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 개시
작년인가 89년 천안문 사태 때 발포 및 진압 명령을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됐던 한 장군이 다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천안문 앞 시위대를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을 정도였으면 어느 구석진 숲속에서 뒷머리에 총 맞고 묻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중국군 제 38군 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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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 개시
작년인가 89년 천안문 사태 때 발포 및 진압 명령을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됐던 한 장군이 다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천안문 앞 시위대를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을 정도였으면 어느 구석진 숲속에서 뒷머리에 총 맞고 묻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중국군 제 38군 군장
서근선(쉬췬셴)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노장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한국에 왔을 때에도 38군 소속이었다면 그는 10월 6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1952년 10월 6일은 중국군 38군에게 잊기 어려운 참패를 안겨 준 백마고지 전투의 시작이었다.
중국군 38군은 한창 기세 좋게 북진 중이던 국군과 유엔군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덕천 전투의 승리자였다.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녹아 없어졌고 연대장 세 명이 포로가 되고 한 명은 전사하는 참극이 중국군 38군에 의해 이뤄졌다. 이후 한국군 세 개 사단이 도망자 군단이 됐던 현리전투 등을 거치면서 중국군은 한국군을 완전히 졸로 봤다. 미군은 한사코 피하면서 오로지 한국군 담당 구역만 파고들었고 한국군은 마치 중국군의 피리와 꽹과리에 홀리듯 패전을 거듭했다. 물론 이는 미군에 비해 현격히 약했던 화력의 탓이 컸지만 어쨌든 미군들이 "한국군은 도대체 뭐하는 군대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할 만큼 한국군의 약세는 두드러졌다.
지금도 철원의 안보관광지에 가면 글자 그대로 융단같이 펼쳐진 철원평야에 형성된 DMZ지대를 볼 수 있다. 한강변의 오두산전망대나 해변의 금강선 전망대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분단 체험장인데, 북쪽으로는 멀리 병풍같은 산들이 둘러쳐져 있지만 남쪽으로는 매우 평탄한 평야지대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군사적으로 보면 철원 평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고지들을 점거하고 전선을 밀어올려야 했지만 그럴 역량은 없었고, 그나마 남쪽에 위치한 해발 395미터의 395고지가 철원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한국군의 거점이었다. 중국군은 이곳을 두들겨 뺏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일을 맡은 것이 중국군 38군이었다.
총도 없이 달려오다가 동료가 쓰러지면 그 총을 들고 달려온다는 그런 차원의 중국군이 아니었다. 비슷한 지형에서 맹훈련을 거치고 고지를 점령한 후 그곳에 눌러앉아 버티기 위해 방한장비까지 갖춘 정예병력이었다. 그들은 1952년 10월 6일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들을 맞아 싸운 것은 김종오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9사단이었다. 전쟁 초기 춘천에서 선전하여 인민군들의 발목을 잡아챘던 그는 미군에게 바락바락 대들어가며 화력 지원을 확보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참혹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은 24차례나 바뀐다, 양측에서 사용된 포탄 수만 무려 275,000발이었고 국군 9사단은 3천 5백명, 중국군은 그 세 배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것은 바로 이 백마고지 전투였다. 지키다가 쫓겨 내려오고 다시 밀고 올라가서 차지하고서는 또 후퇴하고 무슨 동네 아이들 놀이 같은 양상의 연속이었지만 그 와중에 전사자들의 군번줄은 다발을 만들만큼 쏟아졌고 동료들의 시산혈해 앞에서 양측 군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보다는 "이왕 죽을 거 고깃값이라도 하고 죽자."는 광기같은 오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9사단 30연대가 공격에 나서던 날이었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고지 점령을 자신할 수는 없으나 점령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말한 뒤 공격에 나선다. 이전의 전투에서 29연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황, 돌격 과정의 산자락에는 어제까지 군가를 부르고 어머니에게 편지도 쓰던 사람들의 몸에 구더기가 슬고 파리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30연대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9부능선까지 올라갔지만 정상 부근의 중국군 기관총이 풀을 베듯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제주도 출신에 두 살난 아들을 두고 있던 강승우 소위가 벼락같이 외쳤다. "준비됐나?"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두 병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됐습니다." 셋은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끌어안고 기관총좌로 뛰어든다. 기관총이 침묵하자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고지로 치달았고 마침내 고지는 또 한 번 국군의 것이 된다. 그리고 핏발선 눈으로 세 명을 찾았을 때 그들은 온몸에 기관총알이 박힌 시신이 되어 있었다. 끝내 중국 38군은 고지를 포기하고 물러선다. 땅이 뒤집힐 정도로 심한 폭격을 받은 고지의 모습이 누워 있는 허연 말 같다 해서 백마고지라고 불리운 395고지는 국군에 의해 사수됐다. 그리고 9사단은 '백마부대'의 호칭을 얻는다.
평범하디 평범한, 순한 농부요 아이들의 아버지요 귀한 아들이요 누군가의 사랑스런 애인 이었던 남자 2만 명이 그 고지를 사이에 두고 죽어갔다. 영화 <고지전>의 인민군 장교 류승룡처럼 "와 싸우는지 모르갔어."라고 되뇌면서도 꾸역꾸역, 악으로 깡으로 가파른 고지길을 달려 올라갔던 이들의 태반은 흙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전 철원평야를 굽어보며 백마고지 전투를 떠올렸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또는 빼앗고자 했던 땅덩이가 아무리 넓다 한들 그들 생명의 크기보다 넓었을 것이며, 그 땅의 전략적 가치가 아무리 소중한들 그들의 목숨에 비할 것인가. 그러나 전쟁은 벌어졌고 용감한 이들은 죽어갔다.
중국군 38군은 한창 기세 좋게 북진 중이던 국군과 유엔군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덕천 전투의 승리자였다.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녹아 없어졌고 연대장 세 명이 포로가 되고 한 명은 전사하는 참극이 중국군 38군에 의해 이뤄졌다. 이후 한국군 세 개 사단이 도망자 군단이 됐던 현리전투 등을 거치면서 중국군은 한국군을 완전히 졸로 봤다. 미군은 한사코 피하면서 오로지 한국군 담당 구역만 파고들었고 한국군은 마치 중국군의 피리와 꽹과리에 홀리듯 패전을 거듭했다. 물론 이는 미군에 비해 현격히 약했던 화력의 탓이 컸지만 어쨌든 미군들이 "한국군은 도대체 뭐하는 군대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할 만큼 한국군의 약세는 두드러졌다.
지금도 철원의 안보관광지에 가면 글자 그대로 융단같이 펼쳐진 철원평야에 형성된 DMZ지대를 볼 수 있다. 한강변의 오두산전망대나 해변의 금강선 전망대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분단 체험장인데, 북쪽으로는 멀리 병풍같은 산들이 둘러쳐져 있지만 남쪽으로는 매우 평탄한 평야지대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군사적으로 보면 철원 평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고지들을 점거하고 전선을 밀어올려야 했지만 그럴 역량은 없었고, 그나마 남쪽에 위치한 해발 395미터의 395고지가 철원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한국군의 거점이었다. 중국군은 이곳을 두들겨 뺏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일을 맡은 것이 중국군 38군이었다.
총도 없이 달려오다가 동료가 쓰러지면 그 총을 들고 달려온다는 그런 차원의 중국군이 아니었다. 비슷한 지형에서 맹훈련을 거치고 고지를 점령한 후 그곳에 눌러앉아 버티기 위해 방한장비까지 갖춘 정예병력이었다. 그들은 1952년 10월 6일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들을 맞아 싸운 것은 김종오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9사단이었다. 전쟁 초기 춘천에서 선전하여 인민군들의 발목을 잡아챘던 그는 미군에게 바락바락 대들어가며 화력 지원을 확보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참혹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은 24차례나 바뀐다, 양측에서 사용된 포탄 수만 무려 275,000발이었고 국군 9사단은 3천 5백명, 중국군은 그 세 배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것은 바로 이 백마고지 전투였다. 지키다가 쫓겨 내려오고 다시 밀고 올라가서 차지하고서는 또 후퇴하고 무슨 동네 아이들 놀이 같은 양상의 연속이었지만 그 와중에 전사자들의 군번줄은 다발을 만들만큼 쏟아졌고 동료들의 시산혈해 앞에서 양측 군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보다는 "이왕 죽을 거 고깃값이라도 하고 죽자."는 광기같은 오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9사단 30연대가 공격에 나서던 날이었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고지 점령을 자신할 수는 없으나 점령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말한 뒤 공격에 나선다. 이전의 전투에서 29연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황, 돌격 과정의 산자락에는 어제까지 군가를 부르고 어머니에게 편지도 쓰던 사람들의 몸에 구더기가 슬고 파리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30연대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9부능선까지 올라갔지만 정상 부근의 중국군 기관총이 풀을 베듯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제주도 출신에 두 살난 아들을 두고 있던 강승우 소위가 벼락같이 외쳤다. "준비됐나?"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두 병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됐습니다." 셋은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끌어안고 기관총좌로 뛰어든다. 기관총이 침묵하자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고지로 치달았고 마침내 고지는 또 한 번 국군의 것이 된다. 그리고 핏발선 눈으로 세 명을 찾았을 때 그들은 온몸에 기관총알이 박힌 시신이 되어 있었다. 끝내 중국 38군은 고지를 포기하고 물러선다. 땅이 뒤집힐 정도로 심한 폭격을 받은 고지의 모습이 누워 있는 허연 말 같다 해서 백마고지라고 불리운 395고지는 국군에 의해 사수됐다. 그리고 9사단은 '백마부대'의 호칭을 얻는다.
평범하디 평범한, 순한 농부요 아이들의 아버지요 귀한 아들이요 누군가의 사랑스런 애인 이었던 남자 2만 명이 그 고지를 사이에 두고 죽어갔다. 영화 <고지전>의 인민군 장교 류승룡처럼 "와 싸우는지 모르갔어."라고 되뇌면서도 꾸역꾸역, 악으로 깡으로 가파른 고지길을 달려 올라갔던 이들의 태반은 흙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전 철원평야를 굽어보며 백마고지 전투를 떠올렸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또는 빼앗고자 했던 땅덩이가 아무리 넓다 한들 그들 생명의 크기보다 넓었을 것이며, 그 땅의 전략적 가치가 아무리 소중한들 그들의 목숨에 비할 것인가. 그러나 전쟁은 벌어졌고 용감한 이들은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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