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
2007년 대통령 선가가 있던 해의 크리스마스. 나는 컴퓨터 모니터 한 귀퉁이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읽었다. 최요삼의 WBO 세계 타이틀매치. 그때 받은 느낌은 딱 하나였다. “얘 아직 권투하나?” 내가 그 이름을 익혔던 것은 20세기가 마감되기 전이었다. 그가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던 것은 1999년이었으니까. 그 해에 그는 태국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최요삼은 상대의 어퍼컷 한 방에 턱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끝끝내 버틴 끝에 판정으로 이겼다.
최요삼은 환호했다. 아픔 따위는 문제도 안되었다. 부서진 턱뼈를 치료하러 가는 길에 차 창문을 열고 “내가 챔피언이다!”를 내내 외치고 있었다니 그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타이틀을 바로 빼앗겨서가 아니었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세계 챔피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경기는 단 4번이었다. 근 1년에 한 번씩 링에 오른 셈이었다. 이유는 경기의 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능도 실력도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는 장정구나 유명우를 능가하는 챔프가 되어 전설 속의 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싱의 인기가 한물을 넘어 두물이 간 시점, 거기다가 IMF의 좌절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을 무렵의 세계 챔피언은 별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방어전 한 번 치르노라면 챔피언 스스로 나서서 돈을 끌어들여야 할 지경이었다. 급기야 툭하면 방어전을 미루는 챔피언을 보다못한 WBC는 랭킹 1위를 ‘잠정 챔피언’으로 결정하고 ‘현재 챔피언’과의 ‘타이틀 결정전’을 명령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나라를 들끓게 했던 즈음, 그는 소리소문없이 타이틀을 잃는다. 나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끝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어떻게든 권투를 계속하려고 들었다. 허세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아버지도 서울에 집이 몇 채 있는 분이었고, 나도 챔피언 하면서 70평 아파트에서 몇 년 살았다. 아쉬워서 권투하는 건 아니다. ” 즉 권투 아니면 할 것이 없는 헝그리 복서도 아니었다. 그즈음 그를 취재했던 동료 PD의 말은 이렇다. “권투에 미친 사람이었지. 스폰서가 없으니까 여자권투 시합의 오픈 게임을 자청해서 뛰기도 했어. 그래도 전 세계 챔피언이었는데 말이야.”그렇게 바둥바둥거리면서 다시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여지없이 패퇴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뒤 나는 완전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12월 다시 그의 타이틀 매치 기사를 본 것이다. 어느 새 그는 WBO라는 듣도보도 못했던 권투 기구의 챔피언이었다. 그는 74년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이는 72년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당시 서른 여섯. 권투 선수로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다. 그리고 번듯한 기업의 직원으로서 월급도 기백만원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기장에 “매맞는 것이 두렵다.”고 “상대가 두렵다.” “밀리면 죽는다.” 라고 공포감을 토로하면서도 링 위에 악으로 깡으로 오르고 있었다. “권투가 좋아서”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역시 그를 취재했던 작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사명감이 대단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권투를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보겠다는 식이었달까. 내가 잘하는 건 권투밖에 없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멋지게 싸워야 한다. 그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뭐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이런 말도 했죠. 권투밖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도울 거다.”
2007년의 크리스마스날. 그는 젊은 도전자에게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파이팅을 보였다. 이미 판정으로는 이긴 경기였다고 한다. (나는 그 마지막 경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요삼은 마치 이런 게 권투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주먹을 휘둘렀고 그 와중에 강력한 카운터 한 방을 허용하고 다운된다. 벌떡 일어나서 경기는 속행됐고 그 다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겼다. 그러나 승리가 선언된 직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혹자는 이미 그가 다운된 순간 그의 뇌는 멎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파이트!’를 부르짖은 그의 머리 속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나는 그 정체를 ‘사명감’으로 본다. 그는 권투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가치를 좋아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지키고, 그 가치가 시의를 잃고 외면받는 것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을 도와 준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고, 그 가치에 동참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외롭게 그 가치를 수호하며, 그를 위해 투혼을 발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그 가치를 버려도 충분히 살 수 있음에도, 좋아해서,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얼마나 될까.
최요삼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나라와 민족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의 삶은 더 가치롭다. 크리스마스날 쓰러진 최요삼은 8일 후 뇌사 판정을 받았고, “아버지와 같은 날 제삿밥이라도 얻어먹게 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2008년 1월 3일 0시 1분 산소호흡기를 뗐다. 그리고 그의 장기는 6명의 불치병 환자들에게 나누어졌다.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이 죽었다.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
2007년 대통령 선가가 있던 해의 크리스마스. 나는 컴퓨터 모니터 한 귀퉁이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읽었다. 최요삼의 WBO 세계 타이틀매치. 그때 받은 느낌은 딱 하나였다. “얘 아직 권투하나?” 내가 그 이름을 익혔던 것은 20세기가 마감되기 전이었다. 그가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던 것은 1999년이었으니까. 그 해에 그는 태국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최요삼은 상대의 어퍼컷 한 방에 턱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끝끝내 버틴 끝에 판정으로 이겼다.
최요삼은 환호했다. 아픔 따위는 문제도 안되었다. 부서진 턱뼈를 치료하러 가는 길에 차 창문을 열고 “내가 챔피언이다!”를 내내 외치고 있었다니 그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타이틀을 바로 빼앗겨서가 아니었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세계 챔피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경기는 단 4번이었다. 근 1년에 한 번씩 링에 오른 셈이었다. 이유는 경기의 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능도 실력도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는 장정구나 유명우를 능가하는 챔프가 되어 전설 속의 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싱의 인기가 한물을 넘어 두물이 간 시점, 거기다가 IMF의 좌절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을 무렵의 세계 챔피언은 별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방어전 한 번 치르노라면 챔피언 스스로 나서서 돈을 끌어들여야 할 지경이었다. 급기야 툭하면 방어전을 미루는 챔피언을 보다못한 WBC는 랭킹 1위를 ‘잠정 챔피언’으로 결정하고 ‘현재 챔피언’과의 ‘타이틀 결정전’을 명령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나라를 들끓게 했던 즈음, 그는 소리소문없이 타이틀을 잃는다. 나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끝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어떻게든 권투를 계속하려고 들었다. 허세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아버지도 서울에 집이 몇 채 있는 분이었고, 나도 챔피언 하면서 70평 아파트에서 몇 년 살았다. 아쉬워서 권투하는 건 아니다. ” 즉 권투 아니면 할 것이 없는 헝그리 복서도 아니었다. 그즈음 그를 취재했던 동료 PD의 말은 이렇다. “권투에 미친 사람이었지. 스폰서가 없으니까 여자권투 시합의 오픈 게임을 자청해서 뛰기도 했어. 그래도 전 세계 챔피언이었는데 말이야.”그렇게 바둥바둥거리면서 다시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여지없이 패퇴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뒤 나는 완전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12월 다시 그의 타이틀 매치 기사를 본 것이다. 어느 새 그는 WBO라는 듣도보도 못했던 권투 기구의 챔피언이었다. 그는 74년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이는 72년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당시 서른 여섯. 권투 선수로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다. 그리고 번듯한 기업의 직원으로서 월급도 기백만원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기장에 “매맞는 것이 두렵다.”고 “상대가 두렵다.” “밀리면 죽는다.” 라고 공포감을 토로하면서도 링 위에 악으로 깡으로 오르고 있었다. “권투가 좋아서”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역시 그를 취재했던 작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사명감이 대단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권투를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보겠다는 식이었달까. 내가 잘하는 건 권투밖에 없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멋지게 싸워야 한다. 그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뭐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이런 말도 했죠. 권투밖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도울 거다.”
2007년의 크리스마스날. 그는 젊은 도전자에게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파이팅을 보였다. 이미 판정으로는 이긴 경기였다고 한다. (나는 그 마지막 경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요삼은 마치 이런 게 권투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주먹을 휘둘렀고 그 와중에 강력한 카운터 한 방을 허용하고 다운된다. 벌떡 일어나서 경기는 속행됐고 그 다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겼다. 그러나 승리가 선언된 직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혹자는 이미 그가 다운된 순간 그의 뇌는 멎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파이트!’를 부르짖은 그의 머리 속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나는 그 정체를 ‘사명감’으로 본다. 그는 권투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가치를 좋아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지키고, 그 가치가 시의를 잃고 외면받는 것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을 도와 준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고, 그 가치에 동참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외롭게 그 가치를 수호하며, 그를 위해 투혼을 발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그 가치를 버려도 충분히 살 수 있음에도, 좋아해서,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얼마나 될까.
최요삼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나라와 민족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의 삶은 더 가치롭다. 크리스마스날 쓰러진 최요삼은 8일 후 뇌사 판정을 받았고, “아버지와 같은 날 제삿밥이라도 얻어먹게 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2008년 1월 3일 0시 1분 산소호흡기를 뗐다. 그리고 그의 장기는 6명의 불치병 환자들에게 나누어졌다.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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