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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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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12월 12일 12.12의 비극 


역대 대통령 이름을 적을 때 저는 대개 뒤에 대통령을 붙여 줍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독재자이긴 했으나 어쨌건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됐거나 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저는 대통령 호칭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태우도 광주학살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직선 대통령이고 그 뒷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하지만 딱 한 사람 
전두환만큼은 저는 대통령 호칭을 여간해서 붙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대한민국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고 휴전선 이남의 공화국 영토를 제 식솔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던 광주의 흡혈귀이자 그 이후 펼쳐진 80년대 불바다의 발화자(發火者)에게 공화국 대통령의 칭호는 아무리 양보해도 돼지 앞의 진주고 개발의 편자기 때문입니다. 

시바스 리걸과 여가수와 여대생을 앞에 두고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가 박살난 후 발생한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대한민국 군 장성들은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신현확 부총리가 헌법에 의해 규정된 통치권자 승계 원칙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자리에 배석해 있던 수십 명의 군 장성들은 벌떡 일어나 최규하 국무총리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비록 독재자의 수족 노릇을 충실히 하던 군인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사병이 아닌 공화국의 군인임을 증명했던 거겠죠. 

하지만 원래 어느 역사에서든 아름다운 순간은 길지 않은 법입니다. 그로부터 두 달도 되지 않아 12.12라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군사 반란이 일어나니까요. 전두환 이하 육사 11기들과 그 똘마니들이 ‘거사’에 성공한 후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하는 모습이 자료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름 목숨을 건 일이 끝나서 그런지 노는 꼬라지들을 보면 마치 시험 끝낸 어린아이들 같더군요. 스스로 위계질서를 뒤엎고 군령을 거역한 이 깡패 군인들은 그렇게 즐거워했지만 그 순간 온몸의 조각조각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려는 하나회 인맥에 맞서서 대한민국 국군 통수 체제를 지키려던 두 장군.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뒷 이야기는 무슨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 합니다. 우선 장태완 소장부터 볼까요. 

드라마 속에서 카리스마 성우 출신 김기현씨의 열연으로 유명한 바로 그 멘트 “ 이 반란군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전차 몰고 가서 너희들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라고 일갈하던 호랑이같은 장군이었지만, 이미 그 호랑이의 네 다리는 하나회 출신 늑대들이 다 물어뜯어 놓은 뒤였지요. 장태완 장군이 체포된 후 장군의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합니다. “모반자가 득세한 세상에 충신이 살아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넉 달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그 횡액을 당한 후 80년에 고3이었습니다. 보안대원이 집안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서울대 자연대 수석입학을 해 유폐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기쁘게 했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비극과 전두환 시대의 암울함에 고민하던 아들은 홀연 집을 나갔다가 할아버지의 묘소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장태완 장군은 평생 동안 “반란을 막지 못하고 가족 3대를 망친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가지고 살았고 2010년 한많은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써 끝난 게 아니었지요. 올해 1월 17일 장태완 장군의 부인이 투신자살로 생을 끝맺은 겁니다. 남편이 먼저 간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지요. 그 슬픈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 1월 18일은 전두환의 여든 한 번째 생일이었고 29만원 전재산의 노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답니다. 참 얄궂어도 이렇게 얄궂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휘하 여단장들이 죄다 신군부에 가담한 것을 알고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공수여단을 출동시키며 반란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천상 군인이었지요. 6.25 참전 장교였고 5.16 때에는 쿠데타에 동의하지 않아 이른바 혁명 주체 세력에게 곤욕도 치르기도 했고 아내에게는 “나는 군인으로 끝이야. 군인 끝난 뒤에 무슨 공사 사장 같은 거 절대 안 해. 각오해.”라고 몇 번이나 되뇌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자식처럼 기른 부하들에게 참혹하게 배신당합니다. 

그 곁을 지키던 유일한 사람은 김오랑 소령. 육사 25기였던 김오랑 소령은 12.12가 일어나기 전 그를 아끼던 누군가에게 귀띔을 받았다고 합니다. 알아서 몸을 피하라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그는 그를 뿌리치고 권총만 가지고 정병주 사령관을 호위하다가 M16 소총의 난사를 받고 죽습니다. 그의 시신은 허술하게 화장돼서 가매장됐다가 국립묘지로 가게 되는데 그 서슬 푸른 전두환의 시대에서도 “김오랑의 군인 정신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동기들과 그 상관들의 단호한 의지 덕에 국립묘지로 갈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부인은 충격으로 실명하고서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 둘을 딸로 거두며 살다가 남편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정병주 사령관이 의문의 자살을 한 후 따르기라도 하듯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2.12 당시 신군부측 병력이 국방부를 장악을 기도했을 때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휘하의 경비병력에게 국방부 사수를 명령했지요. 그러나 언뜻 봐도 살기 어린 공수부대가 총을 난사하며 쳐들어오자 이미 기가 죽어 버린 경비병들은 총을 버리고 손을 듭니다. 하지만 제대를 석 달 앞둔 병장 하나는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달려들어 총을 뺏으려고 했고 병장이 지지 않고 그들에게 발길질을 한 순간 공수부대원들의 총구는 불을 뿜고 맙니다. 광주 조선대학교 2학년 재학 중 입대했던 정선엽 병장은 5개월 뒤 그의 사랑하는 고향을 피로 물들일 야수들의 손에 그렇게 죽음을 당했죠. 

12.12는 단순히 전두환이 권좌에 오른 첫 계단에 불과한 사건이 아닙니다. 패거리들의 야욕이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의 선의를 짓밟아 버린 사건이었고, 힘으로 정의를 유린한 일이었고, 뻔뻔함이 우직함을 꺾어버린 일이었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렇게 나쁜 놈들은 호의호식 자손만대에 번성하고 뭔가를 지켜 보겠다고 용기를 낸 사람들은 자신을 비롯한 ‘3대’에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운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던 사건이었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을 홀로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김오랑 소령은 키가 작았다고 해요. 정병주 사령관은 그를 두고 “작지만 큰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2월 12일은 작지만 큰 사람들이 한없이 커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소인배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명예를 빼앗기고 상처받아야 했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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