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8년 4월 24일 한신교육투쟁
일본의 ‘한신’ 지역은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 인구 밀집 지대다. 일본은 크게 관동과 관서 지역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 중 관서 지역의 중심에 해당하는 오사카와 고베, 즉 한신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래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948년 4월 재일교포들의 역사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벌어진다.
... 공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정착한 재일교포는 태평양전쟁 말기,200만이 넘고 있었다. 해방이 된 후 많은 이들이 귀국했으나 약 60만 여명은 일본에 남아 있었다. 그 대부분이 귀국을 희망했지만 점차 험악해져 가는 한반도 정세가 그들의 발을 묶었고, 어처구니없는 귀국 조건이 그들을 망설이게 했다. ‘매카사 겐스이’ (맥아더 원수)의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내린 지침에 따르면 재일교포들이 반출할 수 있는 재산은 현찰로 1천엔, 물건으로 250파운드(약110Kg)가 전부였다. 1천엔이라고 해 봐야 쌀 한 가마도 못되는 것이었으니 숫제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국하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일본에 생활 터전을 가진 재일교포들은 대부분 일본에 눌러앉게 됐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들을 특징짓게 하는 열정 중의 하나 ‘교육’이었다. 해방 직후 재일교포들이 난감해 했던 문제는 조선어 교육 문제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 조선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조선 학교가 세워졌고 민족 교육이 교포들의 힘을 모아 시행됐다. ‘국어강습회’가 곳곳에서 열렸고 조선인연맹 사무실이나 폐쇄된 공장 등을 빌려 이뤄지던 것이 조선 학교로 확대되어 일본 전국에 약 500여곳, 학생 수는 6만을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재일 조선인들의 조직이 좌경화하면서 GHQ와 일본 당국은 이를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공안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고, 1948년 1월 24일, 일본 교육 실정법 위반을 들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리고 일본 학교로 편입할 것을 명령했다.
“해방된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 교육을 하겠다는데 왜 금지한단 말인가.” 재일교포들의 울분은 폭발했다. 재일조선인연맹 (조련)은 즉각 이를 거부하면서 3.1 운동 기념일에 발맞춰 이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고 달을 넘겨 4월 하순, 23일과 24일 재일교포들이 밀집해 살던 한신 지역에서는 4.24 한신 교육투쟁으로 불리는 거대한 항쟁이 벌어진다. 23일에는 수천 명의 재일 조선인 시위대와 일본 공산당원들이 오사카 부 지사를 장악했고 오사카 성 주변 곳곳에서 봉홧불을 피우면서 경찰과 맞섰다. 공원에는 약 2만 명의 재일교포가 모여 기세를 올렸고 26일 또 한 번 오사카 부청으로 돌격해 들어가지만 진압되고 만다.
24일 효고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조련은 효고현 지사실에서 벌어지는 조선학교 폐쇄 관련 밀담의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격노한 약 100명의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청 내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지사 응접실을 점거해 비품등을 파손시킨 후, 벽을 깨어 지사실에 진입해 키시다 유키오 지사를 감금했다. 성난 시위대의 요구 앞에서 키시다 유키오는,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을 약속했지만 점령군 미군과 일본 정부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효고는 미 헌병 사령부 관할 하에 들어갔다. 미군과 일본 경찰은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시위는 해산된다. 23일과 24일 양일간에 두 명의 재일교포가 죽었다. 그 중 오사카에서 경찰의 총에 뒷머리를 맞아 죽은 김태일은 불과 열 여섯 살이었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곱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학교를 지켜라!”고 부르짖으면서 시위의 선봉에 섰고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열 여섯 공장 직공이 지켜내려고 했던 ‘교육’은 무엇이었을까.
1948년 5월 5일 조련의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 교육법을 준수한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라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면서 4.24 한신교육투쟁은 상처 많은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이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다. 치마 저고리 교복을 입기 위해, 우리 말 교육을 받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목숨 걸고 싸운 결과이지만 정작 반도의 한쪽은 그에 무심했다. 민족 교육을 하는 이들에게 붉은 페인트칠을 하기 바빴고,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그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가를 신기할 정도로 외면했다. 심지어 재일교포들이 반도의 다른쪽을 선택해서 귀국하겠다고 하자 무장 테러리스트를 파견하여 그를 방해할만큼 못나게 굴었다.
하지만 반도의 한쪽은 조금 달랐다. 나 자신 그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함에도 북한이 재일교포들에게 성의를 다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폭격으로인해 ‘석기 시대로 돌아간’ 나라를 재건하는 와중에도 재일교포들의 민족학교에 돈을 보냈고, 책을 보냈고 그들을 포용하려고 애썼다. 장군님 초상화 비맞는다고 울부짖는 조선 처자에게는 참 딱하다는 마음 금할 수 없어도, 민족학교에 내걸린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어려운 시절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조국이었으니까.
<우리 학교>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역시 비슷한 과거를 겪으며 세워졌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조선학교 중의 하나를 담은 작품이다. 매우 긴 분량이지만 길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본이라는 바다의 섬으로서, 고집스레 누구도 지켜봐주지 않는 정체성을 지키려 애써온 한 인간 집단의 애환, 긍지, 절망, 희망 모든 것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다. 기회 있으면 꼭 보시기를...... 다음은 우리 학교를 노래한 시 하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허남기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놓고 기대노라면
삑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여들어
너희들의 앵두같은 두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오는 날엔 비가
눈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 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 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가지 무엇 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 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우리도 앞으로
일본학교보다 몇배나 더 큰 집 지을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 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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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24일 한신교육투쟁
일본의 ‘한신’ 지역은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 인구 밀집 지대다. 일본은 크게 관동과 관서 지역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 중 관서 지역의 중심에 해당하는 오사카와 고베, 즉 한신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래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948년 4월 재일교포들의 역사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벌어진다.
... 공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정착한 재일교포는 태평양전쟁 말기,200만이 넘고 있었다. 해방이 된 후 많은 이들이 귀국했으나 약 60만 여명은 일본에 남아 있었다. 그 대부분이 귀국을 희망했지만 점차 험악해져 가는 한반도 정세가 그들의 발을 묶었고, 어처구니없는 귀국 조건이 그들을 망설이게 했다. ‘매카사 겐스이’ (맥아더 원수)의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내린 지침에 따르면 재일교포들이 반출할 수 있는 재산은 현찰로 1천엔, 물건으로 250파운드(약110Kg)가 전부였다. 1천엔이라고 해 봐야 쌀 한 가마도 못되는 것이었으니 숫제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국하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일본에 생활 터전을 가진 재일교포들은 대부분 일본에 눌러앉게 됐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들을 특징짓게 하는 열정 중의 하나 ‘교육’이었다. 해방 직후 재일교포들이 난감해 했던 문제는 조선어 교육 문제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 조선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조선 학교가 세워졌고 민족 교육이 교포들의 힘을 모아 시행됐다. ‘국어강습회’가 곳곳에서 열렸고 조선인연맹 사무실이나 폐쇄된 공장 등을 빌려 이뤄지던 것이 조선 학교로 확대되어 일본 전국에 약 500여곳, 학생 수는 6만을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재일 조선인들의 조직이 좌경화하면서 GHQ와 일본 당국은 이를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공안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고, 1948년 1월 24일, 일본 교육 실정법 위반을 들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리고 일본 학교로 편입할 것을 명령했다.
“해방된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 교육을 하겠다는데 왜 금지한단 말인가.” 재일교포들의 울분은 폭발했다. 재일조선인연맹 (조련)은 즉각 이를 거부하면서 3.1 운동 기념일에 발맞춰 이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고 달을 넘겨 4월 하순, 23일과 24일 재일교포들이 밀집해 살던 한신 지역에서는 4.24 한신 교육투쟁으로 불리는 거대한 항쟁이 벌어진다. 23일에는 수천 명의 재일 조선인 시위대와 일본 공산당원들이 오사카 부 지사를 장악했고 오사카 성 주변 곳곳에서 봉홧불을 피우면서 경찰과 맞섰다. 공원에는 약 2만 명의 재일교포가 모여 기세를 올렸고 26일 또 한 번 오사카 부청으로 돌격해 들어가지만 진압되고 만다.
24일 효고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조련은 효고현 지사실에서 벌어지는 조선학교 폐쇄 관련 밀담의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격노한 약 100명의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청 내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지사 응접실을 점거해 비품등을 파손시킨 후, 벽을 깨어 지사실에 진입해 키시다 유키오 지사를 감금했다. 성난 시위대의 요구 앞에서 키시다 유키오는,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을 약속했지만 점령군 미군과 일본 정부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효고는 미 헌병 사령부 관할 하에 들어갔다. 미군과 일본 경찰은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시위는 해산된다. 23일과 24일 양일간에 두 명의 재일교포가 죽었다. 그 중 오사카에서 경찰의 총에 뒷머리를 맞아 죽은 김태일은 불과 열 여섯 살이었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곱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학교를 지켜라!”고 부르짖으면서 시위의 선봉에 섰고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열 여섯 공장 직공이 지켜내려고 했던 ‘교육’은 무엇이었을까.
1948년 5월 5일 조련의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 교육법을 준수한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라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면서 4.24 한신교육투쟁은 상처 많은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이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다. 치마 저고리 교복을 입기 위해, 우리 말 교육을 받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목숨 걸고 싸운 결과이지만 정작 반도의 한쪽은 그에 무심했다. 민족 교육을 하는 이들에게 붉은 페인트칠을 하기 바빴고,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그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가를 신기할 정도로 외면했다. 심지어 재일교포들이 반도의 다른쪽을 선택해서 귀국하겠다고 하자 무장 테러리스트를 파견하여 그를 방해할만큼 못나게 굴었다.
하지만 반도의 한쪽은 조금 달랐다. 나 자신 그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함에도 북한이 재일교포들에게 성의를 다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폭격으로인해 ‘석기 시대로 돌아간’ 나라를 재건하는 와중에도 재일교포들의 민족학교에 돈을 보냈고, 책을 보냈고 그들을 포용하려고 애썼다. 장군님 초상화 비맞는다고 울부짖는 조선 처자에게는 참 딱하다는 마음 금할 수 없어도, 민족학교에 내걸린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어려운 시절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조국이었으니까.
<우리 학교>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역시 비슷한 과거를 겪으며 세워졌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조선학교 중의 하나를 담은 작품이다. 매우 긴 분량이지만 길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본이라는 바다의 섬으로서, 고집스레 누구도 지켜봐주지 않는 정체성을 지키려 애써온 한 인간 집단의 애환, 긍지, 절망, 희망 모든 것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다. 기회 있으면 꼭 보시기를...... 다음은 우리 학교를 노래한 시 하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허남기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놓고 기대노라면
삑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여들어
너희들의 앵두같은 두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오는 날엔 비가
눈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 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 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가지 무엇 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 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우리도 앞으로
일본학교보다 몇배나 더 큰 집 지을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 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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