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1887.4.30 정동교회 서다

$
0
0

산하의 오역

 

1887년 4월 30일 정동교회 서다

 

노래 <광화문 연가>의 배경은 겨울이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변해 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하지만 이 노래는 딱히 계절을 타지 않는다. 새싹 돋는 봄이든 찌는 여름이든 낙엽 지는 가을이든 이 노래 가락이 들리면 서울에서 웬만큼 산 사람들이라면 마음 속으로나마 정동길의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정동(貞洞)이라는 동네의 이름의 시작 역시 매우 로맨틱하다. 조선 왕조를 창건하고 한양이라는 도시로 새 도읍을 삼았던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보다는 후에 맞아들였던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 신덕왕후 강씨에 더 마음을 주었던 모양이다. 이 후처 강씨가 죽자 이성계는 완고한 고집쟁이 모드로 돌입한다. “무조건 도성 안에 묻어라.”

 

도성 안에서는 능을 조성하는 법이 아니라고 신료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성계는 과거 왜구들을 물리치던 기세로 자신의 결정을 반영시킨다. 그리고 근처에 절을 세워 그 절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잠을 잤고 왕후의 명복을 비는 독경 소리를 듣고서야 밥을 먹었다고 하니 천하의 용장 이성계도 해바라기성 순정남의 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 신덕왕후의 무덤이 정릉(貞陵)이었고 정릉 일대는 ‘정동’의 이름을 얻게 된다. 이성계는 정릉을 어루만지며 나도 죽으면 당신과 함께 묻히리라 중얼거리며 이렇게 노래했을 지도 모른다.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도다 눈 덮인 조그만 절간이.”

 

로맨틱한 추억에는 서글픈 기억이 따라붙게 마련, 계모를 철저하게 미워했던 태종 이방원은 이 무덤을 파헤쳐 동대문 밖으로 내쳐 버린다. 그 능에 쓰인 석재는 청계천 다리 축조에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지독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덕분에 서울에는 또 하나의 ‘정동’이 생겼다. 성북구 정릉동(貞陵洞)이 그곳이다.

 

개항 이후 ‘hermit kingdom' (은자-隱者의 왕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조선의 수도에도 서양의 외교관들이 등장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과 수교하면서 그들에게 공관의 부지를 제공해야 했는데 그것이 경운궁과 정동 일대였다. 서울 도성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마포와 양화진 가도의 진입로 격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도 있었고 그 일대가 번잡하지 않고 빈터가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건 이로써 정동은 구한말 서울에서 가장 ‘개화된’ 거리가 됐다.

 

얼마 전 드라마 <제중원>에 ‘톰 소여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 등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이 별안간 등장하여 항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마크 트웨인은 러일전쟁 때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기반으로 하지만 역사적 팩트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강철군화>의 잭 런던 등 여러 서방 언론인들이 한국에 왔던 건 사실이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 병원이라 할 제중원 역시 서양 선교사들이 많은 정동에 좌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쑥한 정장의 서양 인사들이 커피잔을 들고서 외교가에서 즐겨 쓰이던 프랑스 어로 대화를 나누고, 고만고만한 기와집 추녀 끝에 번듯한 양옥들이 들어선 사이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가 팔짱 끼고 걸어다녔던 정동은 일종의 이방지대와도 같았다.

 

정동은 주지하다시피 외국인들의 공간이었고 동시에 신학문과 개화 바람의 진원지였다. 1885년 최초의 신식학교라 할 배재학당이 정동에 세워졌고 이 나라 여성 교육의 시초라 할 이화학당도 정동에 터를 잡았다. 훗날 경신중고등학교로 발전하는 언더우드 학당도 정동에서 지붕을 올렸고 (이후 연지동으로 이전) 오늘날은 잠실로 이사간 정신여고의 전신인 정신여학교의 출발지도 정동이었다. 그리고 1887년 4월 30일 “정동길 언덕길에”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들어선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인용한 것이다. 기타 다른 날짜를 드는 주장도 많고 그 이전에도 예배를 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여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자료를 따른다)

 

시절이 아무리 하수상해도 젊음은 젊음이다. 젊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통제와 인습도 앞장서 무너뜨리는 존재이며, 또 젊은이들이 모인 거리에서 사랑이 피어나지 않는 법은 없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철석같이 지켜지고 기독교 예배당에서조차 휘장을 두르고 남녀를 구분했으며 때가 되면 부모가 정해 주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던 암울한 시대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배재학당을 세웠던 아펜젤러 목사가 1883년 신도인 강신성과 과부 박신실의 결혼의 주례를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신식 결혼으로 보인다. (강준만 저, 한국 근대사 2권 “을미사변에서 아관파천까지”) 또 1892년에는 이화학당 여학생 ‘황씨’와 배재학당 남학생의 결혼식도 열렸다.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신랑은 ‘프록코트’도 입은 서양식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정동길을 오가던 젊음들을 환호하게 했던 극적인 순간은 역시 1899년 7월 14일 예의 정동교회에서 열린 배재학당 학생과 이화학당 여학생 두 쌍의 합동 결혼식일 것이다.

 

신랑은 이후 미주이민선교를 개척하였던 민찬호, 문경호 두 젊은이들이었는데 그들의 뜻에 함께 하기로 한 이화학당 여학생들을 신부로 맞은 것이다. “이 혼인에 대하여 희한한 것은 대한 풍속에 아들을 쌍둥이로 길렀으면 혹 한날 한시에 혼인함이 있거니와 타성(姓)의 년기(年紀)도 같지 아닌 사람들이 어찌 한 자리에서 한 때에 혼례를 행할 수 있으리오. 대한 개국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오.....대한 풍속에 매파(媒婆)가 있어 남자와 여아가 당초에 그 심지와 덕행과 제도를 서로 알지 못하고 백년 행할 큰일을 경홀이 작정하거늘......대한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모두 교중 사람끼리 혼인을 하였으면 대한에도 어리석은 풍속이 차차 고칠 줄 아노라. (<조선 그리스도인회보Ⅱ p.161 (대한그리스도인회보 제 3권 제 29호 1899. 7. 19일자.)

 

이후 ‘연애 결혼’은 정동길 곳곳에서 꽃 피었고, 대한의 청춘남녀들은 경운궁 돌담길을 거닐며 사랑의 달콤함과 실연의 아픔, 이별의 쓰라림과 만남의 기쁨을 함께 만끽하기 시작한다. 아마 처음으로 교회에서 신식 결혼을 올린 강신성도, 최초로 프록코트 입고 면사포 쓴 신부 맞은 이름 모를 배재학당 학생도, 그리고 민찬호와 문경호 모두 세월이 간 뒤 다시 찾은 정동길, 아직도 남아 있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에서 영글었던 그들의 사랑을 추억하며 빛나게 웃었으리라.

 

 

나는 이 노래를 쓰라린 추억으로 부른다.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교회당이 한 세기도 넘어 전에 생겼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