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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4.28 비운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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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0년 4월 28일 비운의 결혼식

 

명나라 수도 베이징이 외적도 아니고 국내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에 의해 함락될 즈음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황후를 자결케 한 후 딸을 찾는다. 나이 열 다섯 살이었던 공주는 아버지의 소매를 붙들고 울기만 했다. 이를 바라보던 숭정제 이를 악물고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어찌해서 황실에 태어났더냐.” 그리고 왼 소매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리친다. 이 공주는 죽지는 않았지만 한쪽 팔이 잘린다. 차마 다시 내리칠 수는 없었던지 숭정제는 자리를 떠났고 여섯 살 난 다른 공주는 그 칼에 죽는다.

 

“어찌하여 황실에 태어났느냐?”는 숭정제의 절규에서 보듯, ‘망한 나라의 황족’만큼 애매하고 기구한 신분도 없을 것이다. 그 이치는 대한제국에서도 생생하게 적용된다. 일단 황제 자신의 호칭이 상황제에서 태왕으로 격하됐다. ‘덕수궁 이태왕’ 뒤를 이은 순종은 ‘창덕궁 이왕’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아들, 즉 ‘친왕’(親王)과 공주들의 여생에도 숱한 파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곱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로 지명된 사람이었다. 후사가 없는 순종의 후계자가 된 것인데 스무 살 연상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그가 황태자가 된 것은 머리가 큰 의친왕보다는 꼬마 영친왕이 다루기 쉽다고 본 일본측의 야욕과 그 이복형들을 경계한 이완용의 책략과 더불어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의 작용도 컸다고 전해진다.

 

망해 가는 나라의 황태자라는 이 모순된 팔자의 험준한 고갯길은 황태자가 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그는 황태자는 일본에서 교육받아야 하나는 억지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끌려간다. 이때 고종 황제가 자신의 아들에게 참을 인(忍)자를 써 주며 격려했다고 하는데 글쎄 열 한 살 짜리가 뭘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알 수나 있었을는지. 결국 영친왕은 인질이었다. 일본식으로 교육받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그는 마음대로 귀국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일본에서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자랑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친모였던 엄비가 “아들을 보고 싶은 정은 상민이나 왕이나 다를 바가 없거늘 약속을 저버린 그런 말이 어느 입에서 나올 수 있는가. 몰인정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 고 격노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엄비는 살아생전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

 

어머니 임종도 못한 영친왕은 또 한 번 황망한 일을 겪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약혼자가 정해지고 발표된 것이다. 영친왕도 어이가 없었겠지만 그 상대 또한 기가 막혔을 것이다. 상대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의 딸이며 히로히토 황태자의 배필 물망에까지 올랐던 마사코였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쯤 한국에서 온다는 황족을 마중하기 위해 온 가족과 함께 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억조차 없는 당시의 이웃나라 황족이 자신의 배필이 될 줄이야.

“.....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하다니! 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이방자 여사 자서전 <세월이여 왕조여> 중 ) 벼락을 맞은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영친왕이 한국을 떠나기 전 약혼했던 처자 민갑완이었다. 졸지에 파혼당한 아버지는 홧병으로 죽고 그녀는 수십 번의 혼담을 물리친 채 평생을 혼자 살게 된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은 일본의 황족 마사코와 결혼한다. 원래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식 나흘 전 고종이 세상을 떠나 버려 1년이 미뤄진 것이다. 약혼 기간 동안 만남을 가지며 정을 쌓기도 했고 마사코는 “털끝만치도 격을 느끼는 마음이 일지 않으며 뵙고 나서는 그리운 마음이 들 뿐”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과연 그랬을지는 잘 모르겠다. 싫다고 물릴 수 있는 결혼도 아니었고 둘의 처지도 그럴 처지가 아니었지 않은가. 환영하는 사람들도 적었다. 일본이야 그렇다고 치고 조선인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아버지 삼년상도 끝내기 전에 장가를 그것도 일본 여자한테 들다니!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던 이은은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이므로” (독립신문. 1920.5.8) 마사코의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식 당일에도 조선 청년의 수류탄 공격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첫아들 이진도 조선 방문 길에 생후 8개월만에 죽는데 그 죽음을 둘러싸고도 말이 많았다. 초콜렛 색 덩어리들을 연신 토해 냈다는 의사의 증언을 근거로 독살설이 파다했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이들은 일본인의 피가 섞인 황손이 못마땅하여 조선측에서 독살을 감행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식 사인은 소화불량으로 기록돼 있다. ( 물론 그게 가능성은 제일 높다고 본다 ) 영친왕은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한 나라의 군대 장성까지 진급한다. 영친왕의 최종 계급은 중장. 조선인이 달았던 최고의 계급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립운동 진영에서 그의 망명과 독립운동 가입을 권하기도 했다는데 영친왕의 대답은 미지근했다. “내가 만일 망명이라도 하면 조선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소. 너희 왕도 도망갔으니 너희들도 잘 대우해줄 필요가 없다고 조선인들을 개돼지 같이 부릴 것이오……” 글쎄 이미 개돼지처럼 부리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해방이 왔다. 영친왕 가족은 다른 일본의 귀족 가문들과 함께 일체의 특권과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방자 역시 ‘망한 나라 황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수십만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이 됐다. 영친왕은 귀국을 열망했지만 단호한 장애물이 있었다. 그건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를 자처하던 이승만의 존재였다. 자신을 흡사 왕으로 여기던 이승만 대통령은 왕년의 황태자의 귀국에 딴지를 걸었고 여권조차 내 주지 않는다. 이승만이 쫓겨날 때까지 영친왕은 일본에서 그 팍팍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야 식물인간이 된 영친왕은 이제는 한국 사람 ‘이방자’가 된 부인과 돌아오지만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한다. 박정희 정권은 구 황실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이방자 여사에게 맡기려고 했고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가 설립한 숙명 학원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숙명여대 기존 재단측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숙대재단 운영진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이들은 즉각 들고 일어났고 언론 및 학생들과 연계해 이방자 여사를 몰아붙였다. ‘쪽바리 여자 나가라!’, ‘왜놈 돌아가라!’, ‘게다짝 물러가라!’와 같은 표어들이 주요언론 및 숙대 교정 곳곳에 등장했다.” (한대신문 2010.5.1자) 결국 이방자 여사는 재단 참여를 포기하게 된다.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한국사회가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불행한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후회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방자 여사는 지금도 과히 사각지대에서 벗어났다고 하기는 어려운 장애인 돕기를 실천하며 여생을 보냈다. 명색 황제의 딸이었지만 쓰시마 도주 가문의 청년과 결혼해야 했던 덕혜옹주가 실성해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거둔 것도 이방자 여사였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의 남편 소오 다케유키가 만남을 청하자 “덕혜옹주가 받았던 정신적 학대의 기억 때문에 병세가 악화될까 두렵다.”고 단호히 거절했고 급기야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왔을 때 매몰차게 문전박대한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의 병간호를 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아마 이것은 이방자 여사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1920년 4월 28일 결혼의 날은 이방자 여사에게 어떻게 기억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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