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4일 티토, 부러운 이름의 최후
남북을 다 합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면적은 22만 제곱
킬로미터다. 그리고 그 가운데 70 퍼센트가 산지다. 이 조건과 가장 비슷한 나라를 꼽으라면 지금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진 한 나라를 들 수 있겠다. 그건 유고슬라비아다. 왕년의 유고슬라비아의 넓이는 25만 제곱 킬로미터에 역시 70퍼센트는 산악 지대였다. 국토의 조건은 비슷한지 모르나 그 안의 내용물(?) 즉, 국민들의 구성은 180도 달랐다. 비록 일본과 여진, 몽골, 거란, 위구르 피까지 섞였을망정 어쨌든 단일 언어와 문화를 지닌 단일민족이 살아가던 한반도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그야말로 삼선짬뽕같은 나라였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정교를 믿는 슬라브족의 나라 세르비아, 한때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자를 말해 주는 보스니아에다가 알바니아인들도 적잖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선 나라가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나라를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를 들어보자. ”1개의 연방, 2개의 문자(라틴/키릴), 3개의 종교(가톨릭/정교회/이슬람), 4개의 언어(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5개의 민족(4+보스니아), 6개의 공화국(5+몬테네그로), 7개의 접경국"
우리와 유고슬라비아와는 몇 개의 공통점이 더 있다. 외국의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으며 또 그 와중에 내부 구성원들끼리 처참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이 침략했을 때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도들은 그에 붙은 민병대 우스타시를 창설했고 이 우스타시는 독일 나찌군들도 경악할 잔인함을 발휘하며 유태인과 나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을 학살했다. 우스타시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그 집무실 책상에 학살된 자들의 눈알 20킬로그램을 상시 두고 다녔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니 알쪼다.
그에 맞선 좌익 빨치산들도 점차 세력을 키웠으니 그 대표가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티토는 그의 많은 가명 중의 하나였다. 스탈린조차 죽을 때까지 그를 ‘발터’라는 가명으로 기억하고 불렀거니와 그 때문에 그는 한때 김일성이 받았던 오해를 받는다. “저 티토가 그 티토 맞아? 아닌 거 같은데?”
그는 강철같은 의지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빨치산을 이끌었고, 나찌와 우스타시, 그리고 독일에 저항하는 목표는 같으나 좌익에 더 적대적이었던 우익 빨치산 체트닉 모두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를 탐탁지 않아 했던 미국과 영국의 일치된 지원을 받을 만큼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티토는 자신의 조국을 자신의 무력으로 해방한 몇 안되는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물론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한때 충성했다.
가장 문제 많은 지도자가 다스리던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받았던 것은 일종의 비극이기까지 하다. 독일 공산당은 “나찌당이 집권하면 서방 세계를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이 여유있게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는 스탈린의 한 마디에 나찌에 대한 저항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내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이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며 대장정을 벌이고 장개석 군과 맞서는 동안 소련은 요지부동으로 장개석 정부를 지지했다. 또 소련의 지시 한 마디에 만리타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원수로 갈려 죽고 죽이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건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었다.
티토 자신도 그랬다.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 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당시의 공산주의자 태반이 그랬다. 그 절대적인 믿음 위에서 스탈린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매달아 죽이고 쏘아죽였으며 그 시산혈해 위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그 피비린내가 자신의 코를 찔러도, 그 참극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그 교조,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과 추앙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점에서 티토는 달랐다.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킨 티토는 외국 군대의 유고슬라비아 진주를 막아 냈고, 사회주의 조국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련 체제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짖고 있던 김일성보다 앞선 ‘주체사상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는 속이 얕고도 강퍅했다. 자신의 입 안의 혀같이 놀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혓바늘처럼 골치 아픈 존재로 취급했고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공산주의자 지도자 티토의 나라를 코민포름에서 축출했을 뿐 아니라 티토를 개인적으로 죽이려고 암살단까지 파견했다. 이에 티토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 “"나를 죽이라고 사람을 자꾸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이나 붙잡았는데...... 중지하지 않으면 나도 모스크바에 한 사람 보낼 거요. 나는 딱 한 사람만 보낼 거요. 더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는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등의 천조각들을 유고슬라비아라는 그럴 듯한 식탁보로 짜낸 정치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가 그때껏 자신을 지탱해 왔고, 믿어 왔으며, ‘복음’으로 여겼던 대상에 대하여 반항할 수 있었던 데에서 인간 티토의 탁월함을 본다. 앞의 두 일에 비해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죽어간 이들은 사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지켜온 ‘교조’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고, 그 교조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이익과 독립을 지킨 예는 오히려 많지 않은 것이다. 1980년 5월 4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티토는 그 일을 했다.
교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티토가 있었듯 단파방송을 들으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한민전의 기치를 높이 올려라 조국의 해방이 동터오른다” 가사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 떨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인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고, 지금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쏘아올리기에 돈을 때려붓고 있는 왕정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그 교조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하시오. 이건 주석님의 뜻이 아니잖소?”라고 묻지 못하고 미련하게 상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대견한 일로 아는 치들이라면, 현실에 눈 감은 채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우리의 공적은 과오보다 크다.”운운하는 이들은 티토에게 다음과 같은 욕설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쓰레기들”
남북을 다 합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면적은 22만 제곱
킬로미터다. 그리고 그 가운데 70 퍼센트가 산지다. 이 조건과 가장 비슷한 나라를 꼽으라면 지금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진 한 나라를 들 수 있겠다. 그건 유고슬라비아다. 왕년의 유고슬라비아의 넓이는 25만 제곱 킬로미터에 역시 70퍼센트는 산악 지대였다. 국토의 조건은 비슷한지 모르나 그 안의 내용물(?) 즉, 국민들의 구성은 180도 달랐다. 비록 일본과 여진, 몽골, 거란, 위구르 피까지 섞였을망정 어쨌든 단일 언어와 문화를 지닌 단일민족이 살아가던 한반도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그야말로 삼선짬뽕같은 나라였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정교를 믿는 슬라브족의 나라 세르비아, 한때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자를 말해 주는 보스니아에다가 알바니아인들도 적잖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선 나라가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나라를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를 들어보자. ”1개의 연방, 2개의 문자(라틴/키릴), 3개의 종교(가톨릭/정교회/이슬람), 4개의 언어(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5개의 민족(4+보스니아), 6개의 공화국(5+몬테네그로), 7개의 접경국"
우리와 유고슬라비아와는 몇 개의 공통점이 더 있다. 외국의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으며 또 그 와중에 내부 구성원들끼리 처참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이 침략했을 때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도들은 그에 붙은 민병대 우스타시를 창설했고 이 우스타시는 독일 나찌군들도 경악할 잔인함을 발휘하며 유태인과 나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을 학살했다. 우스타시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그 집무실 책상에 학살된 자들의 눈알 20킬로그램을 상시 두고 다녔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니 알쪼다.
그에 맞선 좌익 빨치산들도 점차 세력을 키웠으니 그 대표가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티토는 그의 많은 가명 중의 하나였다. 스탈린조차 죽을 때까지 그를 ‘발터’라는 가명으로 기억하고 불렀거니와 그 때문에 그는 한때 김일성이 받았던 오해를 받는다. “저 티토가 그 티토 맞아? 아닌 거 같은데?”
그는 강철같은 의지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빨치산을 이끌었고, 나찌와 우스타시, 그리고 독일에 저항하는 목표는 같으나 좌익에 더 적대적이었던 우익 빨치산 체트닉 모두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를 탐탁지 않아 했던 미국과 영국의 일치된 지원을 받을 만큼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티토는 자신의 조국을 자신의 무력으로 해방한 몇 안되는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물론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한때 충성했다.
가장 문제 많은 지도자가 다스리던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받았던 것은 일종의 비극이기까지 하다. 독일 공산당은 “나찌당이 집권하면 서방 세계를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이 여유있게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는 스탈린의 한 마디에 나찌에 대한 저항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내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이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며 대장정을 벌이고 장개석 군과 맞서는 동안 소련은 요지부동으로 장개석 정부를 지지했다. 또 소련의 지시 한 마디에 만리타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원수로 갈려 죽고 죽이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건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었다.
티토 자신도 그랬다.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 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당시의 공산주의자 태반이 그랬다. 그 절대적인 믿음 위에서 스탈린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매달아 죽이고 쏘아죽였으며 그 시산혈해 위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그 피비린내가 자신의 코를 찔러도, 그 참극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그 교조,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과 추앙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점에서 티토는 달랐다.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킨 티토는 외국 군대의 유고슬라비아 진주를 막아 냈고, 사회주의 조국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련 체제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짖고 있던 김일성보다 앞선 ‘주체사상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는 속이 얕고도 강퍅했다. 자신의 입 안의 혀같이 놀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혓바늘처럼 골치 아픈 존재로 취급했고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공산주의자 지도자 티토의 나라를 코민포름에서 축출했을 뿐 아니라 티토를 개인적으로 죽이려고 암살단까지 파견했다. 이에 티토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 “"나를 죽이라고 사람을 자꾸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이나 붙잡았는데...... 중지하지 않으면 나도 모스크바에 한 사람 보낼 거요. 나는 딱 한 사람만 보낼 거요. 더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는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등의 천조각들을 유고슬라비아라는 그럴 듯한 식탁보로 짜낸 정치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가 그때껏 자신을 지탱해 왔고, 믿어 왔으며, ‘복음’으로 여겼던 대상에 대하여 반항할 수 있었던 데에서 인간 티토의 탁월함을 본다. 앞의 두 일에 비해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죽어간 이들은 사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지켜온 ‘교조’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고, 그 교조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이익과 독립을 지킨 예는 오히려 많지 않은 것이다. 1980년 5월 4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티토는 그 일을 했다.
교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티토가 있었듯 단파방송을 들으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한민전의 기치를 높이 올려라 조국의 해방이 동터오른다” 가사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 떨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인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고, 지금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쏘아올리기에 돈을 때려붓고 있는 왕정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그 교조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하시오. 이건 주석님의 뜻이 아니잖소?”라고 묻지 못하고 미련하게 상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대견한 일로 아는 치들이라면, 현실에 눈 감은 채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우리의 공적은 과오보다 크다.”운운하는 이들은 티토에게 다음과 같은 욕설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쓰레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