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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9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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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3년 12월9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세상 사람들의 키가 한 뼘은 움츠러지게 만들 정도로 추운 날이었습니다. 자동차들은 어둔 밤에도 선연한 입김을 내뿜으며 바람을 가르고 달렸고, 거리의 사람들은 하시라도 빨리 온기가 있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무자비해져만 가는 추위 속에서 한 아저씨가 힘겹게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젊은이의 거리 대학로가 저만치 보였습니다. 원래 나이는 마흔다섯이지만 누가 봐도 쉰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는 잠바떼기 하나로 추위를 막으며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서로 부둥켜 안은채 바삐 길을 가던 연인에게 아저씨가 말을 걸였습니다."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어드렇게 갑니까?"연인 중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습니다."저리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꼬부라지면 돼요.""얼마나 걸립니까?""차 타면 5분이면 가요.""걸어가문 어느 정도......"


아저씨의 마지막 질문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연인들은 저만치 뜀박질하며 아저씨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하필이면 젊은 연인이 가리킨 방향에서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고드름이 들어와 박히는 듯 했고 손과 발은 칼바람에 토막이 나듯 시렸습니다.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가 버린 듯 감각이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혀가 얼어붙을까 걱정했는지 지나는 사람들에게마다 길을 물었습니다.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이 어드메 있습니까?"


"7천원이라도 달랠 걸 그랬나." 아저씨는 이틀 전 밀린 월급 7백만원을 받아내 보겠다며 일하던 직장을 찾았지만 한푼도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조선족 동료들이 농성 중인 100주년 기념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몸을 한껏 움츠리다보니 갑자기 옆구리에서 쩡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고통으로 하얘졌습니다.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밀항선 선원들을 단지 바라만 보았다는 이유로 때리고 밟혀 부러진 갈빗대가 아직도 말썽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저씨는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옆구리를 다독인 후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아저씨는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어제 아침부터 오늘 저녁까지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릿 속에 차갑게 들어와 박혔습니다.지나는 사람에게 몇 번 도와 달라고 이야기도 해 보았지만 그 말을 들을 새도 없이 사람들은 빠르게 아저씨 앞을 지나쳐 갔습니다. 뜨끈한 오뎅이라도 한 사발 먹는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아저씨의 수중에는 오뎅 국물값이라도 할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바람은 아저씨를 집어삼킬듯 불어 왔고 아저씨는 손을 비비며 마치 어린아이같이 중얼거렸습니다."아이 추워... 아이 추워....."누군가 아저씨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저 좀 보시오... 라고 할 양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핸드폰 통화에 열심이었습니다. "응? 뭐 사 오라고? 알았어 아빠가 꼭 사갈께. 여보? 나야. 불 좀 팍팍 때고 있으라구. 추워 죽겠어. 뭐 좀 데워 놔 밥 안먹었어"


속절없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저씨는 무릎을 쳤습니다. 기렇지 핸드폰이 있었구나. 112 신고를 하면 순찰차가 달려오겠지. 여러분 곁에 3분 내로 달려온다고 했으니까. 사정을 좀 봐 주지 않갔나. 추운 날씨에 밧데리가 방전될까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밧데리는 선명한 한 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얼어붙어 가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습니다


.1...1....2.... 수화음을 거쳐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아저씨는 이미 얼어붙은 입을 힙겹게 떼었습니다. 상대방도 대답을 해 왔습니다.

"집에 왜 못가요?"
"맥이 없어서 걷지를 못하니까 못가죠."
"왜 힘이 없어요?"
"한 이틀 굶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앉아 있어요."
"집이 어디에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걷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말을 할수록 목은 잠겨 왔고 상대방은 아저씨를 술 취한 사람 정도로 안 것 같았습니다. 전화는 이내 끊겼습니다. 순찰차의 꿈은 사라지고 아저씨는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50미터쯤 갔을까 아저씨는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땅이 이렇게 차가운지는 몰랐는데 땅에 닿은 뺨이 마치 썩어들어가듯 얼어 왔습니다. 아저씨가 내뱉는 거친 숨결도 입에서 나오는 족족 냉기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 이거이 죽는 거이구나."


지금껏 그렇게 고생했어도 죽음을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입국할 때 당한 갈빗대 부상으로 일 반 치료 반 했던 한국 생활은 사는지 죽는지 모를만큼 바쁘고 급박한 생활이었습니다. 나이 마흔 다섯,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글자가 머릿 속에 어른거렸습니다.아이 돼... 죽다니 마누라랑 새끼 둘은 어캐 하라고....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지하도 벽에 기대고 생명의 동아줄인 듯 핸드폰을 부여잡았습니다


."여기요.. 살려 주십시요.. 종로 4가에서 창덕궁 시장 쪽으로 오면 있슴다."
"택시 타고 들어가세요."
"택시 탈 돈 없슴다."
"공중전화로 전화해 봐요 그럼. 위치추적 되게"

공중전화 박스가 어디 있을까. 지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봤지만 전화박스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얼음장보다 더 얼어붙은 땅바닥에 널부러져서 그는 그렇게 열 세 통의 112와 한 통의 119를 눌렀습니다. 하지만 112와 119는 택시 타고 들어가라고 충고하거나 이미 마비되어가는 혀를 움직이려 애쓰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이미 아저씨의 온몸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 버렸습니다. 다리를 펴는 것조차,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온전히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윙윙 그 독기를 더해 가는 겨울 바람의 이빨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의 몸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더 이상 웅크리지도 못했습니다. 불이 있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좋으니 불씨가 있다면.... 파들파들 떨던 아저씨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 기래... 라이타가 있었지."담배를 산 지가 오래 되어 사용한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라이터 는 얌전히 주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불길을 내뿜지 못했던 빨간 색 싸구려 라이터는 주인의 손이 닿자마자 환하게 켜졌습니다. 아.... 따뜻하구만.... 라이터의 불길에 손을 가까이 대자 거짓말처럼 손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그 온기는 아저씨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아저씨는 고향에서 쓰는 녹슨 난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먹음직스런 상을 벌려 놓고 비워 놓은 자리에 앉을 것을 채근하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보지 못한 아내와 아이들이었지만 어제 헤어진 듯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웃으면서 자신의 장기인 생선 튀김 요리를 건넸습니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던 시절 가장 먹고 싶던 요리였지요."고맙소. 내 이거를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지 아오? 조금만 더 기다리문 내 돈 마이 벌어서......"이 말을 하며 생선 접시를 받으려는 순간 라이터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화로불 타오르던 방이 아닌 창덕궁 근처 인적 드문 길거리의 지하보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 라이타 라이타.... 아저씨는 서둘러 라이터의 불을 당겼습니다. 노랗게 타오르는 촛불같은 불길 안으로 아저씨의 눈길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서러웠지요? 돈 떼 먹을까봐?"이제 아저씨는 석유난로가 눈이 시리만큼 퍼렇고 싯누런 불길을 지펴 올리는 현장 사무실 안에 서 있었습니다. 부천,동두천 등 이름도 낯선 도시의 건설 현장에서 일할 때 아저씨를 걸핏하면 중국놈이라고 욕하던 십장님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갈빗대를 부러뜨렸던 밀항선 선원들도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서 있었습니다."미안하게 됐어요. 우리도 먹고 살려다 보니까..... 미안해요 김씨. "


십장님이 밀린 임금 봉투를 수줍게 내밀었을 때 아저씨는 지난 3년간 쌓아 뒀던 모든 슬픔과 고통이 눈녹듯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 돈 있으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개 들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노라며 아내에게 한국제 화장품 하나, 아이들에게 최고급 한국산 학용품 세트 하나씩 들고 가도 아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일없습니다 선생님들...... 선생님들 원망 하나도 안합니다. 다 기럴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순간 아저씨는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웃음을 멈추고 예의 독기 서린 어투로 말을 내뱉은 것입니다."개새끼 지랄하네.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퍼뜩 눈을 뜨자 아저씨 앞에는 취객 두 명이 서 있었습니다. 망년회에서 거나하게 술 한 잔씩한 모양인 듯 얼굴이 불이 난 듯 붉었습니다. 쳐다볼 힘조차 없어 다시 고개를 숙이는 아저씨의 목덜미를 한 취객이 거칠게 잡아 올렸습니다.

"너 이 새끼 뭐하는 거야 지하도 앞에서.....히죽 히죽 웃으면서... 끄윽... 너 혹시 기름 붓고 불지르려는 거 아냐 이거?"
"아... 아님다. 고조... "
"아님다? 고조? 이 새끼 연변 놈이구만. 왜 라이타 들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사람들 겁주는 거야? 끄윽....이거 대구의 그 미친놈같이 불지를라구 그러는 거 아냐?"


대답할 힘도 없이 취객의 거친 손에 따라 몸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데 일행이 취객을 말려 떼어 놓고는 아저씨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취객의 고함 소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중국놈들 너희놈들은 돈 벌면 다 너희 나라 갈 거지? 이 개새끼들아. 너희 놈들 때문에 우리 인생이 이 모양이야 이 되노무 새끼들아."


한국에 온지 3년 동안 귀가 따갑고 머리가 어지럽도록 들었던 욕설을 다시 한 번 삼키면서 아저씨는 머리를 바닥에 눕혔습니다. 아까같이 차갑지는 않았습니다. 되레 폭신하고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지요. 하지만 아직도 살을 스치는 바람의 날은 매서웠습니다. 아저씨는 굳어가는 팔을 들어 라이터를 켜려 했습니다. 하지만 피식 피식 불꽃만 새어 나올 뿐 라이터는 타원형의 풍성한 불을 뿜어내지 못했습니다. 힘을 짜내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퉁겨 봤지만 라이터는 아저씨의 희망을 외면했습니다. 라이터를 그제야 찬찬히 들여다 봤습니다. 가스는 거의 떨어졌고 불꽃조차 갈수록 사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통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보였습니다. made in China


"너도 중국에서 왔구나. 그래도 너는 할 일을 하고 죽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벌 돈도 많은데....."


아저씨는 라이터를 소중히 가슴에 안고 누웠습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불을 밝혀 다오...... 아저씨의 소원이 통했을까요. 피식거리던 라이타에서 갑자기 파란 뿌리의 노란 불길이 확 하고 혀를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다시금 온몸으로 스며드는 라이터의 온기에 눈을 감았습니다.


"원섭아.... 원섭아....."한 한복입은 할머니가 아저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아저씨의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 대에 아저씨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중국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아저씨의 아버지를 낳았고 아저씨의 아버지는 아저씨를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저씨를 어릴 때처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아저씨도 어릴 때처럼 할머니에게 떼를 썼습니다.


"왜 중국으로 갔슴까 할마니. 죽어도 고향 땅에서 죽지 뭣하러 중국 가서 날 이캐 만들었슴까 할마니."
"묵고 살라고 갔다."
"내가 중국 사람입니까 조선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까. 난 다 아닙니다. 난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니가 어디 사람이건 그건 암것도 아니여. 넌 그냥 상놈이여. 없는 놈이여. 예전에 압록강 건너던 우리처럼 말여."
"할마니 나 중국놈이라고 욕하던 새끼들 다 때려 죽이고 싶소. 하나 하나 찾아 가서리 멱을 따고 싶소."
"죄 지은만큼 불쌍한 사람들이여. 그 사람들도 운제 니겉이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여. 그 사람들이 니를 잘못 미워한 것처럼 니도 그 사람들을 잘못 미워허면 쓰겄냐.... 불쌍한 내 새끼야. 이제는 다 잊을 때가 되았다......"


할머니는 포근하게 아저씨를 안아 주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랑 싸우다 머리가 터져 들어왔을 때 정성스레 된장을 발라 주시던 그 손길로, 혹독한 흑룡강성의 추위, 얇은 창을 거침없이 넘나들던 황소 바람도 감히 접급하지 못했던 그 품의 따뜻함으로, 아무리 강짜를 부리고 맹랑한 투정을 일삼아도 한 팔에 안아 주시던 그 넉넉함으로, 할머니는 아저씨를 보듬었습니다. 어슴프레 아저씨가 눈을 떴을 때 한없이 멀어 보이던 별이 시나브로 가까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장군의 차가운 갑옷 자락에 묻혀 버린 검은 도시의 불빛으로부터, 그 고통의 추억으로부터 아저씨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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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원섭(45·중국 흑룡강성 하천현)씨는 2000년 7월 밀입국 브로커에게 1천 만원을 넘게 주고 한국
에 왔다. 김씨는 밀항선에서 브로커에게 심하게 폭행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기도 했다.김씨는 대전, 동두천, 부천 등지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으나 빚을 갚지 못한 채 강제추방 대상이 됐다. 김씨는 서울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농성현장에 합류해 '재외동포법 개정 및 강제추방 반대'를 재중동포들과 함께 요구했다.작년 12월 8일 아침 밀린 임금을 받으러 나간 김씨는 다음 날인 9일 새벽 5시께 종로구 혜화동 도로변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부검결과 김씨는 폐렴과 간경화를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김씨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해 움직일 힘이 없다"며 핸드폰으로 112에 열세번, 119에 한번 등 모두 열네번의 구조요청을 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동사하고 말았다. 특히 김씨의 사망장소와 경찰지구대간의 거리가 불과 4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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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2.10 전주역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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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7년 12월 10일 전주역의 오류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 가장 드높은 관심을 보이고, 또 그 관심이 폭발로 이어진 시기를 고르라면 우선 해방정국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85년 2.12 총선에서 87년 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12 총선 때의 참여 분위기는 중학생들의 눈으로 봐도 엄청났다. 투표율 80퍼센트를 넘은 가공할 민의가 집권당을 향했고 특히 부산에서는 집권 민정당이 2등 턱걸이도
 못하고 고꾸라진 구가 많았다. 그즈음 양정 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는데 대략 이런 것이었다. “니는 김정수 (당시 신민당) 찍어라. 나는 강경식 (국민당)이 찍으께. 민정당은 안되는 거 알제.” 며칠 뒤 선거 결과가 그대로 나타났을 때의 놀라움이란..... 

그런 민의로 이뤄진 국회 임기 내에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부르짖었던 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마침내 국회에서는 새로운 헌법안이 제정됐다. ‘호헌철폐’는 이루어진 셈이다. 남은 것은 ‘독재타도’였는데 이게 만만하지 않았다. 야당의 두 거목이 웃통 벗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수십 년 한국을 지배해 온 파시스트 세력을 결집하고 온갖 공작 정치를 가동하며 그들의 재집권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돌아보건대 그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지역주의였다.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무대를 뒤흔들면서 김영삼 사퇴를 부르짖어 끝내 유세를 포기하게 만든 청년들 가운데에는 순수하게 김대중 후보를 애타게 지지하던 ‘민주 학생’들도 있었겠지만 민정당이나 안기부에 고용된 이들도 끼어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그에 앞서서는 대구에서 김대중 강연회를 따라다니며 김대중 사퇴를 외치던 정체모를 청년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신화를 창조했던 학생운동권도 우왕좌왕이었다. 전대협은 비판적 김대중 지지 입장이었겠지만 부울총련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호남 지역 대학생들은 당연하게도 비판적 지지 아닌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노태우 후보는 간교할 만큼의 훌륭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그 틈새시장에서 대목을 보았다. 

김영삼 후보는 끝내 광주 유세를 하지 못했지만 노태우 후보는 그때 처음 본 투명방패로 날아오는 돌을 막으며 연설을 진행했다. 방패에 부딪치는 돌들과 그 안에서 의연하게(?) 연설하는 노태우 후보의 모습은 확연한 채도 대비를 보이며 사람들의 망막을 어지럽혀 놓았다. 80년대의 그 어둠을 넘어, 그 죽음의 시대를 넘어 군바리 독재정권과 싸워 온 이들에게야 그건 당연한 응징이었고, 노태우라는 광주 5적의 하나인 자가 대통령 후보에 올라 그것도 광주에 와서는 표를 주십사 연설하는 자체가 허파가 뒤집힐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태우의 수난(?)이 그렇게 응당한 업보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심지어 특히 85년과 87년 군사독재를 그로기로 몰아넣는 뚝심을 발휘했던 평범한 부산 시민들에게조차 그랬다. “저리 할라모 아예 선거하지 말든가. 개헌해서 선거하자는 데 와 저라노.” 

1987년 12월 10일은 노태우 후보가 전북 군산과 전주에 오는 날이었다. 전북 민주화운동 세력들 사이에는 “동학 농민의 성지 전북에는 노태우가 발도 못붙이게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산이건 전주건 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전의를 다지고 있었는데 그 사령탑이라 할 전북대학교 총학생회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새전북신문>2006년 8월 21일자 실록 ‘전북 민주화운동사’의 내용에 따르면 그는 ‘민정당 청년 조직 책임자’였다. 그는 총학생회장 이하 간부들을 만나 “우리 쪽 대응이 이 정도이니 경거망동 말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으름장만 놓은 게 아니라 유세 현장의 경비 배치도 등까지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단지 이 정도니까 감히 어쩔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을까. 제발 와서 깽판 쳐 달라는 미끼였을까. 

12월 10일이 왔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6월항쟁 내내 ‘전리품’으로 모아 놨던 최루가스 분말이 분배됐고 철근 끝에는 폭죽이 묶였다. ‘시청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노태우 후보의 유세는 3시였다. 연단이 설치되고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인파 사이로 최루가스를 슬슬 뿌리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오후 1시 50분께 전북대 의대생이 던진 사과탄이 ‘동을 떴다.’ 학생들은 거세게 연단을 향하여 돌진했고 경찰은 죽을 힘을 다해 막았다. 경찰은 물론 민정당 청년 당원들도 가세했지만 진압은커녕 최후의 마지노선 사수에 전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그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드러내는 언론 플레이를 한다. “폭력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는 노 후보의 의지에 따라 오후3시 50분, 4시 30분, 5시 30분 등 세 차례에 걸쳐 유세장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방송사 카메라는 이 광경을 ‘부감’으로 찍어대고 있었다. 부감이란 높은 곳에 올라가서 현장을 잡는 그림을 뜻한다. 마치 중세 시대의 전쟁이라도 벌이듯 수백 명의 시위대가 각목을 들고 경찰의 벽에 맞부딪치는 스펙타클이 펼쳐졌다. 그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했을까. 이걸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연실색을 했다. 물론 부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아 역시 호남이다! 노태우는 저렇게 해도 싸!”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노태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전두환 똘마니라고 보고 외면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분위기는 결코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었다. 

87년 12월 10일의 노태우 후보 전주 유세는 저지됐다. 전날 광주에서 충돌 끝에 유세가 강행된 것에 비춰 봤을 때, 그 시위에 참가한 이들은 나름의 긍지(?)도 가져 볼만한 사건이겠다. 대학에 와서도 전주 출신 동기들에게 “우리는 노태우 유세를 막은 데여.” 하는 자랑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위 신문에 따르면 당시의 투쟁 주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주역 유세 저지 투쟁이 정권측이 지역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함정을 판, 기획 작품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선택은 그것뿐이었다. 열심히 싸우는 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말을 곱씹으면서 그 투쟁의 신심과는 별도로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의 날을 세우고 싶다. 노태우의 전주 유세 저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저 증언에서 나는 일종의 도취감을 본다, “정권측의 함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며, 우리는 정당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투쟁은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함정을 판 사람의 의도는 차치하고, 그 함정에 빠진 후과가 무엇인지는 없는 것으로 치고, 투쟁의 의의를 공유하는, 그리고 그를 ‘속 시원하게 여기는’ 동류의 사람들의 환호에 몸을 내맡기는 코뿔소같은 습관은 그 이후로도 유구하고 엄존한다. 그 영광은 그들과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의 테두리 내에서만 빛나고 그 덩어리 안에서만 박수 받는 것이었다.

P.S. 이정희 후보가 “속을 시원하게 해 줬다”는 말 참 많이 들었다. 나도 시원하긴 했다. 그런데 그 뒤엔 겁이 나고, 짜증이 들고 걱정이 됐다. 이정희 후보와 그 캠프가 전주역의 오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1908.12.11 신돌석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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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8년 12월 11일 신돌석의 마지막 날 

날이 찹니다. 삼한사온이라는 미덕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 겨울은 초입부터 예의가 없네요. 곳곳에 보일러 망가지고 가다가 미끄러지고 동장군한테 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별 탈이 없으신지 모르겠네요. 서울보다 좀 추운 곳이라....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바람 피할 집에 들어와 술 한 잔 하고 아랫목에 등 지지면 사람의 몸은 노골노골 녹아들면서 깊은
 잠에 빠지게 마련이죠. 셰익스피어의 맥베드인가요. 거기서 맥베드가 왕을 죽인 뒤에 환청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이 이런 거였죠. “맥베드는 잠을 죽였다. 맥베드는 다시는 편히 잠들 수 없으리라.” 너무나도 평화롭게 맘 푹 놓고 잠자는,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왕을 죽인 죄책감의 소산이었겠죠. 1908년 12월 11일 대게 많이 나는 영덕 땅의 한 집에서 한 걸출한 인물이 비슷하게 그 안온한 잠을 끝맺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신돌석이라는 사람이지요. 그는 대대로 영해 고을의 아전 노릇을 하던 집에 태어났습니다. 장가를 든 다음 갓을 썼다가 양반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대충 그 집안을 짐작해 볼 수 있겠죠. 영해라는 고을에 주목해 보면, 조선 말기 그야말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민란을 주도했던 이필제 (이 사람도 영화 주인공으로 적격인데)라는 사람이 대규모 민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 돌석은 그의 아호 같은 거였고 태호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그가 의병 항쟁을 벌이면서 쌓아간 전설 속에서 우리는 신태호 아닌 신돌석을 기억하게 됩니다. 꽤 교육도 받은 것 같고 한시도 지을 만큼 소양도 있었어요. 그의 한시 하나를 들어 볼까요.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땅에 누운 나무에 가로막힌 단군의 터전을 한하노라 
스물일곱 남아가 이룬 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이는구나. 

허동현 교수는 ‘단군의 터전’이라는 점을 들면서 그가 단순한 충군의식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즉 봉건적 충성보다는 민족적인 울분과 반외세 의식이 앞섰다는 뜻이겠죠. 사실 그게 대세여야 했을 겁니다. 갑오년의 그 수십만 농민 항쟁도 결국 봉건 통치에 대한 명확한 반대를 표하지 못했던 나라, 전국의 의병들을 기껏 모아 놨더니 의병 총대장이라는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총대장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나라에서 사실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결국은 허당에 질곡 이상의 존재일 수 있었겠어요. 거기다가 신돌석은 사정상 합류를 못했다지만 홍범도같은 평민 의병장은 제대로 끼워 주지도 않았고 상놈 선봉장이 양반을 능멸했다고 목을 쳐 버리는 일이 횡행하는 판이었으니 신돌석은 잔뜩 변죽만 올리고 만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울진 영덕 삼척 양양 등 오늘날 7호선 국도변의 고을들, 은 그의 주무대였지요. 울진 영덕에 뭐 볼 게 있었나 하지만 이쪽 고을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고 하네요. 그때 일본인들이 대게 맛을 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돌석이 경북 영양을 점령한 뒤 태백산맥을 넘어 울진으로 쳐들어가자 일본인들이 대거 탈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도 일본인들의 동해안 진출은 꽤 활발했던 것 같아요.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온 가족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가산을 털어 아들을 도왔고 매부도 처남도 모두 신돌석 휘하의 의병에 참여해요. 의병 소리를 듣고 이를 말리러 온 영해 군수 경광국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해요. “누가 그 의기를 그르다고 하랴마는 독단으로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말리러 온 것 뿐이다. 눈빛은 횃불같고 다리는 바다를 건널만 하니 참으로 장군이로다.” 실제로 일본군도 “그 어깨 힘이 대단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정말로 용력이 대단했던가봐요. 다른 의병부대가 괴멸되어 가는 동안에도 신돌석의 의병대는 재빠른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 지속적인 타격을 줍니다. 군대 해산 전의 대한제국 진위대도 신돌석을 잡으려들지만 쉽지 않았죠. 이후 내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로 용명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지요. 1908년 그는 휘하 의병대를 해산하고 차후를 기약합니다. “지금 적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고 있는데, 총탄과 화살이 퍼붓는 마당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던 내가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여러 강국에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하니 다른 이들처럼 만주로 가거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은인자중 절치부심 몸을 피해 다니던 그는 영덕의 한 마을에 사는 친척집을 방문합니다. 외사촌이라고도 하고 고종사촌이라고도 하고 이름도 왔다 갔다 하는 김가의 집이었지요. 사촌네 와서 마음도 몸도 풀려 버린 신돌석은 술 한 잔 하고 그대로 누워 간만에 편안한 잠에 빠집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맥베드가 왕의 친척이었던 것처럼, 때로 친척은 원수보다도 못하죠. 이 사촌들은 곯아떨어진 신돌석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도끼를 준비합니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거죠. 도끼를 들고 신돌석의 가슴팍을 내리찍는데 신돌석은 가슴에 도끼를 맞고서도 벽을 부수고 도망갔다고 해요. 하지만 그 죽을 힘을 다한 용력도 돈에 눈이 어두운 이들의 도끼를 당하지 못합니다. 사촌 3형제는 인간 백정이 되어 도끼를 휘둘렀고 일본군 수백 명도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신돌석은 사촌들의 손에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나뒹굽니다. 이 사촌들은 그 머리를 끊어서 일본군들에게 가지고 갑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군은 “생포해야 준댔지 누가 죽여 오면 준댔냐.”고 사촌들을 하릴없이 돌려보냈다고도 합니다만 그건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아마 그들은 현상금을 받아 챙겼을 겁니다. 

신돌석의 유일한 아들도 자라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일본인들이 독이 든 과자를 줬다는 전설이 있지요. 저 암살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요 나오지 않습니다. 장담컨대 그들은 일제 내내 떵떵거리고 살았을 것이고 그때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들 잘 교육시켜 아마 그 3대 4대 후손들은 지금 어디선가 방귀깨나 뀌고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아 여기서 친일파 타령하자는 건 아닙니다. 저는 21세기에 친일파 타령하는 거 딱 질색이고 그걸 지금 청산하자는 건 혁명하자는 거보다 더 어렵다고 보니까요. 하지만 걸출한 인물 하나가 간만의 꿀같은 잠 와중에 사촌의 도끼에 머리가 까여서 짐승같은 소리 지르며 벽을 부수고 뛰어나가고, 그를 쫓아 도끼 휘두르며 따라가는 사촌들을 떠올리면 매우 스산해집니다. 그게 1908년 12월 12일이었지만..... 저는 12월 11일 마지막으로 두 다리 뻗고 잠자리에 든 신돌서의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로 그를 기억해 봅니다. 그 달디 단 잠을 그는 참혹하게 끝맺어야 했습니다.

197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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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12월 12일 12.12의 비극 


역대 대통령 이름을 적을 때 저는 대개 뒤에 대통령을 붙여 줍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독재자이긴 했으나 어쨌건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됐거나 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저는 대통령 호칭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태우도 광주학살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직선 대통령이고 그 뒷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하지만 딱 한 사람 
전두환만큼은 저는 대통령 호칭을 여간해서 붙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대한민국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고 휴전선 이남의 공화국 영토를 제 식솔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던 광주의 흡혈귀이자 그 이후 펼쳐진 80년대 불바다의 발화자(發火者)에게 공화국 대통령의 칭호는 아무리 양보해도 돼지 앞의 진주고 개발의 편자기 때문입니다. 

시바스 리걸과 여가수와 여대생을 앞에 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가 박살난 후 발생한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대한민국 군 장성들은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현확 부총리가 헌법에 의해 규정된 통치권자 승계 원칙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자리에 배석해 있던 수십 명의 군 장성들은 벌떡 일어나 최규하 국무총리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비록 독재자의 수족 노릇을 충실히 하던 군인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사병이 아닌 공화국의 군인임을 증명했던 거겠죠. 

하지만 원래 어느 역사에서든 아름다운 순간은 길지 않은 법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도 되지 않아 12.12라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군사 반란이 일어나니까요. 전두환 이하 육사 11기들과 그 똘마니들이 ‘거사’에 성공한 후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하는 모습이 자료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름 목숨을 건 일이 끝나서 그런지 노는 꼬라지들을 보면 마치 시험 끝낸 어린아이들 같더군요. 스스로 위계질서를 뒤엎고 군령을 거역한 이 깡패 군인들은 그렇게 즐거워했지만 그 순간 온몸의 조각조각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려는 하나회 인맥에 맞서서 대한민국 국군 통수 체제를 지키려던 두 장군.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뒷 이야기는 무슨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 합니다. 우선 장태완 소장부터 볼까요. 

드라마 속에서 카리스마 성우 출신 김기현씨의 열연으로 유명한 바로 그 멘트 “ 이 반란군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전차 몰고 가서 너희들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라고 일갈하던 호랑이같은 장군이었지만, 이미 그 호랑이의 네 다리는 하나회 출신 늑대들이 다 물어뜯어 놓은 뒤였지요. 장태완 장군이 체포된 후 장군의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합니다. “모반자가 득세한 세상에 충신이 살아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넉 달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그 횡액을 당한 후 80년에 고3이었습니다. 보안대원이 집안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서울대 자연대 수석입학을 해 유폐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기쁘게 했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비극과 전두환 시대의 암울함에 고민하던 아들은 홀연 집을 나갔다가 할아버지의 묘소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장태완 장군은 평생 동안 “반란을 막지 못하고 가족 3대를 망친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살았고 2010년 한많은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써 끝난 게 아니었지요. 올해 1월 17일 장태완 장군의 부인이 투신자살로 생을 끝맺은 겁니다. 남편이 먼저 간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지요. 그 슬픈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1월 18일은 전두환의 여든 한 번째 생일이었고 29만원 전재산의 노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답니다. 참 얄궂어도 이렇게 얄궂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휘하 여단장들이 죄다 신군부에 가담한 것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공수여단을 출동시키며 반란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천상 군인이었지요. 6.25 참전 장교였고 5.16 때에는 쿠데타에 동의하지 않아 이른바 혁명 주체 세력에게 곤욕도 치르기도 했고 아내에게는 “나는 군인으로 끝이야. 군인 끝난 뒤에 무슨 공사 사장 같은 거 절대 안 해. 각오해.”라고 몇 번이나 되뇌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자식처럼 기른 부하들에게 참혹하게 배신당합니다. 

그 곁을 지키던 유일한 사람은 김오랑 소령. 육사 25기였던 김오랑 소령은 12.12가 일어나기 전 그를 아끼던 누군가에게 귀띔을 받았다고 합니다. 알아서 몸을 피하라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그는 그를 뿌리치고 권총만 가지고 정병주 사령관을 호위하다가 M16 소총의 난사를 받고 죽습니다. 그의 시신은 허술하게 화장돼서 가매장됐다가 국립묘지로 가게 되는데 그 서슬 푸른 전두환의 시대에서도 “김오랑의 군인 정신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동기들과 그 상관들의 단호한 의지 덕에 국립묘지로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부인은 충격으로 실명하고서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 둘을 딸로 거두며 살다가 남편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정병주 사령관이 의문의 자살을 한 후 따르기라도 하듯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2.12 당시 신군부측 병력이 국방부를 장악을 기도했을 때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휘하의 경비병력에게 국방부 사수를 명령했지요. 그러나 언뜻 봐도 살기 어린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며 쳐들어오자 이미 기가 죽어 버린 경비병들은 총을 버리고 손을 듭니다. 하지만 제대를 석 달 앞둔 병장 하나는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고 했고 병장이 지지 않고 그들에게 발길질을 한 순간 공수부대원들의 총구는 불을 뿜고 맙니다. 광주 조선대학교 2학년 재학 중 입대했던 정선엽 병장은 5개월 뒤 그의 사랑하는 고향을 피로 물들일 야수들의 손에 그렇게 죽음을 당했죠. 

12.12는 단순히 전두환이 권좌에 오른 첫 계단에 불과한 사건이 아닙니다. 패거리들의 야욕이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선의를 짓밟아 버린 사건이었고, 힘으로 정의를 유린한 일이었고, 뻔뻔함이 우직함을 꺾어버린 일이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렇게 나쁜 놈들은 호의호식 자손만대에 번성하고 뭔가를 지켜 보겠다고 용기를 낸 사람들은 자신을 비롯한 ‘3대’에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운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던 사건이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을 홀로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김오랑 소령은 키가 작았다고 해요. 정병주 사령관은 그를 두고 “작지만 큰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2월 12일은 작지만 큰 사람들이 한없이 커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소인배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명예를 빼앗기고 상처받아야 했던 날입니다.

1982.12.14 죽음의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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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12월 14일 죽음의 촬영 

한국 언론의 선정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는 언제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저는 5공 때를 들겠습니다. 언론기본법이나 보도지침의 존재에서 보듯 언론 통제의 고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서 정치적 위험성 없는 선정주의는 잔뜩 고무되고 장려되었으니까요. 물론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비길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때는 언론이 인터넷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미주알고주알 없는 말 있는 사실 총망라해서 신문지상에 노골적으로 보도되곤 했으니까요. 

그 가운데 최악의 보도 가운데 하나가 1982년 12월 14일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이동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일러 배관공으로 기십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살았지만 150만원짜리 일제 카메라를 구비하고 있을 정도로 사진 찍기에 대한 열정을 발휘했어요. 그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운했습니다. 조실부모하고 숙부 집에서 자랐고 잦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면서 점차 범죄의 세계에 입문했죠. 서른살이 되기 전에 별 세 개를 달았던 그는 우연히 갖게 된 카메라를 통해 사진의 세계에도 입문하게 됩니다. 

취미로 찍는 정도가 아니라 의외로 재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진전에서는 은상도 받았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그 소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닭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지요. 그 뒤로 그는 누드 모델들을 즐겨 찍는데 그의 취향은 매우 기괴할만큼 독특했습니다. 칼에 꽂혀 죽어가는 사람이라든가 변태적 모습이라든가 하여간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세계(?)를 구가했죠.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차원으로까지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넓히는 생각에 접하게 됩니다. “죽음은 가장 숭고한 순간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고 싶다.” 

영감(?)이 떠오른 예술가는 그를 화폭에 옮기든 종이에 끄적이든 껌종이에 긁든 구체화시키기 마련이죠. 그도 그랬습니다. 2남 1녀의 아버지였던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엽기적 행태의 충실한 조력자 (모델)이 되어 준 착하디 착한 아내 외에 이발소 아가씨를 사귀고 있었는데 이 아가씨를 상대로 그가 생각하는 ‘숭고함’을 구현하기로 맘 먹습니다. 1982년 12월 14일 야산으로 그녀를 유인한 이동식은 썰렁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는 그녀에게 감기약이라며 알약 몇 알을 건넵니다. 그녀는 아무 의심 없이 그를 삼켰고 그 이후 그녀는 온몸이 뒤틀리고 마비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감기약은 다름아닌 청산가리였죠. 내가 왜 이러냐고 부르짖다가 끝내 혀까지 굳어버리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꿈틀거리는 동안 이동식은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피해자가 사망한 다음에는 그 옷까지 벗겨 낸 뒤 누드(?) 사진까지 찍은 뒤에야 낙엽과 흙으로 그녀를 덮어 버립니다. 

며칠 뒤 동네 꼬마들이 산에 올라와서 총싸움을 하다가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녀의 주변을 탐문하던 경찰은 어렵잖게 이동식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게 되고 그를 추궁하게 되지만 당연히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게 됩니다. 그의 집 합판 벽 안에서 죽음의 촬영 사진 필름을 발견한 거죠. 이걸 내밀자 이동식은 연출사진이라고 우기다가 범행을 자백합니다. 

이후 신문들은 대서특필을 합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인데 조간신문에 이발소 아가씨가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필름 한컷 한컷 수십 장이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청산가리를 먹으면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사춘기 성적 호기심 왕성한 중학생들은 그 녀석이 시체를 두고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무슨 변태 중학교 나왔냐고 나무라지는 마세요. 순진한 중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건 언론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사진은 인터넷상으로 돌아다니고 원판은 프랑스인가 일본인가 외국에서 사 갔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돈을 지불했는지는 몰라도) 여기에도 올릴까 하다가 관둡니다. 

그런데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관 한 명은 후일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이동식에게 희생된 것이 이발소 아가씨 한 명만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이동식의 수첩에는 그의 사진만큼이나 그로테스크한 시(?)나 메모들이 그득했는데 토막 살인을 암시하는 내용도 있었고 다른 희생자들을 묘사한 것도 있었다는군요. 또 그의 전처도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계속된 추궁 끝에 그는 희생자가 묻혀 있는 곳을 자백했다고 합니다. 전경 의경 총동원돼서 삽질을 하려는데 저 높은 곳에서 이제 그만하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이유는 나라 망신. 이 사건이 해외토픽에 실린 게 화근이었습니다. “88올림픽이 열리는 한국에서 사람한테 청산가리를 먹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찍는 일이 벌어졌다!” 88 올림픽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던 당시 한국의 고위층들은 이 사건을 하시라도 빨리 덮고 싶어했고 이 일이 연쇄살인범으로 확대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아 ‘덮어!’의 명을 내린 거죠. 물론 이 사실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고 수사본부는 해체되고 이동식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이동식의 엽기성을 주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영철과 강호순도 목격한 터에 그때라고 그런 놈이 없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만큼 두려운 것은 그때의 언론과 권력입니다. 언론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도 없이, 피해자에 대한 예의도 없이, 독자에 대한 배려도 없이 최대한의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그 죽음의 촬영 사진들을 지면에 도배했습니다. 그 사진들은 보도지침을 어길 이유도 없고 권력의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돈은 잘 벌게 해 줄 수 있는 껀수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건이 권력의 비위를 건드리는 해외토픽으로 승화된 순간 수십 명의 숨겨진 희생자가 있다고 의심되는 이동식 사건은 수면 아래로 들어갑니다. 범죄자들의 범죄적 성향도 무섭지만 저는 이것도 그에 못지 않게 무섭습니다. 

전두환 때였으니 가능한 얘기였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전두환 때는 전두환의 군부 똘마니들만이 문제였지만 그 자리에 자본과 재벌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들어선 이상 그 힘은 더욱 강하고 그 영향력은 더욱 넓으며 그 취사선택의 간사함이 더욱 자심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아니겠습니까. 자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언론의 자유는 무한대를 달리지만 그에 역하는 기사와 사진과 동영상은 기자들의 눈에 띄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아무개가 누구랑 뜨거운 관계라면 사생결단 쓰레기통에 숨고 중국집 종업원으로 변장해서라도 사실을 캐내는 언론이 몇 명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엄동설한에 수십 미터 높이의 철탑에 올라가 그 답답함을 호소해도 오불관언 소 닭 보듯 하고 있는 모습은 과연 우리가 5공때보다 나아진 것인지를 의심케 합니다. 군부건 자본이건 자신들의 이익과 기호에 맞게 언론을 부리려 들고 언론이 그에 봉사할 때 남는 것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이동식의 사진같은 ‘특종’과 ‘나라 망신’이나 ‘국가 경제’라는 미명 하에 파묻히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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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2.15 통일주체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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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흔히 유신 시대를 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같은 것 없이 종신집권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엄연히 대통령 임기도 있고,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임기는 6년으로 프랑스보다 오히려 1년 적었고 대통령 선거도 치러졌다. 단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손이 아닌 매우 기이한 이름의 ‘선거인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름하야 ‘통일주체국민회의’. 요즘 새누리당이 들으면 당장 “종북주의자!”라고 거품을 물 이름이겠는데 유신헌법 선포 후 부랴부랴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이뤄졌다. 1972년 12월 15일이었다.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초대 대의원 2,359명이 확정되었는데 직업별로는 농업이 전체의 48%였다. 이미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1972년에 갑자기 왜 대통령 선거인단의 절반이 농민이 되었는지 그 조화속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거 이외에도 통일 정책을 심의하고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하는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플라스틱 음식같은 기관이었다. 전시용의, 그리고 먹을 것 없는. 

12월 15일 선거를 통해 결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차 회의를 거쳐 대통령을 선출했다. 2359명의 대의원이 만장한 가운데 형식 다 갖추고 폼 다 잡은 ‘선거’가 이뤄졌다. 이윽고 발표된 선거 결과는 그들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성표가 2357표에 이른 것이다. 2표는 기표에 실수한 무효표. 북한의 100% 투표 100% 찬성에 맞먹는 선거 결과였다. 아마도 명색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진 선거판에서는 기록적인 득표율에 해당할 것이다. 박정희는 이 99.9퍼센트의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 뒤 온갖 긴급조치를 떨어뜨리며 국민들의 입을 용접하고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6년 뒤 또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힌다. 

이번에는 2581명으로 구성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축사’를 한다. “친애하는 대의원 여러분........ 이제 제2대 대의원 여러분들은 유신한국의 새 역사 창조의 기수로써 또한 통일 대협달성을 위한 민족 주체세력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972년 우리가 10월 유신을 단행한지도 언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급변하는 내외정세에 직면한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양상은 어떠했던가, 이러한 문제는 아랑곳도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낭비와 비능률과 무질서가 만연하고 있었고 정파 간의 극한투쟁과 선동정치의 폐해 속에서 무책임한 인기 전술 등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내일의 진로도 정립하지 못한 채 목전의 일에만 급급하는 풍조가 우리사회에 구석구석에 가득 차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국보간난의 시기에 국정의 능률을 극대화해서 국력을 조직화해서 내외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나가고자 우리는 마침내 구국적 일대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습니다.” 

선거를 앞둔 대통령의 연설이 아니라 휘하 병력을 모아 두고 자신의 부대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사단장의 훈화라 할 것이다. 이에 감명받았는지 제 2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무효표를 50퍼센트 줄이는 탁월한 성과를 가져왔다. 두어 달 뒤 실시된 체육관 선거에서 2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2577명이 찬성하고 단 1명만이 무효표를 던졌던(?) 것이다. 이 시기를 두고 우리는 4 ‘공화국’이라 일컫거니와 왕국에서도 벌어지기 힘든 ‘선거’가 그 공화국에서는 펼쳐지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나마 용기 있는 사람이 그 삼엄한 체육관 내에서 100퍼센트 찬성의 오점을 남기지 않고자 ‘박정히’라고 오기하여 무효표 하나를 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치도곤을 맞았다고 전한다. 

출마자가 한 사람이니 그에 반대한다고 적어도 ‘반대’가 아닌 무효로 처리되었을 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던 최규하가 대통령 직에 오를 때에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렸는데 이때는 84표라는 사상 최대(?)의 ‘무효표’가 나온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오지만 전두환 이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 봄은 또 다시 얼어붙는다. 광주의 피바람이 한바탕 전국을 숨죽이게 한 뒤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다시금 유신 때의 ‘군기’를 되찾는다. 작년까지 별 두 개였던 주제에 갑자기 별 네 개를 달고 전역한 전두환 장군에게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무효표는 1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철권 독재자는 이렇게 국민의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장식품이자 요식 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부여하고 99.9%의 찬성률을 습득하여 제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러고 대의원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었고 여전히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먼 나라 얘기도 아니고 먼 과거 얘기도 아니다. 87년 6월 항쟁은 그 국민의 권리를 다시 되찾겠다는 국민들의 항거로 점철된 사건이었다. 

놀러 가거나 늦잠을 자거나 귀찮아서 내팽개친 우리의 한 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무효표 1-2표를 제외하고 대통령 각하 만세를 부르짖는 이 희한함을 거부했던 손모음과 땀방울이 빚어낸 열매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바로 그 시대, 대통령 옆에서 환한 웃음 지으며 손 흔들던 ‘퍼스트 레이디’가 다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 있다. 그리고 그녀는 무효표 1표 99.9퍼센트의 찬성률로 대통령이 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정치의 이유라고 우긴다. 이를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희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그때 국민들은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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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박근혜 후보는 '여성대통령'을 논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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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는 선거 홍보 문구로 '여성 대통령'을 논할 자격이 없다!!!


- 고려대 민주동우회 여성 동문들의 성명서-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 여성 동문들은 굽은 것 바로 펴고 억눌린 것 쳐들기를 의무로 알며 자유, 정의, 진리의 교훈을 들고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려 노력해왔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제도적, 법률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고 이들의 능력을 동등하게 발휘할 수 있게끔 불공정한 법과 제도 등 사회 현장 곳곳에서 스스로의 삶을 위해 현실의 벽과 온 몸으로 부딪히며 싸워온 이들이다.

 

 박근혜 후보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라는 선거 홍보 문구를 들고 나섰다.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가 대통령이었던 시절부터 국가권력의 온갖 비호를 받으며 독재자 박정희의 딸로 살아왔다. 60여년간 박근혜 후보는 물려받은 권력과 그 권력을 이용해 거져 얻은 장물 유산들을 받아 살아오며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부터 핵심 권력에 근접한 최근에 이르기까지 핍박받는 여성농민, 여성노동자등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위해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여성이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기를 누구보다도 원하는 여성이다. 부패가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자기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여성인 우리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 후보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광고문구로 이용하는 것을 보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라는 홍보 문구를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고려대 민주 동우회 여성 동문 일동-

1902.12.16 유관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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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u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의 생일 

원래 누구의 생일은 잘 얘기하지 않아요. 산 사람은 생일을 기념하는 법이고 죽은 사람은 기일을 기억하는 법인데 그래도 역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경우보다는 돌아간 경우가 많으니까요. 아마 산하의 오역이라는 카테고리를 형성한 뒤 누구의 생일 얘기한 건 세 번째일 겁니다. 첫 번째가 김진숙 위원의 생일. 그 다음이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 그리고 오늘은 유관순 누나
의 생일입니다. 

우선 신화부터 걷어 냅시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건 사실 해방 이후라고 합니다. 일제 시대만 해도 유관순의 이름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1919년 기미년 3.1 항쟁 때 죽어간 7천 5백명 (통계) 속에서는 유관순 이상으로 영웅시되어야 마땅한 이름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겠지만 해방 이후 남한을 손아귀에 넣었던 우익들에게는 그럴 수 없이 영웅시하기 좋은 조건에 있었다는 것도 큰 이유죠. 기독교인에 우익의 거물 조병옥의 고향 사람이었고 일찍 죽어서 변절하지도 않고 사회주의 따위에 빠지지도 않았죠. 나이도 얼마나 좋아. “한국의 잔다르크”에 딱 걸맞게 열 일곱에 독립만세 부르다가 열여덟 우리 나이로는 열아홉 나이에 옥사했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생일을 기억하고 싶어요. 유관순 괴담을 기억하세요? 나 초등학교 1-2학년 때 유명했습니다. 그 얼굴을 반을 가리면 남자 반을 가리면 여자로 보인다는 괴담으로부터 꼬리가 몇 달린 여우였다는 둥 사진의 반을 가리고 보 다가 별안간 초상화의 눈을 크게 뜨면 죽는다는 둥. 그런데 그녀를 남자로 보이게(?) 만드는 사진의 정체(?)는 사실 슬픈 사연이 서린 사진입니다. 그 사진은 감옥에서 찍은 거예요. 그리고 여자라고 사정 돌보지 않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 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의 사진이죠. 그러니 반을 가리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일만큼 그 인상이 험악했던 거죠. 

충무공 이순신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우상화됐다고 해서 그 빛남이 줄어들지 않듯 유관순도 그래요. 제가 2000년도에 3.1절 기념 아이템을 찾아 헤맬 때 유관순의 동기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1902년 생이 100세를 맞기 전이었으니 나이 아흔 여덟의 할머니셨죠. 그분은 유관순의 룸메이트였다고 합니다. 이미 치매가 와서 아침밥 먹었는지 기억도 못하셨지만 90년 전의 ‘관순이’는 명확하게 기억을 하더군요. 기억에 남는 말은 이겁니다. “관순이는 불쌍한 사람 보면 지나치지를 못했어. 뭐라도 쥐어 주거나 덮어 줬지. 우스개 소리도 잘하고 얼마나 명랑했다고. 화가 나면 충청도 사람답잖게 말도 따다다다 쏴 대기도 했고.” 

애국소녀 이전에 독립운동의 아이콘 이전에 유관순은 정의감 넘치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는 청년 학도였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파고다 공원에서 감격 속에 읽혀진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그녀는 열정적으로 참여했어요. 당시 이화학당을 책임지고 있던 교장 프라이가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드러눕자 차마 그 위를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친구들 몇과 함께 담을 넘어 독립 만세를 부르던 열혈 소녀였지요. 만세 시위에 질려 버린 일본인들은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건 일본인들의 실수였죠. 독립만세의 바이러스를 조선 각지에 뿌려 놓은 셈이었으니까.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크게 실망합니다. 서울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동포가 만세 부르고 죽어가고 있는데 서울에서 코 닿을 천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니. 유관순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을 끌어들이고 고향의 교회와 유림들, 그리고 인근의 진천, 청주 등 다른 도시까지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지요. 

아마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19년 음력 3월 1일 양력으로는 4월 1일 전날 밤일 겁니다. 캄캄한 밤 나이 열일곱의 소녀는 오늘날 독립기념관을 품에 안고 있는 매봉산 정상에 올라 봉홧불을 들어 올리지요. 이를 신호로 목천, 천안 ,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여섯 고을 24곳의 산봉우리에 봉화가 올랐답니다. 그때 소녀의 가슴은 터져 나갔을 겁니다. 조선은 살 수 있다. 대한은 이렇게 불타오를 수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검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껑충껑충 뛰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저 산에도 그 산 넘어 또 산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이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만세시위로 골머리를 앓아 온 일본 경찰은 글자 그대로의 살인적인 진압에 나섭니다. 유관순의 만세 시위를 고무하고 도와 주었던 김응구는 일본도에 맞아죽고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습니다. 유관순은 옥에 갇힌 지 1년이 지난 1920년 열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구요. 만세 시위 1주년인 3월 1일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 부르다가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끝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토막이 났다는 건 좀 과한 소문이구요) 

유관순의 생일을 맞아 ‘참여’라는 단어를 고민해 봅니다. 우리 나라의 국경일 가운데 저는 3.1절이 가장 값지고 가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예 근성이 충만하고 자신을 위해주먹 한 번 쓸 줄 모르는 비참한 백성들”로서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없이 이웃 나라에 스르르 병합되어 버린 별 볼 일 없는 나라의 인민들이 “우리는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우리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며 미국, 러시아, 중국, 만주 등 그들이 살아가던 모든 곳에서 들고 일어났던 3월 1일은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혁명’에 가까웠습니다. 일제의 통계만 봐도 사망자만 해도 7500명이 넘는데 그게 어찌 ‘운동’일라구요. 그리고 그 혁명은 평소에 전혀 그렇지 않아 뵈던 사람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은 참여로 물길이 되고 홍수가 됐습니다. 

1902년 12월 16일 태어난 유관순은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과연 지금 우리가 올인해야 할 ‘참여’는 무엇일지 고민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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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8 절박했던 밤 뜨거웠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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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2년 12월 18일 간절했던 밤 뜨거웠던 밤

 

 

12월 18일 선거 전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노무현 후보의 마지막 명동 유세. 겨울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를 향해 환호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노사모를 비롯한 노무현의 열혈 지지자도 있었지만 단일화를 위한 여론 조사 끝에 노무현에게 패배한 이래 노무현을 도와 온 정몽준의 지지자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차기 대통령 정몽준의 피켓을 들고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 정몽준 대통령을 외쳤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엄청난 꽹과리 소리가 되어 그들을 덮쳤다. “속도위반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대찬 여성 추미애 의원도 있고 국민 경선을 끝까지 함께 지켜온 정동영 의원도 있습니다.!”

 

이 말에 정몽준 의원의 얼굴은 냉동인간으로 변해 버렸다. 새 정권의 주인은 못돼도 2대 주주는 족히 될 것이고 차기 대통령 후보만큼은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던 이 재벌집 도련님은 즉시 식솔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우래옥 냉면집에 가서 회합을 가진 뒤 10시 반 ‘노무현 지지 철회’를 발표한다. 우래옥발 태풍은 전국을 덮친다. 가장 신명나서 말춤을 춘 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만들어 뿌렸다. 그 호외에 실린 사설의 제목은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 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 제목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글자 한 자 한 자에 배어 있던 비아냥과 조소의 냄새는 지금 떠올려도 비릿하고 퀘퀘하다.

 

그날 나는 선거 다음 날 휴가를 낸 터였다. 투표를 끝내고 스키장으로 가 아들내미 스키를 가르칠 계획이었기에 장거리 운전을 하려면 잠을 자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노무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몽준이 왜 삐졌는지 노무현이 정몽준 집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까맣게 모른 채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밤 11시 30분. 짜증이 확 일면서 전화를 받았는데 웬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목소리로 대충 신원 파악을 하고 뭘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뒤 계속 울었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잠이나 자. 진인사대천명이지. 잘 된 걸 수도 있어. 대충 진압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그날 나는 전화 열 통을 받았고 수십 통의 문자를 받았다.

 

“정몽준 개새끼는 끝내 개새끼다.” “민주노동당원! 내일만은 2번 찍어 줘.” “목숨 걸고 투표! 그래도 이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너무 원통하다. ” 그 가운데 압권은 잠이 깬 나머지 접속하여 발견한 선배의 이메일이었다. 제목은 “나를 아는 모든 분들게.”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자신의 주소록을 총동원하고 명함첩까지 가져다 놓고 일일이 기입하여 보낸 수백 통의 메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 메일에는 동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2000년 총선 당시 부산 북구에서 청중 하나 없는 유세장에서 눈물겹게 연설하던 노무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선배의 메일에는 이런 짤막한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동영상을 보아 주십시오. 이 사람을 보아 주십시오. 우리가 저 용기와 희망을 잊어버리고 살되 잃어버리지는 않았음을 보아 주십시오."

 

나는 그 이후 그 선배를 개인적으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그날 그는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 메일 주소 오타 날까봐 또박또박 타이핑하면서 울었을 것이다. 이렇게는 안된다. 이렇게는 안된다. 나에게 전화하고 다른 이를 깨우고 문자를 날리고 조선일보 호외 보며 발 동동 구르던 이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뭉쳐진 뜨거움이었다.

 

그것들이 노무현을 위한 것이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권력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라고 한 노무현의 말에 무릎을 쳤고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체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라는 말에는 가슴을 쳐야 했고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다!”라고 내지르는 절규에 “그래 맞다!”라고 가슴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으아아 소리를 내질렀던 이들은 노무현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떨쳐 일어선 것이었다.

 

문자와 전화는 밤새 한반도 남단의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 간절한 밤 뜨거운 밤을 기억해 보자. 그래서 노무현 당선시켜서 무슨 좋은 영화를 봤냐는 식의 질문도 가능하겠다. 그 질문의 취지에 동의하고 그가 준 실망감의 크기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그 간절함과 뜨거움의 기억은 그만의 것도 아니었고, 그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그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사랑이 배신당했다고 그 사랑의 추억이 죄다 헛된 것은 아니듯,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 정치에 대하여 안달복달 애면글면 간절하고 절박하게 손을 모으고 전화를 돌리고 문자를 두드린 그 기억은 소중한 자산으로 남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내일은 투표일이다. 나는 2002년에는 늘어지게 잠들 수 있었지만 오늘 밤은 좀체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늘 박근혜 후보가 마지막 유세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잘살아 보세의 신화를 이루겠다.”고 외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질려 버렸다. 저분은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날의 부와 특권을 소유한 이들이 그 힘과 재산을 형성한 그 방식으로 다시 나라를 운영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는 느낌에 그만 오금이 저려 버렸다. 다시 한 번 절박해졌으면 좋겠다. 뜨거워졌으면 좋겠다. 투표하자. 투표하게 만들자. 최소한 ‘잘 살아 보세’에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아이들을 싣지는 말자. “어떻게 잘 살 수 있죠?”라는 질문에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면!”이라고 답할 공산이 큰 이가 우리 대통령이라는 건..... 좀 끔찍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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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12,19 크리스마스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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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일지 모를 산하의 오역 

ㄴ1843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 캐롤 출간, 그리고 우리의 12월 19일 

찰스 디킨스는 영국이 바야흐로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던 19세기에 유성우처럼 출현했던 작가군들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중의 하나입니다. 디킨스라고 하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올리버 트위스트’ 하면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마련이죠. 소설은 좀 가물거리더라도 캐롤 리드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올리버!”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죠. 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양산되었지만 그늘 속에 방치되었던 어두운 풍경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수프를 더 달라고 했다가 혼찌검이 나는 구빈원 (고아 수용소같은)이나 퀴퀴하기 이를데없는 런던의 빈민가와 잔인한 범죄의 소굴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불쌍한 소년의 모습은 사실 디킨스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디킨스의 어린 시절 그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간 적이 있었고 12살의 디킨스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이상 구두약 공장에서 얼굴이 누렇게 뜰 때까지 일해야 했으니까요. 그런 생생한 체험들은 그의 소설 곳곳에 굵직하게 틀어박혀 있습니다. 이 디킨스가 남긴 소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하나가 1843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출간됩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었죠. 

천하의 구두쇠에다가 돈이 아까와 난로도 때우지 않고 일하면서 직원을 들들 볶는 스크루지 영감에게 그와 비슷한 성격이었던 동업자 말레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세 유령이 방문할 것임을 알려 주죠. 그 유령은 스크루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 줍니다. 스크루지는 자신의 과거를 여행하면서 아름답고 순수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과 자신이 구박해 마지않던 조카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엿보면서 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쳐지는지를 확인하며 아연실색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한 소년의 예정된 죽음을 듣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유령은 쾌활하면서 달변이었던 이전의 유령들과는 달리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과묵한 유령이었고 그는 스크루지를 그의 묘지 앞으로 안내합니다. 그 묘지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한평생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구두쇠 스크루지가 여기에 잠들다.” 스크루지는 이에 울며불며 유령에게 매달리다가 잠을 깹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하죠. 

저도 가물가물해서 기억을 더듬어 봤습니다. 그런데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이렇게 한 구두쇠의 변신 스토리만 있는 건 아니에요. 군데 군데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이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두 번째 유령, 즉 현재를 보여 주던 유령이 스크루지와 헤어질 무렵, 그는 품 안에서 두 아이를 풀어 놓습니다. 사내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 둘은 엄청나게 악을 쓰고 떼를 쓰면서 다시 유령에게 달라붙으려고 발버둥치는데 그 몰골이 워낙 흉악하여 스크루지는 그들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유령은 이렇게 답합니다. 

““사내아이는 ‘무지’ 계집 아이는 ‘빈곤’이라고 한다네. 이 두 아이를 조심해야 돼. 그런데 위험한 건 사내아이 ‘무지’다. 무지 다음에 오는 것은 멸망이거든 ” 유령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두 존재로 무지와 가난을 설명합니다. 그 중에서도 무지를 더 치명적인 존재로 꼽지요. 딴은 그렇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할 것이라지만 ‘잘 살아 보세’ 하는 노력과 ‘안되면 되게 하라’는 깡다구로 극복되기도 할 거고, 실제 그런 사례는 많이 발생했지요. 하지만 무지는 다릅니다. 단순한 지식의 부재만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음, 알고 싶어 하지 않음, 알아도 모르는 체 등 당면한 현실과 깨쳐야 할 지혜에 대한 외면의 총합인 무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는 디킨스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일 테니까요. 2007년 12월 19일 ‘부자 되세요’를 내세운 이를 뽑았던 한국인들이 그 재앙을 경험한 이후 2012년 12월 19일 다시 한 번 ‘잘 살아 보세’의 신화를 부르짖는 이에게 자신들을 맡긴 것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구요. 

어쨌든 다시 훑어 보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흥미롭습니다. 디킨스는 이 소설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1주일도 안 남았던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수천 부가 팔려나갔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 소설의 강독회가 우후죽순처럼 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한 공장주는 이 소설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유급 휴가와 칠면조 하나씩을 선사했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감동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한 분 계십니다. 오늘 밤잠을 못 이룰 대통령 당선자입니다. 

어차피 잠 못 주무실 거, 기왕이면 그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려 주는 유령 하나씩이 나타나 그분의 앞길을 밝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 노력 이전에 그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였는지, 그 공에도 불구하고 치를 떨며 싫어하는지를 소상하게 살피고, 오늘 멘붕에 빠져 술을 푸며 땅을 치는 49퍼센트의 한국인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철탑 위에 올라가 이 드센 칼바람을 맞으며 농성하는 이들의 외침을 통감하며, 그러지 못할 시 “한평생 박통의 딸로만 살았던 여자”로 묘비명이 서게 될 것임을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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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20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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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12월 20일 존 스타인벡 별세

 

1968년은 세계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떠들썩한 해였습니다. 미국의 인종분규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유럽에서는 좌파 학생운동권이 유럽 각국의 수도를 뒤덮었죠. 베트남에서는 전쟁의 포화가 잔인하게 불을 뿜었고 한국에서는 북한이 내려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까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 다사다난한 해를 지켜보던 한 미국의 작가가 끝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1968년 12월 20일이었고 그 작가의 이름은 존 스타인벡이었습니다. 스타인벡은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뒤를 잇는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의 소설은 한창 자본주의의 첨단으로 자라나던 미국의 사회 경제적 모순 때문에 뒤틀리고 짓밟히는 사람들을 즐겨 담고 있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자신 스탠포드 대학이라는 명문 대학을 다녔지만 농장과 도로공사장, 목화밭 등에서 소금땀 흘리며 일한 적이 있고 출신 지역이 캘리포니아로서 농업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던 곳이었던지라 그 경험과 기억들은 그대로 작가로서의 소양과 재능의 토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대표작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분노의 포도>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오클라호마에 사는 가난한 농부 가족. 은행에 그 땅을 빼앗겨 버린 그들의 갈 길은 Go West! 밖에 없었습니다. 젖과 꿀은 흐르지 않더라도 최소한 먹고 살 일거리가 있는 캘리포니아를 찾아서. 살인죄로 복역했다가 풀려난 아들 톰 조드와 그 부모, 동생, 얼치기 목사 케이시 등 대가족은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착취와 고통이 만연한 지옥 같은 농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또 하나의 지옥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키’라고 경멸스런 호칭의 대상이 되어 이주민 캠프에 수용되는데 여기서 이주민들과 보안관들의 싸움이 일어나고 톰 조드는 여기에 휘말리는데 자칫 잘못할 경우 가석방이 취소될 수 있는 톰의 사정을 잘 아는 목사 케이시가 자신이 주동자라고 주장하며 잡혀갑니다. 쥐꼬리만한 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그리고 노동자들이 분노라도 할라치면 ‘용역’을 써서 그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버리는 현실은 캘리포니아에서 태평양 건너 일본을 지나면 있는 나라의 사정과 매우 유사합니다만, 포도 농장의 풍요로움 앞에서 이주민들의 가슴에는 분노의 포도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목사 케이시는 어느덧 이주민 조직의 리더로 커 갑니다. 그는 파업을 벌이던 중 자경단원에 의해 목숨을 잃는데 톰 조드 또한 그 자경단원을 죽이고 맙니다. 결국 톰 조드는 그곳을 떠나야 했지요. 이때 톰과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는 실로 사람의 마음을 울립니다. 어머니는 갑갑한 심경이 돼서 묻습니다.

“이제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놈들이 널 죽여도 내가 모를 텐데. 놈들이 널 해칠 수도 있는데. 네 소식을 어떻게 듣지?”

이때 톰은 ‘불편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뭐, 케이시 말처럼,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케이시의 말이 옳다면, 사람들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러 댈 때도 제가 있을 테고, 배고픈 아이들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릴 때도 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 식구들이 스스로 가꾼 음식을 먹고 스스로 지은 집에서 살 때도, 저는 거기 있을 거예요. 아시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지만 또한 그 개개인의 뜻과 의지가 모여 만드는 거대한 염원의 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 염원 안에 있을 때 사람은 동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인간의 권리와 품격을 갖게 되기도 하지요. 그 사실을 저 문장만큼 명확하고 간단하게 묘사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도로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살인이라도 저지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기업들, 은행들도 스스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곡식 창고는 가득 차 있어도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렸고 펠라그라병 때문에 옆구리에서는 종기가 솟아올랐다. 대기업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막가는 사회에서 조드의 선언은 땅에 떨어진 우수리 열매가 아니라 탐스럽게 영글어가는 분노의 포도에 매달린 한 알 한 알의 열매가 되겠다는 것이었겠지요.

 

스타인벡의 영감이 <분노의 포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역시 그 마지막 장면입니다. 아이를 사산한 조드의 여동생은 굶어 죽어가던 한 노동자를 발견합니다. 참을 수 없는 절망과 희망의 빛을 잃은 어둠이 만난 거지요. 거기서 조드의 여동생은 옷을 치켜 올리고 젖이 샘솟는 자신의 가슴을 남자의 말라 비틀어진 입술에 물리웁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그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의 상체를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에로틱한 상상은 전혀 개입의 여지가 없는 남녀가 아닌, 한 인간과 한 인간의 도움과 도받기의 현장은 이런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나더군요. “그녀의 입술이 한데 모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소설은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킵니다. 이주민들의 지옥으로 묘사된 캘리포니아도 기분이 좋을 수 없었겠지만 ‘오키’들의 고향 오클라호마의 사람들은 소설을 불사르며 분노합니다. 당연히 ‘빨갱이’ 소리는 기본으로 따라붙었고 심지어는 ‘환희의 포도’라고 해서 중부에서 온 이주민 가족이 캘리포니아 농장주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경험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소설까지 ‘분노의 포도’에 대응하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앨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잊을 수 없는 책”으로 ‘분노의 포도’를 극찬했고 스타인벡은 퓰리처상으로 그 명작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요. 그것이 미국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FBI의 수십년 국장 후버는 스타인벡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고 어느 날 미국 법무부는 “이 후버의 똘마니들 좀 치워 주시오!” 하는 분노에 찬 스타인벡의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그것도 미국이겠죠.

 

미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 가장 희망적인 모습으로 승화시킨 능력의 작가 존 스타인벡이 1968년 12월 20일 죽었습니다. 그가 톰의 어머니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얘기해 준 말을 옮겨 보고자 합니다. 요즘같이 멘붕이 잦은 시절에는 유용할 거 같아서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지치기만 할 뿐이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게 되는 삶은 하나뿐이야.

만약 내가 그 가능성을 다 생각해 본다면 견디기 어려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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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1 참언론인 송건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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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12월 21일 참언론인 송건호 타계

 

대학 1학년 때 나 공부 좀 한다는 티를 내는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해전사 몇 권까지 봤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전사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준말로서 그때까지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국사 교과서보다는 국민윤리 시간에 더 많이 가르쳤던 한국 현대사에 새로운 눈을 뜨게 했던 책이었죠. 이 책을 통해서 이후 70년에 가깝도록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에 이르는 험난하고도 답답한 경로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때껏 국정교과서가 가르쳐 온 황망한 사설들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뉴라이트들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까지 펴내 ‘해전사’의 명성에 편승하려 했겠어요

 

후일 6권까지 나왔던, 즉 그 시리즈 1권을 보며 분노하고 무릎을 쳤던 이들이 연구자가 되어 그 책의 저자가 되기도 할만큼 면면히 이어졌던 ‘해전사’ 1권의 저자는 대개 이렇게 소개됩니다. ‘송건호 외’ 해전사 1권이 나온 것은 1979년 10월 16일 하필이면 부산에서 부마항쟁이 터진 날이었습니다. 그때 송건호는 실업자였죠. 지금은 그 앞머리 발음이 경음으로 즐겨 발음될 만큼 그 가치가 떨어졌지만 한때 대한민국 언론의 상징과도 같았던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그를 실업자로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은 가히 해외토픽감이었습니다. 한승동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에 따르면 방위병이 애인 집에 불 지른 사건을 보도한 것이 ‘민군(民軍) 관계 이간질’이라는 이유에 걸려 기자가 관계기관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거나 “달동네 연탄값 비싸다.”는 기사가 하층민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역시 기자가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감옥에 계신 가카의 멘토 최시중씨도 이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지인들이 알아보지 못할만큼 엉망으로 얻어 터졌다는 전설도 있지요. 신문사에는 기관원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빨간펜 선생님처럼 기자들의 기사를 정독하고 밑줄 긋고 삭제를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유신 반대 시위 기사 같은 건 그야말로 동지섣달 꽃보다도 귀한 기사였어요.

 

그런데 1974년 10월 23일 그 꽃이 슬몃 동아일보 지면에 피어납니다. 서울농대에서 일어난 반유신 시위를 보도한 거지요.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고 동아일보로 쳐들어가 편집국장과 지방부장, 동아방송 뉴스쇼 담당부장의 오로록 옭아매고 남산으로 끌려갔지요. 이때 편집국장이 송건호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180여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은 다음날인 10월 24일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하고 기관원 출입금지와 언론의 자유를 외치게 됩니다.

 

이 격동의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 젊은 날의 그는 신학생 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연희전문 즉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절치부심 경성법학전문학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게 됩니다. 신학생 될 사람은 많으니 너 같은 사람은 언론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송건호는 또한 성직자처럼 언론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수호 투쟁과 정권의 광고 철수 압박, 그리고 국민들의 빗발치는 격려 광고 등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편집국장으로서 지켜봤던 그는 다음해 3월 정권의 압력에 굴복한 사측이 기자들을 대거 해고할 때 사표를 내던집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한창 공부할 나이의 아이들이 여섯이나 있었지만 이 고지식한 편집국장은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야무진 아내 덕에 집안이 굶어죽을 위기는 면했지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거나 대학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국 제일의 일간지 편집국장을 지냈지만 찻값이 없어 친구가 와도 다방에 들어가 앉지 못했던 처지의 그는 당국은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겨우 얻은 시간 강사 자리에서 몰아내거나, 간간히 들어오는 원고 청탁마저 봉쇄해 버리거나. 그러면서 정권은 그에게 고위직을 제시하며 회유합니다. 후일의 전두환 정권까지 합치면 무려 14번이나 그럴 듯한 제의가 들어왔다고 해요. 하지만 일찍이 “분단조국에서는 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이 고지식한 선비는 그 모두를 박차 버리죠.

 

야인으로 지내면서 그가 천착했던 것이 한국 현대사입니다. 책을 좋아해도 너어어어어무 좋아해서 연애 시절 아내와 데이트하다가도 “잠깐 기다리라”고 세워 놓은 뒤 책방에 들어가 세 시간을 넘겼고, 아내가 묵은 잡지를 버렸을 때 당장 이혼하겠다며 불호령을 터뜨려 아내가 엉엉 울면서 내버린 잡지를 찾아 나섰던 일화에서 보듯 방대한 독서량을 축적했던 그는 분단과 전쟁을 잉태하고 내놓았던 해방 이후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그 한 예가 되겠습니다. 송건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언론인의 견지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글을 썼습니다. 그에게 역사 의식이란 언론인에게 글을 쓰는 손 이상으로 필요한 존재였지요, “언론인이란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와 같은 사람이 되서는 안 된다. 양심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극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며칠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도록 고초를 겪었는데 여기서도 저 끔찍한 이름 이근안이 등장합니다. 송건호의 표현대로라면 “치가 떨리게 잔인한” 고문을 받고 그의 육체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초대 의장이 되고 저항 언론의 상징과도 같았던 ‘말’지를 창간,발행인을 역임하고 88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세상에 나온 한겨레 신문의 초대 사장이 되기까지 그의 언론인 생활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수첩 맨 앞장에는 이런 글귀가 항상 쓰여 있었다고 하지요. “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

송건호는 고 김근태 의원처럼 고문 후유증에 의한 파킨슨 병에 걸려 전신마비로 수년을 고생하다가 2001년 12월 21일 그 고독하지만 용감했고 부러지지 않는 꼿꼿함을 자랑했던 삶을 마칩니다. 이런 분의 일생을 보면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5년 정도에 암담해하는 것이 무척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당선인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대한민국, 특히 유신 치하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닌 왕국이었고 그 어둠은 요즘의 갑갑함 정도와는 비교가 안되는 참혹한 흑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기에도 송건호는 있었고, 그의 동료들이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일궈 내지 않았겠습니까. 그 왕국의 공주가 다시 대통령이 되어 김일성의 손자가 이끄는 북한과 그 국격을 나란히 했다고는 하지만 마냥 한탄만 하기에는 우리네 인생도 아깝고 또 송건호 선생같은 분의 일생이 무색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가증스런 권력에 맞서다가 쫓겨난 사람도 있고 수갑을 찼던 사람도 있고 난데없이 신사옥 건설단에 발령나서 안전모 쓰고 일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고 응원하고 또 잊지 않는 것이 송건호의 후예들을 키우는 일이라고 믿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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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2.22 이재명과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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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과 이동수

 

(이 포스팅은 월간중앙 2004년 8월호 이향복 기자의 이재명 의사 관련 기사를 복사에 가깝게 재구성하고 있음을 밝혀 둠)

 

매국노의 대명사 하면 우선 이완용입니다. 을사오적이면서 한일합병 당시는 총리대신으로서 나라를 일본에 홀랑 넘긴 장본인이지요. 얼마전 그의 평전도 나왔지만 (김윤희, 한겨fp출판) 그는 사악한 악당보다는 비겁한 선비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독립문 위에 쓰여진 그의 글씨를 보듯 나름 나라의 개화를 위해 노력도 했고 대한제국 말기의 신하들 가운데에는 꽤 유능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그의 행적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고 이완용 이름 석 자는 만고의 역적의 이름으로 세세손손 전해지게 됩니다.

 

그런 그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이었지요. 그 며칠 전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가 세상을 떠났는데 벨기에 총영사 주관으로 명동성당에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외교권 없는 나라였지만 그래도 남아 있던 몇몇 외교관들과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 고관대작들이 몰려들었죠. 그런데 그 행적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습니다. 나이 스무살을 갓 넘은 이재명이라는 청년이었지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열 세 살에 기독교를 믿게 됐고 그 영향인지 신천지라 할 수 있는 하와이 땅에 이민을 갑니다. 그 형편으로 미루어 방귀깨나 뀌던 양반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에게는 사람 취급 못받던 평안도 사람의 처지로 그냥 고향 잊어버리고 영어 배워 미국 시민권 따고 한세상 살면 그만이었겠는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등 망국일로를 걷던 나라 소식을 듣고는 태평양을 건너 이 땅으로 되돌아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몸집이 통나무처럼 빈틈이 없는데다 두 어깨가 벌어진 근골질”이었던 이재명은 평안도 사람 열, 서울 사람 넷이 뭉친 을사오적 암살단의 일원이 돼요. 이 중 이재명이 맡게 된 이가 이완용이었습니다. 이재명은 그를 척살하기 위해 칼 쓰기 연습을 무지하게 했다고 합니다. ‘ 팔뚝에 납덩어리같은 알통이 배기도록’ 말이지요. 사랑하는 여자와 짧은 살림을 차리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 연인에게 “나는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항상 얘기하며 각오를 다졌답니다.

 

그렇게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벨기에 황제 추도식은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어요. 명동성당 내려와서 양갈래 길이 있는데 어느 쪽을 지켜야 할지 가늠이 안 서는 거지요. 이재명은 평양 출신이었던 동지 이동수를 찾아갑니다. 이동수는 일진회 친일파 이용구를 담당하고 있었죠. 이재명이 사정 이야기를 하자 이명수는 두말없이 따라 나섭니다. “날래 가자우. 내레 한쪽을 디키면 될 거 아니가. ” 두 평안도 사내는 12월 22일 동짓날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그들 일생일대의 거사를 위해 명동 성당 언덕으로 향합니다.

 

이완용이 탄 인력거는 이재명 쪽으로 왔습니다. 이재명은 그의 팔뚝에 붙도록 훈련했던 칼을 들고 이완용의 인력거로 치닫습니다. 그런데 유달리 건장하고 힘이 셌던 인력거꾼이 이재명을 가로막았고 이재명은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둘러 그를 쓰러뜨립니다. 단련을 거듭한 그의 칼은 매서웠고 한칼에 인력거꾼은 절명을 하고 맙니다. 기겁을 한 이완용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기어서 도망하자 이재명은 날렵하게 그 뒤를 따라잡아 칼을 휘두릅니다. 이 매국노야. 이 역적놈아. 이완용의 살을 파고들면서 이재명과 그의 단도는 그렇게 외쳤겠지요.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기 전 일본 경관의 칼이 이재명의 허벅지를 꿰뚫고 이재명은 체포되고 맙니다. 이재명은 칼을 꽂은 채로 “이 칼을 빼라. 나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다.”라고 호령하면서 구경꾼들에게 태연자약 담배를 얻어 피울 만큼 대담한 사람이었어요.

이후 열린 재판에서 이재명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증거물로 제시된 칼을 두고 일본인 판사가 이 칼이 흉행(兇行)에 쓰인 것이냐고 묻자 벼락같이 외쳤지요. “너는 흉자는 알고 의(義)자는 모르느냐. 나는 매국노를 죽이는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네 행동에 찬성한 자가 누구냐는 판사의 질문에 “2천만 민족이다.”라고 답할 때에는 밖에서 구경하던 한국인들이 법원 유리창을 깨며 “옳다!”고 동조했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한 지 몇 달 후 이재명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나라 위해 죽는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며 유언조차 거절한 채 말이죠.

 

이재명 외 13명이었던 암살단은 한 명을 남겨 두고 전원 체포됩니다. 한 명은 끝내 그 서슬푸른 일본 경찰의 검속을 피해 사라지죠. 그게 이재명과 같이 명동성당 아래 갈래길에 서 있었다는 이동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 이유는 정말로 영화와 같습니다. 이인 변호사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 등의 회고에 따르면 이동수는 이완용을 죽이겠다는 일념을 굽히지 않고 십년을 잠행하던 중 이완용 집 고용인으로 들어가 3년을 일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끝내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정체가 탄로나, 1920년 12월 20일 밤 11시 30분 공소시효를 37시간을 남기고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동짓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1년 전 이재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바로 그날, 이완용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칼을 벼르고 또 별렀는지도 알 수 없지요.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완용이 그들에게 무엇이었기에, 그리고 그들에게 나라는 무엇이었기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젊은 인생과 십 몇 년의 기다림을 희생해 가며 인생의 안락은 커녕 형극뿐인 길을 걸어야 했을까요. 이재명은 그나마 후세의 기림을 받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라도 그 영전에 바쳐졌지만 이동수, 김용문 등 그 의거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행적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런 나라를 위하여 그들은 젊음을 걸었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원수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까지 하면서 칼을 갈았습니다. 그것도 나라에서 은혜를 입었거나 책임감 느껴야 할 자리에 있었거나, 일본에 빼앗긴 것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 참으로 많습니다. 이재명은 재판정에서 이완용의 죄상을 일일이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 모든 죄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죄!”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반성했을까요. 이재명의 외침은 이완용에게만 향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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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24그들이 마지막 본 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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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4일 그들이 마지막 본 흥남 

한국인들이 잊을 수 없는 뽕짝 가사가 몇 가지가 있을 거다. “두만강 푸른 물에”가 그렇고 “해 저문 소양강”이 그럴 것이며 “천동산 박달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잊히지 않는 지명으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노래 가사 하나가 있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소절이다. 그리고 1절 가사는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를 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1950년 12월 24일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가 된 흥남 철수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중공군은 흥남을 점령했다. 그럼 이 흥남 부두는 왜 그렇게 사무친 노래 가사로 불리우게 된 것일까. 왜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먼 훗날 가수 강산에가 <라구요>라는 노래에서 그 정서를 되풀이할만큼 깊은 영감을 남긴 것일까. 박근혜 찍은 노인들을 무턱대고 빨리 죽어야 한다고 몰아댈 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왜 흥남부두였을까? 

북진도 쾌속이었지만 후퇴도 빨랐다. 한국의 지형은 대동강과 원산만, 즉 통일신라 국경을 넘어서면 그 면적이 별안간 좌우로 넓어진다. 북진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않고 압록강 두만강을 향해 달려가던 국군과 UN군의 뒤를 중공군은 모질게 후려쳤고 국군과 UN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함경도 지역의 경우 더 형편이 좋지 않았다. 흥남은 일종의 덩케르크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패한 영국군의 마지막 탈출지)였다. 흥남에서 육로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애시당초 중공군에 막혀 버렸다. 중공군에 포위된 흥남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그리고 한국군들과 무수한 군 장비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막대하고 처치곤란의 존재가 흥남부두에 밀려와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들이었다. 

그나마 흥남 외곽의 피난민들은 거기에 끼지도 못했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다가는 흥남 항구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일찌감치 흥남에 들어와 있던 피난민들만 해도 10만여 명에 달했다. 미군 수송 함대가 바다에 떠 있었지만, 그들은 군인과 군용 장비만 실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을 뿐, 피난민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두 명의 한국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백선엽의 출신 부대로 이름 높은 간도 특설대 출신인 1군단장 김백일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고문 현봉학이다. 이들은 피난민들을 놓고 갈 수 없다고 알몬드를 설득했고 심지어 김백일은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라. 국군은 걸어서 철수하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건 부두에 들끓는 피난민들의 참상 때문이었건 결국 미군은 매우 인도적인 결정을 내린다. 군 장비를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을 싣기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했던 배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였다. 이 배는 2차대전 때도 사용된 화물선이었는데 화물선의 특성상 정원은 60여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남은 정원은 13명. 하늘이 무너져도 2천명 이상은 못 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장 레너드 라루가 실려 있던 화물과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수용하리라는 결심을 한 뒤 그 배에는 무려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이 올라탄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피난민들도 짐을 버렸다. 선장은 부르짖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태워!” 

17세기의 노예선도 한 사람이 누울 자리를 계산하고 노예를 태웠다. 하지만 이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는 한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다. 7천 6백톤 규모의 배에 1만 4천 명이 들어찼으니 오죽했을까.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었다. 통제할 사람도 없는 아비규환. 선원들은 어떻게든 피난민들을 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 굶주린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고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 부산항에 들어왔지만 배에 실린 피난민 수에 질렸는지 입항이 거부된다. 하는 수 없이 선장 라루는 배를 거제도로 몰아야 했다. 자연의 이치는 지옥에서도 이어지는 법이라 그 배 안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헤어나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번의 대통령 후보 문재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자. 그 경험을 겪은 사람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아픔을 눈 앞에서 보고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발을 굴렀던 사람들의 기억이 뭉쳐진 한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란 쉽사리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그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보기에, 새까맣게 어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김백일을 ‘간도 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라고 동상 파괴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심경이 들까. 과거의 사람들의 판단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책 몇 권으로 조립한 얄팍한 지식으로 살벌한 체험과 생존의 본능으로 쌓아온 역사를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은 매우 우스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얘기 하나 하자. 나는 광주 출신도 아니고 머리가 큰 뒤에야 광주의 아픔을 느꼈지만, 그다지 개연성도 없고 긴장감도 느슨한 영화 <26년>을 보면서 몇 차례나 발을 굴렀다. 내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양. 죽여! 쏴! 소리가 몇 번씩이나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한 젊은이의 멘트는 충격적이었다. “이게 뭐냐. 선동할라면 제대로 해.” 그때 느꼈다. 그에게 광주란 나에게 6.25와 같은 것이라는 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기억일 뿐, 나에게는 좀체 달라붙지 않았던 것처럼 광주도 그 청년에게 그러리라는 것. 배달의 기수 보고도 몰입하시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던 나처럼 그 청년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 

노인들이 복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회수하라는 주장이 불길같은 동의를 얻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좀 안타깝다. 물론 그분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점들을 지나치게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때로 우리에게 질곡이었고 우리에게도 유전처럼 흘러들어 우리의 행동을 지체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단절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경험을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고 저버리고 도외시하여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박근혜 후보에게 절대적 지지표를 보낸 사람들은 유신 치하의 동아일보 사태 때 백지 광고를 내어 동아일보를 응원한 사람들일 수도 있었고 4.19 때 총칼 앞에서 이승만 물러가라고 외친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역사란 화끈한 단절과 청산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한 번 공부해 보고 이해해 보자.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따위 대학 신입생 교양서 (그것도 그리 성의있지 않은)로 학습한 지식 말고, 국민윤리 교과에서도 벗어나서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트라우마와 그 해결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 만은 너무 잘아는 건 우리 아버지 레파토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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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2.25 대연각 호텔 화재와 노래 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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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대화재와 노래 두 곡 

영화 <타워링>이 한국의 대연각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그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1974년 제작된 영화 <타워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3년 전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던 대형 화재를 기억하면서 몸서리쳤다. 영화 속 설정도 그럴 수 없이 비슷했다. 15층 이상 올라가면 도무지 대책이 없다며 괴로와하는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은 기껏해야 7-8층 높이의 사다리차만 보유했던 한국 소방관들과 똑같은 심경이었을 것이고, 화재가 점점 고층으로 올라가 스카이라운지를 고립시키고 헬리콥터를 동원한 구명 작전이 펼쳐지는 것, 불길에 휩싸이거나 두려움에 못이긴 사람들이 몸을 날려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풍경, 그 모두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만큼 똑같았다. 

값싸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프로판 가스의 밸브를 까페 여직원이 채 잠그지 않은 것이 화인이었다. 준공검사 후 한달도 안된 새 건물이었지만 화재 경보기가 가동되지 않았고 방화벽도 없었고 200여 객실의 호텔에 비상계단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비극의 크기를 산더미처럼 키워 놓았다.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군인, 하다못해 미군들까지 동원된 필사적인 진화 작업 끝에 8시간여만에 꺼지긴 했으나 163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난 뒤였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다. 어떤 이는 시트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한 층 한 층을 타고 내려와 구조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헬기가 늘어뜨린 구명줄을 잡긴 했으나 팔에 힘이 빠져 바닥으로 추락사하기도 했다. 가장 절박한 풍경은 불길의 위협에 못이긴 사람들이 매트리스에 의지해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다 죽었다.) 매트리스와 함께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고 이 사진은 UPI에 의해 해외로 송고되어 유명세를 탄다. 또 대만 외교관 한 명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불길 속에서 물기를 적신 담요를 뒤집어쓰고 버티며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이 세계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당시까지의 세계 최악의 대형 구조물 화재 사고였다. 

한국인 사망자는 150여 명이었다. 그런데 이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자주 불리우는 노래 두 곡과 관련이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우선 김성술이라는 가수다. 그는 1970년 유니버설 레코드가 만든 음반 속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말을 짓고 불렀다.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엔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이후 조용필이 불러 국민가요가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98퍼센트가 같은 노래였다. 

사연인즉슨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김성술이 작곡가 황선우씨에게 노래 가사를 주고 곡을 받아 불렀던 것이었더. 김성술은 이후 군대를 갔고 휴가를 나온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현장에서 사망한다. 그 이후 유족들은 그의 유품들을 태우면서 그의 음반들도 모두 수거하여 소각했는데 작곡가 황선우씨가 이 노래의 가사를 몇 군데 바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또 내용도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에서 형제를 부르는 설정의 노래로 만들었고 이를 조용필이 부르게 됨으로써 엉뚱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대연각 호텔에서 죽어간 김성술은 자신의 노래가 그렇게 뒤바뀌어서 국민가요(?)가 된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족들은 작곡가 황씨에게 손해배상을 제기했고 2006년 법원은 그 책임을 인정하여 3천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그 뒷일은 알 수 없지만. 

대연각 호텔 화재 현장에서 아깝게 죽어간 사람 중에는 서울 공대생으로서 음악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던 민병무라는 이도 있었다. 그는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역시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동생 민병호는 형의 유작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친구들을 포섭하여 형의 유작으로 ‘서울대 트리오’의 이름으로 MBC 제 1회 대학 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게 된다. 이것이 추억의 대학 가요제 명곡이라 할 <젊은 연인들>이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를 만든 이의 슬픈 최후 때문에 그런가 이 노래에는 또 다른 전설이 따라붙고 있다.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은 도시전설이지만 소개해 본다면 대충 이렇다.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4학년들이 마지막 MT를 떠났는데 선배들과 각별했던 한 명의 후배가 따라갔다. 그런데 등산 중 눈보라를 만나 가까스로 동굴 속에 몸을 피한 그들은 누군가 눈길을 헤치고 내려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그 사람에게 옷과 식료품을 몰아 주기로 한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지를 뽑는 사람이 내려가는 것으로 제비뽑기를 했다. 

맨 먼저 후배가 쪽지를 뽑아 펴 보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배들은 그를 채근해 내려 보냈고 후배는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를 데리고 왔는데 이미 때는 늦어 모두 얼어 죽어 있었다. 선배들 모두는 편안한 얼굴로 손들을 꼭 잡고 죽었는데, 남아 있던 쪽지에는 모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후배는 자신만은 살려 보려는 선배들에게 속았던 것이다. <젊은 연인들>은 눈보라 속에서도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후배를 살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 학생들을 기리는 노래라는 전설이다. 이 사연을 들으며 노래를 부르면 뭔가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여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 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그런데 그 사연에 감명받아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불바다 속에서 그 짧은 생을 마쳐야 했고 또 바로 그 죽음을 배경으로 이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면 또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1971년 12월 25일 163명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불덩이가 되고 숨막혀서 몸을 뒤틀다가 꽃잎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갔다. 이 시기 유사한 사건들은 기실 비일비재했다. 그 전해에는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었고 그 뒤에는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가 고도성장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실제로 대한민국이 환골탈태하던 때이기도 했으나, 사람 목숨의 소중함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더 중요한 시기였고,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앞에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실종됐던 즈음이었다. 김성술과 민병무를 비롯하여 대연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 없는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낙원에서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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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12.26 데카브리스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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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12월 26일 데카브리스트 이야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율리우스력을 썼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의 정통 달력이었던 그레고리우스력과는 날짜가 좀 달랐어요.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10월 혁명이지만 서유럽 날짜로는 11월 7일이 되지요. 비슷한 예로 러시아 달력으로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신력(新曆)으로 따지면 12월 26일이 됩니다. 

데카브리스트라는 말은 영어로 디셈버(December)의 어원과 비슷합니다. 즉 12월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12월당원이라고나 할까. 이 12월단의 시작은 러시아 황제에게 몹시도 충성스러운 러시아의 귀족 청년들이었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동원,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용감하게 이를 맞아 싸운 사람들이었고, 러시아 국민의 끈질긴 저항과 동장군의 위세에 견디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철수한 뒤에는 그 뒷머리를 잡아 채기 위해 파리까지 달려갔던 용사들이었지요. 그런데 그 기나긴 투쟁과 원정의 과정에서 그들은 적을 향한 살기와는 동떨어진 자유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열렬히 싸우긴 했는데, 막상 싸워 이기면서 적들의 심장부 파리에 입성하긴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에 빠져듭니다. 전쟁에는 졌으나 도대체 그때껏 온존하던 농노제를 비롯하여 러시아 전체에 만연해 있던 봉건 질서의 암울함이 유럽을 횡단한 그들의 눈에 선연히 들어온 거죠. 조국에 돌아온 그들은 뒤떨어진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고 그 질곡에 분노를 터뜨리는 가운데 은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북방결사, 전면 공화제를 꿈꾼 남방결사, 범 슬라브 연방을 상상했던 통일슬라브결사 등등으로 분열했던 이 반항적인 귀족들은 마침내 그들이 충성을 바쳤던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의 혼란기를 틈타 거사를 결행합니다. 

1825년 12월 26일 (러시아력 12월 14일) 그날은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일이었습니다. 데카브리(12월)의 사람들(ist), 즉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의 병력은 대관식이 예정된 원로원 광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주로 ‘북방결사’ 출신이었던 그들은 니콜라이가 아닌 니콜라이의 형 콘스탄틴을 황제로 내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고 니콜라이 황제에 대한 충성 선서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킬 태세를 갖춥니다. 하지만 그들의 최고 지도자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불상사 속에서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정부군에 진압되고 말아요. 뒤이어 남부결사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내 와해되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갑신정변이라고나 할까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민중들이나 데카브리스트들이 구제하고자 했던 농노들과의 일체의 연계가 없이 변화의 열망에만 스스로를 내던진 젊은 귀족들의 거사였고 그만큼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대관식을 망친 데카브리스트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동자 5명은 당장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고 주동자 100여명은 영하 40도의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그 가운데 기혼자는 1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젊었고 서툴렀지요. 그런데 이 18명의아내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것이었습니다.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혼을 하거나 귀족의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거나.” 그런데 이 18명 중 11명의 아내들은 얼음썰매를 타고, 때로는 목숨 걸고 언 강을 건너고 칼 날같은 눈보라 맞아가며 몇 달을 가야 이르는 ‘겁나먼’ 시베리아로의 남편 찾기 삼만리 여정을 감행합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주동자라 할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부인이었죠. 현지 총독에게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린다고 서약하고서야 그녀는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남편 발목에 묶여 있던 22킬로그램의 쇠뭉치에 키스하며 눈물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하죠.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희망의 땅에 왔습니다.” 어둠과 추위의 땅 시베리아도 그 순간만큼은 환하고 따뜻하게 빛났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명의 귀부인은 대문호 톨스토이의 숙모격인 발콘스키 공작 부인입니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 발콘스키라는 성이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지 않나요. 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세르게이는 쉰 아홉 번이나 되는 전투에 나아가 용감히 싸웠던 군인이었지만 데카브리스트였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와 나이 20살 차이가 나는 아내 역시 시베리아로 옵니다. 남편이 반역자로 몰린 것은 그녀가 첫 아들을 낳은 다음 날이었지요. 그녀의 시베리아행을 만류하는 친정식구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귀족사회에서 자랄 행복한 아기보다 나는 불행한 남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 귀족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 채 뜨개질로 생업을 이으며 여생을 보냈던 그녀의 수예품들은 지금도 한 시대의 슬픔과 아픔이 수놓아진 예술 작품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발콘스키 공작 부인은 원래 시인 푸시킨의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함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날만큼 깊은 사이였다고 하는데 집안의 결정에 따라 발콘스키 공작과 결혼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푸시킨 역시 데카브리스트들 다수와 친교가 있었고, 옛 연인을 비롯하여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살던 귀족 부인들이 만 리길을 멀다 않고 남편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부인들에게 이런 시를 바칩니다.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느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여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캄캄하고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별로 좋아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그 문장에 관한한 경의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중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빌려와 봅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반기를 든 아름다운 자기부정. 데카브르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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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2.27 한남대교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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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9년 12월 27일 한남대교 개통 

한강에는 다리가 많다. 2012년 현재 팔당에서 일산까지 펼쳐진 한강을 철교를 포함하여 서른 곳이 넘는다니 6.25 전쟁 때 한강 인도교 하나에 피난민들이 몰리는 상황에서 성급한 폭파 명령이 떨어져 수도 알 수 없는 한강의 원혼들을 만들어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지간히 많은 숫자다. 다리 하나 하나에 사연이 없을 수 없고, 그 다리가 바꾼 사람들의 삶도 소소하지 않을 테지만 서울에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다리라면 역시 한남대교를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에 다리라고는 한강대교와 양화대교, 저 동쪽 끝의 광진교 정도밖에 없던 시절, 1966년 1월 19일 한강 위에 다리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년 1월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만 7천여명.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었던 것이 ‘영동’이란 지명만 해도 ‘영등포 동쪽 동네’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그곳에 다리가 뚫렸는가. 

그것은 군사적 목적이었다. 역대 군사 정권과 독재 정권이 전쟁을 빌미로 북한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즈려밟은 사실은 엄존하지만 전쟁의 공포가 마냥 허당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한은 공작금 두둑히 넣은 ‘통일 일꾼’들을 남파시키고 있었고 무력도발도 수시로 감행했다. 휴전선에서 엎어지면 배꼽 닿을 거리에 있고 6.25 때 단 사흘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 당했던 서울을 두고 정부는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6.25때 인구는 백만 조금 넘었지만 6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는 350만을 넘기고 있었다. 제2한강교가 지어져 있었지만 이 다리는 유사시 철저하게 군사용 용도로만 사용되어 민간인이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제3한강교가 착공된 것이다. 즉 서울 강북의 민간인들의 피난용 다리(?)였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서울 시민들은 다리가 놓이는지 언제 완성되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그래서 제3한강교의 준공일은 기록마다 신문마다 12월 25일에서 27일까지 왔다갔다 한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북한 콤플렉스도 곁들여진 다리였다. 북한 평양의 대동강에는 옥류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1960년 놓인 이 다리의 폭은 25미터. 그런데 제3한강교의 폭이 그보다 좀 좁았던 모양이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정부는 이미 공사가 진행된 다리를 좀 무리한 설계 변경을 통해 그 폭을 평양 옥류교보다 늘려 놓았다. 북한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다고 너무 비웃지는 말자. 1960년대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가 놓이고 경부고속도로와도 연결되면서 제3한강교의 남단에는 모세의 기적이 무색한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강북 주민들이 먹을 과일을 생산하는 배밭이 그득그득했던 이곳에 전면 개발 붐이 일면서 평당 2백원하던 땅값이 기천원, 기만원이 되는 ‘말죽거리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미 다리가 놓일 때부터 눈치 빠르고 발 잰 사람들은 강남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29만원 전 재산인 생활수급자 영감의 마누라가 왕년에 빨간 바지를 입고 그 턱을 내밀며 강남 일원의 부동산업체를 쓸고 다녔다는 전설도 그 중의 하나가 되겠다. 서울시 또한 “강북은 묶고 강남은 푼다.”는 모토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공무원들에게 입주토록 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베풀었고 이 제3한강교가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개발붐은 절정에 이른다. 63년에서 73년까지강남구 학동의 땅값은 1천 3백배, 압구정동은 8백 90배, 신사동은 1천 배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의 땅값은 25배 정도 오른 것에 불과했다. 유사시 피난용으로 건설한 다리가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한국인들의 대뇌에 문신으로 새겨 놓았던 것이다. 

혜은이가 <제3한강교>를 노래하던 1979년 무렵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전혀 다른 모습의,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강남구가 강남(江南)구가 아니라 강남(强男)구라는 얘기를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 죽던 해였으니, 서울 ‘사대문안’이 갖던 권위마저 상당 부분 이식된 상태였을 것이다. 법원 검찰청도 한강을 건넜고 강남의 유복한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노려 강북의 많은 명문학교들이 도강하여 새 터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적으로 노래 제목으로까지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원래 가사가 매우 풍기가 문란하다 하여 엉뚱하게 바뀐 것이다. 

“젊음은 갈곳을 모르는채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후략)“의 가사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결국 남녀가 포개지는 거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난감한 가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 젊은이들의 열정과 복부인 아줌마들의 음습한 욕망을 실어날랐던 <제3한강교>의 가사는 그렇게 건전하게(?) 바뀌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 다리에 실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서 오들오들 떨기도 했고 서울로 이사오면서 강건너 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기도 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다. 주병진이나 현진영 등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자살하려 했다는...._)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다리이면서 전두환이 구속 영장 앞에서 합천으로 도망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다리. 서울을 바꾼 다리가 1969년 이맘때 세워졌다.

19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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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2.28 장렬 나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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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6년 12월 28일 장렬. 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부리부리한 눈매에 다부져 보이는 어깨의 한 청년이 오늘날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식산은행을 찾아들었다. 식산은행이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적 측면에서 지탱해 주었던 기관으로 1920년 이후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의 자금을 담당했던 은행이다. 식산은행을 찾기 전 청년은 식산은행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착취의 첨병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둘러본 터였다. 청년은 “좌동척 우식산”이라 불리운 일제 식민 통치 기관에 볼일이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나석주. 1892년생이니 나이 열 세 살에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열 여덟에 나라는 망했다. 십대의 나이에 망국의 쓰라림을 체험한 이 황해도 청년은 한탄만 하고 술이나 푸며 세상을 지내기에는 너무 피가 뜨거웠고 “못하는 운동이 없을만큼” 몸도 비상하게 날랬다. 김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항일 의식을 키우던 청년은 동네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얻어 임시정부에게로 보냈고 급기야 주재소 순경과 면장을 죽이고 악질 친일파였던 은율 군수 등도 처단했다. 나석주를 담당한 황해도 경찰관에 따르면 “1921년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대부분에 나석주의 이름이 걸려 있고 동원된 경찰 수만 해도 만 여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경찰의 끈질긴 수사망에 걸려 동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지만 나석주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신흥무관학교도 졸업하고 중국군으로도 복무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고 백범 김구의 경호관으로도 있었던 그였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일본인들과 맞서는 쪽을 더 선호했던 것 같고,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원이 된다. 1921년 경성을 뒤흔들었던 김상옥 의거를 비롯하여 일제 식민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의열단원의 계보에 합류한 것이다. 그럼 어디를 때려 부술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심산 김창숙이었다. 김창숙은 나석주를 만나 이렇게 얘기한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본은 간담이 내려앉아 더 이상 우리 민족을 착취하지 못할 것이오.” (신동아 2008.4) 식산은행과 동척. 나석주로서도 식산은행이나 동척에는 유감이 많았다. 그의 집안이 오래도록 자기 땅처럼 경작해 온 궁장토 즉 조선 왕실의 땅이 동척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들의 횡포에 당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횡액을 당한 건 나석주 뿐이 아니었다. 나석주는 쾌히 응하고 폭탄과 권총을 숨긴 채 중국인 복장을 하고 귀국한다.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이었다. 

고향에 들러 처자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찍 장가를 가서 열일곱에 아들을 본 터라 그 아들도 이미 십대 중반의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한때 동지였던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형(愚兄- 나석주 본인)은 고향 떠난지 6년에 공연히 동서분주하면서 아무 성공 없이 지내 왔으니 제1은 민족에 대한 죄인이요, 제2는 가족에 대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만 사회 환경이 불허하는데야 어찌하오.”라고 했던 만큼 가족에 대한 미안함 또한 사무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서울로 스며든다. 

그리고 12월 28일 오후 2시경 식산은행에 나타난 그는 마침내 그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뭉쳐진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이었다. 은행 직원들은 중국인 차림의 이상한 남자가 뭔가 던지는 것은 봤지만 그게 폭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폭탄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볼 정도였다. 일제 시대 폭탄의 성능 때문에 낭패를 본 독립운동가들이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식산은행의 직원들은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 식산은행 폭파에 실패한 나석주는 이번에는 동척을 겨냥한다. 그 이후는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폭탄에 실패한 나석주는 권총을 빼들었다. 동척에 진입하여 제지하는 일본인 수위부터 쏘아 쓰러뜨린 나석주는 토지개량부 사무실로 올라가 일본인 직원들에게 원한 맺힌 총알을 날렸다. 한바탕 총알 세례를 퍼부은 후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또 불발이었다. 하지만 이미 식민지 사람들의 등을 치고 피를 빨아먹던 식민 통치의 경제적 본산 동척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동척은 오늘날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나석주는 동척을 빠져나와 을지로 쪽으로 몸을 피하지만 이미 경찰이 따라붙고 있었다.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지다가 나석주는 자신의 몸에 세 발의 총알을 스스로 꽂고 만다. 세모의 난데없는 도심 총격전에 몸을 움츠리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던 동포들을 향하여 나석주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말라.” 

경각에 달린 목숨 앞에서 일본 경찰은 악착같이 그의 정체를 캐내려 들었다. 이름과 출신을 독살스레 묻는 일본 경찰에게 나석주가 남긴 말은 “내가 나석주다. 그리고 공범은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은 황해도에 연락하여 나석주를 아는 경찰을 불러올렸고 그제야 경성의 1926년 연말을 총성으로 뒤흔든 사내가 나석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석주는 12월 28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서른 넷의 젊디 젊은 나이. 

흔히 사람들은 별 근거없는 착각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80년대가 학생운동이 성했던 시기라고 해서 대학생마다 투사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왕년에 돌 한 번 안던져 본 사람 있나”고 하지만 정확히 수를 세어 보자면 돌을 안 쥐어 본 사람이 쥐어 본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독재 정권 하에서도 어떤 이는 고시를 보고 어떤 이는 토플 공부하고 어떤 이는 유학을 가고 스펙을 쌓았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이 돌을 던지고 저항에 나섰을 뿐인 것이다. 일제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6년이면 이미 일제 식민 통치는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고, 그 안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은 또 다른 뿌리를 내려 가고 있었다. 나석주의 불발 폭탄을 두고 요리조리 살폈던 직원 3명 가운데 1명은 조선인이었고, 나석주를 사지로 몰아넣은 경찰대 중에도 조선인이 있었고 나석주의 신원을 확인한 이도 조선인 경찰이었다. 그 조선에서 나석주는 일종의 별종일 수 있었다. 

일상이 공고할수록 모순은 심해지고 모순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힘을 잃어간다. 애초에 김창숙이 나석주에게 동척과 식산은행을 공격하자고 한 이유는 심산 김창숙 자신이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잠입했다가 뜻밖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던 탓이었다. 목이 쉬게 만세를 불러도 젊은이들 몸 바친 폭탄이 터져도 공고해만 보이는 일제 체제는 섣부른 포기와 정교한 자기합리화를 불렀고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조선민족이 쇠퇴하게 된 근본원인이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無信), 겁나(怯懦), 사회성의 결핍' 등 타락한 민족성에 있으며, 우리 민족이 완전한 멸망에 빠지기 전에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라는 이광수 류의 민족개조론을 자기에 맞게 받아들이며 조금 더 잘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불평불만은 술과 노래로 삭이며 독립운동 따위 ‘나대는’ 이들에게 냉랭해지고 있었다. 나석주의 폭탄은 동척 뿐 아니라 그 조선인들을 향해 터진 것이기도 했다. “나는 싸웠다. 분투하라. 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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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9 어느 전쟁영웅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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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9일 위대한 전쟁 영웅 김영옥 사망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쟁 영웅, 그러니까 20세기 전쟁사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장 평가받을만한 전쟁 영웅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남한도 북한도 누군가를 내세울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사람을 꼽겠습니다. 2005년 12월 29일 여든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영옥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흔한 별을 달아보지 못한 사람이고 한국군으로 복무한 적 없는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인 핏줄로 치면 그렇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민 2세로 LA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순권은 하와이에 이민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미국에서 장성한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장교후보생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되긴 했는데 그가 배속된 것은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니세이’ (2世) 부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황량한 사막지대에 설치한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가서 전쟁 내내 그곳에 머무르게 하지요. 일본인 2세들은 그 현실 속에서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들도 2차대전에 참전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고 그 결과 편성된 것이 442연대였습니다. 그 가운데 김영옥은 100대대(후일 442연대 1대대)에 배속돼 일본인 2세들을 지휘하게 되지요. 

지휘관은 그가 한국계라는 것도 알았고, 그가 지휘해야 할 일본계 병사들과 사이가 당연히 좋지 않으리라 짐작하여 전출을 권유하지만 김영옥은 그를 거부하고 부대에 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통솔력과 자기 희생으로 부대원들의 지지를 받고 유럽 전선에 투입됩니다. 이 일본인 니세이 부대는 태평양 전선에는 일절 투입되지 않지요. 유럽에서 이 일본인 부대는 아버지들의 나라 일본 보병을 뺨치게 용감하게 활약합니다. 가끔 자살 돌격에 가까운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기도 하고 기발한 작전으로 독일군의 허를 찌르며 전과를 세우기도 합니다. 442연대가 받은 훈장과 기장을 합치면 1만개가 넘을 정도지요. 

그 부대를 지휘하면서 김영옥 역시 큰 공을 세웁니다. 위험하다고 거부된 포로 납치 작전을 감행하여 정보를 캐낸 뒤 그를 이용, 승리를 거두거나 위장 공격으로 안심시킨 후 갑자기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진지를 점령하거나,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사령관이 그 활약을 지켜본 후 현장에서 중위 견장을 뜯고 대위 계급장을 달아 준 일화는 유명하지요. 

종전 후 그는 장기 복무를 거절하고 코인 세탁소 사업을 시작합니다. 거의 신규 사업에 가까웠고 사업은 승승장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소령도 이즈음 재소집되어 (한국에서 복무하지는 않지만) 다시 군문에 드는데 김영옥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는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유색인종 최초로 백인 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이 됩니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영화같은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후퇴하는 한국군들을 바라보며 탱크 앞에 홀로 버티고 서서 반격을 호소하여 그 패잔병들을 데리고 반격 작전을 수행하는가 하면, 너무 쾌속 진군을 하다가 적으로 오인받아 포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전쟁 영웅으로서 그의 이력을 일일이 읊자면 아마 해가 갈 것 같습니다. 덧붙여 그를 설명하자면 그는 전쟁통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고 또 자신이 충성한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또한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미국내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는 인종차별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했고 그에 맞섰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요. 

김영옥은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인종편견과 차별에 강하게 맞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영옥은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 타운 리틀도쿄에 세워진 442부대 추모비 건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비문에는 니세이부대의 참전 경위와 전과를 기록했지요. 그를 작성한 것은 김영옥의 옛 부하 벤 다마시로였습니다. 그는 김영옥에게 문안 검토를 부탁했고 그를 자세히 훑어보던 김영옥은 펜을 들어 딱 한 단어를 고칩니다. 미국 정부가 미국내 일본인들을 억류(interment)했다는 것을 집단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꾼 겁니다. 단순한 억류가 아닌 인종차별적인, 즉 나찌의 행태와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비문에 남긴 거지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일본인 3세인 혼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내려 할 때 일본인 사회의 압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때 혼다 의원은 김영옥을 찾아갔고 김영옥은 자신들의 옛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결국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위안부 결의안에 찬성 의사를 밝힙니다. 혼다 의원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일이었고 오랜 진통 끝에 2007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하게 됩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한국전쟁 때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조사위원으로 활약합니다. 수십년을 묻혀 온 전쟁의 비극은 21세기에 들어서서야 수면으로 떠오르고 결국 클린턴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사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게 됩니다. 코언 국방장관이 발표한 성명을 읽으며 저는 김영옥 대령 (그는 끝내 별을 달지 못했습니다. 진급 케이스에서 한국군 군사고문단장을 지원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박찼기 때문이죠.) 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지나간 50년의 세월은 한국의 노근리 부근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모든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줄였다. 그러나 우리는 1950년 7월 마지막 주 미군이 노근리 부근에서 후퇴하던 중 확인되지 않은 수의 한국 피난민을 살해 또는 부상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러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미국인도 한국인도 역사를 묻어서는 안된다. 전쟁의 결과로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이 숨진 것은 우리 양국에 강요된 것으로 우리는 자유수호를 위해 싸운 용감한 병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듯 그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분이 자신의 성향이 ‘진보’라면 ‘전쟁 영웅’ 따위의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전쟁 자체가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데 ‘전쟁 영웅’이 가당이나 하며, 전쟁에서 사람 많이 죽인 게 무슨 영웅이냐는 얘기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보수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씀은 대단히 이상적임을 넘어서 “허공에 매인 십자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전쟁은 피해야 하는 존재임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촛불 들고 인간띠 두른다고 마냥 피해지지만은 않는 게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결국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거고, 그들의 폭력성(?)에 고개를 저으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도모한 이들은 친일파 아니었겠어요. 여러 의미로 따져 볼 때 김영옥은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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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2.31 어둠을 이기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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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79년 12월 31일 빛이 어둠을 이기다 

1879년 12월 31일 미국 뉴저지 주에 있던 토머스 엘바 에디슨의 멘로파크 연구소 근처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특별 열차까지 운행될 정도였지요. 그들은 그들 앞에 나타날 대단한 구경꺼리를 상상하며 가슴 설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선 기다린 것은 어둠이었습니다. 에디슨이 어둠을 물리칠 전구를 발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천개가 넘는 특허를 지닌 이 ‘발명왕’이자 ‘멘로파크의 마술사’가 또 무슨 조화를 부릴 것인지 호기심들이 그득했지요. 

마침내 에디슨의 신호에 따라 멘로파크 거리에 설치된 전구가 환하게 밝혀진 순간 수천 명의 인파는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백열등 불빛은 그을음도 없고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재가 날리지도 않았지만 그 어느 불보다 환하게 어둠을 무찔렀지요. 아마 멘로파크에 모여든 사람들은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이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음을 어슴푸레 느꼈을 겁니다. 해가 저문 뒤에는 별 수 없이 어둠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인류가 밤을 낮삼아 그 활동 시간을 연장할 수 있음을 입증하던 순간에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에디슨은 백열등 자체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열등 자체는 이미 수십년 전에 인류 앞에 등장해 있었지요. 하지만 실용화가 어려웠습니다. 에디슨 역시 프랜시스 업튼의 도움을 받아 백금 필라멘트가 든 전구를 내놓은 바 있죠. 그러나 백금으로 필라멘트를 만든다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었지요. 

에디슨의 위대함은 여기서 발휘됩니다. 사실 에디슨의 천재성은 창의성이라기보다는 집요함이죠. 그는 필라멘트 재료를 찾기 위해 금속, 자기 머리카락을 비롯한 동물의 털, 식물 섬유 등 1만여 종의 재료를 실험에 동원했고 마침내 최적의 필라멘트 재료인 대나무를 찾아 냅니다. 2천 4백여 번의 실험에 실패 끝에 성공을 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하죠. “누구에게나 2천4백번의 기회는 있다.” 미국 특허청에서 그의 특허 신청을 두고 한때 반려할만큼, 그리고 법정 소송에 휘말릴만큼 백열 전구는 그 혼자의 능력으로 이룬 업적은 못되었지만, 결국 백열전구는 에디슨의 발명품으로 남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 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조수가 증언한대로 에디슨이라는 이름은 그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와 함께 작업하고 그를 도와 일했던 많은 이들의 땀과 지혜가 함께 빚은 것이었지요. 기실 에디슨은 발명가라기보다 발명회사 사장이었고 발명왕이 아닌 발명가들의 왕으로 군림하려 들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거역하거나 튀어 보이는 과학자들에 대해 에디슨이 보여 준 태도는 지극히 ‘미국적’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또 다른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라는 사람에 대한 행동이지요

테슬라는 에디슨의 회사의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이 내건 상금을 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끝에 전기 발전기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지만 돈이 아까워진 에디슨은 ‘농담도 못하냐?’는 식으로 웃어 넘깁니다. 테슬라는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내던지고 라이벌 전기회사로 옮겨 교류발전기와 송전시스템을 개발하게 되는데, 에디슨은 이 테슬라를 물먹이기 위해 발명왕의 포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백정 노릇을 하게 됩니다. 

고압의 고류 발전기로 개와 고양이를 태워 죽이는 공개 실험을 하면서 “교류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으려 한 거지요. 심지어 테슬라의 특허를 사들여서 그의 발명품 목록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됩니다. 사형수가 앉을 ‘전기의자’죠. 하지만 테슬라는 에디슨과는 달리 “천재는 99퍼센트의 영감과 1%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천재였습니다. 시카고 박람회에서 고주파 교류 전력이 그의 몸을 통과하여 전구를 켜게 만드는 것을 관중들 앞에서 실연함으로써 교류 전기의 안전성을 증명한 것은 그 만 가지 천재성 중의 하나일 뿐이죠. 

테슬라라는 천재 과학자와의 알력 등으로 에디슨이 은근히 욕을 먹고 있고 일종의 탐욕스런 자본가로 비판받고 있는 걸로 압니다. 특히 테슬라가 개인의 기술이 인류를 위해 보다 폭넓게 쓰여지고, “가진 자들의 폭력이 가난한 자들에게 굴욕을 주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에디슨이 좀 더 악당으로 비쳐지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역사라는 걸 선악의 기준으로, 정의와 불의의 잣대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매우 위험할 것 같습니다. 테슬라에 대한 패악질 때문에 에디슨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반열에 든다고 봐야겠죠. 

역사는 때로 게걸스런 잡식성 동물 같아서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그 속에서 발전을 위한 자양분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대단한 구두쇠라서 부단한 낙과(落果)의 아픔을 베풀고서야 열매 하나를 줄까 말까 합니다. 1879년 12월 31일 한 해가 저물던 밤 멘로파크의 밤거리를 밝혔던 전구들은 에디슨 이전의 많은 이들의 실패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퍼질러 앉아 매진했던 에디슨 (그는 사실 머리가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지요. 테슬라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의 뚝심이 빚어낸 역사 속의 빛이었습니다. 물론 그 빛이 에디슨만 비추고 있는 현실에는 좀 비판이 가해져야 하겠습니다만. 

영화 레미제라블이 화제입니다.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마리우스가 가담한 혁명이 무슨 혁명이냐고 묻더군요. 프랑스 대혁명은 아닌 거 같고, 그 뒤의 그 몇월 혁명이냐 하면서 가물가물한 고등학교 세계사적 지식을 더듬더라고요. 당연히 아니지요. 역사에 남은 혁명은 대개 성공한 혁명들입니다. 영화 속에서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일으킨 ‘혁명’은 손에 꼽지도 못하는 소소하고 보잘것없는, 빈발했던 소요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도 그런 봉기는 셀 수 없이 있었고, 그 뒤에도 굵직굵직한 사건들 앞에도 처참한 실패와 좌절의 비명과 한숨들이 조약돌들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다가올 역사의 작지만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되게 마련이지요. 

올해 겨울 유난히 춥고 어둡습니다. 이런 날일수록 많은 이들이 불을 밝히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럴수록 아픔도 실패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실천과 열정들이 결국 대낮같은 빛으로 뭉쳐지는 날이 올 겁니다. 오기를 바랍니다. 1879년 12월 31일처럼 말입니다. 

산하의 오역 2012년 마감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설정 바꿔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친 그리고 트친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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