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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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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10.16 존 브라운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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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59년 10월 16일 문제적 인물 존 브라운 

80년대 대학가 술자리에서 깔깔대며 부른 노래가 있다. “관악산에 자리잡은 서울대학은 총장이 어용이라 교수도 어용.”....으로 시작하는 노래. 연세대는 ‘제비’였고 고려대는 ‘술꾼’이었고 공부 열심히 하는 서강대는 ‘고삐리’ 데모할 때 과격하기로 유명했던 성균관대는 ‘깡패’ 등등으로 그 특질들을 끼워 맞춘 노래였고 자기 학교를 부를 때는 언제나 ‘투사’라든
가 멋있는 말을 넣어 부른 뒤 “영광 영광 XX대학 영원히 빛나리” 하는 후렴으로 맺곤 했다. 

이 노래의 원곡은 매우 전투적인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지만 원래 19세기 미국에서 의용 소방대의 노래로 만들어졌고 이후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군가로 고창되기도 했던 노래다. 그런데 군가로 불리울 때 이 노래의 제목은 좀 특이했다. ‘존 브라운의 시신’이었으니까. 이 노래 가사는 군가답게 단순하다. “존 브라운의 시신은 무덤에 잠들고 (세 번 반복) 후렴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후 “His soul is marching on." (그의 영혼은 전진하고 있으리라) 그 뒤 가사도 있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자. 북군 병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남군과 싸웠고 승리한 뒤에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럼 이 흔하디 흔한 이름 존 브라운은 누구인가. 왜 그는 북군의 우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는 피혁공장에서 일했다. 돈벌이에는 별로 소질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독실한 청교도이자 열렬한 노예 해방론자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공장은 곧잘 흑인들을 도와 탈출시키는 비밀 조직의 아지트로 즐겨 쓰였고 존 브라운 자신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의 어느 날 김승같은 학대를 받는 흑인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럴 수는 없다! 그날의 기억은 존 브라운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노예 문제로 미국은 거의 정신적인 분단 상태에 있었다. 노예 옹호론자들과 노예 폐지론자들은 새로운 주가 연방에 가입할 때마다 그 주를 노예 허용 주로 가입을 허락할지 노예폐지 주로 등록할지를 놓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유명한 건 역시 ‘피의 캔사스’ 라 불리우는 유혈 사태일 것이다.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는 캔사스 주를 놓고 노예 옹호자들과 반대자들은 그야말로 벼랑 끝 대치에 들어간다. 양측은 모두 대량의 이주민들을 투입하여 캔사스 주를 장악하려 들었고 그 와중에 치른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양쪽 모두 경건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노아의 자손 중 노아의 알몸을 본 아들들은 영원히 그러하지 않은 아들을 섬기게 되리라 하셨다.”는 설교에 열광했고 또 한쪽은 “비기독교적인 노예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총과 성경”이라는 말에 아멘을 부르짖었다. 양쪽의 충돌은 당연히 캔사스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일단의 노예 제도 지지자들이 1856년 5월 로렌스 시를 습격하여 자유주 지지자들을 살해한다. 이는 그때껏 잠자고 있던 한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행동이었다. 노예 지지자들의 행동에 분노하여 떨쳐 나선 이 가운데 존 브라운이 있었던 것이다. 존 브라운은 그의 네 아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을 모아 노예 지지자들을 습격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을 토막내 죽인다. 그것도 그들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사지를 잘라 죽인 것이다. 광기에 가까운 눈빛을 가졌다는 것이 존 브라운을 만나본 이들의 평이긴 했지만 그의 행동은 노예 지지론자에게는 거의 악마와도 같은 반열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미국 역사에서는 포타와토미 학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 이후 "피의 캔사스“는 더욱 피비린내를 풍기며 사람들의 목숨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존 브라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 믿었던 그는 남부의 심장부 버지니아의 산악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그곳을 탈주노예들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꿈을 꾼다.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위해 자신의 아들들과 ,지지자들, 일단의 헤방 노예를 그러모아 연방군 무기고를 습격한 그는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혀 엉뚱한 희생자 하나가 나왔다. 해방된 자유인이었던 흑인 한 명이 근처를 지나다가 유탄에 맞아 죽은 것이다. 1859년 10월 16일이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죽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이건 연방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후일 남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로버트 리가 이끄는 연방군은 당장 존 브라운 일행을 공격한다. 교전 와중에 존 브라운의 아들이 총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아들에게 브라운은 “남자답게 죽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저항은 장렬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체포된 후 사형을 선고받지만 그는 재판정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한다, “노예를 살리기 위해, 힘으로써 노예 소유자에게 간섭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탈옥의 기회까지 뿌리치고 “순교자가 되겠다”며 열정적으로 털어놓은 그의 마지막 연설은 노예 폐지론자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노예 지지론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가져다 준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했다. 에머슨 같은 시인은 그를 예수에 빗대며 “옣수 이래 그만큼 값진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없다.”고 격찬했고 북부인들은 그를 동정했지만 남부인은 브라운에 대한 북부의 태도를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된다. “살인마를 순교자로 만들다니!” 링컨은 존 브라운을 “오도된 광신도”로 비난했다. “노예제도를 폐지해서 연방이 유지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노예 제도를 유지해서 연방이 수호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며 연방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링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브라운의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군복까지 빌려 입고 형장에 들어가 브라운을 저주했던 한 남부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윌크스 부스. 후일의 링컨의 암살자였다. 결국 그에게 링컨이나 브라운이나 거기서 거기인 인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개인적으로는 링컨의 평가에 동의하지만 “정의를 위해 나와 내 자식들의 피가 고통받는 노예들의 피가 섞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할 것이다.”고 기염을 토하던 존 브라운의 모습을 마냥 미치광이로 몰기에는 어딘가 좀 껄쩍지근하다. 그 껄쩍지근함은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수필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예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는 브라운과 같이 노예의 입장을 대변하는 박애주의자를 택할 것이다.” 즐겨 역사를 망치는 것이 과잉된 맹동주의자들의 오버인 것은 사실이나 역사는 누군가의 행동 없이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 게으름뱅이이기 때문에. 1859년 10월 16일 존 브라운이 행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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