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19년 8월16일 피털루 학살
영국의 넬슨 제독은 영국 침공을 꿈꾸는 나폴레옹의 함대와의 결전, 즉 트라팔가 해전을 벌이기 직전, 함대의 전 수병들에게 이렇게 훈시한다. "영국은 그대들 모두가 스스로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넬슨 자신은 개선 행진에 참석하지 못하고 전사했지만 그 훈시대로 영국 해군은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여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고, 그 외에도 식민지 각처에서, 유럽 대...
1819년 8월16일 피털루 학살
영국의 넬슨 제독은 영국 침공을 꿈꾸는 나폴레옹의 함대와의 결전, 즉 트라팔가 해전을 벌이기 직전, 함대의 전 수병들에게 이렇게 훈시한다. "영국은 그대들 모두가 스스로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넬슨 자신은 개선 행진에 참석하지 못하고 전사했지만 그 훈시대로 영국 해군은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여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고, 그 외에도 식민지 각처에서, 유럽 대...
륙 곳곳에서 영국군은 나폴레옹이라는 거인의 몸 곳곳에 돋아난 종기가 되었으며, 영국인들은 나폴레옹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한다. 승리였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 원래 쓴잔은 다 함께 먹자고 언성 높이는 놈들이 단물은 몰래 끼리끼리 들이키게 마련. '스스로의 의무'를 다한 영국 민중들에게 전쟁 승리의 과실은 헤라클레스도 직접 가져오지는 못했던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처럼 머나먼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곡물법이란 놈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륙 봉쇄령 당시 곡물 수입이 여의치 않아 하늘 높이 올라갔던 곡물값이 전쟁이 끝나면서 폭락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데, 이것은 지주들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현상이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회(일정 정도의 토지 소유자만 참정권이 있었다.)는 곡물법을 제정, "소맥 1쿼터(약 12.7 kg)당 가격이 80실링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소맥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선언한다. 식량값은 당연히 두 배로 올랐다. 거기다 전쟁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대거 산업 예비군이 되어 국내로 쏟아지니 월급은 반으로 줄었다. 주급 60 실링을 받던 면직공장 반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24실링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시인이자 상원 의원이었던 바이런의 한 마디 "이제 사람의 목숨 값이 양말 짜는 기계만도 못하게 되었소!"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뛰던 바로 그 도시, 맨체스터에서 1819년 8월 16일 대규모의 집회가 열린다. 참정권 확대와 선거법 개정 등을 외치는 참여자의 수는 6만 여명, 그만큼 많은 민중들이 멘체스터의 성 베드로 광장, 영어로 Peter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집회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순서가 하나 있었다. 유명한 급진적 연설가였던 헨리 헌트가 참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람을 폭탄이라도 두른 위험 분자로 봤지만 사실 그는 의회 내의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또 다른 집회 참가자(?)들이 그를 덮친다. 베드로 광장에 한 켠에서 시위대를 굽어보고 있던 영국군 제 15 검기병대를 비롯하여 1500여명의 기병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태반은 정규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의 하수인을 동원하여 조직한 '의용 기병대'였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술까지 먹어 얼굴들이 살기와 취기로 반반씩 벌개져 있었다.
"돌격!" 1500 여 기병대가 일제히 말을 몰아 비무장의 군중들을 덮쳤다. 기병대의 태반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을 베어넘기던 역전의 제대 장병들이었다. 유럽 최고의 무력이 여자들과 아이들도 수없이 섞여 있고, 몽둥이 하나 들고 있지 않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한 것이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기병대의 공포란 훈련된 보병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비무장 민중들에랴. 최대 10만을 헤아리던 인파는 일시에 흩어졌다. 마치 1987년 7월 이한열 장례식에 몰려든 100만의 군중들이 지랄탄 몇 방에 깨끗이 없어졌던 것과 같이.
정부는 11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에서 칼을 맞은 사람은 500여명이 넘었다. 이 사건은 성 피터 (베드로) 광장과 워털루의 합성어로 '피털루 학살'이라 역사 속에서 명명된다. 워털루 용사들이 피터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벌인 학살이라 비꼬는 이름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영국 정부는 철저하게 민중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들었다. 50명 이상의 집회가 금지됐고, 모든 신문에 인지세를 증대하여 신문값을 올려 노동자들로부터 언론을 차단하려는 뻘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털루 사건은 영국 노동운동사와 근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으며, 이후 참정권 확대와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 투쟁의 기폭제가 된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영국 노동당 형성의 원류로 보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생했던 민간 용역 회사의 어처구니없고 인정사정없는 노조 진압 작전을 보면서 나는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를 떠올렸다. 용역들은 "경고"를 제멋대로 남발한 후 "선봉대 넘어!"라는 전투적 용어를 감행하며 소화기를 뿌리고 그 빈 용기를 내던지고 노동자들이 피땀흘려 만들어 놓은 부품까지도 던지면서 수십 년 동안 그 공장에 근속하던 노동자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 공권력은 그들을 방관할 뿐이었고, "사람 죽어가는 것 안보이냐?"는 말에 "지시가 없었다."고 먼산만 바라봤다.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는 술이라도 퍼먹고 이성을 잃었지만 짭짤한 아르바이트비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대학생들이 주였다는 용역들은 어쩌면 그들과 같은 처지일 노동자들에게 의용 기병대처럼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베드로 광장이 깨끗이 비워졌듯 공장은 용역의 손에 넘어갔다. 이 소식에 분기가 채 풀리지 않는데 또 하나의 희한한 소식이 어이를 또 한 번 빼앗는다. 삼성 특검의 책임자였던 조준웅 특검의 아들이 삼성에 과장으로 특채됐단다. 그 경력은 사법고시 공부와 중국 유학. 우리에게는 피털루가 여러 번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 원래 쓴잔은 다 함께 먹자고 언성 높이는 놈들이 단물은 몰래 끼리끼리 들이키게 마련. '스스로의 의무'를 다한 영국 민중들에게 전쟁 승리의 과실은 헤라클레스도 직접 가져오지는 못했던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처럼 머나먼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곡물법이란 놈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륙 봉쇄령 당시 곡물 수입이 여의치 않아 하늘 높이 올라갔던 곡물값이 전쟁이 끝나면서 폭락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는데, 이것은 지주들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는 현상이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회(일정 정도의 토지 소유자만 참정권이 있었다.)는 곡물법을 제정, "소맥 1쿼터(약 12.7 kg)당 가격이 80실링이 될 때까지는 외국산 소맥의 수입을 금지한다."고 선언한다. 식량값은 당연히 두 배로 올랐다. 거기다 전쟁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대거 산업 예비군이 되어 국내로 쏟아지니 월급은 반으로 줄었다. 주급 60 실링을 받던 면직공장 반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24실링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시인이자 상원 의원이었던 바이런의 한 마디 "이제 사람의 목숨 값이 양말 짜는 기계만도 못하게 되었소!"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뛰던 바로 그 도시, 맨체스터에서 1819년 8월 16일 대규모의 집회가 열린다. 참정권 확대와 선거법 개정 등을 외치는 참여자의 수는 6만 여명, 그만큼 많은 민중들이 멘체스터의 성 베드로 광장, 영어로 Peter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 집회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순서가 하나 있었다. 유명한 급진적 연설가였던 헨리 헌트가 참석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람을 폭탄이라도 두른 위험 분자로 봤지만 사실 그는 의회 내의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또 다른 집회 참가자(?)들이 그를 덮친다. 베드로 광장에 한 켠에서 시위대를 굽어보고 있던 영국군 제 15 검기병대를 비롯하여 1500여명의 기병대가 그들이었다. 그들 중 태반은 정규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의 하수인을 동원하여 조직한 '의용 기병대'였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술까지 먹어 얼굴들이 살기와 취기로 반반씩 벌개져 있었다.
"돌격!" 1500 여 기병대가 일제히 말을 몰아 비무장의 군중들을 덮쳤다. 기병대의 태반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을 베어넘기던 역전의 제대 장병들이었다. 유럽 최고의 무력이 여자들과 아이들도 수없이 섞여 있고, 몽둥이 하나 들고 있지 않은 군중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한 것이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기병대의 공포란 훈련된 보병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비무장 민중들에랴. 최대 10만을 헤아리던 인파는 일시에 흩어졌다. 마치 1987년 7월 이한열 장례식에 몰려든 100만의 군중들이 지랄탄 몇 방에 깨끗이 없어졌던 것과 같이.
정부는 11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에서 칼을 맞은 사람은 500여명이 넘었다. 이 사건은 성 피터 (베드로) 광장과 워털루의 합성어로 '피털루 학살'이라 역사 속에서 명명된다. 워털루 용사들이 피터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벌인 학살이라 비꼬는 이름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영국 정부는 철저하게 민중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려 들었다. 50명 이상의 집회가 금지됐고, 모든 신문에 인지세를 증대하여 신문값을 올려 노동자들로부터 언론을 차단하려는 뻘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털루 사건은 영국 노동운동사와 근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남으며, 이후 참정권 확대와 노동자들의 권리 확보 투쟁의 기폭제가 된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영국 노동당 형성의 원류로 보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생했던 민간 용역 회사의 어처구니없고 인정사정없는 노조 진압 작전을 보면서 나는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를 떠올렸다. 용역들은 "경고"를 제멋대로 남발한 후 "선봉대 넘어!"라는 전투적 용어를 감행하며 소화기를 뿌리고 그 빈 용기를 내던지고 노동자들이 피땀흘려 만들어 놓은 부품까지도 던지면서 수십 년 동안 그 공장에 근속하던 노동자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다. 공권력은 그들을 방관할 뿐이었고, "사람 죽어가는 것 안보이냐?"는 말에 "지시가 없었다."고 먼산만 바라봤다. 피털루의 의용 기병대는 술이라도 퍼먹고 이성을 잃었지만 짭짤한 아르바이트비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대학생들이 주였다는 용역들은 어쩌면 그들과 같은 처지일 노동자들에게 의용 기병대처럼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베드로 광장이 깨끗이 비워졌듯 공장은 용역의 손에 넘어갔다. 이 소식에 분기가 채 풀리지 않는데 또 하나의 희한한 소식이 어이를 또 한 번 빼앗는다. 삼성 특검의 책임자였던 조준웅 특검의 아들이 삼성에 과장으로 특채됐단다. 그 경력은 사법고시 공부와 중국 유학. 우리에게는 피털루가 여러 번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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