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0.11.16 비인간의 성채 게토
유태인들의 거주 구역을 일컫는 게토의 이름은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중세 때부터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을 격리시켜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게끔 강조했고 게토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된 것은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다.
...
“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종교 외에는 다를 바 없고 , 신앙 이외에는 차이가 없는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와의 통행을 금지하고 고립된 삶 속으로 몰아넣는 야만적 격리처를 뜻하는 게토를 세계적으로 익숙한 단어로 만든 것은 나찌들이었다. 그들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서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한다 이는 유태인 절멸 계획을 위한 시설이 완공되기 이전의 대기실 격이었고 10만명도 수용하지 못할 공간에 50만명을 밀어넣은 아수라장이기도 했다.
3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게토 안에서는 만성적인 식량난과 전염병이 발생했고 유태인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를 탈출하려는 유태인들을 막기 위해 1941년에는 총살령이 발동됐고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 이미 12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죽어갔다.
조갑제가 이스라엘의 전 수상 이츠하크 라빈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조갑제는 게토와 강제수용소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이스라엘 수상에게 그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북한의 만행을 그의 입을 빌려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의 수용소 실태에 대해 설명하려 든다. 물론 유태인 대량 학살과 게토에 빗대면서. 그때 라빈은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중동 국가더러 민주주의하라고 하지 않소! 그건 그 나라의 문제요. 하지만 유태인 대학살은 한 족속을 절멸시키려는 가공할 시도였소. 무엇도 거기에 비길 수는 없소!". 조갑제는 북한의 수용소 현실도 그에 못지 않다고 항변했지만 라빈의 기세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아픔을 겪은 민족, 그 참담함을 겪은 민족이 오늘날 게토의 주인공이 된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심술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2002년 6월부터 이스라엘은 총연장 640km 길이의 분리장벽 건설을 밀어붙여 왔다. 동예루살렘을 감싸는 8미터 높이의 이 콘크리트 장벽을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보안 장벽"이라 불렀다. 나찌스와 똑같은 소리였고 그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르샤바의 게토 안의 유태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게토는 바르샤바에만 있지 않고 팔레스타인에만 부활한 것이 아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게토도 있고 2016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브라질 정부는 빈민가를 감싸고 도는 장벽을 건설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빈민가는 3미터의 장벽이 포위한 게토가 될 것이다. 그런데 게토는 외국에만 있을까. 우리는 그런 야만에서 자유로울까. 애석하게도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촬영차 한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난감했던 일은 단정하게 동 숫자가 매겨진 아파트들 사이에서 내가 가야 할 동을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디. 어찌어찌 문제의 동을 찾긴 했는데 그때껏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그 동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었다. 촘촘하게 심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을 지나 꽤 긴 걸음을 돌아들고서야 겨우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무슨 아파트를 이런 식으로 지었냐고 볼멘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 제보자 아주머니는 씁쓸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는 임대잖아요. 출입하는 데가 달라요."
대한민국에서 험악하기로 말하자면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프로그램의 연출자로서, 눈과 귀에 담기 싫은 풍경과 소리들을 숱하게 접해 봤지만 그날 마주했던 아카시아 담장은 좀체 떨어뜨리기 힘든 악성 종양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한 아파트의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출입구가 다르고 다른 동과의 교류마저도 어려운 외딴 동. 그곳은 게토가 아닐까 아닐 수 있을까.
어느 교육열 높은 단지에 이똥처럼 낀 임대주택 단지에 사는 한 학생에게 한 교장이 이렇게 윽박질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 “다른 데 가라고. 너 맡을 선생님이 없다고. 우리 학교 애들 기백만 원 과외 기본으로 받는 애들인데 너 때문에 분위기 망가지고 피해 보면 그건 누가 책임질 거냐고.”. 과연 이 아이의 신세는 노란 별 단 유태인보다 낫고 그의 임대주택은 게토에 비해 백만배 행복할 수 있을까. 게토는 1940년 11월16일 나찌가 만든 그곳에 대한 호칭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1940.11.16 비인간의 성채 게토
유태인들의 거주 구역을 일컫는 게토의 이름은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중세 때부터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을 격리시켜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게끔 강조했고 게토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된 것은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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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종교 외에는 다를 바 없고 , 신앙 이외에는 차이가 없는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와의 통행을 금지하고 고립된 삶 속으로 몰아넣는 야만적 격리처를 뜻하는 게토를 세계적으로 익숙한 단어로 만든 것은 나찌들이었다. 그들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서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한다 이는 유태인 절멸 계획을 위한 시설이 완공되기 이전의 대기실 격이었고 10만명도 수용하지 못할 공간에 50만명을 밀어넣은 아수라장이기도 했다.
3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게토 안에서는 만성적인 식량난과 전염병이 발생했고 유태인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를 탈출하려는 유태인들을 막기 위해 1941년에는 총살령이 발동됐고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 이미 12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죽어갔다.
조갑제가 이스라엘의 전 수상 이츠하크 라빈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조갑제는 게토와 강제수용소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이스라엘 수상에게 그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북한의 만행을 그의 입을 빌려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의 수용소 실태에 대해 설명하려 든다. 물론 유태인 대량 학살과 게토에 빗대면서. 그때 라빈은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중동 국가더러 민주주의하라고 하지 않소! 그건 그 나라의 문제요. 하지만 유태인 대학살은 한 족속을 절멸시키려는 가공할 시도였소. 무엇도 거기에 비길 수는 없소!". 조갑제는 북한의 수용소 현실도 그에 못지 않다고 항변했지만 라빈의 기세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아픔을 겪은 민족, 그 참담함을 겪은 민족이 오늘날 게토의 주인공이 된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심술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2002년 6월부터 이스라엘은 총연장 640km 길이의 분리장벽 건설을 밀어붙여 왔다. 동예루살렘을 감싸는 8미터 높이의 이 콘크리트 장벽을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보안 장벽"이라 불렀다. 나찌스와 똑같은 소리였고 그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르샤바의 게토 안의 유태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게토는 바르샤바에만 있지 않고 팔레스타인에만 부활한 것이 아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게토도 있고 2016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브라질 정부는 빈민가를 감싸고 도는 장벽을 건설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빈민가는 3미터의 장벽이 포위한 게토가 될 것이다. 그런데 게토는 외국에만 있을까. 우리는 그런 야만에서 자유로울까. 애석하게도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촬영차 한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난감했던 일은 단정하게 동 숫자가 매겨진 아파트들 사이에서 내가 가야 할 동을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디. 어찌어찌 문제의 동을 찾긴 했는데 그때껏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그 동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었다. 촘촘하게 심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을 지나 꽤 긴 걸음을 돌아들고서야 겨우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무슨 아파트를 이런 식으로 지었냐고 볼멘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 제보자 아주머니는 씁쓸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는 임대잖아요. 출입하는 데가 달라요."
대한민국에서 험악하기로 말하자면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프로그램의 연출자로서, 눈과 귀에 담기 싫은 풍경과 소리들을 숱하게 접해 봤지만 그날 마주했던 아카시아 담장은 좀체 떨어뜨리기 힘든 악성 종양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한 아파트의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출입구가 다르고 다른 동과의 교류마저도 어려운 외딴 동. 그곳은 게토가 아닐까 아닐 수 있을까.
어느 교육열 높은 단지에 이똥처럼 낀 임대주택 단지에 사는 한 학생에게 한 교장이 이렇게 윽박질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 “다른 데 가라고. 너 맡을 선생님이 없다고. 우리 학교 애들 기백만 원 과외 기본으로 받는 애들인데 너 때문에 분위기 망가지고 피해 보면 그건 누가 책임질 거냐고.”. 과연 이 아이의 신세는 노란 별 단 유태인보다 낫고 그의 임대주택은 게토에 비해 백만배 행복할 수 있을까. 게토는 1940년 11월16일 나찌가 만든 그곳에 대한 호칭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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