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637년 1월 4일 병자호란 발발
어느 분이 ‘산하의 오역’에서 왜 근대 이전의 우리 역사는 거의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이유가 있다. 트위터에서 짤막하게 오늘의 역사를 올려 두던 즈음, 충무공 이순신을 두 번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신의 힘을 빌려 충무공의 전사일을 찾아 소개를 했는데 누군가가 이런 토를 다는 게 아닌가. “충무공이 예숩니까 한 달 전에 죽었다고 얘기해 놓고 ...또 죽어요?” 아뿔싸. 앞서 소개한 날짜는 음력이었고, 무심코 적은 오늘은 양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충무공을 두 번 죽인 뒤 ‘오늘의 역사’는 무조건 양력을 기준으로 삼게 됐고 그러다보니 근대 이전의 사연들은 자
연스레 논외가 됐다.
그런데 오늘은 좀 옛날 얘기를 해 보자. 국사 시간에 공부 좀 한 사람이라면 임진왜란 일오구이(1592)나 병자호란 일육삼육(1636)의 숫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병자년에 터진 것은 맞지만 서력 기원 1636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아니다. 청 태종이 영 시원찮게 구는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만주족 팔기군 가운데 7기를 동원하고 몽골군에다 관할 하의 한족까지 박박 긁어모은 12만 대군을 심양에 집결 완료한 것은 병자년 1636년 12월 1일(음력)이었고, 그 선봉 부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은 것은 병자년 12월 8일이었으며 의주 부윤 임경업이 적병의 도하와 진격을 목격하고 장계에 적은 날짜, 즉 공식적으로 병자호란 발발이 명시된 날짜는 12월 9일이었는데 이 날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 된다. 즉 병자호란은 1637년에 발발한 것이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을 두려워한 청나라 군이 임경업이 좌정한 백마산성을 피해 남하했다는 것은 서인(西人) 들이 만들어낸 신화다. 기실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선봉 부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서울을 잇는 선을 최고 속도로 내달려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고, 주력부대가 중요한 성을 공격한 뒤 몽골 병력으로 점령 지역을 통제하도록 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각처의 조선군들은 산성에 들어앉아 몰려들 적을 기다렸지만 청나라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의 심장부였고 그를 위해 20세기에 독일군이 보여준 이상의 ‘전격전’ 실력을 과시한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영화 ‘활’에서 혼례식 도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에 의해 개성이 유린되는 장면을 보고 아무렴 저렇게 무방비로 당했겠느냐고 불만을 표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건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임경업이 청나라 군의 압록강 도하를 보고한 날짜가 양력 1월 4일이었는데 청나라 기병대는 1월 9일에 개성을 통과한다. 도로 사정이 좋지도 않고 산도 많고 강도 많은 조선의 서북면을 단 닷새 만에 주파한 것이다. 압록강변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혀를 차던 사람들의 혀가 멎기도 전에 변발한 무사들이 불쑥 칼을 들이민 형국.
임금부터가 부랴부랴 강화도로 가려고 도성을 나서서 서쪽으로 가다가 황망한 소식을 듣는다. “적들이 양천 (불광동쪽이라는 말도 있다)에 들어왔습니다.” 도깨비도 이런 도깨비가 없었다. 청나라군은 압록강 이남의 나라 왕이 툭하면 들어가 숨는 강화도라는 섬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차단하는 한편, 차단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강화도를 공격할 작전까지 수립해 두고 있었다. 바야흐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의 사태는 익히 아는 바니 대충 넘어가자. 조선 임금은 남한산성이라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티다가 끝내 출성하여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최악의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1637년 1월 4일 일어난 전쟁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그 전쟁은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었으며, 그 전말을 예상하기도 했던 전쟁이었다는 데에 있다. 인조가 쫓아낸 광해군은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보병 위주였던 왜군과 달리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기병으로 한양으로 들이닥친다면 어찌할 것이냐.” 애초에 국호를 ‘후금’으로 한 데에서 보듯 과거의 금나라처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꿍심에 여념이 없던 청나라로서는 조선과 각을 세워 ‘두 개의 전선’을 굳이 형성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은 조선이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묘사되었듯 성벽에 올라서는 죽을둥살둥 싸우는 병사들을 굽어보며 이래라 저래라 입이나 놀렸던 썩은 선비들, ‘척화’를 논하고 대의명분을 부르짖고 후금의 왕이 황제가 된다는 소식에 중국 사람들보다 더 펄펄 뛰었던 관리들은 자신들을 덮칠 눈더미를 쌓아가고 있었다.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며 글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의로 결단해 그들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노라. 충성된 선비와 용기있는 이들은 종군을 자원하여......” (인조의 교서)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 같았던 왕이 내세운 대의와 정의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는’ 미련함을 자랑으로 삼은 나라가 전쟁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637년 1월 4일 마침내 얼어붙은 압록강에는 그 아둔함의 뒤통수를 치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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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4일 병자호란 발발
어느 분이 ‘산하의 오역’에서 왜 근대 이전의 우리 역사는 거의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이유가 있다. 트위터에서 짤막하게 오늘의 역사를 올려 두던 즈음, 충무공 이순신을 두 번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신의 힘을 빌려 충무공의 전사일을 찾아 소개를 했는데 누군가가 이런 토를 다는 게 아닌가. “충무공이 예숩니까 한 달 전에 죽었다고 얘기해 놓고 ...또 죽어요?” 아뿔싸. 앞서 소개한 날짜는 음력이었고, 무심코 적은 오늘은 양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충무공을 두 번 죽인 뒤 ‘오늘의 역사’는 무조건 양력을 기준으로 삼게 됐고 그러다보니 근대 이전의 사연들은 자
연스레 논외가 됐다.
그런데 오늘은 좀 옛날 얘기를 해 보자. 국사 시간에 공부 좀 한 사람이라면 임진왜란 일오구이(1592)나 병자호란 일육삼육(1636)의 숫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병자년에 터진 것은 맞지만 서력 기원 1636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아니다. 청 태종이 영 시원찮게 구는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만주족 팔기군 가운데 7기를 동원하고 몽골군에다 관할 하의 한족까지 박박 긁어모은 12만 대군을 심양에 집결 완료한 것은 병자년 1636년 12월 1일(음력)이었고, 그 선봉 부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은 것은 병자년 12월 8일이었으며 의주 부윤 임경업이 적병의 도하와 진격을 목격하고 장계에 적은 날짜, 즉 공식적으로 병자호란 발발이 명시된 날짜는 12월 9일이었는데 이 날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 된다. 즉 병자호란은 1637년에 발발한 것이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을 두려워한 청나라 군이 임경업이 좌정한 백마산성을 피해 남하했다는 것은 서인(西人) 들이 만들어낸 신화다. 기실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선봉 부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서울을 잇는 선을 최고 속도로 내달려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고, 주력부대가 중요한 성을 공격한 뒤 몽골 병력으로 점령 지역을 통제하도록 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각처의 조선군들은 산성에 들어앉아 몰려들 적을 기다렸지만 청나라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의 심장부였고 그를 위해 20세기에 독일군이 보여준 이상의 ‘전격전’ 실력을 과시한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영화 ‘활’에서 혼례식 도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에 의해 개성이 유린되는 장면을 보고 아무렴 저렇게 무방비로 당했겠느냐고 불만을 표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건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임경업이 청나라 군의 압록강 도하를 보고한 날짜가 양력 1월 4일이었는데 청나라 기병대는 1월 9일에 개성을 통과한다. 도로 사정이 좋지도 않고 산도 많고 강도 많은 조선의 서북면을 단 닷새 만에 주파한 것이다. 압록강변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혀를 차던 사람들의 혀가 멎기도 전에 변발한 무사들이 불쑥 칼을 들이민 형국.
임금부터가 부랴부랴 강화도로 가려고 도성을 나서서 서쪽으로 가다가 황망한 소식을 듣는다. “적들이 양천 (불광동쪽이라는 말도 있다)에 들어왔습니다.” 도깨비도 이런 도깨비가 없었다. 청나라군은 압록강 이남의 나라 왕이 툭하면 들어가 숨는 강화도라는 섬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차단하는 한편, 차단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강화도를 공격할 작전까지 수립해 두고 있었다. 바야흐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의 사태는 익히 아는 바니 대충 넘어가자. 조선 임금은 남한산성이라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티다가 끝내 출성하여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최악의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1637년 1월 4일 일어난 전쟁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그 전쟁은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었으며, 그 전말을 예상하기도 했던 전쟁이었다는 데에 있다. 인조가 쫓아낸 광해군은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보병 위주였던 왜군과 달리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기병으로 한양으로 들이닥친다면 어찌할 것이냐.” 애초에 국호를 ‘후금’으로 한 데에서 보듯 과거의 금나라처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꿍심에 여념이 없던 청나라로서는 조선과 각을 세워 ‘두 개의 전선’을 굳이 형성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은 조선이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묘사되었듯 성벽에 올라서는 죽을둥살둥 싸우는 병사들을 굽어보며 이래라 저래라 입이나 놀렸던 썩은 선비들, ‘척화’를 논하고 대의명분을 부르짖고 후금의 왕이 황제가 된다는 소식에 중국 사람들보다 더 펄펄 뛰었던 관리들은 자신들을 덮칠 눈더미를 쌓아가고 있었다.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며 글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의로 결단해 그들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노라. 충성된 선비와 용기있는 이들은 종군을 자원하여......” (인조의 교서)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 같았던 왕이 내세운 대의와 정의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는’ 미련함을 자랑으로 삼은 나라가 전쟁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637년 1월 4일 마침내 얼어붙은 압록강에는 그 아둔함의 뒤통수를 치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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