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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7 슬픈 김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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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3년 10월 17일 슬픈 김주익 

2003년에 찾아왔던 태풍 매미 기억하십니까. 부산을 위시한 남해안 일대를 휩쓴 이 태풍의 위력은 태풍의 전설로 남아 있는 59년의 사라호 태풍을 능가한다는 평이었습니다. 가로수가 뽑히고 택시가 쓸려가고 하는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못되었고 수천 톤 규모의 선상 호텔이 나자빠질 정도의 초대형 태풍이었지요. 그 무서운 태풍이 부산에 밀어닥쳤을 때 나는 강원도 설악산의 한 콘
도에 있었습니다. 거기도 날씨는 잔뜩 구겨져 있었고 바람도 심상찮게 불었지만 설악산이 무너지랴 동해바다 넘치랴 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유리창을 때리는 그 황소바람 소리를 안주 삼아서 아늑한 방 안에서 다리 쭉 뻗고 휴식을 즐기던 그 순간 부산 영도에 있던 한 남자는 바람개피처럼 팔랑거리며 돌아가는 크레인 조종실에서 몸을 가누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영도는 바람이 센 곳입니다. 해운대나 광안리도 바닷가라지만 영도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평소에도 지나는 사람의 얼굴을 심하게 때릴 때가 많아요. 하물며 2003년의 매미 때겠어요. 크레인 위의 그 사람이야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을 겁니다. 오들오들 떨면서 차디찬 쇳덩이라도 필사적으로 그러쥐었을 것이고 바람이 잦아들기만을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렸을 겁니다. 그는 그 크레인 위에서 석 달 가까이 살고 있었습니다. 2003년 6월 85호 크레인에 올라와 고공농성 중이던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김주익 위원장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난 뒤 김주익 위원장은 편지 하나를 올려다 받습니다. 딸로부터 온 것이었죠. “아빠 어제 무서웠죠?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아빠 노릇 잘해요." 아마 김주익 위원장은 이 편지를 읽으며 어린아이처럼 왈칵 울었을 것 같아요. 그런 큰 바람이 부는 날이면 들판의 들짐승들도 굴 안에서 오돌오돌 떠는 새끼들 품고 바람 잘 날 기다렸을 텐데, 산속의 산짐승들도 바위틈에서 새끼들에게 조금만 기다려라고 다독이고 있었을 텐데, 자기는 집은커녕 지상 수십 미터의 크레인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딸로부터 의젓한 위로를 받는 아버지의 심경이 오죽했을라구요. 얼마 전에는 “내가 일자리 구해 줄께요. 아빠 그 일 그만 하면 안되요? 그래야 운동회 학예회도 보잖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 자랑도 하는데.”라고 편지를 올려 보내서 아빠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딸이었는데 말이죠. 몇 달 사이 어떻게 커 버린 걸까. 크레인 아래로 와 본들 점보다 조금 더 큰 머리로만 보일 뿐이었던 딸내미를 안고 싶어서 팔에 쥐가 나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눈에 근육이 솟았을 겁니다. 

하지만 해는 다시 반짝하고 떠서 어제 거칠게 세상을 할퀴고 간 물기를 말렸지만 크레인 위의 외로운 영혼에게는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홀쪽했던 달이 점점 배가 불러갔지만 크레이 아래 회사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자기 회사 노조위원장이 석 달이 넘게 크레인에서 살고 있는데 회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필사적이었지만 세상은 평화로왔습니다. 차들은 무심히 영도 다리를 넘었고, 고기잡이 배들은 통통거리며 바다를 지났고 태종대쪽 도로는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아마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매미호 태풍도, 지난 여름 사람을 쪄죽이는 줄 알았던 더위도 아니었을 겁니다. 외로움이었을 겁니다. 아래에서 음식 올려 주고 구호 외쳐주는 동지들이야 있었겠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에 그들 역시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내가 85호기 크레인위로 올라온 지 벌써 90여일.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 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이 회사에 들어온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 105만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0여만원. 근속연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한단 말인가.”

그 월급조차 그의 가족들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시대, 기업들이 개발한 손배가압류라는 가공할 무기는 마치 독가스처럼 노동자들의 숨통을 막고 있었죠. 김주익 위원장의 세 아이가 뛰어 노는 방안의 살림도구에도 압류의 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이들에게 회사는 어김없이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그에 대한 저항은 나라 망할 소리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결심을 합니다. 그때 머리를 감아죈 것은 아이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끼룩끼룩 갈매기 영도서 울고 뿌웅뿌웅 뱃고동 부산항에서 울 때, 머리띠 매고 크레인에 올라가신 아빠는 휠리스 사가지고 오신다고 했지만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 위원장은 목을 맸습니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이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한이 뚝뚝 떨어지는 유서에 고 정은임 아나운서는 이렇게 화답했었지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애석하게도 정은임 아나운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김주익 위원장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어서라도 그 방송 고마웠다고 눈물을 흘렸겠지요. 

정은임도 김주익도 없는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고공 크레인 위에 달라붙은 이들은 있습니다. 그들의 호소는 차라리 법치국가를 자임하는 나라에 대한 슬픈 조롱입니다. “대법원 판결을 지켜라.” 경찰이 그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할 때 법원이 “올라간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고 기각할만큼 웃기지도 않는 법치국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2003년 10월 17일 목을 맸던 김주익 위원장은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 나처럼 되게 내버려 둘 것이냐고. 저 사람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해 줘야 할 거 아니냐고. 김주익 위원장이 태풍에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아갈 때 건배를 외치고 있었던 죄책감으로, 지금은 철탑 위에 오른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노동자들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합니다. 별 수 없는 월급쟁이깜냥에 가 볼 처지는 못되고 아주 부끄러운 액수나마 보태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강요하고자 합니다. 땅보다는 하늘에 가까운 곳이니 하늘나라에 쌓아두는 셈치고 저들이 외롭지 않다는 걸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포스팅은 전체 공개로 해 두갰습니다. 공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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