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1926.10.5 성동원두 경성운동장

$
0
0
산하의 오역 

1925년 10월 5일 성동원두 경성운동장 

내 생일은 ·1925년 10월 5일이라오. 묻지마라 갑자생을 면한 을축년생이지. 이 해 조선에서는 무지막지한 대홍수가 있었소. 요즘도 홍수가 질 때 가끔 기상 캐스터들이 얘기하는 ‘을축년 대홍수’가 그것이지. 이때 노량진이나 용산등 한강변은 물론이고 남대문까지 물이 들어찼다고 하니 얼마나 큰 홍수였는지 짐작해 보시오 옛날 백제의 유적지라는 몽촌토성과 풍납
토성 흔적도 이 홍수 뒤에 드러났다오. 근 2천년간 그 위를 덮고 있던 흙을 홍수가 싸악 흘러 내려 갔던 거 아니겠소. 

아무튼 그 홍수가 있던 해 나는 태어났소 내 태어날 때 아명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경성운동장’이었소. 이때 동궁전하는 당시 일본 황태자이자 미친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하던 히로히토였지. 이 양반 테니스를 즐겨 치는 등 운동을 꽤 좋아했는데 “운동을 좋아하시는 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을 세우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 일제 당국의 입장이었소. 당시 사대문 안에야 나같이 우람한 운동장을 세울 데가 없었을 것이고, 일제는 동대문 밖 옛 훈련원터를 주목하게 됐지. 병사들 훈련시키던 곳이니 널찍하고 바로 동대문 밖이니 오가기도 좋고. 동대문 밖 너른 들판이 시작되던 곳 ‘성동원두’라는 별명이 내게 붙었소. 아마 나이 쉰줄쯤 된 이들은 기억하리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게 성동원두 경성운동장이었지. 



원래 내 자리에는 옛 한양 성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쓰나. 싹 헐어버리고 그 위에 나를 세웠소. 그래서 축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이 망라된 ‘경성운동장’이 1925년 10월 5일 (15일이라는 사람도 있더군. 나도 몰라 가물가물해서) 개장하오, 출생신고 (정식준공)는 다음 해에 하지만. 그 이후 정말로 많은 이들이 내 안에서 활약하고 환호하고 눈물 흘리고 사라져 갔다오.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얘기하리다. 

내가 세워진 뒤 나는 한국 스포츠의 메카가 된다오. 다른 건 몰라도 스포츠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보다 잘했던 것 같소. 또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등 ‘문약’으로 망한 나라를 스포츠를 통해 강인한 체질로 바꿔 보자는 식의 캠페인도 많았던지 사람들이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 내가 태어난 초기에 있었던 경평전부터 얘기를 시작해 봅시다. 조선 사람들은 축구를 참 좋아했는데 각 도시마다 자존심을 걸고 대회를 치를 정도였소. 그 가운데 최강의 두 팀이라면 역시 경성팀과 평양팀이었소. 경성팀이 서울내기처럼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경기를 했다면 평양팀은 '평양박치기‘의 위용처럼 강력한 투지와 몸싸움으로 유명했소. 1회 경평전은 휘문고보 운동장이었지만 2회 때부터는 내 안에서 펼쳐지지.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들이 수천 명 몰려들어 와와 거리는 것이 무척 거슬렸나 봐. 경평전 자체를 금지시켜 버리니까. 하지만 경평전은 우여곡절 끝에 재개됐고 1935년에는 또 다시 나 경성운동장에서 6회 경평전이 열리는데 나는 그만 차마 못볼 꼴을 보고 말지. 

판정 시비 끝에 다혈질인 서북 관중들과 시골뜨기 무시하기로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서울 응원단이 대판 붙어버린 거요. 원래 스포츠 경기에서는 소요가 많았소. 내가 지어지기 전 활약했던 자전거 선수 엄복동이 편파판정을 항의하다가 두들겨 맞자 전 관중이 들고 일어섰던 일은 일제의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었지. 하지만 조선말 쓰는 관중들이 두 패로 갈라져서 간나 새끼 개새끼 하면서 치고 받는 거 매우 볼썽이 사납습디다. 

언젠가는 몽양 여운형이 앞장서고 수천의 관중이 운집한 적이 있었소. 나는 저 거물까지 등장해서 환영대회를 한다니 누가 오나 했는데 그건 권투선수 서정권이었지. 도입된 지 얼마 안되는 권투 선수로서 일본 선수들 숱하게 때려눕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세계랭킹 6위까지 올랐던 사람이오. 그가 돌아온다니 여운형까지 나서서 환영 연설을 했고 서정권은 보란 듯이 라슈 조라는 선수를 흠씬 두들겨 패서 TKO로 이기지. 조선 사람들 참 좋아하더군. 열등감에 시달리던 조선 사람들로서는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었겠지. 

해방 뒤 처음으로 열린 1945년 10월 27일의 전국 체전도 내 몫이었소. ‘서울운동장’으로 개명된 나는 한 사람의 눈물을 보면서 참 마음이 짠했었지. 그건 손기정이었소. 손기정은 태극기 기수였는데 그는 태극기를 든 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렸소. 머리 스타일도 9년 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했을 때의 바로 그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울었지. 이제 내 머리에는 일장기 아닌 태극기가 걸려졌었고 그때는 평양에서 온 이들이건 함흥에서 온 이들이건 모두 그 태극기 앞에 경례를 했었지. 아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터져 나갔을 거요. 물론 몇년 내로 삼팔선 이북의 사람들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하게 됐고 5년 뒤 전쟁이 터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주요 스포츠 경기의 대부분을 지켜 봤소. 차범근이 7분 동안 세 골을 넣는 것도 봤고 수십 년간 월드컵 예선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것도 참 가슴 아프게 봤소. 또 고교야구를 수십 년 동안 보면서 그 초롱초롱한 이름과 얼굴들을 생생히 봤다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기막힌 모습도 봤고 고교생이었지만 슈퍼스타급이었던 박노준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모습도 봤지. 프로야구도 프로축구도 나 내가 그 개막전을 치렀고 고대와 연대가 벌이는 정기전도 거의 내몫이었지요. 어디 스포츠 뿐이겠소. 해방 공간에서 치르던 광복절 기념식이나 3.1절 기념식이나 다 내가 치렀고 어린이날 어린이들 모아놓고 만화책 불싸지르던 곳도 나였고 각종 규탄대회나 큰 행사는 어김없이 나였지. 그 추억들을 다 얘기하면 아마 날 샐 거고.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이 서면서 나는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났고 차제에 잊혀진 경기장이 되어 갔소. 성동벌판은 죄 건물숲으로 변했고 나는 도심에 자리잡은 거대한 장애물 정도로 인식이 되기도 했지. 내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내 안에서 풍물 시장도 열렸다가 그냥 주차장으로 쓰자는 말도 있었다가, 이제는 운동장이 아닌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그 모습도 변한 채 남아 있지. 그래도 가끔은 추억한다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를 부르짖던 아나운서들의 멘트와 온 서울 장안을 울릴 것 같던 환호 소리, 그리고 수십년 지겹게 봐왔던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의 그 상기된 얼굴들.


tag :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49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