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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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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24 크리스마스 이브의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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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80. 12. 24 타잔 교수대에 서다


사형 집행이 사실상 ‘무기 연기’된 요즘은 덜 할지도 모르지만, 12월은 사형수들에게 공포의 달이었다.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 또는 다음 정권에게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법무부 장관이 사형 집행에 서명이 무더기로 이뤄지는 일이 잦았던 탓이다. 대한민국에서 마지막 사형 집행은 97년 12월 30일에 있었다. 이 날 23명이 한꺼번에 목이 매달렸다. 1980년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사형수 가운데에는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도 있었다. 그 이름은 박흥숙이었다.


 광주 무등산 바람재에서 토끼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너덜겅 약수터. 그 근처에 광주 월드컵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있는데 그 발 아래 계곡에 해당하는 동구 운림동 산 145번지 증심사 계곡 덕산골(속칭 무당골)에 그는 살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타잔’이었다. 이소룡같은 무술 배우를 꿈꾸며 하루에도 몇 번씩 웃통 벗고 무등산을 종횡무진하다 보니 붙은 멸명이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법고시 합격의 포부도 가지고 독학에 정진하기도 했던 청년이었다. 이런 무등산 타잔에게 비운의 날이 닥친 것은 1977년 4월 20일이었다.


 무당골에 산재해 있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광주시 철거반원들이 나타난 날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의 아버지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집을 부수는 일이었다. 무당골의 철거는 상당히 진행되어 당시 현장에는 박흥숙의 집을 포함하여 4채만 남아 있었다. 봐줄만큼 봐줬다고 생각했던지, 전국체전을 앞둔 상부의 압박이 거센 탓이었던지 철거반원들은 필요 이상의 과잉 행동을 보인다. 몇 안되는 세간을 끄집어낸 뒤 ‘철거’가 아니라 ‘방화’를 해 버린 것이다. 즉 집에 불을 질렀다. 박흥숙이 “지붕위에 두른 천막만이라도 걷게 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오불관언이었다.

 판자에 천쪼가리만 둘렀던 박흥숙의 집은 성능 좋은 불쏘시개였고, 반쯤 정신이 나간 가족들의 비명 속에 활활 타올랐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집 안에 모아둔 돈 30만원이라도 건지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철거반원들에 의해 제지됐다. 박흥숙과 그 여동생 박정자와 남동생 둘, 그리고 어머니가 살던 판자집은 이내 ‘철거 완료’됐다. 이윽고 다른 집을 철거하고 돌아선 철거반장의 눈 앞에 시퍼런 인광을 발하는 박흥숙이 나타났다. 그 손에는 철공소에서 일하던 시절 만들었다는 사제총이 들려 있었다.

나이 서른 아홉부터 스물 일곱까지의 철거반원들은 그들의 임무 때문에 “철거를 위해 불을 지르는” 냉혈한이 되었다가 이제는 청년의 돌아가 버린 눈동자 앞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포로가 됐다. 그들은 노끈으로 몸이 묶여 박흥숙이 사법고시 공부방을 만들기 위해 파 놓았던 구덩이로 밀어 넣어졌다. “광주 시장에게 전화하겠다.”고 여동생이 산을 내려간 얼마 뒤 마침내 타잔은 분노의 광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포로가 됐던 5명 중 4명이 박흥숙이 휘두른 쇠망치에 목숨을 잃었다.

사건 이후 자수한 박흥숙은 사형 선고를 받는다. 공무 집행 중인 공무원을 고의적으로, 그것도 4명씩이나 죽여 버린 살인범들에게 관용을 베풀 여유는 유신정부에 없었고, 기실 그 뒤의 어떤 정부도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박흥숙의 사형만은 면해 달라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훗날 미 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역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조선대생 김현장이 그였다. 김현장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불태워지고 어머니마저 철거반원에 밀려 실신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에 대해 사회의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입어 박흥숙 구명운동이 일어났지만 법의 이름으로 걸린 빗장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의 피보라가 몰아친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교수대 앞에 선다. 그의 최후 진술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오갈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렀습니다. 돈이나 천장에 꽂아 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도 깡그리 타 버렸습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사법고시 합격과 무술배우 이소룡을 꿈꾸며 기운차게 무등산을 뛰어다녔던 효성 지극하고 똑똑했던 한 청년을 죄인으로 만든,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무원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삶의 터전에 불을 놓게까지 만들었던 이유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4명의 머리가 쇠망치로 뭉개지고 한 명의 목숨이 교수대에 매달렸는데, 과연 그 책임은 그들만의 것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박흥숙 외에 그 사건에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으며 비슷한 일은 이후로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었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다. 그 대부분은 대개 너무 평범해서 문제였던 사람들이었다.

1980년 뒤의 예수의 생일 이브에 죽어간 박흥숙을 만나면서 예수는 무슨 말을 했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을 탓하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아가던 한 청년과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던 공무원들의 생명의 박탈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이면서도 혀를 차고, 가슴을 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를 부르짖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장 23절,24절) 그리고 이렇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러하리라 믿으며, 무등산 타잔과 불운했던 공무원들을 감싸 안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사지로 내몬 자들을 저주하는 예수였으리라 믿으며 그의 생일을 축하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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