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3일 해방구(?) 인천의 사람들 1985년 2.12 총선은 정국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관제야당으로 불리우던 민한당은 새롭게 부상한 신민당이라는 블랙홀에 허무하게 빠져들어갔다. 신민당은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맞먹을만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그들은 2.12 총선 1주기를 맞아 71년 이래 대한민국 국민의 숙원 중 하나였다 할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 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의한다. 부산에서 이 행사가 열렸던 것은 서면의 대한극장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지닌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추정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은 적어도 그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대중의 육성 연설이 쩌렁쩌렁 스피커를 울렸고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박수가 터져 나왔었으니까.
개최 주체는 당연히 신민당이었지만 그 판에 뛰어든 것은 신민당원 뿐이 아니었다.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가 된 학생들, 재야 단체 등 당시 전두환에 맞서 싸우던 거의 모든 세력이 개헌촉구 대회의 주력을 이뤘다. 쌍방간에 윈윈할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보수야당 신민당은 ‘과격한’ 그룹의 참여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특히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으로 대변되는 대학가의 비극 이후 그 눈살 찌푸림은 더욱 노골화됐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과 만난 자리에서 과격한 좌익 세력에 대해 공통적인 우려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격 세력’ 쪽도 신민당에 눈살을 찌푸리긴 마찬가지였다. “니들이 고와서 함께 한 줄 아니?”
86년 5월 3일은 인천 지역 개헌 추진위원회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날이었다. 신민당 인천 지역 관계자들도 가슴 설레며 기다린 날이었겠지만 그들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 이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지역 학생운동 그룹은 물론, 경인가도를 따라 늘어선 공장 지대에 촘촘히 박혀 있던 ‘위장취업자’들과 그들의 동지가 된 노동자들, 각종 재야 단체 회원들에게는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학생과 재야 중심이었던 시위에 노동자들이 대거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대회 시작도 전, 이미 수천 명 규모의 시위대가 시민회관 앞에 형성돼 있었다. 집회에 참가했던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동근의 꼼꼼한 회고에 따르면 5.3에 참여한 ‘조직 대오’로 사회운동 진영 1천여명, 노동운동 2천여명, 학생운동 4천여명으로 추산하고 신민당원 등 나머지 주체들을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즉 조직 참가자가 1만.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약 5만 정도의 시위대가 집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인천 시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화염병”으로 뒤집힌다. 민정당사가 불탔고 신민당 승용차도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신민당 대표부는 이 난리법석 와중에 정작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개헌 추진 대회를 치르지도 못했다.
이날 TV 뉴스에서는 한 장면이 대략 스무 번도 넘게 리플레이됐다. 운 나쁘게 시위대에게 포위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한 전경을 수십 명의 각목 부대가 잔인하게 두들겨 패는 광경이었다, 물론 시위대가 한 번 잡히면 “일단 맞고” 시작하는 시절이었고, 그 끔찍한 경찰의 폭력성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였지만, 그 장면에서 악마는 각목부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악마들은 메인 뉴스 시간 내내 반복해서 브라운관에 출현했다. “저게 학생이냐?” 일대 검거 선풍이 불었다.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의 삼총사는 경쟁을 하듯 찍어 두었던 이들을 뜰채로 건져 냈고 서빙고에서, 남산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소리와 사람 살 타는 냄새, 그리고 두들겨 패는 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대한 회고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5.3 인천 사태 3일 후 보안사 수사팀에 체포됐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전기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고문을 당했다. 견디다 못해 엉터리 약도를 그려 주자 앰뷸런스에 싣고 그리로 데려갔다가 속은 것을 알고는 앰뷸런스 안에서 전기방망이로 온몸을 지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후 법정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모두진술에서 2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전두환 이름 앞에다가 매번 ”광주학살과 군사반란을 저지르고“라는 수식어를 달아붙였다. 실로 용기백배해주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진술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은 평소 뭘 먹고 살았길래 저렇게 힘이 좋아요?“” ( 유시춘씨의 증언)
이 기운차고 견결했던 사람의 이름은 김문수다. 맥빠지는 소리들이 귀에 어른거리지만, 김문수가 맞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만큼 헌걸차고 용맹한 투사도 없었다. 26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고도 매정했던 것 같다. 인천 5.3 당일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차명진 의원의 젊은 날도 있었고, 요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는 장기표씨는 그 선봉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요즘 보면 새누리당 체질같기도 한 박계동 전 의원도 이 사건의 여파로 구속됐다.
이쯤 되면 역시 “사람의 죽을 때를 보아야 한다.”는 옛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말은 기가 막히게 맞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만 우리는 그 사람 변했네 라는 말을 일삼아 하고 살기도 한다.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인천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없었지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 , 체포되어 전기찜질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과거에 무색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슬프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저쪽으로’ 넘어간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제딴엔 견결하게 진보진영에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주제에 대리투표부터 소스 열람까지 부정선거 백화점을 차린 주사파들 역시 김문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날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인천 거리를 누비던 ‘자민투’ 소속 학생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오늘날 “자 자 할머니 찍으시고...... 어 안되면 내가 대신 투표해 드리지 뭐,” 따위로 놀고 자빠진 자들이 운동을 합네 진보를 합네 놀고 자빠지고 있었음을 어제 오늘 우리는 잘 알게 되지 않았는가. 86년 5월 3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 스산하다.
개최 주체는 당연히 신민당이었지만 그 판에 뛰어든 것은 신민당원 뿐이 아니었다.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가 된 학생들, 재야 단체 등 당시 전두환에 맞서 싸우던 거의 모든 세력이 개헌촉구 대회의 주력을 이뤘다. 쌍방간에 윈윈할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보수야당 신민당은 ‘과격한’ 그룹의 참여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특히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으로 대변되는 대학가의 비극 이후 그 눈살 찌푸림은 더욱 노골화됐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과 만난 자리에서 과격한 좌익 세력에 대해 공통적인 우려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격 세력’ 쪽도 신민당에 눈살을 찌푸리긴 마찬가지였다. “니들이 고와서 함께 한 줄 아니?”
86년 5월 3일은 인천 지역 개헌 추진위원회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날이었다. 신민당 인천 지역 관계자들도 가슴 설레며 기다린 날이었겠지만 그들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 이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지역 학생운동 그룹은 물론, 경인가도를 따라 늘어선 공장 지대에 촘촘히 박혀 있던 ‘위장취업자’들과 그들의 동지가 된 노동자들, 각종 재야 단체 회원들에게는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학생과 재야 중심이었던 시위에 노동자들이 대거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대회 시작도 전, 이미 수천 명 규모의 시위대가 시민회관 앞에 형성돼 있었다. 집회에 참가했던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동근의 꼼꼼한 회고에 따르면 5.3에 참여한 ‘조직 대오’로 사회운동 진영 1천여명, 노동운동 2천여명, 학생운동 4천여명으로 추산하고 신민당원 등 나머지 주체들을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즉 조직 참가자가 1만.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약 5만 정도의 시위대가 집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인천 시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화염병”으로 뒤집힌다. 민정당사가 불탔고 신민당 승용차도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신민당 대표부는 이 난리법석 와중에 정작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개헌 추진 대회를 치르지도 못했다.
이날 TV 뉴스에서는 한 장면이 대략 스무 번도 넘게 리플레이됐다. 운 나쁘게 시위대에게 포위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한 전경을 수십 명의 각목 부대가 잔인하게 두들겨 패는 광경이었다, 물론 시위대가 한 번 잡히면 “일단 맞고” 시작하는 시절이었고, 그 끔찍한 경찰의 폭력성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였지만, 그 장면에서 악마는 각목부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악마들은 메인 뉴스 시간 내내 반복해서 브라운관에 출현했다. “저게 학생이냐?” 일대 검거 선풍이 불었다.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의 삼총사는 경쟁을 하듯 찍어 두었던 이들을 뜰채로 건져 냈고 서빙고에서, 남산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소리와 사람 살 타는 냄새, 그리고 두들겨 패는 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대한 회고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5.3 인천 사태 3일 후 보안사 수사팀에 체포됐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전기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고문을 당했다. 견디다 못해 엉터리 약도를 그려 주자 앰뷸런스에 싣고 그리로 데려갔다가 속은 것을 알고는 앰뷸런스 안에서 전기방망이로 온몸을 지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후 법정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모두진술에서 2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전두환 이름 앞에다가 매번 ”광주학살과 군사반란을 저지르고“라는 수식어를 달아붙였다. 실로 용기백배해주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진술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은 평소 뭘 먹고 살았길래 저렇게 힘이 좋아요?“” ( 유시춘씨의 증언)
이 기운차고 견결했던 사람의 이름은 김문수다. 맥빠지는 소리들이 귀에 어른거리지만, 김문수가 맞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만큼 헌걸차고 용맹한 투사도 없었다. 26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고도 매정했던 것 같다. 인천 5.3 당일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차명진 의원의 젊은 날도 있었고, 요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는 장기표씨는 그 선봉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요즘 보면 새누리당 체질같기도 한 박계동 전 의원도 이 사건의 여파로 구속됐다.
이쯤 되면 역시 “사람의 죽을 때를 보아야 한다.”는 옛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말은 기가 막히게 맞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만 우리는 그 사람 변했네 라는 말을 일삼아 하고 살기도 한다.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인천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없었지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 , 체포되어 전기찜질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과거에 무색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슬프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저쪽으로’ 넘어간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제딴엔 견결하게 진보진영에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주제에 대리투표부터 소스 열람까지 부정선거 백화점을 차린 주사파들 역시 김문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날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인천 거리를 누비던 ‘자민투’ 소속 학생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오늘날 “자 자 할머니 찍으시고...... 어 안되면 내가 대신 투표해 드리지 뭐,” 따위로 놀고 자빠진 자들이 운동을 합네 진보를 합네 놀고 자빠지고 있었음을 어제 오늘 우리는 잘 알게 되지 않았는가. 86년 5월 3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