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04년 1월 1일 슬픈 아이티 독립기념일
세상 일이란 게 그렇습니다. 항상 옳은 쪽이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고), 승리하더라도 그게 녹녹히 이뤄지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탈탈 털어도 드물지요. 되레 정말 역사에 진보는 있는 것인가,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1804년 1월 1일 독립한 아이티의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지요.
먼저 세계 지도나 지구본을 갖다 놓고 아이티라는 나라를 찾아 보세요. 카리브 해상 쿠바 옆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위치한 섬나라인데 그 섬의 상당 부분은 그나마 도미니카 땅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 아이티는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나라죠. 원래는 당연히 에스파니아 땅이었다가 프랑스로 넘어간 뒤 이 지역은 프랑스령 생도밍그라고 불리며 번창했습니다. 유럽의 어느 항구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입출항했다고 하면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가겠죠. 주요 산업은 설탕과 커피 재배였고 그로 인해 프랑스에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줬습니다.
커피나 사탕수수 재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그 일손들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검은 손들이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티에는 강력한 백인들의 지배 하에서 흑백 혼혈인 뮬라토가 백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다수의 흑인 노예들을 또한 경멸하면서 살아가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령 도밍그에도 불어오고 뮬래토들은 백인 지배층에 대해 반항하지만 철저하게 두들겨 맞지요. 본격적인 저항은 흑인 노예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이에 의해 시작됩니다. 흑인 노예의 아들이었지만 일찍 자유의 몸이 됐고 교육도 꽤 받았던 사람이었지요. 이미 나이가 꽤 들어 ‘영감’ 소리를 듣던 그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을 외치며 항쟁에 돌입합니다. “나는 자유와 평등이 생 도밍그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생 도밍그를 탐낸 영국이 생도밍그를 공격하여 수도를 손에 넣었을 때 생도밍그 섬의 대표는 프랑스 국민회의장에 나타나 생도밍그의 실태를 알리고 인권과 자유의 확대를 요청합니다. 이에 감동한 프랑스 국민의회는 노예제 철폐를 선언하고 프랑스에 저항하던 흑인 노예 군대는 당장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하며 영국군을 두들겨 부숩니다. 이를 지휘했던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 장성의 계급장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을 몰아낸 뒤 총독 다음의 실력자가 된 투생은 인종간의 화해와 통합을 기조로 한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에 불만을 제기하는 흑인 노예들 앞에서 물과 술을 섞어 버린 후 “술과 물을 구분할 수 있겠나? 우린 이렇게 섞여 살 수 밖에 없단 말이야!”라고 설득했던 예는 유명하죠. 하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듯한 놈”이라는 경멸을 받게 마련입니다. 투생도 그래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부터 신뢰를 적잖이 잃지요. 거기에 유럽 대륙에 초대형의 적수가 나타납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은 이미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해 가던 투생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매제 르클레르가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프랑스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지만 끝내 프랑스군에 체포되고 말죠. 그가 프랑스로 압송되기 전 남긴 말은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너희 프랑스인들이 베어낸 것은 도밍그의 자유라는 나무의 줄기일 뿐이다. 뿌리로부터 이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깊숙이 그리고 셀수 없이 뻗어 있는 뿌리들로부터.”
이 ‘흑인 자코뱅’은 1803년 4월 프랑스에서 사망하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프랑스는 생도밍그에서 철수합니다. 흑인 노예들의 저항도 저항이었지만 황열병이라는 열대성 전염병은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만큼 무서운 놈이었죠. 거기에 영국의 해상 봉쇄가 계속되면서 생도밍그 저항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마침내 1804년 1월 1일 생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으로 지구상 최초의 흑인 독립국,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국 (미국에 이어) 으로 지구상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독립은 기쁨보다는 슬픔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예제가 엄존하던 세상에서 노예들의 반란으로 선 국가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지배층에게도 용납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싫은, 일종의 ‘금단의 나라’였습니다. 자본주의 일색의 지구상에 갑자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했답시는 작은 섬나라가 등장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대통령 제퍼슨부터 남아메리카의 독립 혁명지도자들까지 아이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죠. (참고로 이웃 사촌 미국은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합니다) 더구나 아이티인들은 백인들의 식민지 포기에 대한 댓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 환산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받습니다. 이는 프랑스 1년 예산에 가까운 돈이었다지요. 이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을 하겠다는 위협 앞에서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에 빚을 져야 했고 이 빚은 두고두고 아이티인들의 대를 이은 채무가 됩니다. 그들이 그 빚(?)에서 놓여난 것은 거의 1백년 뒤였다고하니 아이티인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을지 대충 짐작이 가겠지요.
프랑스의 경제적 지배는 또 다른 탐욕스런 지배자 미국에 의해 끝장나고 미국은 아이티를 점령하지만 이때 아이티인 수만 명이 미군의 손에 학살당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조종을 받는 대를 이은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의 지배를 받으며 아이티는 오갈데없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해서 아이들에게 진흙 과자를 먹이고 아이들은 흙에 사는 기생충으로 주어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나라가 됐습니다.
2013년 1월 1일은 아이티 독립 209주년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아이티 국민들일망정 그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만 그들이 지내온 나날을 생각하면 차마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토록 빨리 역사의 진보를 이뤄 낸 나라, 노예들의 혁명으로 독립을 일궈 낸 나라의 오늘을 생각하면 당혹감을 넘어서는 허망함이 눈앞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과연 오늘 아이티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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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1월 1일 슬픈 아이티 독립기념일
세상 일이란 게 그렇습니다. 항상 옳은 쪽이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고), 승리하더라도 그게 녹녹히 이뤄지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탈탈 털어도 드물지요. 되레 정말 역사에 진보는 있는 것인가, 과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사례가 더 많이 발견되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1804년 1월 1일 독립한 아이티의 역사를 보면 더욱 그렇지요.
먼저 세계 지도나 지구본을 갖다 놓고 아이티라는 나라를 찾아 보세요. 카리브 해상 쿠바 옆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위치한 섬나라인데 그 섬의 상당 부분은 그나마 도미니카 땅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 아이티는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나라죠. 원래는 당연히 에스파니아 땅이었다가 프랑스로 넘어간 뒤 이 지역은 프랑스령 생도밍그라고 불리며 번창했습니다. 유럽의 어느 항구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입출항했다고 하면 대충 분위기가 짐작이 가겠죠. 주요 산업은 설탕과 커피 재배였고 그로 인해 프랑스에 막대한 부를 안겨다 줬습니다.
커피나 사탕수수 재배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그 일손들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검은 손들이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티에는 강력한 백인들의 지배 하에서 흑백 혼혈인 뮬라토가 백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다수의 흑인 노예들을 또한 경멸하면서 살아가는 구도가 형성됩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령 도밍그에도 불어오고 뮬래토들은 백인 지배층에 대해 반항하지만 철저하게 두들겨 맞지요. 본격적인 저항은 흑인 노예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이에 의해 시작됩니다. 흑인 노예의 아들이었지만 일찍 자유의 몸이 됐고 교육도 꽤 받았던 사람이었지요. 이미 나이가 꽤 들어 ‘영감’ 소리를 듣던 그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을 외치며 항쟁에 돌입합니다. “나는 자유와 평등이 생 도밍그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생 도밍그를 탐낸 영국이 생도밍그를 공격하여 수도를 손에 넣었을 때 생도밍그 섬의 대표는 프랑스 국민회의장에 나타나 생도밍그의 실태를 알리고 인권과 자유의 확대를 요청합니다. 이에 감동한 프랑스 국민의회는 노예제 철폐를 선언하고 프랑스에 저항하던 흑인 노예 군대는 당장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하며 영국군을 두들겨 부숩니다. 이를 지휘했던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 장성의 계급장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을 몰아낸 뒤 총독 다음의 실력자가 된 투생은 인종간의 화해와 통합을 기조로 한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에 불만을 제기하는 흑인 노예들 앞에서 물과 술을 섞어 버린 후 “술과 물을 구분할 수 있겠나? 우린 이렇게 섞여 살 수 밖에 없단 말이야!”라고 설득했던 예는 유명하죠. 하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듯한 놈”이라는 경멸을 받게 마련입니다. 투생도 그래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부터 신뢰를 적잖이 잃지요. 거기에 유럽 대륙에 초대형의 적수가 나타납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은 이미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해 가던 투생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매제 르클레르가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합니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프랑스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지만 끝내 프랑스군에 체포되고 말죠. 그가 프랑스로 압송되기 전 남긴 말은 예언과도 같았습니다. “너희 프랑스인들이 베어낸 것은 도밍그의 자유라는 나무의 줄기일 뿐이다. 뿌리로부터 이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깊숙이 그리고 셀수 없이 뻗어 있는 뿌리들로부터.”
이 ‘흑인 자코뱅’은 1803년 4월 프랑스에서 사망하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프랑스는 생도밍그에서 철수합니다. 흑인 노예들의 저항도 저항이었지만 황열병이라는 열대성 전염병은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만큼 무서운 놈이었죠. 거기에 영국의 해상 봉쇄가 계속되면서 생도밍그 저항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마침내 1804년 1월 1일 생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으로 지구상 최초의 흑인 독립국,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국 (미국에 이어) 으로 지구상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독립은 기쁨보다는 슬픔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예제가 엄존하던 세상에서 노예들의 반란으로 선 국가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지배층에게도 용납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싫은, 일종의 ‘금단의 나라’였습니다. 자본주의 일색의 지구상에 갑자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했답시는 작은 섬나라가 등장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 대통령 제퍼슨부터 남아메리카의 독립 혁명지도자들까지 아이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죠. (참고로 이웃 사촌 미국은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합니다) 더구나 아이티인들은 백인들의 식민지 포기에 대한 댓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 환산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받습니다. 이는 프랑스 1년 예산에 가까운 돈이었다지요. 이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을 하겠다는 위협 앞에서 아이티인들은 프랑스에 빚을 져야 했고 이 빚은 두고두고 아이티인들의 대를 이은 채무가 됩니다. 그들이 그 빚(?)에서 놓여난 것은 거의 1백년 뒤였다고하니 아이티인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을지 대충 짐작이 가겠지요.
프랑스의 경제적 지배는 또 다른 탐욕스런 지배자 미국에 의해 끝장나고 미국은 아이티를 점령하지만 이때 아이티인 수만 명이 미군의 손에 학살당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조종을 받는 대를 이은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의 지배를 받으며 아이티는 오갈데없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해서 아이들에게 진흙 과자를 먹이고 아이들은 흙에 사는 기생충으로 주어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나라가 됐습니다.
2013년 1월 1일은 아이티 독립 209주년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아이티 국민들일망정 그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싶습니다만 그들이 지내온 나날을 생각하면 차마 축하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토록 빨리 역사의 진보를 이뤄 낸 나라, 노예들의 혁명으로 독립을 일궈 낸 나라의 오늘을 생각하면 당혹감을 넘어서는 허망함이 눈앞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과연 오늘 아이티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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