치였다고 합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가 진평왕 때(재위 579∼632년) 관등제도가 성립됐다고 주장해왔던 일본학자 미이케 켄이치(三池賢一)일 거야. 한때 그의 학설은 너무도 정연해서 누구라도 부인하기 어려웠는데, 비문이 발견되면서 단번에 허물어졌으니….”(이기동 교수) 그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고 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게 아니었고 진평왕 때에야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적성비에는 버젓이 신라의 관등제 중 15위인 ‘대오’(大烏)나 외직(外職)의 최하위 품계인 아척(阿尺) 등이 등장해 있었던 거죠.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고대사는 기실 풍부한 사료 분석과 풍성한 유물을 통해 확립한 역사라기보다는 빈약한 사료와 유물을 근거로 얼키설키 엮고 꿰맨 성긴 그물 같은 것입니다. 그 틈 사이로 어떤 사실들이 새고 있는지, 전혀 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뭔가가 남아 있는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죠. 그 진위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화랑세기>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신라 귀족 사회의 ‘상식’과는 아예 패러다임이 다르거든요. 누군가 18대 대통령을 선덕여왕에 비유하던데 남편들을 태연하게 갈아치우는 화랑세기 속 선덕여왕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발견되지 않은 사료, 땅 속에 묻힌 유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런데 건설회사 있는 친구 말 들어보면 좀 으스스해집니다. 땅 파다가 뭔가 나왔다 하면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기보다는 그냥 묻어 버리는 것이 ‘상식’이라는 거지요. 

단양 적성비도 버려진 성 안에 묻혀 있었기에 그 아래쪽이나마 살아남았겠지만 중앙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발견됐더라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 콘도미니엄을 짓다가 그 기초공사 중에 나왔다면 아마 사우나탕 지하 깊숙이 박혀 버렸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백제의 5백년 도읍지 하남 위례성의 태반은 그렇게 아파트 단지 지하에 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크지요. 4월쯤까지 ‘오늘의 역사’를 계속한다면 그때쯤 중원 고구려비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중원 고구려비는 아주머니들이 빨랫감을 놓고 두들기는 빨랫돌 역할을 했었다지요. 고대사에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그렇게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우리에게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돌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단양은 볼 것 많고 경치 좋은 고장입니다. 단양 들르게 되면 관광 코스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지만 단양 적성 한 번 올라가 보세요. 그리고 그 앞의 단양 적성비 (물론 모조품이겠지만)도 들여다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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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7 청주 우암상가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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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수십년의 군부 통치를 끝내는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문민 정부의 초반은 30년 군 출신 대통령들의 치세에 쌓아올린 모래성들의 붕괴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하면 된다.”와 “잘 살아 보세”의 쌍끌이가 안전을 무시한 속도전과 내실을 저버린 잇속으로 치달았던 오랜 관행이 정신없이 한국인들의 뺨을 때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구포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지고 격포에서는 배가 침몰해 사람들이 바다에 삼켜졌고 구포에서는 기차가 탈선해 승객들을 짓이겼고 성수대교 다리가 끊어졌고 마침내는 백화점이 무너졌다. 그 일련의 재난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사고였다. 

1월 7일 새벽 1시 반쯤, 화재 신고가 청주소방서에 접수됐고 요란한 출동 벨이 울렸다. 화재 장소는 상당구 우암동 주상복합건물 우암상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소방관 김기원은 현장을 보자마자 무전기를 들었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반복한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청주 시내 소방관에 총동원령을 내릴 만큼 심각한 화재였다. 주민들은 많이 빠져나왔지만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떨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방화복 단추도 채 잠그지 못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화재 진압 작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두시 십분 경, 소방관들과 옥상의 주민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펑 펑.... 건물 내에 있던 LPG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 불길한 소리에 이어 건물은 숱한 사람들의 비명을 아귀처럼 삼키면서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청주 시내 전 구급차량은 우암 상가로 집결하라는 찢어지는 명령이 떨어졌고 잠깐 동안 넋을 잃었던 소방관들은 다시 무너진 건물 더미로 뛰어들었다. 잠옷 바람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고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꼭 안은 채 콘크리트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어떤 소년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자신의 부모와 두 형이 울부짖다가 건물 더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문제는 단연 부실시공이었다. 상가 건축 당시 자금난 때문에 건축업자가 3번이나 바뀌는 통에 철근은 얇아져 갔고 내화제 또한 줄어들었으며 골재는 불량품 범벅이었다. 더 심한 화재였던 대연각 호텔이나 대아 호텔 등도 건물이 붕괴되지는 않았었는데 불이 난 지 단 1시간도 못되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은 부실시공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안전불감증 또한 심각해서 건물의 안전 담당자는 화재 예방 교육 참가는 커녕, 공사에 다망한 나머지 경비원을 대신 참석시키는 용기를 과시했고 자체 소방 시설 등을 점검하거나 그를 소방서에 제출하는 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부실시공도 안전불감증도 결국은 ‘쩐’의 문제다. 당장 눈 앞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데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으며 까짓거 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으며 철근 좀 줄인다고 무슨 큰일 나겠는가, 공기 맞추면 그만이고 잔금 받으면 그만이고 빨리 입주자 집어넣어 돈 챙겨 잘 살아 보면 그만 아닌가 하는 당시, 또는 지금도 만연한 ‘한국인의 국민자세’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사고 후 또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건축 허가에 책임이 있는 시보다 소방서에 사고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목숨 걸고 불을 껐던 소방관들이 경찰에 연일 불려가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소방관 몇 명은 사표를 던지며 항의하기도 했다. “건물이 무너진 게 우리 책임이라는 겁니까.” 

우암동의 옛 이름은 와우동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일제 시대 우암동으로 바뀌어 불려 왔다는 것인데 동네 이름이 그대로였다면 이 우암상가 아파트의 이름도 와우아파트였을 것이다. 와우 아파트 하니 당연히 떠오르는 동명의 이름이 있다. 와우 아파트 참사. 그때도 똑같았다. 불도저같이 하면된다고 밀어붙이고 벌면 된다고 부실시공에 떼먹을 거 다 떼먹고 그러고는 잘 살게 되었다며 아파트 굽어보며 기고만장하던 바로 그 사고(思考)가 와우 아파트를 무너뜨렸고 청주의 우암상가에 결국 대형 사고를 친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간다. 현장에 출동한 장현철 소방관은 콘크리트 더미에 묻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넉 달 동안 팔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었고 1년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노컷뉴스 2007.11.10) 장애등급을 받아야 할 중상이었고 툭하면 뭐가 덮칠 것 같은 공포에 폐쇄공포증까지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소방서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10년간의 내근을 거쳐 2005년부터는 화재 진압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가면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아요. 다른 소방관들도 그럴 거에요. 인명구조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사람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고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런 마음씨는 꺼지지 않는 호롱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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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8 제임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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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9년 1월 8일 1.8 테러와 제임스 리 

1989년 1월 8일의 기나긴 겨울밤이었다. 석남사 산장에서는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열띤 토론이 오간 끝에 밥 먹고 하자는 말도 나오고 술이 빠지지도 않았으리라. 뻗을 사람은 뻗고 질긴 사람들은 두런두런 남은 얘기를 하던 새벽녘, 갑자기 복면을 한 괴한들이 산장을 덮쳤다. 무전기로 서로 교신하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함을 보인 그들은 추호도 사정을 돌보지 않고 각목을 휘둘러댔다.


무려 50여명이 넘는 괴한들의 몽둥이질에 조합원들은 속절없이 두들겨 맞았다. 한바탕 몽둥이 찜질이 끝난 후 괴한들은 신속하게 철수하여 다음 목표물을 찾아갔다. 다음 목표물은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이었다. 아직은 동트기 전의 어두운 시간, 그곳에 있던 23명의 노동자들은 때아닌 매타작에 혼이 나가고 말았다. 

후일 뉴라이트로 선회하여 온갖 욕을 다 들어먹었지만 끝내 들어먹은 욕만큼 장수하지는 못한 87년 ‘울산의 바웬사’ 권용목도 그곳에 있었지만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바람같이 나타나 몽둥이를 휘두른 뒤 바람처럼 사라진 그 괴한들은 현대그룹 차원에서 조직한 일종의 ‘구사대’였다. 그 책임을 지고 현대그룹의 전무까지 구속되는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사실은 그 전무조차 일종의 총알받이였을 뿐 최종 결정자는 정씨 로열 페밀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불도저같은 기업 문화답게 현대그룹은 노조와의 대결에서도 ‘화끈’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앞뒤 가리지 않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의 한복판에 앉아서 조종간을 쥐었던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1.8 테러의 기획자였고 그 이전부터 노조 활동에 대한 비난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에게 반노조 의식을 불어넣으려고 기를 쓰던 노조 파괴자였다. 그 이름이 제임스 리다. 본명 이윤섭. 1990년 7월 1일 시사저널 보도에 나타난 이윤섭의 행적은 사뭇 흥미롭다. 


1950년생인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빈털터리로 미국에 이민갔다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보고 노동운동에 의욕이 생겨 미국내 한인 노동 단체에 가입한다. 그런데 막상 그 단체 조직원들에게 제임스 리는 자신이 미는 사람이 대표에 당선되지 않자 조직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광분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노동운동의 ABC와 재야의 논리를 익힌 그는 귀국 후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기업주들에게 일종의 자본 부흥사 역할을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논리는 유구하게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많거니와 “No work, No pay!" 즉 무노동 무임금이나 "파업하는 노동자에게는 폐업으로 대처하라.”는 지침 등은 세월을 넘어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유력한 무기가 되고 있으니 87년의 그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제임스 리’의 명성은 높아갈 수 밖에 없었다. 수원지역 삼성계열사(삼성전관,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안국화재,용인 한일전장, 선경마그네틱(주), 대우전자 인천공장, 풍산금속 안강공장 등등의 유수한 기업체들이 그를 다투어 모셔서 고견을 들었다. 

제임스 리는 보통 인물이 아니어서 그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재야의 인사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논리에 계속 접하면서 그 대응 논리를 개발해 나가는 한편, 그를 행동으로 옮긴다. “노조가 빨갱이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정에서” 1.8 테러를 기획하고 현대그룹과의 밀접한 협조와 공권력의 친절한 무관심 하에 실행에 나선 것이다. 태반이 현대그룹의 노동자들이었다는 괴한들을 시켜서. 

제임스 리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곧 풀려난 뒤 이번에는 울산과 맞먹는 노동운동의 메카라 할 인천에 나타났다. 새인천병원에서는 인사부장을 자처했고 콜트악기에서는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음해공작을 폈고 명성전기에서는 아예 교섭의 사측 대표로 나서면서 그는 그 악명을 노동운동계 전역에 떨쳤다. 오죽하면 그의 행적이 사라진 요즘도 노조 파괴자의 대명사로 ‘제임스 리’가 종종 회자될까. 

그는 자본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선구적인 (?) 인간이었다. 앞서 언급한 무노동 무임금 전술과 위장 폐업 전술은 자본의 금과옥조가 되었거니와 그는 테러 4일 전 현대중공업의 일부 노조대의원 60여 명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를 한다. “구사대를 조직하라. 그들은 여러분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즉 노동자들끼리의 싸움을 유발시키고자 했고 싸우려는 이들을 고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자본은 제임스 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성과를 거둔다. 한때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로서 노동운동의 점화대 노릇을 했던 현대 그룹의 정규직 노조원들은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발휘하며 철탑 위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제 새끼들마저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데 우선권을 달라는 단체협약을 하고 앉은 노동귀족이 된 지 오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돌아보면 차라리 노동자를 두들겨 패고 협박이나 하면서 노조 파괴공작을 하던 제임스 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저놈들은 빨갱이다!”고 소리지를 줄이나 알았던 제임스 리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130억이 넘는 ‘손배가압류’를 걸어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임스 리가 두들겨 팬 그 노동자들의 후배들이 거들먹거리는 노동 귀족이 되어 “누가 비정규직 되랬냐? 시끄럽긴......” 하면서 침을 찍 뱉는 제임스 리 보기에 매우 건전하고 아름다운 노동자가 될 줄은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은 돌고 돈다지만 죽지 않았다면 환갑을 넘긴 나이로 미국 아니면 한국 어디에선가 여생을 보내고 있을 제임스 리로서는 참 기가 막히게 돌아나가는 게 세상사라는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참 기가 막히게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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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9 다대포 앞바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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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3년 1월 9일 다대포 앞바다의 비극 

영호남을 이어주는 교통편은 오랫 동안 불편했다. 지금은 그나마 고속도로들이 이어져 있지만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영호남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편은 해상 교통이었다. 그리고 그 물길은 부산항에 이르기 전 다대포 앞바다를 통과한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한 뒤 물러나는 길도 다대포를 거쳤을 것이고, 거기서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 정운이 전사했고 그의 전몰지는 ‘몰운대’ (정운이 죽은 곳)로 명명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때 조선 수군도 그 험한 물길 때문에 고생이 자심했다고 하거니와 다대포 앞바다는 유난히 사고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3년 1월 9일 밤 일어났다. 

1월 9일 오후 두 시 창경호라는 이름의 배가 여수항을 떠났다. 전쟁 중이라지만 그래도 설은 쇠야 했기에 임시수도 부산으로 향하는 창경호에는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난 쌀 450가마와 수산물 50가마가 배에 그득히 실렸다. 다도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통영항에 입항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인 6시경.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경호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구정 대목을 노려 부산에 가서 물건을 떼 오려는 상인들이었다. 그렇게 올라탄 것이 수백 명. 

원래 일본 화물선 천신환이었던 창경호는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것을 대충 고쳐서 다시 바다에 띄운 허약한 배였다. 만들어진 지는 20년이 지났고 배 자체도 불안정했다. 여기에 쌀 수백 가마와 정원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찬 것이다. 거기에 남해 바다에는 불길한 요소 하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육지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파도가 맞물려 기습적으로 솟구치는 삼각파도가 그것이었다. 1월 9일 그렇지 않아도 파도가 드높은 겨울 바다였다. 통영을 떠나 부산의 목전인 다대포 앞바다에 이른 창경호에는 연신 파도가 부딪혀 공포스런 포말로 부서졌다. 흡사 피난선처럼 사람들이 들어찬 창경호 곳곳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파도를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던 중 커다란 파도가 창경호의 옆구리를 들이쳤고 순식간에 배는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다른 파도가 배를 때렸고 창경호는 순식간에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그 배에 탄 사람은 236명이었지만 실상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236명 사망자 가운데 229명이 엄동설한의 겨울 바다의 원혼이 됐다. 생존자는 단 7명. 창경호에는 구명장비가 전혀 없었다. 구명장비는 ‘도난’을 우려해서 배가 아니라 회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장비보다 사람의 목숨을 소홀히 한 댓가를 창경호는 처절하게 치르고 말았다. 부산일보가 호외를 뿌렸고 부산 시민들은 다대포를 향해 달려갔다. 구조 작업이 시작됐지만 기적은 드물었다. 많은 이들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겨울 바다를 헤엄쳐 섬에 상륙하긴 했지만 얼어 죽기도 했고, 많은 시신들이 줄을 엮은 것 같이 줄줄이 손을 잡고 죽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 교통부 장관이란 이의 망언이 유족들과 국민들의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창경호 사건은 풍랑 탓”이라며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사고로 규정했던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라면 그는 창경호 선주와 인척 관계였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로는 배의 소유주가 ‘장관의 영식’ 즉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여객선 개조, 정원 초과, 안전 장비 미비 등 모든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불법적이었던 창경호 사건을 불가항력으로 규정한 교통부 장관은 분노한 국민들 앞에 사표를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창경호 침몰은 탐욕을 부리는 이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보였지만 창경호의 마(魔)는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1967년 진해 가덕도 앞바다에서 역시 여수와 부산을 오가던 여객선 한일호가 구축함 충남함에 부딪쳐 침몰하여 90명이 넘는 이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그 배의 엔진은 바로 14년 전 침몰한 창경호의 엔진이었던 것이다. 인양한 배에서 엔진을 떼내어 자기 배에 달고 운항하던 한일호 역시 구명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그를 점검해야 할 공무원도 사바사바에 눈을 감았으며 결국 그 많은 생명을 물 속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창경호의 저주라고 해야 하나.

폭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배 천신환은 그 배조차 귀하던 시절 덕에 창경호로 살아났고 그 엔진은 한일호까지 이어져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돈 몇 푼에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악습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캄캄한 겨울바다 위에서 살려달라 악을 쓰다가 물 속으로 사라져간 원혼들의 포한은 쉽사리 이해가 간다. 구조대는 몇 시간 동안이나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고, 외로운 희생자들은 영화 <타이타닉>의 승객들처럼 빠져 죽고 얼어 죽어 갔다. 차이점은 있겠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구명조끼는 다들 챙겨 입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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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 개그우먼 김형은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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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0일 개그우먼 김형은 가다 

매우 뜽금없고, 지나치게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가끔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어떨까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노숙자까지, 귀공자에서 양아치까지 온갖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도 있고,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의 환호성과 비명과 웃음을 자아낼 수 있게 될 정도의 레벨만 갖춘다면, 연예인이란 정말 해 볼만한 직업 아니겠습니까. 그 경지에 오르는 과정이 하늘에 별 달고 마감공사하는 정도로 어려워서 그렇죠.


그러나 연예인들을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연예인이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며 상상을 초월하는 불편함과 인내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남을 웃기려면 스스로 울어야 하고 남을 울리려면 자기 머리와 가슴은 부서져야 한다는 것, 그것은 수사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더욱 많은 이들이 알아보아야 줏가가 올라가는 한편으로 맘 놓고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개나 소나 아무개다 소리지르는가 하면 술 한 잔 받으라고, 또는 따라 달라고 찐따붙는 이들에게 노출되기도 하지요. 그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주먹 한 번 내지르지 않고도 "아무개 포장마차에서 폭력 휘둘러....."의 기사 주인공이 되기 십상입니다.

연예 프로그램에는 한 번도 발담그지 않았고, 연예인들과 함께 일한다기보다는 항상 그들을 섭외하고 뭔가 요청하는 입장이었던 제게 연예인들과 싶은 사귐의 기회는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듯이, 바쁜 스케쥴의 틈새를 노리는 스토커처럼 그들 주위를 맴돌거나 함께 일하면서도 사무적인 농담 주고 받으면서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조차 제대로 못한채 어영부영 프로그램 마무리할 때도 많았구요. 그건 제 주변머리의 문제입니다만.......

'특명 아빠의 도전'을 연출할 때, 저는 크리스마스나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 같은 것은 아니고, 그런 특별한 때에는 언제나 연예인을 섭외해서 그들을 불우이웃들의 1일 아빠로 설정, 과제를 주고 성공을 '시키고' 선물을 전달하는 이벤트를 치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의 크리스마스 어간에 제게 떨어진 임무는 1일 아빠로 웃찾사 멤버들 6명을 단체 도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타들보다 스타의식이 강한 매니저"의 무례함에 치를 떨면서, 당시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있던 웃찾사 멤버들의 꼬리를 따라다니면서 '연습 조금만 하시죠.' 라고 엎드려 빌다시피 하고 있었지요. 매니저만 제외하면 다른 웃찾사 멤버들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르겠지만 줄넘기 하나 들고 와서 곡예에 가까운 묘기를 해 달라고 강요하는 PD의 부탁을 성실히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코너가 다른 그들은 한데 모으기조차 쉽지 않았고, 단체 도전의 성격상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지 않고는 진전이 불가능했기에 저는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 봤을 때 '귀염둥이' 코너의 김형은씨가 누구에겐가 쌍시옷 들어가는 야단을 맞고 있었습니다. 개그맨 선배인지 기획사 사장인지 과문한 저로서는 알길이 없었지만 저는 함께 야단을 맞는 듯 가슴이 철렁거렸습니다. 도전팀 6인 가운데 유일한 여자로서 5분뒤 가까스로 모일 도전팀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 줘야 할 처지였던 겁니다. 김형은씨의 얼굴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고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까지 보이더군요.

호통을 치던 누군가가 휙 제 갈길로 가 버리고 김형은씨가 얼굴을 감싸고 소파에 앉아 버렸을 때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동작 하나 상황 하나 부탁 부탁하면서 일을 이어오던 처지에 김형은씨가 이거 나중에 하면 안돼요? 해 버리면 꼼짝없이 하루를 더 들여 그들을 따라가야 하고 그 뒤 일정들이 사정없이 꼬여 버리게 되어 있었죠. 그냥 피곤한 정도면 어떻게든 아양을 떨고 이왕 하는 거 빨리 끝냅시다 하면서 설득해 보겠는데, 제가 보기에도 찌그러지도록 혼이 나서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에 대고 어떻게 해 봅시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더군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후 저기요....... 하면서 건네는 제 말조차 이미 기가 죽다 못해 중천에 이른 뒤였습니다.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 분장은 많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땀일 수도 있고 눈물일 수도 있지만 그때 생각엔 아차 엄청 울었구나 싶었지요. "연습 좀 해야죠?"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괜찮으세요?"라고 말을 건넨 순간 저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빨리 바뀌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눈물 범벅에 얼음장같이 굳었던 얼굴이 봄햇살처럼 펴지면서 이종규씨와 함께 '귀염둥이' 코너를 열연하던 그 얼굴...... 아래 위보다는 왼쪽 오른쪽으로 발달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구부러지며 웃는 그 얼굴로 변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발딱 일어나서는 역시 '귀염둥이'의 어투로 채따라 일어서지 못했던 제 어깨 위로 발랄한 멘트를 날렸습니다. "그러엄요. 괜찮고 말구요. 연습해요 이제?"

30초 전에는 미이라같던 그녀가 어떻게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발그레한 홍조까지 되살아난 귀염둥이로 둔갑할 수 있는가, 그녀가 김형인씨며 윤택씨며 이종규씨며 기타 우리 도전 팀들을 찾아다니며 잠을 깨우고 등을 두드리고 팔을 잡아끌며 "빨리 연습하자"고 재우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는 아주 잠시지만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김형은씨 표정의 극적인 전환을 계속 리플레이시키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그 직후의 연습에서 평소보다 더 즐거워하면서 오버하면서 넘어지고 깔깔거리면서 악착같이 연습에 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반 넘어 지워져 버린 채 수습할 새 없었던 그녀의 얼굴 분장이 선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마왔고, 그래서 연예인 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로구나, 자신의 감정과 상황 모두를 자신의 웃음 뒤로 가둬 버릴 수 있는 능력은 정말 나로선 흉내조차 못낼 일이겠구나 고개를 가로저었었지요.

김형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저는 눈물로 얼굴 분장을 지우다가 제 앞에서는 땀으로 분장을 마저 깎아내리던 그녀의 줄넘기를 생각했습니다. 제게 연예인이란 아무나 하는 게 아냐~~를 몸으로 가르쳐 주었던 그녀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날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인사를 뒤늦게나마 전합니다. "고마왔습니다 김형은씨......... 이제는 천국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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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1.11 태평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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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1월 11일 태평천국의 탄생

중국이란 나라는 땅도 넓지만 사람이 무진장 많은 곳이죠. 지구상 인류 중 다섯 명 중 한 명은 중국인 아니겠습니까.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서 나고 죽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영웅호걸이라 불리울 위인들도 빗자루로 쓸어낼 만큼 많은 것이 그 역사일 겁니다. 아편전쟁에서 참패하여 중국이 서구열강의 호구가 되어가던 무렵의 1851년 1월 11일 중국 남부에서는 서른 중반의 청년이 자신의 나라 건국을 선언합니다. 그 이름은 태평천국. 그리고 그 청년의 이름은 홍수전(홍슈취안)이었습니다.

홍수전은 그의 고향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식으로 자라났습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흔히 하던 것처럼 과거 공부를 하고 급제하여 중앙의 관료로 종신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라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까무라쳤을 때 그는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일종의 꿈인지 환영인지 모를 스토리를 경험하게 되죠. 내용인즉 대충 이렇습니다.

홍수전은 하늘나라를 방문해서 검은 옷을 입은 노란 수염의 노인을 만나는데 그는 자신이 세계만물을 창조한 이이며 마귀를 숭배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칼과 인장을 줍니다. 홍수전은 이 칼과 인장을 들고 마귀와 싸우는데 그를 한 중년의 남자가 도와 줍니다. 홍수전은 그를 큰형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흑의의 노인이 누군가를 몹시 혼내는 것을 보게 되는데 글쎄 그건 ‘공자’였답니다. 공자는 그 죄를 깊이 늬우치며 가슴을 치고 말이죠. 이미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 내용을 읽었던 홍수전에게 이 몽상의 체험은 일종의 종교적, 영적 깨달음(착각)으로 전화됩니다. 즉 흑의 노인은 여호와 하느님이요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며 자신의 어머니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자신을 잉태하여 낳았고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족보를 스스로 형성하게 된 거죠.

그는 ‘배상제회’ 즉 상제를 경배하는 모임을 만들어 예수가 세상을 구하러 왔듯 자신도 온갖 악마의 유혹으로 타락에 빠진 중국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상제로부터 받았다고 설교했다. 모세의 10계와 비슷한 10계명을 지키고 유일신인 상제만을 믿으면 질병이나 재해에서 벗어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춘추전국시대 이후 중국의 오랜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으며 만인이 상제 앞에 평등함을 선포합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아버지도 임금도 없는 종교”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듯 공자님을 비루먹은 망아지로 보고 하늘같은 질서를 무시하는 이 홍수전의 배상제회는 당연히 지역의 토호라 할 향신 계급과 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홍수전은 1851년 양력 1월 11일, 음력으로는 12월 10일 그의 생일날 태평천국을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를 도운 핵심인물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매우 다양합니다. 숯장수 출신의 양수청, 빈농 출신의 소조귀, 지주였던 위창휘, 부농이었던 석달개 등이죠. 이렇듯 태평천국의 이름과 그 가르침은 각계각층의 지지를 얻으며 홍수전의 고향 광서성을 넘어 남중국으로 퍼져 나갑니다. 태평천국의 군기는 엄정했고 악질 지주나 부유한 상인, 그리고 중국을 망친 마귀로 지목한 만주족에 공격을 집중했기에 민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홍수전은 남녀 차별에도 반대하여 여자의 전족을 폐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로 군대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소삼랑이라는 여자가 이끄는 부대는 청 정부군의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하지요. 남중국의 수도라 할 난징을 장악한 태평천국 정부는 그들의 이상향을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로써 밝힙니다. 그것은 중국의 고대 평등사상으로서의 ‘대동(大同)’의 이념에 입각하여 토지를 공유하고 남녀 균등히 할당하며 전체 잉여물자를 공유로 하여 분배한다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전 자신은 이미 자신의 가르침을 배신하고 있었습니다. 술, 담배, 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까지도 엄격하게 통제하여 부부끼리도 동침을 허락지 않았던 반면, 그는 남경성 안의 대궐에서 수천 명의 여자에 둘러싸여 지냈거든요. 당시 기록으로는 백제 의자왕의 3천궁녀에 맞먹는 수의 여자들이 홍수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애초에 어설픈 신비체험으로 시작된 태평천국은 그 종교적 망상으로 흔들립니다. 홍수전의 심복이었던 양수청은 덩달아 신비체험을 과시하며 자신에게 상제의 혼이 내렸다며 홍수전에게 호통을 치는 애매한 상황을 연출하곤 했고, 홍수전은 이를 방기할 수 없었죠. 결국 피가 피를 부르는 내분이 일어나고 혁명 동지들은 하나 둘 그 목이 달아납니다. 아마 원수를 사랑하라는 큰형님의 가르침은 까먹은 듯 홍수전은 같은 편 수만 명을 눈 깜짝하지 않고 죽여 버리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하죠.

처음에는 기독교 아류가 아닌가 하고 호감을 가지던 서양 열강들은 우상 숭배라며 성모 마리아상까지 때려부수는 태평천국군을 보면서 얘들은 아닌 거 같다 결론지었고 더구나 태평천국보다는 완전히 자신들에게 꼬리를 내린 청나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다는 판단에 도달, 청나라 정부를 돕게 됩니다. 그리고는 태평천국의 성장만큼이나 빠른 몰락이 시작되지요. 남경성 포위 중 홍수전은 죽음을 맞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자살했다는 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만나’를 먹겠다고 아무 풀이나 집어먹다가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홍수전은 끝내 형님 예수나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죽습니다. 문제는 그 뒤에 남은 태평천국의 용사들이었지요.

어떤 기록에 보면 태평천국군의 강 도하를 목격하고 수만 명이 줄을 서서 배를 기다리는 강변을 향해 대포를 퍼붓는데 태평천국군들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서 볼링핀처럼 쓰러져 가는 모습에 서양인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어제까지 농민이었던 태평천국 군인들은 생애 처음 맛본 평등의 세상, 지주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운 기억을 위하여 싸웠고 죽였고 죽어갔습니다. 태평천국의 난 와중에 약 2천만명의 목숨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때 조선 인구가 천만을 밑돌았을 때니 조선 팔도의 인구가 몽땅 죽어 없어지는 참사가 일어났던 겁니다. 역시 중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죠.

언뜻 태평천국의 난을 보면 반세기쯤 뒤에 일어난 조선의 갑오농민혁명이 떠오릅니다. 물론 양상은 많이 다르죠. 전봉준은 홍수전같은 권력을 휘두르지도 못했지만 홍수전처럼 나라를 뒤엎고 새 나라를 꾸릴 생각 역시 하지 못했지요.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외쳤을 뿐 봉건 조선 왕조를 뿌리채 흔들 요량은 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동학농민운동 이전의 그 흔한 민란에서도 아전들은 죽이면서도 절대로 사또는 죽이지 못했던 이 착한 백성들이라니...... 종교적 열망으로 시작해서 정치적 개혁의 깃발을 휘날리지만 기관총 앞에서 주문 외면서 달려들었던 동학군들은 태평천국의 농민들처럼 시산혈해를 이루며 죽어갔지요. 그리고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가 됐고 조선은 완전식민지가 됐습니다. 그 무수한 희생은 마냥 헛되이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은 남고 역사는 기억의 무더기 속에서 피는 꽃이지요. 물론 쉽게 피는 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동학군이 사라진 후 조선 백성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 간다.”라는 슬픈 민요가 퍼졌듯 청나라 농민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완두콩은 붉게 꽃피었지만, 한번 떠난 태평군 형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네. 황혼이 지고 새날이 밝는 것을, 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을 바라보네. 오직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네.”

1988.1.13 장경국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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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사망

어느 나라인들 다르겠습니까마는 중국의 현대사는 참으로 많은 곡절과 파란 속에 펼쳐졌으며 별같은 인물들이 출몰하여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었습니다. 땅 넓고 인구 많은 지상 최대의 나라이면서도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세계대전의 전쟁터로 화했으며 그 와중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경험하고서 덩치가 너무나 차이가 나서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일종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으니 그 사설이 짧을 수야 없겠죠. 1988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난 대만 총통 장징궈 (이하 입에 밴 장경국으로 부릅니다)의 일생 또한 매우 복잡하고 처연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장개석의 아들입니다.

장경국을 얘기하려면 우선 그 어머니 모복매부터 시작해야겠죠. 장개석의 고향 절강의 풍습대로 장개석은 소년의 나이에 네 살 연상의 모복매에게 장가를 듭니다. 결혼식날 이웃 악동들이 폭죽 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아직 정신 못차린 꼬마 신랑 장개석이 폭죽 줍기에 뛰어드는 일이 있었다죠. 이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기에 장개석의 어머니도 노발대발했고 가마 속 모복매도 눈물을 흘렸다지요. 불길한 징조는 대개 실현되는 법. 장개석은 전족을 한 ‘구닥다리’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일본 유학이다 혁명이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바라지하며 장씨 가문을 지키던 모복매였지만 장개석은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고 기껏 찾아온 아내를 두들겨 패기도 했던 못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어찌 장개석의 첫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게 장경국이죠.

장경국은 청년의 나이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후일의 박정희도 그랬지만 장개석은 한때 ‘붉은 장군’으로 불리울만큼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었죠.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본질을 안 후” 또는 돈의 맛을 보고 자신의 처신에 대해 저울질을 끝낸 후 무자비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합니다. 1927년 장개석은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는데 이때 모스크바에 있었으며 “인터내셔널”을 가장 즐겨 불렀다는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재밌습니다 보세요) 장경국은 격렬하게 아버지를 성토합니다.

“.... 장개석의 혁명 사업은 이미 끝났다. 그의 혁명에 있어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혁명을 배반한 이상 이제부터 그는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적이다. 과거에 그는 나의 부친이며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적의 진영으로 돌아선 이상 그는 나의 적일뿐이다.” 아주 견결한 공산주의자의 아버지 부정이었지요. 하지만 스탈린은 그런 기특한 공산주의자에게도 그리 정답지 못했습니다. 장경국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우랄 산맥 근처의 노동자로 전전하는데 거기서 러시아 아가씨를 사귀게 됩니다. 후일 장방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러시아 여인은 머나먼 중국의 총통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죠.

1936년 장개석이 공산당의 씨를 말리겠다는 기세로 공산당 토벌에 몰두할 무렵 장경국은 다시 등장합니다. 프라우다에 실린 그의 글은 단어 하나 하나가 벼려진 칼날이었고 매서운 창끝이었죠.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후 세 차례의 반란에서 그 때마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었으므로 그는 중국 인민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뿐이 아니라 상처받은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 이렇게 아버지를 씹어대지요. “어머니는 기억하십니까. 누가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의 머리를 잡아챘으며, 누가 어머니를 2층에서 아래로 던졌습니까. 그 모두가 장개석의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가정폭력은 이렇게 큰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각설하고.

그런데 서안 사변, 즉 만주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고 공산당과 연대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자고 강청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역사의 선로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스탈린은 일종의 ‘인질’이었던 장경국에게 별안간 귀국령을 내리고 고국에 가서 투쟁할 것을 지시합니다. 장경국은 러시아인 아내를 데리고 귀국하게 되지요. 장개석도 인간인지라 그렇게 자신을 독하게 밀어붙였던 아들이라도 만나고 싶어 어쩔 줄 모릅니다. 하지만 체면이 있어서 ‘참을 인(忍)자만 쓰고 앉았다가 원로들에게 혈육을 만나는 기쁨을 외면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서야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장경국은 장개석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들로서의 예를 다합니다. 그리고 별 나이 차이도 안나는 새어머니 송미령에게도 ‘어머니’라 부르며 빈틈없는 예의를 갖추죠. 러시아인 아내도 서투른 중국말로 ‘어머님’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장경국은 일대 변신을 합니다. 장개석의 충실한 조력자가 된 거죠. 새어머니 송미령과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일 일본군 폭격에 돌아가게 되는 친모 모복매의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 두었을 정도지만 아버지에게는 충실한 효자로 돌아갑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온 뒤 장경국은 안보 기관 쪽 일을 맡아 보면서 아버지를 도왔고 38년간 계속된 계엄령 하에서 대만 민주주의와 대만 출신 인사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만의 정보 부서도 우리나라 중앙정보부 못지 않은 전횡을 휘둘렀습니다. 반정부적 언동을 하던 대학 교수가 대학 교내에서 시체로 발견돼도 흐지부지 수사가 끝나는 정도의 일이 무시로 벌어진 게 대만이었죠.

장개석이 죽은 뒤 잠깐의 과도기를 거쳐 총통 직에 오른 장경국. 그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에 힘을 쏟았고 죽기 1년 전에는 계엄령을 해제하여 민주화의 물꼬를 스스로 틉니다. 2대째 세습 정권이면 당연히 3대째에도 욕심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혼혈의 부담 때문인지 아니면 민주화 의지 때문인지 그는 “장씨 가문 통치는 2대 뿐”이라고 선언하며 후계자로 대만 출신인 이등휘를 지목하지요. 그리고 1988년 1월 13일 그 파란만장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끝내게 됩니다.

아시아적 특성이라고 할지 유교적 가치가 살아 있던 나라들에는 세습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싱가포르가 그랬고 대만이 그렇고 일본에도 그런 인물들 많고 한국도 선거를 통해서 전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의 직위에 앉게 되죠. 그런데 싱가포르의 이광요나 한국의 박정희나 중국의 장개석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다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거나 핵심 인자였거나 그에 친숙한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셋 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또는 떠는 체 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관철했던)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장경국 역시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열혈 청년 공산주의자 (뭐 인질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만)에서 아버지의 충실한 조력자로 반생을 살지요. 역사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재미라는 게 안전장치가 없는 롤러코스트 같기는 하지만요


1978.1.14 기구한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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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8년 1월 14일 기구한 최은희

영화 <괴물> 기억나시죠? 한강에서 괴물이 별안간 나타나 시민들을 쓸어 버리는 장면에서 우리의 봉테일 감독은 이 영화가 반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듯 한 용감한 미군 병사를 등장시킵니다. 송강호와 함께 괴물과 맞섰던 유일한 사람이죠. 그때 괴물에 덤비려는 미군 병사에게 매달리며 말리는 애인이 나오는데 그 애인 역을 맡은 여배우는 꽤 유명한 사람의 딸입니다. 바로 신상옥 감독의 딸 신승리지요.

신승리씨는 전혀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 탄생으로 말미암아 한국 영화사상 최고로 명망이 드높다 할 스타 부부의 파탄을 가져온 이이기도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여배우 최은희와 결혼했으면서 여배우 오수미와 몰래 사랑을 키웠고 아들을 얻지요. 여기까지는 최은희도 아이 못 가지는 죄도 죄려니 하고 용서를 하려 했는데 두 번째 애가 태어나면서는 그만 인내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둘째가 신승리였다죠.

최은희씨는 아시다시피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입니다. <상록수>의 채영신, <춘향전>의 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의 별당아씨 등 한국 여성의 대표적 캐릭터 가운데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고 본인도 기억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영화의 히로인으로 한국 영화를 빛냈죠. 저는 EBS에서 가끔 해주는 한국 영화 걸작선에서 최은희씨를 만나 본 적 있는데 요즘 기준으로 빼어난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그 둥근 얼굴과 야무진 이목구비에서 배어나오는 신비한 매력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철모르는 옥희 앞에서 속내를 숨기려고 애쓰던 <사랑방 손님의 어머니>에서는 더욱요. 한국적 여인상이라는 말에 한(恨)이 많이 배어나 있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과부 배역을 많이 맡았던 여배우라고 합니다.

그녀는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한 뒤 이미 한반도 전체에서 유명해집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말이죠. 47년이면 38선을 넘나들며 장사하던 사람들도 많을 때였죠. 하지만 그 유명세가 결국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녀는 목포에서 영화 촬영 중이었다고 합니다.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 와중에 그녀는 서울에 있던 카메라 촬영기사 남편을 찾아 남들이 피난 가던 길을 거슬러 올라 27일 서울로 올라옵니다. 서울 함락이 28일이었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어도 머리 깎고 들이민 셈이죠.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면 결핵에 걸린 남편을 부양하며 죽은 듯 숨어 지내던 7월의 어느 날 남산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한 인민군 장교에게 뒷덜미가 잡힙니다. “동무 최은희 동무 아니오. 나 심영이오.” 일제 때 유명했던 배우로서 월북했다는 소문이 났던 심영이 최은희를 알아본 겁니다. 최은희는 졸지에 인민군 내무성 소속 경비대 협주단의 단원이 됩니다. 쉽게 말해 문화선전대가 된 거죠. 배우 김승호, 엄앵란씨 삼촌 엄토미, 성악가 오현명 등이 끌려와 있었다죠. 이들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북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다가 폭격 와중에 기회를 포착해서 최은희는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감행합니다.

도망하다가 그녀는 북진하던 국군 6사단과 마주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를 불렀다.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지요. 그런데 6사단 정훈 장교는 그녀에게 선무 공작을 요구합니다. 즉 국군의 문화선전대 노릇을 하라는 거였지요. 며칠 상간으로 그는 정반대의 공연을 하며 다른 편의 군인들을 위무해야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부역자 딱지가 위태롭게 등짝에 붙어 있었던 이유도 있었죠.

어느 날 헌병대에서 그녀의 부역 혐의를 조사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고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녀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헌병대원은 잔뜩 겁먹은 나를 한적한 민가로 데려갔다. 술상 앞에 헌병대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피부도 곱구먼"이라며 다가왔다. 그를 확 밀어젖혔다. 하지만 그는 씩씩거리며 권총을 겨누더니,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질렀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한겨울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후 6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나지요. 국군이 후퇴하면서 최은희는 서울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의 회고는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납북됐다가 살아 돌아오니 ‘최은희가 인민군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등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이었다.”

전쟁 후 그녀는 다시 화려한 배우가 되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신상옥 감독과 사랑에 빠집니다. 전쟁 통에 목포에서 자신을 걱정해 올라왔던 아내 최은희를 종종 두들겨 팼다는 남편은 이 둘을 간통죄로 걸어버리는 바람에 간통죄 1호의 오명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을 일생의 남자로 삼고 사랑했지만 그 양반에게도 앞서 말한 배신을 당하게 되지요. 그리고 1978년 1월 14일 또 한 번 남북 분단의 희생양이 됩니다.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를 당한 거죠. 영화광으로 소문났던 김정일 위원장의 소행으로 추정됩니다만 어쨌든 그녀는 홍콩에서 평양으로 위치이동됩니다. 그 후 신상옥 감독도 북으로 납치되어 (또는 제발로) 들어와서 그들은 난데없는 북한에서 다시 결합하지요. 그리고 그 뒤 이야기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전쟁이 터져도 남편 걱정하느라 서울로 올라왔던 여배우는 적군의 문화선전대원이 됐다가 아군에 구출된 뒤에는 아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수십 년을 살았던 고국을 생판 타의로 등지고 상상해 보지도 않은 땅에서 배우 노릇을 해야 했고 다시 기회를 보아 그곳을 탈출했습니다. 아마 분단 이후 그녀만큼 남과 북을 처절하고 뼈아프게 경험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요. 한국 영화사상 우뚝 선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의 삶은 실로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굴곡이 크고 굽이가 많았습니다.

1978년 1월 14일 전혀 본의 아니게 배에 실려 황해를 가로지르던 최은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남포항까지 마중나왔다는 김정일을 보면서 또 그녀는 무슨 기겁을 했을까요. 대체 이게 무슨 팔자냐 한탄하는 와중에 갑자기 난데없이 심상옥 감독이 떡 하고 나타났다면 이건 또 무슨 조화냐 기절초풍하지 않았을까요....... 밤이나 낮이나 빛났던 여배우,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의 인생역정은 참으로 역사에 남을만큼 기구했습니다.


1919 ᆞ1.15 스러진 붉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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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9년 1월 15일 붉은 로자 지다.

유태인들에 대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 정부같은 악당들을 제외하면 어떤 편견도 없고, 그들을 특별히 우수한 존재로 치부하는 고려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유태인 출신들의 인물들을 보자면 적어도 그 인구에 비해서 특출한 인물들이 꽤 많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게 된다. 이른바 빨갱이들의 역사만 봐도 마르크스가 유태인이었고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무력의 조직자 트로츠키도 유태인이었고 레닌 사후 잠깐 당을 이끌었던 지노비에프도 그랬고 카메네프도 유태인이었으며 1919년 1월 15일 권총에 맞아 운하 속으로 던져진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로자 룩셈부르크도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면서 폴란드인이었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여성이었던, 즉 유럽 사회에서 차별받고 괄시받고 권리주장 못할 모든 조건을 갖췄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혁명가였다. 독일 시민권 획득을 위해 생면부지의 남자와 위장결혼을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여성이었고 혁명이 폴란드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격하되는 것에 열렬히 반대했으며 유태인은 커녕 열렬한 독일인으로서 전쟁에 반대하고 그 변혁을 꿈꿨다. 그렇다고 그녀는 많은 지식인들처럼 러시아에서의 성공에 경도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혹독한 비판의 창끝은 즐겨 레닌을 향하고 있었다.

“레닌은 방법론에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압류, 체포, 공장 책임자들의 독재적 권한, 가혹한 처벌, 테러를 통한 지배, 공포 정치.....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는 볼세비키를 거세게 비난했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차 그녀의 비판은 예언과 같은 성격을 띠어간다. 그것은 소련의 미래이기도 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적 생활이 그토록 빈곤하고, 그토록 도식적이며, 그토록 메마르게 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부와 지적 진보의 풍요로운 원천들을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전쟁의 광기에 그 스스로를 내맡겼다. 정부의 전쟁 예산을 승인한 것이다. 이로써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연대”는 라인 강의 오리알이 되고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됐다. 수천만의 젊은이들이 기관총과 독가스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전쟁 속에서 로사 룩셈부르크는 혁명만이 살육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사회민주당내 분파 가운데 가장 왼쪽에 위치한 인자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한다. 1918년 절망적인 명령에 저항한 독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시작한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황제는 퇴위하고 제정은 끝장났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 우파는 오히려 제정의 시스템을 옹호했고 그에 의지하여 안정을 찾으려 들었다. 그 시기에 붉은 로자라는 이름의 장미는 그 인생에서 최대의 붉은 빛을 발휘한다.

1918년 가을 출소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사 룩셈부르크는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독일의 현실을 비판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논설을 매일 매일 써서 유포하는 한편 이미 개량화하고 오히려 지배 체제의 일원이 되어 버린 사회민주당에서 벗어나 새로운 당을 창당하기로 하고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봉기자들은 사회민주당 본부와 관공서를 일시 장악하지만 한때 로자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1월 15일 마지막 논설을 써서 넘긴 직후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그들을 죽일 것을 작심하고 온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들의 손에 세상을 떠난다. 군인들은 그 날카로운 글과 선동을 짜내던 머리가 미웠던 모양이다. “군인들은 로자를 에워싸고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로자의 시신을 란트베르카날의 다리 위에서 던져 버렸다.”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그렇게 강철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동시에 인간성을 삼키는 혁명을 원치 않았던 공산주의자였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던 로자의 목소리는 그녀의 어떤 정치적 연설보다도 감동적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녀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결국은 나아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이행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저울은 주어진 조건을 파하여 더 큰 자유를 찾자고 일어선 그녀의 머리를 부쉈고 운하 속 수중고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가 평생을 걸고 사랑했으며 그 앞에서는 그야말로 연약한 여자가 되어 버렸던,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처형됐던 레오 요기헤스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를 읽으며 혁명가가 아닌 한 남자를 무진장 사랑했고 그와 행복한 일상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기일을 기념해 둔다.

“정말 그 아이를 안고 그대로 뛰고만 싶었어요. 오, 디오디오 (자신이 붙인 요기헤스의 별칭) 우리 아기는 가질 수 없는 건가요? 그리고 집에서는 절대로 다투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죠. 우리 집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예요..... 지구상의 어느 부부도 우리처럼 완벽한 쌍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요..... 오, 디오디오! 제발 빨리 여기로 와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요...... 디오디오, 당신이 날 번쩍 안아 올려 주길 바라지만 당신은 늘 내가 너무 무겁다는 핑계를 대지요."



1920.1.16 미국 금주법 전국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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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0년 1월 16일 미국 금주령 전국 발효 

요즘 내 코가 완전히 루돌프가 돼서 “코 왜 그러냐?”는 인사를 매양 받습니다. 바이러스성 피부병이라는데 좀체 낫지 않을 거랍니다. 의사 왈 “술 때문에 생긴 병은 분명히 아니지만 많이들 오해를 받지요. 그런데 술 마셔서 좋아지는 병은 없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죠. 술 끊으시면 좋습니다.”라고 하는데 그 말 들은 순간 떠오른 생각은 루돌프 사슴으로 살아가야겠다는 거였습니다. 안개 낀 성탄절날 스타를 꿈꾸면서 말이죠. 술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포기하기는 싫거든요. 하물며 갑자기 정부가 술을 마시면 처벌한다고 나오면 행복추구권 침해로 헌법 재판소에 달려감은 물론 안해 본 1인 시위도 불사할 것같습니다. 

기실 하지 말라고 하는 딱 한 가지를 기어이 범하고야 말았던 아담과 이브의 유전자는 제게도 유구한 탓에 금주령이 내린다면 오히려 술에 더 집착하고 공연히 맛도 없는 술 한 잔에 온갖 호들갑을 떨며 크아아 죽인다 군침을 겔겔 흘릴 것 같습니다. 공연히 웃돈 주고 맥주 한 병 숨길 거 같고, 담을 넘어서라도 술을 ‘추진’해 와서 ‘짱박아’ 두고서 홀짝 홀짝 마시면서 말이지요. 1920년 1월 16일 미국 49개 주 1억 국민, 그 가운데 술 마실 줄 알았던 수천만명의 남자들이 비슷한 심경이었을 겁니다. 

‘엄격한 위선자들’로 표현할 수 있는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 미국에서 금주 운동의 역사는 뿌리 깊습니다. 메이플라워 타고 온 청교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벤자민 프랭클린도 그가 설파한 13 덕목 중 “취하도록 마시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땅은 청교도만 살기엔 너무 넓었죠. 세계 각국의 이민들이 미국 땅에 쇄도하면서 술에 대한 엄격한 기준은 느슨할 대로 느슨해집니다. 하지만 지금껏 대통령이 성경에 손 얹고 선서하는 기이한 나라에서 술에 대한 곱잖은 시선은 계속 유지되어 왔죠. 그러던 중 뜻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미국의 적이 된 독일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독일 하면 떠오르는 맥주가 애꿎은 배척의 대상이 됐던 거죠. 미국의 맥주업계는 당연히 독일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미국 하원은 1917년 1월 금주법안을 제출합니다. 이 금주법은 12월 상원까지 통과하여 이는 “헌법 수정안 제 18조”로 불리우게 되지요. 윌슨 대통령은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만 의회는 ‘재결의’를 하는 강수를 두고 결국 1920년 1월 16일 헌법 수정안 제 18조는 시퍼런 빛을 발하며 발효되고 맙니다. 인간의 욕망을 법으로 규제해 보자는, 역사 이래 여러 차례 여러 나라에서 누차에 걸쳐 시행되었던 금주령이 20세기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 사회를 덮친 겁니다. 기실 이미 많은 가장들이 자기 집에 웬만큼의 알콜을 빼돌려 보관하고 있었다지만 공식적으로 술 사라진 사회는 오히려 술로 인해 일어난 사고의 상처 이상으로 미국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금지된 술을 찾는 사람들에게 술을 쥐어 준 사람들은 당연히 범법자들이었고, 범법자들은 그 거래를 통해 커다란 부를 쌓아 올립니다. 사실 미국의 유력한 정치 가문 케네디 가문도 이때 기민하 술을 사고 팔며 재산을 일군 사람이며, 우리가 익히 아는 알 카포네도 이 시기에 활동합니다. 그들은 술 제조와 판매의 나와바리를 두고 피튀기는 세력 전쟁을 벌였고 이 와중에 일반 대중들은 오히려 금주령 시대 전보다 더 많은 술을 해치웠습니다. 공업용 알콜을 장만해 들이키다가 저승으로 가야했던 이들은 그 가련한 예일 뿐이죠. 약 1500 명 정도 됐다는 감시원으로 49개 주, 오대호부터 시애틀까지, 플로리다에서 나이아가라까지의 미국 땅에서 술을 사라지게 한다는 야심은 실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고 사회는 점차 더 병들어 갑니다. 

범죄율이 24% 증가하였으며, 살인이 12.7%, 날치기 총기난사 등이 13% 늘었고, 마약중독자 증가율이 44.6%에 달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갱 영화의 대부분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가운데 <언터처블>은 참 재미있는 영화였죠. 정력적인 술 감시원으로 술 밀제조 및 판매 단속 요원이었던 케빈 코스트너와 알 카포네의 포스를 무섭게 드러냈던 로버트 드 니로의 대결이 흥미진진했구요. 하지만 그렇게 술 파는 자들을 웬수처럼 쫓던 케빈 코스트너는 자신의 일이 “현재 술이 불법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 금주법이 폐지된다면 “그때는 한 잔 해야지.”라고 웃지요. 하지만 대개 세상에는 케빈 코스트너같은 이보다는 얼치기 알 카포네가 많은 법이죠.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견지에서 싹텄고 그로 인한 폐해를 없애 보겠다는 뜻에서 대통령의 거부권까지 거부해 가며 미국 의회가 발효시킨 금주법은 오히려 미국 사회의 상처를 깊게 했고 엉뚱한 이들의 주머니를 채웠으며 보통 사람들의 소외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방법 수호를 T고위해 뛰어다닐 동안 대통령 하딩 부부는 “그놈의 헌법 때문에 술도 못마시겠다.”고 뇌까리리면서 친근한 인사들과 함께 백악관에서 칵테일 파티를 열고 있었거든요. 서민들의 일탈을 법으로 규제하고 규제 때문에 생긴 이익을 범죄 집단이 챙기고 힘있는 사람들은 다시 범죄집단으로부터 이익을 배분받고, 자신들은 그 법으로부터 자유를 만끽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미국의 1920년대를 관통했던 겁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주제이고 쉽게 대비시킬 수도 없는 문제임을 인정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 보자면, 현재 우리가 시행 중인 성매매 금지법에 그 발끝이 미칩니다. 어차피 성매매가 합법이었던 적도 없는 나라이지만 이 성매매 불법화는 많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과연 긍정적으로만 작용하고 있느냐를 생각하면 거기에선 좀 아리송해집니다. 미국에서 술 소비량이 줄지 않았듯 성매매의 빈도나 규모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점차 지하로 스며든 성매매는 더욱 음성화됐고 기관총과 권총만 없다 뿐이지 생선회칼에 야구방망이 든 양아치들의 준동 또한 크게 다를 것이 없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루스벨트가 술 금지령을 해제하듯 성매매 금지법도 폐지하는 것이 옳으냐고 누가 따진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건 케빈 코스트너가 금주법이 폐지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그땐 한 잔 해야지!” 대답하듯이 성매매 법이 폐지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고 “그땐 한 번 하러 가야지.”라고 절대로 대답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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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7 고베 대지진과 하루카의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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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과 하루카의 해바라기 

일본에 ‘고베’(神戶)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안 건 1985년 그 도시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릴 때였다. 요즘이야 유니버시아드 대회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지만 스포츠 공화국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폐막식을 생중계했고 그 대회 와중에 대회 찬가라 할까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배를 쥐었었다. “고베 유니버시아드”를 이 참으로 발음 후진 일본인들이 “고베 유니바시아도~~~~”라고 목청껏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고베라는 도시도 있구나.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일본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일본 최대의 항구였던 고베를 다른 연유로 기억한다. 1995년 1월 17일 고베 시를 쑥밭으로 만든 고베 대지진이 그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를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부르고, 공식적으로 효고현 남부 지진이라 명명된 강도 7.2의 대지진이 고베 시와 한신 지역을 덮친 것이다. 땅이 흔들린 시간은 단 14초였지만 사망자는 6434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4만3천명을 넘어섰다. 1초에 450명 정도의 사람이 죽어간 셈이다. 

땅은 뒤틀렸고 빌딩은 주저앉았다. 고베와 오사카를 잇는 거대한 고가도로는 장난감처럼 무너져 내렸다. 지진 많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그나마 안전 지대로 여겨져 온 고베 지역은 지진의 기습에 속절없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작년 겨울 고베에 들렀을 때 말끔히 재건된 항구 근처에는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장난감처럼 부서져 나간 콘크리트 항만 시설들은 지진의 위력적인 손의 지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저렇게 망가지고 부서진 재산은 1000억 달러에 달했다. 경제대국 일본 GNP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20퍼센트를 넘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후쿠시마 쓰나미 때 보여주었듯 불가사의하게까지 보이는 질서 의식과 인내력으로 재난에 대처했다. 고베 전체 인구와 맞먹는 자원봉사자들이 고베로 몰려들었고 매점매석이나 약탈 같은 행동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계가 감탄했지만 그 감탄의 대열에 동참하면서도 좀 다른 생각을 하는 나라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었다. 저 질서 의식을 1923년 관동 대지진 때는 왜 발휘하지 못했더란 말이냐..... 죽음에 이르러서도 침착하게 구조를 기다릴 줄 알고 살았다는 기쁨보다 구조대에 감사를 먼저 표할 줄 아는 예의바른 일본인들이 어떻게 수천 수만의 ‘조센징’들에게는 악마로 돌변했더란 말이냐. 그런데 이 생각을 속에만 묻어두지 못하고 그를 토해 냄으로써 스스로 악마가 되는 이도 있었다. 고소하다는 둥,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둥.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들이라 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 오던 수요 시위를 한 차례 중단함으로써 일본의 고통에 대한 예의를 진켰다.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고베 대지진을 맞아 수요시위를 계속하여 규탄의 목소리를 이을 것인지 한 차례 거를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정신대 문제는 일본이 만든 인재(人災)이고 지진은 천재(天災)인데 시위를 중단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강경론도 나왔고 거기에 동조하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 할머니의 말씀이 다른 의견들의 창끝을 누그러뜨렸다. “오늘만큼은 우리가 피해자로서 참변을 당한 가해자들을 용서합시다.” 92년 1월 시작된 수요집회 이후 150 주 연속하여 단 한 번의 무산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나 계속된 집회를 할머니들은 일본인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스스로 중단했다. 일본 대사관 직원이 “할머니들의 관용에 부끄러우면서도 참으로 감격스럽다.”고 말했다고 하거니와 (한겨레 95.1.20) 할머니들의 예의는 일본인들의 무책임을 그렇게 이긴 것이다. 

대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후 고베 시의 어느 동네에서 한 초등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는 몸을 피했지만 가토 하루카라는 열 한 살 아이는 끝내 집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희생자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 아이는 무척 예의 바르고 동네 사람들에게 해맑게 인사하고 다녀 사람들로부터 귀염 받던 아이였음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이후의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 테니까. 

지진의 상처로부터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그 해 여름, 동네 사람들은 공터가 되어 버린 하루카의 집 근처에서 탐스럽게 피어난 해바라기들을 보게 된다. 난데없는 해바라기의 출현에 의아해하던 동네 사람들은 곧 내막을 알게 된다. “해바라기씨야. 하루카가 귀여워하던 앵무새에게 주던 해바라기씨가 지진 때문에 땅에 묻히면서 이렇게 피어난 거야.” 살아남은 가족들도, 하루카를 귀여워했고 그 아이를 못 잊어하던 동네 어른들은 하루카가 살아온 듯 해바라기 앞에 모였다. “하루카. 하루카 네가 해바라기로 되돌아왔구나.” 

희망같은 태양을 향해 환하게 피어난 해바라기 앞에서, 명랑하고 씩씩했던 소녀 하루카의 유품(?)이 피어올린 해바라기 앞에서 하루카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이 해바라기 씨를 고베 곳곳에 옮겨 심기로 한다. 하루카의 넋을 기리면서 또 희망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도시 도처에 해바라기가 피어났고 그때까지 수국을 상징으로 했던 고베 시도 그 상징을 해바라기로 바꾸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 경기가 고베에서 열렸을 때 참가 선수단과 내빈들이 감탄해마지 않았던 해바라기의 물결은 바로 하루카의 해바라기에서 그 싹을 틔운 풍경이었다.   

인간은 때로 상상도 못할만큼 잔인한 존재다.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겠다며 무기를 들고 설치는 일은 역사에서 그리 귀하지도 않으며 어떻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공포심을 주어 저들을 지배할까 하는 것에 날이 새고 저무는 사람들은 비로 쓸어낼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사람들이 없었던 적도, 스러지는 것들 사이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인류의 본능적인 행동이 그친 적도 없었다. 1995년 1월 20일 자신들의 피맺힌 포한을 토해내는 수요 시위를 포기하면서 가해자의 나라에 위로를 전했던 할머니들과 슬프게 죽어간 하루카의 해바라기씨로부터 희망을 발견한 일본인들처럼. 2013년 오늘 우리에게 해바라기씨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해바라기씨로 삼아야 할까. 무엇으로부터 희망을 찾고 그를 누구에게 전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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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18 피카소가 그린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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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1월 18일 이 그림을 아십니까 

파블로 피카소라는 이름은 20세기의 미술계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나는 찾지 않는다. 다만 발견할 뿐이다.” 같은 별 재능 없이 태어난 장삼이사들의 부아를 돋구는 멘트를 날리던 이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는 언감생심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닐 겝니다. 추상화를 볼 때마다 “쳇 이건 나도 그리겠네.” 뇌까리기 일쑤인 주제에 무슨 토를 어디에 달겠습니까. 다만 1951년 1월 18일 완성됐다는  이 그림 앞에서는 조금 그 생각이 달라집니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1951년 1월 18일이라면 한반도라는 판이 두 번의 싹쓸이(?)를 거친 뒤입니다. 전해 6월 터진 전쟁은 8월경 낙동강 교두보만 남기고 거의 끝나는 것 같았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이은 반격으로 이번엔 남한과 그를 돕는 미군이 압록강 두만강가까지 진격해 올라갔고 급기야 중공군의 개입으로 썰물처럼 후퇴하여 서울을 내 주고 중공군의 남진을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는 시점이었죠. 건조하고 덤덤하게 전황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 남과 북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죽어갔습니다. 전쟁통에 적군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같이 뒹굴고 자라났던 사람들, 동네 이웃들의 손에 의해서 무수하게 서로 죽고 죽였습니다. 물론 무력을 보유한 정규군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죠. 

80년대 수정주의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 일월서각> 의 표지를 장식했던 이 그림은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배를 내민 임산부, 영문을 모른 채 총 앞에 선 남녀, 아직도 흙장난을 하고 있는 아이와 영문을 알아차릴만큼은 철이 들어 공포에 질린 채 엄마에게 달려드는 아이를 향해 중세 기사들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지요. 이 신천대학살에서 신천군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만 5천명의 신천군민들이 죽어갔다고 합니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서 볼 수 있듯 미군이 그랬다기보다는 오히려 교세가 막강했던 기독교인들과 좌익들의 대립 와중에 발생한 ‘우리끼리의 대학살’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 한데, 어쨌든 신천 대학살 소식은 동유럽과 유럽의 좌익들에게 전해지고 국제 취재진까지 구성되어 파견되는 등 관심의 핵이 됩니다. 아마도 피카소도 그런 경로로 신천을 알게 됐겠죠.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들에게 그렇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도대체 저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 수 없잖나!”가 그 이유였죠. 80년대 민중화가들같이 코 크고 수염난 엉클 샘을 대놓고 그린 것도 아니고 무슨 표식 같은 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도 모르게 얼굴들을 칭칭 투구로 싸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선전재료로 써먹기에는 몇십 퍼센트가 부족했던 겁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로부터는 예술성이 없다는 비판은 기본으로 들어야 했고 20세기 예술의 거성 피카소를 정치적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에는 가 본 일도 없는 피카소를 FBI가 25년이나 감시하며 파일을 작성하는 수고를 한 것은 이 그림 덕분일 가능성이 크죠.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진 뒤 하나의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전시수도 부산의 한 다방에서 분노에 찬 (?) 예술가들의 “피카소와의 결별식”이 열린 거죠. 주역은 한국 서양 미술 1세대로 평가되는 화가 김병기, 공초 오상순 등이었습니다. 김병기는 막심 고리키의 장례식 때 추도사를 읽을 정도로 사회주의에 경도돼 있었지만 이후 소비에트의 현실에 접하며 생각을 수정해 나가다가 해방 이후 “예술가 동무들이 정물이나 그리고 앉으면 되갔소?”라고 책상을 치는 ‘혁명가’들에 신물을 내고 월남하게 되죠. 그런데 자신의 우상이라 사표라 할 피카소가 미국의 학살을 규탄하는 그림을 그리다니! 그는 피카소에게 보내던 경의를 포기하는 편지를 써서 낭독합니다. 물론 전쟁 북새통에 부치지 못한 편지로 남습니다만. 

20세기 최고의 화가 피카소를 어쩔 수 없이 언급하면서도 피카소의 이름은 전쟁 겪은 대한민국에서 불온의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딱지의 꽃봉오리(?)라 할 사건이 1969년 6월 7일 벌어집니다. 삼중화학이라는 크레파스 제조사에서 크레파스에 ‘피카소’의 이름을 붙여 팔았다가 벼락을 맞은 겁니다. 검찰은 “피카소는 좌익계 화가로서 1944년 공산당에 입당, 소련으로부터 레닌 평화상을 받은 이이며 ‘한국에서의 학살’ 등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재료에 이용되는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점을 중시”, 그 이름을 상표로 쓰거나 그를 찬양하는 행위를 반공법 위반으로 다스리겠다고 으르렁거립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TV 프로그램에서 “피카소같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언급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씨도 불려들어가서 경을 치고 맙니다. “피카소가 훌륭해? 이 자식 이거 사상이 불순하네......” 곽규석씨는 나는 피카소가 그런 놈인줄 몰랐다고 자백해야 했고 삼중화학은 “피닉스” 크레파스로 (피씨는 피씨네) 그 이름을 개명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피카소를 대놓고 빨갱이로 몰아 버리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도 컸던 모양인지 검찰은 요런 단서를 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그냥 걸어두거나 그의 예술에 대해 연구 논평하는 행위는 괜찮다.” 참 대한민국 검찰의 꼼수는 유래와 전통이 있습니다. 

좌익으로부터 비판받고 우익으로부터는 눈에 가시 취급을 받은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한국이라고는 언젠가 유럽 순회 공연하던 최승희의 무용 정도로 밖에 본 적이 없었을 것 같고, 평생 한국 근처도 와 본 적 없는 피카소는 지구 반대편에서 수만 명의 생명이 일시에 죽어갔다는 소식에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좌익으로부터 “가해자가 불분명하다”고 비판받은 그 이유로, 이 <한국에서의 학살>은 예술가로서의 직관이 훌륭히 드러난 명작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피카소 자신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힌 바 있거니와 그의 그림은 무력을 소지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 기꺼이 참여한 국가와 권력이 무고한 수백만의 인민들을 앗아간 한국전쟁의 단면을 칼로 쪼갠 듯이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살은 황해도 신천 뿐이 아니라 왕년의 조선 팔도 전역에서, 남과 북에 충성하는 각각의 무력 집단에 의해 자행됐으며 피학살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어김없이 <한국에서의 학살> 바로 그 모습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1962.1.19 한국 최초의 드라마, 그리고 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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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2년 1월 19일 최초의 드라마와 이순재 

초치기라는 말이 있다. 주로 공부 못하는 이들이 하는 공부 스타일로서 평소에 예습 복습 준비함이 없이 시험 기간 앞두고 날밤을 새면서 닥치는 대로 머리에 집어넣는 ‘오빤 삽질 스타일’의 형태가 되겠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방송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한국방송 KBS의 출범도 비슷했다. KBS의 창사기념일은 1961년 12월 31일인 바,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스타트를 끊겠다는 의지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다. 초치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해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그들이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 8월의 일이었다.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어서” (공보부 장관 오재경) 

이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야말로 초치기를 통해 국민들에게 배달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9일 뒤인 1962년 1월 19일 또 하나의 ‘초치기’ 선물이 뒤를 따랐다. 그것은 최초의 TV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였다. ‘금요무대’의 첫회분으로 극본 유치진 연출 이기하의 한국 드라마의 시조였다. 내용은 “반공을 제 1의 국시로” 하던 시절답게 반공극. 80년대 중학교를 다닌 분들은 교과서에 실린 반공 희곡의 일부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를 기억하실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 희곡의 길을 개척했던 유치진의 솜씨라고는 말하기 싫을만큼 닭살 돋았던 작품이었다. 그것보다 좀 낫다는 평을 듣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공산당원이던 백석봉은 남한 출신의 애인의 존재와 한국계 소련 2세 나타샤의 연정을 거부한 죄로 궁지에 몰리고 그 와중에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기이한 결심을 한다. “당이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인간이 당에 속하여 내가 그 괴뢰가 되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거다. 나도 인간이 되어야겠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말살하려는 공산주의의 쇠사슬을 끊어야겠어.” 그러니까 인간이 되련다는 죽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석봉은 그의 죽음을 막으려는, 즉 인간 되기를 막으려는 공산당원들의 방해를 뚫고 인간이 된다. 즉 죽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드라마 제작 환경은 더더욱 말할 것이 못되었다. “녹화기는 둘째치고 카메라도 달랑 2대에 불과했다. 카메라조작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카메라 대신 의자를 카메라로 설정해 실습을 해야만 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야 했으니 드라마 촬영은 긴장의 연속일 수 밖에 없었다. 생방송인 관계로 가장 큰 문제는 NG였다.” (김환표의 TV 드라마, 역사를 만나다 제6회 중) 

들어나봤나 드라마 생방송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해피 타임>같은 곳에서 만나는 NG장면의 그 자유발랄함은 꿈도 못꿀 일이었고 모든 NG는 방송 펑크와 바로 연결됐다. 그 가운데 기가 막힌 예를 하나만 들어 둔다. “스튜디오 바닥이 마루장이어서 힐을 신은 여자 연기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장면에서 마루장 구멍에 힐이 박혀 꼼짝을 못 하자, 난데없이 “엄마야!” 하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위 김환표의 글 중)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은 주로 연극 배우들이었다. 대학 때부터 연극으로 단련된 배우들을 데려다 썼던 것이다. 탈렌트 공채 1기생으로 태현실, 정혜선 김혜자 등이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우리가 기억해 둘 만하다. 이순재. 이후 52년 동안 한국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망라하는 배우로서 활약해 온 그 할아버지다. 그 세월 내내 이순재가 일군 기록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언뜻만 살펴 봐도 그가 바로 TBC로 옮겨 작업한 <눈이 나리는데>는 최초의 일일 연속극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최장수 일인연속극이었으며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는 아예 고유명사가 됐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일일연속극은 역시 이순재가 중심을 잡았던 <보고 또 보고>였고 제자 허준 (전광렬)을 호령 하나로 기죽이던 명의 유의태 역의 이순재는 드라마 <허준>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으로 끌어올려 놨다. 그의 배우로서의 역사는 곧 한국 드라마의 효시와 궤도,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영조, 대원군 등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와 야동순재같은 얼뜬 표정에 이르기까지, 일일연속극부터 시트콤까지 그의 발자취는 곧 우리 TV드라마의 역사였던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이순재의 연기는 김세윤이 형사로 출연했던 드라마 <형사> 납량특집에서였다. 친구의 아내 장미희를 사모하게 되는 이순재는 최면술을 걸어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만나러 오게 만들어 밀회를 거듭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순재를 만나러 오던 장미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그때부터 그의 아파트에는 또각 또각 구두 소리만 내면서 “안아 주세요.”를 부르짖는 ‘목없는 미녀’가 출몰한다.


먼 훗날 김혜수와 김태우 두 배우로 리바이벌됐던 그 드라마에서 그는 정말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공포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참으로 실감나게 구현했었다. 최면을 걸며 이순재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나를 열렬히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던 모습은 주름살 그득한 지금의 모습 위에도 종종 오버랩되곤 한다. (그런 최면술 어디 배울데 없나 쩝) 

51년 전의 1월 19일 한국 TV 드라마의 효시가 쏘아올려졌다. 그 화살은 지금도 날고 있다. 이순재의 정치적 선택이나 입지를 떠나서 그렇게 우리의 한 분야의 산 증인이 여직도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행운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순재 자신이다. 2008년 7월30일, 연극 〈라이프 인 더 시어터〉 공연장에서 이순재가 등장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순재가 출연하고 있었지만 그날 새벽 이순재의 노모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순재는 무대 위에 나타났다. “연극은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공연을 한 뒤 빈소를 지키겠다” 두 번의 공연을 마친 뒤에야 그는 노모가 기다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그가 왜 아직도 현역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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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0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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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9년 1월 20일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죄! 

1988년 가을, 서울 올림픽의 손에 손 잡고 로고송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울려 대던 즈음의 어느 날 밤, 나이 서른 두 살의 주부가 경북 어느 소도시의 으슥한 밤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두 명의 젊은 남자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 마주침과 이후 상황에 대한 설명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부의 말에 따르면 갑자기 달려든 두 남자가 자신의 팔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한 뒤 골목길로 끌고 간 뒤 쓰러뜨려 놓고 한 남자가 음부를 만지면서 옆구리를 걷어찬 뒤 강제로 키스를 시도했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입 안에 뱀같은 혀가 들어오자 여자는 어금니를 악물고 그 혀를 깨물었고 여자는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몰캉한 뭔가가 입 안에 머금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남자는 짐승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있었죠. 혀가 뜯겨나간 겁니다. 

남자들의 입장은 매우 달랐습니다. 남자들에 따르면 다른 친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귀가하던 도중 길바닥에 앉아 있던 주부가 갑에게 매달려 어떤 식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여 그녀를 부축하여 골목길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축하면서 몸이 밀착하여 뺨이 맞닿게 되자 ‘술김에’, ‘호기심으로’ 주부에게 키스하였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주부가 먼저 키스를 시도했다고 우겨대기도 하지요. 또 하나의 남자는 땅바닥에 앉아 있는 변월수를 보고 그냥 지나가자고 하였으나 자신의 친구가 그녀를 부축하여 골목길로 들어갔고 자신은 따라가기만 했다고 증언합니다. 

사건은 묘하게 전개됩니다. 되레 혀를 잘린 가해자측이 주부를 찾아 잘린 혀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이에 분개한 여자는 남자들을 성폭행 혐의로 고발하고 남자들은 주부를 무고 혐의로 맞고발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 여자는 폭행 혐의로 구속까지 됩니다. 

1심에서 남자들은 강제추행치상죄로 기소됩니다. 당연하죠. 어쨌건 남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가 잘렸으니 더 이상 또렷한 증거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의 변호사는 여자가 밤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면서 다녔고 집안 문제로 불화를 일으키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몰아붙이고 그 여성의 마수(?)에 걸린 전도양양한 청년들의 상처를 부각시킵니다. 덩달아 ‘과잉방어’로 주부를 기소한 검사는 여자가 폭행 피해 진술이 자꾸 바뀐다며 몰아붙이지요. 즉 옆구리를 먼저 맞았는지 뺨을 먼저 맞았는지 헛갈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럴 때는 검사를 딱 열 대만 기습적으로 때리고 싶어지지요. 그러고 나서 어디를 맞았는지 그 순서를 기억해 내면 대당 100만원 희사할 용의도 있구요. 어쨌건 대한민국 검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 다 기소합니다. 

이 사건이 기사화된 것은 1988년 9월 10일이었습니다. "폭행범 혀 깨문 주부에 1년 구형"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죠. 검찰 구형이 나온 이후 여성의 전화는 이 사건을 여론화하기로 결정하고, 9월 20일 "성폭력추방을 위한 긴급시민대토론회- 강간에 대한 정당방위도 죄인가"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판사 또한 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토론회가 열린 다음 날,판사는 주부에게 징역5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합니다. “정당방어라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행위”라는 게 판사의 판결이었지요. ‘상가가 밀집돼 있고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공포에 질려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럼 정당한 방어는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정당한 방어이고 어디까지가 과잉 방어인가? 도대체 여성의 인권은 강간범의 혀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하는 분노가 폭발적으로 제기되고 여론은 물 끓듯 일어납니다. 여성의 전화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강간범을 옹호하는 안동지원 유죄판결에 항의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7인의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하여 항소심준비에 들어갑니다. 변씨의 무죄판결을 위한 범시민 가두서명을 전개했고, 항소심 1차공판시 대구 고등법원 앞에서 무죄 선고 촉구 집회도 개최되지요. 여기에는 100여명의 여성들이 참여하여 무죄를 소리높이 외칩니다. 마침내 1989년 1월 20일 역사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그래도 의미있는 무죄 판결이 내려집니다. 

“피고인 1의 위와 같은 행위는 그 자신의 성적순결 및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로서 이는 법률상 범죄의 성립을 조각하는 사유인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할 것이므로(피고인 1이 당시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 늦게 혼자 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결국 피고인 1에 대한 이 사건 폭력행위 등 처벌에관한법률위반의 공소사실은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 소정의 피고사건이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하여 무죄가 된다 할 것임에도 원심이 이를 유죄로 인정하였으니 원심판결에는 채증법칙을 위배하여 사실을 오인하였거나 정당방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할 것이므로 이 점을 지적하는 피고는 피고인 1 및 그 변호인의 위 항소논지는 이유 있다.”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 늦게 혼자 돌아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기초 중의 기초가 법적인 판례로 남게 되거니와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인정되어 “차라리 그냥 그 날 그들에게 당하고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울부짖던 주부는 그 결백함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판례는 판례일 뿐,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식당 주인인 줄 알고” 여기자 가슴에 손을 넣었던 국회의원도 봤고 “왜 밤늦게 돌아다녀 범죄를 유발하는가?”하는 질문이 태연하게 등장하는 세상에 살고 있긴 하지요. 대법원 무죄 판결이 끝나고 한 그녀의 인터뷰의 일부는 홀연 무서워지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상 또한 참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제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우리 동네에서 세 건의 강간 사건이 일어났는데 저를 위문하러 왔다가 돌아가던 여자분도 당했어요.” 


사진은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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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1 1.21 사태와 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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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수도 한양을 둘러쌌던 우람한 성벽은 오랫 동안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서울 사람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조가 몰락하고 서울의 주인이 서너 번씩 바뀌는 와중에 성곽의 많은 부분은 잘려 나가고 허물어지고 때론 민가의 담장으로 전이되어 우리 목전에서 사라져 갔어요. 그래도 "산등성이에 눈 내린 자욱을 보고 쌓았다“는 전설대로 북악을 감아돌며 쌓아올린 성곽은 꽤 온전히 남아 있었건만 언제부턴가 그 길은 언감생심 염두에 두면 안되는 길이 되었더랬죠. 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까러“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이후 수십 년 동안 민간인은 얼씬도 할 수 없는 흡사 전시(戰時)의 성곽이 되어 초병들의 발걸음만 부산했으니 말이에요.



31명의 인민군 124군 부대원은 1968년 1월 18일 미군 2사단 경계지역이었던 고랑포를 낮은포복으로 통과한 후 맹렬히 서울을 향해 내달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뜻밖의 일로 노출되고 맙니다 산에 나무하러 온 나무꾼 4형제와 맞닥뜨리고 만 거죠. 나무꾼들은 국군 복장의 그들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124군부대원들은 나무꾼을 잡아놓고 죽일 것인지 살려보낼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자신들이 노출된 사실을 평양에 보고합니다. 하지만 무전 상태 불량으로 답을 받지 못하자 자신들이 결정을 내려야 했죠.

"이 사람들도 소작농이고 우리 닌민입네다 함부로 죽일 수는 없디요." "동무들은 경험이 없어 기러는 건데 안됐지만 죽여야 하오. 내려가서 신고 않는다는 보장이 어드메 있음둥." "네 명이 동시에 사라지문 수색이 있을 거이구 숨길라면 땅을 파 묻어야 되는데 기걸 어캅니까." 결국 그들은 투표를 실시합니다. 결론은 살려주자였죠. 역시 살려주자에 표를 던진 대장 김종웅은 나무꾼들에게 신고하면 자식까지 죽인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편 세이코 시계를 선물하며 나무꾼들을 놓아 보냅니다. 

그때까지는 "인민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는 유격대 정신이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살아내려간 나무꾼들은 당연히 신고했고 그 때문에 산통이 깨졌다고 생각한 북한은 이후 침투시키는 유격대들에게는 가차없는 행동을 지시하게 되죠. 어쨌든. 

124군 부대는 정말로 상상을 초월한 특수부대였습니다. 신고를 받은 군경이 포위망을 치면 그 뒤통수에서 서울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코앞 세검정에서 종로경찰서의 검문을 받게 됩니다. 경찰의 검문에 그들은 남한에서 끗발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방첩대를 사칭합니다. 하지만 이미 뭔가 수상한 낌새를 챈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신분을 확인하려들자 31명 중 대장 김종웅이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최서장을 쓰러뜨리면서 피비린내나는 서울의 1.21이 시작됩니다. 


124군 부대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기관단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집니다. 여러 시민들이 버스 안에 던져진 수류탄에 희생된 한 학생의 가방에는 생일선물로 줄 초콜렛이 들어 있었다지요 평온한 일상을 지내던 시민들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동생이 며칠 후 졸업식에 고인을 대신해 나타나자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왔지만 호랑이를 잡지는 못하고 깨우기만 했던 31명의 인민군들은 하나 둘 피를 쏟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오늘날의 한양 성곽길 마루까지 진출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여 소나무에 총탄의 상처를 남깁니다. 오늘날도 성곽길 탐방 중 볼 수 있는 김신조 소나무가 그것입니다. 그걸 쏜 사람이 김신조는 아닙니다만. 


31명의 대장이었던 김종웅, 유난히 키가 훤칠했고 침투 도중 마주친 나뭇꾼들을 살려 보내기로 결정했던 그는 매복에 걸려 걸레짝이 되어 죽습니다. 유탄발사기로 한쪽 팔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수류탄을 들고 돌진하다 일제사격으로 죽었다지요. 

원래 생포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김춘식과 김신조. 세검정 앞에서 청와대로 돌진하려던 부대원들 앞을 최규식 총경이 막아서기 전, 종로서 종로경찰서 형사 두 명이 정체모를 괴한들의 출현에 의심을 품고 따라붙고 있었죠. 말을 걸고 입씨름도 하며 그들의 발걸음을 늦추던 경찰관 두 명은 저 앞에서 최규식 총경이 쓰러지자 지금까지 말을 섞던 공비 김춘식을 돌로 찍어 실신시키지만 한 명은 총을 맞고 맙니다. 이 김춘식의 옷을 벗기던 도중 셔츠에 연결된 수류탄이 터지면서 김춘식도 죽고 말죠. 또 하나가 김신조였습니다 수류탄을 터뜨리려 했지만 불발돼 초병에 의해 체포된 그는 1월 22일 기자들 앞에 나타나 살기띤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박정희 멱을 따러 왔수다." 그는 유일한 생포자 및 전향자로 남습니다. 

그렇게 포위망을 치고 소탕전을 전개했지만 한 명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뚫고 철조망 뜯고 올라갔을리는 없으며 어디선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수십년 뒤 김신조는 북한에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송이버섯 선물을 들고 남한에 온 인민군 장성을 보고 기함을 하게 됩니다. 박재경. 그가 68년 1월 21일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북한도 참 심술궂지 않습니까. 송이버섯 배달자로 하필이면 그를 지목하다니. 마치 동무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오?라고 묻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서른 한 명의 북한 특공대 중 스물 아홉명은 죽어서 남쪽 땅에 묻혔고 한 명은 남에서 한 명은 북에서 그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중 김신조의 경우를 봅시다. 저는 죽어간 그의 동료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이 죽인 최규식 총경 이하 군인들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과 더불어 김신조를 분단의 희생양이라고 봅니다. 그 역시 결국 적의 궁을 기습하려던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이곳에서 온 것도 이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것도 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칼기 858편 폭파범 김현희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우리가 해 왔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런 분단의 희생자들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일일 겁니다. 그러자면 김신조든 김현희든 그들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광고판으로 삼고 그들의 아픔을 헤집는 일부터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신조나 김현희를 내려보낸 북한 정권에 경각심을 갖는 건 좋으나 그 적대감만을 확대재생산할 때 1.21 사태가 언제 재림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1.21은 6.25같은 오해에 싸여 있습니다. 6.25가 평온한 일요일 새벽 별안간 터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치열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듯 1.21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67년 휴전선은 거의 전시 상황이었습니다. 인민군은 무시로 넘어와 미군과 국군을 죽였고 인민군 100여명이 대거 휴전선을 넘어온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 육군 7사단은 포탄 수백 발을 북녘 땅에 쏘아부칩니다.... 그리고 68년 신년벽두 1.21이 왔던 겁니다

이거 보면서 무슨 영화같은 이야기라고 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화였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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