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흔히 유신 시대를 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같은 것 없이 종신집권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엄연히 대통령 임기도 있고,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임기는 6년으로 프랑스보다 오히려 1년 적었고 대통령 선거도 치러졌다. 단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손이 아닌 매우 기이한 이름의 ‘선거인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름하야 ‘통일주체국민회의’. 요즘 새누리당이 들으면 당장 “종북주의자!”라고 거품을 물 이름이겠는데 유신헌법 선포 후 부랴부랴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이뤄졌다. 1972년 12월 15일이었다.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초대 대의원 2,359명이 확정되었는데 직업별로는 농업이 전체의 48%였다. 이미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1972년에 갑자기 왜 대통령 선거인단의 절반이 농민이 되었는지 그 조화속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거 이외에도 통일 정책을 심의하고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하는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플라스틱 음식같은 기관이었다. 전시용의, 그리고 먹을 것 없는.
12월 15일 선거를 통해 결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차 회의를 거쳐 대통령을 선출했다. 2359명의 대의원이 만장한 가운데 형식 다 갖추고 폼 다 잡은 ‘선거’가 이뤄졌다. 이윽고 발표된 선거 결과는 그들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성표가 2357표에 이른 것이다. 2표는 기표에 실수한 무효표. 북한의 100% 투표 100% 찬성에 맞먹는 선거 결과였다. 아마도 명색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진 선거판에서는 기록적인 득표율에 해당할 것이다. 박정희는 이 99.9퍼센트의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 뒤 온갖 긴급조치를 떨어뜨리며 국민들의 입을 용접하고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6년 뒤 또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힌다.
이번에는 2581명으로 구성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축사’를 한다. “친애하는 대의원 여러분........ 이제 제2대 대의원 여러분들은 유신한국의 새 역사 창조의 기수로써 또한 통일 대협달성을 위한 민족 주체세력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972년 우리가 10월 유신을 단행한지도 언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급변하는 내외정세에 직면한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양상은 어떠했던가, 이러한 문제는 아랑곳도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낭비와 비능률과 무질서가 만연하고 있었고 정파 간의 극한투쟁과 선동정치의 폐해 속에서 무책임한 인기 전술 등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내일의 진로도 정립하지 못한 채 목전의 일에만 급급하는 풍조가 우리사회에 구석구석에 가득 차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국보간난의 시기에 국정의 능률을 극대화해서 국력을 조직화해서 내외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나가고자 우리는 마침내 구국적 일대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습니다.”
선거를 앞둔 대통령의 연설이 아니라 휘하 병력을 모아 두고 자신의 부대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사단장의 훈화라 할 것이다. 이에 감명받았는지 제 2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무효표를 50퍼센트 줄이는 탁월한 성과를 가져왔다. 두어 달 뒤 실시된 체육관 선거에서 2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2577명이 찬성하고 단 1명만이 무효표를 던졌던(?) 것이다. 이 시기를 두고 우리는 4 ‘공화국’이라 일컫거니와 왕국에서도 벌어지기 힘든 ‘선거’가 그 공화국에서는 펼쳐지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나마 용기 있는 사람이 그 삼엄한 체육관 내에서 100퍼센트 찬성의 오점을 남기지 않고자 ‘박정히’라고 오기하여 무효표 하나를 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치도곤을 맞았다고 전한다.
출마자가 한 사람이니 그에 반대한다고 적어도 ‘반대’가 아닌 무효로 처리되었을 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던 최규하가 대통령 직에 오를 때에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렸는데 이때는 84표라는 사상 최대(?)의 ‘무효표’가 나온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오지만 전두환 이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 봄은 또 다시 얼어붙는다. 광주의 피바람이 한바탕 전국을 숨죽이게 한 뒤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다시금 유신 때의 ‘군기’를 되찾는다. 작년까지 별 두 개였던 주제에 갑자기 별 네 개를 달고 전역한 전두환 장군에게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무효표는 1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철권 독재자는 이렇게 국민의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장식품이자 요식 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부여하고 99.9%의 찬성률을 습득하여 제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러고 대의원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었고 여전히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먼 나라 얘기도 아니고 먼 과거 얘기도 아니다. 87년 6월 항쟁은 그 국민의 권리를 다시 되찾겠다는 국민들의 항거로 점철된 사건이었다.
놀러 가거나 늦잠을 자거나 귀찮아서 내팽개친 우리의 한 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무효표 1-2표를 제외하고 대통령 각하 만세를 부르짖는 이 희한함을 거부했던 손모음과 땀방울이 빚어낸 열매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바로 그 시대, 대통령 옆에서 환한 웃음 지으며 손 흔들던 ‘퍼스트 레이디’가 다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 있다. 그리고 그녀는 무효표 1표 99.9퍼센트의 찬성률로 대통령이 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정치의 이유라고 우긴다. 이를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희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그때 국민들은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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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흔히 유신 시대를 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같은 것 없이 종신집권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엄연히 대통령 임기도 있고,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임기는 6년으로 프랑스보다 오히려 1년 적었고 대통령 선거도 치러졌다. 단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손이 아닌 매우 기이한 이름의 ‘선거인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름하야 ‘통일주체국민회의’. 요즘 새누리당이 들으면 당장 “종북주의자!”라고 거품을 물 이름이겠는데 유신헌법 선포 후 부랴부랴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이뤄졌다. 1972년 12월 15일이었다.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초대 대의원 2,359명이 확정되었는데 직업별로는 농업이 전체의 48%였다. 이미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1972년에 갑자기 왜 대통령 선거인단의 절반이 농민이 되었는지 그 조화속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거 이외에도 통일 정책을 심의하고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1/3을 선출하는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플라스틱 음식같은 기관이었다. 전시용의, 그리고 먹을 것 없는.
12월 15일 선거를 통해 결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차 회의를 거쳐 대통령을 선출했다. 2359명의 대의원이 만장한 가운데 형식 다 갖추고 폼 다 잡은 ‘선거’가 이뤄졌다. 이윽고 발표된 선거 결과는 그들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성표가 2357표에 이른 것이다. 2표는 기표에 실수한 무효표. 북한의 100% 투표 100% 찬성에 맞먹는 선거 결과였다. 아마도 명색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진 선거판에서는 기록적인 득표율에 해당할 것이다. 박정희는 이 99.9퍼센트의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 뒤 온갖 긴급조치를 떨어뜨리며 국민들의 입을 용접하고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6년 뒤 또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힌다.
이번에는 2581명으로 구성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축사’를 한다. “친애하는 대의원 여러분........ 이제 제2대 대의원 여러분들은 유신한국의 새 역사 창조의 기수로써 또한 통일 대협달성을 위한 민족 주체세력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972년 우리가 10월 유신을 단행한지도 언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급변하는 내외정세에 직면한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양상은 어떠했던가, 이러한 문제는 아랑곳도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낭비와 비능률과 무질서가 만연하고 있었고 정파 간의 극한투쟁과 선동정치의 폐해 속에서 무책임한 인기 전술 등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내일의 진로도 정립하지 못한 채 목전의 일에만 급급하는 풍조가 우리사회에 구석구석에 가득 차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국보간난의 시기에 국정의 능률을 극대화해서 국력을 조직화해서 내외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나가고자 우리는 마침내 구국적 일대에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습니다.”
선거를 앞둔 대통령의 연설이 아니라 휘하 병력을 모아 두고 자신의 부대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사단장의 훈화라 할 것이다. 이에 감명받았는지 제 2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무효표를 50퍼센트 줄이는 탁월한 성과를 가져왔다. 두어 달 뒤 실시된 체육관 선거에서 2578명이 참석한 가운데 2577명이 찬성하고 단 1명만이 무효표를 던졌던(?) 것이다. 이 시기를 두고 우리는 4 ‘공화국’이라 일컫거니와 왕국에서도 벌어지기 힘든 ‘선거’가 그 공화국에서는 펼쳐지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나마 용기 있는 사람이 그 삼엄한 체육관 내에서 100퍼센트 찬성의 오점을 남기지 않고자 ‘박정히’라고 오기하여 무효표 하나를 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치도곤을 맞았다고 전한다.
출마자가 한 사람이니 그에 반대한다고 적어도 ‘반대’가 아닌 무효로 처리되었을 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던 최규하가 대통령 직에 오를 때에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렸는데 이때는 84표라는 사상 최대(?)의 ‘무효표’가 나온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오지만 전두환 이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 봄은 또 다시 얼어붙는다. 광주의 피바람이 한바탕 전국을 숨죽이게 한 뒤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다시금 유신 때의 ‘군기’를 되찾는다. 작년까지 별 두 개였던 주제에 갑자기 별 네 개를 달고 전역한 전두환 장군에게 2525명 가운데 2524명이 찬성표를 던졌고 무효표는 1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철권 독재자는 이렇게 국민의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장식품이자 요식 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부여하고 99.9%의 찬성률을 습득하여 제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러고 대의원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짖었고 여전히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먼 나라 얘기도 아니고 먼 과거 얘기도 아니다. 87년 6월 항쟁은 그 국민의 권리를 다시 되찾겠다는 국민들의 항거로 점철된 사건이었다.
놀러 가거나 늦잠을 자거나 귀찮아서 내팽개친 우리의 한 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 모여 무효표 1-2표를 제외하고 대통령 각하 만세를 부르짖는 이 희한함을 거부했던 손모음과 땀방울이 빚어낸 열매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바로 그 시대, 대통령 옆에서 환한 웃음 지으며 손 흔들던 ‘퍼스트 레이디’가 다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 있다. 그리고 그녀는 무효표 1표 99.9퍼센트의 찬성률로 대통령이 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정치의 이유라고 우긴다. 이를 비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희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1972년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그때 국민들은 또 어떤 심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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