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8년 7월 22일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아버지 과레스끼 사망
고등학교 3학년 때쯤, 무슨 일로 집을 방문했던 대학생 형이 책 한 권을 두고 갔다. 제목은 <돈 까밀로와 뻬뽀네> 훗날 장관이 된 김명곤씨의 번역으로 기억하는 그 책을 처음에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다. 이름도 뭔가 어려워 보이는데다가 작가의 이름은 더 희한하게 꽈배기를 꼬고 있었다. 죠반니노 과레스끼. 그러던 어느 날 공부가 안되어 농땡이를 치던 차에 그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원체 잠이 많아 1시가 되면 무조건 이불 덮어 코를 골던 내가 무려 새벽 4시까지 책을 독파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아껴둔 용돈을 아낌없이 털어 '돈 까밀로' 시리즈를 사들였다. 2006년 총 10권으로 완간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건 5권이다. 나에게 그 한 권 한 권은 내 보잘것없는 서가의 보물들이다.
과레스끼는 우리 정치 지형을 빗대어 보면 철저한 우익에 속한다. 정치 풍자를 하면서 뭇솔리니를 비판했지만 결국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까지 가서 싸우다가 포로가 됐고 전후에는 왕당파였고, 국왕이 쫓겨난 뒤에는 기독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쓴 이야기 속에서는 사뭇 다르다. 이탈리아 포강 유역의 바싸라는 마을에서 사목하는 주먹 센 신부 돈 까밀로와 일자무식의 읍장으로서 공산주의자인 뻬뽀네는 서로 치고받고 때로는 험악하게 총탄도 주고받지만 마지막 선은 넘지 않으며 마을을 이끌어나간다. 기관총까지 숨기고 사는 돈 까밀로를 제지하고 돈 까밀로의 분노를 자제시키는 것은 성당에 걸려 있는 예수상이다. 예수는 돈 까밀로를 제어하고 또 설득하며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했던 것은 그 어설픈 조화 속에 인간애가 드러날 때였다. 이탈리아 현대사 역시 좌우의 격렬한 충돌과 복수가 일상처럼 할퀴고 지나간 역사다. 하지만 과레스끼는 그 책 속에서 그 날선 대결의 만두피 속에 웃음과 눈물, 그리고 휴머니즘의 속을 다져 만들어 놓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선거가 벌어지고 좌우익은 목숨을 건 표 대결을 펼친다. 기독교민주당이 참패를 당하고 공산당이 승리하는 초반 개표 결과가 전해지자 읍장 빼뽀네 일당은 환호를 내지르며 반동에 대한 척결을 다짐한다. 그런데 정전이 된다. 그러자 뻬뽀네는 부하들에게 짐짓 거짓말을 한 뒤 돈 까밀로에게로 달려간다. "당장 피하시오! 세상이 바뀌었소!" 돈 까밀로는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뻬뽀네는 애가 탄다. 그런데 누군가 또 뛰어오는 기척이 있어 뻬뽀네는 황급히 몸을 숨긴다. 공산당 간부가 기독교 신부를 피신시키려 달려온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달려온 것은 역시 뻬뽀네의 부하인 공산당원이었다. "신부님 어서 몸을 피하시오."
이윽고 빼뽀네가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주요 공산당원들이 전부 성당으로 달려 왔고 돈 까밀로에게 피신하라고 외치다가 누가 또 오는 소리가 들리자 잽싸게 숨었다가 결국은 다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돈 까밀로에게 말한다. 피신하라고. 돈 까밀로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 자네들이 여기에 다 와 준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라네. 내거 어딜 가겠나." 말을 안들어먹는 이 반동노무 신부, 오늘 날이 밝으면 인민의 적으로 처단당할지도 모르는 이 신부를 피신시키기 위해 공산당원들은 머리를 맞댄다. "수레에다 묶어서 마을 밖으로 내보내자고,." 막 공산당원들이 신부를 덮치려는 찰나 나갔던 불이 들어오고 선거 방송이 재개된다. 선거 개표는 역전! 기독교민주당이 공산당을 크게 누르고 있었다. 혁명의 깃발은 어이없이 떨어졌고, 공산당원들을 일거에 풀이 죽는다. 돈 까밀로가 이죽거리자 빼뽀네 일당은 다시 반동 신부!라고 으르렁거리지만 이미 그들은 적일 수가 없었다.
돈 까밀로가 공산당원들을 두들겨 패자 빼뽀네는 주교에게 탄원하여 돈 까밀로를 전근시킨다. 그런데 막상 돈 까밀로가 없어지자 뻬뽀네 일당은 물론 마을 사람들 전체가 일종의 공허감에 시달린다. 막상 자기가 불러온 새 신부에게 딴지를 부리던 뻬뽀네는 다시 주교에게 가서 선언한다. "전임 신부가 돌아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막상 돈 까밀로가 재림하시자 뻬뽀네는 악을 쓴다. "누가 당신을 돌아오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놈에게 벼락이라도 쳤으면 좋겠소!" 그렇게 그들은 한 테두리에서 서로에 대해 적의를 숨기지 않지만 신뢰를 잃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그 신뢰가 절정에 달하는 에피소드는 역시 포 강의 홍수다. 장대비가 며칠째 쏟아지는 마을의 강둑이 위기에 처했다. 강둑이 무너지면 바로 온 마을의 생명과 재산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때 돈 까밀로가 나선다. "침착하시오 강둑은 무너지지 않소. 내가 그 위에 앉아 있겠소." 그러자 사사건건 이 반동노무 신부와 대립하는 읍장 뻬뽀네도 나선다. "돈 까밀로.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소." 강둑에 앉은 꼴통 신부와 열혈 공산주의자. 하느님과 혁명 열사들이 공동으로 보위한 탓인지 마을 사람들이 피신할 때까지 강둑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쩌면 과레스끼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을 창조하고, 가능하지 않은 정경을 그려냈기에 오히려 동감을 샀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포강의 에피소드가 소개된 이후 전 세계에서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로 지정된 수해 물자가 몰려들었다니 그건 나만의 감회가 아닐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책의 주인공 중의 하나인 예수다. 그는 돈 까밀로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존재이지만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돈 까밀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신부가 있다면 굵은 양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쳐도 좋다. 또 뻬뽀네 때문에 기분이 잡친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몽둥이로 내 등짝을 후려쳐도 좋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은 내 양심의 소리이기 때문이다."는 과레스끼의 말에 비추어 볼 때 그 예수는 과레스끼 자신이었고, 그의 꿈이었고, 그 간절한 소망이었다. "돈 까밀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단다."고 호소하며 무신론자들의 횡포에 무력으로 맞서려는 까밀로를 "내가 폭력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며 뜯어말리며, "누군가 자신의 삶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내게 대한 믿음을 가진 것이니라."면서 넓은 팔을 벌리던 예수는 실상 과레스끼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고, 동시에 과레스끼 스스로에게 내리던 충고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까밀로와 뻬뽀네 그 사랑스런, 그러나 현실에선 참으로 구현되기 어려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들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은연중에 설파했던 이 이탈리아 우익에게 나는 경의를 표한다. 1968년 7월 22일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일어났던 1968년의 한복판에서 조반니노 과레스끼가 죽었다.See More
1968년 7월 22일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아버지 과레스끼 사망
고등학교 3학년 때쯤, 무슨 일로 집을 방문했던 대학생 형이 책 한 권을 두고 갔다. 제목은 <돈 까밀로와 뻬뽀네> 훗날 장관이 된 김명곤씨의 번역으로 기억하는 그 책을 처음에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다. 이름도 뭔가 어려워 보이는데다가 작가의 이름은 더 희한하게 꽈배기를 꼬고 있었다. 죠반니노 과레스끼. 그러던 어느 날 공부가 안되어 농땡이를 치던 차에 그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원체 잠이 많아 1시가 되면 무조건 이불 덮어 코를 골던 내가 무려 새벽 4시까지 책을 독파하는 괴력을 발휘하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아껴둔 용돈을 아낌없이 털어 '돈 까밀로' 시리즈를 사들였다. 2006년 총 10권으로 완간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건 5권이다. 나에게 그 한 권 한 권은 내 보잘것없는 서가의 보물들이다.
과레스끼는 우리 정치 지형을 빗대어 보면 철저한 우익에 속한다. 정치 풍자를 하면서 뭇솔리니를 비판했지만 결국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에 입대하여 동부전선까지 가서 싸우다가 포로가 됐고 전후에는 왕당파였고, 국왕이 쫓겨난 뒤에는 기독교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쓴 이야기 속에서는 사뭇 다르다. 이탈리아 포강 유역의 바싸라는 마을에서 사목하는 주먹 센 신부 돈 까밀로와 일자무식의 읍장으로서 공산주의자인 뻬뽀네는 서로 치고받고 때로는 험악하게 총탄도 주고받지만 마지막 선은 넘지 않으며 마을을 이끌어나간다. 기관총까지 숨기고 사는 돈 까밀로를 제지하고 돈 까밀로의 분노를 자제시키는 것은 성당에 걸려 있는 예수상이다. 예수는 돈 까밀로를 제어하고 또 설득하며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했던 것은 그 어설픈 조화 속에 인간애가 드러날 때였다. 이탈리아 현대사 역시 좌우의 격렬한 충돌과 복수가 일상처럼 할퀴고 지나간 역사다. 하지만 과레스끼는 그 책 속에서 그 날선 대결의 만두피 속에 웃음과 눈물, 그리고 휴머니즘의 속을 다져 만들어 놓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선거가 벌어지고 좌우익은 목숨을 건 표 대결을 펼친다. 기독교민주당이 참패를 당하고 공산당이 승리하는 초반 개표 결과가 전해지자 읍장 빼뽀네 일당은 환호를 내지르며 반동에 대한 척결을 다짐한다. 그런데 정전이 된다. 그러자 뻬뽀네는 부하들에게 짐짓 거짓말을 한 뒤 돈 까밀로에게로 달려간다. "당장 피하시오! 세상이 바뀌었소!" 돈 까밀로는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뻬뽀네는 애가 탄다. 그런데 누군가 또 뛰어오는 기척이 있어 뻬뽀네는 황급히 몸을 숨긴다. 공산당 간부가 기독교 신부를 피신시키려 달려온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달려온 것은 역시 뻬뽀네의 부하인 공산당원이었다. "신부님 어서 몸을 피하시오."
이윽고 빼뽀네가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주요 공산당원들이 전부 성당으로 달려 왔고 돈 까밀로에게 피신하라고 외치다가 누가 또 오는 소리가 들리자 잽싸게 숨었다가 결국은 다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돈 까밀로에게 말한다. 피신하라고. 돈 까밀로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 자네들이 여기에 다 와 준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라네. 내거 어딜 가겠나." 말을 안들어먹는 이 반동노무 신부, 오늘 날이 밝으면 인민의 적으로 처단당할지도 모르는 이 신부를 피신시키기 위해 공산당원들은 머리를 맞댄다. "수레에다 묶어서 마을 밖으로 내보내자고,." 막 공산당원들이 신부를 덮치려는 찰나 나갔던 불이 들어오고 선거 방송이 재개된다. 선거 개표는 역전! 기독교민주당이 공산당을 크게 누르고 있었다. 혁명의 깃발은 어이없이 떨어졌고, 공산당원들을 일거에 풀이 죽는다. 돈 까밀로가 이죽거리자 빼뽀네 일당은 다시 반동 신부!라고 으르렁거리지만 이미 그들은 적일 수가 없었다.
돈 까밀로가 공산당원들을 두들겨 패자 빼뽀네는 주교에게 탄원하여 돈 까밀로를 전근시킨다. 그런데 막상 돈 까밀로가 없어지자 뻬뽀네 일당은 물론 마을 사람들 전체가 일종의 공허감에 시달린다. 막상 자기가 불러온 새 신부에게 딴지를 부리던 뻬뽀네는 다시 주교에게 가서 선언한다. "전임 신부가 돌아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막상 돈 까밀로가 재림하시자 뻬뽀네는 악을 쓴다. "누가 당신을 돌아오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놈에게 벼락이라도 쳤으면 좋겠소!" 그렇게 그들은 한 테두리에서 서로에 대해 적의를 숨기지 않지만 신뢰를 잃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그 신뢰가 절정에 달하는 에피소드는 역시 포 강의 홍수다. 장대비가 며칠째 쏟아지는 마을의 강둑이 위기에 처했다. 강둑이 무너지면 바로 온 마을의 생명과 재산이 날아갈 판이었다. 그때 돈 까밀로가 나선다. "침착하시오 강둑은 무너지지 않소. 내가 그 위에 앉아 있겠소." 그러자 사사건건 이 반동노무 신부와 대립하는 읍장 뻬뽀네도 나선다. "돈 까밀로.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소." 강둑에 앉은 꼴통 신부와 열혈 공산주의자. 하느님과 혁명 열사들이 공동으로 보위한 탓인지 마을 사람들이 피신할 때까지 강둑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쩌면 과레스끼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을 창조하고, 가능하지 않은 정경을 그려냈기에 오히려 동감을 샀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포강의 에피소드가 소개된 이후 전 세계에서 "돈 까밀로와 뻬뽀네의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로 지정된 수해 물자가 몰려들었다니 그건 나만의 감회가 아닐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책의 주인공 중의 하나인 예수다. 그는 돈 까밀로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존재이지만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돈 까밀로 때문에 마음이 상한 신부가 있다면 굵은 양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쳐도 좋다. 또 뻬뽀네 때문에 기분이 잡친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몽둥이로 내 등짝을 후려쳐도 좋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은 내 양심의 소리이기 때문이다."는 과레스끼의 말에 비추어 볼 때 그 예수는 과레스끼 자신이었고, 그의 꿈이었고, 그 간절한 소망이었다. "돈 까밀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단다."고 호소하며 무신론자들의 횡포에 무력으로 맞서려는 까밀로를 "내가 폭력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며 뜯어말리며, "누군가 자신의 삶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내게 대한 믿음을 가진 것이니라."면서 넓은 팔을 벌리던 예수는 실상 과레스끼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고, 동시에 과레스끼 스스로에게 내리던 충고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까밀로와 뻬뽀네 그 사랑스런, 그러나 현실에선 참으로 구현되기 어려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들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은연중에 설파했던 이 이탈리아 우익에게 나는 경의를 표한다. 1968년 7월 22일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일어났던 1968년의 한복판에서 조반니노 과레스끼가 죽었다.See More
tag : 산하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