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7년 1월 15일 따뜻한 남쪽 나라
1987년 1월 14일 남한에서는 박종철이 죽었다. 그런데 박종철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을 그 즈음 북한에서는 또 다른 ‘철이’가 목숨을 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만철. 마흔 일곱살의 의사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김만철 본인은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고 했고 북한은 불륜남의 도피라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친가쪽은 포함되지 않은 처갓집 식구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낡은 배에 올랐다. 식량과 물 등 장기간의 항해까지도 철저히 대비했던 그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경 청진항을 떠났다.
일단 북한 영해를 벗어나려는 마음이었던지 동쪽으로 내달리던 김만철 일가의 낡은 배에 시련이 닥쳤다. 엔진이 고장나고 만 것이다. 한겨울의 거센 파도에 며칠을 시달린 끝에 김만철의 엑소더스 호(?)는 일본 쓰루가 항에 닿아 닻을 내릴 수 있었다. 항을 순찰하던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은 난데없이 출현한 괴선박에 놀라 다가섰지만 배 안에 있던 이들은 해상 보안청 요원들을 만나자마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우리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만철의 배는 동북아시아 3국을 순회하는 강력한 태풍의 핵이 되었다. 6.25 이후 북한 주민이 정교한 계획 하에 탈북을 감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북한도 머리털이 설 일이었고, 남한으로서는 이들을 어떻게든 데려온다면 체제 경쟁에서의 승전고를 울림은 물론, ‘생지옥 북한’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이었기에, 거기다 결정적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덮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온몸의 솜털이 일어섰다. 사이에 낀 일본도 난처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후지산마루호라는 배의 선장과 기관장이 북한에 ‘간첩’으로 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하사 민홍구라는 자가 후지산마루에 몰래 숨어들어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북한이 그 선장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한 것이다. 북한은 여지없이 이 카드를 내밀며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동무들. 알아서 하라우.”
김만철 일가의 소망은 사실 남한도 아니었고 일본도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쯤 되는 “따뜻한 남쪽 나라”의 무인도에 살고 싶었다고 김만철씨가 술회한 바 있으니까. 그리고 김만철의 가족들은 남한을 ‘거지떼가 득실거리는 생지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외교관이 배에 올라타서 남한으로 오면 받게 될 혜택을 늘어놨지만 가족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으로서도 난감했다. 차라리 남한으로 가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청한다면 ‘인도적 견지’에서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가족들 희망대로 제3국으로 보내 버린다면 도끼눈을 뜨고 있는 한국이 걸리고.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머리를.
먼저 꼼수를 낸 건 일본이었다. 추방을 명분으로 남한의 영해 근처에 김만철의 배를 끌고 가서 슬그머니 놓아 주면 남한측이 알아서 인수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들고 귀국한 한국 외교관은 뜻밖의 장소로 초대된다. 인공위성도 떨어뜨릴 세도가 장세동 이하 삼군 참모총장이 총출동한 안가였다. 북한이 행여 방해할 지 모르고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한다는 수뇌부 작전 회의였던 것이다. 북한이 장난을 치면 날려 버리고서라도 김만철을 데리고 오겠다는 결의였다.
하지만 북한을 의식한 일본이 이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남한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펄펄 뛰는 한국에다가 일본이 제시한 안이 대만을 이용하자는 안이었다. “우리는 대만에 보낼게. 한국은 대만하고 친하니까 알아서 데려가.” 이번에는 국내 대만 관련 인맥이 총출동했다. 처음에는 거부 반응을 보이던 대만도 그에 응했고 ‘원조 탈북자’ 김만철 가족은 그렇게 서울에 왔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흘렀다. 2007년의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상에서 김만철은 그 부인과 함께 경기도 광주 야산의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한때 정착금과 강연으로 모은 10억의 재산은 몇 번의 사기로 날아갔고 일당 1만원의 사탕 봉지 묶기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탈북자들이 당하는 사기 범죄 피해율은 남한 사람들에 비해 40배 이상 높다. 다섯 명 중 하나는 사기를 당한다. 김만철도 별 수 없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함께 왔던 아이들은 그래도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는 것. 특히 생생한 일기를 써서 유명했던 아들 광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사위 하나는 남한 사람을 맞았고 또 하나의 사위는 탈북한 인민군 출신이다. 그의 팔자란 그렇게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나보다.
그런데 그가 남한에 옴으로써 또 다른 비극 하나가 발생한다. 그가 탈북하던 날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동진27호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원래는 적십자사들끼리 얘기를 해서 풀려나는 것이 정석이었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김만철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북한은 김만철과의 맞교환을 요구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줄 리 없었다. 이에 북한은 송환을 거부했고 동진27호를 간첩선으로 몰았다. 지금도 12명의 선원 중 6명은 아직 그 생사조차 모른다.
김만철은 동북아시아 3국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됐고, 차후로도 꽤 극진한 관심을 받았었지만 동진호 사건의 경우, 북한 정부는 그렇다치고, 남한의 정부도 그리고 그 말 잘하고 잘난체하는 남한의 운동권과 자칭 진보들도 이렇다 할 개입을 하지 않는 무관심 속에 4반세기의 세월을 지냈다. 1987년 1월 15일은 갈라진 반도의 한쪽에서 살아가던 몇몇 사람들의 운명이 오묘하게 , 또는 구슬프게 꼬이기 시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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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5일 따뜻한 남쪽 나라
1987년 1월 14일 남한에서는 박종철이 죽었다. 그런데 박종철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을 그 즈음 북한에서는 또 다른 ‘철이’가 목숨을 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만철. 마흔 일곱살의 의사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김만철 본인은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고 했고 북한은 불륜남의 도피라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친가쪽은 포함되지 않은 처갓집 식구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낡은 배에 올랐다. 식량과 물 등 장기간의 항해까지도 철저히 대비했던 그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경 청진항을 떠났다.
일단 북한 영해를 벗어나려는 마음이었던지 동쪽으로 내달리던 김만철 일가의 낡은 배에 시련이 닥쳤다. 엔진이 고장나고 만 것이다. 한겨울의 거센 파도에 며칠을 시달린 끝에 김만철의 엑소더스 호(?)는 일본 쓰루가 항에 닿아 닻을 내릴 수 있었다. 항을 순찰하던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은 난데없이 출현한 괴선박에 놀라 다가섰지만 배 안에 있던 이들은 해상 보안청 요원들을 만나자마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우리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만철의 배는 동북아시아 3국을 순회하는 강력한 태풍의 핵이 되었다. 6.25 이후 북한 주민이 정교한 계획 하에 탈북을 감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북한도 머리털이 설 일이었고, 남한으로서는 이들을 어떻게든 데려온다면 체제 경쟁에서의 승전고를 울림은 물론, ‘생지옥 북한’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이었기에, 거기다 결정적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덮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온몸의 솜털이 일어섰다. 사이에 낀 일본도 난처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후지산마루호라는 배의 선장과 기관장이 북한에 ‘간첩’으로 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하사 민홍구라는 자가 후지산마루에 몰래 숨어들어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북한이 그 선장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한 것이다. 북한은 여지없이 이 카드를 내밀며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동무들. 알아서 하라우.”
김만철 일가의 소망은 사실 남한도 아니었고 일본도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쯤 되는 “따뜻한 남쪽 나라”의 무인도에 살고 싶었다고 김만철씨가 술회한 바 있으니까. 그리고 김만철의 가족들은 남한을 ‘거지떼가 득실거리는 생지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외교관이 배에 올라타서 남한으로 오면 받게 될 혜택을 늘어놨지만 가족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으로서도 난감했다. 차라리 남한으로 가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청한다면 ‘인도적 견지’에서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가족들 희망대로 제3국으로 보내 버린다면 도끼눈을 뜨고 있는 한국이 걸리고.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머리를.
먼저 꼼수를 낸 건 일본이었다. 추방을 명분으로 남한의 영해 근처에 김만철의 배를 끌고 가서 슬그머니 놓아 주면 남한측이 알아서 인수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들고 귀국한 한국 외교관은 뜻밖의 장소로 초대된다. 인공위성도 떨어뜨릴 세도가 장세동 이하 삼군 참모총장이 총출동한 안가였다. 북한이 행여 방해할 지 모르고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한다는 수뇌부 작전 회의였던 것이다. 북한이 장난을 치면 날려 버리고서라도 김만철을 데리고 오겠다는 결의였다.
하지만 북한을 의식한 일본이 이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남한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펄펄 뛰는 한국에다가 일본이 제시한 안이 대만을 이용하자는 안이었다. “우리는 대만에 보낼게. 한국은 대만하고 친하니까 알아서 데려가.” 이번에는 국내 대만 관련 인맥이 총출동했다. 처음에는 거부 반응을 보이던 대만도 그에 응했고 ‘원조 탈북자’ 김만철 가족은 그렇게 서울에 왔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흘렀다. 2007년의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상에서 김만철은 그 부인과 함께 경기도 광주 야산의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한때 정착금과 강연으로 모은 10억의 재산은 몇 번의 사기로 날아갔고 일당 1만원의 사탕 봉지 묶기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탈북자들이 당하는 사기 범죄 피해율은 남한 사람들에 비해 40배 이상 높다. 다섯 명 중 하나는 사기를 당한다. 김만철도 별 수 없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함께 왔던 아이들은 그래도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는 것. 특히 생생한 일기를 써서 유명했던 아들 광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사위 하나는 남한 사람을 맞았고 또 하나의 사위는 탈북한 인민군 출신이다. 그의 팔자란 그렇게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나보다.
그런데 그가 남한에 옴으로써 또 다른 비극 하나가 발생한다. 그가 탈북하던 날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동진27호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원래는 적십자사들끼리 얘기를 해서 풀려나는 것이 정석이었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김만철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북한은 김만철과의 맞교환을 요구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줄 리 없었다. 이에 북한은 송환을 거부했고 동진27호를 간첩선으로 몰았다. 지금도 12명의 선원 중 6명은 아직 그 생사조차 모른다.
김만철은 동북아시아 3국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됐고, 차후로도 꽤 극진한 관심을 받았었지만 동진호 사건의 경우, 북한 정부는 그렇다치고, 남한의 정부도 그리고 그 말 잘하고 잘난체하는 남한의 운동권과 자칭 진보들도 이렇다 할 개입을 하지 않는 무관심 속에 4반세기의 세월을 지냈다. 1987년 1월 15일은 갈라진 반도의 한쪽에서 살아가던 몇몇 사람들의 운명이 오묘하게 , 또는 구슬프게 꼬이기 시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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