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두 남자
1908년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거의 없어져 가고 있었다. 외교권이 없어진 지는 벌써 오래고 그나마 명맥만 유지하던 군대조차 해산돼 없어졌다. 분개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워낙 우세한 무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외교부터 치안까지 한 나라의 정부가 행사해야 할 권리는 차근차근 일본에 빼앗겼고 일본은 '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을 각
부처에 배치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조종하려 들었다. 그 가운데 외부고문이 미국인 스티븐스라는 자였다. 그가 미국내의 여론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조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1908년 3월 20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내의 여러 신문기자와 회견을 가지고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서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라는 제목의 왜곡된 친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적 ‘보호’를 강변한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保護)한 후로 한국에 유익(有益)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한국·일본) 양국인 간에 교제가 점점 치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벼슬아치들은 일본을 반대해도 지방의 농민들과 사사 백성은 전일 정부의 폭정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일본 사람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이민이 하와이에 발을 디딘지 10년도 안된 때였으나 어느 새 미국에는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의 관문이라 할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 단체들까지 세워져서 활동
중이었다. 스티븐스의 이 발언은 당연히 한국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 양코배기 자식 말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저렇게 날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 울분을 토하던 한국인들은 우선 4명이 대표로 가서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그 발언을 취소하기를 요구해 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만난 스티븐스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
"한국에는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같은 통감(統監)이 있으니 한국에 이만한 복이 어딨냐. 내 유심히 봤더니 황제도 개판이고 벼슬아치들은 백성들 뜯을 생각만 하고 백성은 띨띨하고 찌질한데 뭔놈의 독립 자격이 있어.! 고마운 줄 알어 일본한테! 안그러면 니들은 러시아가 먹었어!"
적당히 얼러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건만 스티븐스는 단어 하나 하나마다 한국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혈질의 한국인들은 그 유구한 '한성질'을 폭발시킨다. 의자를 들어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성질 같았으면 패 죽였을 텐데, 주변의 만류어 그냥 돌아와야 했던 한국인들은 모임을 열며 그들의 분노를 토로했다. 가장 열띤 것은 스물 다섯된 팔팔한 젊은이 전명운이었다. "내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당시 회의장은 만석이었고 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한인들이 벽까지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벽에 기대 서서 연설을 듣던 한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총만 있으면 내가 쏘디." 서른은 훨씬 넘어보이는 평안도 사내 장인환이었다.
3월23일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스티븐스는 길을 나섰다 오클랜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이른 순간 스티븐스는 가까운 곳에서 철컥 철컥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듣는다. 흘낏 보니 젊은 동양인 친구가 권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불발이었다. 이런 써너비치! 스티븐스도 몸을 날렸다. 맹렬한 경투가 벌어졌다. 양쪽다 필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린다. 탕 탕 탕 전명운이 움찔했고 그 다음엔 스티븐스가 비명을 질렀다. 권총을 쏜 것은 장인환이었다. 한 발은 전명운이 잘못 맞았지만 나머지는 임자를 찾아갔다. 스티븐스는 절명한다. 이것이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의거다.
둘은 함께 체포되긴 했지만 서로 공모한 적이 없었다. 따로따로 계획하고 따로따로 준비했다가 우연히 한곳에서 만난 것이었다. 스티븐스의 유족과 일본측은 정교한 음모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며 조국의 원수에게 매수되어 조국을 폄하하는 미국인을 응징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전명환과 장인환에게 필요한 것은 변호사였지만 그에 앞서서 한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통역이 절실했다. 적임자가 있었다.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윌슨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네 없네 하는 똑똑한 한국인이었다. 교민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해괴한 이유로 요청을 거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 이 신실한 기독교인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별 시덥잖은 윤똑똑이는 제쳐 두고 교인들은 두 의사릍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각처에서 의연금이 모아지고 중국 유학생들까지도 성의를 보태는 가운데 한일 양국의 대리전 같은 재판이 펼쳐진다.
검찰측과 일제가 고용한 나이트 변호사는 특히 장인환을 일급살인 혐의를 주장했다. ‘미개한 한국에서 안전하게 그 직분을 다하고 귀국했는데 이렇게 비명에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 측 변호사는 장인환의 스티븐스 총격은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니고 ‘애국적 광란으로 인한 무지각적(無知覺的) 범죄’이므로 애국지사 장인환은 당연히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장인환은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는 혈성이 극도에 지나서 정신이 변할 때 한 행위이므로 형사적인 책임이 면제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으로 교포들을 출두시켰다.
이 재판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은 한국측이었다.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됐고 장인환은 2급살인으로 규정되어 사형을 면하고 25년현을 받은 것이다.
장인환은 그로부터 10여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이승만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감옥에서 세타그기술을 배웠고 영어를 읽고 쓰기를 마스터한다. 출소한 이후 그는 교민단체의 지도급 인사로 일하다가 귀국한다. 남아 있던 가족들의 환영을 받고 늦장가도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짐승보다도 못하게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이었다. 장바닥에 떨어진 곡식 낱알로 허기를 메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장인환은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볼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사 의거 이전부터 고국의 고아원 사업에 관계하고 있었고 옥중에서도 도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하고 있었던 바 그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대동고아원 외국 총무'로서 미국 각지를 돌며 의연금을 모은다. 꽤 성과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당국이 보기에 에누리없는 불령선인, 그 후의 대한민국 정부가 쓴 단어로 하면 요주의인물이었다. 당연히 일제는 사사건건 장인환의 다리를 걸었고 판판이 그 활동을 가로막았다. 장인환은 결국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늦장가를 든 아내에게 곧 부르마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돌아갔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까다로운 미국 이민법이 부부를 갈라놓은 것이다. 다시 차린 세탁소 사업은 여의치 않았고 조선에 남겨둔 딸이 그만 어려서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왔다. 일찌기 재판정에서 "내가 어찌 그놈을 죽이지 않겠는가. 수백만의 한국민이 그의 모함에 빠져 죽었다. 그가 다시 살아서 한국에 돌아간다면 다시 그만한 한국 인민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그를 저격하였다......사람은 죽음의 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를 죽이고 또 나도 죽으면 우리나라의 광영이며 우리나라 인민의 행복인 것이다."고 사자후를 토하던 장인환도 이 슬픔에서 헤어나는 못했다. 생활고 끝에 속병까지 얻은 그는 1930년 치료받던 병원 3층에서 몸을 던진다.
전명운 역시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는 후 교포 사회의 도움으로 지구를 반바퀴 돌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했다가 안중근과 만나는 기이한 인연을 엮기도 했던 그는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겨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마침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쥐뿔 하나 준 것이 없고 버티다 못해 등지고 떠나야 했던 변변찮은 조국일망정 그 이름을 더럽히고 그 나라 국민을 욕보이는 이방인에게 분노했던 두 명의 청년들이 나라로부터 훈장 쪼가리나마 하나 받았던 것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던 고고한 한국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12년을 해 먹고 쫓겨난 다음이었다. 1908년 오늘 막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두 청년이 예기치 않은 협동으로 한 원수의 앞잡이를 죽였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두 남자
1908년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거의 없어져 가고 있었다. 외교권이 없어진 지는 벌써 오래고 그나마 명맥만 유지하던 군대조차 해산돼 없어졌다. 분개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워낙 우세한 무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외교부터 치안까지 한 나라의 정부가 행사해야 할 권리는 차근차근 일본에 빼앗겼고 일본은 '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을 각
부처에 배치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조종하려 들었다. 그 가운데 외부고문이 미국인 스티븐스라는 자였다. 그가 미국내의 여론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조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1908년 3월 20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내의 여러 신문기자와 회견을 가지고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서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라는 제목의 왜곡된 친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적 ‘보호’를 강변한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保護)한 후로 한국에 유익(有益)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한국·일본) 양국인 간에 교제가 점점 치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벼슬아치들은 일본을 반대해도 지방의 농민들과 사사 백성은 전일 정부의 폭정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일본 사람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이민이 하와이에 발을 디딘지 10년도 안된 때였으나 어느 새 미국에는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의 관문이라 할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 단체들까지 세워져서 활동
중이었다. 스티븐스의 이 발언은 당연히 한국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 양코배기 자식 말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저렇게 날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 울분을 토하던 한국인들은 우선 4명이 대표로 가서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그 발언을 취소하기를 요구해 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만난 스티븐스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
"한국에는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같은 통감(統監)이 있으니 한국에 이만한 복이 어딨냐. 내 유심히 봤더니 황제도 개판이고 벼슬아치들은 백성들 뜯을 생각만 하고 백성은 띨띨하고 찌질한데 뭔놈의 독립 자격이 있어.! 고마운 줄 알어 일본한테! 안그러면 니들은 러시아가 먹었어!"
적당히 얼러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건만 스티븐스는 단어 하나 하나마다 한국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혈질의 한국인들은 그 유구한 '한성질'을 폭발시킨다. 의자를 들어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성질 같았으면 패 죽였을 텐데, 주변의 만류어 그냥 돌아와야 했던 한국인들은 모임을 열며 그들의 분노를 토로했다. 가장 열띤 것은 스물 다섯된 팔팔한 젊은이 전명운이었다. "내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당시 회의장은 만석이었고 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한인들이 벽까지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벽에 기대 서서 연설을 듣던 한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총만 있으면 내가 쏘디." 서른은 훨씬 넘어보이는 평안도 사내 장인환이었다.
3월23일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스티븐스는 길을 나섰다 오클랜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이른 순간 스티븐스는 가까운 곳에서 철컥 철컥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듣는다. 흘낏 보니 젊은 동양인 친구가 권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불발이었다. 이런 써너비치! 스티븐스도 몸을 날렸다. 맹렬한 경투가 벌어졌다. 양쪽다 필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린다. 탕 탕 탕 전명운이 움찔했고 그 다음엔 스티븐스가 비명을 질렀다. 권총을 쏜 것은 장인환이었다. 한 발은 전명운이 잘못 맞았지만 나머지는 임자를 찾아갔다. 스티븐스는 절명한다. 이것이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의거다.
둘은 함께 체포되긴 했지만 서로 공모한 적이 없었다. 따로따로 계획하고 따로따로 준비했다가 우연히 한곳에서 만난 것이었다. 스티븐스의 유족과 일본측은 정교한 음모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며 조국의 원수에게 매수되어 조국을 폄하하는 미국인을 응징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전명환과 장인환에게 필요한 것은 변호사였지만 그에 앞서서 한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통역이 절실했다. 적임자가 있었다.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윌슨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네 없네 하는 똑똑한 한국인이었다. 교민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해괴한 이유로 요청을 거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 이 신실한 기독교인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별 시덥잖은 윤똑똑이는 제쳐 두고 교인들은 두 의사릍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각처에서 의연금이 모아지고 중국 유학생들까지도 성의를 보태는 가운데 한일 양국의 대리전 같은 재판이 펼쳐진다.
검찰측과 일제가 고용한 나이트 변호사는 특히 장인환을 일급살인 혐의를 주장했다. ‘미개한 한국에서 안전하게 그 직분을 다하고 귀국했는데 이렇게 비명에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 측 변호사는 장인환의 스티븐스 총격은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니고 ‘애국적 광란으로 인한 무지각적(無知覺的) 범죄’이므로 애국지사 장인환은 당연히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장인환은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는 혈성이 극도에 지나서 정신이 변할 때 한 행위이므로 형사적인 책임이 면제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으로 교포들을 출두시켰다.
이 재판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은 한국측이었다.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됐고 장인환은 2급살인으로 규정되어 사형을 면하고 25년현을 받은 것이다.
장인환은 그로부터 10여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이승만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감옥에서 세타그기술을 배웠고 영어를 읽고 쓰기를 마스터한다. 출소한 이후 그는 교민단체의 지도급 인사로 일하다가 귀국한다. 남아 있던 가족들의 환영을 받고 늦장가도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짐승보다도 못하게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이었다. 장바닥에 떨어진 곡식 낱알로 허기를 메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장인환은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볼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사 의거 이전부터 고국의 고아원 사업에 관계하고 있었고 옥중에서도 도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하고 있었던 바 그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대동고아원 외국 총무'로서 미국 각지를 돌며 의연금을 모은다. 꽤 성과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당국이 보기에 에누리없는 불령선인, 그 후의 대한민국 정부가 쓴 단어로 하면 요주의인물이었다. 당연히 일제는 사사건건 장인환의 다리를 걸었고 판판이 그 활동을 가로막았다. 장인환은 결국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늦장가를 든 아내에게 곧 부르마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돌아갔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까다로운 미국 이민법이 부부를 갈라놓은 것이다. 다시 차린 세탁소 사업은 여의치 않았고 조선에 남겨둔 딸이 그만 어려서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왔다. 일찌기 재판정에서 "내가 어찌 그놈을 죽이지 않겠는가. 수백만의 한국민이 그의 모함에 빠져 죽었다. 그가 다시 살아서 한국에 돌아간다면 다시 그만한 한국 인민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그를 저격하였다......사람은 죽음의 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를 죽이고 또 나도 죽으면 우리나라의 광영이며 우리나라 인민의 행복인 것이다."고 사자후를 토하던 장인환도 이 슬픔에서 헤어나는 못했다. 생활고 끝에 속병까지 얻은 그는 1930년 치료받던 병원 3층에서 몸을 던진다.
전명운 역시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는 후 교포 사회의 도움으로 지구를 반바퀴 돌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했다가 안중근과 만나는 기이한 인연을 엮기도 했던 그는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겨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마침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쥐뿔 하나 준 것이 없고 버티다 못해 등지고 떠나야 했던 변변찮은 조국일망정 그 이름을 더럽히고 그 나라 국민을 욕보이는 이방인에게 분노했던 두 명의 청년들이 나라로부터 훈장 쪼가리나마 하나 받았던 것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던 고고한 한국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12년을 해 먹고 쫓겨난 다음이었다. 1908년 오늘 막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두 청년이 예기치 않은 협동으로 한 원수의 앞잡이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