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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1 어느 소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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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5년 11월 11일 어느 소년의 죽음


"영인아. 영인아." 2005년 11월 11일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의 비닐하우스촌 어귀에서 나이 쉰 넷의 교사가 안타까운 어조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담임의 출산휴가로 임시로 두 달 전부터 맡게 된 반에서 영인이는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띄어쓰기를 전혀 배우고 익히지 못한 아이의 글을 보면 기가 턱 막혀 온 터에 다른 아이들 말에 따르면 엄마 아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혼자서 비닐하우스를 지키며 살고 있다고 했으니 교사 이전에 아이 기르는 부모로서 마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땟국물이 주르르 흐르는 옷은 아이를 돌보는 손길이 전혀 없음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40분 걸리는 학교를 꼬박꼬박 나오던 아이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결석했기에 아이의 집을 찾은 것이다.


10월 11일 교사는 아이를 불러 면담을 했다. 면담 결과 교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이의 공식적인 보호자는 외조부와 외조모인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살던 이모가 결혼을 해서 서울로 떠났고 아이의 외조부 외조모는 충남 당진으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는 것이다. 즉 9월 중순 이후 아이는 비닐하우스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정말 너 혼자 산다는 거니?" 아홉 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알게 된 학교는 의왕시에 사실을 전달하고 대책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반문은 "그 아이 수급자입니까?"였다. 절차와 조치를 기다리면서 교사는 일단 아이의 통학부터 챙기기로 했다. 출근할 때 마을 어귀에서 아이를 만났고 퇴근할 때는 아이를 태워 주었다. 아이도 선생님을 따랐다. 1시면 끝나는 수업 뒤 아이는 다른 데 가서 놀 생각도 않고 선생님 옆에서 놀면서 선생님의 퇴근을 기다렸다. 허기야 집에 가봐야 친구들은 다 학원에 갔을 것이고, 게임기 하나 집에는 없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교사의 아내는 갑자기 차에 실리기 시작하는 라면 박스와 빵에 놀랐다. 아니 이걸 어디에 쓰는 거예요. 아 우리 반 애 줄 거요. 당장 어디로 옮기고 싶은데 맘대로 안되네. 애가 너무 불쌍해서...... 그렇게 챙기던 아이였는데 어느날 아침 클랙슨을 울리면 밝게 웃으며 선생님 차로 뛰어오던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가 볼까 했지만 친구 집에 가서 잤나 싶기도 해서 학교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든 교사는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사정을 보고한 후 아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영인아 영인아."


 막 집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교사는 혼비백산한다. 몸길이 130센티미터가 넘는 곰같은 개가 거칠게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엄두가 안난 교사는 경찰을 불렀지만 경찰도 개를 잡을 방법은 없어서 일행은 뒷문으로 비닐하우스 영인이 집으로 들어갔다. 전기밥솥의 밥은 새까맣게 썩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는 집에 없었다. 교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구나. 하지만 여전히 사납게 짖어대고 있는 개의 울음은 뭔가 불길하고 흉폭했다. 교사는 수업 후 다시 영인이의 집을 찾는다.


 그때 교사는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접한다. 영인이는 양말만 신은 알몸으로 개에게 물어뜯겨 죽어 있었다. 옷들은 개가 찢어발긴 것 같았고, 이빨 자국은 수십 군데였다. 아이를 물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 듯 긁힌 상처도 깊게 나 있었다. 아이는 그 끔찍한 순간을 죽어서도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영인이를 물어죽인 개는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앞에서도 무섭게 저항하다가 경찰관의 권총 세 발을 맞고서야 고개를 떨궜다. "개밥을 주는 게 재미있다."고 일기에 썼던 아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밤과 낮을 맞던 아이는 전기밥솥의 밥 썩는 냄새 진동하는 집에서 선생님이 준 라면을 유품으로 남기고 개에게 물어뜯겨 죽음을 맞았다.


"시장에 가서 할머니가 책가방을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라고 또박또박 일기에 쓰던 할머니는 먼곳에 있었고 개가한 어머니는 죽은 뒤에도 며칠 동안 아들을 찾지 않았다. “신발이 더러워서 빨았습니다." 라며 자신의 빨래를 스스로 했던 아홉 살 어린이는, "밤에 무섭지 않으냐?"고 묻는 교사에게 "안무서워요!"라고 짐짓 크게 답하던 가엾은 어린이는 그렇게 죽었다. 더 끔찍한 상상 하나. 그나마 아이를 챙기던 교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작은 육신조차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개에게 먹이를 주던 아이가 죽었으니 개의 먹이는 그 아이 밖에 없었을 것이니.



 한겨레 21 2005년 11월 22일자 "미안해 아이들아 우리가 죄인이란다" 기사에는 위 사연과 함께 아이의 그림과 일기 일부가 실려 있다. 선생님과 친구들만이 있고 가족은 없는 그림 한 장과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일기장 일부. 돈이 궁했던 아이는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댔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차칸 영인이가 될께요." 아이다운 그림과 빼뚤빼뚤한 글씨는 보며 마음에서 열천이 솟았다. 대체 영인이에게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무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엄마를 주먹 부르쥐고 성토하면, 입으로  때려죽이고 찢어죽이고 당장 구속하라 외치면 되는 걸까.   결국은 혼자 남겨졌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아이에 대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돗자리를 펴고 이마를 땅에 짓찧어 피를 흘린들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뼈저리게 슬퍼한들 또 다른 "착한 영인이"를 구할 노력에 무심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 개보다 나을까.


 얼마 전 장애가 있는 동생을 제 몸처럼 돌보던 누나가 화재로 숨졌다. 동생이 싼 똥을 부모보다 빨리 치우고, 그 놀기 좋아할 나이에 동생에만 매달려 보냈다는 천사같은 아이는 그렇게 죽은 다음에야 사람들을 일깨웠고 해당 지자체는 생전에는 없던 지원을 하고 부조금이 쏟아졌다. 자신을 죽인 개와 함께 며칠 동안 병원에 안치되어 있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 하나 제대로 없었던 영인이보다는 나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흔히 "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새끼들은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형반대론에 공감하지만 아동성폭력범이나 유괴범 같은 자들은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공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애들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과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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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12 도끼살인마 고재봉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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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1월 12일 도끼살인자 고재봉 검거

1963년 11월 12일 청계천 5가에서 장사하던 한 땅콩 장수는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표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그가 의심을 두고 수상하게 본 것은 간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첩을 방불케하는 현상금이 붙은 사람이었다. 바로 대략 20여일 전 강원도 인제에서 육군 중령 일가족과 가정부 총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여 버렸던 살인마 
고재봉이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후일 연쇄살인사건이나 여러 명이 희생된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원조격으로 들먹여진다. 

21세기 세계 14대 경제 대국이 어쩌고 하는 나라의 군대에서도 사병들 군화가 없니 어쩌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는 판이니 60년대의 군대가 어땠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요즘 북한 인민군들이 즐겨 한다는 농담처럼 사단에서는 사정없이 떼먹고 연대에서는 연달아 해 먹고 대대에서는 대대적으로 떼먹고 중대에서는 중간 중간에 해먹는 것이 당시 한국군의 현실이었고 사병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고재봉도 그 중의 하나였다. 3군단 예하 1109 야공단 소속이었던 그는 대대장의 당번병 격으로 뽑혀 사택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던 그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가 가정부에게 걸린다. 그게 누룽지였다는 말도 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는 말도 있고 애인 만나는데 군화가 낡아 대대장의 군화를 대신 신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뭔가를 들고 나오다가 걸린 고재봉은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가정부에게 도끼를 들고 협박했다가 영창으로 간다. 

그때껏 발생한 도난 사건의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쓴 그는 7개월 영창 살이를 하는데 그 철창 안에서 그는 이를 악문 악마가 된다. 출감하면 자신에게 이런 대접을 한 대대장 가족을 다 몰살시키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출감한 뒤 대대장 집 근처 짚단 속에서 이틀을 새우는 독기를 발휘하며 살인을 준비한다. 그리고 깊은 밤 대대장 관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대대장과 그 아내, 아이들과 가정부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인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7개월 사이에 대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재봉이 휘두른 도끼에 맞은 것은 전혀 다른 대대장과 그 가족이었다. 이때 죽은 대대장 이득주 중령과 그 의 아내는 또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6.25 때 한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지리멸렬 후퇴할 때의 일이다. 동부전선에서 선전했지만 서부전선이 붕괴되면서 후퇴한 6사단 7연대 2대대는 충북 음성 근처에 주둔 중 숨이 턱에 닿은 여교사의 방문을 받는다. "이북 군인들이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있어요." 인민군들이 동락국민학교에 진을 치는 것을 보고 수 킬로미터의 산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2대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서 동락국민학교에 모인 인민군을 공격한다. 기습을 당한 인민군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고 이는 국군의 첫 대승리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을 내리며 기뻐한다. 이 사연은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거니와 당시 2대대의 소대장은 용감한 여교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에 골인하게 됐는데 바로 이들이 고재봉의 도끼의 희생양이 된 이득주 중령 부부였던 것이다. 

전혀 엉뚱한 사람들을 죽인 뒤 다이아 반지 등을 훔쳐 나왔던 고재봉은 그 다이아 반지를 팔아치웠다가 꼬리를 밟히고 결국 땅콩 장수의 눈에 띄어 신고되고 체포된다. 사람 여섯 명을 삽시간에 죽여 버린 사람답게 그의 포학성은 도를 넘었다고 한다. 감방에 들어가서 신고식은커녕 "여섯 명 죽이나 한 명 더 죽이나 똑같다."의 포스를 발휘하면서 감방의 우두머리로 군림했고 대체 어떤 놈인가 보자고 감방 안을 엿보던 교도소장 눈을 찔러 버리는 왈짜였다고 하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하지만 대개의 스토리처럼 그 역시 사형을 당할 때는 지극히 선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게 주님의 은혜든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이든 관계 없이 어쨌던 살인마 고재봉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저승에서라도 그분의 부하가 되어 모시겠습니다."라고 맹세하며 살다가 죽어갔다. 총살형을 받을 때 그는 그런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눈을 가리지 말아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웃을 때 쏘아 죽여 달라는 것. 그러나 찬송가 한 곡을 끝낼 때까지 헌병들은 총을 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계속 울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는 환하게 웃었고 사격! 명령과 함께 두 번째 찬송을 맺지 못하고 죽는다. 

고재봉이 남긴 사진을 보면 눈에 살기가 번득이고 내뻗는 손에도 독기가 서려 있는 듯 보인다. 죄 이상으로 뒤집어쓴 누명과 7개월의 영창살이는 그를 악마로 만들어 놨지만 그의 성정은 이른바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우하고 가난했던 수십만 수백만 청년 중의 하나였다. "(재판이 끝나고) 구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숨을 쉬었다. 어느 구두닦이를 보고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맨발로 추위에 떨고 있는 지게꾼과 구두닦이를 보면서 마음이 찌르르했다. 나는 지금 배고픔을 잊고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구급차에 탔으니 행복이랄까......" 라고 적은 그의 일기를 보면 역시 마음이 찌르르해진다. 새엄마와 누이동생을 보고 싶어했고, 형제들을 육신보다 사랑하던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냐고 탄식하던 고재봉은 지금도 살인마의 리스트 맨 윗단에 자신을 올려 놓은 후 웃는 얼굴로 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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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1.17 큰 이름 우당 이회영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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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2년 11월 17일 우당 이회영 그 큰 이름 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하였다. 이 일을 어찌 하는가. "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
적을 죽이라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 실로 귀티가 나는 서른 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회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가문에서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의 후예였고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몽땅 보유했던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고 그 신임장을 몰래 빼돌려 간도의 이상설에게 전달했지만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이 되고 3천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잰걸음을 하던 그들은 바로 이회영의 가족들이었다. 이회영과 그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형제들이 지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나라를 회복할 무장 항쟁의 군자금으로 그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가족 아닌 왕년의 이씨 가문의 노비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노비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는 주인들이 큰일을 한다는데 어찌 우리가 따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배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회영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 주시오.” 뱃사공은 이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건너간 만주에서 그들은 가지고 나온 재산을 털어 '경학사'를 세운다. 밭 갈면서 공부한다는 그 뜻처럼 구국계몽운동 이념에 입각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그 부설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를 건립하는데 경학사는 곧 문을 닫지만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외 모든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 밑빠진 독에 퍼부어진 물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재산이었다. 

일본과 그 압력을 받은 만주 군벌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옮긴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없이 이회회영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이회영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이회영의 호)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서 조반을 그대로 내보낸 어느날 아침이었다. 뜻밖에 양털을 받친 마괘를 입고 모발이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양차를 타고 와서 나를 심방하였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한달음에 뛰어 나가서 벽돌 바닥에 두 손을 집고 공손지 조선 절을 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손수 들고 오시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노인은 우당 선생이셨고 내 손에 옮겨들린 조그마한 항아리에는 시큰한 통김치 냄새가 끼쳤다." (이덕일 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 

중국 음식에 비위가 역하여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통김치를 손수 들고 왔던 노인. 이회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북경행 이후 그의 형제들에게는 잇단 비극이 닥쳐 왔다. 한때 손에 물 안묻히고 살았을 이씨 가문 며느리들은 삯바느질로 연명해야 했고 아이들을 제대로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이씨 형제의 재산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즉 일찌기 고관 댁의 양자로 들어가 그 재산을 상속받았던 둘째 형 이석영은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굶어죽었고 그 아들은 의열단원으로서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다가 20대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 동생 철영은 애초 만주 신흥무관학교 시절 죽었고, 맏형 건영의 가문도 대가 끊겼다. 막내 호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소식이 끊겨 버렸다. 여섯 형제 가운데 살아남아 해방을 본 것은 다섯째 시영이 유일했다.


이회영은 예순 여섯의 나이에 다시 만주로 향한다. 만주 군벌 장학량에게 무기를 구하려 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해 갔다고도 하는데 주위에서 고령을 이유로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늙은 사람이 텁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 공작을 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오라." 그러나 그의 출발은 밀정에 의해 일제에 낱낱이 전달되고 있었다. 요동반도 끝 대련에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1932년 11월 17일 하필이면 을사늑약 체결 27년을 맞던 그날 세상을 떠난다. 일본 경찰은 그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얼굴에 유혈이 낭자했다는 전언으로 비추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온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풍찬노숙의 망명길로 떠났던 이회영은 그렇게 평생을 바치고 쏟기만 하다가 죽어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80년 전에 꾼 독립국가의 꿈을 아직 우리는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또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루었던 그의 기념관은 국고 아닌 사비로 조성되었고, 지금도 국고의 지원은 1년에 기백만원에 그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우당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뭘 바랐다면 그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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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1.18 민정당 연수원 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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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5년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그리고 꽃상여 타고 

1985년 2.12 총선 뒤 ‘선명야당’ 신민당이 등장했지만 전두환의 폭압 통치는 여전하던 시절, 점차 전두환의 입김을 닮은 된바람이 살갗을 때리기 시작한 즈음의 어느 날,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186 명의 학생들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남녀불문 비장한 표정의 학생들은 간단한 지침을 전달받고 그들이 그날 해야
 할 행동에 돌입했다. 그 가운데에는 후일 유서 대필 사건으로 한국의 드레퓌스가 된 강기훈도, 호방한 입담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 정봉주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가락동 민정당 중앙연수원이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봄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의 인원이 민정당 중앙연수원을 향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쉽사리 정문을 돌파한 그들은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무지하게 넓었던 연수원을 점거하려면 정문에서 강당까지의 기나긴 거리를 전력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전경이 쫓아오고 점거해야 할 강당은 겁나 멀고,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 나가는 달리기 끝에 학생들은 점거에 성공했다. 성을 빼앗았으면 수성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지키려고 성을 빼앗은 게 아니라 상징적인 점거였고 성을 지킬 무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시간 안에 연행 대열로 끌려가는 것을 예상했는데 행주산성에는 돌이 있었듯 연수원에는 뜻밖의 무기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생수통이었다. (전 말지 기자 신준영이 쓴 80년대 학생운동 야사에서 봤음) 

생수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민정당 어르신들은 수돗물과 차별되는 생수를 즐긴 것 같다. 그 꽉찬 생수통과 생수병들은 학생들의 짱돌이 됐다. 전경들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물병 세례에 곤욕을 치르며 학생들을 진압해야 했다. 3-40분 끌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농성은 무려 3시간을 끄는 ‘대첩’을 이룩했다. 대첩을 이룬 만큼 연행자들에 대한 대접도 혹독했다. 우선 연행자 전원이 구속됐다. 미문화원 사건 때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고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에도 “개전의 정이 역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도 베풀었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뛰어내리다가 허리를 다친 학생까지 짤없이 구속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상이 걸린 것은 검찰청이었다. 검사의 손이 모자란 것이다. 공안부 인력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검찰은 일반 검사들까지 차출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현장에 동원된 강력 형사 이야기는 허투루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대량 구속의 경험은 1986년 10월 28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라 쓰고 ‘건대항쟁’이라 읽는 사건에서 1천2백명이 넘는 구속자를 너끈히 소화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낳은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88년 서울의 어느 대학에 들어간 한 신입생은 학기초 생일 파티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라면 한 그릇 얻어먹은 적이 없는 구두쇠 87학번 (지금 페친이다)이 여자 신입생에게 푸짐한 꽃다발 하나와 자기 키만한 인형을 선사한 건 황당하긴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황당한 것은 불이 꺼진 뒤에 울려퍼진 희한한 노래였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숲 사이로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 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노래가 끝난 후 선배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85년 경의 어느 날, 생일파티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또 다른 생일 파티가 열렸다고 했다.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한 사람의 생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자리는 생일 파티답지 않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을 맞은 83학번은 바로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하게 되어 있었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다른 곳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 자리는 대학 시절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술자리이자 생일 파티였던 것이다. 별안간 누군가 일어서서 축가를 부르겠다고 꺼억꺽 목청을 가다듬더니 묘한 노래 하나를 토해 놓았을 때 그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생일 축하 노래로 꽃상여 타고라는 장송곡이 흘러나오니 그 순간의 '언바란스'에 잠시 평정이 깨진 것이다. 하지만 노래는 꿋꿋이 계속되었고,웃음은 사그러들었습니다. 독창은 합창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울음의 합창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날의 술자리는 결국 생일날 모여앉아 생일맞은 이를 가운데 앉혀 두고 "꽃상여 그대 타고 잘 가라 "를 불러 대는, 요즘말로 하면 엽기적인 악습을 만들어 냈다. 

이 악습은 근 10년을 넘게 전승되다가 97언저리에서 대가 끊겼다. 그래서 요즘 그 동아리의 아이들은 생일 파티에서 그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그 노래조차 모른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악습을 낳았던 선배 자신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배는 그런 전통(?)의 창시자가 자신임을 신기해하면서도 그 노래조차 동아리 후배들에게 잊혀진 것을 아쉬워했다. 
"노래까지 잊어먹으면 안되는데..꽃상여 진짜로 탄 사람들도.."..

그 세월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꽃상여를 타고, 또는 그조차 타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1985년 11월 18일의 그 191명의 인생도 그 후 각양각색으로 바뀌었으리라. 그 중에도 몸을 팔아버린 이도 맘을 팔아버린이도, 끝끝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작게나마 지켜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의 ‘어제의 오늘’을 기념한다. 1985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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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9 하디타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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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 오역 

2005년 11월 19일 하디타 학살 

바그다드의 북서쪽으로 차를 달리면 서울에서 문경 정도 되는 거리의 도시 하다티. 이라크라는 나라가 미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미군이 순찰을 돌고 점령군 행세를 한 것은 하다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군이 순찰 도중 사단이 발생했다.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져 미군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한 것이다. 미군 해병대 당국자는 이렇게 발표했다. “현지 주민 15
명과 미 해병 1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이날 폭발은 해병 순찰조와 이라크군을 노린 것이다. 또 폭발 직후 무장괴한들이 해병대를 겨냥해 총기를 난사했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적어도 8명의 저항세력이 사살됐다.”

그런데 뒤이어 밝혀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동료 1명을 잃은 미군들은 눈이 돌아 버렸다. 그래서 지나던 택시를 세워 그 승객들에게 총격을 퍼붓고 인근의 민가를 습격해 어린아이고 여자고 그 머리와 등에 대고 탄창을 비워 버렸다. 당연히 수류탄도 곁들여졌고...... 일대 화력이 퍼부어졌다. 결과는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은, 즉 교전 중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처형식으로 총을 맞은 시신들 스물 네 구가 병원에 실려 온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도가 터져 나오자 당연히 조사단이 파견됐고 당연한 결론이 나왔다. 그 가운데 몇 명은 ‘컬레트럴 데미지’ 즉 부수적 피해로서 무고한 민간인이지만 나머지 몇 명은 무장 세력으로서 민간인 행세를 하면서 미군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부수적 피해(?)를 입은 몇 명에게는 우리 돈 2백 - 3백만원 정도의 보상금이 주어졌다. 그나마 24명 중 15명이었을 뿐, 나머지는 ‘무장 세력’으로서 당연한 작전 중 전과(?)로 치부돼 버렸다. 

세월이 흘렀고 고발도 있었고 폭로도 만발했다. 미군도 관련 병사들을 조사를 벌였다. 장교 4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이 기소됐지만 중대장을 포함해 6명은 기소유예로, 1명은 무죄로 석방됐다. 재판까지 간 사람은 사건 당시 현장을 지휘했던 분대장 1명이었다. 그에게 2012년 1월 내려진 형벌은 24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의 혐의자치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등병으로 강등, 최대 90일 구금, 3개월 감봉.’ 그나마 이 하사관은 ‘직무태만’ 혐의를 인정한 댓가 - 이걸 폴리바기닝이라고 하던가- 로 구금조차 면했다. 

이쯤 되면 미군의 만행과 오만과 잔학함에 치를 떨게 마련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이런 개새끼들이 있는가.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끌어대어 이라크의 석유를 노려 전쟁을 일으킨 조지고 부시고 2세의 잔학함은 백번 나무라도 모자란다. 양키들의 잔인함과 그 피에 굶주린 만행을 규탄하는 것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얼마나 미친 놈들의 만행인가.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부정할 수도 없다, 미국은 이 원죄를 뒤집어써야 한다. 그 죄는 미국인들의 후손들이 두고 두고 갚을 것이다.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저주했듯이 그 핏값은 그 후손들이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도발적이 되어 보자. 

희생자들이 양민이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비정규전이 펼쳐지고 있는 이라크였음을 상정해 보자. 여덟살 꼬마가 수류탄을 까서 던지고 아주머니가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미군들 여럿을 날리는 상황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미군들도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미군의 만행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미군들도 인간이고 공포에 질릴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할 따름이다. 그런 비극이 수시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침략군이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자신의 아들만한 아이가 언제 자신에게 수류탄을 까 던질지 모르고 호의를 베풀었던 친구가 폭탄을 두른 채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는 인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이니까. 

전쟁은 그런 거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공포가 전쟁의 기둥이며, 내가 저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롭다고 믿는 것이 전쟁의 서까래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을 치른 우리는 카인의 후예들일 수 밖에 없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우리는 서로의 적을 찾아냈고 적과 비슷한 민간인들 찾아냈고 그들을 토끼몰이하듯 몰아서 싹쓸이해 버렸었으니까. 즉 미 제국주의자들의 나쁜 천성 때문에 하디타의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술먹으면 월남 얘기하는 앞집 아저씨가, 상이용사로서 훈장도 자랑스러운 친구 아버지가 꼬마 베트콩의 배를 가르고 인민군에게 국군 소식을 전하려 들었던 중학생의 머리를 박살낸 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민군도 마찬가지고. 

전쟁은 똑같이 더러운 것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은 숭고한 것이고 내부 구성원끼리의 전쟁만 참혹한 것이 아니다. 그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이 모두의 의무고 미덕이다. 그런데 나는 이 하디타 학살을 얘기하면서 천만뜻밖의 논리가 세워지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라크에 핵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라크 인민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 중의 하나는 후세인같은 전근대적 독재자 (이게 서방 시각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후세인은 독가스를 쿠르드인들에게 뿌려버린 놈이다.)를 스스로의 힘으로 내몰지 못한 것도 있다고 여긴다. 후세인 따위에게 핵이 있고, 그래서 그 힘으로 미국의 공격을 모면했다 하더라도 하디타 학살같은 일이 없었으리라고 믿는 건 비극적인 순진무구함의 결과일 뿐일 것이다. 호치민의 베트남이 핵 없이 미국을 이긴 이유를 까마득히 도외시한 결과일 뿐일 것이다. 


나는 미군의 하디타 학살에 분노한다. 동시에 어린 아이들에게 폭탄을 쥐어주거나 총을 쏘게 만드는 ‘민족 해방 전쟁’에도 반대한다. 그리고 핵이 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으리라는 희한한 논리에는 단호하게 저항한다. 그는 미국놈과 다를바가 없다. 

하디타의 학살이 오늘 가자에서 재연되고 있다. 슬프고 분노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로켓포를 쏘는 이들의 목표가 이스라엘의 소멸이라면 나는 그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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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1.20 멕시코 혁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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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의 시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멕시코에는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 출몰했던 선글라스 낀 ‘불행한 장군’ 과 매우 닮은 꼴인 대통령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아스. 그는 1877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 30여 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일찍이 독재자 산타 아나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게릴라의 일원이기도 했던 디아스는 멕시코를 바꿔
 놓은 동시에 정체시켰다. “조국근대화를 강조하는 디아스의 30년 통치 기간 중 전국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깔리고, 금은의 생산이 급증하고, 석유가 개발되었으며, 해외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국가 경제의 핵심인 제조업과 무역 부문이 급성장했으며, 무엇보다도 정치적 안정이 주어졌다.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은 전설적인데, 독립 이후 디아스의 취임 전까지 55년 동안 36명이 통치하면서 무려 75회의 대통령직 교체가 발생했었다.” (백종훈 칼럼,멕시코 혁명의 빛과 그림자http://jgback.gnu.kr/ ) 

그러나 디아스의 통치는 “혜택을 누리는 극소수에게 천국이었지만 토지를 빼앗긴 다수 국민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디아스라는 빽을 둔 대농장들과 외세의 자본은 해마다 풍년가와 해피송을 불렀지만 멕시코의 대다수 민중들은 죽도록 일해야 할 뿐이었다. 디아스라는 돌이 내리누르던 멕시코라는 솥단지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마침내 그 뚜껑이 펑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날이 왔다. 1910년 11월 20일. 

박정희 대통령도 유신 말미에는 몇 년 뒤엔 물러나서 영남대학 총장이나 할까보다 운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이 디아스도 그랬다. 1908년 미국의 한 언론에 “이제 멕시코는 민주주의할 때가 됐다.”고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언명했던 것이다. 드디어 디아스 시대가 끝나는구나! 정치적 열기가 들끓고 새로운 희망들의 그림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디아스는 또 박정희처럼 마음을 바꾼다. “나 아니면 안돼!” 그리고 1910년의 재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그에게 결연히 맞선 이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해외유학생 출신의 프란시스코 마데로였다. 그는 “재선반대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하고 재선 반대와 실질적인 참정권의 확립을 외친다. 그런데 디아스는 역시 박정희와 비슷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데로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다. 그 뒤 가석방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지만 탈출하여 “산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발표한다. 

“자유와 정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민중들,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요구할 역사적 순간 앞으로 끌려나왔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에서 그는 외세의 배제, 농지 개혁, 노동조건 개선을 소리 높여 주장한 마데로는 멕시코 인들에게 봉기의 날을 공표한다. 1910년 11월 20일 .

1910년 11월 20일 리오그란데에서 치아파스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북쪽의 농민군 지도자 판초 비야, 남쪽의 농민혁명군 수장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만데로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어났고 기타 지역에서도 소작민들의 봉기가 잇달아 디아스 정부군을 무찔렀다. 특히 1911년 5월 판초 비야의 농민군은 미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후아레스 전투에서 정부군에 완승을 거둬 디아스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결국 디아스는 30년 정권에서 손을 떼고 망명길에 오르고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 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개혁 앞에 우유부단했고 그가 외친 구호들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달팽이처럼 행동했다. 토지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사파타는 마데로를 떠났고 반혁명 세력은 그를 고립시켰다. 미국 대사 헨리 윌슨도 끈질기게 그 행로에 간섭하여 마데로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다. 마데로는 멕시코 사람들을 깨우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왜 자신이 그들을 깨웠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자멸해 갔다. 그는 반혁명 반란군과 내통한 자신의 국방부 장관에게 암살된다. 

판초 비야는 마데로에게 감화받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의용군은 디아스 퇴출의 결정적 공헌을 했다. 마데로는 그에게 보답하고자 그와 그 의용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키지만 정규군과의 갈등에 휘말려 마데로의 국방 장관 (마데로를 죽이는 바로 그)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데로가 죽은 뒤 그는 다시 의용군을 일으켜 멕시코 북부를 휩쓸고 다녔고 미국의 반혁명 세력 지원을 못마땅히 여겨 미국까지 공격한다. 후일 미국의 미사일 이름이 되는 퍼싱 장군은 이때 판초 비야를 잡겠다고 1만 대군을 몰고 헉헉거렸지만 판초 비야는 유유히 빠져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판초 비야는 멕시코인의 손에 암살당한다. 마데로의 우유부단함을 통탄하며 떠났던 에밀리아노 사파타도 반혁명 세력의 손에 암살당한다. 

그들 뿐이 아니다. 1910년 11월 20일 이 이상의 압제와 불평등, 말이 안되는 착취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일어선 멕시코 민중들은 1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고, 마데로가 바꾸자고 외쳤던 토지 제도는 한 세기가 흘러도 별 변화없이 멕시코 인민들을 옥죄고 있다. 그 피들은 과연 헛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멕시코는 지금도 혁명 중이다. 사파타의 뒤를 따른다는 사파티스타 반란군이 엄존하고, 기억이란 일종의 유전되는 문신과 같아서 세대와 세대를 가로지른다. <라 카쿠라차>는 멕시코 혁명기 농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라 카쿠라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멕시코 전통 복장에 차양 긴 모자를 쓴 농민군들의 행렬이 바퀴벌레같아 보인다는 뜻, 그리고 두 번째는 바퀴벌레처럼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오는 그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낸다는 뜻.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이제 다시 걸을 수 없어
더 이상 쓸 돈이 없기 때문에
뭔가가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 주네
그것은 바로 셔츠를 입지 않은 판쵸 비야
이미 까란사 (비야를 죽인 반혁명 지도자)의 군대들은 가버렸네
판쵸 비야의 군대들이 오고 있기 때문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수십 미터 고공에 올라갔다. 우리는 저들을 ‘바퀴벌레’가 아니라 ‘매미’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발 알아 달라고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달라고 고공에 매달린 매미. 그들에게 미소를 가져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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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21 IMF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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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1월 21일 IMF와 참 더럽게 착한 백성들 

내 초년의 기억이 박정희 ‘유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면 성년의 기억의 분수령은 결혼이나 취직 등등보다는 알파벳 세 개로 정리될 거 같다. IMF. 이 세 알파벳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한국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달라져 있었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대한민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한
국 경제의 푼더멘탈은 튼튼하다”고 우겼던 푼수 비슷한 부총리는 경질됐고 며칠 전 한국이 IMF에서 수백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에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던 한국 정부는 결국 IMF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그 밤 임창렬 부총리의 상기된 얼굴과 경직된 목소리는 기억에 생생하다. 연초부터 한보가 부도나고 진로가 무너지고 해태가 나가떨어지고 기아마저 붕괴되는 연쇄 부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 불안 하면서도 그래도 뭔 일이 나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 마음 추스르던 한국의 서민들 위로 별 구멍이 없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임창렬 부총리의 담화문의 일부를 다시 들어본다. “IMF는 과감하고 강도 높은 개혁 조치를 주문했고 정부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속도의 개혁과 구조조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 이러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가안정과 국제 수지를 위한 긴축 재정 정책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성장률 하락으로 실업이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부담은 위기에서 회생하기 위한 비용이자 국제 사회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댓가입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직장마다 회사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달아났고, 수십 년 몸 바쳐온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졌고, 월급이 깎이고 무급 휴직이 돌아가며 시행됐으며 숱한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들은 새로운 험로를 모색해야 했고 그 살얼음판을 걷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벼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 기억해야 할 것. 솔직히 한국 사람보다 일을 열심히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주관적인 평가다) 그리스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며 시위를 벌였다. 화염병이 날았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으며 자신들에게 가해질 ‘고통과 부담’에 저항했다. 그것의 정당성을 찬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IMF를 맞는 우리의 자세”가 너무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온순했다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과장님 (사장님 기사)이 인사를 오셨어. 사장님을 20년 모신 분이고 기사만 한 게 아니라 회사 관리직도 함께 하셨어. 몇년 동안 나보다 늦게 오신 적 한 번도 없었고 빨리 가신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분이 잘들 지내라고 인사를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 사장님도 속이 안좋으셨는지 나와 보시지도 않았어. 여직원들 다 우는데 그분은 웃으셨어.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울지들 말라고.” 눈이 빨개져서 왔던 아내의 푸념이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정든 직장에서 내팽개쳐지면서도 의연히 웃었다. 웃지 못하더라도 당시 제일은행 직원들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남은 분들의 건투와 우리 은행의 건승”을 기원하면서 비디오를 찍었다. 누가 이 사태를 불러왔는지,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항의는 실종됐다. 종교적 의미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는 고백은 거룩하지만 사회적으로 그 고백이 강요될 때 그것은 죄악이다. 그것도 가장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지워지는 상황에서는. 외환 위기의 시발점이라 할 한보 사태에서 “머슴이 뭘 알겠습니까?”라고 뇌까리던 정태수같은 개새끼들은 그래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죽을 힘을 다해 그 곳간을 채워 주던 머슴들은 “나만 그런가 뭐.” 하면서 물러섰다. 

그뿐인가. 그 외환 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사람들은 금모으기에 나선다. 애들 돌반지에 결혼 반지,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패물까지 장롱을 박박 긁은 금을 들고 사람들은 은행 앞에 장사진을 쳤다.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 때 거지가 동냥 받은 돈을 보태고 기생들이 웃음과 몸 팔아 번 돈을 바치던 그 유전자는 참으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다. 물론 국채보상운동 당시 참여가 극히 미미했던 고관대작들, “그걸 해서 뭘 하겠냐? 바보들”이라며 비웃던 약삭빠른 사람들의 유전자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금모으기 실적이 가장 부진했던 것은 서울 강남이었다. 그뿐인가. 이 금을 모아 수출하는 업무를 맡았던 재벌들의 행태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 금 수출업무를 맡은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이 금모으기운동이 한창인 때에도 금을 수입해 팔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금을 수출한 해외업체로부터 수출가격보다 0.2∼0.5% 높은 값으로 사들였다. 올해 들어 지난 4월 말까지 대우·현대·LG 등 7대 종합상사들이 수입한 금은 약 10억달러에 이른다. 1월과 2월 각각 7천5백만달러, 1억1천만달러, 3월 3억9천6백만달러였다. 4월에도 (주)대우가 2억6천만달러, 현대종합상사 6천1백만달러, LG종합상사 5천7백만달러, 삼성물산 6백만달러 등이 약 4억달러의 금을 수입했다. 

이들이 금 수입을 위해 도입하는 무역신용은 월 3억∼4억달러에 이른다. 이를 통해 연이율 11∼12%에 6개월까지 외상거래를 한다. 반면 금을 수출하면 바로 달러를 손에 쥘 수 있고 이를 원화로 바꿔 국내 금융기관의 고금리 금융상품에 투자하면 적지 않은 이자수익을 낼 수 있다. 해외업체들로서는 종합상사들에 비싼값에 팔았다가 싼값에 되사들이는 셈이다.“ (한겨레21 - 조준상 기자) 

도대체 왜 이렇게 착한 것인가. 왜 이렇게 더럽게 착한 것인가.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어 말도 안되는 군포(軍布) 즉 병역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던 한 가족의 처지를 고발했었다. 배냇물도 안 마른 갓난 아이에게 군포가 부과되자 이에 분을 못이긴 남자는 자기 성기를 잘라 버린다. ...... 磨刀入房血滿席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왜 그는 자기 성기를 잘라 버리기 전에 동네 사또를 죽이지 못했을까. 안되면 고을 아전이라도 목을 따지 못했을까. 자기 성기를 자를 때 자르더라도 왜 그 칼을 밖으로 겨누지 못했을까. 왜 “아이 낳은 죄”를 자신에게 돌려야 했을까. 왜 자기 물건 잘라 아내가 땅을 치고 통곡하게 만들어야 했을까. 참다 참다 못해 일어난 민란에서도 그랬다. 아전들은 죽이고 불에 던지고 때려 죽이면서도 사또를 죽이지는 못했다. 욕보이고 엉덩이를 차서 쫓아낼지언정 죽이지는 못했다. 임오군란 때 왕비를 죽이자고 궁궐을 범한 막가는 인생들도 왕은 어쩌지 않았다. 갑오농민전쟁의 슬로건도 결국은 “보국안민”이었고 탐관오리들을 미워했으되 그 우두머리인 왕한테는 별반 시비를 걸지 못했다. 결국 IMF 때도 그랬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당연히 잘려야 하는 줄로 알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사가 잘되기를 빌었고, 그리스처럼 시위는 커녕 양순하고 공손하게 그 ‘고통’을 감내했다. 나는 가끔 이 더럽게 착한 유전자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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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2 인간기관차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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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0년 11월 22일 인간기관차 자토펙 멈추다.

“.... 이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민주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이제야 언로(言路)가 열렸다고 믿는 데에 수개월이 걸렸고 지금도 이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일단 우리가 입을 열고 민주화의 발걸음을 시작한 이상, 민주화를 관철하기 위하여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세력의 잔인한 보복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방관해 온 이들에게 호소한다. 지금은 전국민이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이다. 
바야흐로 여름 휴가가 시작된다. 여느 때 같으면 일손을 놓고 잠시 쉴 수 있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우리의 경애하는 적대자들이 휴가를 팽개치고 반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어떻게 그들에게 뒤질 수 있겠는가....... (중략)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현실에 알맞은 사회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인다. 겨울이 되면 그 성과를 알게 되리라. 노동자 농민 월급쟁이 예숧가 학자 기술자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선언한다.“ 

1968년 6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동맹에서 70여명의 진보적 인사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2천어 선언’이다. 이는 “당에 의해 행해진 부정과 과오를 시정하고 사회주의의 민주화를 원하는”,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호소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용감한 지식인들의 함성이었다. 프라하의 봄의 절정이요, 그 프라하의 봄을 짓밟을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의 탱크 소리 바로 앞에 울려 퍼진 감동의 메아리였다. 이 2천어 선언의 주창자 가운데에는 아주 유명한 이름 하나가 끼어 있었다. 에밀 자토펙. 

나찌 독일의 군홧발이 오래된 역사의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의 간판을 짓밟은 것은 그의 나이 열 여덟 살 때였다. 그에 무척 분노하긴 했지만 가난한 구두공장 직공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제안을 한다. “어이 에밀. 내가 육상 대회 후원하는 거 알지. 자네 한 번 나가 봐.” 별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사장은 자신이 이름을 내민 대회에서 자기 공장 직원 하나쯤 출전하길 바랬고 에밀 자토펙은 그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들었던 것이다. 기뜩이나 일이 힘들어 죽겠던 자토펙은 꾀병을 부려 그 형극을 모면하려 했는데 결과는 "육상에 가장 적합한 신체 상태“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울며 겨자먹기로 대회에 출전한 자토펙은 뜻밖의 성과를 거두어 사장 이하 주변을 놀라게 한다. 처음 뛴 육상대회에서 당당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가장 놀란 것은 에밀 자신이었다. 어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이후 에밀 자토펙은 체코 육상의 떠오르는 별로 명성을 얻는다. 2차 대전 이후 재개된 런던 올림픽에서 그는 5천미터에서 은메달, 1만미터에서 금메달을 딴다. 특히 1만미터에서 그의 역주는 관중들과 선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경기 초반에는 형편없는 하위권에 처져 있던 그가 별안간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처럼 다른 선수들을 하나 하나 젖히며 1위로 골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그의 인생의 절정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이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5천미터와 1만미터, 그리고 마라톤까지 제패하여 육상 장거리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이때 5천미터에서 우승하는 모습은 전 관중을 열광시킨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의 한 선수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했다. 점차 다른 선수들이 그를 제쳤고 그는 후순위로 처졌다. 그런데 거의 경기 막판, 목을 잔뜩 움츠리고 혀를 내밀고 마치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한 고통이 아로새겨진 얼굴에 팔을 크게 휘젓는 다소 희한하다고 할 포즈로, 마치 100미터 달리기하는 펭귄같은 안간힘으로 자토펙이 다시 스퍼트를 시작한 것이다. 관중들은 일제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자토펙 자토펙 자토펙..... 무거운 추를 달고 가스 마스크를 쓰고 훈련하고 숨 안쉬고 뛰기를 하다가 졸도해 버린 경력까지 있었던 이 희한한 노력파 자토펙은 은퇴할 때까지 1만미터 기록을 몇 번이나 갈아치우며 체코의 영웅이 된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인간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은 자토펙의 명언이었다. 

그는 체코 붉은 군대의 장교였고 대령으로까지 승진한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나찌를 혐오하던 구두 공장 직공은 동시에 인민을 배신한 공산당에 항거하여 2천어 선언에 이름을 올린다. 또한 거리에서 마이크를 들고 인민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외치며 인민을 배반한 사회주의를 성토한다. 프라하의 봄이 산산히 부서졌을 때 그 역시 대령 계급장과 공산당원증이 찢겨 나갔고 그로부터 20여년 간 그는 유배와 같은 나날을 보냈다. 심할 경우는 탄광에서 석탄을 캐기도 했다고 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동구권이 몰락한 뒤에야 그는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오랜 유폐의 괴로움은 그의 튼튼한 몸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11월 22일 자토펙은 세상을 뜬다. 그의 장례는 체코 국장으로 치러졌고 사마란치 전 아이오시 위원장을 비롯하여 기라성같은 인사들과 수만 체코 국민들의 애도 속에 인간기관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육상 선수였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엄의 하한선을 지켜내고자 노력했던 민주주의자였고, 사회주의의 배신에 분노한 사회주의자였다. 

요즘 트윗에서 수단 민간인 학살 항의 시위 중 체포된 미국의 영화 배우 조지 클루니의 말이 화제다. “사회적 주목도와 돈이 따르는 영화배우로서의 내 직업은 우리 사회를 더 진전시키는 사안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 책임까지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자토펙이 클루니의 말을 들었다면 박수를 치며 이렇게 맞장구쳤을지도 모르겠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그리고 하나 더. 인간은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로부터 벗어날 때 인간은 날개 잃은 새가 되고 뭍으로 나온 물고기가 된다.”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사회적 발언을 할라치면 바로 건방지다든가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든가 폴리테이너라든가 하면서 매장의 삽을 뜨거나 밥줄을 끊으려드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저 영웅들이 부럽고 그들을 길러낸 사회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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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1.23 라이프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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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6년11월 23일 라이프 창간 

역사 속 오늘을 검색하다보면 그 하루의 '팔자'랄까 그런 게 있나 싶은 날이 있다. 하루 하루가 범상한 날이 어디 있을까만 왤케 하루에 많은 일이 일어났나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11월 23일의 팔자도 꽤 센 편이다 이를테면 1945년 11월 23일의 한반도는 남북으로 시끄러웠다. 백범 김구 이하 임시정부 요인들이 감격의 귀국을 했고 신의주에서는 소련군과 공산당의 학원 
침탈에 반대하여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고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 시위 운동 후 월남한 사람 중에는 함석헌이라는 이름도 끼어 있었다. 이외에도 많지만 대충 줄이고 오늘 있었던 일 중의 하나를 꼽아 보자면 1936년 11월 23일의 잡지 라이프 창간을 들어 보겠다. 

라이프의 창간자는 미국의 잡지왕이라 불리우는 헨리 루스다. 선교사의 아들로 중국 산동성 등주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에도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 외국인들을 죽이자고 들고 일어난 의화단의 난 (1900) 때 요즘도 한국과 중국를 잇는 항구 옌타이에 피신했다가 서울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아무튼 잡지 타임과 포츈을 창간하며 한창 줏가를 올린 그는 1936년 11월 23일 적자에 허덕이며 망해가던 유머 잡지 '라이프'를 인수한다. 

잡지 ‘타임’과 ‘포천’을 만든 헨리 루스. 그를 세계적 잡지왕에 오르게 한 결정적 작품이 바로 ‘라이프’다.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 줄 수 있다.” 1936년 11월23일 빨간 네모 바탕에 ‘LIFE’란 흰 제호를 가진 사진잡지가 탄생했다. 창간호 표지는 당시 뉴딜정책의 하나로 진행 중이던 포토맥 댐 사진이 장식했다. 또 1면에는 제왕절개로 탄생한 아기의 사진을 싣고 ‘라이프는 시작되었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기사를 장식해 주는 수준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이 중심에 서고 기사는 그를 보조하는 형태의 획기적인 잡지 '라이프'는 곧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우수한 포토 저널리스트들이 다투어 라이프에 가담했고, 그들의 사진 한 컷이 주는 감동은 충분했지만 그에 비해 값은 쌌다. 

주1회 발행, 값 10센트, 연간 구독료 3달러 50센트라는 광고가 헨리 루스가 경영하는 포촌 지에 게재되자 순식간에 23만부의 정기구독 신청이 쇄도했다. 용기백배한 헨리 루스는 부수를 늘려 40만부에 가까운 잡지를 찍어냈는데 이게 하루만에 매진된다. 그리고 비슷한 양의 재판을 또 찍어 내야했다. 다음 해가 되면 라이프지는 이미 백만 부수를 넘어섰고 뒤이어 벌어진 각지의 전쟁들, 그 중에서도 인류 앞에 닥친 대재앙 2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비극을 알리는 동시에 라이프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한 컷으로 기억하는 사진들 중 상당수는 라이프에 소속되어 전 세계를 누비던 포토 저널리스트들의 목숨과 땀과 피로 현상한 사진들이다. 

스페인 내전 중 돌격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의 그림은 스페인 내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 사진은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빗발치는 기관총 앞에 내던져진 미군 병사들과 함께 해안으로 달려갔고 결국은 베트남의 전장에서 부비트랩에 걸려 사망한 로버트 카파의 것이었고 모두 라이프지에 게재됐다. 2차대전 중 독일에 유린당한 프랑스인의 슬픔을 극적으로 묘사한 사진, 즉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프랑스 군이 각 연대의 연대기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해외로 반출하는 상황에서 한 중년의 프랑스인이 얼굴을 찡그리고 울던 장면 역시 역사의 한 장면이고, 나찌들이 불질러 버린 정치범 수용소에서문틈으로 사력을 다해 기어나오다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정치범의 사진 (윌리엄 반디버드 작)은 전쟁의 공포, 인간의 잔인함, 그리고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의 불가사의 등등을 한 컷에 다 담고 있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로 유명한 이오지마의 성조기도 라이프에 실렸고,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거리에 뛰쳐나온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는 여러 도시 전설을 낳을 만한 명작이었다. 수십 년 뒤 그 키스 후 영영 이별한 실제 주인공들이 다시 마주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흥미롭다.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넘쳐나는 시대고 결국 그 조류를 이기지 못하고 라이프지는 몇 번의 복간과 폐간을 거쳐 이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라이프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다. 움직이는 그림은 눈 앞에서 흘러가기에 생생하지만 동시에 그래서 많은 것을 놓친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은 단조롭고 부족하기는 하나 그 사각 프레임 안에 든 모든 것을 화석으로 만들어 역사의 지층 속에 갈무리한다. 마치 우리가 지층 속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 화석 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그 체중과 걸음걸이와 종류와 보행 목적과 함께 살던 생물까지 추정하듯이 사진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일종의 세밀화로 우리 곁에 쌓인다. 라이프는 그 점에 가장 천착한 잡지였다. 

적어도 1936년 이후 72년까지의 세계사는 이 책들을 빼놓고는 작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굵직굵직한 사건들 뿐만이 아니다. 흑백의 분규가 벌어지는 가운데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어디론가 가는 세 흑백 어린이의 뒷모습은 사람들의 입꼬리를 슬그머니 말아올리게 하는 명작이었고 어느 해인가는 폴리스 라인을 뚫고(?) 나온 어린아이에게 바싹 허리를 굽힌 경찰이 웃으면서 나가 달라고 하는 순간이 퓰리처 상을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팁 하나. 1864호의 지령 가운데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의 'LIFE' 제호를 날려 버린 유일한 존재가 있었다. 그 제호가 표지 모델의 위엄과 미모를 해칠 수 있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그 존재는 누구였을까?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엘리자베드 테일러? 아니었다 그건 닭이었다. 어느 수탉의 탐스럽고 위풍당당한 닭벼슬이 라이프의 제호를 날린 것이다. 


1972년의 1차 폐간 때 라이프는 자신들의 사진들 가운데 명작들을 엄선하여 사진집을 낸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라이프 베스트편, 영화배우편, 전쟁편, 우주편의 4권인데 이 이상의 책이 혹시 나왔다는 정보 있으면 알려 주시라. 대한민국 헌책방 전부를 뒤져서라도 장만하고야 말 것이다. 사진에는 취미가 없고 가족사진을 찍어도 참 PD치고는 감각이 발바닥이라고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는 처지긴 하나 이 라이프지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이라는 말처럼,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즐기고 남은 모든 것들을 사진의 형태로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매우 진지하고 훌륭할 것 같다. 

어느 블로그에서 본 라이프가 본 한국 전쟁이다... 감상하시라 

http://www.gtksa.org/zbxe/comm_autogallery/4152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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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1.24 우범선과 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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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과 고영근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정의와 불의를 따지기는 어렵다. 유일한 판가름 방법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권리와 인식의 확장을 향한 움직임은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겠지만 사실 자유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마저 떨떠름해진다. 1903년 11월 24일 현해탄 건거 운명적으로 마주친 두 한국인 우범선과 고영근
을 놓고 어느 쪽이 정의의 편이었는가를 생각하다보면 그 알쏭달쏭의 도가 더욱 심해진다. 

우선 우범선이라는 인물부터. 그는 대대로 무인의 집안이었던 집에서 태어났다. 1857년생으로서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던 1876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구닥다리 무예를 넘어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김옥균 등과도 교유하며 개화 사상을 키워 갔고 구식 군대 아닌 별기군의 참령으로 근무했다. 신문물에 목말랐던 청년 장교는 일본으로의 밀항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후일 체포됐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난국을 헤치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야 그렇다고 치고 거의 유일한 이웃으로서 전쟁도 치르고 교류도 하던 나라가 별안간 왜상투 깎고 훈도시 벗고 게다 벗어던지고 말쑥한 양복에 서양 군대 부럽지 않은 무력까지 쥐고 조선을 넘나들었으니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던 것은 우범선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똑똑한 김옥균도 일본에만 목을 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본에 기댔다고 해서 그들이 ‘친일파’로 매도될 처지는 아니었다. 우범선 역시 그랬다. 그는 우직한 무인이었고 자신이 충성을 다하는 나라가 개화한 문명국이 되길 바랬다. 

그런 그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민씨 왕비였다. 우범선이 보기에 왕비는 표독하기로는 (드라마상의) 장희빈 같았고 정치력(주로 민씨 가문을 위한)은 원정왕후 (태종의 비)처럼 능란했으며 재물욕은 중종비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에 비할만했다. 무당에게 군 칭호를 내리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거금을 올려놓고 세자의 건강을 축원하는 것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임오군란 때 죽을 뻔하다가 돌아와서는 그 행태가 더욱 자심했다. 갑신정변을 청나라를 끌어들여 짓밟았고, 결국은 청일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불씨를 당겼으며 그 척족들의 세도는 온 나라를 피멍들게 했다. 우범선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개 무부요. 하지만 그 일파를 물리치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오.” 문제는 그 얘기를 한 상대가 일본 공사 미우라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야욕과 자신의 충심이 버무려진 어느 날 밤, 그는 경복궁을 범하는 조선인이 된다. 그리고 민비의 죽음을 확인한 이, 불에 탄 유해를 땅에 묻어버린 이가 바로 이 우범선이라고 전해진다. 

을미개혁 특히 단발령은 많은 이들을 격동시켰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왕비였지만 그래도 국모였다.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의병들이 들끓었고 허약한 정권이 휘청거리는 와중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버린다. 우범선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총리대신 김홍지처럼 맞아죽거나 인천으로 튀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우범선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객으로 지낸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나 한 한국인 망명객이 그를 초대한다. 이름은 고영근. 원래 민씨 척족과 친밀한 관계였고 그 덕에 경상좌병사로 출세한 경력이 있는 이였다. 독립협회에 맞서 황국협회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지만 황국협회가 폭력을 휘두르자 이에 실망하여 되레 관복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 주최의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한 특이한 열혈 애국자였다. 특히 1899년에는 부패한 관료들의 집에 폭약을 터뜨리려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한다. 

슬픈 것은 이 고영근과 우범선의 애국의 방법이 매우 달랐다는 데에 있다. 민비 시해범이라 할 우범선이 일본에 있음을 안 고영근은 그를 구슬러 초청한 다음 칼로 목을 찌르고 쇠망치를 내리쳐 머리를 터뜨려 죽여 버렸다. 그는 한국 대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호 통재라, 을미사변 때 우범선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우는 극역대악으로 천하의 공분을 샀도다. 대한의 신하 된 몸으로, 하늘을 같이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위에 아뢰고 아래에 알린다.” 그에게 충성의 대상은 나라와 임금이었다.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국모를 시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였고, 그는 재판정에서도 그를 당당히 밝힌다. 

고종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일본 공사에게 가벼운 처벌을 청했고 일본 공사 역시 이를 즉시 정부에 알려 이를 외교적 카드로 사용하도록 한다. 러일전쟁에서의 한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살던 중 귀국했으나 이미 그가 충성했던 임금은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고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래도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홍릉에 그 유택이 마련되었을 때, 고영근은 능참봉으로서 또 하나의 일을 벌인다. 식민지 조선의 군주는 ‘이왕’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즉 황제라던가 등등의 존호를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늙은 능참봉 고영근은 임의로 ‘고종 태황제’를 새겨 넣어 버렸다. 조선 총독부의 낯빛이 변했고 비를 다시 눕혀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고영근은 쇠고집을 부리며 버틴다. 결국은 고영근이 이기지만 고영근은 능참봉에서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영근은 홍릉 근처에 오막살이를 짓고 거기서 여생을 고종의 능을 지키며 보냈다. 

참으로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 “군부대신이 일일이 일을 물어 처결했을”만큼 영특하고 빼어난 군 장교였던 우범선. 정부 관리로 백성들의 집회를 막아야 할 입장이었으면서도 황국협회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관복을 집어던지고 만민공동회를 주재했던 열혈관료 고영근. 그들의 의기와 꿈은 외세의 소용돌이,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침몰 속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뛰어난 인재이며 나라에 대한 사랑 또한 그리 차이나지 않았을 두 사람이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동안 대한제국은 멸망으로 치달았다. 둘 중 누가 애국자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무망한 일이고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때론 슬프다. 그들은 왜 서로 죽고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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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25 아암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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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5년 11월 25일 아암도의 비극 

서울 와서 약간 웃겼던 것 중의 하나는 서울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로망이었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니 해운대가 부산을 빙 둘러 있는 거 아니냐면서 천국에서라도 온 듯한 눈길을 보내는 데에는 아주 질렸거니와 실연을 당하거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으면 거의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바다 보고 올께.”라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바다는 백발백중 동해 바다였다. 아니
 바다 볼 거면 전철 타고 인천 가면 되지 뭐하러 고생스럽게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그 먼데를 가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인천 앞바다가 바다냐?” 하는 퉁명스런 답이 돌아왔었다. 

사실 동해와 서해는 그 느낌이 다르다. 하루 종일 푸른 파도가 철썩거리는 동해와 달리 간만차가 세계적이어서 모세의 기적(?)이 하루에 두 번씩 벌어지는 서해는 뭔가 갑갑하고 바다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간만의 차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명소도 있었다. 아암도라는 작은 섬이 그곳이다. 송도 앞바다 앞에 있는 그야말로 작은 섬이었던 이 섬과 송도 유원지 후문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좁은 돌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다 위를 걸어 아암도로 갔고 데이트를 즐겼다. 물이 들어올 때를 맞춰 일부러 여자친구를 이끌고 섬으로 들어갔던 괘씸한(?) 청춘들도 많았다. 

이 아암도는 곧 섬 팔자를 벗어나게 된다. 송도유원지 유수면 매립공사가 시작되고 무수한 흙더미가 아암도는 육지와 몸을 맞닿게 된 것이다. 인천시는 이 지역에 ‘와이키키’같은 해변을 만들겠노라며 기염을 토하지만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퍼다 부은 모래는 쓸려 나갔고 ‘와이키키’의 꿈은 예산만 와장창 퍼부은 채 허사로 돌아갔다. 그래도 아암도에는 해안도로가 깔렸고 그 인근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고 당연히 노점상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그 가운데에는 가난한 장애인으로 자라나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는 강해져야 한다.”고 일기장에 쓰던 젊은이도 있었다. 이름은 이덕인. 

아암도의 노점상들은 이중으로 시달렸다. 툭하면 망치 들고 쳐들어오는 관청 사람들도 그랬지만 꼴망파라고 불리우는 조폭들도 그 문신 치렁치렁한 몸들을 들이밀었다. 그럴 때마다 가장 악착같이 싸운 사람이 이덕인이었다. “버티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던 청년답게 조폭들이 혀를 내두를만큼 지독하게 싸우면서 자신과 동료들을 지켰다. 하지만 조폭보다 더 무서운 관의 철거가 다가왔다. 대대적인 철거가 예고되면서 노점상들은 아암도에 ‘골리앗’을 세우기로 한다. 5년 전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갔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외로운 늑대들’처럼, 13년 뒤의 용산 지구 철거 현장의 호프집 주인을 비롯한 시민들처럼 고공농성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 고공 농성에 이덕인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안가고 사람들 왕래도 많지 않아서 선전 효과가 있으려나.....” 

하지만 이덕인과 노점상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바람은 날로 차가와지고 위에 오른 사람들의 몸에 한기가 들이칠대로 들이칠 무렵, 11월 24일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마치 날이 추워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물대포가 망루를 직격했다. 흠뻑 젖은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며 경찰에 맞섰고 경찰은 공성전의 정석대로 식량과 의약품의 보급을 차단했다. 망루 위에는 당뇨병 환자도 있었는데 경찰이 약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셔야 했다. “죽을 거 같으면 내려오겠지.”가 고전적인 경찰의 전략. 지쳐가는 사람들 앞에서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덕인은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사기를 북돋웠다. 철거반들이 빨간 츄리닝 내려오면 죽인다고 살기등등할 정도였다.

1995년 11월 25일이 왔다. 몇 번의 보급품 전달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뒤 이덕인은 최악으로 고립된 현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한 명의 동료와 함께 골리앗을 내려와 포위망을 뚫을 시도를 한다. 살금살금 골리앗을 내려와 까치발을 걷던 둘을 경찰이 발견했고 동료 1명은 허겁지겁 다시 망루로 기어 올라왔지만 이덕인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1월 25일 밤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 28일 오전 망루 위에 서 있던 농성자 한 사람은 뭔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군가 해변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농성자들은 경찰에 소리쳐 사실을 알렸고 곧 그가 누구인지 밝혀진다. 이덕인이었다. 

이덕인은 손목과 양팔을 함께 묶는 형태로 느슨하게 포박되어 있었고 곳곳에 피멍과 타박상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그 눈은 무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망루를 내려온 사람이 포박된 채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그 범인이야 삼척동자도 알만했지만 그 유력한 용의자는 또 한 번의 무리수를 저지른다. 경찰 1500명이 투입되어 시신을 지키던 동료와 학생들을 짓밟은 후 시신을 빼돌리고 부검을 한 후 그를 죽인 범인이 ‘물’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썰물이었던지라 수심 50센티미터 정도였는데 그런 접시물에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포박에 대해서는 뭐라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연히 바닷물에 떠다니던 밧줄이 또 한 번 우연히 그 손목에 감겼던 것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들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싶을까. 빠져나갈 수 없는 독에 스스로를 던지는 행위를 누군들 하고 싶을까. 하지만 90년 울산의 골리앗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도무지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고공 위에서 독 안의 쥐가 되어 수십 일을 버티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다가 시커멓게 탄 주검이 되기도 했고 스스로 목을 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결사적인 농성으로 호소하고자 했던 대상들은 그들의 ‘찍찍거림’을 무시했고 “죽을 것 같으면 내려오겠지.”를 고수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고공에 오른 이들의 주장에도 일부 억지가 있을 수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내던지고 스스로의 목을 죄면서 내지르는 절규에 무심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당뇨병 환자에게 자기 오줌을 마시게 하고 이 엄동설한에 텐트조차 치는 것을 막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백만 배의 억지를 부리고 있으며 인간으로서 용납하기 힘든 죄를 짓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뭐라든 “알 바냐?”라고 내 살길 바쁜 나도 유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고. 1995년 11월 25일 어둠을 뚫고 포위망을 벗어나려다가 ‘물에 빠져’ 갑자기 흘러온 밧줄에 포박당한 채 죽어갔던 한 청년 장애인은 오늘을 지켜보면서 어떤 마음이 될까. 

이 포스팅은 최인기가 쓴 <핏빛 가득한 아암도>에서 상당 부분 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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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1835.11.30 오스카와일드와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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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835년 11월 30일 오스카 와일드, 마크 트웨인 

밤샘 일하는 와중에 몇 자 끄적인다. 영화 '더 롹'을 본 사람들은 그 멋있음이 절정에 달했던 노배우 숀 코네리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 가운데 명장면 중의 하나가 부하들의 희생을 저버린 조국에 미사일을 겨눈 험멜 장군이 알카트라즈 탈출에 성공했지만 붙잡혀 오랜 옥살이를 했던 영국 첩보원 메이슨과 나누는 대화다. 험멜 장군
이 먼저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키워진다. 토머스 제퍼슨”이라며 스스로의 행위를 미화하자 메이슨은 영국인 특유의 냉소로 이렇게 되받는다. “애국이란 보통 악한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요 장군.” 

게으르게도 나는 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잊기 힘든 동화를 쓴 사람이다. 죽어서 동상이 세워진 뒤에야 오지랖이 눈물 날 만큼 넓어진 왕자와 그 오지랖을 감당하며 왕자의 동상에 박혀 있던 보석들을 부리로 떼어 가난한 이들에게 실어 나르다 끝내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지 못하고 동상 아래 떨어져 죽어야 했던 제비의 이야기는 언제 다시 생각해도 가슴에 화기(火氣)를 당긴다. 자신의 눈까지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 달라는 왕자의 청에 응한 제비는 그예 그를 떠나지 못하고 왕자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왕자에게 전하며 살다가 왕자의 발치에 떨어져 죽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일종의 연대였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고 전염되며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감동하며 놓지 못하는 손들이 빚어내는 인간 최고의 미덕 중의 하나. 그래서 동화 속에서 천사는 그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왕자의 깨진 심장과 제비의 시체를 꼽고 그를 들고 하느님 앞에 갔으리라.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자주 인용되는 그의 아포리즘들을 보면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들이 많다. “영혼은 늙게 태어났으나 젊어져 간다. 그것은 인생의 희극이다. 그리고 육체는 젊게 태어나서 늙어간다. 그게 인생의 비극이다.”는 말 앞에서 나는 싱긋 웃는다. 지금도 옛 학교에 가면 족구하자고 아이들 불러 낼 것 같은 마음이지만 대학 4학년 때에는 되레 애고 몸이 전같지 않다는 둥 시건방을 다 떨었었던 것도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이는 들수록 마음은 젊어가고 마음이 젊을수록 몸은 쭈글쭈글해지는 게 인간사의 이치인가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들으면 그건 동서고금에 똑같은 것 같고. 

1900년 11월 30일 오스카 와일드는 세상에 떠났지만 그로부터 65년 전 1835년 11월 30일은 한 탁월한 문학가가 세상에 왔다. 그 이름은 새뮤얼 클레멘스였지만 그는 측량기사 노릇을 하던 시절 얻었던 별명 마크 트웨인을 평생의 필명으로 사용한다. 그의 작품들은 내 어린 시절의 일부를 생생히 구성하고 있다. 온 마을을 골탕먹이던 톰 소여의 장난기와 허클베리핀의 모험도 물론 그렇지만 나에게 마크 트웨인은 사회적 모순(?)을 처음으로 알려 준 작가였고 사람에게 사람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작가였다. 

<왕자와 거지>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온다. 쌍둥이처럼 닮은 톰 칸티와 옷을 바꿔 입는 바람에 졸지에 거지가 되어 거리를 누비게 되는 왕자 에드워드는 동료(?) 거지가 훔친 새끼 돼지를 떠안기고 도망가는 바람에 붙잡혀 도둑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는다. 재판장은 새끼돼지의 주인인 여자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부인 이 아이를 교수형 받게 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여자는 화들짝 놀란다. “아니 이만한 일로 이 아이가 교수형을 당해요?” 

판사는 설명한다. “그게 법입니다. 훔친 물건이 6펜스 이상이면 교수형을 받지요.”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크게 저으며 그럴 수는 없노라고 자신이 새끼돼지 가격을 그 이하로 적겠노라 대답하고 서명한다. 그런데 이를 본 경찰관이 그녀의 뒤를 따라붙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머니 이 돼지 내게 3펜스에 파시오.” “아니 이 양반이 내가 10펜스를 주고 산 걸 어떻게 3펜스에 팔아요?”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부치자 경찰은 엄숙하게 말한다. “당신 판사 앞에서 위증을 했군.” 그리고는 돼지를 빼앗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 그 대목을 읽으며 사람이 나쁘면 참 한없이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와 소설들이 다시 생각나는 걸 보면 역시 내 영혼은 늙게 태어나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다. 마크 트웨인이 오고 오스카 와일드가 떠난 날 우리 나이로 마흔 세 살이 되는 (내 나이를 헛갈리다니! 참 심신이 미약해지고 있다) 나는 문득 그들이 내게 선물했던 아름다운 이야기와 추악한 인간상을 되씹으며 긴긴 밤을 지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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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2.1 로사 파크스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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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의 용기

짐 크로우 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짐 크로우’는 1830년대 뮤지칼의 배역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점차 미국 내 흑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사용되게 됐고 ‘짐 크로우법’은 흑인들을 박해하고 차별하기 위해 제정한 흑백 분리법을 뜻하는 말이 됐다고 한다. 이 법에 따르면 흑백의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기차 안에서 같은 객차에 탈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차별은 20세기도 중반을 넘길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버스 좌석도 그랬다. 흑인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은 정해져 있었고, 백인이 오면 지체없이 일어서서 다른 자리로 가야 하거나 서서 가야 했다. 미국 남부의 상식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법이었고 짐 크로우 법은 미국 대법원에 의해서도 그 합법성을 여러 차례 인정받고 있는 ‘현행법’이었다.그 법의 취지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분리하지만 평등하다.” 즉 흑백을 분리하여 다른 차에 태우더라도 그 대우가 동등하면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말이 그렇지 뜻이 그렇지 않은 건 미국도 마찬가지라 그 대우가 동등할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1955년 12월 1일까지도 흑인들은 묵묵히 그 법을 지켜야 했다. 백인들이 오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줘야 했고 백인 운전수들은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개 잡듯 총을 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1955년 12월 1일 그 역사가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로사 파크스라는 백화점 양복 코너 직원이 있었다. 그녀가 사는 앨라바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도 짐 크로우법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하루 일의 피로에 지친 로사는 백인이 없을 시에는 유색인종이 이용가능한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운전사 제임스 블레이크의 불호령이 들렸다. “어이 검둥이! 어서 일어나 너희들 자리로 가란 말이야!” 


퍼뜩 눈을 떠 보니 백인 한 명이 자신 앞에 서 있었고 곁에 있던 흑인들은 양순히 뒤쪽으로 움직인 뒤였다. 여느 때 같았으면 로사도 엉거주춤 일어나 불만스럽 입술을 실룩이며 뒷좌석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은 로사가 너무 피곤했다. 또한 마음도 피곤했다. 희한한 짐승 다 본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백인의 눈초리, 얼굴이 뻘개진 백인 운전사의 얼굴, 그 모두가 로사의 마음을 후려치고 짓밟고 있었다. 로사는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위해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 


경천동지였다. 백인 운전사는 즉시 경찰서로 차를 몬다. 법은 지켜져야 했고 그 법은 백인들의 권리와 이익고 욕망을 보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경찰은 이 불법적인 여인의 ‘개김’을 위법한 것으로 보고 그녀를 체포한다. 


권총 차고 수갑 내미는 경찰의 위압감 앞에서 “내가 미쳤지!” 가슴을 치면서 “다시는 안그럴께요” 하고 울먹일 수도 있었겠지만, 전국 흑인지위 향상 협회 회원이었던 로사는 내친김에 자신의 사건을 공론화해 보겠다는 또 하나의 용기를 낸다. 법정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존엄은 어떤 법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죄목 하나가 더 추가된다. 검둥이의 존엄을 법 위에 두었다는 이유였을까. ‘법정모독죄’였다.


그녀의 사건이 알려지면서 흑인 사회는 들끓기 시작했다. 그녀의 공판이 시작된 12월 5일 스물 일곱의 젊은 흑인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목사들은 흑인들에게 버스를 보이콧할 것을 주창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는 마침내 굴욕적인 태도로 버스를 타느니 존엄을 지키며 걸어다니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영혼을 혹사하느니 다리를 혹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우리는 몽고메리 시내를 걸어다니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쇠약해진 불의의 벽은 정의의 망치에 두들겨 맞아 허물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제창한 사람들조차 버스 보이콧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버스를 타지 않으면 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60퍼센트만 보이콧 운동에 응해 주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12월 6일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거의 100퍼센트의 흑인들이 보이콧에 응하여 걷고 또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텅텅 빈 버스의 백인 운전수들은 망연한 얼굴로 그 검은 행진을 쳐다보았고 흑인들은 버스 안에서는 결코 드러내지 못했던 당당한 표정으로 몽고메리 시의 거리를 활보했다. 차가 있는 흑인들은 자신의 차를 방향이 같은 흑인들과 함께 이용했다.


노예 해방 이후로도 노예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흑인들, 즐겨 짐승으로 비하했고 백인 여자에게 치근대기라도 했다간 사람을 해친 동물원의 동물처럼 도살되기 일쑤였던 흑인들은 이 보이콧으로 자신들이 존엄을 가진 인간이며, 무엇보다 불의한 법에 단결할 줄 아는 인간임을 선포했다.


단시일에 끝난 것도 아니었다. 버스 보이콧은 1년을 끌었다. 그리고 백인들은 흑인들의 카풀을 금지한다는 꼼수까지 부리며 흑인들의 기를 죽이려고 들었지만 결국 연방법원은 버스 내 인종분리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흑인들의 승리였다. 


버스 좌석을 얻고 얻지 않고의 승리가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든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의 승리였고, 인간의 존엄을 모토로 하는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내 발은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편안하다.”고 했던 참가자 마더 폴라드의 말처럼, 흑인들은 자신들의 불이익과 피로감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일당을 털어 이 운동을 후원했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수 킬로미터를 걸었다. 차를 몰고 가는 흑인들은 툭하면 창문을 열고 거리의 흑인들에게 물었다. “어디 가요? 아 거기? 타쇼! 조금 돌면 되지 뭐!” 그리고 그들은 승리했다.


장담컨대 한국에서 이런 형태의 연대가 행해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1년씩이나 끄는 끈기가 뒷받침된다면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바뀔 것이다. 버스 파업하면 내일 출근 걱정하면서 개새끼들 배때기가 불러 가지고.....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의 수가 준다면, 지하철 파업하면 기관사 멱살이나 잡는 사람들의 결기가 없어진다면, 노동 조직률이 세계에서도 알아줄만큼 낮은 나라에 살면서 “노조가 나라 망친다.”는 복날 가마솥 속 개가 웃을 소리가 사라진다면, 대한민국에서의 변화는 1년도 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좀 서글프다. 로사 파크스는 불의한 법에 저항하여 자리에 앉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꾸었지만 한국에서는 스무 명이 넘는 목숨이 사라지고 이 추운 날에 고공의 철탑에 올라가 ‘법을 지키라’고 외쳐도 오불관언 마이동풍인 나라 아닌가.

12월 19일 정권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오십보 백보라지만 오십보 이후에는 유턴 금지선이 그어져 있을 것 같다. 그나마 유턴이 가능하고 백보까지는 안간 정권이 들어서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실행에 옮길 열망들이 정권의 교체에 수그러들지 말고, 정말로 존엄한 인간이 사는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양보할 줄 알고 지킬 것을 지킬 줄 알게 되어, 정권 교체 따위의 명제 이상으로 인간의 존엄이라는 화두에 대해 “아직도 우리는 배가 고프다.”고 말하며 생존과 인권을 위협받는 이들의 손을 함께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노무현 정권 때 “왜 노동계가 노짱의 발목을 잡느냐?”는 식으로 묻는 이들은 사실 앨라배마의 백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음을 기억하면서, 적어도 앞으로는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일단 12월 19일 이기기는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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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2.2 그란마호 쿠바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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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 쿠바 상륙 

스페인에서 쿠바로 온 이주민이었던 앙헬 카스트로는 풍족한 지주는 못되었지만 그런대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부였다. 이 앙헬 카스트로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스페인 남자였던 모양이다.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결혼 생활 중 가정부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였으니까. 그는 이 바람기로 인해 20세기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을 세상에 내놓는 행운(불운
?)아가 된다. 그 5명의 사생아 가운데 둘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막내의 이름은 라울. 지금 세계 최장수 국방장관 (근 50년째!)인 바로 그다. 

언젠가 80을 훌쩍 넘은 피델 카스트로가 한국과 일본의 WBC 야구 결승전을 보면서 봉중근이 일본에 노출된 것을 한국의 패인으로 지적하면서도 그 경기 내용에 경탄을 금치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실력도 꽤 괜찮아서 뉴욕 양키즈에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었다고 하는데 그를 불합격시켜버린 뉴욕 양키즈로서는 두고두고 미국 턱 밑의 종기가 될 위인 하나를 낫질할 기회를 박찬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가 됐고 쿠바를 숫제 자신의 영토로 치부하는 미국과 그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는 혁명 투사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천재적이거나 레닌처럼 치밀한 사람이 못되었다. 야구로 치면 그는 일단 휘두르고 보는 타자였고 번트 따위는 댈 생각 없이 치고 달리는 히트 앤드 런 신봉자였다. 

1953년 7월 26일 소규모 군중을 이끌고 대담하게도 몬카다의 정부군 병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투수 류현진의 공을 레프트 담장으로 넘기겠다고 배트를 휘두르는 리틀 야구 선수 같았다. 당연히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 쿠바의 소농 85퍼센트는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늘 계약 해지를 통고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비옥한 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의 손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오리엔테 지방에서도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해안가 토지 대부분은 미국 과일회사와 서인도제도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부조리합니다.(…)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유명한 열변으로 이 혁명의 리틀 야구 선수는 일약 혁명 야구팀의 유망주로 부상한다. 15년 징역을 선고받지만 그나마 여론의 압력으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절치부심 새로운 기회를 노린다. 그는 멕시코에서 그의 강력하지만 컨트롤 안되는 강속구를 받아 줄 멋진 배터리를 만난다. 바로 체 게바라가 그였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피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체 게바라)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 동료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부터 맹훈련을 받으며 혁명의 구질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1956년 11월 멕시코의 한 해변으로부터 그란마 호라는 오래된 배에 오른다. 정원이 20명이 될까말까한 배에 82명이 올라탔고 FBI와 멕시코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장 불편한 항로를 택한 이 신흥 혁명 야구단은 일주일이 넘는 항해 동안 거의 초주검이 된다. 그들의 배 ‘할머니’ (그란마)는 쿠바 땅을 눈앞에 둔 산호초 지역에서 좌초하고 말았고 이 풋내기 혁명 야구단은 일동 입수하여 헤엄을 죽을 듯이 쳐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이었다. 

허구헌날 삼진 아웃을 당하고 알이나 까던 혁명 야구단이 마침내 1루 베이스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시원한 안타를 친 것이 아니라 내야 안타를 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서 겨우 이뤄낸 세이프였고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거기에 이 풋내기들의 1루 진루를 허용하여 노히트 노런을 놓친 상대팀 에이스들과 타자들은 그야말로 맹렬한 공격을 가해 왔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톡톡히 재미를 봤던 네이팜탄을 뿌려 대는 전폭기들이 일어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혁명군들을 폭격해 왔던 것이다. 죽음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고, 실제로 죽을 고비 넘기며 카리브 해를 헤쳐 온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결국 남은 것은 스무 명 뿐이었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병력은 3만. 이쪽은 스무 명. 아마튜어 야구같으면 콜드 게임이 나도 여러 번 날 스코어였지만 혁명 야구단은 왜소하긴 해도 프로였다. 1956년 12월 2일 1루 베이스를 밟고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 이래 카스트로와 게바라 원투 펀치를 지닌 쿠바 혁명 야구단은 바티스타 측의 살벌한 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며 그 실력을 불려 나갔고 마침내 미국팀의 쿠바 용병 바티스타를 두들겨 강판시킨다. 쿠바 혁명이었다. 그 뒤 미국이 직접 나서서 이 버릇장머리없는 쿠바 혁명 야구단에게 빈볼부터 싱커까지 별별 공을 다 던졌지만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쿠바가 행복해졌느냐?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옆 나라 아이티를 보라는 것이다. 혁명이 없었다면 쿠바의 바티스타는 수십 년 정권을 누리다가 자식에게나 넘겨주면서 그 배를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불렸을 것이 뻔하고, 그럴 때 쿠바의 형편이 진흙 과자로 배를 채우는 아이티 사람들과 크게 차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6년 12월 2일 낡아빠진 배를 타고 한 나라를 전복시키려고 온 80여 명의 남자들, 산호초에 걸린 배를 버리고 장비 짊어진 채 수 킬로미터를 수영하여 그 땅을 밟은 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그 이념의 정체를 떠나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역사에는 수많은 기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이들이 이룬 기적은 그 기적의 랭킹 순위에서 절대로 다섯 손가락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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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2.3 다대포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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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12월 3일 다대포의 두 간첩 

1983년 12월 4일 아침의 학교 교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그 돼지띠 해는 정말이지 시끄러운 한 해였다. 소련군에 의해 대한항공기가 격추됐고 아웅산에서는 북한이 전두환을 노린 폭탄을 터뜨려 외교 사절들이 죽었다. 그런데 12월 4일 아침이 소란했던 것은 바로 전날인 12월 3일 우리가 사는 도시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다가 잡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문제의 장
소는 다대포라는 곳이었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바로 지난 여름에 신나게 헤엄치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생포된 간첩은 두 명. 전충남 이상규라고 하는 이름이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그들의 모습은 수없이 반복되어 방송되었고 그 생포의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식(?)은 구덕운동장 (사직 이전 부산의 최대 규모 운동장)에서 요란하게 개최E됐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보도에 따르면 해안가를 지키는 방위병들이 공비를 때려잡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아니라 공비가 올 줄 알고 해안가에는 특수부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고도로 훈련된 무장공비를 제압한 실력은 방위병 아닌 특수부대원들의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실 내가 봐도 우리 옆집 방위 아저씨같은 사람들이 어마무시한 특수공작원의 덮치고 팔을 비틀고 무장해제하는 전광석화를 실현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수수께끼는 20년 뒤에야 풀렸다. 

중앙일보 2003년 9월 25일자에 따르면 대한민국 공식 군인 명단에도 없는 특수부대원들 은 그 해 11월 초부터 이미 해안가로 침투하는 대상을 제압, 생포하는 훈련을 피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치질도 하지 못했고 비누도 금지됐다. 그렇게 한달을 반복한 뒤 그들은 부산으로 향했다. 휴게실 사용이 금지된 채 갓길에 오줌 눠 가며 도착한 부산에서 그들은 임무를 하달받는다. 고정간첩과 접선하는 무장공비들을 생포하는 것. 접선장소는 다대포 해안 근처의 공중화장실이었다고 하는데 특수부대원들은 그 퀴퀴한 곳에서 숨죽여 간첩들을 기다린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고 대원들은 둘을 제압하고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면 대원들 역시 죽은 목숨에 가까웠다. 인근에는 공수부대 1개 대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53사단 병사들 1개 연대가 완전무장하고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누가 공비인지 누가 특수부대원인지 모를 상황에서 생포작전이 실패했더라면 특수부대원 역시 벌집이 되어 백사장에 쓰러져 공비 일당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 중의 하나를 하는 5년 뒤에 먼발치에서나마 만났다. 전충남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문무대에 나타나 고려대 1학년생들에게 반공 강연을 했다. 문무대 입소 첫날 문무대장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개겼던 탓에 일반 교육 과정에서는 큰 물의 없이 진행하던 (마지막 날은 사단이 났지만) 중이었기에 별다른 시비 없이 강연을 끝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강연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충남이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곯아 떨어져서 강연 후 의례적으로 쳐 주는 박수 소리에 깨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문무대에 들어갔던 모학교 1학년들은 더 과격했던 모양이다. 전충남이 강연할 때 약간의 소요가 있었던 것이다. “저 새끼 어용이다!!!”고 누군가 고함을 지르고 야유도 터져 나와서 그렇게 순탄하게 강연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모 학교 1학년생 중의 한 명이었던 사촌형의 전언에 따르면 강연 후 전충남과 조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충남은 슬픈 얼굴로 이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학생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임다.” 

사실 그도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그라서 남쪽으로 오고 싶어 왔을 것이며 완전히 노출된 허당 작전의 희생양이 되어 ‘적’에게 체포되어 또 다른 인생을 억지로라도 살아내야 했던 그 젊음은 또 얼마나 고역이었을 것인가. 북에 남아 있을 그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반공 강연을 하고 다니는 그는 북에 남은 가족들의 얼굴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을 것인가. 그런데 그를 체포했던 특수부대원들은 북파부대원들이었다. 즉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군인도 아니었고 다대포 작전 이전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쓰고 왔다고 한다. 그들의 선배들은 또 얼마나 북한의 해안가나 산간 지역에서 맞아 죽거나 체포되어 수령님의 품에 안겨야 했을까. 

견고하게 움직이지 않는 박근혜 후보의 표를 보면 6.25의 3년과 그 이후 남북 공히 수십 년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의 목을 따 오기도 하고 수틀리면 특수부대원을 침투시켜 쑥밭을 만드는 일을 다반사로 했던 한랭한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자식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70년대만 해도 북한 공작원 단 3명이 충청도 해안으로 상륙하여 20만 명의 군 포위망을 뚫고 신출귀몰하다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부르면서 휴전선을 넘어간 일을 비롯해서 북한 공작원들이 출현하여 민간인들을 습격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등산하다가 약초 캐다가 휴가 신고 가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은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다대포 간첩 사건 당시 아버지는 생애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언젠가 홀로 등산 후 하산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산간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 산간 마을이 몽땅 소개된 상태였다. 즉 북한 공작원들이 나타나 비상이 걸린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산골 지서의 순경을 만나기까지 수십 분..... 아버지는 공포로 미칠 것 같아서 나는 듯이 뛰었고 나중에는 무서워서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 했다. 

공포의 세월은 참 길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숨막히는 긴급조치에 대한 또 다른 색깔의 공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문신처럼 새겨지던 세월이 있었다. 그 세월이 뭉치고 이겨져서 만들어낸 시멘트들은 참 징그럽게도 거대하게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문제는 그 시멘트들이 공포를 줄이고 없애는 성벽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되레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멘트를 뚫어낼 무기는 무엇일까. 참 감이 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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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14 부서진 대동강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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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0년 12월 4일 대동강 철교 

도진아. 언젠가 네가 문득 한 말이 떠오르는구나. 연평도 포격 때였나. “정말 이러면 한 번 붙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분기탱천해서 한 네 말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남한이 무슨 일을 했건 북한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 행위를 하지 않은 한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은 죄악이고,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버릇을 고치는 게 맞았다고 봐. 하지
만 그렇게 주먹을 부르쥐다가도 급브레이크를 거는 몇 개의 허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1950년 12월 4일 세상에 나왔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 함락 직전 한국군 수뇌부는 어처구니없는 한강 폭파 작전으로 한강 인도교를 날려 버린다. 적의 거침없는 진군을 막는 고육책이었다지만 고육책치고도 너무 아둔하고 성급했지. 전세가 역전됐을 때 인민군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어. 평양 쟁탈전을 벌이는 미군과 한국군이 득달같이 달려들 때에도 침착하게 미군의 선봉 부대가 거의 다리를 밟기 직전에 경의선 대동강 철교와 대동교 폭파를 실행했다. 그때 별 도하 장비가 없던 한국군 1사단이 장비 차고 넘치는미군을 제치고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게 되는데 그건 사단장 백선엽이 강의 얕은 여울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지. 약이 바싹 오른 미군 지휘관이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물었을 때 백선엽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긴 내 고향이오. 어릴 적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놀았소.” 

공식적 평양 입성 기록이 10월 19일이었지. 그런데 그 좋았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해. 이미 평양 입성 만세를 부를 때 중공군들은 소리없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고 많은 병력은 이미 한반도 안에 들어와 있었거든. 멋모르고 압록강 두만강을 목표로 전진하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들에게 제대로 된 뒤통수를 맞는다.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엄숙히 얘기했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지. 그때쯤이면 새로운 전쟁은 시작이 아니라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경쟁을 벌이던 그 기세만큼이나 맹렬한 철수 작전을 벌이게 돼. 

11월 26일 중공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취한다. 이미 청천강 전투에서 호되게 맛을 본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시작해. 그게 공식적으로는 12월 4일이다. 두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철교를 재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기록들은 UN군이 또 대동강 철교를 폭파했다고 얘기하고 있네. 군인들은 공병대가 건설한 부교를 건너 남쪽으로 향했지. 이미 겨울이 들이닥친 대동강물 위에 띄워진 부교를 부지런히 건너던 미군 병사들 틈에는 막스 데스퍼라는 사진 기자가 끼어 있었어. 덜덜 떨면서 갓뎀 차이니즈 하면서 투덜투덜거리면서 다리를 건너던 그는 입을 벌린 채 멈춰 서 버렸다. 그 눈 앞에는 부서진 대동강 철교가 있었고 그 부서진 쇳덩이 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대동강 철교의 젓가락처럼 부서지고 엿가락처럼 휜 교각 위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있었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다리 위에서 목숨을 건 평균대 걷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데스퍼 기자의 눈 앞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교각 위에서 비명과 함께 대동강 시퍼런 물로 떨어지고 있었어. 등짐을 지고 보따리를 이고서 애들 손까지 잡고서 사람들은 부서진 대동강 철교의 교각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누군가 미끄러져 교각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도와줄 수도 없었고 도울 사람도 없었어. 안타까이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지르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면 그를 부르는 가족들의 찢어지는 비명만 남을 뿐. 데스퍼 기자는 2차 세계대전 등 주요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지만 이런 꼴은 평생 처음이었어. 그는 미친듯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퓰리처상에 빛나는(?) 사진을 역사에 남기게 되지. 

가끔 이 사진을 자세히 볼 때가 있어. 한 번 이미지 띄워 놓고 확대해서 보기 바란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읽힌다. 어떻게든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채 쪼그리고 앉아서는 무릎구름으로 걷는 사람들. 어디가 그나마 안전하고 확실한 통로인지 몰라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는 이, 뒷 사람을 돌아보며 조심하라우 말하고 있는 듯한 등짐진 남자. 덱스퍼에 따르면 교각 북쪽으로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교각이라도 타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었다고 했지.

데스퍼 기자는 얘기해. “군인들을 따라가야 했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대동강 철교 말고도 눈 속에 파묻혀 숨구멍을 내고 쌕쌕거리다가 그예 얼어죽은 아이들, 이미 숨이 끊어진 엄마의 품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발길이 떨어질 수 있었겠니. 45년 사진 기자 생활 가운데 최악의 풍경을 그는 1950년 12월 4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전쟁이란 그런 거야. 도진아. “까짓거 한 번 붙어야” 하는 게 전쟁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용기는 저런 참극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막 걷기 시작했다는 네 조카가 부서진 다리의 차가운 교각에 엄마 품 마냥 바싹 달라붙어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전쟁이고, 어제 막걸리 나누며 승리를 기원하던 아저씨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짐승같은 비명을 지르며 물 위로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킨 뒤 영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감수해야 하는 게 전쟁이야. 차라리 죽은 사람들은 끝나지만 그 풍경을 보고 당하고 겪은 사람들의 상처는 평생을 가고 후대들까지 괴롭히게 되는 거. 그게 전쟁이야. 

저 대동강 철교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연평도 같은 짓을 또 한 번 벌이면 그때는 국물도 없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저 사진만 보면 생각을 정돈하게 된다. 전쟁은 없어야 해.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불행한 민간인들로서 우리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고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정치를 선택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거다. 

어제 너도 본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그런 말을 했지. “퍼주기로 이뤄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북한에게 더 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성공단같은 것도 두어 개 더 만들고 금강산 관광도 민간인 피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 사과를 ‘끌어낸’ (안하겠다는 넘 하게 만드는 것도 정치다) 후 금강산 관광도 재개하고 개성도 개방하고 묘향산도 열어서 북한에게 더 많은 것을 안겨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에게 잃고 싶지 않고, 지키고 싶은 존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니. 대동강 물에 빠져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다를 것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으며, 굶어 죽어가는 식구를 지켜보며 피눈물 흘린 이들의 안중에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니. 

결국 퍼주기(?)가 중단되고 ‘안보’를 신줏단지로 모시는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요즘, 내 짧은 생애에서 전쟁의 공포를 느꼈고, 느끼고 있는 것에 나는 가끔 절망한다. 또한 북쪽의 덜떨어진 정권도 자신들의 인민과 남의 국민을 상대로 치킨 게임을 종종 시도하는 것에 부아가 치민다. 그 틈바구니에서 너와 나는 선택을 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저 대동강 철교를 다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너와 내 가족이 교각 위에서 엉엉 울면서 하나님 부처님을 찾을 일이 없도록 만들 수 있는지. 북한이 서툴게 나오면 아작을 내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여기는 네 생각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꼭 이 사진을 떠올리기 바란다. 1950년 12월 4일 우리의 모습이다. 2012년 12월 4일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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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 이게 왜 흉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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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보다가 박근혜 대표의 흉탄 소리에 좀 기가 막혀서 옛 글  끌어옴.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 앞에서 신군부라는 이름의 흡혈귀가 포식을 위한 마지막 호흡을 고르고 있던 1980년 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는 삭막한 사형의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던" 김재규 이하 그 명령을 받아 10.26 당일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 직원들을 쏘았던 이들 모두가 전격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법원 항소 기각 3일만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사형 판결 다음날 인혁당 관련자들의 목을 매달아 버린 박정희 대통령보다 이틀 더 관대했다.

물론 그날 죽어간 사람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중앙정보부의 수장과 그 요원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유린하고 치켜들었던 ‘유신’의 기라졸(옛 조선 군대에서 깃발로 신호하던 졸병)이며 타도당해 마땅한 정권의 수족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철저한, 아니 무정하기까지 한 무관심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소한 그 시점의 박정희는 심신이 피폐하고 이성을 상실해가는 독재자였다. 10.26 당일 현장에서 총을 맞고 ‘각하’를 감싸기는커녕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마지막 일발을 맞고 절명했던 또 하나의 무소불위의 권력 경호실장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이 죽어도 괜찮았는데...."를 뇌까릴 때 고개를 끄덕이던 예비 살인마였다. 그리고 거사에 가담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자식 둔 아버지로서 도무지 못할 짓"을 해 가며 여자를 갖다 바쳐야 했던 호색한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승길을 떠나는 자리에서조차 두 명의 여인이 있었거니와, 각하의 심야 ‘행사’를 위해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채홍사’ 노릇을 해야 했다. 이쯤 되면 기쁨조의 원조는 김정일이 아니라 박정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현역 대령이자 육사 18기의 선두 주자로 자타가 공인했던 박흥주 대령 (현역 군인이라 단심제가 적용, 일찍 총살됐다)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서 김재규에게 박정희를 죽인 총을 건넸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가 다시 날려보내는 위세를 부린 중앙정보부의 부장님의 최측근으로서 그는 놀랄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하다못해 지역 정보부원 나부랭이도 맘만 먹으면 집 몇 채가 일도 아니던 시절, 그는 서민층들과 어울려 허름한 집에서 살았고, 그 형제들도 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형편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올 것 같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유족들에게 연금은 어떻게 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했다가 “각하를 죽인 일당한테 뭔 연금?” 이라며 퇴짜를 맞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박흥주 대령은 유서에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들을 위해 할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도와 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신군부 시절에는 그들의 유족에게 험악한 감시와 모멸의 눈길을, 그리고 그 후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민주화가 진행되고, 그 시절의 사형수가 여당의 핵심이 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대관절 왜 그랬을까. 혹여 '국가 원수 시해'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우리 안에 내재된 무엇인가의 발동은 아니었을까. 단지 그들이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능하다 정권의 위기를 맞아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던" 이유만으로 오늘 사라진 그들을 그렇게 완벽하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유신 시절의 ‘민주 인사’에게 누군가 김재규 이하 오늘 죽어간 사람들의 신원을 건의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어흠 그래도 대통령을 죽인 사람들인데.”

박흥주 대령의 딸들은 어느 날 집을 찾아온 카메라 앞에서 하염없이 울면서 자신들의 고사리손으로 쓴 플래카드를 내보였다.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자식 너로다.....라고 노래하듯 고지식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항소의 권리 없이 단심제로 재판은 끝났다. 박흥주 대령은 두 달 먼저 총살당했다. 그가 두 딸에게 남긴 편지를 읽다 보면 눈물이 핑 돌다가 결국은 봄날 고드름처럼 뚝뚝 떨어지고 만다.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를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 한다. ...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독재의 강퍅함과 비인간성은 그 자체로 해롭지만 가장 큰 악영향 중의 하나는 그 주변과 시대의 사람들을 망쳐 놓는다는 데에 있다. 멀쩡한 사람들을 바보나 악당으로 만든다거나, 독재만 아니었으면 정직하고도 모범적으로 일생을 마쳤을 사람들을 보상도 없는 역사의 희생자로 만들어 망각의 늪에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차마 이것만큼은 감당할 수 없으며 내 가족과 내 양심에 비추어 이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람들의 명예는 지금도 생매장당한 채 바윗돌에 눌려 있다

사진은 박흥주 대령의 두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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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5 국민교육헌장 -> 시민선거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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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반포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 대통령만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그는 일종의 일본 매니아였다. 술 취하면 일본 군가를 부르고 “배꼽 아래에는 인격이 없다.”는 일본의 양아치스러운 격언을 주워섬겼다는 그는 조금 집요하게 보일 정도로 일본의 역사를 모방하려 들었다. 쿠데타를 꿈꾸는 내내 그의 머리에 들어 있었던 것은 “부패한 재벌과 군 상층부를 벌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일본군 장교들이었으며 (2.26 사건) 자신의 독재 정권의 수립에는 하필이면 ‘유신’(維新)이라는 칭호를 붙여야 했다. 1968년 12월 5일의 ‘국민교육헌장’도 사실 일본 메이지 천황이 발표했던 ‘교육 칙어’의 판박이였다.

 

나는 그런 횡액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내 또래의 친구들은 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 쓰는 숙제를 이행한 이들이 많았다. 아마 나보다 연배가 더 올라갔으면 그 비율 또한 더 올라갔으리라. 그리 긴 문장은 아니었지만 말 자체가 딱딱하고 좋은 단어는 다 갖다 붙인 듯 오만한 문장이라 사실 외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헛갈리는 아이들 머리통 갈기며 “이 돌대가리!”라고 퍼붓기에는 안성맞춤인 글이었다.

 

1968년 12월 5일은 이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 날이었다. 당시 대통령으로서 이를 공포하신 분의 따님이 아버지의 직위를 차고 앉기 7부 능선에 도사리고 계신 2012년 12월 5일 , 나는 다음과 같은 시민 선거 헌장을 반포하는 바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회복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이 땅에 살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고 압제에 일어났던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인간 존엄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선거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판단과 튼튼한 의지로 흑색선전과 금전공세를 물리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꼴통근성을 개발새발 늘어놓는 조중동의 광분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역사 창조의 힘과 민주주의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정의를 위한 질서를 앞세우며 행복을 위한 노동과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법을 지키라 외치며 저 높은 곳에 오른 이들을 기억하고, 고통 속에 목숨 끊어간 이들을 잊지 않는, 뜨거운 연대와 협동 정신을 힘차게 북돋운다.

 

우리의 관심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의 참여가 나라의 융성과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인간의 최소한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민주주의 건설에 참여하고 향유하는 봉사하는 공화국의 정신을 드높인다.

 

어떠한 독재와 독점에도 반대하는 민주 정신에 투철한 형제애 자매애가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로운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자유롭고 평화로우며보다 많은 이가 행복하고 만족하는 복지 사회의 앞날을 내다보며, 이승만을 물리치고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던 신념과 긍지를 지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모두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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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6 어느 위인의 탁구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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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5년 12월 6일 어느 천재의 기묘한 일생 

1945년 12월 7일 조선일보의 한 귀퉁이에 짤막한 다섯 줄짜리 부고가 실렸다. “윤치호씨 병사(病死). 송도중학 설립자 윤치호씨는 (12월) 6일 오전 9시 개성 고려정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았다.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후 3시 송도중학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윤치호가 죽었다. 나이 여든 둘. 그 80 여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
과에 소년 급제할 만큼 영민했지만 서자 출신이라 무척 서러움을 받았던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난 윤치호. 그의 나이 열 세 살에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렸다. 굳게 닫힌 문호를 억지로 열어젖힌 것은 일본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일제히 조선 땅에 공사관을 세웠고 새로운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청년 윤치호는 이 신문물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가진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선 천지를 벗어나 존재하는 생판 새롭고 거대한 세상의 공기를 마신다. 이렇게 생소한 경험을 한 인간들은 대개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 새로운 것에 열광하긴 하는데 돌아와서는 깡그리 잊어먹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는 사람, 역시 머리를 싸매기는 하는데 우리는 안될 거야 아마..... 로 빠지면서 새로움을 일궈낸 대상에 찬미를 보내는 사람 등등... 윤치호는 맨 마지막 부류였다. 

그의 일생은 매우 복잡하고 오묘하며 애매하고 모호하다. 전라도 말로 참 거시기하다. 물론 무 베듯 잘라 얘기하자면 그는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원로격 친일파였다. 세계를 알아가던 시절, 그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이건 윤치호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당시 개화를 주창한 이들 대부분은 “우리도 일본처럼”을 모토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갑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민영익 등에게 칼을 휘두른 이후 개화파가 달려갔던 것은 국왕이 있는 경복궁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이지 않았겠는가. 

젊은 날의 윤치호의 눈에 자신의 고국은 정녕으로 한심하고 아둔한 나라였다. 왕비 척족들이 온 나라를 거덜내고 사또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제 배 챙기기 바쁘고 지식인이란 것들은 아직도 서양 오랑캐 타령하고 앉았고......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도망가고 이후 미국까지 건너가 넓은 세상을 본 윤치호에게는 더욱 그랬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라고 나이 스물 다섯의 청년은 땅을 쳤고 스물 일곱 되던 해의 봄에는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라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조선에서 흔치 않은 국제적 경험자이자 열등감의 덩어리였던 그는 귀국 후 열정적인 개화 운동에 나선다. 독립신문의 주필,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등을 도맡으며 국민들에게 요즘의 구호를 조금 컨닝하여 말하면 “미래는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그 내부 안에서 탁구대 하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핑퐁핑퐁 그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분노하면서도 “흑인들을 데리고 와서 영어 가르쳐 줬으면 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중성, 자신의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젊은이들에게 대한의 영광을 얘기하고 ‘애국가’ 가사를 지으면서도 툭하면 자신의 나라와 백성에 저주에 가까운 한탄을 내뱉는 양가감정,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러일전쟁은 동양인의 승리라고 찬미하는 어수선함,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을사조약의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그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행동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 미적거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를 노래하며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안창호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방황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못하는 머뭇댐의 연속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증오하여 붓으로는 엄중히 규탄했으나 그들을 응징하려는 움직이에는 발끝 하나 대지 않았다. 결국 그의 공은 결코 그 마음 속 탁구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1차 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사람들의 귓전을 어지럽히고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담에서 조선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 논의될 것이라는 착각이 야무지게 난무할 때,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 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시원스럽게 현실을 일깨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파리 강화 회의장에서 뭘 어째 보겠다는 인사들은 아둔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아둔패기들 가운데에는 베트남의 호치민도 있었다. 어떤 이는 좌절을 경험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만 어떤 이는 좌절을 예측하고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는다. 

윤치호는 자신이 보기에 가능한 일에는 열정을 쏟았지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도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운동하는 이들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고 3.1 운동에도 참여를 거부했다.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결국 그의 주장은 철저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현실론이었다.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이란 곧 경제력이고 민도(民度)이며, 그게 안되는데 무슨 독립이며 투쟁이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쯤되면 그는 민족개조론의 이광수와 영혼으로 만나는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향후 행보는 춘원 이광수의 그것과 매우 높은 일치율을 보인다. 

또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한 탁구대 인생을 선보인다. 독립운동가를 비판하면서도 상해에서 활동하던 양기탁이 잡혀왔을 때에는 유배지까지 천리 길 마다 않고 달려가 그를 만났고 충무공 유적보존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즉 일본으로서는 별로 환영하기 어려운 인물의) 터전을 지켜낸 사람이었고 도산 안창호가 혹독한 옥고 끝에 죽었을 때에는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일본 제국에 거역하지 않음을 수십 년 동안 천명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았고, 무슨 사건만 터지면 일본 경찰은 윤치호에 대한 감시의 폭을 높였으니 이 복잡하고 오묘한 사람의 인생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해방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보다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이비 애국자’들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자신의 일제 시대 행각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런 행동이 자신이 평생을 지켜 온 탁구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그가 1945년 12월 6일 죽었다. 뇌일혈이었지만 항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죄책감으로, 또는 억울함으로 등등 )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의 수십 년을 일기로 남겼다. 초반에는 한문으로, 다음에는 한글로, 그리고 그 후에는 유창한 영어로. 그가 친일파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는 그와 그의 일생과 그가 지켜본 세상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따위 친일파 일기 따위 봐서 뭐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역사에 대해 오만한 자세일 뿐. 유영렬이 지은 <개화기 윤치호 연구>의 서문에 나는 공감한다. 

“역사적 인물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위인이나 열사의 공적을 밝히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여 역사의 진실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격랑(激浪)을 올바로 헤쳐나간 인물뿐만 아니라 그 격랑에 휩쓸려 빗나간 인물에 대한 연구도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윤치호는 누구일까? 윤치호처럼 천재는 드물겠지만 그 같은 탁구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조금 더 많지 않을까? 뭐 거울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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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2. 7 빌리 브란트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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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의 사과 

눈 오기 직전의 서울 날씨랄까. 하늘은 잔뜩 찌푸려 뭔가를 세상에 뿌려버릴 기세 역력하고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지나는 사람의 살갗을 북북 긁고 지나가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는 한 명의 귀빈이 와 있었다.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그였다. 사회주의 형제국인 동독이 아닌 서독의 수상 빌리 브란트였다. 

남과 북의 코리아에 댈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단된 동과 서의 도이칠란트는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 복무하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는 1956년 서독 외무 차관 할시타인이 발표했고 할시타인 원칙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서독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서독만이 국제법상 존재하는 유일한 독일국가이며, 따라서 전 독일민족을 대표하고 그 이름 아래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었다. 역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를 주장하던 남한의 정부도 할시타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남한이나 서독에게나 자승자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적대국과 수교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손을 끊는 것은 이래저래 손해였던 것이다. 결국 서독은 1967년 루마니아와 수교함으로써 할시타인 원칙의 굴레로부터 일단 벗어난다.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는 4월 12일에는 서독의 평화협정과 긴장완화 정책을 발표 하였으며, 4월 20일 '할슈타인 원칙' 폐기 가능성과 동독 인정 가능성을 발표함으로써 기존의 정책에 일대 변혁을 가했다. 이른바 ‘동방정책’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 것이다.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 개전의 신호탄을 쏜 폴란드 침공과 뒤이은 학정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폴란드인들이 독일인들에 대해 품는 감정은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들이붓는 감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도 독일의 옛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날선 시선이 있었고, 독일군의 오리걸음과 그 군홧발소리를 떠올리며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든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을 맺기로 한 12월 7일 아침, 브란트는 어떤 장소를 찾았다. 자멘호파 거리의 넓은 광장이었다. 그 중앙에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기념비가 있었다. 

1943년 바르샤바에 있던 유대인 집단 수용 지역 게토에서 필사적인 반란의 불길이 솟았다. 죽음의 수용소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은 끌려가서 죽느니 싸우다 죽자는 각오로 나찌에 맞섰다. 봉기는 장렬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28일 동안 독일군 1500명이 죽었지만 5만 6천여명의 유태인들이 피살됐고 생존자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끌려갔다. 기념비는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독 수상이 기념비를 찾은 것이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온갖 방법으로 유태인 게토를 싹쓸이했던 가해자의 나라의 수상 브란트는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폴란드만큼 유태인이 고통받은 장소는 없다. 유태계 폴란드인에 대한 말살 책동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말이다. 

입을 꾹 다물고 기념비 앞에 선 서독 수상 앞에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다. 기념비 앞에 화환이 놓여졌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 게토의 생존자나 나찌의 압제를 경험한 폴란드인이라면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을지도 모른다. 화환에는 흑 백 황의 독일 국기의 테이프들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환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는 뒤로 물러선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일부 성미 급한 카메라맨들은 철수할 채비를 하던 그 순간, 브란트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기념비 앞에 덥석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경건하다기보다는 경악스러운 순간. 미친 듯한 플래쉬가 흐린 하늘을 밝히는 가운데 브란트는 30초 이상 무릎을 꿇고 손을 다잡았다. 그 자리에 있던 독일인이고 폴란드인이고 어안이 벙벙한 순간. 브란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독일의 현대사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그때 살해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브란트는 나찌에 복무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나찌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봉기의 소식을 들었다. 즉 바르샤바의 비극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빌어 역사적 책임을 모면하기에는 그의 민족에게 들이닥쳤던 역사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물론 그 무거움은 양심의 무게를 지닌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이 바르샤바의 봉기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비 앞에 무릎 꿇은 순간, 수백만 명이 탄성을 토해 냈고 빠개지는 듯 뭉클해 오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 진심어린 무릎 꿇음은 전후 독일인들의 반성의 상징이 됐고 동서 냉전의 역사는 새로운 걸음을 위한 신발끈을 동여맸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못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모든 가해자들은 대개 천수를 누리거나 잘 먹고 잘 살았고,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더라도 눈 가리고 아웅에 그쳤다. 때로는 그 사과를 ‘생까는’ 속내를 드러내 그들로부터 피해 입은 사람들은 허파가 뒤집히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통석의 념에 유감에 ‘아픔을 주었다’고 표현한 뒤에 식민 통치는 조선에 도움을 주었다는 둥 하는 망언을 서슴없이 쏟아붓는 일본인들도 있고,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은 분들을 위해 사죄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판결은 두 개라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전태일 열사에게 꽃을 가져가서는 그 앞에 있는 노동자는 치워 버렸던 분도 계셨으니까. 

진정한 사과는 어렵다. 피해자 뿐 아니라 제 3자, 나아가 가해자 자신까지도 감동시켜서 참회와 용서, 공감의 장을 만드는 사과는 쉬운 것이 아니다. 1970년의 브란트는 그 일에 성공했고 2012년 박근혜 후보는 그 일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기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진심으로 사과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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