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1년 8월 19일 자유의 절규를 알린 언론인 가다
2001년 8월 19일 엘리자베드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받은 기사의 작위에 빛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 많은 거물급 인사들의 병문안을 받았던 한 언론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이름은 도널드 우즈. 그의 고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조국을 떠나 영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조국을 버린, 아니 조국으로...
2001년 8월 19일 자유의 절규를 알린 언론인 가다
2001년 8월 19일 엘리자베드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받은 기사의 작위에 빛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 많은 거물급 인사들의 병문안을 받았던 한 언론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이름은 도널드 우즈. 그의 고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조국을 떠나 영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조국을 버린, 아니 조국으로...
부터 버림받은 이유에는 또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얽혀 있다. 스티브 비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도널드 우즈는 데일리 디스패치라는 남아공 동남부의 이스트 런던이라는 곳에서 발간되는 데일리 디스페치라는 매체의 창간자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로서 남아공에서는 보기 드문 축에 들어가는 백인이었다. 흑백 남녀의 연애와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엄연하여, 경찰관이 나무에 올라가 남의 침실 창문을 통해 흑백이 섹스하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하던 행복한(?) 임무를 수행하던 나라, 넬슨 만델라같은 흑인 지도자들은 죄다 죽거나 감옥에서 시들어가던 숨막히는 나라에서 우즈의 존재는 분명 특이하고 소중했다. 어느 날 우즈는 새롭게 부각되는 흑인 운동 지도자 스티브 비코의 이름을 듣는다. 그는 "흑인 의식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스티브 비코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압제와 폭력도 문제지만, 그에 맞서야할 흑인들의 열등감, 즉 노예 근성을 더 큰 문제로 보았다. "백인에게 의지하기 말고 스스로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한다. 흑인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쳐 열등감에서 벗어날 때에야 백인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고 외친 것이다 . "Black is beutiful!" 그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슬로건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이른바 "엽전 의식 극복"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도널드 우즈는 비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비코를 백안시했다. 비코의 사상이 과격하며, "흑인은 아름답다!"는 식의 주장은 일종의 역차별 인종주의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탓이다. 우즈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은 "비코를 만나 얘기나 해 보라."고 채근했으나 우즈는 무려 1년 동안이나 비코와의 만남을 거절한다. 그 동안 그의 신문 지상을 통해 계속 비코를 공격하면서. 도널드 우즈와 스티브 비코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자유의 절규"를 보면 어느 날 우즈에게 한 흑인 여의사가 찾아와서 이렇게 쏘아부친다. "당신은 조작된 허구를 진실로 믿고 있어요. 당신이 정직한 기자라면 제발 스티브 비코를 만나 보세요."
마침내 스티브 비코를 만난 이후 우즈는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스티브 비코를 알아가면서 나는 그의 특별한 천재성이 사슬을 끊기 위해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법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사슬 못지않게 흑인들을 옥죄어 온 심리적 사슬 말이다.” (<반투 스티브 비코> - 도널드 우즈 저, 그린비) 우즈와 비코는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해 가고, 둘은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보안 관찰 기간 중이었던 1977년 8월 18일 학생 시위에 연설자로 참여하려던 스티브 비코는 남아공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심한 고문을 당한다. 지배자에 대한 '겁대가리'를 상실한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선택은 간단하다. 굴복하거나 더 잔인해지거나. 당연히 남아공 경찰은 후자를 택했고 보안경찰 사무실에 끌려간 비코는 22시간 동안 쉼 없는 '심문'을 당한 끝에 의식을 잃는다. 비코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있었지만 남아공 경찰은 그를 랜드로버 뒷 좌석에 짐짝처럼 싣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입 싹 씻는 거짓말은 비열한 공권력의 공통 현상, 남아공 경찰은 그가 단식의 후유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즉 자기가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발표 앞에서 정면으로 No!를 부르짖고 나온 이가 바로 도널드 우즈였다. 그는 데일리 디스패치 1면에 "국가의 영웅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와 함께 비코의 초상화를 싣는 한편, 시체 공시소에서 촬영된 비코의 시신을 공개한다. 머리 쪽에 난 심각한 상처는 경찰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코의 불행한 최후는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 양심들 뿐 아니라 세계를 격동시켰다. 1만 5천 명이 몰려든 그의 장례식에는 남아공 주재 외교사절들도 찾아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남아공 정부는 비코에게 내렸던 처분을 역시 이 말썽쟁이 언론인 우즈에게도 적용한다. '보호관찰'의 대상으로 지정하고 가택에 연금시켜 버린 것이다. 연금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남아공 정부도 동시대 동북아시아의 어느 분단 국가의 정부만큼이나 지독했다. 언론인에게 집필을 금지시킨 것이다. 수시로 경찰이 집을 덮쳐 뭔가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고 집을 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즈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사실들을 기록했고 이를 레코드 판 커버 사이에 숨긴다. 대충 기록이 마무리됐을 때 그는 집을 넘어 국경을 넘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탈옥을 결행한다. 그는 신부로 변장하여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남아공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간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케빈 클라인과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자유의 절규>다.
우즈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그의 열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적이 ‘말’이라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는 것을 막으면 자신들이 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보다 더한 그들의 적은 사상이다. 문제는 사상인데 그들은 사상을 탄압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사상의 자유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하자. 그것이 잔존하는 한, 그게 없으면 우리가 무너지는지 아는 한, 그 법이 두려워 몸을 움츠리는 한 우리는 흑인 노예일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흑인 친구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일신을 걸었던 한 언론인이, 그의 친구가 마지막으로 체포된 그 날로부터 꼭 24년하고도 하루가 지나서,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2001년 8월 19일이었다.
도널드 우즈는 데일리 디스패치라는 남아공 동남부의 이스트 런던이라는 곳에서 발간되는 데일리 디스페치라는 매체의 창간자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로서 남아공에서는 보기 드문 축에 들어가는 백인이었다. 흑백 남녀의 연애와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엄연하여, 경찰관이 나무에 올라가 남의 침실 창문을 통해 흑백이 섹스하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하던 행복한(?) 임무를 수행하던 나라, 넬슨 만델라같은 흑인 지도자들은 죄다 죽거나 감옥에서 시들어가던 숨막히는 나라에서 우즈의 존재는 분명 특이하고 소중했다. 어느 날 우즈는 새롭게 부각되는 흑인 운동 지도자 스티브 비코의 이름을 듣는다. 그는 "흑인 의식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스티브 비코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압제와 폭력도 문제지만, 그에 맞서야할 흑인들의 열등감, 즉 노예 근성을 더 큰 문제로 보았다. "백인에게 의지하기 말고 스스로 모든 것을 얻어내야 한다. 흑인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쳐 열등감에서 벗어날 때에야 백인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고 외친 것이다 . "Black is beutiful!" 그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슬로건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이른바 "엽전 의식 극복"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도널드 우즈는 비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비코를 백안시했다. 비코의 사상이 과격하며, "흑인은 아름답다!"는 식의 주장은 일종의 역차별 인종주의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 탓이다. 우즈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은 "비코를 만나 얘기나 해 보라."고 채근했으나 우즈는 무려 1년 동안이나 비코와의 만남을 거절한다. 그 동안 그의 신문 지상을 통해 계속 비코를 공격하면서. 도널드 우즈와 스티브 비코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자유의 절규"를 보면 어느 날 우즈에게 한 흑인 여의사가 찾아와서 이렇게 쏘아부친다. "당신은 조작된 허구를 진실로 믿고 있어요. 당신이 정직한 기자라면 제발 스티브 비코를 만나 보세요."
마침내 스티브 비코를 만난 이후 우즈는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스티브 비코를 알아가면서 나는 그의 특별한 천재성이 사슬을 끊기 위해 존재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법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사슬 못지않게 흑인들을 옥죄어 온 심리적 사슬 말이다.” (<반투 스티브 비코> - 도널드 우즈 저, 그린비) 우즈와 비코는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해 가고, 둘은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절친한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보안 관찰 기간 중이었던 1977년 8월 18일 학생 시위에 연설자로 참여하려던 스티브 비코는 남아공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심한 고문을 당한다. 지배자에 대한 '겁대가리'를 상실한 피지배자에게 지배자의 선택은 간단하다. 굴복하거나 더 잔인해지거나. 당연히 남아공 경찰은 후자를 택했고 보안경찰 사무실에 끌려간 비코는 22시간 동안 쉼 없는 '심문'을 당한 끝에 의식을 잃는다. 비코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있었지만 남아공 경찰은 그를 랜드로버 뒷 좌석에 짐짝처럼 싣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입 싹 씻는 거짓말은 비열한 공권력의 공통 현상, 남아공 경찰은 그가 단식의 후유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즉 자기가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발표 앞에서 정면으로 No!를 부르짖고 나온 이가 바로 도널드 우즈였다. 그는 데일리 디스패치 1면에 "국가의 영웅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와 함께 비코의 초상화를 싣는 한편, 시체 공시소에서 촬영된 비코의 시신을 공개한다. 머리 쪽에 난 심각한 상처는 경찰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코의 불행한 최후는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 양심들 뿐 아니라 세계를 격동시켰다. 1만 5천 명이 몰려든 그의 장례식에는 남아공 주재 외교사절들도 찾아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남아공 정부는 비코에게 내렸던 처분을 역시 이 말썽쟁이 언론인 우즈에게도 적용한다. '보호관찰'의 대상으로 지정하고 가택에 연금시켜 버린 것이다. 연금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남아공 정부도 동시대 동북아시아의 어느 분단 국가의 정부만큼이나 지독했다. 언론인에게 집필을 금지시킨 것이다. 수시로 경찰이 집을 덮쳐 뭔가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고 집을 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즈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사실들을 기록했고 이를 레코드 판 커버 사이에 숨긴다. 대충 기록이 마무리됐을 때 그는 집을 넘어 국경을 넘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탈옥을 결행한다. 그는 신부로 변장하여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기며 남아공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간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케빈 클라인과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자유의 절규>다.
우즈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그의 열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적이 ‘말’이라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는 것을 막으면 자신들이 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보다 더한 그들의 적은 사상이다. 문제는 사상인데 그들은 사상을 탄압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
사상의 자유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철폐하자. 그것이 잔존하는 한, 그게 없으면 우리가 무너지는지 아는 한, 그 법이 두려워 몸을 움츠리는 한 우리는 흑인 노예일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흑인 친구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일신을 걸었던 한 언론인이, 그의 친구가 마지막으로 체포된 그 날로부터 꼭 24년하고도 하루가 지나서,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2001년 8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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