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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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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12 도끼살인마 고재봉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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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1월 12일 도끼살인자 고재봉 검거

1963년 11월 12일 청계천 5가에서 장사하던 한 땅콩 장수는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표어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그가 의심을 두고 수상하게 본 것은 간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간첩을 방불케하는 현상금이 붙은 사람이었다. 바로 대략 20여일 전 강원도 인제에서 육군 중령 일가족과 가정부 총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여 버렸던 살인마 
고재봉이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후일 연쇄살인사건이나 여러 명이 희생된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원조격으로 들먹여진다. 

21세기 세계 14대 경제 대국이 어쩌고 하는 나라의 군대에서도 사병들 군화가 없니 어쩌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는 판이니 60년대의 군대가 어땠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요즘 북한 인민군들이 즐겨 한다는 농담처럼 사단에서는 사정없이 떼먹고 연대에서는 연달아 해 먹고 대대에서는 대대적으로 떼먹고 중대에서는 중간 중간에 해먹는 것이 당시 한국군의 현실이었고 사병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고재봉도 그 중의 하나였다. 3군단 예하 1109 야공단 소속이었던 그는 대대장의 당번병 격으로 뽑혀 사택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던 그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나오다가 가정부에게 걸린다. 그게 누룽지였다는 말도 있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는 말도 있고 애인 만나는데 군화가 낡아 대대장의 군화를 대신 신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뭔가를 들고 나오다가 걸린 고재봉은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가정부에게 도끼를 들고 협박했다가 영창으로 간다. 

그때껏 발생한 도난 사건의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쓴 그는 7개월 영창 살이를 하는데 그 철창 안에서 그는 이를 악문 악마가 된다. 출감하면 자신에게 이런 대접을 한 대대장 가족을 다 몰살시키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채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출감한 뒤 대대장 집 근처 짚단 속에서 이틀을 새우는 독기를 발휘하며 살인을 준비한다. 그리고 깊은 밤 대대장 관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대대장과 그 아내, 아이들과 가정부 6명을 도끼로 찍어 죽인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7개월 사이에 대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즉 고재봉이 휘두른 도끼에 맞은 것은 전혀 다른 대대장과 그 가족이었다. 이때 죽은 대대장 이득주 중령과 그 의 아내는 또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6.25 때 한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지리멸렬 후퇴할 때의 일이다. 동부전선에서 선전했지만 서부전선이 붕괴되면서 후퇴한 6사단 7연대 2대대는 충북 음성 근처에 주둔 중 숨이 턱에 닿은 여교사의 방문을 받는다. "이북 군인들이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있어요." 인민군들이 동락국민학교에 진을 치는 것을 보고 수 킬로미터의 산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2대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서 동락국민학교에 모인 인민군을 공격한다. 기습을 당한 인민군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고 이는 국군의 첫 대승리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을 내리며 기뻐한다. 이 사연은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거니와 당시 2대대의 소대장은 용감한 여교사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에 골인하게 됐는데 바로 이들이 고재봉의 도끼의 희생양이 된 이득주 중령 부부였던 것이다. 

전혀 엉뚱한 사람들을 죽인 뒤 다이아 반지 등을 훔쳐 나왔던 고재봉은 그 다이아 반지를 팔아치웠다가 꼬리를 밟히고 결국 땅콩 장수의 눈에 띄어 신고되고 체포된다. 사람 여섯 명을 삽시간에 죽여 버린 사람답게 그의 포학성은 도를 넘었다고 한다. 감방에 들어가서 신고식은커녕 "여섯 명 죽이나 한 명 더 죽이나 똑같다."의 포스를 발휘하면서 감방의 우두머리로 군림했고 대체 어떤 놈인가 보자고 감방 안을 엿보던 교도소장 눈을 찔러 버리는 왈짜였다고 하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하지만 대개의 스토리처럼 그 역시 사형을 당할 때는 지극히 선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게 주님의 은혜든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이든 관계 없이 어쨌던 살인마 고재봉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저승에서라도 그분의 부하가 되어 모시겠습니다."라고 맹세하며 살다가 죽어갔다. 총살형을 받을 때 그는 그런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눈을 가리지 말아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웃을 때 쏘아 죽여 달라는 것. 그러나 찬송가 한 곡을 끝낼 때까지 헌병들은 총을 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계속 울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는 환하게 웃었고 사격! 명령과 함께 두 번째 찬송을 맺지 못하고 죽는다. 

고재봉이 남긴 사진을 보면 눈에 살기가 번득이고 내뻗는 손에도 독기가 서려 있는 듯 보인다. 죄 이상으로 뒤집어쓴 누명과 7개월의 영창살이는 그를 악마로 만들어 놨지만 그의 성정은 이른바 '사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우하고 가난했던 수십만 수백만 청년 중의 하나였다. "(재판이 끝나고) 구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숨을 쉬었다. 어느 구두닦이를 보고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맨발로 추위에 떨고 있는 지게꾼과 구두닦이를 보면서 마음이 찌르르했다. 나는 지금 배고픔을 잊고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구급차에 탔으니 행복이랄까......" 라고 적은 그의 일기를 보면 역시 마음이 찌르르해진다. 새엄마와 누이동생을 보고 싶어했고, 형제들을 육신보다 사랑하던 자신이 왜 이런 처지가 되었냐고 탄식하던 고재봉은 지금도 살인마의 리스트 맨 윗단에 자신을 올려 놓은 후 웃는 얼굴로 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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