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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0.6 백마고지 전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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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 개시 

작년인가 89년 천안문 사태 때 발포 및 진압 명령을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아 명령 불복종 혐의로 체포됐던 한 장군이 다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천안문 앞 시위대를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을 정도였으면 어느 구석진 숲속에서 뒷머리에 총 맞고 묻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중국군 제 38군 군장 
서근선(쉬췬셴)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노장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한국에 왔을 때에도 38군 소속이었다면 그는 10월 6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1952년 10월 6일은 중국군 38군에게 잊기 어려운 참패를 안겨 준 백마고지 전투의 시작이었다.

중국군 38군은 한창 기세 좋게 북진 중이던 국군과 유엔군의 뒤통수를 후려쳤던 덕천 전투의 승리자였다.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녹아 없어졌고 연대장 세 명이 포로가 되고 한 명은 전사하는 참극이 중국군 38군에 의해 이뤄졌다. 이후 한국군 세 개 사단이 도망자 군단이 됐던 현리전투 등을 거치면서 중국군은 한국군을 완전히 졸로 봤다. 미군은 한사코 피하면서 오로지 한국군 담당 구역만 파고들었고 한국군은 마치 중국군의 피리와 꽹과리에 홀리듯 패전을 거듭했다. 물론 이는 미군에 비해 현격히 약했던 화력의 탓이 컸지만 어쨌든 미군들이 "한국군은 도대체 뭐하는 군대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할 만큼 한국군의 약세는 두드러졌다. 

지금도 철원의 안보관광지에 가면 글자 그대로 융단같이 펼쳐진 철원평야에 형성된 DMZ지대를 볼 수 있다. 한강변의 오두산전망대나 해변의 금강선 전망대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분단 체험장인데, 북쪽으로는 멀리 병풍같은 산들이 둘러쳐져 있지만 남쪽으로는 매우 평탄한 평야지대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군사적으로 보면 철원 평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고지들을 점거하고 전선을 밀어올려야 했지만 그럴 역량은 없었고, 그나마 남쪽에 위치한 해발 395미터의 395고지가 철원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한국군의 거점이었다. 중국군은 이곳을 두들겨 뺏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일을 맡은 것이 중국군 38군이었다. 

총도 없이 달려오다가 동료가 쓰러지면 그 총을 들고 달려온다는 그런 차원의 중국군이 아니었다. 비슷한 지형에서 맹훈련을 거치고 고지를 점령한 후 그곳에 눌러앉아 버티기 위해 방한장비까지 갖춘 정예병력이었다. 그들은 1952년 10월 6일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들을 맞아 싸운 것은 김종오 장군이 이끄는 한국군 9사단이었다. 전쟁 초기 춘천에서 선전하여 인민군들의 발목을 잡아챘던 그는 미군에게 바락바락 대들어가며 화력 지원을 확보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참혹함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은 24차례나 바뀐다, 양측에서 사용된 포탄 수만 무려 275,000발이었고 국군 9사단은 3천 5백명, 중국군은 그 세 배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가 된 것은 바로 이 백마고지 전투였다. 지키다가 쫓겨 내려오고 다시 밀고 올라가서 차지하고서는 또 후퇴하고 무슨 동네 아이들 놀이 같은 양상의 연속이었지만 그 와중에 전사자들의 군번줄은 다발을 만들만큼 쏟아졌고 동료들의 시산혈해 앞에서 양측 군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보다는 "이왕 죽을 거 고깃값이라도 하고 죽자."는 광기같은 오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9사단 30연대가 공격에 나서던 날이었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고지 점령을 자신할 수는 없으나 점령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말한 뒤 공격에 나선다. 이전의 전투에서 29연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상황, 돌격 과정의 산자락에는 어제까지 군가를 부르고 어머니에게 편지도 쓰던 사람들의 몸에 구더기가 슬고 파리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30연대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9부능선까지 올라갔지만 정상 부근의 중국군 기관총이 풀을 베듯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제주도 출신에 두 살난 아들을 두고 있던 강승우 소위가 벼락같이 외쳤다. "준비됐나?"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두 병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됐습니다." 셋은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끌어안고 기관총좌로 뛰어든다. 기관총이 침묵하자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고지로 치달았고 마침내 고지는 또 한 번 국군의 것이 된다. 그리고 핏발선 눈으로 세 명을 찾았을 때 그들은 온몸에 기관총알이 박힌 시신이 되어 있었다. 끝내 중국 38군은 고지를 포기하고 물러선다. 땅이 뒤집힐 정도로 심한 폭격을 받은 고지의 모습이 누워 있는 허연 말 같다 해서 백마고지라고 불리운 395고지는 국군에 의해 사수됐다. 그리고 9사단은 '백마부대'의 호칭을 얻는다. 

평범하디 평범한, 순한 농부요 아이들의 아버지요 귀한 아들이요 누군가의 사랑스런 애인 이었던 남자 2만 명이 그 고지를 사이에 두고 죽어갔다. 영화 <고지전>의 인민군 장교 류승룡처럼 "와 싸우는지 모르갔어."라고 되뇌면서도 꾸역꾸역, 악으로 깡으로 가파른 고지길을 달려 올라갔던 이들의 태반은 흙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전 철원평야를 굽어보며 백마고지 전투를 떠올렸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또는 빼앗고자 했던 땅덩이가 아무리 넓다 한들 그들 생명의 크기보다 넓었을 것이며, 그 땅의 전략적 가치가 아무리 소중한들 그들의 목숨에 비할 것인가. 그러나 전쟁은 벌어졌고 용감한 이들은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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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7일 어느 성적 소수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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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7일 어느 성적 소수자의 죽음 

나보다 일곱살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시골로 통할 와이오밍 태생이었지요. 하지만 부모님의 일이 좀 국제적이었던지 유럽 물도 먹었고 그 어떤 외화도 더빙된 것 아니면 상종을 않는 미국인답잖게 외국어에도 능통한 청년이었지요. 고향의 대학교에 간 뒤엔 학생회 일도 열심으로 했고 와이오밍 환경 위원회 대학생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뭐 이쯤 되면 
그야말로 ‘보드건청’ 즉 요즘 보기드문 건강한 청년으로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1998년 10월 7일 그런 건실한 청년, 매튜 셰퍼드는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성적 소수자,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바에 술을 마시러 갔다가 그는 누군가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하지만 그는 얼마 뒤 죽도록 두들겨 맞은 다음 울타리에 묶입니다. 그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18시간이 지난 뒤였지요. 이미 흘릴대로 흘린 피 때문에 이미 발견 당시 그는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가 독실히 믿었던 하느님 (그는 성공회 신자였습니다) 곁으로 갑니다. 

그를 죽인 이들은 또래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경찰에 체포된 뒤 그들이 했던 변명은 다음과 같아요. “매튜가 동성애자인 것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비이성적인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라는 겁니다. 사실 이들은 치밀하게 매튜의 돈을 노린 것으로 확인됐지만, 범인들의 해명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범인들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적개심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범죄에 대한 핑계로 삼고 있다는 거죠. “내가 얼마나 놀라고 충격받았으면 그랬겠느냐.”는 식이지요. 대개 핑계를 대는 이들은 그 핑계가 통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지요. 이 사실은 매튜의 장례식이 있던 날 우울하게 증명됩니다. 

프레드 팰프스라는 반동성애 운동가이자 목사가 그의 신도들과 함께 시위를 벌인 겁니다. 요. 어차피 성경 몇 몇 구절에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등장하는 바에야 “신은 동성애자들을 혐오한다.” 는 피켓까지는 이해를 하겠지만 그들이 들었던 문구 중의 하나는 그들이 섬기는 것이 사랑의 하느님인지 사막 언저리 유목 민족의 잡신인지를 헛갈리게 만들었습니다. “매튜 셰퍼드는 지옥에서 불타 버려라.” 이것이 바로 적의입니다. 저 범인들이 매튜를 만났을 때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그 기독교인들은 충분히 알 수 있었겠죠. 

미국에서는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계기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등에 의해 ‘증오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호 법안’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 등의 항목만이 인정됐고 성적 소수자는 그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던 거죠. 명백히 한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가 전체 증오범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한다는 FBI의 보고도 있었지만 성적 소수자를 증오범죄 피해 보호 대상자로 끼워넣는 데에는 무척이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장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며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레위기 20장 13절을 금과옥조로 섬기는 이들이 문제였고, 그들은 동성애가 죄라고 성경 말씀을 설교하면 잡혀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매튜 셰퍼드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성적 소수자를 이 증오범죄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2009년 10월 29일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증오범죄 보호 대상에 성적 소수자를 넣는 법안에 서명합니다. 매튜 셰퍼드가 울타리에 매달린 채 비참하게 죽어가던 날로부터 11년하고 21일이 지날 때였습니다. 

2008년의 9월에는 이화여대에서 변날 사태라는 게 벌어졌습니다. 변날이라는 이름의 성적소수자 동아리에서 준비한 행사 걸개그림이 도난당하는데 그 범인은 그레이트비전인가 그레이트마징가인가 하는 기독교 동아리 회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뜻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그 기독교인들의 얼굴은 CCTV에 낱낱이 보관되어 있었죠. 그레이트 비전쪽은 신앙적인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고 걸개 그림을 변상하겠다고 했지만 동아리 창립 이래 행사 때마다 테러와 절도에 시달려 왔던 변날쪽은 미온적인 사과를 거부하며 동아리 제명을 요구합니다. 이에 그레이트는 범인 3명이 다 탈퇴했다며 맞서고 변날 쪽은 다른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레이트 측이 탈퇴한 3인에게 성적 소수자 그룹이 주최하는 교육에 참가하도록 공개적으로 권유한다면” 제명을 철회하겠다는 것이죠. 물론 그레이트는 이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마침내 이화여대 동아리연합회는 꽤 의미있고 개인적으로는 역사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결단을 내립니다. 동아리 ‘그레이트 비전’에 대해 제명을 결의한 것이죠. 아시다시피 이화여대는 기독교 동아리고, 학생처 직원들이 변날 등 성적 소수자 행사를 사시미눈을 하고 쫓아다니는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한 동아리의 기물을 파괴하고 절취한 또 다른 동아리가, 피해 입은 동아리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했을 경우 그 존립 가치와 이유를 잃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응당한 일이었으나 “TV 드라마 보고 내 아들 동성애자된다.”는 말을 실제로 믿는 이들이 드글거리는 나라에서 그들의 결단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선배도 알다시피 나도 교회를 나가죠. 공식적으로 성적소수자들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진보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성적소수자들이 사탄의 꾐에 빠진 자로 대접받을 일은 없고, 그 머리에 손 얹고 오 주여 이. 그릇된 욕정에 빠진 어린양을 구하소서 침 튀길 목사님도 없어요.

그런 가운데 어떤 성적소수자 커플이 교회에서의 결혼식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약간의 사단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막은 잘 모르니 설명을 생략하겠어요. 결론적으로 그들의 결혼식은 열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방관자로 건성건성 지켜보면서 나는 뜻밖에도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의 벽이 얼마나 높고 강고한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어요.

"결혼이 시위도 아니고 꼭 교회에서 그렇게 물의 빚으면서 결혼하고 싶냐?"라고 혀를 차다가 "그럼 그분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 안에서 성혼할 자유도 없단 말이냐. 이 꼴통아."하는 제 이성의 소리에 말문이 틀어박혔던 것은 그 단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내 아들이 남자 며느리를 데려오거나 누군가의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있느냐?"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을 때 저는 고통스럽게도 고개를 저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두고 보니 사실 저와 매튜를 죽였던 두 이성애자와의 간극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 간극은 점점 더 멀어져 가야 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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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8일 경평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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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9년 10월 8일 경평전의 시작 

근대화에서 일본에 뒤처지고 끝내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조선인들에게는 한 가지 활로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하는 스포츠에서는 일본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이자 즐거움이었다. '자전거왕' 엄복동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자전거 배달꾼이던 그가 트랙에서 날렵한 몸놀림으로 페달을 밟으며 그 엉덩이를 들어올릴 때 조선인 관중들은 "올라간다! 올라간다!"를 부르짖
으며 열광했고 일본인들이 부리는 야료에 엄복동이 흥분하여 우승기를 꺾어 버리고 두들겨 맞자, 일제히 왜놈들이 엄복동 죽인다고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올려다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는 조선인들의 많지 않은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1920년대는 내려다볼 것이 더 많아진 시기였다. 

요즘이야 프로야구가 거의 국민스포츠가 되었지만 약간 기죽은 듯한 축구 관계자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야구는 축구 못 따라가. 한국 사람들이 결국 미치는 건 축구라고." 그 볼멘 소리에 신빙성이나 근거를 요구하지는 말자.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DNA에는 축구에 대한 관심이 꽤 유구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선 우리가 문약함 때문에, 강고한 체력과 전투력의 부재 때문에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성찰을 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를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종목이 축구였다.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1920년 잡지 개벽에 실린 논설의 제목이다. 이 기사 내용인즉슨 조선 사람들은 허구헌날 업혀 길러져서 다리가 짧고 양복 바지도 테가 안나는데 축구를 하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 천정환 저, 푸른역사> 참조. 

이미 1920년대 축구는 장안의 화제였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원조라 할 수 있을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축구 대결은 그때도 유명했고 격렬했다. 축구 경기를 하다가 선수들, 급기야 응원단까지 치고받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보성 출신 인맥과 연희 출신 인맥이 축구 인맥의 중심이 되어 서로를 끌어주고 견제하기도 했다니 어떻게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어쨌건 당시 서울에는 '조선 축구단'이 그 최고의 명성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에 맞서는 또 하나의 산맥이 대동강변에서 융기하고 있었다. 바로 평양의 축구팀이었다. 이미 1918년 무오년에 무오 축구단이라는 축구팀이 창단한 바 있고 서울에 경성운동장과 때맞춰 기림리 공설운동장 (후일의 김일성 운동장)까지 건립해 놨던 평양 지역의 축구 열기는 대단했다. 평양의 숭실학교 축구팀은 일본 최강이었다는 와세다 대학 팀을 7대0이라는 엽기적인 스코어로 뭉개놓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 우물에 두 용이 살 수는 없는 법, 조선의 양대 도시는 축구로 진검승부를 내기로 한다. 주최는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 하니 눈살 찡그리지 마시기 바란다. 이때의 1920년대의 조선일보는 요즘과는 차원이 달리 할 말을 하는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이는 경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라고 기염을 토했다. 1929년 10월 8일이었다.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7천여명의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열린 3판 양승 경기에서 승자는 평양팀이었다. 스코어는 2승 1무. 명색이 서울팀으로 으스대던 경성팀은 콧대가 여러 마디로 분절되고 말았다. "갱성 갱성 하드만 별 것이 아니더구마니." 평양 시민들은 열광했다. 

경성의 축구팀들은 칼을 갈았다. 다음 해 설욕의 기회가 왔다. 이때 경성팀에는 뜻밖의 선수가 하나 끼어 있었다. 고교야구에서 가장 우수한 타율을 기록한 이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이라는 상이 있는데 그 이름 이영민, 경성운동장 야구장 1호 홈런을 기록했던 야구선수 이영민, 나아가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베이브 루스와도 경기하는 영광을 누렸던 이영민이 축구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었다. 그는 야구 천재이면서 배재고보 시절부터 축구에도 발군이었으며 육상대회에 나가서도 무려 5관왕을 차지했던 스포츠의 달인이었다. 경성운동장에서 거하게 열린 2차전에서 이 이영민은 1차전에서 결승골을 넣는다 3대2. 아마 평양 선수들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저 선수레 방망이나 후두를 것이디 여기 와서 와 저러는 거이가." 

야구와 축구를 넘나드는 천재 이영민의 활약 속에 경성팀은 3차전에서 5대1이라는 무참한 스코어로 평양팀을 밟아버린다. 경기가 끝난 후 망연한 평양팀에게 서울내기들은 "봤지? 풋뽈은 이렇게 차는 거야."라고 등을 두드렸을지도 모르겠다. 관중들 중에도 비슷하게 말하다가 평양 박치기에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간간이 관중들끼리 또는 선수들끼리 치고받는 불상사가 있었고, 대규모 관중들이 모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던 총독부의 견제도 있었고 하여 경평전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으로 발전적으로 정립된 뒤 경기가 재개되기도 했고, 축구 열기가 전국으로 퍼진 뒤에는 서울과 평양, 함흥과 광주까지 가세한 도시 대항전으로 발전했다. 조선 축구는 1935년 일본 천황배 (이 대회는 지금까지도 열리고 있다)에서 경성 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 조선의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야지! 

언젠가 박원순 서울 시장이 경평전의 부활을 제안한 바 있다. 하긴 1990년의 경평전(?)은 일종의 남북 친선전이었지 도시대항 경평전이 아니었다. 한 번 조기축구연합회든 서울시 고교축구 연합회든, FC 서울이든 민간 차원에서 평양의 해당팀들과 축구 시합으로 자웅을 겨루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옛날 평양팀처럼 유니폼에 '평'자 매달고 서울팀은 '서울' 꼬리표를 달고, 태극기와 인공기에 대한 부담감 없이 도시 대 도시로 한 번 붙고, '코리아'의 역량을 과시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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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0.9 아바이 잘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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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4년 10월 9일 아바이 잘 가오 

60년대를 대표하는 추억의 아나운서가 둘 있다고들 한다. 하나가 가수 손지창과 임재범의 아버지인 임택근씨고, 또 하나가 이광재 아나운서라는 분이다. 특히 이분은 스포츠 중계에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분인데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이분의 멘트를 듣다보면 숨 막혀서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다고 하는데...... “아무개 선수 슈우웃.... 5미터 4미터 
3미터 2미터.... 아 아깝습니다.” TV 위성중계 같은 것이 없던 시절 라디오에만 의지하던 사람들은 듣다가 뒤집어질 밖에. 

그는 스포츠 중계 말고 또 다른 어떤 상황을 중계하면서 4천만의 가슴을 울린 바 있다. 그건 1964년 10월 9일 동경 올림픽 당시 벌어졌던 가슴 아픈 신금단 신문준 부녀의 상봉과 이별 현장이었다. 신금단은 1962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400미터, 800미터 2관왕을 차지했는데 1963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 (GANEPO)에 출전해서도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아 여성으로는 초유의 일이었고 기록 또한 경이적이어서 일각에서는 그가 “여자가 아니다.”라는 쑥덕거림까지 나왔다. 그래서 심판진이 “신금단의 몸을 살펴 봤는데 가슴이 평평해서 그렇지, 분명히 여자다.”라고 해명할 정도였다. 그녀가 여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에서도 나왔다. 가네포 대회 직후 “신금단은 내 딸이오.”하는 남자가 한국의 언론에 제 발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문준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함경남도에서 1.4후퇴 때 피난 나온 월남민이었다. 주변의 함경도 사람들과 비슷하게 ‘잠시 피난 내려오겠다’고 집을 떠난 것이 그 뒤로 생이별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13년밖에 안되었을 때니 언제고 만날 희망이야 있었겠지만, 어려서 달음박질 잘하고 선머슴애같은 딸이 갑자기 세계적인 육상 선수로 떠올랐을 때 아버지의 심경은 남달랐으리라. 그러던 중 북한 선수단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의 문을 두드렸다.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한 것이다. 당연히 신금단도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IOC는 북한에 'North Korea'라는 국호를 쓸 것을 결정했는데 (한국은 Korea) 북한으로서는 이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DPRK,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고집했지만 IOC 역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까지는 어찌 어찌 북한이 넘어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또 하나의 청천벽력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신금단이 출전했던 가네포 경기대회, 즉 신생국 경기대회였다. IOC는 이런 류의 대회가 올림픽의 존립 가치를 위협한다고 여겼고,이 대회에 출전한 이들에 대해 올림픽 참가를 불허한 것이다. 금메달 0순위였던 신금단 또한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북한은 여기에 격노했다. “못해 묵갔어 철수하자우.” 기껏 동경까지 왔던 선수단은 다시 보따리를 싼다. 이 소식에 하늘이 무너진 듯 낭패감을 경험한 이가 있었다. 바로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이었다. 그는 신금단을 만나러 동경에 와 있었다. 재일 올림픽 후원회장 이유천은 동경올림픽 위원회 사무차장 무라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라이는 북한 선수단에게 사정을 전달했다. “금단이가 만나갔다면 만나게 해 주갔소.” 

한국 취재진이 북한 선수단에 카메라를 들이밀었을 때 카메라를 뺏겠다고 달려들던 험악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던 데다가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IOC에 항의하여 선수단을 철수하는 입장이라 그 만남 자체가 기적적일 수 밖에 없었다. 장소는 일본 동경의 ‘조선 회관’ 조련(조총련) 계열의 젊은이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신문준은 딸 신금단을 만난다. 오후 4시 55분. 북한 올림픽 선수단장 김종항, 조련 의장 한덕수 등이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처음에 부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울었다. 그 서러운 상봉에 올림픽 조직위 일본인 관계자들도 눈물을 흘렸고 지켜보던 북한 선수단도 하늘색 단복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자리의 부녀에도 휴전선이 그어져 있었음은 동아일보 1964년 10월 10일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자유대한에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 아버지와 “15년 내에 통일이 될 테니 그때는 온 가족이 모여서 살 테니 양심적으로 사시오.”라고 답한 딸. 그들이 정말 이렇게 얘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사가 윤색됐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현실을 반영한 일일 것이다. 7분여 만난 뒤 신금단은 건장한 재일 조련 청년들과 저쪽으로 사라졌고 미칠 것 같은 아버지는 북한 선수단이 타고 갈 기차가 기다리는 역으로 향했다. 신금단은 그 역장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잠깐의 해후 후 신금단은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이별한다. “아바이 잘 가오.” 

함경도 사투리가 웬만큼 귀에 익은 나는 그 ‘잘’의 발음을 잘 안다. 이남의 ‘잘’과는 확연히 다른, ‘자르’에 가까운 그 장음.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더라 “학교 자르 갔다 오너라.” 하던 그 ‘자르’. 신금단 부녀는 그 말과 함께 남북분단의 아픔을 드러내는 산 역사가 됐다. 그리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5년 내에 통일이 되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그 한맺힌 만남이 있은 19년 뒤에 세상을 떴다. 그 후로도 오랫 동안 부녀의 슬픈 만남조차 정치적으로 계산되던 시대가 계속됐다. 남한은 짧은 만남만을 허용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연이어 열렸고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은 그 연단에 올라가서 자신의 아픔을 대중적으로 폭로(?)해야 했다. 또 북한은 판문점 정전위 회의에서 10분이 안되는 만남은 ‘미국 사람들’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였고, 이후 삿포로 동계 올림픽 때 북한 선수로 출전한 한필화 선수의 오빠 한필성이 만남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했다. 1964년의 만남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남북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둘이 똑같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정치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어느 쪽으로든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고 책상 위에 줄 긋고 넘어오면 뭐든 해코지하던 아이들 장난보다 더 못한 자존심 싸움으로 서로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최근의 5년은 역시 “둘이 똑같이” 그나마 나아갔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 자리로 돌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권이나 김정일 정권이나 50년 전에나 하던 자존심 싸움과 대결의식으로 결국 모든 것을 잃어 갔으니까. 

이 사건 이후 잽싸게 누군가가 지어 부른 노래 <아바이 잘 가오>의 가사다 
운명이냐 비극이냐 이국의 하늘아래
아바이에 몸을 안고 울었나이다
자유의 몸이라면 어데라도 가려만은
조국의 이슬픔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운명인가요 비극인가요 눈물도 말라붙어
울수없는 이역 땅 그 누가 그런 원 부녀의 정이더냐
아바이 잘가기요 살아생전 언젠가는 또 만날끼요 아바이"

눈물이냐 서름이냐 만나도 소용없는
그리움에 몸무림에 울다 지쳐서
금단의 이 발길이 기약없는 길이라면
부녀의 이눈물을 그 누가 만들었나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잘가오. 

고 신문준씨는 딸 이름을 잘못 지었다. 금단이라니...... 하필이면 금단이었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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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0.10 조명하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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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8년 10월 10일 조명하 의사의 죽음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간단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은 역사적 상식에 대한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왜 누구는 의사(義士)고 왜 누구는 열사(烈士)냐?” 같은 것이다. 사실 의사가 무엇이고 열사는 또 누구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국가보훈처에서도 그를 따로 분류하지 않으며 쓰는 사람에 따라, 또 주장에 따라 의사와 열사는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향용
 쓰이는 대중적인, 그야말로 대중적인 분류를 가져오자면 의사는 ‘성공한 의거의 주인공’이고 열사는 ‘열렬히 시도하였으나 아쉬움을 남기고 실패한 분들’ 쯤 되겠다. 그래서 안중근 윤봉길 두 분 뒤에는 의사가 붙고, 이봉창 선생 뒤에는 열사가 붙는 것이다.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설이 있다고 얘기했다 ㅋ ) 오늘은 조명하 의사에 대해 얘기해 보자. 

1928년 10월 10일 나이 스물 넷의 식민지 조선 청년이 타이완의 어느 교도소 사형대 위에 선다. 이름은 조명하. 사진으로 봐도 그 총기가 세월을 넘어 전달되고, 그 외모 또한 수려하다 할 만큼 반듯한 젊은이였다. 이미 장가를 가서 고향에는 처자도 있었다. 마지막 말을 묻는 간수에게 그는 일갈한다. “나는 대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오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단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인물 많기로 황해도와 충청도”라는 말이 있는데 (물론 이승만과 김종필은 예외로 하고) 조명하 역시 황해도 출신이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그의 초년 인생은 여느 조선인들처럼 순탄치 않았다.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한 그는 군청의 서기로 취직해서야 약간의 안정을 찾는다. 장가를 들어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웬만한 눈치와 아양떨기로 일본 관헌을 만족시키며 살았더라면 그는 조선 농민들에게 쥐꼬리일망정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면서기’로서, 또는 모모 군청의 간부로서 한평생 잘 살았을지도 모르고 그 아들 역시 호의호식하고 일본 유학쯤 다녀와서 후일 대한민국의 ‘인재’로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명하의 눈에는 그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의 장례식 때 조문 오는 사이토 총독을 노려, 그 일행으로 예상되는 차에 뛰어들어 칼을 휘둘러 차에 탔던 모두를 단숨에 죽였던 송학선의 거사 (불행히도 다른 일본인들이었지만)와 나석주, 김상옥 등 연이어 경향 각지를 들썩였던 의열단의 의거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 또한 그 길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80년대와 90년대 대학가와 노동 현장에서 불리운 노래 가운데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목메어 불렀지만 사실 이 노래는 ‘거짓말’이다. 사실 그 주변에 그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깨우치고 독촉하고 행동을 통해 보여 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런데 이 노래는 정말로 조명하에게 어울리는 노래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으로도 후로도 그는 어떤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던 희귀한 ‘의사’였다. 

그는 아내가 아들을 낳은 후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때에 돌아오지 않을 걸음을 떠났다.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그랬는지 부인과 아들도 만나지 않은 채였다. “큰 볼일이 있어 떠나야겠습니다.” 아들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친 채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일본을 알아야겠다는 의도였다. 그의 조카는 삼촌의 마지막 말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일본놈들에게 속지 않는다.”

일본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또 식민지 출신으로서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그의 의지는 돌처럼 굳어 갔다. 하지만 일본에서 단독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려고 했지만 그 여정이 만만치 않자 일단 대만으로 들어갔다가 상해로 향하는 방책을 세운다. 대만에 도착하여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중국인에게서 칼 쓰는 법을 배우는데 상해로 건너가기 전, 뜻밖의 목표물이 대만으로 온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대만 주둔 일본군 특명 검열단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1928년 5월 14일 황족이며 국구 (임금의 장인)였던 구니노미야가 탄 차량이 타이쭈우 도서관을 지나는 길에서 조명하는 날쌔게 무개차 뒤로 올라탔다. 그리고 독을 바른 칼을 던졌는데 구니노미야의 목덜미를 스쳐 상처를 내고는 운전사의 어깨에 꽂혀 버렸다. 실패인가 싶었지만 구니노미야는 결국 이 상처가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죽는다. 조명하의 회심을 담은 칼날이 마침내 일본 육군 대장을 쓰러뜨린 것이다. 의열단도 아니고 한인애국단도 아니고, 꽤 흔했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관도 없이 혼자만의 결심으로, 혼자만의 의지로 그 일을 해 냈다. 글머리의 정의에 따르면 그는 조명하 ‘의사’의 반열에 오른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몇몇 사건들로만 점철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압제에 맞섰고 우리가 아는 이름들보다는 모르는 이름이 백 배 천 배는 많다. 그들은 꽃도 십자가에 없는 무덤에 묻혔고 빛도 이름도 없이 만주벌판 어딘가에서 또는 조명하처럼 대만에서, 조선의 산자락에서, 일본의 형무소에서, 현해탄 바닷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그 중 하나인 조명하가 1928년 10월 10일 사형을 당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그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택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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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0.1 나운규의 아리랑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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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1일 영화 아리랑 개봉 

1926년 10월 1일 일제에 의해 헐리울대로 헐리우고 좁아질 대로 좁아지고 망가질대로 망가진 궁궐 앞을 거대한 건축물이 섰고 그 낙성식이 거행된다.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이라는 조선 총독부였다.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상 4층, 총건평 9,600여 평,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이 건물은 조선의 지배자가 
일본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적 존재였다. 내부 장식도 초호화판으로 꾸며졌고 후일 독립 한국의 중앙청으로 수십 년 동안 쓰인 뒤 철거될 때까지도 별 하자가 없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 건물이 지어지면서 경복궁은 일본인 관리들의 휴식처로 전락한다. 경회루 일대의 잔디밭은 골프연습장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격무에 지친(?) 총독부 관리들의 연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날, 종로 단성사에서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것이다. 전날 영화 전단지에 ‘불온한 내용’이 있다 하여 몽땅 압수된 사건의 여파였을까. 영화 <아리랑>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개봉 초반보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은 더욱 늘어났고 기마경찰이 출동해서 군중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극장 문짝이 부서져 나가고 유리창들이 깨져 나가기도 했다.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으면서 북치고 장구치고 창까지 다 한 영화였다. 내용은 어느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여동생을 탐내는 부잣집 마름, 그리고 광인의 친구 등이 엮어 내는 사연이었다. 광인 청년은 여동생에게 달려드는 마름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고개를 넘어가는데 그때 마을 주민들이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른다. 

함경북도 회령 사람으로 독립군에 가담하기도 했고 더 큰 부대로 찾아가다가 “학생들은 총 들고 싸울 게 아니라 공부로 애국하시오.”라는 독립군의 충고를 듣고 발걸음을 돌렸던 나운규는 이 영화로 남과 북 모두를 통틀어 ‘한국 (조선) 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항일 영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지만 영화 곳곳에 조선 사람들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장치들이 도사리고 있기도 했다. 변사가 “경성에서 철학공부를 하다 만세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이 있었으니….”라고 유장하게 읊을 때 7년 전에 있었던 기미년 독립만세의 굉음이 관객들 귓가에 어찌 내려앉지 않았을 것이며, 사람을 죽인 뒤 실성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여러분 울지들 마십시오. 이 몸은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인 것이올시다.”라는 말을 남긴 뒤 순사에게 끌려갈 때 보는 사람 눈시울에 어찌 습기가 끼지 않았을 것인가. 나운규 자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한편에는 자랑할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놓는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까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나운규, 한길사) - 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 삼천리 (1930.7)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 <아리랑>은 사실 남과 북 모두가 부르고 스포츠 단일팀이 구성되면 국가로 채택되기도 했던 노래 ‘아리랑’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불러온 민요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제가격으로 창조된 노래였다. 물론 없는 아리랑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운규의 회고다. “내가 지었습니다. 나는 국경 회령이 고향으로 내가 어린 소학교 때에 청진에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했는데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나는 이 아리랑 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 들을 길 없더군요. 기생들도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즉 나운규는 영화 뿐 아니라 그 후 남과 북의 민중들이 흥얼거렸던 아리랑의 곡조까지도 남겨 준 셈이다. (물론 이게 일본풍이니 뭐니 하는 시빗거리는 좀 있는 것 같지만) 

조선 총독부가 우렁차게 들어서서 조선은 일본 땅임을 다시 한 번 살천스레 과시하던 날, 조선인들의 거리 종로통에서 한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은 영화사적인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 후로도 끈덕지게 살아남은 노래 아리랑이 구슬프게 태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일본 고관들이 조선 친일파들과 경성 시민들을 늘어세우고 대일본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팡파르 속에서 일제 시대가 낳은 우리 민족의 명화와 명곡이 태어났다는 것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조선 총독부 건물은 수십 년 동안 남아 있었음에도 그토록 남북 모두 기념비적이라고 평가하는 <아리랑> 필름은 ‘삼천리 강토’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음이다. 왜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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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0.12 t최악의 올림픽 최고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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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10월 12일 인류 최악 그러나 최고의 올림픽 개막 

인류 최악의 올림픽이라면 대개 베를린 올림픽을 떠올리는 수가 많지요. 일단 히틀러가 등장했던 올림픽이고 그 3제국의 영광을 드높이는 한 방편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대회 그 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어요. 히틀러가 인종차별주의적 모습을 보여 미국의 제시 오웬스같은 흑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건 제시 오웬스 자
신이 부인한 얘깁니다. 오히려 그는 미국에 돌아와서 더한 차별을 받았다고 하죠. 또 독일에서 열린 뮌헨 올림픽에서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삼았던 그 슬픈 사연을 들어 그를 최악의 올림픽으로 들기도 하고, 실제로 올림픽기가 조기로 게양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요. 하지만 올림픽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진짜 최악의 올림픽은 따로 있어요. 바로 1968년 10월 12일 개막된 멕시코시티 올림픽이었죠. 

개막 열흘 전 멕시코 정부는 틀라텔로코 광장이라는 곳에서 올림픽 반대와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싹쓸이'합니다. 광주항쟁의 공식 사망자보다 더 많은 수의 학생과 시위대가 군경에 의해 도살됐고 왜 쏘았지 왜 찔렀지 물음에 답변도없이 그 시신들을 차로 실어가 버렸습니다. 그 학살의 광장에서 오륜기가 나부끼게 되지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의 비둘기는 하늘을 덮고 세계 평화를 향한 올림픽 선언은 학살자를 통해 울려퍼지게 됩니다. 이만하면 최악이라고 할만하지요. 

거기다가 이 올림픽에서는 참으로 역사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블랙 파워 시위였죠. 200미터에서 기존의 세계 신기록 20초 3을 무려 0.5초나 단축한 19초 8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시상대에서 뜻밖의 행동으로 세계를 경악시킵니다.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의 국가가 울려퍼지고 국기가 게양되는 순간 스미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오른손을 치켜듭니다. 주먹쥔 그 손은 검은 장갑이 뒤덮고있었죠. 카를로스 역시 똑같이 행동하며 왼손을 쳐듭니다. 역시 검은 장갑, 그리고 둘 다 신발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OPHR 이라는 약자가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었지요. 그건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 (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의 약자였지요. 금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는 부르쥔 손으로 미국내 흑인의 힘과 단결을, 그리고 배지를 통해서는 인종차별주의자에 가까왔던 IOC 위원장에 대한 항의와 부당하게 정치적 탄압을 받던 전 금메달리스트 무하마드 알리 등에 대한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인간적' 항의에 가까왔으며 보편적 인류애를 숭상하는 올림픽 정신에 걸맞는 것이었지만 (이에 비해 솔직히 "독도는 우리땅" 세레모니는 매우 정치적이며, 징계받는 게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선처를 바랄 뿐이지) 그들은 그야말로 외계인 취급을 받습니다. 미국팀에서는 그를 내쳤고 IOC에서는 그들의 메달까지도 회수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돌아가서도 심한 냉대와 사시미칼같은 눈초리들 속에서 평생 마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멕시코올림픽이 인종차별국이었던 남아공의 출전 문제를 두고 수십 개국이 보이콧 위협을 한 끝에 겨우 성사된 대회라고 할 때, 이 흑인들이 당했던 일에 각국 선수단이 떨쳐일어났음직도 한데 초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 둘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연꽃은 더러운 못에서 피어나는 법. 우리는 그 최악의 올림픽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아름다운 면모를 봅니다. 두 흑인 메달리스트가 속절없이 쫓겨날 때 미국 선수단 지도부는 전혀 인정머리를 발휘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그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의 백인 선수단들이 발표한 성명을 볼까요. “자연인으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지위와 평등한 권리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미국 올림픽 단원의 일원으로 우리의 팀메이트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리기 위해 한 행동에 지지를 표시한다” (2007/5/16 조이뉴스, 김도균) 물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딸이 흑인을 데리고 오면 기겁을 할 위선자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지언정 그 상황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고 옳은 일에 연대할 수 있는 용기와 자세...... 저는 그게 인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블랙 파워의 그 충격적인 시위 한켠에 숨어 있었습니다. 

은메달을 딴 한 백인. 피터 노먼의 가슴에도 흑인들과 같은 배지가 달려 있습니다. OPHR.... 이 오스트레일리아 청년은 시상식 직전 금과 동메달을 딴 흑인들이 하려는 행동을 알았고 그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흑인 둘에게 한 짝밖에 없는 장갑을 나눠 끼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도 그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몫인 배지가 없는 것을 깨닫고는 관중석으로 달려갑니다. 그 순간을 생각해 봅니다. 아직 격렬한 경주의 땀이 식지 않은 몸으로 관중석 앞을 달리면서 "누구 배지없어요? OPHR 배지! 누구 없어요? OPHR!"을 부르짖는 한 백인 청년의 모습, 그리고 배지를 누군가에게 건네받아 자신의 가슴에 달고는 신나서 시상대로 달려가는 한 인류의 달음박질을. 

그는 메달을 박탈당하지는 않았지만 백호주의가 판을 치던 그의 나라에서 준 역젹 취급을 받습니다. 즉 반란분자의 연설에 감동해 버린 철없는 아군이었던 거지요. 그는 다음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량을 가졌지만 그 기회를 빼앗기고 맙니다. 온갖 비난과 지청구 속에 이곳 저곳을 전전하고 살던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끝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그의 관을 든 사람들 가운데에는 미국에서 날아온 늙어버린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했던 흑과 백의 인류는 그렇게 슬픈 이별을 했고 노먼이 죽은 6년 후 호주 의회는 의회 차원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부당한 처우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그의 인류애적 행동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지난 런던 올림픽에서는 인종차별은 고사하고 어떤 인종이나 나라에 대해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구사한 이들에게도 가차없는 처벌이 주어졌습니다. 한국팀에게 불만을 터뜨린 스위스 축구 선수도 싹싹 빌었지만 처벌을 받아야 했지요. 어떠한 인종차별도 있을 수 없고, 그와 비슷한 시도조차 처벌된다는 이 엄격하고도 당연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를 그럴 수 없이 보여 준 올림픽이 인류 최악의 올림픽 멕시코시티 올림픽이었습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희망의 불꽃이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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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4 신당동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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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4일 신당역의 기적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은 있다. 힘겹거나 슬플 때 문득 눈을 감으면 홀연히 되살아나 어깨를 두드리고, 모니터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 놨다가 들춰 보며 혼자 웃다가 울다가 하며 지친 일상을 잊을 수 있는 기억, 아무리 부대끼고 속시끄러워도 그곳 생각에 이르면 그냥 키득거려지고 다물린 입이 벌어지는 그런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재생산해 주는 지점들은 우리 뇌리 속에 도
로변 ‘쉬어가는 곳’처럼 남아 있다. 2003년 10월 14일은 참으로 팍팍하고 겁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누가 휘두른 묻지 마 칼날에 목이 베일지 모르고 혹시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내 머리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늘까지도 살펴야 하는 한국 사람 모두에게 살가운 추억이 만들어진 날이다. 

그 추억은 지하철 역 안에서 일어났다. 네이버 블로거 jitow님의 사진과 기록을 통해 그날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밤 10시 20분 경이었다. 하루의 일과로 지친 사람들, 2차쯤을 거쳐 술냄새 풀풀 풍기는 취객과 여전히 참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학생들이 뒤섞인 인파가 지하철 2호선 객차를 메우고 있었다. 신당역에 들어선 열차가 급작스레 급정거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정차였다. 이유인즉슨 한 남자가 선로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관사가 뛰어내려 상황을 살폈다. 남자는 천만다행히 열차에 치어 죽지는 않았지만 열차와 선로의 좁은 사이에 꼼짝도 못한 채 끼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은 갑자기 벌어진 참상 앞에서 놀랐다. 여자들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핸드폰으로 119를 부르는 이도 여러 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불행한 일을 당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내심 어떻게 되는지 보자 하는 호기심으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떠나지 않는 열차에 퍼져 앉아 언젠가 가겠지 잠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119를 부르기는 했지만 선로에 끼인 채 열차에 압박당하고 있는 피해자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한 사람이 외쳤다. “밀어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수레 앞에 선 사마귀처럼 두 팔을 들어올리고는 전동차에 달라붙었다. 순간 그 주위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리라. 저 사람 뭐냐?는 의아함부터 지금 전동차를 사람이 밀어서 움직이겠다고? 하는 실소, 그렇게라도 해 볼까? 홀로 용쓰는 아저씨의 어깨를 응시하던 안타까운 시선, 그냥 119가 올 때까지 가만 계쇼 하는 신중한 눈길까지 범벅이 된 잠깐의 침묵이었으리라. 


그때 몇몇 사람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가만. 몇 명만 더 달라붙으면 이 칸은 어떻게 흔들어서 그 틈을 타서 깔린 아저씨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동네 헬스클럽 강사 아저씨는 문득 자신의 근육을 실룩거렸고 술 취한 대학생 몇 명은 눈빛으로 야 야 붙어! 를 교환했을 것이다. 몇 명이 더 전동차에 달라붙었다. 그러려면 무게를 줄여야 했겠지. 누군가 목청 큰 아저씨가 차 안에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거기 다 내려요. 사람이 죽어간단 말이오. 아 빨리 안 내리고 뭘해?” 


사람들은 부리나케 내렸고 플랫폼은 신당역이 목적지가 아닌 사람들로 갑자기 붐볐다. “한 번 밀어 봅시다. 다 내렸으니까.” 일단 몇 명이 달라붙자 긴가민가 하던 사람들도 손을 보탰고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용을 쓰게 됐다.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안에 다 내리게 해!” “다 나와요!” 이럴 때 나는 듯이 움직이는 사람들 반드시 있다. 등화관제 때 집집마다 불 끄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은 온 칸으로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내리세요. 열차를 가볍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깔렸어요. 어르신 어서 나오세요. 학생 뭐해 빨리 튀어나와.” 몰려나온 사람들이 플렛폼에 섰을 때는 이미 꽤 많은 이들이 될 것 같지 않은 일에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또 부르짖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밀어요!” 

깡마른 아가씨가 낑낑대며 전동차 밀기에 가담했을 때, 멀거니 쳐다보던 장정들이 불에 덴 듯 달라붙었고 머리 벗겨진 노인이 몸으로 전동차를 밀어대자 투덜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고교생들이 돌아섰다. 삽시간에 수백 톤의 전철은 수십 명의 팔과 몸뚱이에 포위됐다. 누군가가 언성을 높였다. “그냥 밀지 말고 하나 둘 셋 하면 밉시다. 하나 두울..... 세엣” 그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똥이 튀었다. 전동차가 움직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차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내렸고 힘을 쓰던 사람들의 어깨에는 새 힘이 솟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두울 셋.” 이미 몇 명은 끼어 있는 사람의 팔을 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끌어올릴 수 있어요. 한 번만 세게 밀어 줘요. 그때 끌어올릴 테니까.” “하나 두울 세엣.....끙차..........”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은 힘을 냈을 때 전동차는 크게 기우뚱거렸고 불운한 남자는 플랫폼에 끌어올려졌다. 2003년 10월 14일 신당역의 기적이었다. 

‘신당역의 기적’의 사진은 언제 보아도 감동이다. 전철이라는 거한에 매달린 올망졸망한 사람들의 뒷모습은 그 어떤 천사와 여신의 전신상보다도 아름답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날 신당역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적을 이루고 맛보고 퍼뜨렸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초단시간에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다급하고 절박한 사정에 직면했을 때 대개의 사람들은 포기하고 외면하고, 또는 안타까이 지켜보는 것에 그친다. “내가 뭘?”이라고 자조하고 “나 바빠”하고 돌아서고 “119를 불러라.”고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그들이 힘을 합치면 전동차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 바위같은 현실에 누군가 계란을 던진다. “한 번 밀어라도 봅시다.”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킨 누군가가 없었던 적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없다. 누군가 그에 동조하고, 또 누군가는 그를 전파하고, 안되는 일 같지만 한 번 해 보자고 팔뚝 걷어붙이는 이가 하나 둘 늘어갔을 때 전동차는 움직이고 기적은 이뤄졌듯, 역사는 그렇게 어제로부터 내일로 나아가 왔던 것이다. 

우리의 눈 앞에도 전동차 밑에 끼인 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은 널려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여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며 철탑 위에 올라간 농성자들에게 세계 몇 위를 자랑한다는 기업은 비를 피할 텐트를 올려보내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리를 펼 공간도 없어 무시로 다리까지 마비되는 그 좁디좁은, 어쩌면 전동차와 플랫폼 간보다 더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날로 추워지는 가을 바람을 견디고 있다. 과연 기적은 신당동에만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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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0.15 사막의 여우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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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10월 15일 사막의 여우의 죽음 

언젠가 개봉됐던 영화 <발퀴레>는 히틀러의 광기로부터 독일을 구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 및 나찌 정권 전복 쿠데타를 시도했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였다. 이 영화 말미에 슈타우펜베르크 등은 총살당하는데 다른 주동자들은 정육점 갈고리에 건 피아노줄로 목을 졸랐고 히틀러는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두고두고 감상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돼지 새끼처럼 매달고 싶었지만 히틀러로서도 그럴 수 없었던 인물이 있었다. 에르빈 롬멜 독일 육군 원수가 그였다. 그가 음모에 가담했다는 확증은 없었지만 암살 계획자들의 문서에 사후 지도자의 하나로 에르빈 롬멜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프랑스 전선에서는 압도적일만큼 신속한 기동 전술로 독일군 수뇌부까지 당황시킨 전격전을 펴 영국 원정군을 독안의 쥐로 만들었으며 멋모르고 북아프리카에 뛰어든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일종의 구원투수로 독일군 북아프리카 군단의 지휘관으로 투입돼 한때 영국군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던 ‘사막의 여우’ 롬멜이었다. 물론 그의 실제 성과는 그의 명망에는 많이 못 미치며, 그의 전설은 상당 부분 나찌의 선전술, 또는 적을 높여 스스로의 성가를 높이려는 연합군측의 과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그를 명장 반열에서 끌어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천하악질 히틀러였지만 그 롬멜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일 수는 없었다. 

1944년 10월 15일 두 명의 장군이 롬멜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은 히틀러의 명령을 가지고 왔다. 반역죄로 처형당할 것인가 음독 자살하여 최후의 명예는 지킬 것인가의 양자택일령이었다. 롬멜은 아내와 아들에게 이별을 고한 후 음독자살한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운전병의 증언은 이렇다. “저는 차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고, 마이셀 장군이 저를 데리고 차를 떠났습니다. 한 5분이나 10분쯤 뒤 베르크돌프 장군이 마이셀 장군과 저를 다시 차로 불렸죠. 그 때 롬멜 원수가 뒷좌석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혼수상태였고, 앞으로 쓰러져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는 것도, 숨이 넘어가는 소리도 아닌 흐느낌이었습니다. 그의 군모와 지휘봉은 좌석 밑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바로 앉히고 그의 군모를 다시 씌워 주었습니다.” 
(곰PD의 전쟁 이야기 - http://blog.ohmynews.com/gompd/154824중)

그렇게 롬멜은 죽었다. 롬멜의 신화가 일부 과장됐을지언정 그가 진정한 군인이었고 인격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오른 이였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프러시아 제국 이래 독일 육군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 분위기에서 동떨어진 평민 교사의 아들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 번 그 공훈에 비해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인물이었다. 열렬히 사랑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못한 사랑도 상대가 귀족 가문이었던 탓이 컸다고 한다. 얼마 전 공개된 롬멜의 연애 편지는 사막의 여우 역시 사랑 앞에서는 정신을 잃는 보통 남자였음을 느끼게 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내 삶은 행복해. 7월 초가 되면 시간을 내 바인가르텐에 갈 수 있을 거야. 부드러운 키스와 인사를 담아. 당신의 영원한 사랑 에르빈이....”

집안의 반대 끝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지만 그 사이의 사생아를 끝까지 돌볼만큼 책임감도 있었던 롬멜. 그는 전쟁터에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영국군 야전병원에 물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물을 가득 실은 차량에 백기를 꽂아 영국군에게 보냈고 영국군은 이에 감격하여 위스키와 콘비프로 화답한 일은 유명하다. 또 격전의 와중에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전투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있소. 나는 그것이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소...... 그래서 내가 저축해 둔 2만 5천 리라를 그 편에 동봉하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신의 손에 달려 있소. 아들과 함께 잘 살기를 바라오. 당신과 아이에게 키스를 보내오.” 여기까지는 그저 용감하고 결기 있는 무인의 편지 정도이지만 그 다음 추신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고위층 군인들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면모를 발견한다. “추신 :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저축했던 돈을 아내에게 보내면서, 국민적 영웅이며 독일 육군의 원수였던 롬멜은 아내에게 “외환 관리 규정”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출세 가도로 이끈 히틀러에게 충성했지만 나찌당에는 가입하지 않았고 유태인 학살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학살, 유태인 학살을 주도하는 친위대들은 독일 군인 본연의 모습이 아니며 비겁자들의 집단일 뿐”이라고 혀를 찼으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휘하 부대를 철수시켰던 롬멜. 그는 천상 군인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고 한 인간으로서도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역사의 소모품이 된다. 어떠한 의미로든 ‘반역’이란 그의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던 군인 롬멜. 그는 히틀러 암살 사건 이후 자신이 총애하던 장군이 숙청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때 그의 구명을 탄원하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존경하는 총통 각하. 1940년의 서부전선 전격전, 1941년과 1943년 사이의 아프리카 전투에서, 1943년의 이탈리아에서, 1944년의 서부 전선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에서 제가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했던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 머리 속에는 새로운 독일을 위한 최후의 승리 외에는 없습니다.” 자신의 이력을 줄줄이 읊는 데에서 히틀러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 배어나지만 그는 히틀러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을 위해 싸워야 하는 군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훌륭한 인격과 무서운 책임감에다가 그에 못지않은 출중한 재능을 가졌지만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을 잘못 선택한 탓에, 또는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끝내 벗어던지지 못하고, 장렬하지만 허무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사람들은 예상 외로 많다. 에르빈 롬멜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처칠의 말대로 상대편에게는 “전쟁의 재앙이지만, 장군으로서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했던” 롬멜은 1944년 10월 15일 자신의 운전병 앞에서 흐느끼다가 세상을 등졌다. 마지막 순간 그가 안타까와했던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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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10.16 존 브라운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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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59년 10월 16일 문제적 인물 존 브라운 

80년대 대학가 술자리에서 깔깔대며 부른 노래가 있다. “관악산에 자리잡은 서울대학은 총장이 어용이라 교수도 어용.”....으로 시작하는 노래. 연세대는 ‘제비’였고 고려대는 ‘술꾼’이었고 공부 열심히 하는 서강대는 ‘고삐리’ 데모할 때 과격하기로 유명했던 성균관대는 ‘깡패’ 등등으로 그 특질들을 끼워 맞춘 노래였고 자기 학교를 부를 때는 언제나 ‘투사’라든
가 멋있는 말을 넣어 부른 뒤 “영광 영광 XX대학 영원히 빛나리” 하는 후렴으로 맺곤 했다. 

이 노래의 원곡은 매우 전투적인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지만 원래 19세기 미국에서 의용 소방대의 노래로 만들어졌고 이후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군가로 고창되기도 했던 노래다. 그런데 군가로 불리울 때 이 노래의 제목은 좀 특이했다. ‘존 브라운의 시신’이었으니까. 이 노래 가사는 군가답게 단순하다. “존 브라운의 시신은 무덤에 잠들고 (세 번 반복) 후렴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후 “His soul is marching on." (그의 영혼은 전진하고 있으리라) 그 뒤 가사도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자. 북군 병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남군과 싸웠고 승리한 뒤에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럼 이 흔하디 흔한 이름 존 브라운은 누구인가. 왜 그는 북군의 우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는 피혁공장에서 일했다. 돈벌이에는 별로 소질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독실한 청교도이자 열렬한 노예 해방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공장은 곧잘 흑인들을 도와 탈출시키는 비밀 조직의 아지트로 즐겨 쓰였고 존 브라운 자신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의 어느 날 김승같은 학대를 받는 흑인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럴 수는 없다! 그날의 기억은 존 브라운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노예 문제로 미국은 거의 정신적인 분단 상태에 있었다. 노예 옹호론자들과 노예 폐지론자들은 새로운 주가 연방에 가입할 때마다 그 주를 노예 허용 주로 가입을 허락할지 노예폐지 주로 등록할지를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유명한 건 역시 ‘피의 캔사스’ 라 불리우는 유혈 사태일 것이다.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는 캔사스 주를 놓고 노예 옹호자들과 반대자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 대치에 들어간다. 양측은 모두 대량의 이주민들을 투입하여 캔사스 주를 장악하려 들었고 그 와중에 치른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양쪽 모두 경건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노아의 자손 중 노아의 알몸을 본 아들들은 영원히 그러하지 않은 아들을 섬기게 되리라 하셨다.”는 설교에 열광했고 또 한쪽은 “비기독교적인 노예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총과 성경”이라는 말에 아멘을 부르짖었다. 양쪽의 충돌은 당연히 캔사스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일단의 노예 제도 지지자들이 1856년 5월 로렌스 시를 습격하여 자유주 지지자들을 살해한다. 이는 그때껏 잠자고 있던 한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행동이었다. 노예 지지자들의 행동에 분노하여 떨쳐 나선 이 가운데 존 브라운이 있었던 것이다. 존 브라운은 그의 네 아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을 모아 노예 지지자들을 습격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을 토막내 죽인다. 그것도 그들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사지를 잘라 죽인 것이다. 광기에 가까운 눈빛을 가졌다는 것이 존 브라운을 만나본 이들의 평이긴 했지만 그의 행동은 노예 지지론자에게는 거의 악마와도 같은 반열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미국 역사에서는 포타와토미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이후 "피의 캔사스“는 더욱 피비린내를 풍기며 사람들의 목숨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존 브라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는 남부의 심장부 버지니아의 산악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그곳을 탈주노예들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꿈을 꾼다.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위해 자신의 아들들과 ,지지자들, 일단의 헤방 노예를 그러모아 연방군 무기고를 습격한 그는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희생자 하나가 나왔다. 해방된 자유인이었던 흑인 한 명이 근처를 지나다가 유탄에 맞아 죽은 것이다. 1859년 10월 16일이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죽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이건 연방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후일 남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리가 이끄는 연방군은 당장 존 브라운 일행을 공격한다. 교전 와중에 존 브라운의 아들이 총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아들에게 브라운은 “남자답게 죽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저항은 장렬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체포된 후 사형을 선고받지만 그는 재판정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노예를 살리기 위해, 힘으로써 노예 소유자에게 간섭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탈옥의 기회까지 뿌리치고 “순교자가 되겠다”며 열정적으로 털어놓은 그의 마지막 연설은 노예 폐지론자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노예 지지론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가져다 준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했다. 에머슨 같은 시인은 그를 예수에 빗대며 “옣수 이래 그만큼 값진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없다.”고 격찬했고 북부인들은 그를 동정했지만 남부인은 브라운에 대한 북부의 태도를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된다. “살인마를 순교자로 만들다니!” 링컨은 존 브라운을 “오도된 광신도”로 비난했다. “노예제도를 폐지해서 연방이 유지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노예 제도를 유지해서 연방이 수호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며 연방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링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브라운의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군복까지 빌려 입고 형장에 들어가 브라운을 저주했던 한 남부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윌크스 부스. 후일의 링컨의 암살자였다. 결국 그에게 링컨이나 브라운이나 거기서 거기인 인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개인적으로는 링컨의 평가에 동의하지만 “정의를 위해 나와 내 자식들의 피가 고통받는 노예들의 피가 섞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할 것이다.”고 기염을 토하던 존 브라운의 모습을 마냥 미치광이로 몰기에는 어딘가 좀 껄쩍지근하다. 그 껄쩍지근함은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수필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예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는 브라운과 같이 노예의 입장을 대변하는 박애주의자를 택할 것이다.” 즐겨 역사를 망치는 것이 과잉된 맹동주의자들의 오버인 것은 사실이나 역사는 누군가의 행동 없이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 게으름뱅이이기 때문에. 1859년 10월 16일 존 브라운이 행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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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7 슬픈 김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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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7일 슬픈 김주익 

2003년에 찾아왔던 태풍 매미 기억하십니까. 부산을 위시한 남해안 일대를 휩쓴 이 태풍의 위력은 태풍의 전설로 남아 있는 59년의 사라호 태풍을 능가한다는 평이었습니다. 가로수가 뽑히고 택시가 쓸려가고 하는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못되었고 수천 톤 규모의 선상 호텔이 나자빠질 정도의 초대형 태풍이었지요. 그 무서운 태풍이 부산에 밀어닥쳤을 때 나는 강원도 설악산의 한 콘
도에 있었습니다. 거기도 날씨는 잔뜩 구겨져 있었고 바람도 심상찮게 불었지만 설악산이 무너지랴 동해바다 넘치랴 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유리창을 때리는 그 황소바람 소리를 안주 삼아서 아늑한 방 안에서 다리 쭉 뻗고 휴식을 즐기던 그 순간 부산 영도에 있던 한 남자는 바람개피처럼 팔랑거리며 돌아가는 크레인 조종실에서 몸을 가누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영도는 바람이 센 곳입니다. 해운대나 광안리도 바닷가라지만 영도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평소에도 지나는 사람의 얼굴을 심하게 때릴 때가 많아요. 하물며 2003년의 매미 때겠어요. 크레인 위의 그 사람이야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을 겁니다. 오들오들 떨면서 차디찬 쇳덩이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었을 것이고 바람이 잦아들기만을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을 겁니다. 그는 그 크레인 위에서 석 달 가까이 살고 있었습니다. 2003년 6월 85호 크레인에 올라와 고공농성 중이던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김주익 위원장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난 뒤 김주익 위원장은 편지 하나를 올려다 받습니다. 딸로부터 온 것이었죠. “아빠 어제 무서웠죠?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아빠 노릇 잘해요." 아마 김주익 위원장은 이 편지를 읽으며 어린아이처럼 왈칵 울었을 것 같아요. 그런 큰 바람이 부는 날이면 들판의 들짐승들도 굴 안에서 오돌오돌 떠는 새끼들 품고 바람 잘 날 기다렸을 텐데, 산속의 산짐승들도 바위틈에서 새끼들에게 조금만 기다려라고 다독이고 있었을 텐데, 자기는 집은커녕 지상 수십 미터의 크레인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딸로부터 의젓한 위로를 받는 아버지의 심경이 오죽했을라구요. 얼마 전에는 “내가 일자리 구해 줄께요. 아빠 그 일 그만 하면 안되요? 그래야 운동회 학예회도 보잖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 자랑도 하는데.”라고 편지를 올려 보내서 아빠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딸이었는데 말이죠. 몇 달 사이 어떻게 커 버린 걸까. 크레인 아래로 와 본들 점보다 조금 더 큰 머리로만 보일 뿐이었던 딸내미를 안고 싶어서 팔에 쥐가 나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눈에 근육이 솟았을 겁니다. 

하지만 해는 다시 반짝하고 떠서 어제 거칠게 세상을 할퀴고 간 물기를 말렸지만 크레인 위의 외로운 영혼에게는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홀쪽했던 달이 점점 배가 불러갔지만 크레이 아래 회사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자기 회사 노조위원장이 석 달이 넘게 크레인에서 살고 있는데 회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필사적이었지만 세상은 평화로왔습니다. 차들은 무심히 영도 다리를 넘었고, 고기잡이 배들은 통통거리며 바다를 지났고 태종대쪽 도로는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아마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매미호 태풍도, 지난 여름 사람을 쪄죽이는 줄 알았던 더위도 아니었을 겁니다. 외로움이었을 겁니다. 아래에서 음식 올려 주고 구호 외쳐주는 동지들이야 있었겠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에 그들 역시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내가 85호기 크레인위로 올라온 지 벌써 90여일.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 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이 회사에 들어온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0여만원. 근속연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한단 말인가.”

그 월급조차 그의 가족들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시대, 기업들이 개발한 손배가압류라는 가공할 무기는 마치 독가스처럼 노동자들의 숨통을 막고 있었죠. 김주익 위원장의 세 아이가 뛰어 노는 방안의 살림도구에도 압류의 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이들에게 회사는 어김없이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그에 대한 저항은 나라 망할 소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결심을 합니다. 그때 머리를 감아죈 것은 아이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끼룩끼룩 갈매기 영도서 울고 뿌웅뿌웅 뱃고동 부산항에서 울 때, 머리띠 매고 크레인에 올라가신 아빠는 휠리스 사가지고 오신다고 했지만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 위원장은 목을 맸습니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이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한이 뚝뚝 떨어지는 유서에 고 정은임 아나운서는 이렇게 화답했었지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애석하게도 정은임 아나운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김주익 위원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어서라도 그 방송 고마웠다고 눈물을 흘렸겠지요. 

정은임도 김주익도 없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고공 크레인 위에 달라붙은 이들은 있습니다. 그들의 호소는 차라리 법치국가를 자임하는 나라에 대한 슬픈 조롱입니다. “대법원 판결을 지켜라.” 경찰이 그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할 때 법원이 “올라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기각할만큼 웃기지도 않는 법치국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2003년 10월 17일 목을 맸던 김주익 위원장은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 나처럼 되게 내버려 둘 것이냐고. 저 사람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해 줘야 할 거 아니냐고. 김주익 위원장이 태풍에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아갈 때 건배를 외치고 있었던 죄책감으로, 지금은 철탑 위에 오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노동자들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합니다. 별 수 없는 월급쟁이깜냥에 가 볼 처지는 못되고 아주 부끄러운 액수나마 보태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강요하고자 합니다. 땅보다는 하늘에 가까운 곳이니 하늘나라에 쌓아두는 셈치고 저들이 외롭지 않다는 걸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포스팅은 전체 공개로 해 두갰습니다.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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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1.2 밸푸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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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

언젠가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몇 장의 종이가 88만 달러에 팔린 적이 있다. 대문호의 자필 서신이나 습작이나 대화가의 연필 스케치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영국 외무 장관이 끄적인 서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서한은 휘갈긴 글자 알파벳 한 장 한 장에 후대의 수십 년 동안 흘릴 피비린내와 배신의 역겨움이 서려 있는 문제적 서한이었다. 서한의 작성자는 밸푸어. 초안은...
1917년 7월 17일에 작성됐으나 발표는 1917년 11월 2일이었다. 서한의 수신자는 유태계 거부 로스차일드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미군이 참전하긴 했으나 그 시점에서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고 독일군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동부전선의 러시아 군은 궤멸 상태에서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독일의 잠수함들은 영국의 상선들을 거침없이 격침시키고 있었다. 즉 영국으로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경일 즈음이었다. 이때 영국의 유태인 지도자들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가 유태인의 도움을 전제로 한 영국의 조처를 끈질기게 촉구했고 결국 외상 밸푸어는 로스차일드로 대변되는 유태계 자본에게 영국의 약속을 전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독립 국가 건설 지지” 시오니스트들은 열광했다. 드디어 로마 제국의 정복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진 유태인들이 꿈의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그들의 송가 하티크바를 부를 날이 만져질 듯 다가온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에게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내가 살고 있는 땅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인지 영문조차 몰랐지만 유태인들도 좋아라 할 일만은 아니었다. 영국은 심각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 다리였다. 영국은 1년 전에는 정반대의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 있었다. 메카의 태수 후세인에게 수 차례 서한을 보내 투르크 치하의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아랍인의 해방을 약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보 장교 로렌스가 중동에 파견되어 아랍인들의 대 투르크 게릴라전을 돕도록 했고 우리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보는 바처럼 다마스커스 같은 주요한 거점을 함락하여 투르크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칠 수 있었다. 밸푸어에 열광했던 유태인들만큼이나 태수 후세인도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보낸 서한에 고무되어 있었다. “영국이 보장했다!” 결국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미끼로 두 마리 고기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낚시꾼은 낚시대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한 미끼를 두고 물고기들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영국은 또 한 다리를 걸쳐 두고 있었다. 맥마흔의 서한보다도 밸푸어 선언보다도 더 먼저 1915년쯤에는 프랑스, 러시아와 비밀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1916년 7월에는 이미 최종 협약서에 사인을 끝냈다.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라 불리는 이 협정의 골자는 다름아닌 아랍 지역 나눠 먹기였다. 영국은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의 해안지대와 요르단, 이라크 남부 그리고 하이파와 아크레 항을 확보하여 지중해 수로를 장악할 것을 보장받았고 프랑스 몫은 터키 남동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북부였고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등을 챙겼다. 이 협정은 그야말로 비밀 협정이었지만 밸푸어나 맥마흔이 모를 리 없었고 영국 정부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리 없었으니 그들은 곧 이중 사기를 쳤던 셈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제정 러시아 정부가 붕괴한 뒤 볼세비키 정부가 이 협정을 공개해 버렸을 때 영국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하지만 결국 비슷하게나마 지켜진 건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었다. 러시아는 탈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알뜰하게 자기 몫을 챙겼던 것이다. 아랍과 유태인은 동시에 분노했다. 유태인들은 연속부절로 팔레스타인에 상륙했고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충돌했다. 영국은 눈 앞의 이익을 위해 그 후로 100년 가까이 벌어지는 중동의 혈투의 씨를 꼼꼼하게 뿌려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 봤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렇게 그 소회를 표현한다.

“나는 동방에서 손쉽고 빠르게 승리를 거두려면 아랍인의 도움이 필수적이고 전쟁에 지는 쪽보다는 이기고 나서 약속을 깨는 것이 낫다는 믿음으로 사기의 위험을 무릅썼다. 아랍인들의 각성이야말로 동방 전쟁에서 우리 승리의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영국이 문서상으로나 진정한 마음으로나 약속을 지킬 것이라 확신시켰다. 이것을 위안 삼아 그들은 자기 몫을 다했다. 그러나 당연히 나는 우리가 해 낸 일을 자랑스러워하기는 커녕 끊임없는 수치감에 시달렸다.”

맥마흔보다는 밸푸어의 끗발(?)이 높았기 때문일까. 중동의 판세는 밸푸어 선언이 제시한 대로 흘러간다. 끝내 팔레스타인에는 다비드의 별이 솟았고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몰아 내고 장벽 속에 가두고 학살했고 아랍 세계의 개입을 물리쳤다. 그 와중에 밸푸어 선언에서의 한 구절은 깡그리 잊혀진다.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아마 밸푸어가 오늘날의 모습을 봤더라면 로렌스만큼이나 수치감에 시달렸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여기서 영국의 표리부동과 신의 없음을 지적하며 역시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는 쉽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 짓을 한 것은 영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공동체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스스로의 이득을 배제하고 이타적인 관점을 유지한 예는 장담컨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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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1.3 국장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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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11월 3일 국장의 날

197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국장일이었다. 일주일 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적인 장례일이었고 이날 초중고 전 학교는 휴교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눈으로 그날을 돌이켜 본다.

...
국장이 있기 전날 담임 선생님은 또 한 번 우리의 다리를 아프게 했었다. 종례 때 반장이 일어서 차려 경례 한 후 보통은 짤막하게 얘기하고 앉히는게 상례였는데 그날도 장장 수십 분 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으셨던 것이다. “내일은 국장일이다. 느그 집안에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우예 되겠노. 밥이 넘어가겠나. 책이 눈에 들어오겠나. 똑같아. 내일은 나라의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날이다. 그래서 느그도 학교 안나오는 기다. 공부가 눈에 안들어와서. 선생인 나도 수업을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재구성한 멘트는 이렇지만 당시의 선생님 멘트와 대차가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싸 어쨌든 학교에 안나오다니 이게 웬 떡이냐. 몇 놈들이 참 철도 없이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와 내일 학교 안 나온다 환호하다가 바로 옆반 선생님에게 걸렸다. 그때 십년 굶은 호랑이 멧돼지 본 기세로 교실 문을 박차고 나온 선생님에게 그 몇 놈의 아이들은 눈동자가 돌아가도록 얻어터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동네 유치원 원장님께 심부름을 갔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 사무를 보고 있던 원장 선생님이 TV를 켜고 계시지 않길래 나는 입바른 소리 잘하는 어린이로서 설레발을 떨었다. “샘예. 국장 보셔야지예. 대통령 장례 아닙니꺼.” 그러면서 역시 호들갑을 계속하면서 티븨를 켰다. 또깍. 흑백 TV에 실황 중계가 비쳐졌다. 광화문 네거리에 긴 아치로 된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장 휘장도 보였다. 그때 나이 쉰 줄의 원장 선생님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일은 참 많이 했지 저 사람이.” “나라의 아버님”이 가신 마당이었기에 나는 의아해서 유치원 원장 샘을 바라 보았다. “저 어르신”도 아니고 “저 분”도 아니고 “저 사람”이라니. 그런데 그 다음 튀어나온 말을 나는 지금도 그 특유의 경상도 억양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소새끼같이. 소새끼같이 열심히 했지.”

서울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 그 뉘앙스가 애매할 수 있으나 경상도 사람이 저 말을 감정을 담아서 하면 그 뜻은 확연하고 명료하다. 그때 원장 선생님은 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안좋다는 것은 확실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원장 선생님의 방점은 확연히 열심히 했지가 아니라 소새끼에 찍혀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급반전되어 있었다. 직장 나가신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티븨 앞에 못 박혀 계셨다. 그때 모니터에 비친 이는 바로 이번 대통령 후보로 나서신, 어려서는 어머니를 닮았나 했더니 나이 들어갈수록 부전녀전인 듯 보이는 바로 그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얼마 전 “불쌍하지 않냐. 일찍 조실부모하고.....”라고 하면서 박근혜 후보 동정론을 펴는 누군가에게 “니 부모는 지금 살아 계시지 않으니 너도 불쌍하구나.” 라고 반문하실 정도로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당시 바로 티븨 앞에서 그 말을 하셨다. “불쌍해서 어떡하나.”

그 후로 펼쳐진 풍경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를 보면 안다. 영구차는 투명했고 그 안에 태극기 덮인 관이 있었고 육사 생도들이 그 관을 호위하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각을 지어 걸어갔다, 모르긴 해도 아마 다음날 육사 생도들 무릎 아작났을 것이다. 연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그리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부모가 잃은 듯이 울었다. 어떤 할머니는 엎드려서 울었고 우리 동네 곳곳에서도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나는 알았다 울음은 전염되는 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울음은 전파되었으며 나중에는 소새끼 운운했던 원장 선생님까지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열흘 전만 해도 박정희 타도의 불길이 널름거리며 타올랐던 부산이었다.

티븨에서 성우가 읽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치는 조시가 흘러나왔다. 작사자는 이은상이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며 사람들의 등짝을 때리는 채찍같은 시를 지었으며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 때는 자제를 호소하며 빨갱이 타령하던 바로 그분. 그분의 조시는 절절하고 명문이었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 (중략)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 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 육십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 / 오직 한길 나라사랑 그길에 바친이여./ 굳센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지을 업적/ 민족사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라.(하략)”

태산에 강물도 슬퍼하는 민족의 지도자에 역사의 중흥주요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에다가 민족사의 금자탑까지. 이런 워딩을 구사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나라 안된다. 사실 이 날은 그로부터 13년 뒤 김일성 주석의 사망 때 북한이 보여 준 풍경의 전조였으며, 그날 내가 본 모습은 북한에서 보여준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미치는 줄 알았다. 좀 울어야 폼이 나겠는데 눈물은 커녕 육사 생도들 발 틀리는 것만 보였으니까. 진심으로 나는 나의 비애국성에 실망했었고 스스로를 나무랐었다. 울어야 되는 줄로 알았다. 안 울면 안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또한 일종의 본능이 아니었을지.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묘사한 김일성 주석 사망일의 북한 풍경을 보면서 나는 일종의 평행이론의 그림같은 재연에 경악했다. 그때 우리가 비웃던 모습은 바로 우리가 행했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흔히 도대체 왜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이 요지부동 40퍼센트이고 특히 나이 든 양반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박근혜 후보에 올인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다. 나도 그랬고..... 하지만 1979년 11월 3일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것이 약간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들이 박정희의 친일파 경력을 모를까? 심지어 박정희가 독재한 걸 모를까? 그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알고 김형욱을 죽이고 ( 실종이지만)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이라는 것을 모를까? 연예인들 호출해서 성노예로 삼았던 경력을 모를까? 다 안다. 그럼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979년 11월 3일에 내가 봤던 풍경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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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1.4 마지막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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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5년 11월 4일 마지막 의병장

오늘은 독립기념관에 갔다 왔다. 특별히 가려고 해서 간 건 아니고 나들이갈 곳도 마땅치 않은 차에 딸아이가 요즘 학교에서 독립운동 단원을 배우고 있다 하는 소리에 겸사겸사 천안행으로 길을 잡았다. 오랜만에 온 기념관은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언제 여길 와 봤더라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커다란 글자들이 채워진 벽 앞을 지났다. 그 벽의 글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
었다.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

이 말은 적어도 1915년 11월 4일까지는 유효했다. 이날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장군이 사형당했으니까. 그는 1907년 정미 의병, 즉 군대 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대에 가담했고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 조선 이북 4도의 산악 지대를 호랑이처럼 넘나들며 남에서 번쩍 북에서 번쩍 일본군을 골탕먹였던 의병장이었다. 그의 체포와 처형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은 거의 종말을 고한다.

그는 평안도 성천 출신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대한제국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여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한 자”였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지주나 부자들의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소작농들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거나 때로는 패대기도 질 줄 알았던 사내 중이 사내였다는 얘기가 된다.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 쪽으로 이사해서 화전을 부쳐먹어야 했지만 그 의협심과 용기가 어디 가겠는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즉 일본이 한국이라는 생선을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한 마지막 가시를 제거한 것이다. 그래봐야 친위대 진위대 다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이었지만 일본은 한 치의 껄끄러움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은 서글펐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라 역적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절규하던 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한국군 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일본군에게 저항한다. 1907년 8월 2일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은 대한제국을 무골충 쯤으로 치부하던 일본과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이 반란은 지방의 진위대로 번졌고 현역 군인이 가세한 의병들은 한층 더 우수한 전투력으로 일본과 맞서게 된다. 힘 세고 용감한 농민 채응언도 그 일원이 됐다.

“을사5적과 정미7적같은 역신들의 살점을 2천만 동포가 씹어먹으리라.”고 격문에서 분노를 터뜨리던 채응언은 다른 의병집단이 일본군에 격파되거나 만주로 이동하는 동안 내내, 그리고 끝내 나라가 없어지고 일본의 일부가 된 나라에서 장장 7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다. 황해도 수안의 헌병 주재소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함경남도 안변의 주재소가 털렸고 황해도 동쪽을 두들긴 의병대가 강원도 북쪽에 불쑥 나타나 일본군을 어지럽게 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군 역시 독이 올랐다. 또 “일진회원을 보지 않고 죽이지 않는 자는 참한다.”는 것이 채응언 의병대의 군령이었으니만큼 친일파들 또한 채응언 의병대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80원을 내걸고 채응언을 잡고자 했다. 결국 채응언은 군자금을 얻으러 가다가 현상금에 탐난 동포의 밀고로 체포된다. 하필이면 그의 고향 평안도 성천에서였다. 체포되는 와중에 격투가 벌어져 채응언과 파출소장 다나까 모두 부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채응언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진은 바로 붕대를 칭칭 감은 다나까가 마치 맹수를 포획한 듯 쇠사슬로 묶어 놓은 채응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줄곧 태연했고 법정에서도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사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인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상고한다. 자신은 의병이고 차라리 ‘의적’이라면 모르겠으되 살인 강도의 혐의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연히 선언한 것이다.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채응언 장군은 끝까지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특히 “독립군은 만주에서 궤멸됐으니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은 만주에 없었고 박정희나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그냥 비적 따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이들의 눈으로 보면 채응언은 ‘의병’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울 것이다. 정규군의 풍채도 갖추지 못했고 무기 또한 빼앗은 것으로 싸웠으며 전투라고 해 봐야 헌병 기십 명 죽인 것이 다였는데 그걸 무슨 의병이라 부르며 그걸 어찌 전쟁이라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채응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몰랐을까. 이미 나라가 넘어간 마당에 헌병 나부랑이 몇 명 죽이고 친일파 몇 명 처단한다고 대세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의 칼바람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일본군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가며 악착같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보였을까. 어쩌면 그는 역사에, 그야말로 역사에 몸을 기댔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일본놈들이 물러가고 내 나라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 충과 효를 기억해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슬플뿐 여한이 없노라.” 당당하게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오늘날 ‘박정희는 독립군이 아니라 비적 토벌’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작자들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의 혼령이 달려들어 독립기념관의 글자를 바꿔 놓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살아났지만 의병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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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5 포먼 챔피언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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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4년 11월 5일 조지 포먼 챔피언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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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고 순진한 산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으나 일종의 EDPS성 퀴즈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세계에서 가장 정력이 센 사나이는? 답은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조지 포먼이다. '조지' 네 개씩이나 있는 사나이 (Four Man)이니 그 절륜함을 가히 누가 당하랴. 키득거리고 말 농담이긴 하지만 일말의 진실은 가지고 있다. 그는 네 번 이혼했고 다섯 번 결혼했으며 열 명을 헤아리는 자식을 낳았다. 기이한 건 아들들의 이름이 죄다 '조지'라고 한다. 조지 원 조지 투 이렇게 부르는지 아님 독특한 구별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그는 실로 무지막지한 괴력의 사나이였다.

그는 열 여섯 살 때까지 동네의 부랑아로서 감옥도 심심찮게 드나들던 일자무식의 흑인 청년이었다. 글도 읽을 줄 몰랐고 잘하는 일이라고는 '빅'이라는 별명 답게 큰 덩치로 상대를 죽도록 두들겨 패는 것 밖에 없던 암담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직업 학교에서 권투를 배우면서 그의 인생은 급전직상하게 된다. 열 여덟의 나이에 그는 세계를 제패한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소련 선수를 허벌나게 두들겨 주고 RSC승을 거둔 것이다.

그 후 프로로 전향한 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눕힌다. 그의 주먹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무패의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나 주먹만큼이나 유명한 이빨을 지녔던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을 능가하는 역대 최고의 등급으로 평가된다.

빗나가는 얘기 하나 하자면 실베스타 스탤론의 <록키> 시리즈에 영감을 준 복서가 있었다. 처크 웨프너. 그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해서 그야말로 영웅적인 혈투를 치른다. 실력이야 차이가 완연했지만 웨프너는 천하의 무하마드 알리에게 다운까지 빼앗으며 15회까지 버틴다. 코뼈가 부러지고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TKO를 당하지만 그는 거친 솜 몰아쉬며 계속 링 위에 서 있었다. 이 경기를 지켜본 실베스타 스탤론은 영감에 사로잡혀 영화 록키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끈질긴 투혼의 웨프너도 포먼 앞에서는 3라운드를 넘기지 못하고 링바닥을 기어야 했다. 그 시대 최고의 맷집이라는 츄발로도 마찬가지였고.

포먼은 무하마드 알리를 꺾은 챔피언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한다. 조 프레이저는 일종의 작은 탱크처럼 폭발적인 인파이팅을 자랑했고 죽어라 밀고 들어오는 그 기세에 알리마저 진저리를 쳤던 절정기의 복서였다. 하지만 포먼의 주먹 앞에 그는 거의 어린아이처럼 당하고 말았다. 주먹 한 방 한 방에 온몸을 움찔움찔거리다가 1회에 세 번 2회에 세 번 나자빠진 끝에 KO 당하고 말았다. 가히 세계 최강이었다.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과 함께 당대 헤비급의 최고 기량으로 꼽힌 켄 노턴이 도전했지만 그 역시 개구리처럼 고꾸라지고 말았다. 39전 39승 36KO. 포먼의 적수는 없어 보였다.

그때 한물이 아니라 두물쯤 간 복서로 보이는 무하마드 알리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곱살이나 위였던 알리가 한창 전성기를 맞이한 젊은 챔피언 조지 포먼의 주먹을 피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 봐야 곰같은 앞발에 한 방 맞으면 그만일 터였다. 하지만 포먼은 경쾌하게 도망다니는 알리를 뒤쫓다가 지친다. 그리고 8라운드 알리의 스트레이트성 잽을 맞고 휘청이더니 이내 쏟아진 말벌같은 펀치에 그만 나가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정신을 잃을 강펀치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KO패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즉 때려눕힐 줄만 알았지 자신이 캔버스에 누우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고, 그 충격이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고나 할까.

그 경기 이후 재기에 노력했지만 지미 영이라는 복서의 교묘한 복싱에 휘말려 판정패하고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입은 후 그는 쓸쓸히 은퇴한다.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는 포먼에게서 빼앗은 타이틀을 스핑크스에게 내주었다가 다시 찾아와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씩이나 차지한 위대한 복서로 남고.

알리는 포먼과 여러 모로 라이벌이었다. 인종차별에 비분강개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 속에 던져 버린 60년 로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리와 68년 동료 흑인 선수들이 미국 국가가 울리는 동안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리고 미국내에서도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활활 타오르던 무렵, 전혀 반항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68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조지 포먼,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이름까지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며 이슬람 교도가 된 알리에 맞서기라도 한 듯 은퇴 후 목사가 되어 예수를 믿으라고 목청을 돋운 포먼. 알리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추앙을 받지만 포먼은 그의 첫 은퇴 후가 더 드라마틱했다.

청소년 센터를 세워 아버지도 모른 채 자라나면서 범죄의 유혹에 늘상 노출되었던 자신처럼 불우한 청소년들을 돕던 그는 돈이 거덜나자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나이 마흔을 넘어서 난다 긴다 하는 복서들이 판을 치는 링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해외 토픽감이었다. 포먼이 챔피언일 때는 내 나이 네 살 때였고 그가 복귀한다고 할 때는 대학교를 거의 마칠 즈음이었으니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쇼를 해도 참 구질구질하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실제 그의 몸은 복서의 몸이 아닌 배 나온 아저씨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팔팔한 복서들이 그의 주먹 앞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영리하게 싸우는 법을 개발했고 젊은 선수들의 헛점을 연구했다. 젊어지려고 한 게 아니라 현재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이에 관계없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도 사람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꿈을 꾸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마침내 1994년 10월 5일 그는 기적을 창조한다. 지금의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나이 마흔 다섯에 아들 뻘 되는 챔피언 마이클 무어러를 10라운드에 KO시켰던 것이다. 역대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의 탄생이었다. 아마 마이클 무어러도 링에 나뒹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고 부르짖었을지도 모른다. 포먼은 또 포먼대로 20년전 서른 살을 훌쩍 넘은 퇴물 복서 무하마드 알리에게 허무하게 KO되었던 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이클! 20년 전에 내가 너였어." 그 경기는 그에게 악몽 중의 악몽이었으리라. 그 경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질문의 소재가 됐다. 여기에 맞서 포먼이 한 얘기가 또한 감동이다.

"그 경기는 내게 가장 치욕스런 경험 중의 하나였지만 그걸 지워 버린다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날아가는 것이다. 과거를 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를 통해 배우되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의 삶은 당신의 미래의 방향을 좌우할 수 없다."

그는 사업에도 성공했다. 그의 이름을 빌려 주고 사업에도 동참한 프라이팬 사업에서 대박을 터뜨려 그때까지 권투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불굴의 투사였다면 조지 포먼은 낙관적인 승부사였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외람되지만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너는 안된다 너는 못한다 하는 말을 무시하면 당신은 뭔가를 이룰 수 있다. 나릃 보라. 내가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니가 무슨 목사냐? 권투나 해라."고 얘기했을 것이고 내가 권투를 다시 하겠다고 했읋 때 사람들은 권투선수하기엔 너무 늙었으니 목사나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노력하고 있다. "


바로 그 노력과 의지로, 그는 1994년 11월 5일 20년 전 그가 힘도 못쓰고 잃어버린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는다. 그가 타이틀을 잃어버린지 꼭 20년 하고 일 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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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1.6 청량리 역사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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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이야기

효율적인 침탈과 중국 침략을 용도로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의 끝과 끝을 철도로 거미줄처럼 이어 놓았다. 우리가 아는 철도 이름 거개가 일제 시대 놓여진 것이고 그 철도를 타고 무수한 쌀과 자원이 일본으로 갔고 수없는 이들이 보따리 짊어지고 압록강 넘어 만주로 갔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철도, 즉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 등의 시발지 역할을 ...
한 역이 청량리역이었다. 원래는 1911년 ‘보통역’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고 ‘동경성역’으로 불리우다가 ‘청량리역’의 명칭을 획득한 것이 1942년. 그런데 6.25 때 청량리역사는 전쟁통에 불타 버린다. 최대 규모의 서울역은 용케 온전했는데 청량리역은 전화를 입은 것이다. (이 사나운 팔자를 기억해 두자)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역사가 다시 재건됐다. 성대한 기념식을 치르고 만장하신 내빈의 박수 속에 역사에 기적 소리 울리며 들어온 건 좋았지만 청량리 역의 팔자는 역시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석유 난방이 도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의 난방 재료는 무조건 석탄이었다. 강원도 일대에서 광부들이 캐낸 석탄은 화물 열차에 실려 청량리역으로 실려왔다. 그런데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지긋지긋하게 못살던 시절, 이 석탄열차를 두고 가히 미국 서부의 무법시대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일이 잦았다. 1960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에 묘사된 풍경을 정리해 본다.

밤 열한시경 석탄을 가득 실은 열차가 청량리 역에 들어오면 한 손에는 부삽, 한손에는 쇠갈퀴를 든 수십 명의 청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열차가 속도를 늦추면 일제히 달려들어 쇠갈퀴를 휘둘러 열차 옆문을 따고 탄을 퍼가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사탕에 개미 꾀듯이 수백 명이 달라붙어 캐낸 탄은 또 그 위에서 대기 중인 수백 명의 아주머니들의 푸대자루로 들어가고 밀거래는 순식간에 끝난다. 그렇게 없어지는 석탄이 연간 1만톤쯤 됐다고 한다. 부족한 나라는 자신의 석탄을 지킬 힘도 없었다. 경비원이라고 해야 2-3명. 괜히 호루라기 불고 달려들었다가 몰매맞기 십상이었고 작심을 하고 경비 중이던 청량리 경찰서 형사가 총을 쏘며 맞섰지만 석탄 도둑들은 돌팔매로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기사 그들에게도 이 일은 밥줄이었을 것이다.

피해는 석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군수물자도 공격을 받았고 어떤 간 큰 도둑들은 아예 열차를 멈추고 물건을 털어가는 대열차강도 흉내를 내기도 했다. 보다못한 당국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철로변에 담이 없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하기에 절도가 기승을 부린다고 판단, 철로변에 장벽을 쌓은 것이다. 효과는 탁월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 도둑으로 끼니를 잇던 주민들이 먹고 살게 해 달라며 아우성을 친 것이다. 석탄공사 청량리 출장소장, 청량리경찰서장, 청량리역장, 등이 총동원돼 대책회의가 열리기까지 했다.

한 번 불바다를 이뤘고 불을 때는 석탄의 종착지였던 청량리역이라 그런가 이 지역은 또 유난히 불과 인연이 많았다. 지금 롯데마트가 되어 있는 바로 그 건물은 과거 대왕코너라는 일종의 종합 유흥 건물이었다, 극장도 있고 술집도 있고 분식집도 있고 심지어 나이트 클럽도 있었던. 이 대왕코너에서는 화재가 3번이나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74년의 화재는 끔찍했다. 72년의 화재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화마는 무서운 채찍을 휘두른다. 최악의 희생은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했다. 화재로 인해 별안간 불이 나가자 일부에서는 “키스타임!”이라고 환호가 나오기까지 했지만 곧 분위기는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때 이성을 유지(?)했던 건 종업원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그때도 돈 내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유일한 출입문이었던 회전문은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기동 불능이 됐고 88 명이 죽었다. 이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도 다음 해 대왕코너에서는 또 불이 났고 대왕코너 철거 후 지어닌 맘모스 호텔에서도, 그 뒤를 이은 롯데 백화점에서도 화재가 연속해서 났다. 오죽하면 롯데 측이 대개 내거는 붉은빛 차양들을 치우고 청록색으로 대신했을까.

그렇게 화기(火氣)가 강한 청량리역이지만 동시에 그 역은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들을 지닌 젊은이들을 동해 바다로 실어 날랐던 소방 기차의 출발 역이기도 했다. 실연을 당하고 또는 시대와 불화하여 상처를 입고, 응어리진 마음들을 토해 버려는 청춘들이 기타 하나 동전 몇 닢 챙겨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를 부르짖으며 만난 곳이 바로 청량리 시계탑 역이었고, 해마다 봄철이면 강촌이나 대성리의 민박집을 향하여 대규모로 출정(?)하던 젊은 MT 군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청량리역은 군부대 많은 강원도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이별의 현장이었고 청량리 역전에는 애인을 군대에 보내고 눈물 짓는 젊은 여성들의 긴 그림자가 끊이지 않았었다.

사연많은 구 역사는 민자역사가 도입되었을 때 한켠으로 밀려났다가 2007년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아울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588 번지에 있다 하여 588이라 불리우던 사창가도 사라졌다. 1959년에서 2007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구석을 들여다봤던 청량리 역사는 수많은 사연과 슬픔을 안고서 이제 추억 속에서만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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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1.7 나의 빠삐용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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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0년 11월 7일 나의 빠삐용, 스티브 매퀸 가다

술자리가 있었는데 문득 그런 질문이 나왔다. “네 인생의 영화를 딱 하나 고르라면 뭐겠냐?” 급작스런 질문에 한참 더듬거리다가 끄집어낸 이름이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초반은 좀 지루해 보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의 시선과 감정의 끈을 놓아주지 않았던 명화였음은 분명하지만 어제의 대답은 분명한 내 건망증의 소산이었다. 내 어찌...
<빠삐용>을 잊었단 말이냐.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본 이래 수 차례 TV에서 틀어줄 때마다 본방을 사수하며 그 감흥을 기억했던 영화, 두고두고 인상깊은 영화란에는 거의 어김없이 적어 넣었던 영화 <빠삐용>을 잊어버리다니. 하필이면 그날은 11월 7일 스티브 매퀸이 떠난 바로 그 날이었는데.

나는 빠삐용을 두 사람의 비디오와 오디오로 기억한다. 비디오는 당연히 주름살 많고 고양이처럼 파란 눈을 가진 스티브 매퀸이지만 그 목소리는 ‘형사 콜롬보’의 성우였던 故 최응찬씨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후일 DVD로 영화를 다시 감상했을 때 그 감흥이 확 떨어질만큼 최응찬의 목소리와 스티브 매퀸의 외모는 신묘하게 맞아떨어졌었다. 그 유명한 꿈 속 재판 장면에서 “네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심판자들의 평결에 “나는 유죄야.”라고 중얼거리던 순간, 그 목소리와 비디오의 조합은 최고조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스티브 매퀸은 많은 명장면을 보여 줬다. 그 영화 속에서 스티브 매퀸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연기들에는 그의 인생의 단면 단면이 녹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형지로부터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비오는 날 호수에 몸을 던지는 빠삐용의 모습은 어린 시절 곡마단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사고나 치고 돌아다니다가 문제아 수용시설에 수용되었던 시절, 툭하면 탈출을 시도했던 요주의 청소년이었던 스티브 매퀸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는 감옥에서 벌레를 잡아 씹어먹어서라도 살려고 노력하던 그 표정은 유조선 선원부터 타일공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며 ‘먹고 살아야’ 했던 즈음에 지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리가 부러진 친구 드가 (더스틴 호프만)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같이 도망가려고 애쓰던 빠삐용의 모습은 해병대 근무 시절 북극해에서 배가 좌초하면서 그 차가운 바닷물에 동료들이 빠지자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혼자서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해 대통령 표창을 받고 대통령 경호 함대원으로도 근무했던 그의 이력을 비추어 보게 만든다.

그가 무명 여배우와 데이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배우 스티브 매퀸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강권으로 응했던 오디션에서 그는 엄청난 경쟁력을 뚫고 합격했고 그의 초반 단역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기 절정의 스타 폴 뉴먼이 주연한 <상처 뿐인 영광>의 단역이었다. 후일에는 70년대 헐리우드를 양분하는 대형 배우로 경쟁하게 되지만 스티브는 <상처 뿐인 영광>에서 폴 뉴먼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 찌질한 깡패로 스크린을 장식한다. 그래서일까 스티브 매퀸은 폴 뉴먼에게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드러냈고 폴 뉴먼 역시 내색을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스티브 매퀸을 이기고자 무진 노력했다고 한다. 폴 뉴먼이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함께 출연하고자 했던 것은 스티브 매퀸이었지만 맥주까지 사들고 설득하러 간 폴 뉴먼의 청을 끝내 거절했고 그 대타를 차지한 것이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하지만 이 두 스타는 <타워링>에서 기어코 그 멋진 호흡을 맞춰 보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건축가 폴 뉴먼. 옥상의 물탱크를 터뜨려 불을 끌 수 밖에 없다는 말에 “나는 어떻게 나오죠?”라고 묻다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 열정적인 남자 폴과 쿨한 남자 스티브는 그렇게 엇갈렸다.

<러브스토리>의 생머리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를 홀릴 만큼 매력이 풍부했고 영화 <블리트>에서는 전설적인 자동차 추격신을 스턴트맨없이 본인이 직접 찍었던 터프가이. 그래도 나에게 스티브 매퀸은 역시 <빠삐용>으로 남는다. 비록 그의 말년이 마약에 찌들고 병마로 점철된 고통스런 행보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갖은 노력 끝에 코코넛 부대 위에 바다로 떠가면서 “이 개새끼들아 빠삐용이 여기 있다.”고 외치던 그 모습으로, 그는 배우로 성공한 뒤 문제아에 불량청소년 시절 수용되었던 시설을 자주 찾았고 기금을 조성하여 청소년들을 도왔고 유언으로 20만 달러를 남기는 성의까지 보였다. 어쩌면 “스티브 매퀸이 여기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설 앞에는 이런 내용의 동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스티브 맥퀸은 문제아로 여기 왔지만, 사나이가 되어 떠났다. 그는 떠나 영화계에서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 캠퍼스로 돌아와 자주 그 자신과 그의 재산을 나누었다. 그의 유산은 이곳 학생들과 앞으로 올 학생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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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1.8. 황정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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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11월 8일 황정하의 추락

대개 무용담은 화려하지만 지루하다. 무용담(武勇談)이란 대개 더 이상 무용(武勇)이 필요 없는 시기에 토로되기 때문이고, 따라서 별 효용 가치가 없는 무용담(無用談)이 되기 쉬운 탓이다. 또 월남전 스키부대나 충청북도 해군 용사 같은 사기성 짙은 무용담이 판을 치기에 그 신뢰도 또한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용담이 의미 있는 것은 한때 그 무용이 절실...
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의 그 숱한 무용담도 그러하다.

지금은 페븍 ‘친구’라는 불경한 언어로 묶여 있지만 한때 쳐다보기에는 목이 아팠던 허인회 선배를 처음 본 건 88년 문무대 입소일이었다. 허인회 선배는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유니폼이었던 빨간 체육복(교련복 입고 오라는 지침을 무시하고)을 입고 웅성웅성 앉아 있던 88학번들 앞에서 그야말로 사자후를 토했다. “서관 3층 창문이 깨집니다. 밧줄이 내려옵니다. 누군가 그 밧줄에 매달려서 메가폰으로 소리를 지릅니다.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 유인물이 눈처럼 휘날리고.....” 마치 연설을 통해 슬라이드가 보여지는 듯 생생한 연설이었다. 시위를 할 수가 없어서, 학교에 전경이 가득 차 있어서 학생 서너 명만 모여도 어이 집에들 가 하고 짭새가 등을 치고 “학우여!”를 외칠 틈도 없이 “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시절의 이야기.

1983년 11월 8일 서울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황정하라는 학생이 시위 주동자로 뜬 것이다. 그는 얼마 후 한국을 찾게 되어 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취임 후 첫 번째 초청 대상자로 전두환을 선정했던, 그래서 변방의 민주화니 뭐니 하는 혼란보다는 “들쥐같은 국민들”의 확실한 독재자를 선택했던 그는 그즈음 한국에 와서 비무장지대의 GP까지 들어가서 북녘을 살피는 파격적인 제스추어를 펼친 바 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불렀던 레이건의 방한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체제를 굳히고 전두환 독재 체제의 기반을 강화한다는 것이 황정하의 판단이었다.

황정하는 부산 사람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여 ‘장군감’이라고 했던 그는 서울 치대에 합격했지만 색약임이 밝혀져 입학이 좌절된 후 재수해서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80학번이니 그 짧았던 서울의 봄도 보았을 것이고 ‘서울역 회군’도 경험했을 것이고 그 뒤 오월의 꽃바람 속에 섞인 피비린내도 경험했을 것이다. 열심히 야학 활동을 했던 그는 어느 인문계 학생 못지않은 풍부한 학습과 독서를 섭렵한 사람이었다. 폴 스위지가 쓴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영문 복사판을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술술 읽어댔다고 하니 말이다. (경향신문 2012년 9월 2일자.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

졸업을 앞두고 그는 마침내 시위 주동자가 될 것을 결의한다. 짭새들이 족구하고 놀고 있는 그 위로 밧줄을 비끄러매고 시간을 버는 고공농성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낮 12시 53분경, 점심을 먹은 학생들이 잔디밭에 누워 식곤을 달래다가 수업 들어가기 위해 엉덩이 털던 그 시간, 도서관 6층에서 몸집 큰 누군가가 유리창 방충망을 뜯고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는 유인물을 본 순간 사람들은 직감했다. “또 시위구나.”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이라는 유인물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정하는 방충망을 찢고 나와 밧줄을 맨 채 5층의 베란다 창틀에 발을 디디려고 했다. 이미 사복경찰과 학교 경비들은 번개같이 도서관을 뛰어올랐다. 다년간의 시위 진압 경력으로 비추어 주동자를 확보하면 일단 급한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한국일보의 첫 보도에 따르면 “관계관의 저지를 뿌리치려다가” 그리고 그 후속 보도에 따르면 “본인의 실수로” 황정하는 15미터 아래로 추락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훤칠한 키의 황정하가 도서관 창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펼쳐졌다. 날카로운 여학생들의 비명과 남학생들의 거친 쇳소리가 뒤엉켰고 곧 땅에 떨어진 황정하는 머리가 깨진 채 피를 쿨럭쿨럭 토하고 있었다.

여기서 경찰은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른다. 그들은 황정하를 병원으로 옮기기보다는 일단 윗옷을 벗겨 황정하의 깨진 머리를 감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감출 속셈이었고 그렇게 자신의 옷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황정하를 그대로 놔 둔 채 또 하나의 시위 주동자였던 백수택을 잡는 데에만 골몰했다. 15미터 위에서 땅으로 추락한 이 불운한 사람은 아무런 처치도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 피만 쏟고 있었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소생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그 참상을 목도한 학생들은 불덩이처럼 일어나 경찰에 맞선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그 서슬푸른 5공 하의 전경들 수십 명이 무장해제되기도 할만큼 그날의 시위는 치열했다.

그날 땅에 떨어진 황정하에게 달려들어 윗옷을 벗겨 그 머리를 가렸던 경찰은 당시 어떤 생각이었을까. 피 보면 애들이 흥분하니 일단 가리고 보자는 본능이었을까. 일단 얘만 가리면 시위 진압에는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이었을까.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몰라 저지른 실수였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 경찰들은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들의 임무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진급이, 자신들의 고과가 더 요긴했던 것이다. 뜻밖에 일어난 불상사에서 ‘사람이 먼저’라기보다는 일단 시위부터 진압해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밥벌이였던 것이다. 누가 죽어가든 말든. 누가 피 흘리든 말든.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데 문득 이 질문의 화살촉이 오늘날의 우리를 향해 돌아올 수도 있음이 섬뜩하게 뇌리를 누른다. 30일이 넘도록 곡기를 끊고 단식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수십 일째 대법원 판결을 지키라고 황정하가 떨어진 도서관보다 훨씬 더 높은 철탑에서 농성 중인 두 사람 앞에서 무심한 우리라면, 밥벌이도 해야 하고 일상도 영위해야 하니 무관심할 뿐인 우리라면, 우리는 저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득한 일제 강점기, 일제 경찰 고위 간부로서 의열단에 가담하고 폭탄 반입 등의 공작을 펼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황옥 경부 사건”의 주인공 황옥의 종손이었던, 시위 전 모든 소지품을 정리해 버려 유품이라고는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는 책 하나만 남아 있었던 청년 황정하가 1983년 11월 8일 붉디 붉은 피를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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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1.9 전국 노래 자랑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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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9일 전국 노래 자랑 시작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라면 단연 <전국 노래 자랑>입니다. 1980년 11월 9일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서른 두 돌을 맞네요. '딩동댕동'과 '땡~~'을 합격과 불합격을 가리키는 일종의 국민적 의성어로 만들다시피 한 이 프로그램은 그 동안 전국을 몇 바퀴 돈 것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도 열렸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그 이름을 뽐냈던 일종의 국민 오락 ...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원조 국민 MC 송해 선생님과 함께죠. 그런데 하나 착각하지 마실 것은 송해 선생님이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맡으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가수 이한필이 오랫 동안 진행했고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도 잠깐 마이크를 잡았고 MC 최선규씨도 전국 노래 자랑의 무대에 선 일이 있습니다. 송해 선생님이 전국 노래 자랑의 부동의 MC로 등극하신 것은 1988년의 일입니다.

빰빠빠 빰빠 빠아아암 빠 ~~~ 경쾌한 시그널 뮤직은 일요일 낮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애초 송 선생님은 이 프로그램이 "몇 십회 나가다 보면 끝날 것"으로 여겼답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시와 군 행정구역 전부를 따져 봐야 몇 개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고 대도시의 경우 구별로 나눠서 열리기도 하고 간 곳 또 가고 하다 보니 그 세월이 30년을 넘기게 됐지요. 이쯤 되면 이건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전국 노래 자랑> 연출팀은 일종의 유랑극단 같았다고 해요. 담당 PD는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갔고 그 휘하에 카메라 조명 세트 스탭에다가 경음악 반주반과 국악 반주반까지 휘몰고 다녔으니 유랑극단이 따로 없었겠지요. 80년대만 해도 할아버지들이 갓 쓰고 나오셔서 그 쉰 목소리로 "장산곶 마루에~~~~"나 "한오백년"을 부르셔서 국악 반주로 흥을 맞춰 드렸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지요. 민요 들으며 자란 세대는 가시고 '목포의 눈물' 정도 들으며 자란 세대가 백발이 성성해진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이 프로그램 PD가 쓴 글을 읽는데 그는 가장 인상 깊게 촬영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완도를 들고 있더군요. 전남의 몇몇 군이 그렇지만 완도군 역시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군이죠. 완도에서 <전국 노래 자랑>을 하는데 좀 걱정이 앞서더랍니다. 완도군민 수도 얼마 안되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녹화 당일 담당 PD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완도항이 완도군 관할의 각 섬들에서 섬 주민들을 싣고 온 통통배와 어선들로 미어터졌던 겁니다. 그 PD는 '완도상륙작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더군요. 상상해 보세요. 완도항이 미어터지는 가운데 간만에 나들이옷 차려 입고 "아따 이거 볼라고 포도시 포도시 왔네." 서로 인사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이닥치는 관중들의 정경을. 담당 PD는 어깨가 으쓱한 정도가 아니라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했을 겁니다.

30년 역사에 그런 일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여든 다섯 딸이 백 세 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미 가물가물하신 어머니가 가사를 까먹자 여든 다섯 딸이 꼬박꼬박 가사를 불러 드리며 노래를 맺었다는데 생각하면 참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경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도 최고령 출연자의 영예를 차지하기엔 너무 젊으셨습니다. 118세 된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신 적도 있으니까요. "너무나도 행복하다."고무대 출연 소감을 밝히신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3일 뒤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아마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제 세상에 무슨 여한이 있겠나 텔레비에도 나와봤는데 하며 저승사자를 재촉하며 가셨을 겁니다. 그런 사연도 있었다더군요. 한 번은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난 형제들이 무대에 올라왔길래 하도 귀엽기도 하고 장난도 칠 겸 악단장에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아가라고 했는데 마침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악단장 겸연쩍어하며 세뱃돈 만 원 씩을 쥐어 줬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 뒤 같은 지역을 찾았던 <전국 노래 자랑> 무대에 이제는 열 일곱, 열 아홉, 스물 한 살이 된 형제가 또 무대에 올랐답니다. 그들은 그때 받은 돈을 그대로 그때까지 갖고 있었다고 해요. 대통령이랑 악수한 뒤 손 안 씼는다는 기분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돈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고 합창했고 송해 선생님은 가슴까지 뭉클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국과 세계를 누빈 <전국 노래 자랑>과 송해 선생님입니다만, 아마 그 프로그램에, 그리고 송해 선생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소는 역시 북한일 것 같습니다. 2003년 광복절 기념으로 성사된 북한 주민들의 노래 자랑은 남북 관계가 괜찮던 당시에도 무진장한 줄다리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북한은 황해도 재령 출신인 월남민 송해 선생님이 무대에 서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고 해요. 금강산 구경을 가서도 송해 선생님을 배에서 못 내리게 한 적이 있는 북한 당국이니 오죽했겠어요. 하지만 KBS쪽도 악으로 깡으로 버텼어요. 전국 노래 자랑에 송해가 빠지면 그게 속 없는 만두 아니고 뭐겠어요. 그거 말고도 문제는 태산이었답니다. 이를테면 불합격을 알리는 '땡' 소리는 평양편 노래자랑에서는 울리지 않았어요. 북한측이 "우리 인민에 대한 모욕입네다!"라고 결기를 세우고 나온 탓이죠. 또 송해 선생님은 애드립도 제대로 치지 못했어요. "와 대본에 없는 소리를 합네까?" 북한측의 항의가 잇따랐던 겁니다. 그나마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노인에게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큰절한 것이 '송해다운' 모습이었지요.

그 삼엄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송해 선생님은 평양에서 차 타면 한 시간이면 갈 황해도 고향 땅에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북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 볼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위안이라면 함께 사회를 봤던 전성희씨의 마지막 인사였겠지요. 헤어지기 전 그녀는 송해 선생님에게 달려와서 그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인사를 했답니다. "아바디 건강하시라요." 그때 송해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얼마 전 송해 선생님이 건강 악화로 전국 노래 자랑 녹화를 포기해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27년 생이시니 여든 여섯. 솔직히 물러나셔도 벌써 물러나서 쉬셨을 연세지만 송해 선생님은 기어코 다시 돌아와서 마이크를 잡으셨다지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저 또한 가슴이 짠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왕 노익장을 과시하실 거 좀 더 사셔서 꼭 북한판 노래 자랑을 진행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월남민'이니 아니니 시비할 것 없이, 맘대로 농담도 하고 '일성이 형님 송해 왔습니다.' 하면서 사람들 웃기기도 하고 뭣보다 그분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 땅에서 꼭 노래자랑을 열어 인민들의 노래를 들으며 딩동댕과 땡 소리를 번갈아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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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1.10 황용주 필화 사건과 매카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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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10일 황용주 필화와 매카시즘


군정에서 민정으로 바뀐 지 몇 해 안되던 그 심란한 세월의 어느 날, 야당의 김준연 의원이 준열한 어조로 누군가의 글을 두고 '용공'(容共)이라고 성토하고 나섰다. 글을 쓴 이는 황용주 부산 MBC 사장. 그는 월갑 잡지 '세대'에 자신의 통일론을 설파하는 글을 썼는데 당시로서는 꽤 진보적인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을 담고 ...
있었다. '북괴'라고 쓰지 않고 북한이라고 일컬어도 흰눈으로 돌아보던 시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고 서로 그 체제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걸 야당 의원이 문제 삼았을까.

김준연 의원은 "왜 황용주를 당장 집어넣지 않느냐?"고 길길이 뛰었다. 그 이유는 그의 뒷말에서 간단히 드러난다. "우리는 지도자(박정희)가 반공 반공 하면서 나중에 용공으로 돌아설까 무섭단 말이오. 한 배의 모든 승객이 샌프란시스코로 가기를 원하나 선장이 키를 돌리면 배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마는 것이오." 황용주는 박정희의 대구 사범 후배로서 박정희의 절친한 후배였던 것이다.(그리고 정수장학회를 박정희가 빼앗는 데 있어 중개인 노릇도 했었다.)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그의 사상을 의심하여 사재를 털어 그의 뒤를 캐고 다녔던 민간인들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을만큼 '빨갱이'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헐크가 되던 시대, 야당 인사들로서는 황용주의 글은 그야말로 뜸 잘 든 밥상이었다.

김준연 의원의 활약상(?)은 참 경악할만하다. 그 자신도 일제 강점기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일찍이 대통령선거에서 "간첩 황태성은 박정희씨의 친형인 박상희씨와 친면이 있는 사이이고, 고 박상희씨는 대구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약했다가 토벌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 때 박정희씨가 남로당 책임자였다는 것, 또한 박씨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씨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공산세계와 일맥이 통하는 소위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였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그의 사상이 의심되지 않을 수 없고, 국민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공격하는 등 악착같이 박정희를 공격했다. 박정희가 "악랄한 매카시즘"이라고 반발할만큼.

황용주 필화 사건에서 김준연은 또 한 번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흥분했다. 국회에서 "수사중"이라고 답변하는 내무 장관 앞에서 김준연은 책상을 두드리면서 "개00"라는 말을 수십 번이나 연발했다. 그는 역시 "박정희 대통령과 그가 친한 사이라는 사실에 전율을 금할 수 없다."고 박정희를 들먹였고 이에 15년 뒤 박정희 대통령의 저승길 동료가 되는 공수부대 대위 출신 차지철이 격하게 반발한다. 그답게 단순하지만 꽤 올바른 논리로. "황용주가 빨갱이면 빨갱이지 왜 각하 이름을 들먹이는 거요." 차지철 역시 책상을 난타하며 분연히 맞섰고 국회는 일촉즉발의 난장판으로 변한다.

그런데 또 엉뚱한 얘기가 야당 의원들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서울 시내 어느 다방에서 소련 국가가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 발언자는 민정당 유청 의원. 소련 국가가 '인터내셔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노래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야당 의원들은 또 불같이 흥분했다. "부산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를 해임해라. 다방의 음반을 조사하라." 가히 정신질환에 가까운 레드 콤플렉스였다. 오히려 당시 정부 여당 측의 반응에 절로 공감이 갈 정도다. 국회의원들의 호통이 이어지던 국회에 출석해 있던 공보부의 모 국장은 기자들에게 "공보부장관이 어떻게 민간 방송사 사장을 해임할 수 있으며, 다방의 음반을 조사할 수 있겠느냐며 하소연했다.

공화당 의원들마저 이 가공할 빨갱이 처단판에 대부분 가담한 가운데 공화당 박종태 의원의 반박은 매우 이채로울만큼 상식적이다. "남북통일이 터부가 아닌 다음에야 통한론(統韓論)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없으며, 북한에 정권이 있는 것을 인정하니까 통한론이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통한론이 나오겠는가." 하지만 한국 보수야당의 대부라 할 위인이자 우리도 아는 정대철 의원의 아버지인 정일형조차 "이 논문(의 용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딱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태에서 나온 코멘트 중 우리가 가장 값지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공화당 대변인으로부터 나온다. "각자가 자기의 소견을 밝히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당으로서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작가 김승옥이 가슴 저리게 묘사한 "1964년 겨울"의 서울에서 '매카시즘'의 공격 대상은 다름아닌 박정희였다. 박정희에게 언론의 힘을 일깨워 준 사람이며 정수장학회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박정희의 친구 중의 하나이면서, 3.15 부정선거 후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보도 통제를 뚫고 그 사진과 기사를 역사 앞에 폭로했던 용기 있는 언론인이기도 한 황용주는 이 필화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그 후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기지 않은 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물론 야당의원들이 공격하려던 것은 그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것도 '악랄한 매카시즘'으로.

그로부터 몇 년 못가서 자신을 공격하던 왕년의 공산주의자 김준연처럼, 박정희 대통령 역시 매카시즘의 악랄한 계승자로 변신해 간다. 맞은 놈이 더 때리는 법이고 시집살이 매웠던 며느리가 더 독해진다고 그는 매카시도 놀랄 수법으로 자신들의 국민들을 쥐잡듯 잡았고, 수많은 이들에게 '빨갱이'의 딱지를 씌워 댔다. 역시 배교자가 더 무섭더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오늘날 그 악랄한 매카시즘이 박근혜 후보에게 유전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상 일이 그렇듯 바람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툭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입버릇인 박근혜 후보에게 그 아버지의 왕년을 일깨워 주고는 싶다. 그 아버님께서 얼마나 "악랄한 매카시즘"에 괴로워하셨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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