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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4.24 형평사와 강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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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23년 4월 24일 형평사와 강상호

 

‘백정’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누구에게 함부로 썼다가는 칼 맞을 일이거니와 조선 왕조 말기 심지어 개화기 이르러서도 백정이란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천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기와집과 비단옷은 금물이었고 그 좋은 혼례식날도 말을 타다가는 봉변을 감수해야 했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양반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설설 기던 농민들까지도 백정이라면 흰눈부터 떴다.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백정을 벌레보듯 했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서다가는 뉘 집 멍석에 돌돌 말려져 누구 몽둥이에 유명을 달리할 지 몰랐다. 심지어 일제가 들어선 뒤에도 그랬다. 법적으로는 평등했지만 호적이라 할 민적(民籍)에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경상도 하고도 진주는 전통 깊은 도시였다. 역으로 말하면 고정 관념이 낙락장송처럼 뿌리 박혀 있는 동네였다. 진주에 최초로 생긴 기독교 교회인 봉래 교회에서 일이 벌어진다. 처음 교회를 개척한 커틀 선교사는 예수는 믿겠는데 백정은 인간이 아니니 내보내라는 희한한 신자들 앞에서 아연실색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따로 예배를 보았는데 1909년 부임한 리알 선교사는 이를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 (좀 배워라 요즘 개독교인들아), 백정들과 일반인(?)들과의 동석 예배를 추진한다. 백정들이 쭈뼛쭈뼛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4백명 교인 중 3백명이 아우성을 치며 일어선다. “내사 백정하고는 같이 천국 안갈끼라!” 리알 선교사도 보통내기가 아니어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면서 버텼다. 그러나 때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억지에 진다. 개독교인들이 국회의원들을 들볶아 차별금지법안을 파기시킨 오늘날처럼 이때도 리알 선교사는 결국 우매한 백성들에게 굴복한다. 49일간의 분쟁 끝에 결국 종전처럼 따로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진주 지역에 적잖은 파문을 던진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를 부르짖는 목사의 설교를 들은 일반인(?)들이고 백정들이고 가슴 속에 의문 한 자락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 없이 진주냉면 칼칼한 육수는 무엇으로 내며 진주비빔밥 고명의 하이라이트는 뭘로 장식한단 말인가. 또 진주는 진주민란의 기억과 갑오농민전쟁의 기운이 일종의 정신적 유산으로 전승되던 동네였다. 멸시는 받았을망정 새롭게 들어서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력을 쌓은 백정 집단과 역시 과거와 단절한 청년 지식인층 사이에는 점차 연대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건이 터졌다.

 

‘부유한 백정 이학찬은 아들을 공립학교에 여러번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100원을 기부하고 진주 제3야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주변 학생들의 구박에 못이겨 자퇴하고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시켰으나 여기서도 쫓겨났다. 그후 진주에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日新高等普通學校)가 설립되어 구장으로부터 노력봉사에 응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노력봉사를 하면 입학이 보장되는 줄 알고 다른 70여명 백정들과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창립위원회측으로부터 백정은 입학시키지 않겠으며 부역한 댓가는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http://cafe.daum.net/historystory/dta/26?docid=YkBHdta2620071023160032에서 인용)

 

이 사건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는다. 1923년 4월 24일 마침내 ‘형평사’라는 우리 역사에 매우 소중한 이름의 단체가 그 깃발을 올린 것이다. “我等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임을 고창하며 형평사는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고 부르짖는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백정 출신 장지필도 있었지만 주목해야 할 사람은 양반 출신 강상호다.

 

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호소한다. (서울신문 2004.4.10) 백정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거부하자 그는 아예 백정의 자식 두 명을 양자로 들여서는 그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학교로 데려다 주며 차별 철폐를 외친다. 일찍이 국채보상운동을 진주에서 주도했고 3.1운동을 주도하여 옥살이도 했고 진주 정촌면 가좌리에 살 때는 마을 사람들의 세금까지 대신 내 주었던 그는 원래 진주의 천석꾼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 (여기서 형평의 이름이 나온다)는 신념에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천석꾼 재산은 밑빠진 독으로 고스란히 빠져든다. 해방 이후 그는 자식들 교육을 못 시킬 정도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해방 뒤 인민위원장 (다른 직책이라는 설도 있다) 같은 좌익 쪽 감투를 섰던 관계로 남아 있던 재산까지 반공 세력에게 몽땅 뜯겼다고 한다. 그가 고통 속에 1957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의 장례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출신들이 치렀다. 형평장 (전국축산기업조합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는 사람들의 홍수로 넘쳐났다. 그때 옛 형평사원에 의해 읽혀진 조사를 인용해 본다. 백 마디 말보다 강상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 인권 평등을 부르짖으십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 오던 50만의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아마 그 장대한 장례 행렬을 굽어보며 강상호는 그래도 자신의 삶이 값진 것이었음을 재삼 깨닫고 편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니 그 값을 따질 인격이 아니었으매, 그 일로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엿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있고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에 기뻐하며 웃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 때문에 편안히 앉아 밥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아들의 증언) 강상호, 천석군 재산을 스스로 바치고 빨갱이로 몰려 남은 재산도 강탈당했다는 비운의 인물 강상호는 그래도 1923년 4월 24일 형평사를 생각하며 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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