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0년 7월 25일 저승사자 나주부대
6.25가 터진 뒤 한 달여, 전황은 인민군의 완연한 강세였다.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은 물론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도 오산에서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쫓겨갔고 미 정규 24사단은 7월 21일 벌어진 대전 전투에서 참패하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행방불명됐다. 물론 호랑이가 수염을 그을린 정도의 타격이긴 했지만 미군으로서도 뼈아픈 일이었고 인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러도 여러 번 찌를 정도 드높았다. 그때 국군은 소백산맥 이남 경상도 지역으로 후퇴하며 전력을 수습했다. 그 결과 호남 지역은 무인지경으로 남았다.
원래 호남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은 서울 방어전에 무턱대고 투입됐다가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으니 호남 지역을 지킬 대한민국의 무력은 경찰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호남 지역에 투입된 인민군은 중국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역전의 조선족들이 주축을 이룬 6사단이었다. 사단장 방호산 역시 팔로군 출신의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가뜩이나 변변찮은 방어망이 사라진 호남 지역을 사람 없는 들을 가듯 휩쓸어 버렸다. 이들이 너무나 빨리 진주 방면에 나타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미군 지휘부가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된 미군들을 득달같이 이동시키는 난리를 치르기도 했다.
호랑이가 없으면 승냥이가 왕이라고, 군대가 없는 호남 지역이라고 해서 저항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그 주축은 좌익과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던 국립 경찰들이었다. 장비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된 전투는 치르지 못했지만 경찰들은 인민군에 맞서는 한편으로 내부적으로 또 하나의 '더러운 전쟁'을 수행한다. 보도연맹원을 비롯 좌익 혐의자들을 모아 놓고 싹쓸이를 해 버린 것이다. 전라도 남해안 곳곳에서, 철수하는 경찰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진동을 했고 피비린내 또한 바다 내음을 덮었다. 진도 갈매기섬에 버려진 보도연맹원들의 시신은 갈매기들이 뜯어먹고 있었고, 해남 지역의 보도연맹원들도 일찌감치 7월 16일께에 소멸됐고 해남의 경찰과 유지들은 7월 24일께에 배를 타고 소리도 없이 내빼 버렸다. 해남은 일종의 공백 상태가 됐다. 해남 군청에도 누가 걸었는지 모를 인공기가 내걸렸다.
그때 주정뱅이로 유명했던 대장장이 김행해가 해남 경찰서에 들어가서는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서장 행세를 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이 김행해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확증된 사실은 아님)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를 인민군에게 온 전화로 착각하고 "인민군들은 해남에 무혈 입성허시요잉!"이라고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 전화를 건 이들은 '나주 부대'였다. 나주경찰서 경찰들로 구성된 약 100여 명의 부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인민군과 영광에서 전투를 치러 패한 후 강진, 해남 등으로 퇴로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김행해의 전화가 왔다면 아마도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시퍼런데 이 뽈갱이 자석덜이."
1950년 7월 25일 나주부대는 해남에 진입한다. 땅끝 고장 해남에서 나주부대는 그야말로 끝장을 보는 대학살의 무대를 열어젖힌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던 나주부대는 가공할 연극 (또는 작전)을 실행한다. 해남읍 마산면 주민들은 해남읍에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읍내에서 트럭 한 대가 마산으로 왔다. 트럭에는 낯선 군복, 즉 인민군 복장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총을 들고 살기등등한 인민군(?) 앞에서 주민들은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군 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소리를 들으며 트럭 위의 인민군은 기관총에 총알을 쟀고 만세 부르는 얼굴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숱한 사람들이 죽었다.
경찰 과거사위원회는 이들이 '자구책'으로 인민군복을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후퇴하여 포구에서 배를 탈 사람들이 무슨 자구책을 써서 마을 주민들 앞에 인민군복을 입고 나타났는지를 설득력있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적극적인 연극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민군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었고 간 보기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주부대가 "인민군 환영대회"까지 열어놓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죽여 버리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인민군으로 위장했던 이경영이 심혜진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적군으로 위장해서 자국의 국민들을 시험하고 그 시험에 든 이들을 학살해 버린 나주부대 사건은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만 발생 가능한 상황이면서 동시에 가장 교활하고 잔학한 형태의 국가적 폭력의 한 단면이었다.
1950년 7월 25일 저승사자 나주부대
6.25가 터진 뒤 한 달여, 전황은 인민군의 완연한 강세였다.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은 물론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도 오산에서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쫓겨갔고 미 정규 24사단은 7월 21일 벌어진 대전 전투에서 참패하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행방불명됐다. 물론 호랑이가 수염을 그을린 정도의 타격이긴 했지만 미군으로서도 뼈아픈 일이었고 인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러도 여러 번 찌를 정도 드높았다. 그때 국군은 소백산맥 이남 경상도 지역으로 후퇴하며 전력을 수습했다. 그 결과 호남 지역은 무인지경으로 남았다.
원래 호남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은 서울 방어전에 무턱대고 투입됐다가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으니 호남 지역을 지킬 대한민국의 무력은 경찰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호남 지역에 투입된 인민군은 중국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역전의 조선족들이 주축을 이룬 6사단이었다. 사단장 방호산 역시 팔로군 출신의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가뜩이나 변변찮은 방어망이 사라진 호남 지역을 사람 없는 들을 가듯 휩쓸어 버렸다. 이들이 너무나 빨리 진주 방면에 나타나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미군 지휘부가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된 미군들을 득달같이 이동시키는 난리를 치르기도 했다.
호랑이가 없으면 승냥이가 왕이라고, 군대가 없는 호남 지역이라고 해서 저항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그 주축은 좌익과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던 국립 경찰들이었다. 장비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된 전투는 치르지 못했지만 경찰들은 인민군에 맞서는 한편으로 내부적으로 또 하나의 '더러운 전쟁'을 수행한다. 보도연맹원을 비롯 좌익 혐의자들을 모아 놓고 싹쓸이를 해 버린 것이다. 전라도 남해안 곳곳에서, 철수하는 경찰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진동을 했고 피비린내 또한 바다 내음을 덮었다. 진도 갈매기섬에 버려진 보도연맹원들의 시신은 갈매기들이 뜯어먹고 있었고, 해남 지역의 보도연맹원들도 일찌감치 7월 16일께에 소멸됐고 해남의 경찰과 유지들은 7월 24일께에 배를 타고 소리도 없이 내빼 버렸다. 해남은 일종의 공백 상태가 됐다. 해남 군청에도 누가 걸었는지 모를 인공기가 내걸렸다.
그때 주정뱅이로 유명했던 대장장이 김행해가 해남 경찰서에 들어가서는 일본도를 휘두르면서 서장 행세를 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이 김행해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확증된 사실은 아님)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를 인민군에게 온 전화로 착각하고 "인민군들은 해남에 무혈 입성허시요잉!"이라고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 전화를 건 이들은 '나주 부대'였다. 나주경찰서 경찰들로 구성된 약 100여 명의 부대였던 것이다. 이들은 인민군과 영광에서 전투를 치러 패한 후 강진, 해남 등으로 퇴로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김행해의 전화가 왔다면 아마도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을 것이다. "우리가 눈이 시퍼런데 이 뽈갱이 자석덜이."
1950년 7월 25일 나주부대는 해남에 진입한다. 땅끝 고장 해남에서 나주부대는 그야말로 끝장을 보는 대학살의 무대를 열어젖힌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던 나주부대는 가공할 연극 (또는 작전)을 실행한다. 해남읍 마산면 주민들은 해남읍에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읍내에서 트럭 한 대가 마산으로 왔다. 트럭에는 낯선 군복, 즉 인민군 복장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총을 들고 살기등등한 인민군(?) 앞에서 주민들은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군 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소리를 들으며 트럭 위의 인민군은 기관총에 총알을 쟀고 만세 부르는 얼굴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숱한 사람들이 죽었다.
경찰 과거사위원회는 이들이 '자구책'으로 인민군복을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후퇴하여 포구에서 배를 탈 사람들이 무슨 자구책을 써서 마을 주민들 앞에 인민군복을 입고 나타났는지를 설득력있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적극적인 연극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인민군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었고 간 보기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주부대가 "인민군 환영대회"까지 열어놓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죽여 버리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인민군으로 위장했던 이경영이 심혜진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적군으로 위장해서 자국의 국민들을 시험하고 그 시험에 든 이들을 학살해 버린 나주부대 사건은 동족상잔의 비극에서만 발생 가능한 상황이면서 동시에 가장 교활하고 잔학한 형태의 국가적 폭력의 한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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