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예전 글 다시 갖다 둠 )
1945.1.17 라울 발렌베리의 실종
1945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1월은 싸늘했다. 부다페스트 곳곳의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들이었다. 패색이 짙은 나찌와 그 괴뢰 헝가리 정권이 유태인 색출에 눈이 시뻘갰고 며칠 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는 유태인 보육원을 습격, 아이들을 끌어내서 발가벗겨 거리를 뛰게 하다가 총살하는 등 이미 이성을 상실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찌와 헝가리 괴뢰 정권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해방하기 전, 도시 안의 모든 유태인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심사를 굳히고 있었다. 이 악마의 시나리오를 막아서고 나선 사람이 이었다. 라울 발렌베리라는 이름의 스웨덴 외교관이었다. .
“집단처형을 강행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전범으로 소련군에게 고발할 거요. 그리고 반드시 처형장에서 당신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볼 거요.”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게 포위된 채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의 독기를 발산하고 있던 나찌 친위대 기갑사단장 슈미트후버 앞에서 발렌베리는 책상을 치며 대든다. 새해를 맞아 나이 서른 셋이 된 이 스웨덴 청년의 당돌한 협박에 슈미트후버는 결국 학살을 위해 벼른 칼을 내려놓고 만다.
발렌베리는 외교관이긴 했지만 외교관으로 입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스웨덴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한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건축학도였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중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유태인 말살 정책의 참상을 목격했고 중립국 스웨덴인으로서 경각에 달린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대 외교 작전의 책임자를 제안받게 된다.
먼 훗날 ‘아이히만 체포 작전’ (전후 남미로 도망갔다가 이스라엘 정보 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한 바로 그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지는 이름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 내 유태인들을 모두 멸종시킬 것을 공언하고 있었다. 그는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헝가리와 아우슈비츠를 연결하는 직통 철도까지 깔았다. 헝가리 내 ‘유태인 청소’가 시작된 7주만에 40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아이히만에게 남은 먹잇감은 부다페스트에서 숨죽이며 살던 유태인들 20여만이었다. 발렌베리가 헝가리에 온 건 이 때였다.
외교관의 자격으로 그는 스웨덴 여권을 무작정 찍어 냈다. 스웨덴 여권을 받은 사람은 헝가리 국민이 아닌 스웨덴 국민으로 인정되었고, 유태인이더라도 의무적으로 달아야 하는 노란 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식 여권이 모자라자 아예 인쇄공을 시켜 위조 여권을 만들어 냈고 그 여권을 받은 사람들은 중립국 스웨덴의 전권대사 라울 바렌베리의 보호를 받았다.
발렌베리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만 구한 게 아니라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해 냈다. 유태인들이 강제 이송당하는 길을 가로막고 그들이 스웨덴 국민이라며 강변하거나 아예 유태인 감금 장소에 나타나 “스웨덴 여권 소지자 일어섯~~” 을 외친 후 웅성웅성 일어난 수백 명을 몽땅 데리고 나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최후의 학살을 막은 것으로부터 그 이전의 대담한 행동까지, 발렌베리의 활약으로 구해진 목숨이 10만명은 족히 넘는다고 한다.
그 모든 일을 끝낸 후 발렌베리는 자신이 구한 유태인들에게 생필품 등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소련군 원수를 만나러 간다. 1945년 1월 17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증발한다. 악명 높은 NKVD (KGB의 전신) 요원들이 그를 체포했고 감옥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있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찌도 척을 지기 싫어할만큼 강력한 중립국 스웨덴의 시민에다가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한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라울은 전쟁에서 언넘이 지지고 볶든 말든,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아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짓밟히는 모습에 분노했고, 한 인간 집단을 ‘해충’으로 보는 야수성에 반하여 목숨을 걸고 맞섰다. 물론 이것은 그 개인의 고결한 인격과 용기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지만 나는 라울이 그렇게 떨쳐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그가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고 싶다.
스웨덴은 1913년에 계급이나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급부를 제공하는 연금 제도를 제정했다. 사회 보장 정책은 시민적 권리로써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일 뿐이며, 정부의 원조나 시혜가 아니라는 개념을 이미 한 세기 전에 이정립했던 것이다. 100년 뒤의 한국 정부가 보자면 포퓰리즘이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복장 터져 죽을 일이었다. 그러자면 조세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었겠고 “이윤 추구가 생명”인 기업으로서는 그 부담을 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사회민주당 정권 기간 많은 기업들이 스웨덴을 떠나 스위스 등으로 본사를 옮긴다. 하지만 발렌베리 가문은 끝까지 스웨덴에 남았고, 되레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함으로써 국민기업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려면 해군 장교로 복무를 해야 하고, 자력으로 해외 유학을 마쳐야 하는 꽤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후계자 급은 아니었지만 그도 미국 유학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청년이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인간 백정의 땅으로 서슴없이 뛰어든 것이 그렇게 놀랄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물론 발렌베리 가문의 행적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래도 경향성이란 건 있다고 믿는다)
5대가 넘도록 세습을 이어가고 있는 이 발렌베리 가문을 한때 무척 부러워했던 가문이 한국에도 있었다. 언젠가 3대째 되시는 후계자가 2대째 되시는 자신의 아버지의 ‘헝그리 정신’을 소리 높여 예찬하셔서 폭소를 자아냈던 그 가문이며, 2대째 주인은 정신병으로, 3대째 후계자는 허리 디스크로 각각 군대를 피하신 바로 그 기업이고, 대량의 장학생으로 대변되는 ‘관리’ 능력으로 사회의 중추부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면서 수천억을 뿌려대어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을 독특한 방식으로 실천했던 바로 그 회사 말이다.
그런데 그 기업을 이끄는 경주 이씨 가문의 방계의 서자의 끝자락의 누구에겐들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용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노조 만들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책상을 복도에 빼 버리고 온갖 따돌림을 자행하여 멀쩡한 사람을 정신질환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자신의 일터에서 사람이 몸을 던져 죽어도 “이 돈 받고 입 다물어라. 단 이 돈 받았단 말 하지 말고.”라고 구슬리면 일 끝난다고 생각하는 가문의 일원이 어디 가서 누굴 구한단 말인가. 그런 가문에서 인류애에 사무치는 돌연변이가 나올 가능성은 내가 3주 연속 로또 1등을 맞을 확률보다도 적지 않겠는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한 뒤에 덤블링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담장을 넘어서, “복지는 시혜가 아닌 권리”임을 일찌감치 천명했던 스웨덴 시민의 경계를 넘어서,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성을 이해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 10만이라는 고귀한 생명을 구했던 라울 발렌베리는 66년 전 오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최후가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인간의 광기라는 악마가 또 다른 몸을 빌어 그에게 복수의 마수를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서명과 용기와 신념으로 구해낸 10만 명의 생명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발렌베리는 10만 개의 우주를 구하고서 역사의 블랙홀로 빠져든 인류의 별이었다. 1945년 1월 17일. 그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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