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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2.15 삼국의 영웅의 허망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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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2월 15일 삼국의 영웅의 최후

어린 시절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이 분분하고, 기발하기까지 한 상상력이 동원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이름은 역도산. 사실 그는 우리 또래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었고 당시의 빈약한 영상자료로서는 그의 얼굴조차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박치기 왕 김일의 스승으로서 원조 영웅쯤 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던 역도산의 죽음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는 전설은 이랬다.
...
“역도산이 일본 레슬링 선수들을 다 때리 눕히니까 일본 놈들이 억수로 밉거덩. 그래가 일본 깡패가 칼을 던짔거덩. 근데 역도산 배가 거의 철판 아이라. 칼이 배에 맞고 튀어나왔는데 숨을 내쉴 때는 배가 약해지거덩. 그거를 눈치챈 딴 깡패 놈이 배를 찔러서 죽었다.”

이 전설은 사실과 거짓이 2:8의 비율로 섞여 있었다. 일본 깡패에게 칼을 맞은 것만큼은 사실이었지만 칼을 튕겨내기는 커녕, 깊이 찔리지도 않은 상처가 덧나 그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63년 12월 15일이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역도산의 이름을 알게 했던 전설의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역도산이 일본 레슬링 선수들을 다 때려눕혀서 미움을 샀다는 거였다. 미움을 사기는커녕 역도산의 장례식에는 1만명이 넘는 일본 사람들이 모여서 슬피 울었다. 그는 일본의 영웅이었다.

링 위에서 역도산의 무기는 ‘가라데 촙’이었다. 일본 말 가라데에 도끼로 쪼갠다는 뜻의 영어 단어 chob이 합성된 가라데 촙으로 역도산은 덩치 큰 백인 선수들을 때려눕힘으로써 일본 최고의 영웅이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완전히 두 손을 들어 버린 뒤 인간이 아닌 신으로 존경받던 천황이 주머니에 손 넣은 키 큰 미국 장군을 방문하여 애처롭게 사진을 찍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그렇게 극렬하게 저항했던 것 치고는 너무나 양순하게 피점령국 국민이 됐던 일본인들은 링 위에서 역도산이 휘두르는 ‘가라데촙’에 백인들이 픽픽 나가 떨어지는 모습에 그야말로 열광했다. TV 수상기가 1만대 정도 보급된 상황에서 1400만이 역도산의 경기 중계를 지켜봤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14인치도 안되었을 흑백 TV 한 대 앞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는 이야기다.

‘리키’가 ‘조센징’이라는 것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역도산 자신도 성의껏 부응했다. 사석에는 재일교포들과도 교류하고 불고기 먹고 술 한 잔 걸치고는 아리랑과 도라지 타령도 불러 제꼈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한국인임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역도산을 흠모하여 밀항선을 타고 건너갔다가 유치장에 갇힌 김일을 꺼내 준 것은 역도산이었지만 그는 김일에게 이후 단 한 마디의 한국말도 건네지 않았다.

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지척에서 역도산이 한국어를 쓴 것은, 아니 썼다고 추정되는 순간은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와 단 둘이 만났을 때 뿐이었다. 고향이 함경도였던 두 사람만 있었을 때에는 역도산이 그렇게도 숨기려던 모국어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므스근 일이든 힘들지 아이하겠소. 힘을 내오” “일없습니다. 맵짠 세월 다 지났습니다.(힘든 세월은 다 지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함경도 사내들은 그들만의 회포를 풀지 않았을까.

그 고향이 함경도였고, 애초에 그 지역에서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역도산, 본명 김신락은 그 출신지 때문에 또 한 나라의 영웅이 됐다. 조선인민공화국이다. 고향에는 김신락의 형제들이 있었고 고향 여자 사이에서 낳은 첫딸이 커 가고 있었다. 1961년의 어느 날, 재일교포 북송선 만경봉호가 입항했을 때 그 배에는 역도산의 형과 친딸이 타고 있었다. 상륙 허가가 날 리 없던 그들을 위해 역도산이 혼자 그 배에 올라탔고, 딸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상봉을 한다. 그는 동경 올림픽에 출전할 북한 선수단의 경비 부담을 약속했고 김일성에게는 벤츠 선물을 하며,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 원수 만세까지 적어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또 남쪽에 대해서도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을 방문하여 카퍼레이드도 하고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판문점에 가서 옷을 벗어던지고 북쪽을 향해 ‘형님!’을 부르짖은 일화는 유명하다. 중앙정보부장이며 김종필이며 당시의 유력자들을 다 만나고 돌아간 그는 그로부터 15년 쯤 흐른 뒤까지도 지방 도시의 국민학생이었던 내 또래들에게도 쟁쟁한 영웅이었다.

미묘한 관계의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서 모두 영웅 대접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역도산 하나일 것이다. 남한의 영웅은 북조선의 원쑤였을 것이고 일본의 영웅이 남북한 공히 환영받을 이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역도산은 그 현대사를 통틀어 삼국이 동시에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서, 두 낱으로 갈라진 조국 어디에도 그 정체성을 뿌리내리지 못한 국외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호화로운 결혼식을 통해 맞이한 신부와의 신혼 여행길에서 그가 했다는 말은 그 서글픔을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는 갈라져 있어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반도를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삶의 터전인 일본, 그리고 갈 수는 있으나 고향과는 거리가 먼 고국 한국, 고향을 두고 피붙이가 있으나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북한. 그는 3국의 영웅이었지만 3국을 떠도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1963년 12월 15일 발을 밟았다고 시비가 붙은 일본 야쿠자에게 역도산은 자상을 입었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3국 모두에 말빨이 통하는, 평화의 사도로서 기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기구하고도 애매한 인생 자체가 김일성이 역도산의 딸에게 한 말대로, “조선사람이면서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였고 그 욕된 운명을 이기고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훨씬 더 많은 기억으로 우리에게 남게 되지 않았을까. 오늘의 칼만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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