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말을 조심해야 하고 듣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뜻을 간직한 ‘말’이다. 그런데 이 ‘아’다르고 ‘어’ 다르게 만드는 현상은 대개 누군가의 입에서 직접 나왔을 때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옮겨질 때 더 복잡하고 심각하게 벌어진다. 특히나 그 매개체가 ‘언론’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개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마련이지만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이게 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들리게 하는 능력까지도 보유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언론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다각도로 전개하게 마련이고, 거기서 나온 대답은 언론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되게 마련이다. 물론 그 와중에 중요한 것은 ‘팩트’다 그 뉘앙스와 맥락과 전후사정을 감안한 팩트면 좋을 것이고 언론 종사자들이 그러한 합리적인 팩트를 추구하리라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음을 우리는 안다.
어제 나는 얼치기 시저가 된 것 같다. 시저도 아닌 주제에 브루투스 너마저도를 부르짖었던 것은 그렇다고 치는데, 사실 브루투스 이름 박힌 칼이라는 이유로 브루투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브루투스 You too!를 외치며 얼굴을 토가로 휘감아 버린 얼치기 시저 말이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는 자신이 언급한 단일화 조건을 새누리당이 만족할 경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와도 단일화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국민들이 동의하느냐가 문제"라고 답했다.”는 기사가 바로 브루투스의 이름이 박힌 칼이었다. 아니 안철수의 이름이 박힌 칼이었다고나 할까.
“국민의 뜻”이라는 애매한 갑옷 속에 항차 새누리당과의 단일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자체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는 식의 발끈함의 원천이었고 “병 걸린 거 아냐?” 하는 식의 거친 언사의 이유가 됐고 그렇게 “안철수 유 투!”를 내갈겼던 것이다. 하지만 근데 자고 일어나 생각해 보니 좀 어색한 구석이 있다. 우선 저 말이 어떤 분위기에서, 무슨 맥락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뉘앙스로 말했느냐에 대한 입체적 분석 없이 그저 ‘새누리당과의 단일화’와 ‘국민들의 동의’의 물리적 결합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싶은 것이다. 거두절미 전후소거하고 “어쨌건 네가 이 말을 했잖아?”라고 윽박지르는 건 사실 조선일보 류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국민들이 동의하느냐가 문제”라는 말이 “국민들이 동의나 해 주시겠습니까?”라는 하늘과 “국민들이 동의하면 할 수도 있죠.”라는 땅으로 그 해석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을진대, 나의 발끈함은 어느 허공을 맴돌아야 한단 말인가.
머쓱함 그리고 송구함으로 일단 섣불렀던 발끈함을 거둔다. 하지만 하고픈 말은 있다. 이른바 “문묘안묘론” 즉 문이든 안이든 저쪽을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쓴웃음으로 공감하면서 그 두 고양이 사이에서 나는 1퍼센트 정도 안씨 고양이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되려면 아직도 안씨 고양이가 갖춰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균형 잃고 비틀거리는 수염 잘린 고양이라면 쥐를 잘 잡을 리 없을 것이고 언제 발톱을 내고 뺄 줄 모르는 고양이라면 저 고양이가 대체 무슨 쥐를 잡을 것인지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의 발끈함과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그런 측면에 기댄 것도 있으리라. 잘 하길 바란다. 함정은 곳곳에 파여 있고 지뢰는 길목마다 놓여 있을 것이다. 가끔은 쥐약도 놓여 있을 것이고 덫도 설치돼 있을 것이다. 그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명확함일 것 같다. 말이든 정책이든 피와 아의 구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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