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0년 11월 9일 전국 노래 자랑 시작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라면 단연 <전국 노래 자랑>입니다. 1980년 11월 9일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서른 두 돌을 맞네요. '딩동댕동'과 '땡~~'을 합격과 불합격을 가리키는 일종의 국민적 의성어로 만들다시피 한 이 프로그램은 그 동안 전국을 몇 바퀴 돈 것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도 열렸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그 이름을 뽐냈던 일종의 국민 오락 ...
1980년 11월 9일 전국 노래 자랑 시작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라면 단연 <전국 노래 자랑>입니다. 1980년 11월 9일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서른 두 돌을 맞네요. '딩동댕동'과 '땡~~'을 합격과 불합격을 가리키는 일종의 국민적 의성어로 만들다시피 한 이 프로그램은 그 동안 전국을 몇 바퀴 돈 것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서도 열렸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도 그 이름을 뽐냈던 일종의 국민 오락 ...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원조 국민 MC 송해 선생님과 함께죠. 그런데 하나 착각하지 마실 것은 송해 선생님이 이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맡으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가수 이한필이 오랫 동안 진행했고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도 잠깐 마이크를 잡았고 MC 최선규씨도 전국 노래 자랑의 무대에 선 일이 있습니다. 송해 선생님이 전국 노래 자랑의 부동의 MC로 등극하신 것은 1988년의 일입니다.
빰빠빠 빰빠 빠아아암 빠 ~~~ 경쾌한 시그널 뮤직은 일요일 낮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애초 송 선생님은 이 프로그램이 "몇 십회 나가다 보면 끝날 것"으로 여겼답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시와 군 행정구역 전부를 따져 봐야 몇 개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고 대도시의 경우 구별로 나눠서 열리기도 하고 간 곳 또 가고 하다 보니 그 세월이 30년을 넘기게 됐지요. 이쯤 되면 이건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전국 노래 자랑> 연출팀은 일종의 유랑극단 같았다고 해요. 담당 PD는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갔고 그 휘하에 카메라 조명 세트 스탭에다가 경음악 반주반과 국악 반주반까지 휘몰고 다녔으니 유랑극단이 따로 없었겠지요. 80년대만 해도 할아버지들이 갓 쓰고 나오셔서 그 쉰 목소리로 "장산곶 마루에~~~~"나 "한오백년"을 부르셔서 국악 반주로 흥을 맞춰 드렸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지요. 민요 들으며 자란 세대는 가시고 '목포의 눈물' 정도 들으며 자란 세대가 백발이 성성해진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이 프로그램 PD가 쓴 글을 읽는데 그는 가장 인상 깊게 촬영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완도를 들고 있더군요. 전남의 몇몇 군이 그렇지만 완도군 역시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군이죠. 완도에서 <전국 노래 자랑>을 하는데 좀 걱정이 앞서더랍니다. 완도군민 수도 얼마 안되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녹화 당일 담당 PD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완도항이 완도군 관할의 각 섬들에서 섬 주민들을 싣고 온 통통배와 어선들로 미어터졌던 겁니다. 그 PD는 '완도상륙작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더군요. 상상해 보세요. 완도항이 미어터지는 가운데 간만에 나들이옷 차려 입고 "아따 이거 볼라고 포도시 포도시 왔네." 서로 인사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이닥치는 관중들의 정경을. 담당 PD는 어깨가 으쓱한 정도가 아니라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했을 겁니다.
30년 역사에 그런 일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여든 다섯 딸이 백 세 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미 가물가물하신 어머니가 가사를 까먹자 여든 다섯 딸이 꼬박꼬박 가사를 불러 드리며 노래를 맺었다는데 생각하면 참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경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도 최고령 출연자의 영예를 차지하기엔 너무 젊으셨습니다. 118세 된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신 적도 있으니까요. "너무나도 행복하다."고무대 출연 소감을 밝히신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3일 뒤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아마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제 세상에 무슨 여한이 있겠나 텔레비에도 나와봤는데 하며 저승사자를 재촉하며 가셨을 겁니다. 그런 사연도 있었다더군요. 한 번은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난 형제들이 무대에 올라왔길래 하도 귀엽기도 하고 장난도 칠 겸 악단장에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아가라고 했는데 마침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악단장 겸연쩍어하며 세뱃돈 만 원 씩을 쥐어 줬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 뒤 같은 지역을 찾았던 <전국 노래 자랑> 무대에 이제는 열 일곱, 열 아홉, 스물 한 살이 된 형제가 또 무대에 올랐답니다. 그들은 그때 받은 돈을 그대로 그때까지 갖고 있었다고 해요. 대통령이랑 악수한 뒤 손 안 씼는다는 기분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돈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고 합창했고 송해 선생님은 가슴까지 뭉클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국과 세계를 누빈 <전국 노래 자랑>과 송해 선생님입니다만, 아마 그 프로그램에, 그리고 송해 선생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소는 역시 북한일 것 같습니다. 2003년 광복절 기념으로 성사된 북한 주민들의 노래 자랑은 남북 관계가 괜찮던 당시에도 무진장한 줄다리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북한은 황해도 재령 출신인 월남민 송해 선생님이 무대에 서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고 해요. 금강산 구경을 가서도 송해 선생님을 배에서 못 내리게 한 적이 있는 북한 당국이니 오죽했겠어요. 하지만 KBS쪽도 악으로 깡으로 버텼어요. 전국 노래 자랑에 송해가 빠지면 그게 속 없는 만두 아니고 뭐겠어요. 그거 말고도 문제는 태산이었답니다. 이를테면 불합격을 알리는 '땡' 소리는 평양편 노래자랑에서는 울리지 않았어요. 북한측이 "우리 인민에 대한 모욕입네다!"라고 결기를 세우고 나온 탓이죠. 또 송해 선생님은 애드립도 제대로 치지 못했어요. "와 대본에 없는 소리를 합네까?" 북한측의 항의가 잇따랐던 겁니다. 그나마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노인에게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큰절한 것이 '송해다운' 모습이었지요.
그 삼엄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송해 선생님은 평양에서 차 타면 한 시간이면 갈 황해도 고향 땅에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북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 볼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위안이라면 함께 사회를 봤던 전성희씨의 마지막 인사였겠지요. 헤어지기 전 그녀는 송해 선생님에게 달려와서 그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인사를 했답니다. "아바디 건강하시라요." 그때 송해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얼마 전 송해 선생님이 건강 악화로 전국 노래 자랑 녹화를 포기해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27년 생이시니 여든 여섯. 솔직히 물러나셔도 벌써 물러나서 쉬셨을 연세지만 송해 선생님은 기어코 다시 돌아와서 마이크를 잡으셨다지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저 또한 가슴이 짠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왕 노익장을 과시하실 거 좀 더 사셔서 꼭 북한판 노래 자랑을 진행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월남민'이니 아니니 시비할 것 없이, 맘대로 농담도 하고 '일성이 형님 송해 왔습니다.' 하면서 사람들 웃기기도 하고 뭣보다 그분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 땅에서 꼭 노래자랑을 열어 인민들의 노래를 들으며 딩동댕과 땡 소리를 번갈아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빰빠빠 빰빠 빠아아암 빠 ~~~ 경쾌한 시그널 뮤직은 일요일 낮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애초 송 선생님은 이 프로그램이 "몇 십회 나가다 보면 끝날 것"으로 여겼답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시와 군 행정구역 전부를 따져 봐야 몇 개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지고 대도시의 경우 구별로 나눠서 열리기도 하고 간 곳 또 가고 하다 보니 그 세월이 30년을 넘기게 됐지요. 이쯤 되면 이건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전국 노래 자랑> 연출팀은 일종의 유랑극단 같았다고 해요. 담당 PD는 몇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갔고 그 휘하에 카메라 조명 세트 스탭에다가 경음악 반주반과 국악 반주반까지 휘몰고 다녔으니 유랑극단이 따로 없었겠지요. 80년대만 해도 할아버지들이 갓 쓰고 나오셔서 그 쉰 목소리로 "장산곶 마루에~~~~"나 "한오백년"을 부르셔서 국악 반주로 흥을 맞춰 드렸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지요. 민요 들으며 자란 세대는 가시고 '목포의 눈물' 정도 들으며 자란 세대가 백발이 성성해진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이 프로그램 PD가 쓴 글을 읽는데 그는 가장 인상 깊게 촬영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완도를 들고 있더군요. 전남의 몇몇 군이 그렇지만 완도군 역시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군이죠. 완도에서 <전국 노래 자랑>을 하는데 좀 걱정이 앞서더랍니다. 완도군민 수도 얼마 안되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녹화 당일 담당 PD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완도항이 완도군 관할의 각 섬들에서 섬 주민들을 싣고 온 통통배와 어선들로 미어터졌던 겁니다. 그 PD는 '완도상륙작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더군요. 상상해 보세요. 완도항이 미어터지는 가운데 간만에 나들이옷 차려 입고 "아따 이거 볼라고 포도시 포도시 왔네." 서로 인사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이닥치는 관중들의 정경을. 담당 PD는 어깨가 으쓱한 정도가 아니라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했을 겁니다.
30년 역사에 그런 일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여든 다섯 딸이 백 세 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서 노래를 불렀답니다. 이미 가물가물하신 어머니가 가사를 까먹자 여든 다섯 딸이 꼬박꼬박 가사를 불러 드리며 노래를 맺었다는데 생각하면 참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경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도 최고령 출연자의 영예를 차지하기엔 너무 젊으셨습니다. 118세 된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노래를 열창하신 적도 있으니까요. "너무나도 행복하다."고무대 출연 소감을 밝히신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3일 뒤 세상을 떠나셨다지요. 아마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제 세상에 무슨 여한이 있겠나 텔레비에도 나와봤는데 하며 저승사자를 재촉하며 가셨을 겁니다. 그런 사연도 있었다더군요. 한 번은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난 형제들이 무대에 올라왔길래 하도 귀엽기도 하고 장난도 칠 겸 악단장에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아가라고 했는데 마침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악단장 겸연쩍어하며 세뱃돈 만 원 씩을 쥐어 줬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 뒤 같은 지역을 찾았던 <전국 노래 자랑> 무대에 이제는 열 일곱, 열 아홉, 스물 한 살이 된 형제가 또 무대에 올랐답니다. 그들은 그때 받은 돈을 그대로 그때까지 갖고 있었다고 해요. 대통령이랑 악수한 뒤 손 안 씼는다는 기분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돈 돌려 드리러 왔습니다."고 합창했고 송해 선생님은 가슴까지 뭉클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국과 세계를 누빈 <전국 노래 자랑>과 송해 선생님입니다만, 아마 그 프로그램에, 그리고 송해 선생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소는 역시 북한일 것 같습니다. 2003년 광복절 기념으로 성사된 북한 주민들의 노래 자랑은 남북 관계가 괜찮던 당시에도 무진장한 줄다리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북한은 황해도 재령 출신인 월남민 송해 선생님이 무대에 서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고 해요. 금강산 구경을 가서도 송해 선생님을 배에서 못 내리게 한 적이 있는 북한 당국이니 오죽했겠어요. 하지만 KBS쪽도 악으로 깡으로 버텼어요. 전국 노래 자랑에 송해가 빠지면 그게 속 없는 만두 아니고 뭐겠어요. 그거 말고도 문제는 태산이었답니다. 이를테면 불합격을 알리는 '땡' 소리는 평양편 노래자랑에서는 울리지 않았어요. 북한측이 "우리 인민에 대한 모욕입네다!"라고 결기를 세우고 나온 탓이죠. 또 송해 선생님은 애드립도 제대로 치지 못했어요. "와 대본에 없는 소리를 합네까?" 북한측의 항의가 잇따랐던 겁니다. 그나마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노인에게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큰절한 것이 '송해다운' 모습이었지요.
그 삼엄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송해 선생님은 평양에서 차 타면 한 시간이면 갈 황해도 고향 땅에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북에 있는 가족들을 찾아 볼 생각도 못했다고 합니다. 위안이라면 함께 사회를 봤던 전성희씨의 마지막 인사였겠지요. 헤어지기 전 그녀는 송해 선생님에게 달려와서 그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인사를 했답니다. "아바디 건강하시라요." 그때 송해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얼마 전 송해 선생님이 건강 악화로 전국 노래 자랑 녹화를 포기해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27년 생이시니 여든 여섯. 솔직히 물러나셔도 벌써 물러나서 쉬셨을 연세지만 송해 선생님은 기어코 다시 돌아와서 마이크를 잡으셨다지요. 그 뉴스를 들으면서 저 또한 가슴이 짠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왕 노익장을 과시하실 거 좀 더 사셔서 꼭 북한판 노래 자랑을 진행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월남민'이니 아니니 시비할 것 없이, 맘대로 농담도 하고 '일성이 형님 송해 왔습니다.' 하면서 사람들 웃기기도 하고 뭣보다 그분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 땅에서 꼭 노래자랑을 열어 인민들의 노래를 들으며 딩동댕과 땡 소리를 번갈아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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