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7년 4월 27일
몇 년 후 전 유럽을 지옥불같은 전쟁의 ㅋ도가니로 쓸어넣는 나찌 독일 공군이 스페인의 공화파 마을 게르니카를 쑥밭으로 만든 날이 1937년 4월 26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한 천재적 이탈리아인이 그 고된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그람시.
이 사람이 한국 사회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2004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소지섭이 옥탑방에 사는 하지원을 방문한다. 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내민 하지원에게 소지섭은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를 건넨다. 그리고 던지는 한 마디 “ 그람시 알아요? 계급은 중세 시대에만 있던 게 아니에요. 그놈들의 헤게모니가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행복하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니까 헛된 신분 상승의 꿈을 꾸고 있는 하지원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원도 책을 읽었는지 조인성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의 헤게모니가 우릴 바보로 만들어." 이 꽃남꽃녀들의 대사 몇 마디로 그람시는 졸지에 검색 순위 수위권을 차지하고 출간된지 엄청 된 그람시의 책들이 별안간 대형서점 서가에 눕혀지는 호사를 맛보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는 긴말하지 않겠다. 아 물론 정확하게 표현하면 긴말할 게 없다. 대학 때 세미나라면 도망만 다닌 주제에, 요즘의 한국 법무부 장관과 비슷한 꼴통 이탈리아 검사가 “이 자의 두뇌 활동을 20년간 멈추어야 한다.”고 피를 토했던 그람시의 저 유능한 두뇌와 방대한 저작을 어찌 운위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이탈리아의 남부 사르디니아 출신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 시칠리아, 그 다음이 사르데냐다. 둘 다 이탈리아 땅이지만 이탈리아의 ‘남부’에 들어간다. 이탈리아에서 남부란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한국으로 치면 조선 시대 평안도와 대한민국의 전라도를 합친 정도일 것이다. 지금도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의 준 분단 국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실제 북부의 분리독립 움직임까지 있다고 하거니와 북부인들이 남부인들에게 가지는 인상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도둑놈 투성이라는 인식이 크다고 하며 하물며 100년 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남부의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어릴 적 하녀의 실수로 그만 척추에 부상을 입고 평생 곱사등이로 살아야 했고 키는 150센티미터를 넘을까 말까 했다. 그의 나이 스무살이 넘도록 어머니는 그의 수의와 관을 준비하고 있었을 정도로 허약한 몸이었으나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가자 열한 살의 나이로 사환을 하며 집안을 도와야 했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야 했다.
후일 자신의 아들에게 준 편지의 내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뭔가 좋은 일을 하나 하고자 한다면 불평을 하거나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깽깽거리며 울지 말고 그 일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어렸을 적 고생이 막심했던 아버지로서의 경험담이자 꼰대 노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곱추에 난쟁이처럼 키가 작았던 그였지만 신은 그에게 누구보다 우수한 머리를 주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 기관지 <오르디네 누오보-새질서>의 명편집장이었다. 그는 원고에 유난히 깐깐한 편집장이었는데 그의 “이 따위는 글도 아니야!” 소리에 피눈물 흘린 기자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물론 편집 회의 끝나면 기자들 또는 기타 청년들과 어울려 소탈하게 즐기는 면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데 그람시는 1921년 소련에 이탈리아 공산당 대표로 파견되면서 행운을 만난다.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늘씬한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시기가 나에게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하거니와 그에게 행운은 하나 더 있었다. 후일 그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그의 옥중수고를 정리해낸 처형, 즉 아내의 언니를 얻은 것이다. 그 이름은 타냐.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그의 입지는 위태로와진다. 한 15살난 소년이 뭇솔리니를 암살하려 했다는 중대한 음모(?)가 발각되고 잇따른 검거 선풍 속에 그는 구속된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오히려 감옥에서 더 발휘된다. "매일 6개의 신문을 읽고 매주 8권의 책을 읽으며 ” 꿈 속의 혁명을 가다듬었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고 교류하며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전한다. 이것이 유명한 그람시의 <옥중수고>로 우리 곁에 남아 있거니와, 그는 ‘헤게모니’ ‘진지전’ ‘기동전’ 등등 공부해야 할 개념들을 여럿 확립해 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교도소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마르코폴로는 13세기에 동방견문록을 썼고 그람시는 20세기에 그 방대한 옥중수고를 썼는데 김남주 시인은 우유곽에 철사로 시를 써야 했으니)
그에게 가장 실질적으로 다가섰던 질문은 “"왜 이탈리아에서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더 지지하는가?" 였다. 이 질문은 이탈리아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극동의 한 반도국을 대입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대중은 가장 광범한 의미에서 스스로 조직하지 않고는 눈에 띄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독립하지도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노동 대중 못지 않게 지식인의 역할 또한 강조했고, 또 "대중봉기를 통해 공산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권력이 장악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여 유토피아가 온 것 같이 여겨지던 러시아 혁명에도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그는 미래를 꿈꾸었으되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은 혁명가였다.
“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대신 우리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평생을 괴롭힌 신체적 결함과 허약한 몸, 열악한 감옥 생활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단절 속에서 그는 자신의 석방운동을 벌인 로맹 롤랑의 경구에서 따온 유명한 관용어구를 남긴다. “지성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그의 편지에서 이런 익살스런 기억을 남기고 있다. “당신이 안토니오 그람시오 라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 시칠리아 사람은 그럴 리가 없어! 라고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어요. 안토니오 그람시는 거인이야! 당신같은 꼬마가 아니야!라고 하더니 인사도 없이 떠나지 뭡니까. ”
나는 그 ‘시칠리아 인’의 눈썰미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대충만 훑어 봐도 그람시는 링컨 정도의 키에 레닌의 포스에 룩셈부르크의 형형한 눈을 다 가진 듯한 초인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엄혹한 이탈리아 파쇼체제와 그 감옥을 ‘의지로 낙관’하면서 버텼고 그 세월을 후대에 <옥중수고>로 남겼다. 그의 위대함은 이런 말에서 뚝뚝 묻어난다.
"불멸성이란, 한 사람이 죽은 뒤 그의 가장 고귀한 행동이 되살아나서, 인간의 의지를 넘어 역사의 보편적 과정에 편입되는 것이다."
그는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