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5년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그리고 꽃상여 타고
1985년 2.12 총선 뒤 ‘선명야당’ 신민당이 등장했지만 전두환의 폭압 통치는 여전하던 시절, 점차 전두환의 입김을 닮은 된바람이 살갗을 때리기 시작한 즈음의 어느 날,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186 명의 학생들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남녀불문 비장한 표정의 학생들은 간단한 지침을 전달받고 그들이 그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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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그리고 꽃상여 타고
1985년 2.12 총선 뒤 ‘선명야당’ 신민당이 등장했지만 전두환의 폭압 통치는 여전하던 시절, 점차 전두환의 입김을 닮은 된바람이 살갗을 때리기 시작한 즈음의 어느 날, 서울 시내 14개 대학에서 186 명의 학생들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남녀불문 비장한 표정의 학생들은 간단한 지침을 전달받고 그들이 그날 해야
할 행동에 돌입했다. 그 가운데에는 후일 유서 대필 사건으로 한국의 드레퓌스가 된 강기훈도, 호방한 입담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 정봉주도 끼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가락동 민정당 중앙연수원이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봄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의 인원이 민정당 중앙연수원을 향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쉽사리 정문을 돌파한 그들은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무지하게 넓었던 연수원을 점거하려면 정문에서 강당까지의 기나긴 거리를 전력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전경이 쫓아오고 점거해야 할 강당은 겁나 멀고,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 나가는 달리기 끝에 학생들은 점거에 성공했다. 성을 빼앗았으면 수성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지키려고 성을 빼앗은 게 아니라 상징적인 점거였고 성을 지킬 무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시간 안에 연행 대열로 끌려가는 것을 예상했는데 행주산성에는 돌이 있었듯 연수원에는 뜻밖의 무기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생수통이었다. (전 말지 기자 신준영이 쓴 80년대 학생운동 야사에서 봤음)
생수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민정당 어르신들은 수돗물과 차별되는 생수를 즐긴 것 같다. 그 꽉찬 생수통과 생수병들은 학생들의 짱돌이 됐다. 전경들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물병 세례에 곤욕을 치르며 학생들을 진압해야 했다. 3-40분 끌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농성은 무려 3시간을 끄는 ‘대첩’을 이룩했다. 대첩을 이룬 만큼 연행자들에 대한 대접도 혹독했다. 우선 연행자 전원이 구속됐다. 미문화원 사건 때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고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에도 “개전의 정이 역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도 베풀었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뛰어내리다가 허리를 다친 학생까지 짤없이 구속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상이 걸린 것은 검찰청이었다. 검사의 손이 모자란 것이다. 공안부 인력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검찰은 일반 검사들까지 차출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현장에 동원된 강력 형사 이야기는 허투루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대량 구속의 경험은 1986년 10월 28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라 쓰고 ‘건대항쟁’이라 읽는 사건에서 1천2백명이 넘는 구속자를 너끈히 소화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낳은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88년 서울의 어느 대학에 들어간 한 신입생은 학기초 생일 파티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라면 한 그릇 얻어먹은 적이 없는 구두쇠 87학번 (지금 페친이다)이 여자 신입생에게 푸짐한 꽃다발 하나와 자기 키만한 인형을 선사한 건 황당하긴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황당한 것은 불이 꺼진 뒤에 울려퍼진 희한한 노래였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숲 사이로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 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노래가 끝난 후 선배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85년 경의 어느 날, 생일파티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또 다른 생일 파티가 열렸다고 했다.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한 사람의 생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자리는 생일 파티답지 않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을 맞은 83학번은 바로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하게 되어 있었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다른 곳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 자리는 대학 시절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술자리이자 생일 파티였던 것이다. 별안간 누군가 일어서서 축가를 부르겠다고 꺼억꺽 목청을 가다듬더니 묘한 노래 하나를 토해 놓았을 때 그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생일 축하 노래로 꽃상여 타고라는 장송곡이 흘러나오니 그 순간의 '언바란스'에 잠시 평정이 깨진 것이다. 하지만 노래는 꿋꿋이 계속되었고,웃음은 사그러들었습니다. 독창은 합창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울음의 합창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날의 술자리는 결국 생일날 모여앉아 생일맞은 이를 가운데 앉혀 두고 "꽃상여 그대 타고 잘 가라 "를 불러 대는, 요즘말로 하면 엽기적인 악습을 만들어 냈다.
이 악습은 근 10년을 넘게 전승되다가 97언저리에서 대가 끊겼다. 그래서 요즘 그 동아리의 아이들은 생일 파티에서 그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그 노래조차 모른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악습을 낳았던 선배 자신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배는 그런 전통(?)의 창시자가 자신임을 신기해하면서도 그 노래조차 동아리 후배들에게 잊혀진 것을 아쉬워했다.
"노래까지 잊어먹으면 안되는데..꽃상여 진짜로 탄 사람들도.."..
그 세월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꽃상여를 타고, 또는 그조차 타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1985년 11월 18일의 그 191명의 인생도 그 후 각양각색으로 바뀌었으리라. 그 중에도 몸을 팔아버린 이도 맘을 팔아버린이도, 끝끝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작게나마 지켜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의 ‘어제의 오늘’을 기념한다. 1985년 11월 18일
그들의 목표는 가락동 민정당 중앙연수원이었다. 84년 11월의 민정당사, 85년 봄의 미 문화원 이후 점거농성단 규모로는 최대의 인원이 민정당 중앙연수원을 향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쉽사리 정문을 돌파한 그들은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무지하게 넓었던 연수원을 점거하려면 정문에서 강당까지의 기나긴 거리를 전력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전경이 쫓아오고 점거해야 할 강당은 겁나 멀고, 그야말로 가슴이 터져 나가는 달리기 끝에 학생들은 점거에 성공했다. 성을 빼앗았으면 수성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지키려고 성을 빼앗은 게 아니라 상징적인 점거였고 성을 지킬 무력도 없었다. 그래서 단시간 안에 연행 대열로 끌려가는 것을 예상했는데 행주산성에는 돌이 있었듯 연수원에는 뜻밖의 무기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생수통이었다. (전 말지 기자 신준영이 쓴 80년대 학생운동 야사에서 봤음)
생수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민정당 어르신들은 수돗물과 차별되는 생수를 즐긴 것 같다. 그 꽉찬 생수통과 생수병들은 학생들의 짱돌이 됐다. 전경들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물병 세례에 곤욕을 치르며 학생들을 진압해야 했다. 3-40분 끌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농성은 무려 3시간을 끄는 ‘대첩’을 이룩했다. 대첩을 이룬 만큼 연행자들에 대한 대접도 혹독했다. 우선 연행자 전원이 구속됐다. 미문화원 사건 때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고 민정당사 점거 농성 때에도 “개전의 정이 역력한” 이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도 베풀었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뛰어내리다가 허리를 다친 학생까지 짤없이 구속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비상이 걸린 것은 검찰청이었다. 검사의 손이 모자란 것이다. 공안부 인력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되자 검찰은 일반 검사들까지 차출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위현장에 동원된 강력 형사 이야기는 허투루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이 대량 구속의 경험은 1986년 10월 28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이라 쓰고 ‘건대항쟁’이라 읽는 사건에서 1천2백명이 넘는 구속자를 너끈히 소화하는 것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낳은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88년 서울의 어느 대학에 들어간 한 신입생은 학기초 생일 파티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라면 한 그릇 얻어먹은 적이 없는 구두쇠 87학번 (지금 페친이다)이 여자 신입생에게 푸짐한 꽃다발 하나와 자기 키만한 인형을 선사한 건 황당하긴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황당한 것은 불이 꺼진 뒤에 울려퍼진 희한한 노래였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숲 사이로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 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 꽃상여 타고"
노래가 끝난 후 선배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85년 경의 어느 날, 생일파티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또 다른 생일 파티가 열렸다고 했다.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한 사람의 생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자리는 생일 파티답지 않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을 맞은 83학번은 바로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하게 되어 있었고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다른 곳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 자리는 대학 시절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술자리이자 생일 파티였던 것이다. 별안간 누군가 일어서서 축가를 부르겠다고 꺼억꺽 목청을 가다듬더니 묘한 노래 하나를 토해 놓았을 때 그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생일 축하 노래로 꽃상여 타고라는 장송곡이 흘러나오니 그 순간의 '언바란스'에 잠시 평정이 깨진 것이다. 하지만 노래는 꿋꿋이 계속되었고,웃음은 사그러들었습니다. 독창은 합창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울음의 합창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날의 술자리는 결국 생일날 모여앉아 생일맞은 이를 가운데 앉혀 두고 "꽃상여 그대 타고 잘 가라 "를 불러 대는, 요즘말로 하면 엽기적인 악습을 만들어 냈다.
이 악습은 근 10년을 넘게 전승되다가 97언저리에서 대가 끊겼다. 그래서 요즘 그 동아리의 아이들은 생일 파티에서 그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그 노래조차 모른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악습을 낳았던 선배 자신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배는 그런 전통(?)의 창시자가 자신임을 신기해하면서도 그 노래조차 동아리 후배들에게 잊혀진 것을 아쉬워했다.
"노래까지 잊어먹으면 안되는데..꽃상여 진짜로 탄 사람들도.."..
그 세월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꽃상여를 타고, 또는 그조차 타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1985년 11월 18일의 그 191명의 인생도 그 후 각양각색으로 바뀌었으리라. 그 중에도 몸을 팔아버린 이도 맘을 팔아버린이도, 끝끝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작게나마 지켜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의 ‘어제의 오늘’을 기념한다. 1985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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