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0년 8월 17일 가봉 독립
산하의 오역에서 어느 나라 독립을 얘기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한 번 해 보자. 1960년 8월 17일 가봉이라는 나라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이 해는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울만큼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아프리카에 세워졌다. 50년대 한국이 '최빈국'이라고 얘기되는 것은 실제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아프리카에 비교할 만한 '나라'가 적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신생...
1960년 8월 17일 가봉 독립
산하의 오역에서 어느 나라 독립을 얘기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한 번 해 보자. 1960년 8월 17일 가봉이라는 나라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이 해는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울만큼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아프리카에 세워졌다. 50년대 한국이 '최빈국'이라고 얘기되는 것은 실제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아프리카에 비교할 만한 '나라'가 적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신생...
독립국들은 대개는 잔혹한 독재나 치열한 내전과 학살의 공포를 골고루 겪었지만 가봉은 그 폭풍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1967년 이래 오마르 봉고 대통령 치하에서 역시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 체제를 이루며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꽤 잘 사는 나라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이다. (물론 1993년을 비롯해서 정치적 위기는 존재했지만)
이 가봉 공화국은 여러 모로 우리와 인연이 많은 나라다. 비동맹노선을 표방하면서도 프랑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이 나라는 친서방적 면모도 지니고 있었기에 우리의 아프리카 외교의 교두보가 된다. 60년대에 이어 70년대 중반까지 남북은 전쟁에 가까운 외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북한은 어떤 비동맹 회의에서 페루 대표에게 뇌물을 줬다가 들통이 났고 한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표에게 돈을 안겨 한국 입장의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한 예는 얼마나 그 '전쟁'이 유치찬란했는가를 드러내 준다. 북한의 경우 한 해 아프리카에 6천8백만 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고 한다. 또 태반이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한 아프리카에서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한은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가봉은 그 와중의 희망이었다. 봉고 대통령이 국빈으로서는 최다 한국 방문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 기인한다.
그는 1975,84,96년 그리고 2007년 이렇게 네 번씩이나 한국을 방문한다. 1975년의 첫 방문에서 가봉 대통령은 가히 거국적인 환영을 받는다. 요즘에야 웬만한 나라 대통령이 왔다는 소식은 단신에서도 빠지기 일쑤지만 이때는 달랐다. 공항에는 정,관, 재계 인사 1400 명이 총출동해서 봉고 대통령을 맞았던 것이다. 가봉이 1974년 북한과도 수교한 마당에 그 대통령을 '국빈'으로 모신 것은 일종의 외교적 승리였다. 연도에는 수십만의 시민이 동원되어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뜨거운 환영의 깃발을 펄럭였다. "가봉의 봉고 대통령인지 봉고의 가봉 대통령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서울대학교는 그에게 명예학위를 주는데 애처롭게도 그 학위증서에는 이름이 틀려 있었다.
그 외에도 경희대학교 의료원에서는 보약을 안겨 주었고, 가봉 수도에는 15층짜리 백화점을 지어주기로 했으며, 기아자동차에서 개발한 신형 승합차에는 '봉고'의 이름이 붙여졌다. 정말 봉고가 그 봉고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2007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봉고 대통령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은 답사에서 "한국 첫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내 이름이 한국의 한 미니버스에 붙여졌다"고 밝힌 것이다. 환대가 얼마나 지극했던지 봉고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머문 뒤 출국한다. 바로 이때를 겨냥해서 '성접대설' 소문이 난다. 누가 흑인 애를 낳았다더라 하는 그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바로 봉고 대통령이었다. 사실 봉고 대통령은 자국에서 굉장한 엽색행각을 벌인 인물이기도 했다. (자녀 150여명)
1982년 8월 17일 가봉이 독립기념일에 전두환은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떠난다. 내가 왜 이를 기억하는가 하면, 그 더운 여름날 전두환 5개국 순방 기념 우표를 사겠다고 우체국 앞에서 날밤을 샜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표 수집 취미가 무슨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레이건 방한 기념우표, 동남아순방 기념우표는 요즘 말로 '득템'의 대상이었고 "10년만 지나면 가격이 100배가 될" 보물이었다. 하긴 지금 그 우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정도 가격이 될 것도 같다. 각설하고, 순방 기간 중 가봉에 도착하여 엄숙한 표정으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전두환의 얼굴은 곧 흙빛으로 변한다.
가봉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이 애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북한 애국가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건 장세동 안기부장이었다. 그는 달려나가 군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내리쳤다. 이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양국 관리들은 사태를 파악한 뒤 얼어붙어 버렸다. 전두환도 선불맞은 짐승처럼 흥분했다. 이때를 목격한 당시 외교관 배상길의 <내가 만난 아프리카>에 따르면 전두환은 수행원들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격노했고 가봉 방문 취소하고 돌아가자고 우겼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의 외교 관계는 결렬 수준이 될 것은 뻔한 일, 수행원들은 가까스로 전두환을 설득했고 가봉 봉고 대통령은 정중히 그 결례를 사과한다. 냉전 시대, 그리고 그 다음해 북한이 전두환의 목숨을 노려 아웅산에 폭탄을 설치하던 시대의 가봉의 실수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촌식을 할 때 남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펄펄 뛰는 것을 보고 나는 옛날의 전두환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웃었다.
우리에게 '봉고차'라는 한국어 단어를 선사한 인물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나라, 남북한의 유치하기까지 한 출혈 외교의 증인이자, 그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간직한 나라 가봉이 1960년 8월 17일 독립했다.
이 가봉 공화국은 여러 모로 우리와 인연이 많은 나라다. 비동맹노선을 표방하면서도 프랑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이 나라는 친서방적 면모도 지니고 있었기에 우리의 아프리카 외교의 교두보가 된다. 60년대에 이어 70년대 중반까지 남북은 전쟁에 가까운 외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북한은 어떤 비동맹 회의에서 페루 대표에게 뇌물을 줬다가 들통이 났고 한국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표에게 돈을 안겨 한국 입장의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한 예는 얼마나 그 '전쟁'이 유치찬란했는가를 드러내 준다. 북한의 경우 한 해 아프리카에 6천8백만 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고 한다. 또 태반이 비동맹 노선을 표방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한 아프리카에서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한은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는데 가봉은 그 와중의 희망이었다. 봉고 대통령이 국빈으로서는 최다 한국 방문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 기인한다.
그는 1975,84,96년 그리고 2007년 이렇게 네 번씩이나 한국을 방문한다. 1975년의 첫 방문에서 가봉 대통령은 가히 거국적인 환영을 받는다. 요즘에야 웬만한 나라 대통령이 왔다는 소식은 단신에서도 빠지기 일쑤지만 이때는 달랐다. 공항에는 정,관, 재계 인사 1400 명이 총출동해서 봉고 대통령을 맞았던 것이다. 가봉이 1974년 북한과도 수교한 마당에 그 대통령을 '국빈'으로 모신 것은 일종의 외교적 승리였다. 연도에는 수십만의 시민이 동원되어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뜨거운 환영의 깃발을 펄럭였다. "가봉의 봉고 대통령인지 봉고의 가봉 대통령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서울대학교는 그에게 명예학위를 주는데 애처롭게도 그 학위증서에는 이름이 틀려 있었다.
그 외에도 경희대학교 의료원에서는 보약을 안겨 주었고, 가봉 수도에는 15층짜리 백화점을 지어주기로 했으며, 기아자동차에서 개발한 신형 승합차에는 '봉고'의 이름이 붙여졌다. 정말 봉고가 그 봉고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2007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봉고 대통령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사에 이은 답사에서 "한국 첫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이뤄졌으며..... 내 이름이 한국의 한 미니버스에 붙여졌다"고 밝힌 것이다. 환대가 얼마나 지극했던지 봉고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몇 시간을 머문 뒤 출국한다. 바로 이때를 겨냥해서 '성접대설' 소문이 난다. 누가 흑인 애를 낳았다더라 하는 그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바로 봉고 대통령이었다. 사실 봉고 대통령은 자국에서 굉장한 엽색행각을 벌인 인물이기도 했다. (자녀 150여명)
1982년 8월 17일 가봉이 독립기념일에 전두환은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떠난다. 내가 왜 이를 기억하는가 하면, 그 더운 여름날 전두환 5개국 순방 기념 우표를 사겠다고 우체국 앞에서 날밤을 샜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표 수집 취미가 무슨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레이건 방한 기념우표, 동남아순방 기념우표는 요즘 말로 '득템'의 대상이었고 "10년만 지나면 가격이 100배가 될" 보물이었다. 하긴 지금 그 우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정도 가격이 될 것도 같다. 각설하고, 순방 기간 중 가봉에 도착하여 엄숙한 표정으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전두환의 얼굴은 곧 흙빛으로 변한다.
가봉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이 애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북한 애국가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건 장세동 안기부장이었다. 그는 달려나가 군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내리쳤다. 이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양국 관리들은 사태를 파악한 뒤 얼어붙어 버렸다. 전두환도 선불맞은 짐승처럼 흥분했다. 이때를 목격한 당시 외교관 배상길의 <내가 만난 아프리카>에 따르면 전두환은 수행원들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격노했고 가봉 방문 취소하고 돌아가자고 우겼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양국의 외교 관계는 결렬 수준이 될 것은 뻔한 일, 수행원들은 가까스로 전두환을 설득했고 가봉 봉고 대통령은 정중히 그 결례를 사과한다. 냉전 시대, 그리고 그 다음해 북한이 전두환의 목숨을 노려 아웅산에 폭탄을 설치하던 시대의 가봉의 실수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북한 선수들이 입촌식을 할 때 남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펄펄 뛰는 것을 보고 나는 옛날의 전두환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웃었다.
우리에게 '봉고차'라는 한국어 단어를 선사한 인물 오마르 봉고 대통령의 나라, 남북한의 유치하기까지 한 출혈 외교의 증인이자, 그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간직한 나라 가봉이 1960년 8월 17일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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