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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11 호남선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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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4년 1월 11일 호남선의 개통

시작은 프랑스의 휘브릴 사였다. 휘브릴 사는 무슨 욕심이었는지 휘청거리는 나라 조선에 들어와 1896년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내달릴 '경목선' 부설권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 철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와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알토란 같은 노선이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그런데 경부선을 따낸 일본도 이 노...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경부선을 호남을 거쳐서 깔자는 건의까지 했다니 그 꿍심을 알만하다.


경목선, 즉 오늘날의 호남선만큼은 우리 힘으로 깔아보려는 움직임은 꽤 강력했다. 정부차원에서 '경목선' 부설을 시도하기도 했고 예산 부족으로 민간에게 넘어간 뒤에도 부설권은 한국인들로 이뤄진 '호남철도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공사에 들어갔지만 만, '국방상 중대한 기능을 하는 철로 건설을 개인에게 불하함은 곤란'하다는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만다. 이제 철도의 완성은 일본의 몫이었다. 일본은 호남선을 시급히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국 최고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쌀이었다.


1914년 1월 11일 3년 8개월 동안 구간 별로 시차를 두고 개통해온 대전과 목포간 철도 노선 가운데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완공됨으로써 ‘호남선’이라는 이름의 완성된 철도가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호남선의 경우는 그 출발부터 분위기가 서글펐다. 일단 일본과 만주,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경부선과 경의선에 비해 노골적인 차별이 이뤄진 것이다. 일단 운행 횟수가 적었고, 여객의 수송보다는 쌀 같은 화물 수송이 중심이었기에 시설이 남루했고 기차도 낡은 것이 투입됐다. 결정적으로 경부선, 경의선은 일본인도 이용했지만 호남선은 '조센징투성이'의 기차였다.


“근일 철도에서 하는 일을 보면 아무리 지선이라도 경원선과 호남선에 대하여는 학대가 비상하여 똑같은 기차삯을 내는데 어찌하면 철도길이 다르냐고 이와 같이 차별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연히 승객의 마음에 일어난다.”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다.

호남선의 서글픈 운명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일제의 쌀 수탈이 가속화되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농민들이 이불짐 싸들고 만주라도 가려고 몸을 싣는 기차였고, 해방된 뒤에도 땅 파고는 굶어죽을 재간 밖에 없던 농민들, 또는 그 아들들이 열차 문간에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서울로 서울로 가던 열차였다.

그런데 1947년 1월 11일 해방된 조선의 언론이 발칵 뒤집힌다. 나흘 전, 그러니까 1월 7일 호남선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그제서야 기사화된 것이다. "7일 밤 목포 발 서울 행 38호 여객 열차가 밤 아홉 시경 대전 못 미쳐 황등과 두계역 사이를 질주 중 미군인의 전용 객차 속에서 조선 여자와 어린애의 비명이 들리므로 수상히 여긴 조선인 여객들은 전무와 이동 경찰에 알리는 동시 그 객차로 달려들었으나 미군이 권총으로 위협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술렁거리는 사이에 그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다른 미군의 협력을 얻어 조선인 경찰과 손님들이 객차 안으로 뛰어들고 보니 24명의 미군이 있는데 그곳 변소에 젊은 조선 여자가 발가벗은 몸뚱이로 되어 있고 또 다른 어린애를 동반한 조선 부인이 이 역시 옷을 칼로 갈래 찢겨 목이 메어 울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분격과 의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는 보도였다.

당시 미군들은 열차 안에 전용칸이 배정되어 있었다. 어느 조선인 여자가 기차에 올라탔을 때 한 미군이 전용차로 안내(유인?)를 했고 멋모르고 들어간 조선인 여자를 스무 명이 넘는 미군들이 윤간을 해 버린 것이다. 권총을 든 미군 앞에서 조선인 열차 경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보도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1월 11일 장안을 뒤집어 버린 일대 사건으로 터져나온 이 사건으로 군정청장 하지 중장이 나서서 "사형같은 엄벌에 처하겠노라" 했지만 며칠 뒤 이 사건은 언론 지상에서 사라졌다. 

 아이 앞에서 칼로 옷이 갈갈이 찢긴 채 강간당했던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나주역 쯤에서 올라타고 남편 찾아 서울 가던 길이었을까, 간만에 친정에 왔다가 쌀말이나 얻어 몸에 두르고 콧노래 부르며 올라탄 주부였을까.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녀는 호남선 레일 위에 굽이굽이 서린 슬픔의 하나로 남는다.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고 김민기가 노래한 서울길도 필시 호남선을 타고 가는 길이었을 것이고,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슬픈 이별을 남기고 떠나가는 대전발 0시 50분은 목포행이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외치며 이승만에 진저리치던 사람들의 희망을 지녔던 신익희가 호남선 위에서 쓰러졌고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열혈팬들은 신날 때는 "남행열차"를, 우울할 때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기차 한 칸씩을 빼곡이 메우며 잠실벌과 광주를 왕복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 철도만큼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실어냈던 철도가 있을까.

해방 당시 인구의 1/3 내지 절반 가까이 타지로 실어낸 철도이지만, 이 철도가 복선화, 그러니까 일제가 3년만에 후다닥 해치운 호남선 레일 옆에 레일 하나 더 까는데 36년의 세월이 걸렸다. 호남선 복선화가 완성된 것은 2003년 12월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구성진 노래 한 자락이 목구멍에 걸린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인가 비 나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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