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의 시사 네컷 만화 왈순아지매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술에 만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자동차가 검문에 걸린다. 그러자 차에 탄 사람들이 경찰을 "번호판을 보고 얘기하라."고 윽박지른다. 번호판을 본 경찰은 "수고하십니다." 경례를 붙이고 차를 보낸다. 번호판은 8688이었다.
즉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그렇게 80년대 내내 대한민국 국민들의 귀에 박힌 굳은 살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 대회들을 치를 수도 서울의 단장을 위해 살인적인 철거를 단행해 나간다. 상계동 사당동 목동 왕십리..... 요즘에는 용역이 설치지만 그때는 정복 경찰이 철거촌을 습격했었다. 식구들이 모인 밥상에 최루탄이 터지고 잠 자는데 천정이 뜯겨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그때 벼랑 끝에 몰린 빈민들이 가장 미더워하고 존경했으며, 실제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 있었다. 독특한 이름, 그만큼 유별난 강골이었던 빈민의 대부 제정구다.
그의 사람됨을 말해 주는 여러 일화 가운데 하나가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다. 1986년 그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가 성동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는 쪽은 제정구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저.... 저기 진술서에 이 말은 좀 뺍시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다'라고 했는데..... 거 좀..."
"아니 개자식더러 개자식이라는데 뭐가 문제요. 국민을 개 패듯이 하는 대통령이 개자식이지 그럼 사람 자식이야? 난 못 빼요."
"저 제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난 못 뺀다니까 당신이 고치든가 말든가."
이날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은 스타일을 구기는 보고서를 쓴다. 아마 집에 가서 벽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연행되어 오는 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진술서의 글자 몇 구절을 바꾸자고 설득해도 안 들으며… 세계적으로 큰 상을 수상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여러 모로 처벌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심만 잃게 될 것이므로 훈방 조치했으면 한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24일자,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중) 성동서 정보과장이 언급한 큰 상이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막사이사이 상이다. 제정구는 그의 평생 빈민운동 동반자였던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그 직후에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4수 끝에 대학생이 됐던 그는 서울대 문리대의 1급 데모꾼이 됐다. '문리대가 선 이후 최고'라는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유명했다. "“인민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허구”라면서 교수를 몰아붙이던 카리스마는 오늘날의 국회의원 김부겸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을 휘어잡았다. 유신이 선포된 뒤 수배를 받은 그가 은신 반 야학 활동 반 목적으로 찾아든 곳이 청계천이었다. 그는 끝없이 늘어선 청계천변의 빈민굴에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살지?" 충격에 휩싸인 젊음을 또 한 번 강타한 것은 옆집에 혼자 살던 엿장수였다. 엿장수는 결핵 3기 판정을 받았고 의사가 쉬라고 권유하자 이렇게 대답해야 했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 쉬면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3일안에 굶어죽지 않겠습니까." 이 사연을 들은 제정구는 엿장수의 엿판을 대신 둘러멘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다녀온 후, 빈민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그로부터 그의 여생은 빈민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거칠게 치고받고, 의심받고 호통치고 묶어 세우고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삶의 연속이었다. 청계천 시절 만난 아내가 아주 잠깐 신발을 구겨 신고 나가자 바로 그 등짝에 신발을 던지며 "아직도 부르조아 근성을 못버렸어!"라고 호통을 쳤던 그는 아내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욱 엄격했던 보기드문 운동가였다. 그의 빈민운동 동지 정일우 신부의 말이다. "성격상 정치할 사람이 못 돼요. 타협할 줄을 몰라요. 정치는 타협하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참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어요. 복음자리 마을 지을 때 그렇게 큰 돈을 만졌는데 십 원도 일 원도 옆으로 돌아간 것이 없어요.....도대체 무슨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깨끗한가."
그런데 그는 정치를 시작했다.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중) 는 그의 신념을 투쟁만으로서는 이룰 수 없다 생각했을까. 하지만 "타협을 모르던"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영국까지 날아갔던 김대중이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끝내는 당을 깨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만든 것이다. 분당 전 김대중을 비판하다가 회의 도중 멱살이 잡히기까지 했던 그는 도저히 이 '정치적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차라리 장렬히 전사하겠다."
그에게 김대중이란 산은 정치인으로서 넘기 힘든 산이었을 뿐더러 오르기 싫은 산이 되었다. 꼬마 민주당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무현 등은 김대중의 막하에 들었고, 그는 이부영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택한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동료 이부영이 그의 죽음을 두고 "DJ암에 걸려 죽었다."고 독설을 퍼부은 일도 있었으니 그는 끝내 김대중에 대한 감정을 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갑작스런 암으로 겨우 쉰 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빈민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그는 일로매진의 투쟁으로 장식된 일생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연함을 드러내는 내용의 강연을 한다. "저는 편안하게 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암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상극’의 역사였습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21세기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먼저 살아야 하는 ‘상생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날카로운 직관의 선각자로서의 예언이었을까 세월과 병마에 지친 한 운동가의 간절한 기대였을까. 21세기가 열렸지만 아직 그 어느 쪽도 충족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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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그렇게 80년대 내내 대한민국 국민들의 귀에 박힌 굳은 살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 대회들을 치를 수도 서울의 단장을 위해 살인적인 철거를 단행해 나간다. 상계동 사당동 목동 왕십리..... 요즘에는 용역이 설치지만 그때는 정복 경찰이 철거촌을 습격했었다. 식구들이 모인 밥상에 최루탄이 터지고 잠 자는데 천정이 뜯겨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그때 벼랑 끝에 몰린 빈민들이 가장 미더워하고 존경했으며, 실제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 있었다. 독특한 이름, 그만큼 유별난 강골이었던 빈민의 대부 제정구다.
그의 사람됨을 말해 주는 여러 일화 가운데 하나가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다. 1986년 그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가 성동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는 쪽은 제정구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저.... 저기 진술서에 이 말은 좀 뺍시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다'라고 했는데..... 거 좀..."
"아니 개자식더러 개자식이라는데 뭐가 문제요. 국민을 개 패듯이 하는 대통령이 개자식이지 그럼 사람 자식이야? 난 못 빼요."
"저 제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난 못 뺀다니까 당신이 고치든가 말든가."
이날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은 스타일을 구기는 보고서를 쓴다. 아마 집에 가서 벽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연행되어 오는 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진술서의 글자 몇 구절을 바꾸자고 설득해도 안 들으며… 세계적으로 큰 상을 수상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여러 모로 처벌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심만 잃게 될 것이므로 훈방 조치했으면 한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24일자,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중) 성동서 정보과장이 언급한 큰 상이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막사이사이 상이다. 제정구는 그의 평생 빈민운동 동반자였던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그 직후에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4수 끝에 대학생이 됐던 그는 서울대 문리대의 1급 데모꾼이 됐다. '문리대가 선 이후 최고'라는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유명했다. "“인민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허구”라면서 교수를 몰아붙이던 카리스마는 오늘날의 국회의원 김부겸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을 휘어잡았다. 유신이 선포된 뒤 수배를 받은 그가 은신 반 야학 활동 반 목적으로 찾아든 곳이 청계천이었다. 그는 끝없이 늘어선 청계천변의 빈민굴에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살지?" 충격에 휩싸인 젊음을 또 한 번 강타한 것은 옆집에 혼자 살던 엿장수였다. 엿장수는 결핵 3기 판정을 받았고 의사가 쉬라고 권유하자 이렇게 대답해야 했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 쉬면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3일안에 굶어죽지 않겠습니까." 이 사연을 들은 제정구는 엿장수의 엿판을 대신 둘러멘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다녀온 후, 빈민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그로부터 그의 여생은 빈민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거칠게 치고받고, 의심받고 호통치고 묶어 세우고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삶의 연속이었다. 청계천 시절 만난 아내가 아주 잠깐 신발을 구겨 신고 나가자 바로 그 등짝에 신발을 던지며 "아직도 부르조아 근성을 못버렸어!"라고 호통을 쳤던 그는 아내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욱 엄격했던 보기드문 운동가였다. 그의 빈민운동 동지 정일우 신부의 말이다. "성격상 정치할 사람이 못 돼요. 타협할 줄을 몰라요. 정치는 타협하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참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어요. 복음자리 마을 지을 때 그렇게 큰 돈을 만졌는데 십 원도 일 원도 옆으로 돌아간 것이 없어요.....도대체 무슨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깨끗한가."
그런데 그는 정치를 시작했다.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중) 는 그의 신념을 투쟁만으로서는 이룰 수 없다 생각했을까. 하지만 "타협을 모르던"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영국까지 날아갔던 김대중이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끝내는 당을 깨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만든 것이다. 분당 전 김대중을 비판하다가 회의 도중 멱살이 잡히기까지 했던 그는 도저히 이 '정치적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차라리 장렬히 전사하겠다."
그에게 김대중이란 산은 정치인으로서 넘기 힘든 산이었을 뿐더러 오르기 싫은 산이 되었다. 꼬마 민주당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무현 등은 김대중의 막하에 들었고, 그는 이부영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택한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동료 이부영이 그의 죽음을 두고 "DJ암에 걸려 죽었다."고 독설을 퍼부은 일도 있었으니 그는 끝내 김대중에 대한 감정을 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갑작스런 암으로 겨우 쉰 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빈민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그는 일로매진의 투쟁으로 장식된 일생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연함을 드러내는 내용의 강연을 한다. "저는 편안하게 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암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상극’의 역사였습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21세기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먼저 살아야 하는 ‘상생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날카로운 직관의 선각자로서의 예언이었을까 세월과 병마에 지친 한 운동가의 간절한 기대였을까. 21세기가 열렸지만 아직 그 어느 쪽도 충족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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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