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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9.14 잠실벌의 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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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년 9월 14일 잠실벌의 한대화

요즘에야 전 세계에서 한국 야구를 우습게 보는 나라는 없다. 야구의 종주국임을 민망할이만큼 자랑하는 미국도 유구한 프로야구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도, 한때 카스트로도 프로야구 선수가 꿈이었을만큼 야구를 좋아하고 전력도 최강인 쿠바도 한국에게 고배를 듵 적이 많은 것이다. 사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랍시는 대회에서도 한국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 일본을 두 번씩이나 이겼어도 한판에 지는 바람에 분루를 삼킬 뿐이었지만.

한국 야구가 국제 규모 대회에서 첫우승을 차지한 것은 1977년의 슈퍼 월드컵이었다. 최동원과 이선희, 최강 좌우완의 합작과 황규봉 김용남 등등의 투수들이 힘을 다해 던지고 김재박이나 김일권 등 준족호타들이 기염을 토한 결과이기도 한데 사실 이 우승은 세계 최강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단 쿠바가 안나왔었고, 진짜 야구의 프로(?)들은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에 다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푸에르토리코, 니카라과 등 북중미 강호들은 출전했고 최동원의 '인간같지 않은' 활약은 진실로 대단했으며 엄연히 우승은 우승, 세계 제패는 제패였다. 감독 김응룡 이하 전 선수단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화려하게 입국했다. 그런데 1982년 세계 선수권 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워낙 김일성 주석을 좋아하다보니 훗날 88 올림픽에까지 선수단을 보내지 않은 쿠바의 카스트로는 당연히 '남조선 괴뢰'의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를 보이콧했다. 대학선발급의 미국 과 사회인야구팀이었던 일본 정도만 잡으면 우승할 수 있는 고만고만의 '세계 선수권 대회'가 안방에서 열렸으니 스포츠라면 어디나 그 대머리를 들이밀던 전두환이 가만 있을 수 없다. 이미 프로야구가 탄생한 상황이었지만 "우승시 병역 면제"와 애국심을 내세우며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꼬드겼다. 김봉연, 김용희, 김일권 등은 프로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김시진, 최동원,장효조, 이해창, 김재박 등은 대표팀에 남았다. 그런데 시작이 영 불안했다. 해장꺼리도 못된다고 생각했던 이탈리아에게 덥석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하다못해 야구 좀 한다는 북중미 국가도 아니고 야구의 불모지인 유럽 팀에 깨지다니. 우승은커녕 망신은 면하면 다행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는 미래의 '국보' 선동렬이 있었다. 아직은 '무등산 폭격기'의 별명을 얻기 전,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 때문에 '멍게' (이 별명을 선동열 감독이 대단히 싫어한다는데)라고 불리웠던 고려대학교 3학년생의 이 투수는 야구 종주국 미국팀을 맞아 무려 열 다섯 개의 탈삼진을 따내며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미국 선수들을 관찰하러 왔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사이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쟤 누구냐? 최동원이 뜻밖으로 부진하고 또 하나의 에이스 김시진도 이탈리아전에서 보듯 죽을 쑤었던 상황에서 선동렬은 단연 돋보였다. 또 하나의 난적 대만까지 완봉으로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1982년 9월 14일 결승전에 해당하는 경기가 벌어졌다. 똑같이 7승 1패를 기록한 한국과 일본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일본 선수들은 카지노에 가서 노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국전 선발 투수 스즈끼는 방안에서 꼼짝 못하게 했었다고 하는데, 서른을 넘었던 노장 스즈끼는 칼같은 제구력과 기가 막힌 코너웍으로 한국 선수들을 농락한다. 한국에는 투수가 없었다. 바로 전 경기 호주전에서 15회 연장전까지 치르는 동안 투수진이 소진돼 있었던 것. 결론은 선동렬이었다. 선동렬이 초반 난조로 2점을 내줬지만 대안도 없었다. 다행히 선동렬이 페이스를 찾아가면서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되던 경기는 8회말 운명의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포수 심재원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대타 김정수가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중견수를 넘기는 2루타를 쳐서 1점을 따라붙는다. 그리고 조성옥의 희생번트. 1사 3루. 타선에는 김재박. 조성옥의 번트에서 보듯 어떻게든 동점부터 내고 보자는 분위기였던지라 스퀴즈가 예상됐고 당연히 일본의 구원투수도 공을 뺐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김재박이 마치 캥거루처럼 폴짝 뛰어 어이없이 빠지는 공을 황망하게 배트에 갖다 댄 것이다. 사인 미스였다고도 하는데 어쨌건 기적을 낳은 실수였다. 3루주자 홈인, 1루 김재박 세잎. 여기서 최고참이자 준족을 자랑하는 이해창이 중전안타를 치고 나가자 주자 1,3루. 그러나 축구 스타가 페널티킥에 약하다더니 우리의 컴퓨터 타자 장효조가 병살에 가까운 타구를 친다. 일단 홈이 급했던 일본 내야수는 일단 홈으로 던져 김재박을 아웃시키지만 주자는 1,2루에 남는다. 2사 1,2루. 이때 들어선 타자는 동국대생 한대화.

해태로 입단해 버린 홈런 타자 김봉연의 대리격으로 선발된 그는 몇 개의 공을 흘려 보낸 뒤 볼카운트 투 투에서 조금 높은 직구를 만난다. 내 기억 속에서는 그의 어깨와 나란히 할 정도로 높았던 공을 한대화는 작심한 듯 후려친다. 잠실벌의 3만 관중과 그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을 최소 천만의 한국인들이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좌측 좌측 좌측! 아나운서의 비명을 들으며 공의 궤적을 쫓던 카메라에 공의 행방이 나타났다. 파울과 홈런을 가르는 폴대 그것을 딱 맞추면서 외야석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홈런. 한국 야구 역사상 잊혀지지 않을 3점 홈런이었다. 올림픽을 겨냥해 가동 중이던 전광판은 멋진 필체로 Homerun!을 쏟아냈고 당시 티븨를 지켜보던 부산 양정의 스포츠 머리 중학생들은 강강수월래를 하며 환호했다.

1982년 9월 14일 충청도 사나이 한 대화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는다. 인생 최악의 해라고 해도 무방한 (감독 해임) 올해 9월 그의 심경은 어떨지 궁금하다. 부디 그날 잠실 스타디움이 무너져라 연호하던 '한대화'의 환호를 기억하면서 참담함을 이기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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