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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8 늦봄 눈 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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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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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18일 늦봄 눈 감다

 

스스로를 늦봄이라 했다. 그런데 이 봄은 봄(春)이 아니라 봄(視)였다. 즉 늦게 눈을 뜨고 늦게 보았다는 뜻으로 일종의 자책의 의미가 담긴 일컬음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1994년 1월 18일 늦게 떴는지는 모르나 그 후 그가 죽을 때까지 맑게 빛났던 눈을 감았다. 심장마비였고 급작스런 죽음이었던지라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에서 손 꼽히는 구약학자였던 그는 강단의 신학자였고, 성서 번역가였다. 문익환을 두고 빨갱이 목사라고 거품을 무는 목사들이더라도 그들이 신주단지로 모시는 구약성서는 문익환의 손을 거친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연원을 하나의 혈연공동체가 아닌 하층 집단의 연맹을 일컫는 '하비루'(천민, 노예, 강도 등의 뜻)로 보았던 그는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민중과 지배의 역사, 압제와 저항, 폭군과 예언자의 역사를 통해 '민중'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실천을 통해 그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의 호세야,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서를 읽으면 그 치떨리는 분노가 수천 년을 뛰어넘어 가슴을 찌를 때가 있다. 미가의 한 구절을 읽어 보자.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들아. 살을 뜯고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며 남비에다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 것들아! 이 죽일 놈들아 ! 권력을 잡았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미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을 만나면 그 밭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밭 임자까지 종으로 부려먹는 것들아!" 아마 지금도 누군가 집회장에서 이 성경 말씀을 열띠게 봉독한다면 정보과 형사들이 아무개가 반정부 선동을 일삼는다고 밑줄을 긋기에 충분하리라.

 

절친한 친구 장준하의 의혹 넘치는 죽음을 계기로 그는 드디어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다.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이들을 향하여 포효했고,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진 가운데"(하박국) 못된 놈들에게 등쳐 먹히는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절규하는 맹렬한 시인으로 내닫는다.

 

늦바람만 무서운 게 아니라 늦봄도 무서웠다. 1976년 "늦게 세상을 본"(현실에 참여한) 이후 그가 죽은 1994년까지의 18년 동안 그는 11년이 넘도록 감옥에 있었다. 야곱의 돌베개 따위는 그의 고행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고, 엘리야가 잡아먹은 메뚜기도 11년이 문익환이 입에 넣어야 했던 관식보다는 그 맛이 달았을 것이다.

 

그는 냉철한 전략가가 아닌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강만길 교수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표현했던 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심성을 지녔던 그는 사람들의 상상의 저편을 넘어서는 과감한 행동을 종종 선보였다. 1989년 봄의 북한 방문은 그 대표이자 절정이었다.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것은.....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며,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잠꼬대 아닌 잠꼬대) 라며 노래했던 문익환 목사가 별안간 진짜로 평양에 나타난 것이다. "아뿔싸 저 양반 잠꼬대가 아니었구나."

 

남한 사람들이 기절할 듯이 놀란 그 방북에서 그는 이번에는 북한 사람들을 놀래킨다. 만면에 자애로운(?) 웃음을 띠며 손을 내미는 김일성을 대뜸, 그리고 덥석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아마 호위총국 군관들은 기겁을 해서는 저 노인네를 들어 메쳐 말아 순간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김일성과 두 번씩이나 만나 남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상당 부분 김일성을 설득한" (이승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길기도 길다 젠장) 문익환 목사는 이왕 온 김에 어디든 모실 테니 북한 구경 좀 하고 가시라는 북한의 권유를 뿌리친다. 그 이유는? "나 여권 만료일이 4월 13일이거든요."

 

나는 이 에피소드를 문익환의 '준법정신'의 발현으로 보지 않는다. 법 같지 않은 법 따위는 밥 먹듯이 어기는 걸 즐거움으로 알던 분이 별안간 여권 만료일을 챙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훗날 검사에게 얘기했던 대로 "남북이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되지 않겠소?" 했던 것처럼, 그는 북한에게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도 남한을 '지도'한다거나 하는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지킬 건 지키시오." 라고 말이다. "나도 대한민국 여권 가진 사람으로 국가보안법은 어길지언정 지킬 건 지킨단 말이오."라고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씨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보면 문익환 목사는 그가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물꼬를 튼 통일운동의 일부 세력에게서 매우 각박한 대접을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범민련'에 대해서는 당국의 탄압이 극심해 적어도 남쪽에서는 이 조직의 간판을 내거는 한 제대로 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문목사는 새롭게 '통일맞이 7천만의 모임'이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범민련'과는 형식상 관계가 없는 형태로 운동을 전개한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범민련'을 적대시하려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존재가 나타나면 까닭 없이 상대방에게 스파이의 누명을 씌워 몰아세우는 무지몽매한 무뢰한들이 일본에는 있습니다. 문목사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범민련'을 탈퇴한 이유를 들어, 이 무뢰한들은 문목사를 '김영삼 정권과 어울려서 흡수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스파이'라는 중상모략 캠페인을 벌인 것입니다."

 

이 '무뢰한'들은 일본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남한의 진보를 참칭하고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에도 숱했고, 그들은 문익환에게 '프락치'와 '스파이'의 화살을 서슴없이 날렸다. 50년 전 박헌영을 죽였던 그 방식으로, 70년 전 스탈린이 동지들 뒤통수에 총알을 박았던 그 경로로.

 

정경모씨가 동석했던 이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전언에 따르면, 돌아가던 날 오후, 식당에서 문익환 목사는 한 스님에게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문익환은 거칠게 캐물었다. "내가 스파이냐? 내가 스파이냐?" 이 질문을 받아내야 했던 것은 범민련 소속의 진관 스님이었다. "말해 봐! 내가 스파이냐?" 속을 긁어내는 듯한 비통한 질문을 하던 중 문익환 목사는 입에 든 것을 삼키지 못하고 숨이 막혀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문익환의 마지막 날이었다. 1994년 1월 18일이었다.

 

그 전날 문익환 목사는 범민련 의장에게 자신이 '통일맞이'를 꾸린 것은 범민련을 적대시하고자 함이 아니며,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관철하리라는 뜻이라는 정성스런 편지를 썼다. 그것이 문익환의 마지막 글이 됐다. 소시쩍 친구 윤동주에게 평생 부끄러워했고 미안해했다는 문익환은 그의 마지막 밤을 옛 친구의 글로 밝혔다. 그의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그 행동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맑디 맑은 사람, 문익환 목사가 갑자기 우리와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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