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6년 2월 5일 어느 추락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오늘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시신 투쟁’ ‘시신 시위’라는 단어가 눈을 찌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동료들이 그 시신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비윤리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는 말일 게다. 그 단어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나 역시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의 관이 전선의 일부가 되는 풍경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다. 비록 고인의 열망이 어떠하였고 그 뜻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처음으로 만났던 ‘열사’ 조성만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그래도 숱한 장례식에 참석했고 노래 부르고 누구 누구 살려내라고 부르짖기도 했던 내가 이런데 중앙일보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장례 투쟁’을 조직하고 시신이 전선의 한가운데 놓이게 만든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정권과 기업에 있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목을 매달아 죽여 버린 인혁당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해 불태워 버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시국과 관련한 죽음 앞에서 힘 가진 이들이 즐겨 기도했던 것은 그 시신의 신속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이 집중했야 했던 것은 일단 시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왜 피가 돌고 살이 뜨거웠던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썩어 진물이 나는 시신으로 변했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이었다.
1996년 2월 5일도 그랬다. 아파트 촌이 되어 버리기 이전의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4리 수지2구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일산과 분당으로 봉화를 올린 경기도 신도시 건설붐은 용인 수지 지역에도 밀어닥쳤고 자기 땅은 아니나마 그곳에 터 잡고 살던 이들은 오갈데없는 처지에 놓였고 밀어닥치는 철거반에 맞서 망루를 쌓아 올렸다. 용산참사 때 봤던 그 망루와 비슷한. 2월 5일 동절기 철거는 없다던 약속을 깨고 공권력과 용역 깡패들이 몰려들었다. 경황 중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두들겨 맞을 사람은 두들겨 맞고 몇 명의 마을 주민과 학생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그런데 망루의 1층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쪽의 증언으로는 용역들이 ‘방화’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믿고 싶지 않다. 어쨌든 불은 망루를 휘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사람 살려 하는 공포스런 비명이 망루 위에서 터져나왔지만 깡패들과 전경들은 망루 아래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해머와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들을 휘두르며 불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의 집을 두들겨 부쉈다. 불길은 계속 치솟았고 LP가스통을 건드렸다. 불길은 더욱 힘을 얻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들의 멱살을 잡을 듯 날름거렸고 열기와 유독가스는 몇 평 안 되는 망루의 가엾은 농성자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래도 불을 끄려는 노력은 없었고 철거는 계속됐다. 멀쩡한 사람들이 타 죽을 지경인데도. 그 흔한 매트리스 하나 깔리지 않았고 소방차도 오지 않았다.
지옥의 악마들이 혀를 찰 현실의 지옥불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결심을 한듯 망루 담을 넘어섰다. 그리고 18미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명과 툭 툭 둔탁한 소음. 검은 꽃잎들이 계속해서 땅으로 추락했다. 그 가운데 세 아이의 어머니 신연숙도 있었다. 허리가 나가고 머리가 깨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현장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펼쳐졌다. 무려 20여분 동안 용역 깡패들은 이들을 방치했고 대한민국 공권력은 사람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이웃들을 막아선 것이다. 설마 떨어지랴 싶어 당황을 했던 건지 임무를 완수한 건지 그들은 부리나케 철수해 버렸다. 한참 뒤에야 병원에 옮겨진 사람들 가운데 신연숙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법에도 규정된 가이주단지 이전, 영구임대 주택 제공 등을 외치며 세 아이와 내 남편 발 뻗을 자리는 달라던 한 주부는 1996년 2월 5일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는 높이의 5층 망루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안치된 동수원 병원 영안실에는 또 ‘사수대’가 꾸려졌다. 또 언제 경찰과 깡패들이 들이닥쳐 시신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은 한참 뒤에야 치러졌다. 그 죽음의 책임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평온한 새벽 망루로 쫓겨 올라간 이들에게 불길이 뒤따랐고 결국 불길보다는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을 택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그 아비규환에 버려져 있었다. 고이 묻을 수 있었을까. ‘이성을 찾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죽음을 시신투쟁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과연 그 시신 부여잡고 으아아아악 피를 토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들을 두고 ‘시신을 팔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래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시신을 볼모로 하면 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진중공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관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경우 크레인으로 관을 들어 올릴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미쳤구나” 싶었다. 하지만 생존이 예절에 앞서는 경우는 없다. 고(故) 최강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그 동료들에게는 138억의 손해배상이 걸려 있다. 그 모두의 삼십 대 후손까지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해도 갚지 못할 동그라미들의 쇠사슬. 회사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손해배상을 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피를 말리고 간을 쪼아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러다가 최강서 노동자는 죽었다. 힘들다고 울먹이면서 죽었다. 관을 떠메고 하는 시위에 눈살 찌푸리기 전에 대체 저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하는 게 응당하지 않을까.
경기도 화성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또 이를 이용하여 ‘시신 투쟁’을 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들렸다. 이전과 다른 것은 그 비난이 고인이 일했고 해고됐던 회사의 노동조합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복직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간 옛 동료의 영혼이라도 ‘복직’시켜 주자는 동료들에게 이 노동조합은 ‘명예사원’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제시하더니 급기야 고인의 해고자 동료들에게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노동자로서는 차마 못할 소리까지 토해 놓고는 장례식도 끝나기 전 그 영전에 모인 조의금까지 들고 사라졌다.
지난 12월 19일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주워섬기기조차 버거운 죽음의 홍수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솔직히 죽음의 소식이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두려울만큼 많은 이들이 죽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죽음들은 결코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고 심약한 이들의 자포자기도 아니었으며 ‘열사’가 되려는 영웅심 때문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1996년 2월 5일 망루에 올라갔던 중년의 여인의 심경. 자기 집은 부숴지고 애들은 울부짖고 불길은 올라오고 소방차는 오지 않고 열기는 몸을 죄어 올 때 어른거리는 저 땅바닥, 그냥 뛰어내리라고 손짓하는 그 시커먼 땅바닥이 그 앞에 왔을 뿐이다. 그 땅바닥에 나는 태연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애써 그럴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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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월 5일 어느 추락사,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오늘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시신 투쟁’ ‘시신 시위’라는 단어가 눈을 찌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동료들이 그 시신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고자 하는 비윤리적인 작태를 보이고 있다는 말일 게다. 그 단어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나 역시 이미 세상을 뜬 사람의 관이 전선의 일부가 되는 풍경은 그다지 흡족하지 않다. 비록 고인의 열망이 어떠하였고 그 뜻이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그건 처음으로 만났던 ‘열사’ 조성만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다. 그래도 숱한 장례식에 참석했고 노래 부르고 누구 누구 살려내라고 부르짖기도 했던 내가 이런데 중앙일보를 보는 보통 사람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장례 투쟁’을 조직하고 시신이 전선의 한가운데 놓이게 만든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정권과 기업에 있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목을 매달아 죽여 버린 인혁당 사형수들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해 불태워 버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시국과 관련한 죽음 앞에서 힘 가진 이들이 즐겨 기도했던 것은 그 시신의 신속한 소멸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이 집중했야 했던 것은 일단 시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왜 피가 돌고 살이 뜨거웠던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썩어 진물이 나는 시신으로 변했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일이었다.
1996년 2월 5일도 그랬다. 아파트 촌이 되어 버리기 이전의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4리 수지2구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일산과 분당으로 봉화를 올린 경기도 신도시 건설붐은 용인 수지 지역에도 밀어닥쳤고 자기 땅은 아니나마 그곳에 터 잡고 살던 이들은 오갈데없는 처지에 놓였고 밀어닥치는 철거반에 맞서 망루를 쌓아 올렸다. 용산참사 때 봤던 그 망루와 비슷한. 2월 5일 동절기 철거는 없다던 약속을 깨고 공권력과 용역 깡패들이 몰려들었다. 경황 중에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두들겨 맞을 사람은 두들겨 맞고 몇 명의 마을 주민과 학생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그런데 망루의 1층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쪽의 증언으로는 용역들이 ‘방화’를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믿고 싶지 않다. 어쨌든 불은 망루를 휘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이야 사람 살려 하는 공포스런 비명이 망루 위에서 터져나왔지만 깡패들과 전경들은 망루 아래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 그들은 해머와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들을 휘두르며 불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들의 집을 두들겨 부쉈다. 불길은 계속 치솟았고 LP가스통을 건드렸다. 불길은 더욱 힘을 얻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이들의 멱살을 잡을 듯 날름거렸고 열기와 유독가스는 몇 평 안 되는 망루의 가엾은 농성자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래도 불을 끄려는 노력은 없었고 철거는 계속됐다. 멀쩡한 사람들이 타 죽을 지경인데도. 그 흔한 매트리스 하나 깔리지 않았고 소방차도 오지 않았다.
지옥의 악마들이 혀를 찰 현실의 지옥불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결심을 한듯 망루 담을 넘어섰다. 그리고 18미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명과 툭 툭 둔탁한 소음. 검은 꽃잎들이 계속해서 땅으로 추락했다. 그 가운데 세 아이의 어머니 신연숙도 있었다. 허리가 나가고 머리가 깨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현장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펼쳐졌다. 무려 20여분 동안 용역 깡패들은 이들을 방치했고 대한민국 공권력은 사람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이웃들을 막아선 것이다. 설마 떨어지랴 싶어 당황을 했던 건지 임무를 완수한 건지 그들은 부리나케 철수해 버렸다. 한참 뒤에야 병원에 옮겨진 사람들 가운데 신연숙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법에도 규정된 가이주단지 이전, 영구임대 주택 제공 등을 외치며 세 아이와 내 남편 발 뻗을 자리는 달라던 한 주부는 1996년 2월 5일 인간이 가장 두려움을 느낀다는 높이의 5층 망루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녀가 안치된 동수원 병원 영안실에는 또 ‘사수대’가 꾸려졌다. 또 언제 경찰과 깡패들이 들이닥쳐 시신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례식은 한참 뒤에야 치러졌다. 그 죽음의 책임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평온한 새벽 망루로 쫓겨 올라간 이들에게 불길이 뒤따랐고 결국 불길보다는 머리가 깨지고 허리가 부러지는 것을 택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그 아비규환에 버려져 있었다. 고이 묻을 수 있었을까. ‘이성을 찾아’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죽음을 시신투쟁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과연 그 시신 부여잡고 으아아아악 피를 토하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들을 두고 ‘시신을 팔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래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시신을 볼모로 하면 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진중공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관에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경우 크레인으로 관을 들어 올릴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미쳤구나” 싶었다. 하지만 생존이 예절에 앞서는 경우는 없다. 고(故) 최강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그 동료들에게는 138억의 손해배상이 걸려 있다. 그 모두의 삼십 대 후손까지 손이 발이 되도록 일해도 갚지 못할 동그라미들의 쇠사슬. 회사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손해배상을 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피를 말리고 간을 쪼아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러다가 최강서 노동자는 죽었다. 힘들다고 울먹이면서 죽었다. 관을 떠메고 하는 시위에 눈살 찌푸리기 전에 대체 저 사람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하는 게 응당하지 않을까.
경기도 화성의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또 이를 이용하여 ‘시신 투쟁’을 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들렸다. 이전과 다른 것은 그 비난이 고인이 일했고 해고됐던 회사의 노동조합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복직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죽어간 옛 동료의 영혼이라도 ‘복직’시켜 주자는 동료들에게 이 노동조합은 ‘명예사원’이라는 희한한 이름을 제시하더니 급기야 고인의 해고자 동료들에게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노동자로서는 차마 못할 소리까지 토해 놓고는 장례식도 끝나기 전 그 영전에 모인 조의금까지 들고 사라졌다.
지난 12월 19일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주워섬기기조차 버거운 죽음의 홍수들이 우리에게 몰려왔다. 솔직히 죽음의 소식이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두려울만큼 많은 이들이 죽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죽음들은 결코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고 심약한 이들의 자포자기도 아니었으며 ‘열사’가 되려는 영웅심 때문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1996년 2월 5일 망루에 올라갔던 중년의 여인의 심경. 자기 집은 부숴지고 애들은 울부짖고 불길은 올라오고 소방차는 오지 않고 열기는 몸을 죄어 올 때 어른거리는 저 땅바닥, 그냥 뛰어내리라고 손짓하는 그 시커먼 땅바닥이 그 앞에 왔을 뿐이다. 그 땅바닥에 나는 태연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애써 그럴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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