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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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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3.5빨간 마후라 김영환 준장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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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3월 5일 해인사를 구한 빨간 머플러 지다 

고 신상옥 감독의 영결식장. 난데없는 공군 군악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숙연해 마땅한 영결식장의 분위기와 걸맞지 않는 신나고 힘찬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건 “빨간 마후라”였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로 시작하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흥얼거리는 구전가요의 지위에 오른 이 노래는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였고 공군측은 이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에 특별히 이 노래를 바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역시 센스 있는 공군) 

빨간 마후라 하면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 하면 빨간 마후라. 그런데 이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1952년 3월 5일 애기를 몰고 비행 도중 산간지대에 추락, 숨진 김영환 준장이었다. (사망 시 대령) 그는 일본 관서대학 법대를 졸업했지만 일본학생항공연맹에 가입, 비행기 조종술을 익힌 사람이었다. 함흥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 중 종전을 맞았다. 어 친일파? 발끈하실 분도 계시겠으나 넘어가자. 조선 인민군 공군의 아버지라 할 이활도 일본 항공학교 출신이니까. 

미군정 하에서 국방경비대는 창설됐고 육군은 물론이고 해군도 그 대오를 갖춰 갔지만 공군은 가장 지지부진했다. 미군정이 한국에 공군을 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종할 사람이나 있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군 창설을 전제로 7인의 장교들이 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하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산파들이 된다. 그 가운데 김영환은 유달리 쾌활하고 구김살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의 사무실에 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웬 비행기들이 한강다리 아래를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이 기절초풍할 소식에 진위를 알아보니 미국에서 막 도입된 훈련기를 잡아탄 세 명의 악동들이 친 장난이었다. 김영환과 김신 (백범 김구의 차남), 그리고 장성환이라는 이였다. 김정렬의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김정렬은 (김영환의 사촌형이기도 한데) 노발대발하여 이들을 영창을 보냈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장난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이화여대에서 민원이 들어왔다. “웬 비행기들이 학교 위를 저공비행해 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난리가 났소!” 김정렬 총장은 또 한 번 얼굴을 붉혀야 했다. “내 이놈들을 그냥!” 

전쟁이 터졌다. 김영환을 위시한 공군 장교들은 초반에는 연습기 위에 올라타고 수류탄을 까서 떨어뜨리며 싸웠고 전투기를 갖추게 된 다음부터는 갖가지 작전에 참여하여 공훈을 세웠다. 이 전쟁 와중에 탄생한 것이 빨간 마후라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있다. 하나는 이 장난기 가득한 파일럿 김영환이 사촌형수를 만나러 왔다가 그 붉은 색 치마를 보고 “형수! 그 치마 천 남았으면 나 마후라 하나 만들어 주! 조종복에 잘 어울리겠소!” 해서 싹둑싹둑 잘라 만든 마후라를 매고 돌아온 것이 전 공군에게 퍼졌다는 설 하나, 비행 중 전투나 불의의 사고로 착륙하게 되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고 판단하고 시장에서 빨간 인조견을 구해 만들었다는 설 하나. 그 어느 것이든 빨간 마후라의 원조는 김영환이었다. 그런데 막상 불시착한 뒤 그는 빨간 마후라가 필요없었던 것 같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중 섬진강변에 불시착한 뒤 근처에 그득한 빨치산들 때문에 동료들이 애가 타서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호위하는 가운데 그는 여유작작 수영을 즐겼다고 하니까. 

이런 걸물이 가장 빛나던 순간은 역시 1951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리산을 위시한 소백산맥에는 빨치산들이 무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산사람’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을 오가며 ‘제2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산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한 구조물을 폭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구조물이란 뜻밖에도 가야산 해인사였다. 8만대장경이 있는. 

정찰기는 연막탄을 해인사 경내에 떨어뜨렸다. 이제 네이팜탄 몇 개 떨어뜨리면 천년 고찰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아울러 몽골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지성으로 조각했고 임진왜란의 참화도 피했던 불굴의 기념물 팔만대장경도 땔감이 될 판이었다. 그런데 편대장 김영환은 공격을 머뭇거린다. “뭘 하고 있나?” 하는 독촉과 “적들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하는 부하의 채근을 들으면서 편대장 김영환은 중대한 명령을 내린다. “공격하지 마라. 공격하지 마라.” 그는 해인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안 장경각에 든 천년의 세월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강 다리 아래를 비행기로 통과하여 사람들을 기겁시킨 악동은 그렇게 국보를 구한다. 명령불복종을 따지며 “사찰이 나라보다 귀하냐?”고 힐난하는 미군 장교 앞에서 이 왕년의 악동 김영환 편대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라보다 귀한 사찰이야 없겠소만 해인사는 공비(토벌)보다는 귀하지 않겠소.” 

우리 나라 어디를 가도 문화재 앞의 팻말에는 대부분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까마득히 옛날에 창건되거나 조성되었는데 몽고 침략, 임진왜란 아니면 모모한 화재로 불타 없어진 뒤 다시 지은 것이라”는 식이다. 자칫하면 해인사 역시 그 이름에 오를 뻔 했다. 우리 역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오리지널’ 문화재도 자취도 없이 사라질 번 했다. 하지만 그를 막은 건 여유작작한 하늘의 사나이 최초의 빨간 마후라 김영환이었다. 그는 최후까지도 마치 전설같았다. 강릉 공군 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1954년 3월 5일 대관령 어느께에선가 자취도 없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수색대가 그의 흔적을 더듬었지만 그의 애기도, 그도 태백산맥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비행기 위에서 굽어보는 경치에 감탄하다가 바다에라도 빨려들어간 것인지, 하늘로 솟았던 것인지 그것은 알 길이 없다. 김영환 준장 (추서)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니 세상에 그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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