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JFK의 마지막 날에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 JFK의 운명은 1963년 11월 22일 끝을 맺는다. 달라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는 오스왈드의 총에 (또는 또 다른 암살자의 총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암살을 둘러싼 온갖 미스테리와 음모론은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JFK"를 비롯하여 온갖 영화나 출판물들이 질릴 정도로 소개하여 왔던 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분명한 점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 젊은 대통령의 죽음을 극심히 슬퍼했고 누군가 자신들의 영웅을 앗아갔다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가져 왔다는 점일 것이다.
젊고 탄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케네디는 형편없이 쇠약한 몸이었고 온갖 병을 지고 사는 가운데 카톨릭 신자로서 종부성사를 받은 것 (즉 생명이 위독했던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노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태양처럼 빛나는 과거 하나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한 집안에 들 케네디 가문의 조지프 케네디의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귀족으로 자라났다. 돈이라면 100달러 지폐를 쌓아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릴 집안이었고, 빽이라면 록키 산맥같은 배경이 둘러쳐진 케네디 가문의 형제들이었지만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장남 조지프부터 전쟁터로 달려간다.
그는 사망률이 아주 높은 공군의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했고 결국 탑승한 전투기가 폭발하면서 유해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때문에 현역 복무를 해야 한다고 해도 워싱턴의 최고 사령부에 근무하거나 주 방위군 정도에서 떳떳하지만 안전하게 군 생활을 하게 만들 능력은 너끈히 되고도 남는 케네디 가의 장남이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둘째 존은 한 수 더 떴다.
그는 대학 시절의 방탕함으로 인해 성병도 앓았고 불치병에 가까운 에디슨 병도 갖고 있었으며 허리에도 이상이 있었다. 생명보험 영업사원도 그를 거부할 정도로 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미국이 이런 약골을 현역으로 배치하여 싸우게 할 만큼 인적 자원이 빈곤한 나라도 아니었으니 존은 현역으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빽을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아버지의 힘은 잘해 봐야 ‘7급 재검’(한국식으로 말하면)이 분명한 그를 우수한 1급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는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해군 정복 입고 폼 내는 사진이 필요했다면 하와이 진주만쯤에서 육상 근무를 하거나 항공모함 정도 타 주면서 생색을 내도 충분했을 테지만 케네디가 탄 배는 PT109라고 불리는 초계정이었다. 말이 초계정이지, 어뢰 몇 발과 기관총을 실은 이 배는 ‘목선’이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위장함대’였다. 구태여 대포 같은 거 쏘지 않아도 강철로 된 군함이 그저 부딪치기만 하면 반쪽이 날 뿐인 나무 판자 배였다. 존 F 케네디가 탄 배도 일본 구축함에 의해 두 동강이 난다.
목선이니 두 동강이 나도 반쪽은 물에 떠 있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다 보니 해류가 일본이 점령한 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충돌 시 사망한 이들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물에 뛰어들어 다른 섬을 향해 헤엄쳐 가기로 한다. 항해 중에도 아픈 허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존은 세상에 부상당한 부하의 구명 조끼 끈을 악물고 수영했다. 그렇게 그는 수 마일을 헤엄쳤고 부하들 전원을 살려 내는데 성공한다.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후 이 사건을 취재하던 한 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 생존자들이 이 “사랑스런 중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언제 그가 출마할 지에 대해 내기까지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생존 부하들의 기대대로 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1963년 오늘 미궁 속에 빠진 살인자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마지막 날에 나는 그가 왜 죽었나보다는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를 생각하고 우리의 현실을 찝찝한 눈초리로 돌아보게 된다.
물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자는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한 유명한 마초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망발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며 병역필 유무가 또 하나의 차별의 이유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가장 위험한 임무를 가장 앞장서 수행했던 미합중국의 젊은 도련님과 ‘행방불명’으로 군대를 가지 ‘못한’ 이유로 “영장을 받은 어머니가 문맹이어서”라는 핑계를 대고 누우셨던 여당의 전직 대표나 그 외 수두룩 빽빽한 ‘면제자’ 분들이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남태평양에서 부하의 구명 조끼끈을 이에 물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힘을 내라고 부하들을 독려하던 그 순간은, JFK의 인생에서 가장 찬연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다했던 젊은 장교는 대통령이 됐고,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설문 한 조각으로 그의 죽음을 기린다. 비록 그 자신도 베트남전이라는 지옥문을 열어젖힌 당사자로서 이 연설문에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미국의 위대함을 바라봅니다.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부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예술적 성취 수준을 높이고, 국민 모두를 위해 문화적 기회를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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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츠제랄드 케네디. JFK의 운명은 1963년 11월 22일 끝을 맺는다. 달라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는 오스왈드의 총에 (또는 또 다른 암살자의 총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암살을 둘러싼 온갖 미스테리와 음모론은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JFK"를 비롯하여 온갖 영화나 출판물들이 질릴 정도로 소개하여 왔던 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분명한 점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 젊은 대통령의 죽음을 극심히 슬퍼했고 누군가 자신들의 영웅을 앗아갔다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가져 왔다는 점일 것이다.
젊고 탄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케네디는 형편없이 쇠약한 몸이었고 온갖 병을 지고 사는 가운데 카톨릭 신자로서 종부성사를 받은 것 (즉 생명이 위독했던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노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태양처럼 빛나는 과거 하나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한 집안에 들 케네디 가문의 조지프 케네디의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귀족으로 자라났다. 돈이라면 100달러 지폐를 쌓아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릴 집안이었고, 빽이라면 록키 산맥같은 배경이 둘러쳐진 케네디 가문의 형제들이었지만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장남 조지프부터 전쟁터로 달려간다.
그는 사망률이 아주 높은 공군의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했고 결국 탑승한 전투기가 폭발하면서 유해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때문에 현역 복무를 해야 한다고 해도 워싱턴의 최고 사령부에 근무하거나 주 방위군 정도에서 떳떳하지만 안전하게 군 생활을 하게 만들 능력은 너끈히 되고도 남는 케네디 가의 장남이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둘째 존은 한 수 더 떴다.
그는 대학 시절의 방탕함으로 인해 성병도 앓았고 불치병에 가까운 에디슨 병도 갖고 있었으며 허리에도 이상이 있었다. 생명보험 영업사원도 그를 거부할 정도로 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미국이 이런 약골을 현역으로 배치하여 싸우게 할 만큼 인적 자원이 빈곤한 나라도 아니었으니 존은 현역으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빽을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아버지의 힘은 잘해 봐야 ‘7급 재검’(한국식으로 말하면)이 분명한 그를 우수한 1급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는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해군 정복 입고 폼 내는 사진이 필요했다면 하와이 진주만쯤에서 육상 근무를 하거나 항공모함 정도 타 주면서 생색을 내도 충분했을 테지만 케네디가 탄 배는 PT109라고 불리는 초계정이었다. 말이 초계정이지, 어뢰 몇 발과 기관총을 실은 이 배는 ‘목선’이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위장함대’였다. 구태여 대포 같은 거 쏘지 않아도 강철로 된 군함이 그저 부딪치기만 하면 반쪽이 날 뿐인 나무 판자 배였다. 존 F 케네디가 탄 배도 일본 구축함에 의해 두 동강이 난다.
목선이니 두 동강이 나도 반쪽은 물에 떠 있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다 보니 해류가 일본이 점령한 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충돌 시 사망한 이들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물에 뛰어들어 다른 섬을 향해 헤엄쳐 가기로 한다. 항해 중에도 아픈 허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존은 세상에 부상당한 부하의 구명 조끼 끈을 악물고 수영했다. 그렇게 그는 수 마일을 헤엄쳤고 부하들 전원을 살려 내는데 성공한다.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후 이 사건을 취재하던 한 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 생존자들이 이 “사랑스런 중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언제 그가 출마할 지에 대해 내기까지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생존 부하들의 기대대로 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1963년 오늘 미궁 속에 빠진 살인자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마지막 날에 나는 그가 왜 죽었나보다는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를 생각하고 우리의 현실을 찝찝한 눈초리로 돌아보게 된다.
물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자는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한 유명한 마초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망발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며 병역필 유무가 또 하나의 차별의 이유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가장 위험한 임무를 가장 앞장서 수행했던 미합중국의 젊은 도련님과 ‘행방불명’으로 군대를 가지 ‘못한’ 이유로 “영장을 받은 어머니가 문맹이어서”라는 핑계를 대고 누우셨던 여당의 전직 대표나 그 외 수두룩 빽빽한 ‘면제자’ 분들이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남태평양에서 부하의 구명 조끼끈을 이에 물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힘을 내라고 부하들을 독려하던 그 순간은, JFK의 인생에서 가장 찬연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다했던 젊은 장교는 대통령이 됐고,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설문 한 조각으로 그의 죽음을 기린다. 비록 그 자신도 베트남전이라는 지옥문을 열어젖힌 당사자로서 이 연설문에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미국의 위대함을 바라봅니다.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부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예술적 성취 수준을 높이고, 국민 모두를 위해 문화적 기회를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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