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7년 1월 10일 의인 이근석
1997년 1월 10일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대목이었다. 명동 거리는 주말의 해방감에 젖은 인파로 붐볐고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골목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빽빽한 사람들의 숲속에서 매서운 눈을 번득이며 뭔가를 찾는 세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한데 몰려 다니다가 흩어졌다가 누군가에 접근했다가 바람같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손에서는 연신 빈 지갑들이 떨...어졌다. 지방에서 서울 대목을 노려 상경한 소매치기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또 다른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서울경찰청 소매치기 전담반 형사들이었다. 소매치기 일당의 행적을 완벽하게 포착한 형사 하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니들 오늘 죽었어."
강력계 베테랑으로 완력 하나는 김두한이 살아오더라도 메칠 자신이 있던 서정표 형사는 또 다시 누군가의 핸드백을 찢으려는 소매치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깜짝할사이에 두 명이 명동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순간 서정표 형사는 아뿔싸 외마디를 내뱉아야 했다. 소매치기들은 항상 흉기를 소지하고 다녀서 단독으로 그들에게 대들었다가는 낭패를 본다던 말이 머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순간 서형사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뜻밖의 활극 구경에 눈이 동그래진 인파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고 동료 형사들은 그 인파를 뚫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저놈이 칼을? 그 짧은 찰나 서 형사의 눈앞에서 소름끼치는 빛이 번득였다. 소매치기 한 명이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구나! 피가 튀고 사람이 픽 쓰러지자 사람들은 늑대를 본 양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주로가 뚫린 소매치기들이 달음박질을 하려는 순간 인근의 악세사리 샵에서 한 젊은이가 튀어나왔다.
청년은 정의의 사자처럼 칼을 든 소매치기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칼을 빼앗아 팽개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지만 그 환호는 소스라치는 침묵에 묻혔다. 바닥에 엎드렸던 소매치기가 또 다른 칼을 꺼내 청년의 심장을 찔러 버린 것이다. 소매치기들은 남산 쪽으로 달아났다. 청년은 병원에 실려가면서 연신 이렇게 얘기했다. "집에 연락하지는 말아요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그러나 그것은 유언이 됐다. 삼형제 중 막내, 형들에 비해 공부는 못했지만 장사를 해 볼 결심으로, 그리고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각오로 리어카 행상을 나섰던 청년, 팔다남은 옷가지가 있으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 옷을 안겨줬고 유난히 싹싹해서 단골도 많았던 청년은 그날 이후 다시 부모님을 보지 못했다.
독기를 품은 경찰들이 용의자들을 찾아 헤맨 끝에 소매치기들은 체포됐다. 그들은 대담해지기 위해 필로폰까지 투약하고서 '영업'을 하던 일당들이었다.
1월10일 저녁, 그가 쇼윈도 바깥을 지켜보다가 소스라친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비록 유도도 했고 덩치도 당당한 청년이었지만 자신만큼이나 단단한 체구의 형사가 칼에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나 움츠러들고 행여 자신 앞으로 놈이 뛰어들지 않을까 하느님 부처님을 찾았을 그 순간에 그는 칼 앞으로 뛰어들었다. 살기띤 소매치기의 눈 앞에서 순간 후회도 했을지 모른다. 그때라도 물러섰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갔다. 무모하게, 바보처럼, 생각 없이.
사건 소식을 들었던 날 기억이 난다. 동료 PD들은 안타까와하면서도 칼 앞에 몽둥이라도 하나 들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는데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을줄 아냐."
용기란 건 사실 남보다 한 발 더 나가는 것일 거다. 하지만 대개 한 발이란 암스트롱의 달 위의 한 걸음보다 더 어렵고 멀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용기를 기리기보다는 한 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 하는 일에 더 익숙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움' 앞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발휘한 최대의 미덕인 용기는 무모함으로, 때로는 미련함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사건 당일 나와 내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착하게만 살다가 용기의 댓가로 목숨을 잃은 청년 이근석은 명동 바닥에 덩그러니 세워진 추모비 하나로 그가 짧디 짧게 살았던 세상에 남아 있다. 명동 거리에서 우연히 이 추모비와 마주친다면 피묻은 칼 앞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어 "이 나쁜놈들!"을 부르짖은 한 청년의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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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10일 의인 이근석
1997년 1월 10일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대목이었다. 명동 거리는 주말의 해방감에 젖은 인파로 붐볐고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골목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빽빽한 사람들의 숲속에서 매서운 눈을 번득이며 뭔가를 찾는 세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한데 몰려 다니다가 흩어졌다가 누군가에 접근했다가 바람같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손에서는 연신 빈 지갑들이 떨...어졌다. 지방에서 서울 대목을 노려 상경한 소매치기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또 다른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서울경찰청 소매치기 전담반 형사들이었다. 소매치기 일당의 행적을 완벽하게 포착한 형사 하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니들 오늘 죽었어."
강력계 베테랑으로 완력 하나는 김두한이 살아오더라도 메칠 자신이 있던 서정표 형사는 또 다시 누군가의 핸드백을 찢으려는 소매치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깜짝할사이에 두 명이 명동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순간 서정표 형사는 아뿔싸 외마디를 내뱉아야 했다. 소매치기들은 항상 흉기를 소지하고 다녀서 단독으로 그들에게 대들었다가는 낭패를 본다던 말이 머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순간 서형사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뜻밖의 활극 구경에 눈이 동그래진 인파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고 동료 형사들은 그 인파를 뚫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저놈이 칼을? 그 짧은 찰나 서 형사의 눈앞에서 소름끼치는 빛이 번득였다. 소매치기 한 명이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구나! 피가 튀고 사람이 픽 쓰러지자 사람들은 늑대를 본 양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주로가 뚫린 소매치기들이 달음박질을 하려는 순간 인근의 악세사리 샵에서 한 젊은이가 튀어나왔다.
청년은 정의의 사자처럼 칼을 든 소매치기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칼을 빼앗아 팽개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지만 그 환호는 소스라치는 침묵에 묻혔다. 바닥에 엎드렸던 소매치기가 또 다른 칼을 꺼내 청년의 심장을 찔러 버린 것이다. 소매치기들은 남산 쪽으로 달아났다. 청년은 병원에 실려가면서 연신 이렇게 얘기했다. "집에 연락하지는 말아요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그러나 그것은 유언이 됐다. 삼형제 중 막내, 형들에 비해 공부는 못했지만 장사를 해 볼 결심으로, 그리고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각오로 리어카 행상을 나섰던 청년, 팔다남은 옷가지가 있으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 옷을 안겨줬고 유난히 싹싹해서 단골도 많았던 청년은 그날 이후 다시 부모님을 보지 못했다.
독기를 품은 경찰들이 용의자들을 찾아 헤맨 끝에 소매치기들은 체포됐다. 그들은 대담해지기 위해 필로폰까지 투약하고서 '영업'을 하던 일당들이었다.
1월10일 저녁, 그가 쇼윈도 바깥을 지켜보다가 소스라친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비록 유도도 했고 덩치도 당당한 청년이었지만 자신만큼이나 단단한 체구의 형사가 칼에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나 움츠러들고 행여 자신 앞으로 놈이 뛰어들지 않을까 하느님 부처님을 찾았을 그 순간에 그는 칼 앞으로 뛰어들었다. 살기띤 소매치기의 눈 앞에서 순간 후회도 했을지 모른다. 그때라도 물러섰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갔다. 무모하게, 바보처럼, 생각 없이.
사건 소식을 들었던 날 기억이 난다. 동료 PD들은 안타까와하면서도 칼 앞에 몽둥이라도 하나 들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는데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을줄 아냐."
용기란 건 사실 남보다 한 발 더 나가는 것일 거다. 하지만 대개 한 발이란 암스트롱의 달 위의 한 걸음보다 더 어렵고 멀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용기를 기리기보다는 한 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 하는 일에 더 익숙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움' 앞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발휘한 최대의 미덕인 용기는 무모함으로, 때로는 미련함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사건 당일 나와 내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착하게만 살다가 용기의 댓가로 목숨을 잃은 청년 이근석은 명동 바닥에 덩그러니 세워진 추모비 하나로 그가 짧디 짧게 살았던 세상에 남아 있다. 명동 거리에서 우연히 이 추모비와 마주친다면 피묻은 칼 앞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어 "이 나쁜놈들!"을 부르짖은 한 청년의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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